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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고문인 돌아보기 - 김준영
(1937~1995)
작가 화보
작가 연보
바르고 성실하게 사셨던 김준영 선생님 / 강순아
하나의 단체가 50여 년을 이어오면서 꾸준히 발전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울산문학의 50여 년 역사도 그냥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열악한 예술 환경 속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들 정도의 인원으로 태동한
울산문협이 어느 새 200여 명의 회원이 참여하는 문학단체가 되었다.
오늘의 울산문학을 있게 한 선배문인들의 노력은 결코 사라져서는 안
된다. 그런 문인들 중에는 이미 작고하시어 하늘의 별이 된 분들도 있
다. 함께 활동했던 회원들에게는 가물거리는 기억으로, 이후에 입회한
회원들에게는 전설처럼 아득한 분들이다. 이러한 선배문인들의 문학
에 대한 열과 성을 배우고, 그 숭고한 뜻을 이어가는 부끄럽지 않은 후
배문인들이 되고자 하는 자리가 필요한 시점이다.
이에 선배문인들의 업적을 기리고 기억함으로써 다시 한 번 느슨해진
문학의 고삐를 조여 매고자 한다. 이를 계기로 보다 탄탄한 울산문인
협회의 기틀을 마련하는 기회가 되리라 믿으며, 그 두 번째로 김준영
아동문학가를 조명한다.
- 편집실 -
작가 연보
1937. 12. 19. 경남 사천에서 부父 김용득과 모母 김달막의 6남1녀 중 장남으로 출생
1953. 사천중학교 졸업
1956. 진주 사범학교 졸업
1956.~1995. 2. 교직
1967. 1. 2. 최임주와 결혼
1968. 2. 29. 장녀 출생
1971. 2. 19. 차녀 출생
1974. 3. 6. 장남 출생
1974.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교원교육원 수료
1978. 경희대학교 대학원 석사 졸업
1985. 아동문학평론 신인문학상 동시 당선
1987. 동시집 『북두칠성 나들이』출간
1990. 아동문학평론 신인문학상 동화 당선
1990. 문교부장관 표창 받음
1991. 동화집 『희망국민학교의 합창』출간
울산시 교육연합회장 연공상 받음
1994. 동화집 『멋쟁이 내 친구』 출간
1995. 한국아동문학상 받음
대통령 국민훈장 석류장 받음
언양여자상업고등학교에서 명예 퇴직
유고작품집 동화·동시 『해와 달의 약속』
수필·시 『솔잎에 이는 바람을 보고』
일기 『그래도 행복하였습니다』
바르고 성실하게 사셨던 김준영 선생님
강 순 아 (동화작가)
울산문학 편집진으로부터 올해는 ‘작고 문인 특집을 내겠으니 강선생께서
김준영 작가에 대해 이야기를 써 주십사’는 청탁을 받았다.
‘아, 김준영 선생님!’
맑고 깨끗한 이미지의 선생님 모습이 떠올랐다.
벌써 작고하신 지 20년이 되었다. 그 동안 나는 선생님을 까마득히 잊고 살
았다.
‘이럴 수 있는가? 어떻게 내가… 너무 했다. 너무 했어.’
망각이란 신이 우리에게 주신 특별한 선물이기도 하지만
‘이건 아니지. 이건 아니지… 깡그리 잊어도 좋은 사람이 있고 생각하며 추
억하며 살아야하는 사람이 있지 않은가? 참, 세월도 무심하고 나라는 사람도
무심하고 무심하지.’
중얼거리며 인터넷 검색 창에 ‘동화작가 김준영’이라 쓰고 검색을 했다.
‘김준영 작가’에 대한 이야기는 ‘없음’ 이었다. 인터넷 어디에서도 선생님에
대한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동시 11편. 동화 40편을 남기시고 ‘한국동화작가
상’을 받으신 분인데… 이리 깡그리 잊혀 지다니. 슬픔에 앞서 그 사실이 더욱
놀라웠다.
