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인(Cain)―인류 최초의 아들이자 살인자
1. 인적 사항 ① 아담의 첫 째 아들(창 4:1). ② ‘가인’은 ‘소유’, ‘획득’이란 뜻. ③ 농업에 종사함(창 4:2). 2. 시대적 배경 아담의 범죄 결과로 에덴 동산에서 추방된 후 하나님의 저주와 말씀대로 땅을 갈며 수고로이 곡식을 거두고 살던 원시 족장시대. 가인은 이런 원시 족장 가운데서도 살인을 일으키고 멀리 도주하여 그 스스로 일가를 이루고 살았다.
3. 주요 생애 ꠆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ꠇ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ꠇ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ꠈ ꠐ 출생 ꠐ 1세 B.C. ? ꠐ 창 4:1 ꠐ ꠉ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ꠊ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ꠊ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 ꠐ 농사를 지음 ꠐ ꠐ 창 4:2 ꠐ ꠉ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ꠊ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ꠊ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 ꠐ 농산물 제사 ꠐ ꠐ 창 4:3 ꠐ ꠉ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ꠊ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ꠊ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 ꠐ 동생인 아벨을 죽임 ꠐ ꠐ 창 4:8 ꠐ ꠉ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ꠊ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ꠊ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 ꠐ 하나님의 심판 ꠐ ꠐ 창 4:9-15 ꠐ ꠉ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ꠊ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ꠊ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 ꠐ 놋 땅에 거주 ꠐ ꠐ 창 4:17 ꠐ ꠉ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ꠊ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ꠊ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 ꠐ 후손의 출생 ꠐ ꠐ 창 4:17 ꠐ ꠌ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ꠍ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ꠍ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ꠎ 4. 성품 ① 자신의 재물이 열납되지 않음을 인하여 분을 내는 독선적 성격(창 4:5). ② 제물이 열납되지 않는 자신과는 달리 제물이 열납된 아벨을 살인할 정도로 시기심이 강하고 과격한 자(창 4:8). ③ 하나님 앞에서도 동생 아벨을 살해한 죄를 감추고 거짓으로 살해치 않음을 주장하는 거짓말쟁이(창 4:9). ④ 동생의 목숨을 쉽게 빼앗으면서 자신의 목숨에는 연연해하는 이기주의 자(창4:13).
5. 구속사적 지위 ① 인류 최초로 인간끼리의 육체 관계를 통해 태어난 자. ② 선악과를 범함으로 하나님과의 수직 관계의 죄를 범한 아담의 1대손으로서, 형제를 죽여 인간끼리의 수평 관계의 죄를 범함으로 타락한 인간성의 본질을 여실히 보여준 자. ③ 극도의 죄인이나 인간사의 전개를 위하여 그 육적 생명을 하나님께 보장받는 자(창 4:15). 6. 주요 실수 ① 하나님께 순종함으로써 하나님께로부터 인정을 받으려고 는 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께로부터 인정받은 자를 죽임으로서 결국은 하나님까지 모독함. ② 하나님에 의하여 생명의 보존을 받은 후에도 그 자신의 성은 쌓으면서 하나님과의 영적 관계에는 무관심함. 7. 평가 및 교훈 ① 가인은 자신이 아담 안에서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피 없는 제물 즉 ‘땅의 소산’을 드렸다. 결과 그의 제물은 하나님께 열납되지 못하였다. 