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가문들은 그냥 단소만 만들어 두고 있을 뿐이지요.
우리도 처음부터 시조의 묘가 있었던 것은 아니예요.
잃어버렸었지요.
시조 사후 5백년 후, 그러니까 1470년 경에 묘를 찾았어요.”
『보감』에도 이 부분에 대한 기록은 보인다.
“17세이신 평창(平昌)군수 권옹(權雍)이 『여지승람』(輿地勝覽)을 보고 시조묘를 발견하였다.”
“저희가 안동의 종가를 취재하고 있는데요.
이번이 ‘안동권씨’를 다룰 차례입니다.”
취재에 동행한 김복영씨가 말하였다.
“‘안동권씨’ 종가를 취재하려면 어디를 가야 하는지 어르신들께서 좀 알려 주셨으면 합니다.”
“우리 ‘안동권씨’는 종가가 없어요.”
노인들 중의 한 분이 말하였다.
“종파는 있지만 종가는 없어요.”
“종파 종가도 안동에는 없고, 종파 후손이 안동에 사는 사람도 거의 없어요.”
“유명한 어른이 있고, 거기서부터 쭉 내려와야 종가라 할 수 있는건데,
자기들끼리 그냥 종가니 뭐니 하니까…”
노인들은 다투어 말하였다.
“그래도 뭐 안동권씨 15파 중에 뚜렷하게 오래되었다거나 하는 그런 파종가가 없습니까?”
김복영씨가 다시 말하였다.
김복영씨는 사전취재를 통하여
‘안동권씨’의 종파문제에 대한 정보를 가지고 있었다.
같은 대에서 15파로 분리되는 ‘안동권씨’ 였으므로,
그 중 어느 파의 종가를 다뤄야 할는지 난감한 문제라는 정도의 정보는 김복영씨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그런 정보와 함께 그래도 안동에서 ‘안동권씨’의 종가를 말하자면
‘이 종가를 다루어야 한다’고 권유를 받았던 파의 이름도 가지고 있었다.
그러므로 김복영씨가 거듭 이러한 질문을 던지는 것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정보의 진실성을 확인하고자 하는 의도가 있었던 것이다.
“우리 ‘안동권씨’는 전체로는 ‘추밀공파’(樞密公派)가 가장 많고,
안동 일원에는 복야공파(僕射公派)가 많지요.
추밀공파도 여럿으로 갈라져서 파 종손은 없어요.”
“안동 인근에서 그래도 뚜렷하게 종가라고 할 수 있는 곳은
부정공파(副正公派) 종가이지요. 부정공파는 파 종손이 있어요.
종손은 부산에 있어요. 종가는 와룡에 있고, 종손만 부산에 가 있지요.”
그것은 김복영씨가 바라던 대답이었다.
“여기 ‘태사묘’는 어떻게 관리되는 것입니까?”
내가 물었다.
“공동소유지요. 세 가문이 공동관리해요. 2월과 8월의 중정에 향사를 올려요.
1555년부터 4절사를 지냈는데 송암(松巖 ; 權好文)선생이 춘 추 양절사로 바꾸었어요.
그래서 1585년부터 양절사를 지내지요.”
태사묘는 원래 안동부(安東府) 안에 있었다고 한다.
이 점에 대해서 상기하였던 『보감』의 ?태사묘 증수기?(太師廟增修記)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
호장청(戶長廳) 안에 사당이 있어 고려 태조의 공신 3인을 향사치루니……
부사(府司)에서 향사를 치루는데 호장이 관장한 것은
아마 태사공(권행)의 손(孫) 책(冊)이 호장이 되었을 때부터 시작된 것이라 여겨진다.”
이 안동부 내의 사당은 1543년에 다시 신축된다고 한다.