나는 오래된 책장을 뒤져 선생님의 동화책을 꺼냈다.
선생님의 동화는 언제 읽어도 선생님 모습 그대로다. 맑고 선한 모습 그대
로 이야기는 잔잔하게 펼쳐진다.
우리 집 마당에 자줏빛 모란이 한창이더니 어느 밤사이 모란은 한꺼번에 지
고 작약이 피기 시작했다. 분홍과 고운 와인 빛의 작약은 밤엔 오므라진다. 이
른 아침엔 오므린 채 있다가 해님이 떠오르면 조금씩 꽃잎을 펴기 시작한다.
가끔씩 나비도 날아온다.
이 꽃과 저 꽃 사이로 한가로이 넘나드는 나비와 그때마다 꽃잎을 파르르 떨
며 반기는 꽃을 보면서 나는 선생님의 동화 ‘나비 날개를 달아 준 노인’을 떠올
린다. 아니 나비와 꽃과, 그 사이를 감미롭게 흐르는 바람 사이에서 나는 자연
스레 ‘나비 날개를 달아 준 노인’ 동화를 펼쳤다.
도시에서 돈을 많이 벌어 고향에 돌아 온 할아버지는 시골 친구들에게 베풀
고도 싶었고 시골아이들과 친해지고도 싶었다. 그러나 시골 친구들, 이제 할
아버지가 다 된 친구들에겐 괜히 잘난 체하는 친구로 보였고 아이들에겐 고집
센 노인으로 비친다. 할아버지는 슬펐다. 그래 자기는 늘그막에 고향에 돌아
와 한쪽 날개를 잃어버린 노인이 되었다고 한탄을 한다. 할아버지는 자주 한
쪽 날개를 잃어버려 기우뚱기우뚱 날아다니는 꿈을 꾼다.
고향 마을엔 화상을 입어 한쪽 팔을 자유롭게 펼 수 없는 ‘수미’라는 아이가
있다. 할아버지는 수미의 팔을 성형 수술해 주려는 결심을 한다. 무사히 수술
을 마친 수미가 퇴원을 하던 날 할아버지 방 안에 나비 한 마리가 날아왔다, 두
날개를 자유로이 펄럭이는 나비를 보고 할아버지는 활짝 웃는다. 무심코 자기
팔을 만진다. 두 팔이 아직은 건강하다. 수술을 마친 수미도 자유롭게 팔을 움
직일 수 있다. 방 안으로 날아들어 온 나비도 두 날개를 활짝 펴며 열려진 문
으로 나가 감나무 가지 위로 높이 날아오른다.
가진 것이 많고 지위가 높은 사람을 최고로 치는 우리 사회. 노인은 이 사회
에서 버티며 살아남기 위해 도시로 나가 열심히 돈만을 모았다. 그 사이 노인
의 마음은 메말라 갔다.
어느 날 문득 어렸을 적 친구들이 그리웠다. 친구 찾아 고향으로 왔지만 친
구들은 자기들을 버리고 도시로 간 노인을 반갑게 대하지 않는다. 한쪽 날개
를 잃은 나비처럼 축 처져있던 노인은 수미의 팔을 수술해 주며 동심을 다시
찾는다. 아름다운 눈으로 세상을 보게 된다. 메말라 버린 줄만 알았던 동심이
마음속에 살아 있음에 흐뭇한 미소를 짓는다.
벚나무 아래서 책을 읽다가 나무 의자에 책을 놔두고 다시 작약꽃 가까이로
간다.
해가 떠오를 때보다 꽃잎이 더 활짝 펴 있다. 노란 꽃술이 한움큼이다. 꽃
잎이 조금 벌어진 꽃은 꽃술이 샛노랑이고 활짝 흐드러지게 핀 꽃은 꽃술이
엷은 노랑이다. 나는 손가락으로 꽃술을 건드려 본다. 아주 자디잔 꽃가루가
꽃잎 위로 떨어진다. 내 손가락에도 노란 꽃가루가 묻는다. 아니 묻어 있어 노
란 파스텔로 손가락을 문지른 것 같다.