이것은 피가 죄를 속하는 바(히 9:22)아담 안에서 모든 죄인은 피 흘림으로만 하나님께 제물을 드릴 수 있었으나 가인은 자신의 뜻대로 자신의 수확을 하나님께 드림으로 거절당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양이 아닌 곡물을 바쳐서 열납되지 않았다기 보다는 양의 피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의사를 무시하고 무조건 자기가 선택한 제물로만 제사를 드림으로써 열납되지 않았다. 즉 제물 자체의 문제는 아니지만 제물을 선택할 때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에 거절당했다고 정확히 이해하여야 한다. 만약 그가 양의 제사를 드리고 거기 곁들여 자신의 곡물도 바쳤다면 하나님은 더욱 기뻐하셨을 것이다. 또한 그는 그 제사의 전 과정에서도 믿음으로 제사를 드린 것이 아니었다.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되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보혈 안에서 섬겨야 함을 배운다. ② 가인은 그의 제물이 열납되지 못한 후 분을 내고 결국 제물이 열납된 동생 아벨을 살해하였다. 성경에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엡4:26)라고 교훈하고 있다. 이것은 분을 통하여 죄를 지을 가능성이 많아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인은 그 분을 삭이지 못하고 결국 아벨을 살해하였다. 여기에서 오늘날의 성도들은 분을 내지 말고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않도록 주의하여야 하겠다. ③ 가인은 범죄 후 하나님께 책망 받을 때 그의 죄를 자백하고 용서를 빌지 않고 오히려 그 죄악성을 감추며 거짓말로 죄를 짓지 않은 것처럼 반박했다. 결과 그는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 앞에서 정죄 당하고 심판 받는 데에 이르렀다. 여기에서 우리는 다시 한번, 죄를 지을 때 그 죄를 하나님 앞에 겸손히 고백하고 용서를 빌어야 함을 엿본다. 하나님은 의로우시고 미쁘시사 죄를 자백하고 용서를 빌 때 용서하시고 죄를 사하신다(요일 1:9). ④ 가인은 하나님의 심판 후 그의 죄벌이 무거움을 인하여 하나님께 간구함으로 긍휼을 입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는 죄인을 반드시 심판하시는 분이시나 또한 그 죄인이 긍휼을 간구할 때 당신의 긍휼을 베푸시는 분이심을 엿보게 한다(창 4:13-15). ⑤ 가인은 하나님의 긍휼로 생명의 연장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그후 자신의 근본적 죄까지도 참회하여 영원한 사죄까지 얻어야 했으나 당장의 목숨 보존에만 만족하여 근본적 회개에는 이르지 못하였다. 또한, 그 자신 그리고 그의 계통의 후손들은 놀라운 물질 문명의 발전을 가져 왔으나 신앙의 참 가치와 축복을 얻는 자의 무리에서는 제외되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은 이 땅에서의 축복은 물론 영생까지 주실 수 있는 분이신 데 그분에게서 이 땅에서의 축복만 구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임을 깨달아야 한다(딤전 6:17-19) 8. 핵심 성구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하신 지라 가인이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창 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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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넓히기-성화聖化를 위한 성경인물과의 만남 (1) 가인- 분노, 시기 < 성경에 나타난 미성숙한 인격과 생각이 빚어낸 고통과 아픔들 > 오늘 다시 가인을 만납니다. 가인의 분노와 질투, 살인을 저지르게된 그 사건을 먼저 분석해보고자합니다. 오늘은 마음 분석, 감정 분석, 분노 분석이 아니라 사건 분석만 하려고 합니다. 가인은 아담의 첫째 아들입니다. 그리고 아벨은 둘째 아들입니다. 이름의 뜻이 깊습니다! 가인 קַ֔יִן Cain 소유 possession / 아벨 הָ֑בֶל Abel 호흡 숨, Breath 가인의 살인 사건은 참으로 심리학적으로 인간학적으로도 많은 연구가 있는 인류최초의 자료입니다! 모든 인류심리학에서 한번은 언급하고 지나가는 사건입니다. 사건을 다시 살펴봅니다. 아벨은 양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습니다. 