이 부분에 대한 ?태사묘 중수기?의 기록을 보자.“……
중종 36년(1541)에 김공 광철(金光轍)이 부사가 되어 와서……
옛 터를 넓혀 묘우(廟宇)를 신축하니
그때에 마침 현 형조판서인 권공 철(權轍)이 본도 감사로서 부에 와서 보고
그 일은 매우 잘하는 일이라하여 제전(祭田)을 봉하고 묘직(廟直)을 만들어 주었다.……
병진(丙辰;1556) 겨울에 부사 권공 소(權紹)가……
부임하여 양 공의 뜻에 깊이 감동하여……
제전을 더 봉하고……”
그런데 『호양선생문집』(湖陽先生文集) 건(乾)의 3쪽에는 이것과는 조금 다른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만력(萬曆) 계축(癸丑) 여름에 우리 순상(巡相; 權盼을 지칭하는 것임)께서 영남을 안절(按節)하실 때
묘를 배알하고 친족들을 모아놓고 상의하기를,
‘묘가 퇴락하여
선조의 영혼이 편안히 거주하기에 충분하지 않으니 바꾸어 새로 짓자’고 하셨다.”
그리하여 새로 짓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불일치는 어떻게 이해되어야 할지 난감한 일이었으나,
태사묘의 방문 때에 안동권씨 노인들로부터 전해받았던
?안동 태사묘의 유래?라는 한 장의 기록을 살펴 봄으로서 분명하게 이해될 수 있었다.
“중종 37년 1542년…… 김광철이……
처음으로 묘우를 이 자리에 세웠다.……
1613년 7월 경상감사 권반(權?), 경주부윤 권태일(權泰一)이 구묘를 증축하고,
3공신묘를 태사묘로 개칭하고,
태사묘 현판은 권복형(權復亨)이 썼다.”
여기의 기록도 『보감』의 기록과의 사이에 연대의 혼란이 보이기는 하지만,
어쨌든 이 기록을 통하여 보면 위의 두 기록이 서로 연대를 달리하는 것이며,
전자는 지금의 자리에 옮겨진 태사묘의 신축상황과 연결되는 것이고,
후자는 그것의 증수와 관계되는 것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위의 두 기록에서 보이는 연대의 차이는 하나는 김광철이 부사로 부임하여 오는 해를 적고 있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묘우를 건립하는 해로 본다면 크게 무리가 없을 것이다.
어쨌든 우리는 태사묘의 방문에서 안동 인근에서 ‘안동권씨’ 종가를 찾고자 한다면
‘부정공파’ 종가를 찾는 것이 가장 나은 일이라는 정보를 확인 할 수 있었다.
그러나 태사묘의 안동권씨 노인들은
혹시 우리가 실수라도 할까 염려되어선지 그냥 ‘안동권씨 종가’라 해서는 안되며,
‘안동권씨 부정공파 종가’하는 식으로 기술하여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여 마지 않았다.
가야동 늪실(訥谷)
날씨는 청명하였다.
봄바람이 조금 살랑거리기는 하였지만,
그것은 오히려 피부를 가볍게 자극시켜 주기에 좋을 정도였다.
와룡 쪽으로 나가는 도로는 한산하였지만,
여느때나 마찬가지로 심하게 굽어 있었고, 노폭이 좁았다.
가야동을 찾아들어가기 위해서는 한 번의 시행착오를 거쳐야 하였다.
포장이 되어 있지 않은 탓에 아래쪽 길로는 승용차가 통행할 수 없고,
위쪽 길로 들어가야 한다는 점을 알고 있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 늪실 마을이 그만큼 오지에 속한다는 증거가 아닐 수 없었다.
사람들이 가르쳐 준 대로 새로 닦아서 검은 빛이 너무 진하게 보이는
아스팔트 길을 타고 늪실로 통하는 낮은 고갯마루에 성큼 올라서니
거기서부터는 길이 울퉁불퉁 패여있는 비포장 도로였다.
눈 앞에는 키 낮은 산들이 늘어서 있는 것이 보였고,
산과 산 사이에 좁직한 농지가 펼쳐져 있었다.
산은 아주 낮았으므로 마을과 거의 수평을 이루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길은 움푹움푹 패인채로 마을 한가운데를 뚫고 지나고 있었다.
우리는 길 양쪽으로 펼쳐져 있는 마을을 눈여겨 보면서 천천히 자동차를 움직여 갔다.