검은 바탕에 노란 점이 박힌 나비가 나를 피해 건너 건너 다른 꽃으로 날아
간다. 곧이어 벌들이 윙윙거리며 날아온다. 벌들은 나를 무서워하지도 않고
꿀을 모으기에 정신없다. 좀 큰 개미도 여러 마리 잎과 가지 사이를 오르내린
다. 나는 그 광경을 눈에 담는다.
빨래가 하얗게 말라가는 한낮. 시골 집 마당은 평화다.
김준영 선생님이 울산 공고에 계실 때 나는 선생님 댁을 찾아 간 일이 있다.
선생님의 집은 아파트가 아닌 주택이었다. 오늘처럼 따뜻하고 밝은 일요일 한
낮이었다. 마침 선생님 댁 마당엔 오늘 우리 집처럼 몇 개의 빨래가 마당 빨랫
줄에 걸려 있었고 어린 강아지 한 마리 공공공… 짓고 뒤따라 선생님도 나오
셨다.
“웬일이오? 강 선생.”
“그냥요. 요 앞을 지나다가 선생님 생각이 나서요. 마침 대문도 열려 있
고….”
선생님께선 허허허 웃으셨고 나는 거침없이 말을 이어갔다.
“선생님, 날씨 참 좋죠? 선생님! 봄에 무슨 꽃들이 피는지 아세요?”
선생님은 고개를 갸우뚱하셨다,
“그럴 줄 알았지요. 데이지, 금잔화, 페추니아, 사피니아, 팬지, 금어초 등
등….”
나는 숨을 쉬지 않고 꽃 이름을 주워 읊기 시작했다.
“ 많이도 알고 있구먼.”
“그럼요. 꽃들이 다투어 피는 이 좋은 날, 저는 어슬렁거리며 누구네 집 꽃
이 젤 예쁜가, 마당을 기웃거리는 중이라고요.”
얼른 대답하고는 화단 한 켠에 무더기로 피어 있는 하얀 꽃을 가리키며 물
었다.
“선생님, 이 꽃 이름은요?”
“마가렛. 아직도 몰랐어요? 하얘서 예쁜 꽃.”
“아하, 마가렛? 마가렛요?”
나는 시침을 뚝 떼고 모르는 척했다. 선생님 댁 화단에 마가렛이 하도 많아
샘이 나기도 했기에 그랬던 것 같다.
그 때만 해도 선생님은 건강하셨다. 건강하셨음에도 말씀을 많이 하지는 않
으셨다. 말씀이 적으신 선생님을 처음엔 거리를 두고 대했지만 곧 우리는 선
생님께서 우리를 많이 배려해 주신다는 걸 알았고 스스럼없이 편하게 대하게
되었다.
봄날 , 우리 집 마당, 선생님 동화책을 손에 쥐고 꽃과 꽃 사이를 거닐며 벌
이 윙윙대는 소리를 들으며 걷노라니 아득하게 먼 지난 기억이 떠올랐다. 그
래, 나는 새삼스럽게 울먹이며 마당을 걸었다. 한참을 그렇게 꽤나 넓은 마당
을 거닐던 나는 다시 나무 의자에 앉아 선생님의 동화책을 펼쳐 든다.
참새 몇 마리 머리 위에서 짹짹 노래를 부른다. 아니 감나무 위에 앉아 저
들끼리 소란을 떤다. 나는 다시 책에 눈을 준다. 책 속에는 평생 까치에게 미
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최 노인의 이야기가 있다.