가인이 먼저 제사를 드렸습니다. [창4:3]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창4:4]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창4:5]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顔色)이 변하니 문제는 가인의 제물을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시고 아벨의 제물만 받으시자 분노와 질투심 때문에 가인이 아벨을 죽인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아벨의 제물만 받으셨을까요? 믿음과 행위가 달랐습니다. [히 11:4]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하심이라 저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오히려 말하느니라 행위도 달랐습니다. 실천의 영성이 달랐다는 뜻입니다. [요일 3:12] 가인같이 하지 말라 저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 어찐 연고로 죽였느뇨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그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이니라 히브리서는 믿음으로 더 나은 제사를 드렸다고 말하고 있고 요한일서는 아벨의 행위는 의롭고 가인의 행위는 악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믿음이 달랐고 행위가 달랐습니다! 이 사건에 대한 오해가 종종 있는데 제물의 종류 때문이라는 해석입니다.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러니까 흔히 말하듯 제물의 문제( 고기, 곡식)이 아니었습니다. 4절 הֶ֖בֶל וְאֶל־ מִנְחָתֹֽו (헤벨 워엘 민하토) 아벨‘과’ 그의 제물 5절 קַ֥יִן וְאֶל־ מִנְחָתֹ֖ו (카인 워엘 민하토) 가인‘과’ 그의 제물 [창4:4] Abel and to his offering [창4:5] But unto Cain and to his offering 삶의 태도와 자세 자체가 문제였던 것이었습니다. 단순히 제물의 문제가 아니라 삶 전체가 제물이요 제사인데 받을만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로마서의 말씀입니다! [롬12: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기억해야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무슨 제물이든지 다 받으시는 것은 아니라 때로는 받지 않으시고 거부하시기도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구약성경은 우리의 기도나 제물을 하나님께서 열납(悅納; 기쁠 열, 받으실 납, <영> acceptable) 해주시기를 원하는 기도가 많았습니다. [시19:14]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속자이신 여호와여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님 앞에 열납(悅納)되기를 원하나이다 또 성경은 하나님께서 제물을 흠향하기도 하시지만 흠향하지 않으시기도 함을 분명히 말합니다! 흠향(歆饗)은 향이라는 발음 때문에 혼동하기 쉽지만 향기(香氣)와는 다른 단어입니다. 드린 제물을 기쁜 마음으로 누리신다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 기쁜 마음으로 받으시는 것이 중요합니다. ▷ 歆 흠향할 흠 ㉠흠향하다 ㉡부러워하다 ㉢움직이다 ▷ 饗 잔치할 향 ㉠잔치하다 ㉡흠향하다 ㉢대접하다 ㉣누리다 ㉤드리다 ㉥마시다 ㉦제사 지내다 성경에서는 하나님께서 사람이 드린 제물을 기쁘게 받으신다고 할 때 쓰였습니다. 사실 식인종도 아닌데 동물을 태우는 제물의 냄새가 뭐가 그리 향기롭겠습니까? 그런데 그 자신을 태우는 간절한 마음이 있었기에 그것을 받아주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전혀 기쁘지 않을 수도 있었습니다. 마음이 안담기고 믿음과 행위가 안담기면 그렇습니다! [레26:31] 내가 너희의 성읍을 황폐하게 하고 너희의 성소들을 황량하게 할 것이요 너희의 향기로운 냄새를 내가 흠향(歆饗) 하지 아니하고 ( I will take no delight) 가인의 제사는 아쉽게도 그렇게 흠향되지 못하고 열납되지 못한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 우리 카인의 후손이기도합니다. 가인은 표를 받았습니다. 생존을 위해 하나님께서 주신 표이기는 하지만 동시에 살인자의 DNA가 그의 몸에 있었습니다. 가인은 주홍글씨 같은 낙인을 찍은 표를 품고 세상을 방황합니다. 