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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영을 뒤로 하고 위로 올라옵니다.
처음 들린곳은 진주성.
진주는 경상남도의 대표적인 양반촌입니다.
진주성하면 임진란 3대 대첩중의 하나인 진주대첩과 의기로 알려진 논개가 적장을 끌어안고
물로 뛰어들었다는곳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미국 CNN에서 한국방문시 꼭 가봐야할곳 50중에 들어있다고 합니다.
진주성은 원래 토성이었는데 고려조 우왕 5년(1379년)에 석축하였다고 합니다.
임진왜란 제 1차 진주성전투에서 진주목사 김시민이 3.800명의 군사로
3만명의 왜적을 물리쳐 진주대첩을 이룬곳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다음해 패배를 설욕코자 10만명의 왜군이 다시 침략하여
끝내 진주성이 함락되고 7만의 민관군이 순절하는 비운을 격기도 하였습니다.
성의 둘레는 1.7Km이고 성내에는 촉석루,창렬사,의기사,북장대,서장대,영남포정사,
국립진주박물관,촉석문,공북문,호국사등이 있습니다.
촉석루에서 바라본 남강의 풍경입니다.
바늘처럼 뽀쪽한 돌 위에 세워진 루각 이라하여 촉석루로 이름지은 촉석루.
이곳의 아래쪽으로 난 작은 문을 통과하면 이런 절벽이나옵니다.
이 작은 바위가 논개가 적장을 끌어 안고 물로 뛰어들었다는 의암입니다.
논개의 뜻을 기리는 비석인 의기논개지문.
논개의 영정을 모셔놓은 사당인 지수문.
진주목의 관기로 1593년 임진왜란중에 진주성이 일본군에 함락될때
왜장을 유인하여 순국한 의기입니다.
진주성이 왜적에게 짓밟힐때 기녀로서 적장을 유인하여 남강에 빠져 산화한 사실은
많은 사람들의 입을 통하여 널리 유포되었습니다.
구전되어오던 그녀의 순국 사실이 문헌이나 금석문에 기록되기 시작한것은
1620년경 부터라고 합니다.
진주 국립박물관입니다.
무료로 관람할수 있습니다.
다리도 아프고 힘도 들고...
그때 요녀석이 나타나 앙증맞은 모습을 보여 줍니다.
가까이 다가가도 도망도 안가고 뭔 열매의 껍질을 열심히 벗기고 있습니다.
일정이 빠듯하여 수박 겉할기식의 구경으로 끝을 냅니다.
그리고 대천의 숙소로 가는중에 다시 들린곳 마이산.
북부 주차장에 차를 대고 목적지인 탑사까지는 1.2Km
주차비는 2.000원.
아무리 바빠도 탑사구경은 해야 겠지요?
3.000원의 입장료를 내고 계단을 오릅니다.
3.000원의 입장료...무지 아까웟습니다.
돈이 아깝다기보다
정상부근까지 운행하는 전기차가 있었는데 그것을 몰랐다는것입니다.
이 전기차를 타고 올라가면 입장료는 무료~~
그러니 알고나서 얼마나 억울 하던지...
마이산(馬耳山)은 암마이봉(686.0m)과 숫마이봉(679.9m)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두 산봉우리가 서 있는 모양이 말의 귀 모양을 하고 있어 마이산으로 명명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마이산 산봉과 유사한 역암으로 된 탑 모양 또는 돔상의 지형은
마이산 동남쪽 약 2㎞ 지점까지 10여 개소가 분포하고 잇습니다.
마이산은 백악기의 마이산 역암으로 되어 있으며
그의 산체는 탑처럼 우뚝 솟은 모양을 이루는 것이 특징입니다.
그리고 그의 풍화 표면에는 수 많은 풍화혈(tafoni)이 발달하고 있어
학술적인 가치도 매우 크며, 빙정의 쐐기작용에 의하여 생성된 것이라고 합니다.
510계단.
나무가 그늘을 만들어 주어 그다지 덥지는 않은데...
까마득하게 보이는 저 위까지는 언제 올라갈까나.
저질 체력의 저는 처다만 봐도 숨이 막힙니다.
어렵게 두산 사이에 이르니 양쪽 등산로는 폐지 되었습니다.
게다가 주차장을 잘못들어 탑사로 가려면 또 한참을 내려가야 합니다.
내려 가는것은 문제가 아닌데 다시 그 계단을 다시 올라와야 한다는것...
남부 주차장에 차를 주차 시키면 탑사는 아래쪽에 위치하게 됩니다.
우리처럼 북부 주차장에 주차하면 산을 넘어야 한다는...
마이산의 전설
마이산은 아득한 옛날 한쌍의 두 신선이 자식을 낳고 살아 가던중
마침내 승천할 때가 이르러 남신이 말하기를 "사람들이 승천하는 장면을 보면
부정을 타서 안되니 한방중에 떠나자고" 말하였으나,
여신은 밤에 떠나기는 무서우니 새벽에 떠나자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새벽에 떠나게 되었는데 때마침 일찍 물길러온 동네 아낙이
승천하려는 장면을 보고 "어머나 산이 하늘로 올라가네" 하고 소리치자
승천이 틀린 것을 안 남신이 화가 나서 "여편네 말을 듣다가 이 꼴이 되었구나" 하고
여신으로부터 두 자식을 빼앗아 그 자리에서 바위산을 이루고 주저앉았다고합니다.