잠시 조용한가 싶더니 참새가 또 짹짹거린다. 나는 다시 참새에게 눈이 간
다. 너무나 조용한 시골 마을 집 마당. 깨어 있는 것은 참새와 나뿐이다. 그러
니 자꾸 참새에게 눈이 갈 수밖에 없다. 머리 위 감나무 가지에서 짹짹거리던
참새는 반대편에 있는 감나무 가지로 날아간다. 감나무 가지가 흔들린다. 방
금 날아 간 참새가 앉았던 감나무 가지도 새로 옮겨 앉은 감나무 가지도 함께
흔들린다.
아침마다 감나무 가지에 앉아 울던 까치가 생각난다. 전에 읽었던 김준영 선
생님의 동화 책 속의 최 노인의 이야기가 가물가물해서 궁금해진다.
책 속에서 「까치 할아버지」를 찾아 무릎에 올려놓고 읽는다.
철없던 어린 시절에 죽인 까치 때문에 평생을 죄책감으로 살다니… 요즘 뉴
스를 보면 하찮은 일로 친구를 속이고 심지어 부모에게 못된 짓을 하는 사람
들도 많은데, 동화 속의 최 노인은 꼭 김준영 선생님을 닮았다. 아니 김선생님
자신이다. ‘아무리 세상이 변해도 사람은 근본이 변하면 안 된다.’는 선생님의
바른 인생관을 닮은 ‘최 노인’이야기를 를 읽으며 나는 절절히 선생님을 기억
하고 추억한다.
선생님은 늘 가지런히 정돈된 모습이셨다. 가까이 다가가기 어렵도록 정돈
된 모습을 보이셨음에도 내가 왜 선생님 앞에서 떠벌이가 되었었는가, 생각해
본다. 그것은 선생님의 누구에게나 부담이나 불편함을 주지 않기 위한 그 마
음, 그 배려 때문이었을 거다. 세상에 대해 욕심이 전혀 없듯 담백하고 예의
바르셨던 선생님. 선생님 동화에 나오는 할아버지들은 세상을 늘 바르고 성실
하게 살아간다. 동심 속에서 이렇게 살고 싶으셨던 소망이자 꿈이 동화로 이
어지지 않았을까?
선생님의 동화를 읽어 갈수록 생각이 더 깊어진다.
아직도 벌들은 꽃 사이를 옮겨 다니고 나는 어느 사이 선생님의 동화집 『희
망국민학교』를 읽고 있다.
선생님은 일찍부터 점수보다는 인성교육을 중요시하셨다. 그 마음이 이 동
화 집 속엔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리고 또 다른 동화 「사장님」 방의 책장에 꽂
혀 있는 동화 책 이야기를 읽으며 나는 나도 모르게 박수를 쳤다. 특히 「남실바
람 루비」는 내게 감동을 준 작품이었다.
바람 주머니만 세면 바다를 정복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을 바꾸고 바람 주머
니를 하나씩 빼며 더불어 이루어 가는 평화가 내 안에 감동을 깊이 새겨 주었
다. 이렇듯 선생님의 동화 속에는 이웃과 어울려 서로 도와 가는 삶. 욕심보다
배려와 희생정신으로 가득하다.
선생님과 인연은 선생님이 등단하시기 전 1982년이었다. 울산 교육청 주최
백일장 심사 때였다. 선생님은 시와 소설을 습작하고 계시는 울산여고 국어 선
생님이셨다. 내가 구독해 보던 《아동문학 평론》을 드렸었다. 2년 후 1984년에
《아동문학 평론》에 동시가 당선되고 그 얼마 후 동화가 당선되었다.
지금 선생님은 가시고 20년이 지났다.
인터넷 검색창 에서도 찾을 수 없어 참으로 쓸쓸하고 섭섭했는데 선생님이
쓰신 동화책을 다시 꺼내 읽으니 선생님에 대한 마음이 다시 따뜻하게 피어나
기쁘다.
한 사람이 우리 곁을 떠나고 잊혀 진다는 게 얼마나 가슴 아픈 일인가? 누군
들 그리 되지 않으랴. 장담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라는 생각에 오래
먹먹해져 있었다.