우리의 심령에 바로 이 가인의 DNA가 새겨져 있을지도 모릅니다. 우리의 혈관에 바로 이 카인의 피가 흐를 수 있습니다. 아니, 아마 그럴 것입니다. 소유욕, 분노, 질투, 산 제물로 살지 못한 생애, 흠향되지 못하고 열납되지 못한 생애... 우리 속에 있는 가인의 본성... 우리 피에 흐르고 있는 카인의 분노와 질투와 시기... 그런 우리를 주님께서 구원해주셨습니다! 그 피는 카인의 피보다 더욱 강력한 사랑의 피요, 은혜의 피! 거룩한 보혈이었습니다! 예수님의 피로! 예수님의 피로! 예수님께서는 그 거룩한 사랑의 보혈로 내 속에 흐르고 있는 가인의 피를 정케 하시고 새로운 성품을 향하여 나아가게 하셨습니다. 그 주님의 은혜가 우리를 새롭게 출발하게 하셨습니다! [출처] 마음 넓히기 성경인물 연구(2) 가인|작성자 CYAN 물빛 ----------------------------------------------------------------------------------------
성경인물설교(3) 가인(창4:1-26) ● 성경을 읽는 사람들이 느끼기에, 창세기 4장의 내용은, 창세기 3장에 나오는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고 범죄, 타락하는 장면보다 더욱 심각하고 안타까운 범죄와 타락의 장면이 아닐 수 없다. 타락 이후, 인간 속에 들어온 죄악은, 인간 최초의 죽음인 아벨의 죽음이 자연사가 아니라 살인사건으로 몰아가게 된다. 뿐만 아니라 인간의 역사는 가인 계통을 주축으로 급전직하, 악화 일로를 걷는다. ● 아담과 하와의 첫째 아들 ‘가인’이 태어났다. 하와는 첫 아들을 출산한 후 얼마나 기뻤던지,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고 말하며, 인류의 첫 열매를 주신 여호와의 은총에 감사하여, ‘하나님의 은총으로 말미암아 얻은 자’라는 뜻으로 이름으로 ‘가인’으로 지었다. 가인은 ‘소유하다. 얻었다.’ 라는 뜻. 가인의 동생 아벨도 태어났다. 아벨은 양 치는 사람이 되었고, 가인은 농사를 지었다. 세월이 지나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아벨은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제사를 드렸다. 사실 성경에는 두 사람의 제물 자체에 대해 어떤 평가도 내리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피 흘린 양의 제사를 기뻐하셨기 때문에 아벨의 제사를 받으시고, 피 흘림이 없는 농산물의 제사는 좋아하지 않으셨기 때문에 가인의 제사가 열납 되지 않은 것이 아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농산물의 제사를 싫어하셨다면, 레위기에서 고운 가루나 기름, 유향 등으로 제사 드리는 것을 금지하셨을 것이다. 히브리서 11장에 보면, 아벨의 제물이 열납 된 이유는 그의 믿음 때문이었다. 아벨은 자신의 죄인 됨을 깨닫고 하나님의 은총과 도움을 바라는 겸허한 심령으로 정성껏 제물을 골라 믿음으로 바쳤기 때문에 그 제사가 열납 된 것이다. 이것은 4,5절의 내용을 자세히 상고하면 잘 알아차릴 수 있다. 여호와께서는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으나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하셨다. 즉, 단순히 제물의 문제가 아니라, 제물 이전에 그것을 바치는 사람의 마음 자세, 정성, 믿음, 삶의 태도를 보신 것이다. ‘열납하다’의 원래 뜻은 ‘응시하다. 주목하다’라는 뜻 - 곧 하나님께서 제사를 드리는 사람을 주목하여 보신다는 뜻이다. 아무 제사, 제물이나 받으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잘 주목하여 보사, 받으실만한 제사를 받으신다는 것이다. ● 왜 가인의 제사는 열납되지 못했는가? 창세기 4장에서 그 까닭을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제사 이후에 드러난 가인의 행동을 통해, 가인의 제사를 기뻐하지 않으신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가인은 농사를 짓고 있었으니 당연히 땅의 소산물을 제물로 바쳤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아벨의 제물만 받으셨다. 이때 가인의 심정이 어떠했을까? “아니, 이럴 수가. 나 이거야 원, 창피해서 못살겠네. 내가 그래도 장남인데 내 제물은 쳐다보지도 않으시다니. 하나님이 어쩌면 저렇게 편애하고 불공평하실 수가 있나. 내가 뭘 잘못했다고....” 편애를 당해본 사람은 안다. 그것이 얼마나 사람을 비참하고 우울하게 만드는지를. 부모로부터, 특히 가까운 형제와 비교되어 열등한 존재라는 것이 낙인찍히는 것처럼 큰 상처가 있을까? 가인은 하나님께 화가 치밀었다. 아니 어쩌면 자기 자신에게 화가 났는지도 모른다. 