갑자기 진행방향의 우측으로 산기슭에 서 있는 당당한 기와집 한채가 눈에 들어오고,
그 사랑채의 처마 아래 붙어있는 ‘부정공세로’(副正公世盧)라는 커다란 편액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우리는 제대로 목적한 마을을 찾아 들어왔다는 것을 비로소 그것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태사묘에서 만났던
안동권씨 노인들은 가야동에서 권오수 씨를 만나면
부정공파에 대한 소상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으리라고 말하여 주었다.
종가에는 종손이 없을 것이고, 종손 권기승 씨의 연로하신 어머니 한분만이 종가를 지키고 있을 것이므로
제대로 이야기를 들을 수 없으리라는 이야기 였다.
그것은 맞는 말일 터였다.
우리는 권오수 씨부터 찾기로 하였다.
길 가의 작지만 깔끔한 집을 찾아가니 주먹만한 개가 숨도 쉬지 않고 짖어댔다.
시골 집에서는 어디나 개를 기르는 것을 볼 수 있는데,
그것은 잡인을 경계하기 위한 것인지
아니면 길러서 팔기 위한 것인지 알 수 없는 노릇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들어간 곳은 바로 권오수 씨의 집이었다.
61세라는 권오수 씨는 체구는 작았지만 단단해 보였고,
검고 갸름한 얼굴에 빛나는 눈을 하고 있었다.
흰머리가 조금 섞여 있는 것이 그가 살아왔던 만만치 않은 세월의 길이를 이야기하여 주는 표식일 뿐,
나이를 느끼기 어렵게 하는 젊음이 그의 작은 육신에 흘러넘치고 있었다.
“다른 파의 경우에는 지손 집에서 큰집 행사하는 사례가 많으나
저희들은 종가는 제대로 유지를 하여 왔습니다. 그렇지만 아이구, 보잘것이 없습니다.”
권오수 씨가 말하였다.
“자손의 숫자는 안동권씨 15파 중에서 셋째로 많을 겁니다.
추밀공파, 복야공파가 많고, 그 다음이 우리 파지요.”
권오수 씨는 엄숙한 얼굴로 말을 이어갔다.
“부정공파는 파조 이후 거의 적자로 종통을 유지하여 왔습니다.
35세에 와서 현 종손의 윗대가 백부에게로 양자를 오셨고……
그 윗대에서도 한 번 양자를 하신 적이 있지만……
거의 적자로 이어내려온 셈이지요.
현 종손은 부산에 가서 개인사업을 하고 있습니다. 현 종손은 1948년 생이고, 이름은 기승이라고 하지요.”
권오수 씨는 족보를 꺼내와서 안동 권씨와 안동권씨 부정공파에 대한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하기 시작하였다. 윗목에 나란히 붙어있는 철제 앉은뱅이 책상 위에 놓여있는
서너개 화분 속의 화초가 조금씩 잎을 흔들고 있는 것이 보였다.
내가 방문을 조금 열어둔 탓이었다.
안동 권문의 역사…특히 ‘추밀공파’가 누렸던 영화
안동 권문은 우리나라에서 진행되어 나온 가문의 역사 속에서는
결정적인 중요성을 지니는 가문이라고 하겠다.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족보들 중 가장 오래된 것이 바로
이 가문에서 발행한 것이라는 점을 통해서 우리는 이 점을 확인할 수 있다.
『성화보』(成化譜)라고 불리워지는 이것은
우리민족의 중요한 문화유산일 뿐만 아니라 권문의 자랑이 아닐 수 없다.
『보감』에 의하면 안동 권문은 우리나라에서 효시가 되는 네가지 자랑할 만한 일이 있다고 하는데,
이 『성화보』의 발간은 그 첫 번째로 거론되고 있다.
『안동권씨 부정공파 세보』(이하 부정공파 세보로 지칭함)의 앞 부분에는
서거정(徐居正)이 지었다는 『성화보』의 ?서문?이 원문으로 실려 있고,
『보감』에는 번역되어 수록돼 있다.
『성화보』의 ?서문?에서는 안동권씨의 초기 역사가 다음과 같이 말하여진다.