선생님을 다시 따뜻한 인연으로 내 안에 살아남게 해 준 시간이었다.
작가의 대표작
해님 뺏기
마주 보는 산과 바다
새벽부터 힘겨룸을 한다
누가 이길까
얼굴이 붉어지면 어때
불끈불끈 힘을 내어라
앗! 저것 봐
바다가 먼저 지쳤다
가슴에 품은 아침 해를 내어 놓네
차르르 찰
차르르 찰
온종일
바다가 보채는 파도소리
산은 바다가 안쓰러워
서쪽 하늘에 걸어 둔 저녁 해는
되돌려 주었다
마음도 넣어줄 거야
아가는 풍선이 좋아서 꼭 붙잡고
풍선은 아가 손에서 달아나려 하고
줄다리기하면서 함께 놀면 어때
아장아장 아기 걸음 귀엽지도 않나
서툰 걸음마 발을 헛디뎌
넘어진 아이
못본 체 그냥 두고 공중으로 날아가네
우는 아가 혼자 두고 어찌 떠나나
다음엘랑 두고 봐
네 가슴 속에 착한 마음도 넣어줄 거야
빈 접시 하나
과일을 담으면 과일 접시
보기만 해도 싱그럽다 과일을 좋아하고
산나물을 담으면 산나물 접시
보기보다 싱그럽다 산나물을 좋아하고
접시는, 빈 접시는
무엇으로 채워질지 마음 쓰지 않는다.
산나물보다 탐스런 과일을 담고 싶어요.
나를 위한 것이라곤 하나도 없어요.
어쩌다 욕심이 불을 켤 때
접시는, 빈 접시는
벽을 향해 앉아서 스스로 책찍질 한다.
내 이름이 접시인데, 빈 접시인데…
해와 달의 약속
1.춘분
따뜻한 봄날
낮과 밤 시간을 똑같이 나누었다
“약속을 꼭 지켜야 해.”
해는 고개를 끄떡끄떡
“너도 꼭 지켜야 해.”
달도 고개를 끄덕였다.
2.하지
정자나무 매미 소리 듣고 있다가
멱 감는 아이들과 물장구치다가
해는 깜박 잊어버렸지
참다못해 달이 샐쭉 토라졌다
“약속 시간을 어겼어요.
반딧불 이와 노는 시간이 너무 짧아요.”
3.추분
한꺼번에 버릇 고치기가 그리 쉬운가
하루에 아기 손가락 길이만큼
해는 달에게 시간을 내어주었다
가을 문턱을 넘고 나서야
“밤과 낮의 길이가 이젠 똑같지?”
해는 어깨를 으쓱 뽐내었다.
4.동지
팥죽 먹고 자고 나도 또 밤이네
한잠 자고 깬 아이 더 자라고
서릿발 논두렁 빈 들판 지나
은빛가루 뿌리면서 골골마다 다니다가
달아,
해님과 약속한 건 어찌 하려나
잽싸리와 삐뚤이
썰물이 지리 비운 갯벌은 게들의 운동장이 되었습니다. 운동장엔 별만큼이
나 많은 작은 구멍들이 송송 뚫려 있었습니다. 게들의 집입니다.
꼬마 게 잽싸리는 집 밖으로 나왔습니다.
“가만 있자, 오늘은 어디 가서 노나?”
잽싸리는 안테나처럼 생긴 두 눈을 곧추세워 두리번거렸습니다.
‘우선 삐뚤이를 불러내야지.’
삐뚤이는 느림보입니다. 기어 다니는 모습도 삐뚤삐뚤합니다. 그래서 잽싸
리가 지어 준 이름입니다.
“삐뚤아, 놀러 가자.”
아무 대답이 없었습니다.
“햇볕이 쨍쨍 났어. 집안에만 틀어박혀 뭘 해?”
잽싸리가 손나팔 흉내를 내며 세 번이나 부르는 소리를 듣고서야 삐뚤이는
슬슬 기어 나왔습니다.