인간은 자신의 기대가 좌절될 때 화가 나는 것을 보통으로 경험한다. 때로는 극도로 분노하여 이성을 잃게 되고 인간관계에 상처를 주는 일도 자주 일어난다. 화가 나는 것 자체는 어찌할 수 없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자신의 마음을 어떻게 조절하고 다스리는가’ 하는 점이다. 가인의 분노의 화살은 전혀 엉뚱한 곳으로 날아갔다. 가인은 하나님의 사랑을 독차지한 아벨을 질투하고 미워했다. “아벨, 저놈 때문이야. 저놈이 나타나면서 모든 게 뒤틀어졌어. 저놈을 없애는 것만이 내가 살길이야.” 미움과 시기는 어느덧 살기를 띠게 된다. 가인은 아벨의 행동이 못마땅한 것이 아니라 그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고 싶었다. 그래서 결국 가인은 동생 아벨을 살해한다. 가인은 동생을 땅에 묻은 후에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 계속 자신이 잘한 행동이라고 생각했을까? 가인은 정신을 차린 후, “아니, 내가 무엇을 한 거지. 동생을 죽이다니. 내가 화를 참았어야 했는데...” 하며 후회했을 것이다. 그러나 땅을 치면서 눈물을 흘리며 후회해도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자신이 죽도록 밉고 싫어졌을 것이다. 사실 아벨은 아무런 잘못이 없었다. 하나님께 드리는 진실한 감사와 믿음의 제사는 칭찬받아 마땅한 것이었다. 하나님께서 믿음이 담긴 아벨의 제물만을 받으신 것은 공평한 처사였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에서 칭찬받는 사람 곁에 소외되고 상처받는 이도 함께 존재하는 것도 사실이다. 동생 아벨은 형 가인의 상처받은 마음을 얼마나 알고 배려했을까? 내가 독차지한 사랑 때문에 가슴 시리고 아픈 이들은 혹시 없는가? ● 가인은 자기 자신을 똑바로 보지 못했다. 그의 시선은 자신보다 밖을 향해 있었다. ‘나는 왜 화가 났는가?’ ‘동생 아벨이 과연 무엇을 잘못했는가?’ ‘왜 나는 큰 잘못도 없는 가족과 형제를, 이웃을, 함께 신앙생활하고 있는 성도들을 시기하고 질투하고 공격하는가?’ 일반적으로 그것은 마음의 상처 때문이다. 이유모를 분노와 폭력도 마음의 상처 때문인 경우가 많다. 인간은 누구나 마음의 상처가 있다. 일생을 지내오면서, 참으로 험악하고 살벌한, 전쟁터와 같은 삶의 현장에서 인간은 누구도 예외 없이 수많은 마음의 상처와 억압된 한이 서려있게 마련이다. 그래서 우리 마음 안에 상처받은 가인이 서 있고, 피투성이가 된 아벨이 쓰러져 있다. 가인의 문제가 어디에 있는가? 어리석고 부족한 인간이기에 사람은 분을 낼 수 있다. 분냄 자체가 모두 죄는 아니다. 예수님께서도 때로는 의분을 내시지 않았는가? 성경은 뭐라고 권고하는가? ‘분을 내어도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다시 말해, 분을 조절하고 삭이지 못하면, 즉 신앙의 눈으로 그것을 재해석하여 승화시키지 못한 채 계속 품고 있으면, 그것을 통해 사람들이 죄를 지을 가능성이 많아진다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심지어 원수까지도 직접 자신의 손으로 갚지 말고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손에 맡기라고 말씀하신다.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고 말씀하신다. 그렇다면, 분을 삭이지 못하고 계속 품고 있다는 것은 믿음 없음의 증거이다. 마음의 상처도 마찬가지다. 마음의 상처 없이 살아가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그 상처를 주님 앞으로 가져와 다 내려놓고, 눈물로 기도하며 주님께서 주시는 위로의 능력으로 상처가 치유되고, 원망과 분노와 폭력과 파멸에서, 용서와 이해와 감사와 헌신과 사랑으로 승화시켜 나가는 것이 하나님의 자녀의 참모습이요 믿음의 증거가 아니겠는가? 무엇 때문에 오늘도 날이 어둡도록 분을 마음에 품고 살고 있는가? 어떤 마음의 상처가 더욱 자신을 쓰리고 아프게 하고 있는가? 이제 고통을 감수하고 마음의 눈을 뜨자. 상처 난 내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자. 주님 앞에 마음을 쏟아 놓자. 그리하여 결코 세상이 치유할 수 없는 그 아픔과 고통들을 주님의 인자한 품안에서 치유 받도록 하자.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11:28)” 가인을 보라. 하나님께서 가인을 돌이키시기 위해 얼마나 애쓰시는가. 6절 이하를 보라! ‘네가 왜 분을 내느냐? 왜 안색이 변하고 불평불만이 가득하냐? 네가 선을 행한다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언제 죄에 빠져들지 모른다. 