“행(幸)이 인행(仁行)을 생하였으니 벼슬이 낭중(郞中)에 이르렀고, 인행이 책(冊)을 생하였으니, 책이 스스로 구하여 본읍의 향리가 되었다. 권씨가 책이 향리로 된 후로부터 칠세를 미미부진(微微不振)하다가 수평(守平;樞密公)에 이르러 부흥하고 자손이 미덕을 계승하여 문정공(文正公;菊齋)에 이르러서 비로소 크게 현달하였으며, 수홍(守洪;僕射公)의 후손 문탄공(文坦公;一齋)이 또다시 현달하여서 권씨가 드디어 2대족으로 나누어져……”
이 구절을 통하여 보면 3세 권책의 시기로부터 10세 때까지 ‘안동권문’은 안동에 세거하며 대대로 향리 직을 세습하여 왔음을 알 수 있다. 이 점에 대해서 『부정공파 세보』는 권책의 조항에서 다음과 같이 적어두고 있다.
“호장정조(戶長正朝)이다. 고려 성종(成宗) 2년에 처음으로 12목의 향리직을 설치하였다. 당대(堂大)를 호장(戶長)이라고 칭하였고, 등대(等大)를 부호장(副戶長)이라고 칭하였고, 낭중(郎中)을 호장동정(戶長同正)이라고 칭하였고, 원외랑(院外郞)을 부정(副正)이라고 칭하였다. 공은 스스로 호장 되기를 바래서 풍속을 규찰하고 바로잡았으니, 이에 그것을 세습하게 되었다.”
이렇게 향리로 정착한 안동권문은 10세에 이르면 15파로 나누어지며 향리직에서 벗어나 중앙 관직에 진출하는 사람들을 배출하게 된다. 안동권씨 15개 파는 복잡한 양상을 띄므로 명확하게 정리하여 내기가 어렵다. 그러나 『보감』에 보이는 ?안동권씨 10세 15파 세계도?에 의하면 다음과 같이 정리될 수 있다.
9세 백시(伯時)의 장자 수중(守中)이 종파(宗派)를 형성한다.
9세 백시의 차자 시중(時中)이 부호장공파(副戶長公派)를 형성한다.
9세 백시의 아우인 중시(仲時)의 장자 수평(守平)이 추밀공파(樞密公派)를 형성한다.
9세 백시의 아우인 중시(仲時)의 차자 수홍(守洪)이 복야공파(僕射公派)를 형성한다.
9세 백시의 둘째아우인 취의(就宜)의 아들 태달(?達)이 동정공파(同正公派)를 형성한다.
9세 백시의 셋째아우인 통(通)의 장자 지정(至正)이 좌윤공파(佐尹公派)를 형성한다.
9세 백시의 네째아우인 통의 차자 영정(英正)이 별장공파(別將公派)를 형성한다.
9세 백시의 다섯째 아우인 취정(就正)의 아들 통의(通義)가 부정공파(副正公派)를 형성한다.
9세 백시의 여섯째 아우 융(融)의 아들 인가(仁可)가 시중공파(侍中公派)를 형성한다.
3세 책(冊)의 차자인 광한(光漢)의 장자 굉옥(宏玉)의 후손이 10세 숙원(叔元)에 이르러 중윤공파(中允公派)를 형성한다.
3세 책의 차자인 광한의 차자 굉진(宏眞)의 후손이 10세 사발(思拔)에 이르러 군기감공파(軍器監公派)를 형성한다.
3세 책의 셋째아들인 겸한(謙漢)의 후손이 10세 대의(大宜)에 이르러 광석파(廣石派)를 형성한다.
3세 책의 셋째아들인 겸한의 후손이며, 8세 입평(立平)의 차자 의정(宜正)의 아들 추(樞)가 호장공파(戶長公派)를 형성한다.
2세 인행(仁幸)의 차자 륜(綸)의 후손이 10세 척(倜)에 이르러 검교공파(檢校公派)를 형성한다.
7세 렴(廉)의 이름을 알 수 없는 아들의 후손이 10세 형윤(衡允)에 이르러 급사중공파(給事中公派)를 형성한다.