“꾸물대긴! 대답하기가 그리 힘들어?”
“미안해, 방에 금간 벽을 손보던 중이었어.”
“벽이 무너질까봐? 우리 집 벽은 쩍쩍 갈라졌어도 아직 괜찮더라.”
“소 잃고 외양간 고치면 뭘 해? 미리미리 손을 봐야지.”
“아주, 동작은 굼떠도 말솜씨는 제법이네. 그건 그렇고 빨리 나오기나 해.”
삐뚤이가 대문을 넘어 나왔습니다. 대문을 넘는다니까 이상하지요. 대문이
라야 도둑이 함부로 드나들지 못하게 쌓아 놓은 모래성입니다.
“삐뚤아, 어디로 갈까?”
“놀이터에나 가지 뭐.”
“논 놀이터밖에 모르는구나. 걷기운동은 어때?”
“걷기운동이라니?
“걸어 다니면서 넓은 세상을 구경하자 그 말이야.”
“낯선 곳에 가기는 두려운 걸.”
삐뚤이는 두 눈을 세웠습니다.
“이 겁쟁이야, 그럼 넌 평생 우물 안 개구리가 되고 싶다 그 말이지?”
“아니야, 우물 안 개구리는 되기 싫어.”
둘은 놀이터를 지났습니다.
“야! 바닷물 밑에 숨었던 저 게 집들 좀 봐.”
“갯벌은 우리 게들의 세상이구나.”
“그런데 게들이 왜 안 보이지?”
“글쎄…, 썰물이 나간 줄도 모르나?”
“잽쌀아, 저기.”
삐뚤이가 안테나 눈으로 가리킨 곳에 조각구름 하나가 떠 있었고 그 아래 낯
선 친구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습니다.
“무슨 일이 생겼나 우리도 가 보자.”
“괜찮을까?”
“무슨 큰 난리라도 날까봐 그러니? 어서 따라오기나 해.”
잽싸리가 앞장서고 삐뚤이가 뒤를 따랐습니다. 놀이터를 지나자 갑자기 삐
뚤이의 걸음걸이가 이상해졌습니다. 발끝을 모래밭에 꾹꾹 누르며 절뚝거렸
습니다.
“삐뚤아, 다리가 아프니? 왜 그래?”
“아니야. 걱정 말고 앞장서서 가기나 해. 난 천천히 뒤따를게.”
“아프지 않으면 왜 그래?”
“아무것도 아니래도. 처음 가는 길은 이렇게 걷기로 했어.”
“처음 가는 길은 그렇게 걷는다고? 점점 이상한 소리만 하는구나.”
잽싸리가 아무리 생각해 봐도 모를 일이었습니다.
“삐뚤아, 물속에 기어 다니는 저건 뭐게?”
잽싸리가 오른쪽 안테나 눈으로 갯벌에 움푹 팬 웅덩이를 가리켰습니다.
“아니, 머리하고 앞발만 보이네.”
“늘 놀이터에서만 노니까 게고둥을 여태 못 봤지?”
“게고둥이라고? 부끄럼을 타나, 왜 몸을 숨기고 있어?”
“부끄러워서 그러는 게 아니야. 집을 갖고 다니는 거야. 몸이 커지면 더 큰
고둥껍질에 살짝 들어가면 되니까 얼마나 편해?”
“그럼, 우리 같이 굴을 파지 않아도 되겠네.”
“물론이지. 집 만들기는 누워서 떡 먹기야. 가다가 멈추면 바로 거기가 집터
가 되거든. 나도 게고둥으로 태어났으면 마음대로 돌아다니며 놀 수 있었을
텐데.”
잽싸리는 자박자박 기어 다니는 게고둥을 부러운 듯 살펴보고 있었습니다.