죄의 유혹이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려라.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도대체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얼마나 잔소리 같을 정도로 회개의 기회를 주시고 있는가! 만일,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고 말씀하시는 그 마지막 하나님의 음성에라도, “여호와 하나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저를 용서해 주세요. 제가 분노에 눈이 어두워 동생 아벨을 죽이고 말았습니다. 저를 용서해 주십시오.” 하며 가인이 죄를 자백하고 회개하며 용서를 빌었다면 상황은 180° 달라졌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가인이 돌아오기를 기다리셨는지 모른다. 그러나 가인은 하나님께 어떻게 대꾸하고 있나? “나는 모릅니다. 내가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 결국, 첫 사람 아담과 하와에게서 출생한 첫 후손 가인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지 못한 채, 회개하지 않는 독선과 분노의 화신이 되어, 일생 죄책감, 공포감, 불안감에 사로잡혀 안식 없는 저주의 삶 속으로 걸어가게 된다. 16절 이하에는 가인의 후손들이 그들의 땅에서 나름대로 문명과 문화를 창출해 가면서 번성해 가는 장면이다. 하지만 ‘여호와 앞을 떠난’(16절) 가인 후손들의 문명은 인간을 위한 세속적 문명일 뿐 결코 여호와를 위한 문명은 아니었다. 즉 죄의 영향 하에 놓인 교만과 타락 및 방종의 문명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라멕의 노래(23,24절) 속에서 잘 드러난다. 복수하고 원수 갚겠다는 가사 내용이 극악잔인무도하다. 하지만 본문 중 우리는 어둠을 밝히는 촛불처럼 비록 미약하나마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26절) 거룩한 씨의 역사가 이어짐을 본다. 곧 가인의 후손들에 의한 죄악과 세속의 문명이 창궐하던 시대 속에서도 하나님께서는 ‘여인의 후손’(3:15) 언약을 따라 거룩한 씨를 보존하사 인간 구속의 역사를 펼쳐 나가고 계신 것이다.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26)는 것은, 셋 시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구속주 여호와께 기도와 찬양, 그리고 감사와 간구가 있는 공식적인 예배를 연합으로 드렸다는 뜻이다. 가인의 후예들이 성을 쌓고 악기와 무기를 개발하는 등 세속 문명을 발전시킴으로써 세상 왕국의 기초를 다져 가는 동안, 셋의 후예들은 여호와께 감사와 찬양을 연합으로 드림으로써 하나님 왕국의 기틀을 세우기 시작했던 것이다. 오늘 우리는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기 위해 이 자리에 모인 사람들이다. 영적 셋의 후예들이다. 가인의 후예들이 죽음에 이르는 노래를 부르고 있으나 우리는 생명에 이르는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이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저주 가운데 쫓겨나가는 가인조차도 불쌍히 여겨 목숨을 살려주심같이, 우리도 저 수많은 영혼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중보의 기도를 드려야겠다. 열심히 복음을 전하고 사랑을 실천해야겠다. 뿐만 아니라, 내 속에 끊임없이 분출하는 가인의 모습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의 공로로, 성령의 능력으로 극복할 수 있도록, 늘 겸손한 마음, 회개 자복하는 심령으로 주님 앞에 나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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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인의 후손이 만든 세상 창4:16-24 지난 주엔 창세기 4장 전반부에서 가인과 아벨의 제사와 가인이 동생을 죽인 사건과 그에 따른 가인이 받은 형벌까지 살펴봤습니다. 오늘은 가인이 죄의 벌로 하나님과 부모로부터 쫓겨나 방랑자가 된 후 하나님 없는 땅에 정착하면서 여러 대로 이어지는 가인 후손들이 만든 세상을 살펴보면서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어떤 특성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알아보겠습니다.