이 15개파 중에서 안동권씨를 권문세족으로 등장시키는데 혁혁한 공적을 세운 것은 ‘추밀공파’라고 하겠다. 앞에서도 말하였듯이 이 ‘추밀공파’의 파조는 ‘수평’이다. 그는 ‘광록대부 추밀원부사 상장군’을 지낸 사람이다.
추밀공파에서는 추밀공의 3대 후에 권부(權溥)가 나서 이 가문을 단숨에 최고 명문으로 끌어올린다. 권부는 몽암(夢庵) 단(?)의 아들로써, 호가 국재(菊齋)이니, 바로 서거정이 앞에 인용하였던 『성화보』의 서문에서 언급하였던 바가 있는 사람이다. 『보감』에서는 이 사람의 이름을 ‘권부’라고 국문 표기를 하여놓고 있으나 『한국 민족문화 대백과 사전』에서는 ‘권보’라는 이름으로 쓰고 있다. 혹 『보감』의 오기일 수 있으나, 여러군데에서 거듭 ‘권부’로 표기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오기일 가능성은 작다고 보아 여기서도 그 견해를 좇아서 ‘권부’로 쓰고자 한다. 『한국민족문화 대백과 사전』에서는 이 인물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초명은 영(永) 자(字)는 제만(齊滿)…… 15세에 진사가 되고…… 19세로 급제, 이듬해 전시(殿試)를 거쳐 ‘첨사부녹사’(詹事府錄事)에 보임되었다.……1308년 충숙왕이 복위하자 찬성사에 올랐고, 이어 정승이 되었으며,…… 그 뒤 ……부원군이 진봉되었으며, 추성익조동덕보리공신(推誠翊祚同德輔理功臣) 호가 더하여 졌다.…… 민지(閔漬)를 도와 『세대편년절요』(世代編年節要) 편찬에 참여 ……『사서집주』(四書集註) 간행을 건의 ……성리학의 전파에 상당한 공헌…… 아들 준(準), 사위 이제현(李齊賢)과 함께 역대 효자 64명의 행적을 기린 『효행록』을 편찬…… 85세를 누렸으니 당대의 부귀로 견줄 자가 없었다. 아들은 준(準), 종정(宗頂), 고(皐), 왕후(王煦), 겸(謙)이고, 사위는 안유충(安惟忠), 순정대군 도(順正大君 ?), 회안대군 순(淮安大君 珣)인데 아들 다섯, 사위 넷이 모두 봉군되어, 9개 봉군집안으로 유명하다.……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보감』에 의하면 권부의 아들 ‘권후’는 충선왕이 총애하여 양자로 삼고 왕씨 성을 내리기까지 하였다고 한다. ‘권후’가 ‘왕후’로 된 것이니, 당시 충선왕이 얼마나 권부를 가까이 하였는지를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이들 권부의 자제들은 다투어 군호를 받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며, 그것은 그 다음대에 이르러서도 마찬가지이다. 대를 이어서 고려가 이들을 중용하고 있음을 증거하여 주는 부분이라고 하겠다. 그것은 조선에 들어서서도 마찬가지였다.
권부의 손자인 권희(權僖)는 영가부원군(永嘉府院君)에 이르며, 기사(耆社)에 든다. ‘기사’란 ‘기로사’(耆老社)라고도 하며, 태조 때에 경로 대우를 목적으로 설치하였는데, 정 2품 이상의 벼슬을 한 사람 중에서 70세 이상 된 사람이라야 들 수 있는데, 임금도 여기에 포함된다. 그런데 이 ‘기사’에 든 자 중 처음으로 기록된 사람이 이 ‘권희’라고 한다. 이 점은 『보감』이 안동권씨가 효시가 된 4가지 중 하나로 꼽고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이 권희의 셋째 아들로 우리는 권근(權近)의 이름이 등장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권근은 호가 양촌(陽村), 자가 가원(可遠)으로, 자타가 공인하는 고려말 조선 초기의 최고의 성리학자이며, 벼슬이 좌의정(左議政)에 이르며, 길창부원군(吉昌府院君)으로 봉하여진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권근의 둘째아들 권제(權?)는 호가 지재(止齋)이고 벼슬이 좌찬성에 까지 이르는 사람으로, 역시 길창부원군으로 봉하여지고, 문경(文景)이라는 시호를 받는다. 음성의 권제 묘소로 들어가는 길 입구에는 권제가 ‘용비어천가 제작에 참여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권제의 둘째 아들은 세조반정에 참여하는 사람으로 그 이름을 권람(權擥)이라 한다. 좌익정난공신(佐翼靖亂功臣)으로 벼슬이 좌의정에 이르며, 길창부원군으로 봉해졌고, 시호는 익평(翼平)이다.