“편할지는 몰라도 난 싫어. 땀 흘려서 만든 자기 집이 더 좋아. 마음 놓고
포근히 쉴수 있거든. 게고둥이 사는 곳은 고둥껍질이지 어디 그게 자기 집
이니?”
“넌 너무 순진해서 탈이다. 그러다간 평생 고생만 할걸.”
“자기 집을 만드는 게 뭐가 고생이니? 난 즐겁기만 하던데.”
“알았다, 알았어. 너하곤 안 통한다. 자, 어서 가자.”
잽싸리와 삐뚤이는 자작자작 말라가는 작은 웅덩이를 또 하나 지나 조각구
름이 있는 곳에 도착했습니다. 낯선 친구들은 꼼짝도 하지 않고 구름의 이야
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습니다.
“오늘은 시골 들판 한가운데에 있는 민들레국민학교를 구경하고 왔어.”
“그런 예쁜 이름을 가진 학교도 있나요?”
두 눈을 세웠다가 눕히면서 큰 눈이 게가 물었습니다.
“있긴 하지만 드물어. 어른들은 때때로 바보스러워. 나팔꽃국민학교, 들국
화 초등학교, 냉이꽃 국민학교 같은 예쁜 이름을 얼마든지 지을 수 있는데 말
이다.”
“푸른 하늘국민학교, 조약돌국민학교는 어때요?”
“그것도 참 좋은 이름인데?”
조각구름은 큰 눈이를 내려다보며 웃음을 보냈습니다.
“내가 민들레국민학교를 지날 때는 다음날이 소풍가는 날이라 어린이들이
일찍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어. 교문 앞에는 갈래길이 세 개 있었는데 손을 흔
들며 헤어지는 모습들이 길섶에 피어 있는 금단추 민들레꽃과 어울려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다웠어.”
“금단추 민들레꽃이오?”
왕방울 눈 큰 다리 게가 집게다리를 불쑥 내밀면서 물었습니다.
“응, 민들레꽃은 금으로 만든 단추처럼 생긴 꽃이야.”
꼬마 게들은 두 개의 안테나 눈을 눕히기도 하고, 눕혔다 세우기도 하면서
조각구름을 쳐다보았습니다.
“구름 아저씨, 우리는 길섶에 피어 있는 금단추 민들레꽃을 구경할 수 없
나요?”
잽싸리가 엉거주춤 몸을 일으키면서 물었습니다.
모두들 난데없는 이 물음에 잽싸리와 삐뚤이가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습
니다. 조각구름은 잠시 난감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너희들은 바다에 살고 민들레는 육지에서 피는 꽃인데 어떻게 구경할 수
있겠니?”
꼬마 게들은 조각구름의 말에 섭섭해 하며 서로 바라보기만 했습니다.
“너무 실망하지 마라. 너희들이 혹시 운이 좋으면 내일 민들레 금단추꽃을
보게 될지도 몰라.”
풀이 죽어 있던 꼬마 게들은 다시 생기를 얻어 입을 열었습니다.
“내일 보게 된다고요?”
“그래. 기다려 보는 거야. 민들레국민학교 어린이들이 바닷가로 소풍을 오
면 좋겠는데…. 꽃을 좋아하는 여학생들이 민들레 금단추 꽃을 머리에 꽂고 다
니는 걸 봤거든.”
끼리끼리 모여 있던 꼬마 게들은 저마다 햇빛이 쨍쨍한 푸른 하늘에 멋대로
그림을 그렸습니다.
민들레 금단추 꽃은 하늘 한복판에서 웃고 있는 해님처럼 생겼을까? 밤에 멀
리 불꽃을 주렁주렁 달고 지나가는 불꽃송이 배처럼 생겼을까?
어느 새 하늘은 꼬마 게들이 그린 여러 가지 모양의 노랑꽃으로 가득 찼습
니다.
“자, 밀물이 들어오고 있다. 너희들, 내일은 동쪽 바닷가에서 기다려라.”
조각구름이 손을 흔들었습니다.