구전되어 내려온 전설이긴 하지만 진안읍에서 마이산을 보면 아빠봉은 새끼봉이 둘 붙어있고
서쪽 엄마봉은 죄스러움에 반대편으로 고개를 떨구고 있는 모습이 신비스런 감탄을 자아내게 합니다.
숫마이봉
암마이봉.
마이산은 중생대 후기 약 1억년전까지 담수호였으나 대홍수시 모래, 자갈 등이
물의 압력에 의하여 이루어진 수성암으로 약 7천만년전 지각 변동으로 융기되어
지금의 마이산이 이루어졌으며 지금도 민물고기 화석이 간혹 발견되는 자연이 만든 최대의 걸작품입니다.
거대한 말의 귀를 뒤에 두고 있는 은수사.
탑사의 이름에 가려져 알려지지 않았지만 지나가는 길에라도 들려보시기를...
산에 보면 듬성듬성 패인부분이 있는데 이것이 타포니현상이라고 합니다.
뭔소린지는 모르겠습니다.
특히 암마이봉에 그런 현상이 많습니다.
은수사의 뒤에 솟아 있는 숫마이봉.
암마이봉 남쪽 아래 위치한 돌탑은 바람에 흔들리거나 무너지지 않는 원추형 석탑인 천지탑입니다.
그 아래 외줄로 쌓아올린 탑인 중앙탑 등 80여기의 크고 작은 돌탑이 옹기종기 모여있습니다.
원래는 120여개의 탐이 있었다고 합니다.
돌을 쌓으며 강력접착제로 붙여놓은듯 견고하게 쌓아올려진 돌들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 탐을 쌓은이는 이갑룡처사.
그는 1860년 임실군 둔덕면 둔기리에서 전주이씨 효령대군 16대손으로 출생했습니다.
본명은 이 경의 호는 이 갑룡이라 합니다.
구한말 시기적으로 어려운 때에 지혜는 총명 했지만 가난한 양반 집안이므로
서당에 다니지 못 하고 창호지 틈으로 세어 나오는 글소리로 학문을 익혔으며
군불에 나무를 집히고 앉아서 나무 가락으로 땅바닦에 글을 쓰며 틈틈이 일하시면서 공부에 열중하셨다고 합니다.
1900년초 이갑룡처사가 이곳에 정착하며 직접 만들어 지금까지 사용하는 우물입니다.
섬진강의 발원지인 용궁이랍니다.
이 우물은 관람객등 많은 사람들이 식수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두개의 탑이 아닌 하나로 시작되어 위로 올라가면서 두개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이 탑이 탑사의 주탑으로 천지탑은 부부탑으로 2기로 되어 있으며
높이는 13.5m이고 남.북으로 축조되어있습니다.
주탑인 천지탑을 정점으로 조화의 극치를 이루며 줄줄이 세워저 있습니다.
병서의 팔진도 법으로 축석 했다는 이 자연석 석탑군은 天地塔을 상단에 두고
오방탑이 호위하듯 서 있고 그 아래 산신각과 대웅전이 바위 위에 자리하고
중앙탑, 일광탑, 용궁탑, 신장탑 등 대탑 사이로 크고 작은 외줄탑 등
80여개의 석탑군이 옹기종기 장관을 이루고 있습니다.
탑사의 명물 능소화입니다.
이렇게 작은 기둥에서...
이렇게 넓은 자리를 차지하고 자라고 있습니다.
맨 앞 양쪽에 있는 탑을 일광탑.월광탑이라 하며
마이산 탑군은 태풍에 흔들리기는 하나 무너지지 않는 신비를 간직하고 있으며
탑들을 보면 양쪽으로 약간 기울게 쌓여저 있는것을 볼수 있는데
이는 조탑자가 바람의 방향등을 고려하여 축조한것으로 보인다고합니다..
깍까지른 절벽위의 틈새....
어떻게 저런곳에 탐을 쌓았을까?
타포니 현상이라는 움푹패인 구멍들...
참으로 신기합니다.
탑사를 구경하고 나오면서 발걸음이 떨아지지 않습니다.
뭔가 허전한것이 내 물건 무었을 두고 온느낌이 들어 옵니다.
다시 돌아보고 또 돌아 보고...
우왕~~
구경은 잘했는데 또 300여개의 계단을 올라가야 합니다.
또 비지땀을 흘리면서 천황문 까지 올라왔습니다.
공고판을 보니 내년 10월부터는 암마이봉 정상까지 올라갈 수 있겠네요.
주차장에 내려와 보니 전기차가 놓여 있습니다.
이 차를 타고 쉽게 올라갈수 있었는데...
마이산을 나와 또 달려간곳이 대천해수욕장.
한 콘도에서 머물면서 대천해수욕장 해변을 걸어 보았습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부여를 향해 달려 갑니다.