권근, 권제, 권람의 3대 묘소는 음성군 생극면 방축리의 한 산줄기에 나란히 위치하고 있다. 낮은 산줄기 하나를 뒤덮은 이 묘지들은 거대한 규모를 자랑하고 있으며, 관리도 잘 되어 있어서, 생전에 그들이 누렸던 영화를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위에서 언급한 권제와 권람이 지니는 역사적 의미는 또 있는데, 그것은 이들이 우리나라 최고의 족보인 『안동권씨 성화보』의 제작에 관계되어 있다는 점이다. 다시 서거정의 ?서문?으로 돌아가 보자.
서거정은 말한다.
“우리 외조부 양촌 권 문충공 근(近)도 또한 문정공의 증손이며, 외삼촌 권 문경공 제(?)가 비로소 가보(家譜) 소첩자(小牒子)를 닦았는데, 길창군 권 익평군 람(擥)이 그 선인의 뜻을 이어 널리 문헌을 찾고 여러분에게 물어서 많이 증보했으나, 그래도 완성되지 못하였다. 내가 상주 판관(判官) 박원창(朴元昌), 대구 부윤 최호원(崔灝元)과 더불어 또 수문(搜問)하여 그 궐유(闕遺)된 것은 보충하고 와오(訛誤)된 것을 리정(釐正)해서 도첩 2권을 만드니 그 보주(譜註)가 문정공과 문탄공(文坦公) 이하는 소상하되 그 이상은 소략하니, 그것은 아는 것을 기록하고 모르는 것은 궐약(闕?)한 것이니, 곧 신(信)으로서 장래에 전하려는 것이다. 보첩이 이루어졌음에 경상감사 윤공 호(尹壕)를 시켜 안동부에서 간행하게 되었다.”
『성화보』가 간행되게 된 내력을 적고 있는 부분이라고 하겠다.
이상에서 살펴 보았듯이 안동권씨 추밀공파는 10세인 파조 추밀공으로부터 18세 권람에 이르기 까지 고려말과 조선 초의 역사 속에서 온갖 영화를 다 누리는 권문세족으로서의 모습을 유감없이 드러내 보여준다. 권율(權慄)도 이 추밀공파에 속한다. 안동권문의 다른 파에서도 여러 현달한 사람들이 나왔지만, 추밀공파 후손들과 같은 정도의 영화를 누린 예는 찾아보기 어렵다.
안동권문 ‘부정공파’의 역사
15파로 나누어지는 안동권문의 각 파에 대해 하나하나 알아보는 것은 지난한 일이다. 그러므로 안동권문을 대표하는 추밀공파에 대해서 대충 알아본 것으로 그치고, 이제부터는 우리가 이야기의 중심에 놓고 살펴보고자 하는 늪실의 ‘부정공세로’의 삶과 연결되어 있는 역사를 개략적으로 더듬어보기로 하자.
안동권문 부정공파의 역사는 추밀공파의 역사처럼 화려하지는 못하다.
“부정공 묘소는 실전입니다.”
늪실에서 만난 권오수씨는 말하였다.
“파조 이후 6대가 다 실전이지요. 금년에 예산을 세워서 설단이라도 하려고 준비 중입니다.”
그것은 그만큼 부정공파가 겪어온 세월이 순탄하지만은 않았음을 의미하여 주는 것이라고 하겠다.
부정공파에 속하는 안동권씨들은 간헐적으로 크고 작은 벼슬을 역임하여 오다가 16세, 그러니까 파조로부터 6세인 권자형(權子衡) 이후로 조금 현달한 인사들을 배출하여내기 시작한다.