“아저씨, 내일 꼭 나와서 우리들에게 민들레 금단추 꽃을 가르쳐 주어야 해
요, 안녕!”
바닷물이 더 가까이로 밀려왔습니다.
“삐뚤아, 우리는 왜 조각구름 아저씨처럼 훨훨 날아다니지 못할까?”
잽싸리는 꼬마 게들이 다 돌아간 텅 빈 갯벌에 그대로 버티고 서서 두 눈을
굴리고 있었습니다.
“나 참, 기가 막히네. 날개가 없는데 어떻게 하늘을 날아?”
맹추 같은 말을 한다 싶어 삐뚤이는 시큰둥하게 대꾸를 했습니다.
“넌 구름 아저씨가 부럽지도 않니?”
“부럽기야 하지. 날아다니는 일은 우리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걸.”
“그런 말 하지 마. 구름 아저씨에게 우리도 민들레 금단추 꽃을 볼 수 없느냐
고 내가 물었을 때, 다들 엉뚱한 말을 한다고 속으로 비웃었지? 그렇지만 제
각기 부푼 꿈을 하나씩 갖고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잖아.”
잽싸리도 좀처럼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듣고 보니 네 말도 옳다만….”
그때 바닷물이 바로 옆에까지 밀어 닥쳤습니다.
“어! 큰일 났네.”
“빨리빨리! 왜 그리 동작이 느려?”
잽싸리는 삐뚤이를 잡아끌었습니다. 한참을 앞서가던 잽싸리가 걸음은 멈
췄습니다.
“삐뚤아, 큰일 났다. 이 넓은 갯벌에서 어떻게 집을 찾아가지?”
그러나 삐뚤이는 별로 걱정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번엔 내가 앞장설게.”
삐뚤이는 오던 길을 잘도 찾아갔습니다.
“엉뚱한 길로 가는 건 아니지?”
“걱정 말고 따라오기만 해.”
뒤따라가던 잽싸리는 아무리 생각해도 삐뚤이의 재주가 신통하기만 했습
니다. 어느 새 둘은 놀이터가 있는 곳까지 왔습니다. 그제야 잽싸리는 마음이
놓였습니다.
“삐뚤아. 넓은 갯벌에서 길을 찾는 재주 참 용하다. 나도 좀 배울 수 없니?”
“재주는 무슨 재주야? 아무 것도 아닌데.”
“그러지 말고 딱 한 번만 가르쳐 줘. 온 갯벌을 마음대로 다닐 수 있게 말
이야.”
잽싸리는 두 집게다리를 비비며 삐뚤이에게 처음으로 애원을 했습니다.
“뭐 별것 아니야. 그래도 꼭 알고 싶다면 어려울 거야 없지. 아까 우리가 조
각구름 아저씨한테 갈 때 잽싸리 넌 내 걸음걸이가 이상하다고 흉봤지? 내 딴
엔 뜻이 있었어. 돌아올 때를 생각해서 발끝으로 꾹꾹 찍어 갯벌에 발자국을
남긴 거야.”
“그랬었구나. 난 그것도 모르고…. 오늘은 삐뚤이 네 덕을 톡톡히 봤어.”
“나도 마찬가지야. 내일이면 민들레 금단추 꽃을 구경할 수 있다는 기다림
때문에 가슴이 설레는 걸. 다 네 덕분이야.”
“가만히 생각해 보니 늘 나한테 잔소리만 듣던 너도 나에게는 꼭 있어야 할
친구로구나.”
“나도 그래. 느림보 삐뚤이에게 잽싸리 같은 친구가 있어야겠어.”
“그러고 보니 오늘 우리들은 2인 3각 달리기를 했네.”
“2인 3각? 그렇지 그래. 우리들은 서로 힘을 뭉쳐야 하는 2인 3각 달리기 선
수들이야.”
바닷물이 씩씩거리며 저만치 뒤따라와도 둘이는 이제 겁날 것이 없었습
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