밀림을 통과해서 마을로 가려는 여행객은 밀림의 특성을 잘 알아야 목적지까지 무사히 갈 수 있습니다. 밀림은 생각보다 위험 요소가 많습니다. 맹수들도 있고, 독을 품은 각종 식물이나 해충들도 있고 늪지도 있기 때문에 잘못하면 마을에 도착하기 전에 밀림에서 해를 당하거나 길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지난 주 정법을 보니 20년된 원주민 안내인도 길을 잃어 목적지를 찾아가지 못하는 걸 봤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밀림이라는 세상을 거쳐서 하나님 나라를 가는 순례자입니다. 그러니 세상을 통과해 천국에 도착하기까지 세상의 특징을 잘 알고 위험한 것은 피해가는 게 상책입니다.
자연 만물로서 세상은 하나님이 창조하셨지만, 그 안에서 살고 있는 인간사회로서 세상은 주로 하나님을 떠나 독립한 사람들이 주도적으로 만들어왔습니다. 그 선구자는 가인과 가인의 후손들이었습니다. 지금도 그 시대마다 주류적인 문화를 만들어 가는 사람들은 바벨탑 이후 흩어진 가인의 후예들입니다. 혈통이 그렇다는 것이 아니고 인간 중심적 사회를 만든다는 차원에서 아벨의 후손이 아니라 가인의 후손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배후엔 하나님을 대적하는 마귀의 세력이 작용하고 있습니다.
바벨탑은 상징적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보호를 믿지 못해, 심하게 말하면 더 이상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독립해서 스스로 자신의 안전을 지키며 생존하겠다는 인간의지의 표현입니다. 여기엔 하나님께 영광 같은 건 안중에도 없고 인간이 중심이 되고 인간의 힘과 능력이 과시되고 인간 자신들에게 영광을 돌리는 게 목적입니다. 이 세상은 원시시대나 현대나 하나님을 떠나 독립한 가인의 후손들이 만들어 온 세상입니다. 오늘 가인 후손의 이야기는 세상의 특성을 이해하는데도 도움이 될 것입니다.
가인은 자신의 제사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는데 동생 아벨의 제사는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시자 분노와 시기심이 일어나 동생 아벨을 들로 데려가 죽였습니다(8절) 하나님은 가인에게 아우는 어디있느냐고 물었습니다. 이 질문은 가인에게 잘못을 깨닫고 돌이길 수 있는 기회를 주시는 질문이었습니다. 그러나 가인은 왜 아벨을 나에게 와서 찾느냐며 전혀 아는 바가 없다고 잡아 땠습니다. 죽어도 아니라고 부인하고 보는 게 죄인의 속성이죠. 그러자 하나님은 아벨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10절). 이것은 무죄한 자를 피흘리는 죄를 하나님은 모른척 넘어가지 않으신다는 걸 보여줍니다.
살인자가 된 가인에겐 저주가 선언되었습니다(11절). 저주라는 말은 ‘남에게 재앙이나 불행이 일어나도록 빌고 바라는 행위, 또는 그 결과로 일어나는 재앙이나 불행을 의미합니다. 농사군이었던 가인에게 땅이 더 이상 효력을 내지 않는다는 것은 땅을 의지하고 살 수 없게 되어 여기 저기 떠돌아 다니며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에게 자기가 태어나고 자란 땅은 어머니의 품과 같은 곳입니다. 오늘날과 같이 도시 문화 속에 사는 사람들도 이곳 저곳 떠돌며 사는 것은 정서적으로 불안하고 인간관계도 어렵죠. 그 당시로서는 고향 땅을 강제로 떠나는 추방은 가혹한 처벌이라고 생각할 만합니다.