권자형은 원나라 지정(至正) 20년인 경자년(庚子年;1360년)에 사마(司馬)가 되고, 신축년(辛丑年;1361년)에 홍건적의 난이 일어나자 공민왕을 상주로 호종하며, 임인년(任寅年;1362년)에는 어가를 따라 청주에 이른다. 그 공으로 봉순대부(奉順大夫) 판삼사부사(判三司副使)가 되며, 홍무(洪武;명 태조의 연호) 임신년(壬申年;1392년)에 안동부 북쪽의 감마촌(甘麻村) 등지의 땅을 하사받는다. 그의 벼슬은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이른다.
권자형의 4촌인 권전(權專)은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화산부원군(花山府院君)이다. 그의 딸이 문종비인 현덕왕후(顯德王后)인 것이다. 현덕왕후는 단종(端宗)의 생모이다. 권전의 아들 권자신(權自愼)은 예조판서를 역임하였고, 사육신과 같이 화를 입어서 삭탈관직 당하였다가, 숙종 때에 이르러서야 복직된다. 어쩌면 부정공파의 영화를 보장하여 줄수도 있었을 왕비 배출은 오히려 그들의 불행으로 끝나 버리고 마는 것이다.
권자형으로부터 3대 후에 안동권씨 부정공파에서는 권징(權徵)이라는 인물이 배출된다. 권징은 호가 등암(藤岩)이며, 세종시대 병오년(丙午年;1426년)에 태어난다. 그는 경오년(庚午年;1450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통례문(通禮門) 봉례랑(奉禮郞)을 역임한다. 그의 이력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그의 죽음과 관계된 기록이다. 역설적으로 그는 부정공파에 불행을 가져다 준 장본인이었던 세조를 위하여 죽는다. 세조시대 정해년(丁亥年;1467년)에 이시애(李施愛)는 함경도에서 난을 일으킨다. 권징은 병마평사(兵馬評事)로 이시애 난을 평정하러 갔다가 순절하고, 혈서 한 장만이 집으로 돌아온다.
“남아의 일과 장부의 운명은 옛부터 이와 같은 것이니 절대로 심려하지 말라!”
혈서에는 이런 글씨가 써 있었다고 한다.
“혈서가 돌아온 날을 기일로 삼아 제사를 드리고 있지요.”
권오수씨가 말하였다.
“유해를 환구하지 못해서 의관장을 하였지요. 배위되시는 분과 합장을 시켰습니다.”
권오수씨는 족보를 짚어보이며 말하였다.
“이 분은 불천위로 모시고 있습니다. 우리는 불천위가 한분 뿐입니다. 묘지는 청석동(淸石洞), 그러니까 막곡에 있는데, 지금 안동전문대학 맞은편입니다.”
부정공파 종손들은 아마도 상당기간 동안은 영주 근방에서 살았던 모양이다.
“파조로부터 6대까지는 묘가 실전되었지만, 7세와 8세의 묘는 영주에 있지요. 그러니 아마 그때는 영주 근방에 세거하였던 모양입니다.”
권오수씨는 계속하여 말하였다.
“여기 늪실의 입향조는 파조로부터 14세, 그러니까 시조로부터 24세 때의 일이지요.”
부정공파의 가산을 늪실로 옮긴 사람은 권익창(權益昌)이다. 그의 선대 2대의 묘소가 남선에 있는 것으로 보아, 그의 직계 선대들은 안동 동쪽에 살지 않았을까 추정된다. 그의 부친 권선(權宣)은 선조때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정자(正字)를 역임하였으며, 퇴계의 문인이라는 기록이 보인다. 권익창은 자가 무경(茂卿)이고, 호가 호양(湖陽)으로 명종시대 임술년(壬戌年;1562년)에 탄생하여 숭정(崇禎)시대 을유년(乙酉年;1645년)에 타계하니, 향년 84세였다. 그에게는 장락원(掌樂院) 정(正)의 벼슬이 주어졌고, 학암서원(鶴巖書院)에 배향되었다. 『호양선생문집』의 ?우유당기?(優游堂記)에는 그가 늪실과 어떻게 관계를 맺게 되었는지에 대한 기록이 보인다.