처음 도착한곳이 궁남지...
부여 남쪽에 위치한 백제의 별궁 연못입니다.
백제 무왕 때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며, ‘궁궐의 남쪽에 연못을 팠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을 근거로 궁남지라 부른다고 합니다.
궁남지는 연꽃의 저수지로 보입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20여 리나 되는 긴 수로를 통해 물을 끌어들였고,
주위에 버드나무를 심었으며 연못 가운데에 방장선산을 상징하는 섬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수로와 물가·연못 속의 섬이 어떤 모양으로 꾸며져 있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못의 중앙부에 석축과 버드나무가 남아있어 섬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고합니다.
궁남지 전체가 연밭으로 가득하며 아름다운 연꽃이 지천입니다.
고대 중국사람들은 동해바다 한가운데에 일종의 이상향인 신선이 사는 3개의 섬으로 삼신산이 있다고 생각하여,
정원의 연못 안에 삼신산을 꾸미고 불로장수를 희망했다고 합니다.
궁남지는 이것을 본떠 만든 것으로 신선정원이라 불리우며
연못 동쪽에 당시의 별궁으로 보이는 궁궐터가 남아 있습니다.
현재 연못 주변에는 별궁 안에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우물과 주춧돌이 남아있고,
연못 안에는 정자와 목조다리를 만들어 놓았습니다.
궁남지는 선화공주와의 사랑으로 유명한 백제 무왕이 만들었다는
왕궁의 남쪽 별궁에 속하는 우리나라 최초의 인공 연못이라고 합니다.
연못 한쪽에 있는 그네도 타보고...
저 역시 동심으로 돌아가 한번 타 봅니다.
하지만 그리 쉽지 않더군요.
궁남지에는 온갖 연꽃들이 모두 있습니다.
해마다 7월이면 연꽃 축제가 열리고 있다고 합니다.
올해는 7월 19일 부터 열렸다고 합니다.
연잎 하나가 쟁반만하네요.
축제기간 중에는 천만송이의 연꽃이 피어난다는데...
너무 늦게 찾은것 같네요.
그래도 처형과 동서가 안내한 궁남지에서 뜻하지 않은 구경을 하고 추억을 쌓았습니다.
아름 다운 연꽃을 뒤로 하고 다시 길을 떠납니다.
궁남지에서 멀지 않은곳에 위치한 부소산성입니다.
부소산성은 백마강 남쪽 부소산을 감싸고 쌓은 산성으로 사비시대의 도성(都城)입니다.
삼국사기』「백제본기」에는 사비성·소부리성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성이 위치한 산의 이름을 따서 부소산성이라 부릅니다.
웅진(지금의 공주)에서 사비(지금의 부여)로 수도를 옮기던 시기인 백제 성왕 16년(538)에
왕궁을 수호하기 위하여 쌓은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동성왕 22년(500)경에 이미 산 정상을 둘러쌓은 테뫼식 산성이 있던 것을
무왕 6년(605)경에 지금의 모습으로 완성한 것으로 짐작되어
백제 성곽 발달사를 보여주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고 합니다.
우리는 일정이 바빠 낙화암과 고란사만 구경하기로 합니다.
낙화암 위에 지어진 백화정입니다.
1929년 <부풍시사>라는 시모임에서 건립 했다고 합니다.
부소산성 안의 낙화암은 연합군이 쳐들어오자 궁녀들이 치마를 뒤집어 쓰고
강물에 몸을 던져 죽었다 하여 타사암(墮死岩)이라 부르던 것을 훗날 강물에 떨어지는
궁녀들을 꽃에 비유하여 낙화암으로 바꿔 불렀다고 합니다.
사진 아래 쪽에 고란사가 위치해 있습니다.
의자왕과 삼천궁녀~~
정말 궁녀가 삼천명이 있었을까?
신라가 백제의 민심을 위해 언론플레이를 한것은 아닐까?
3.000명이면 매일 한명씩 데리고 자도 한바퀴 돌려면 9년여가 걸릴텐데...
내가 걱정할일은 아닐텐데..ㅎㅎ
낙화암옆으로 조금 내려 오면 고란사가 보입니다.
백마강 달~밤에~~고란사의 종소리가~~
꿈꾸는 백마강이던가요?
노래 소리에 이끌려 고란사를 찾아갑니다.
고란사는 백제 말기에 건립된것만 알려졌을뿐 다른 내용은 잘 알려지지 않은사찰입니다.
절뒤에 있는 고란정 약수...
한잔 마실때마다 3년이 젊어 진다는데...
저는 한 10잔은 마셔야 겠네요.
이곳에 소원을 적어 걸어 놓으면 꼭 이루어 진다고 합니다.
그런데 돈 받고 걸어 놓는가 봅니다.
삼성각.
촛불 켜 놓고 소원을 빌어 봅니다.
지금은 거의 사라졌지만 고란초라는 식물이 있나 봅니다.
이제 고란사를 끝으로 3박4일의 여정을 끝내겠습니다.
함께 해준 처남과 처형 부부 그리고 집사람한테도 고맙다는 인사를 드립니다.
긴 글 읽어주신 모든분들께도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