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영월군 수주면 무릉리 소재.
우리나라에 무릉리(武陵里)라는 이름을 가진 곳이 몇군데 있다.
武陵이란 이름을 가진 洞里는 모두 아름다운 경치를 품고 있는 곳이다.
그중 서울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한
영월군(寧越郡) 수주면(水周面) 무릉리(武陵里)도 곳곳에 절경을 가지고 있다.
그중에도 제일 기이한 絶景을 가진 곳이 요선정(邀僊亭)이다.
요선정은 법흥사에서 내려오는 "법흥천"과 치악산에서 내려오는
"서만이강"이 만나서 "주천강"이 시작되는 合水머리 언덕위에 있다.
하나의 亭子에 두 개의 현판이 걸려있다.
우측의 요선정(邀:부를 요,僊:춤출 선,亭)은 神仙을 맞이하는 기이한 亭子라는 뜻을 지녔고,
좌측의 모성헌(慕聖軒)은 숙종의 어제시(御製詩)를 모셔서 임금을 사모한다는 듯이라고 한다.
조선시대 酒泉쪽의 주천강 북쪽 언덕에는 빙허루(憑虛樓)와 청허루(淸虛樓)라는 정자가 있었다고 한다.
1698년 정월에(숙종 24년) 빙허,청허양루시(憑虛,淸虛兩樓詩)를 지어 강원 감사 심정보에게 내렸다고 한다.
강원 감사 심정보는 이 "어제어필"(御製御筆)詩를 주천현(酒泉縣)에 있는 청허루(淸虛樓)에 보관했다고 한다.
그후 청허루가 화재로 인하여 소실되고 "어제시 현판"(御製詩 懸板)도 같이 소실되고 말았다.
나중에 청허루가 중건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영조대왕이 先王의 詩文을 보전하기 위해
숙종대왕의 어제시를 손수 쓰고 후에 다시 자신의 시를 한편 보태어 강원 감사 임집(林鏶)에게 내린다.
이렇게 하여 새로 중건된 청허루에는 두 임금의 어제시를 봉안하게 되었다.
청허루는 일제강점기 때 붕괴되고 어제시 현판은 당시의 주천면 경찰지소장인 일본인이 가져간다.
이에 격분한 이곳 주민들이 요선계를 조직하여 요선정을 건립하고 지소장을 설득하여 거금을 들여
어제시 현판을 매입하여 요선정에 보관하게 된 것이라 한다.
수주면민으로 요선계를 조직한 원씨(元氏), 이씨(李氏), 곽씨(郭氏),의
삼성(三姓)의 역사의식과 애국심은 우리가 깊이 새겨야 할 것이다.
“요선정 옆 큰 바위에 석명선(石明瑄)이라는 이름이 새겨져 있다.
이 자는 1919년 4월21일 영월군 주천면 금마리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났을 당시에 영월군수로 있으면서,
그곳의 많은 애국자들을 잡아들여 감옥에서 온갖 고초를 당하게 한 자이다.
미관을 해치는 이 이름을 지우거나 인물에 대한 설명문을 써 놓아야 마땅하겠다.
요선정 마애여래불 뒤편에서 보는 서만이江의 경치.
많은 사람들이 저기 보이는 강을 "주천江"이라고 하나 여기 보이는 江은 "서만이江"이라고 해야 맞는다.
이 江은 횡성군 둔내면에서부터 흐르는데 상류에서 부터 "주천강"(酒泉江)이라 불리우다가,
원주 신림면 두산리와 영월군 수주면 운학리가 맞나는 지점부터 잠깐 동안을 "서만이江"이라 불리운다.
짧은 흐름을 가진 "서만이江"은 사진 오른쪽에 보이지 않는 위치에 있는 "법흥川"과
"요선정" 아래에서 合水하여 다시 "酒泉江"이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酒泉江"은 영월을 흐르면서 영월군 "한반도面"에서 평창에서 내려오는 "평창江"과 합류하는데
여기에서 이 강은 다시 "평창江", 또는 "西江"이라고 이름을 바꾼다.
"西江"이라는 이름으로는 영월을 벗어나지 못하고 아주 조금 흐른다.
"청랭포"를 지나면 "정선"에서 내려오는 "東江"과 합류하면서 이름이 "南漢江"이 되어
"단양", "충주", "양평"을 지나 "팔당"댐 위에서 "北漢江"과 합류하여 비로서 "漢江"이란 이름을 지닌다.
요선정에서 내려오다 강을 보면 기이한 바위모양이 눈에 들어온다.
천연기념물 543호인 요선암(邀僊岩)이다.
저러한 모양의 강가에 있는 암반을 돌개구멍(Pot Hole)이라고 하며, "깊고 둥근 항아리구멍" 이란 뜻이다.
1차로 기반암(基盤岩)위에 빠른 유속의 물과 흐르는 돌의 작용으로 凹凸이 발달하고,
상류에서 물과 함께 흘러 내려 오는 자갈들이 더욱 깊은 골을 만들어 와지(窪地 : 바위웅덩이)기 된다.
이 와지에 자갈과 모래들이 들어가 와동류(渦動流, Spiral Circuit)의 물살에 의해
빠른 회전을 하며 속을 갈아내어 점점 깊은 포트홀이 만들어 진다.
요선암은 "신선을 맞이하는 바위"라는 뜻으로 조선의 시인 양사언(楊士彦 : 1517 ~ 1584)이
평창군수로 가던 중 이곳의 경치를 즐겨하며 바위에 요선암이라 새겼다고 하는데
지금은 너무 희미하여 찾기가 어렵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