“인산(仁山)의 아래에 눌곡촌(訥谷村;우리말로는 늪실)이 있으니 호양자(湖陽子)가 병란을 피하여 여기에 기거하여 온지 16년째 된다. 땅이 정해진 이름이 없고, 사는 사람들도 또한 끊어져서 상황을 바꾸고자하여 누곡(陋谷), 연곡(淵谷), 눌곡(訥谷) 등으로 불러 보았으나, 세상 사람들이 다 방언으로 눌곡이라 칭하였으므로 그것으로 이름을 삼았다.”
이 구절은 권익창이 눌곡촌의 개척과 관계가 있는 인물임을 말하여 준다. 당시의 상황을 보다 정확하게 알기 위하여 ?우유당기?를 조금 더 살펴보도록 하자.
“경술년(庚戌年;1610년) 봄에 손군익(孫君益)이 자제들이 노닐고 공부할 곳을 마련하기 위하여 초정(草亭) 3간을 지었었고, 호양자는 편액을 만들었으니 그 이름은 ‘우유당’이다.”
이 기록을 통하여 보면 ‘우유당’이 건립되던 시기에는 손군익 등이 늪실에 같이 기거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니 처음 병란을 피하여 늪실에 들어온 것은 ‘안동 권문’의 사람들만은 아니었던 것이라고 하겠다.
그러나 그 이후에는 상황이 달라졌던 모양이다.
“마을 호수는 15호 정도 됩니다. 모두가 집안이지요.”
권오수 씨는 그렇게 말하였다. 그러니 지금 늪실마을은 안동권씨 부정공파 사람들의 집성촌이 되어 있는 것이라고 하겠다.
‘부정공세로’
권오수씨로부터 부정공파의 역사에 대하여 중요한 것은 대충 다 들었으므로, 우리는 그만 부정공파 종가로 올라가 보기로 하였다. 종가는 권오수씨의 집 옆 쪽 우측 상방으로 붙어 있었지만, 바로 통하는 길은 없었으므로 마을 길로 나가서 돌아가야 하였다. 길은 질척거렸고, 발걸음을 떼놓을 때마다 늪실마을의 집들마다에서 강아지들이 바꾸어가며 짖어댔다.
멀리에서도 보일 정도로 커다란 글씨로 붙어있는 ‘부정공세로’라는 편액의 글씨는 가까이 갈수록 그 획 하나하나까지를 분명하게 드러내 보여주고 있었다. ‘부정공세로’의 바깥채는 축대 위에 올라서 있었고, 동향을 하고 있는 바깥 쪽 마루 끝에는 난간이 둘러쳐져 있었다. 마루 위에는 발디딜 틈도 없이 허드레 물건들이 쌓여 있어서 요즈음 ‘부정공세로’의 사랑채가 일상적으로는 거의 쓰여지지 않음을 웅변으로 증명하여 주고 있었다. 사랑채의 한쪽 끝 기둥과 사랑채의 왼쪽으로 나있는 안채로 통하는 문 옆 기둥에는 각각 하나씩 이집 주인인 권기승씨의 문패가 붙어 있었다. 그러니까 문패는 사랑채의 오른쪽 끝과 왼쪽 끝 쯤에 두 개씩이나 붙어 있었는데, 그것은 마치 주인의 부재를 문패를 여럿 붙임으로써 상쇄하려는 듯한 느낌을 가져다 주었다.
사랑채 바깥 마루의 양쪽 끝으로는 길다란 형광등이 하나씩 달려 있었는데, 그것은 앞에서 볼 때는 하나씩의 작은 동그라미와 같은 모습이었지만, 옆에서 볼때는 길다란 직선을 처마 끝보다도 더 앞에까지 내뻗는 형상이어서, 상당히 불균형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부정공세로’의 앞마당 한쪽 끝에는 흙벽돌로 지은 바깥변소가 날씬한 몸체를 하고 솟아 있었고, ‘부정공세로’ 옆쪽의 산기슭으로 면하여 있는 헛간은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은 위태로운 모습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