가인은 자기가 받을 형벌이 너무 가혹하다고 불평하고 낯선 땅에서 해를 당할지 모른다고 하소연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가인을 해하는 자는 일곱 배로 벌을 받을 것이라는 표식을 주어 누구든 가인을 죽이지 못하게 조치하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궁금한 점은 당시 사람이라고 해야 아담과 이브와 가인과 아벨이 전부였는데 누구 있어 가인에게 보복을 한다고 가인은 그런 말을 했을까요? 이 부분은 성경의 난해 구절 가운데 하나인데, 몇 가지 견해를 소개하면, 장차 태어날 아담의 또 다른 후손을 염두에 둔 말이다(Delitzsch), 들짐승을 가리킨다(Josephus), 이미 아담과 하와 사이에 태어난 다른 자녀가 있었을 것이다(Havernick) 이렇게 설명합니다.
가인은 고의적인 1급 살인죄를 범했으니 사형에 해당하지만, 하나님은 아담과 이브를 생각해 방랑자로 살면서 참회할 기회를 주신 게 아닌가 싶습니다. 가인이 집에서 쫓겨날 때 제일 가슴 아픈 사람은 어머니 이브였을 것입니다. 동생을 죽였다고 해도 어머니에겐 아들이 벌을 받아 집에서 쫓겨나는 걸 볼 때 얼마나 가슴이 아팠겠습니까? 가인의 악한 행위만 놓고 보면 쫓겨나는 벌이 부족할 정도지만, 어머니 이브에겐 참 안 된 일이었습니다. 여러분도 어머니를 생각해서라도 잘 살기 바랍니다.
16절엔 가인이 여호와를 떠나 에덴 동쪽 놋 땅에 거주했다고 나옵니다. ‘떠나다’는 말 ‘야차’는 ‘달아나다’, ‘피하다’(렘11:11)는 뜻도 있습니다. 가인은 하니님께 쫓겨나기에 앞서 마음 속으로는 자기가 먼저 하나님을 떠나 멀리가서 하나님과 상관없이 살겠다는 생각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 다음 ‘거주하다’는 단어 ‘야솽’은 ‘계속 정착하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유리하는 자가 되라는 하나님의 뜻을 거부하고 다시 한 곳에 안주하여 살려고 성까지 쌓고 있었습니다(17절).
가인은 하나님께 쫓겨나기 전에 자기가 먼저 하나님을 버리고 하나님을 떠나 살기로 결심한 것 같습니다. 이처럼 가인으로 상징되는 인간형은 자기 중심적이며 자기 욕망을 위해서는 하나님도 무시하고 자기들만의 세계를 만들어 독립해 살려는 사람입니다. 세속적 문화들은 대부분 이런 사람들이 만들어 온 것입니다. 고대도시부터 현대 도시에 이르기까지 도시문화는 거의 모두 인간의 힘과 능력을 과시하며 자기 영광을 추구하는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졌습니다.
17절에 가인이 성을 쌓았다고 한 것은 영어 번역을 보면 도시를 건설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가인과 그 후손들은 자기들 방식으로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기 시작했습니다. 아담과 이브, 그리고 가인과 아벨이 아무런 문제 없이 에덴 동산에 그냥 살았다면 이런 도시 건설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인구 수가 계속 증가하면 그 다음엔 어떤 형태로든 인공이 가미된 생활방식이 생겨났겠지만, 하나님으로부터 독립해서 인간이 중심이 되는 그런 도시 문화가 그렇게 빨리 생겨나지는 않았겠죠.
놋 땅으로 이주한 가인은 아내와 동침하여 에녹을 낳았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앞서 가졌던 의문 가인과 아벨 외에 또 누가 있었는가를 이해할 수 있는 단서를 발견합니다. 가인이 아내와 동침해 에녹을 낳았다고 한 걸 봐서 성경엔 언급되지 않았지만 이브가 낳은 딸이 최소한 한 명은 있었다고 해야 할 것 같고 그런 관점에서 가인과 아벨 외에 다른 아들들도 있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고대 사회에선 친족이나 부족간에 결혼은 자연스러운 것이었습니다.
그 다음 18절부터 24절까지는 가인부터 시작해 에녹, 이랏, 므후야엘, 므드사엘, 라멕, 야발과 유발 / 두발가인과 나아마까지 7대에 걸쳐서 가인이 아들과 손자들을 얻은 기록이 나옵니다. ‘에녹’은 ‘시작’이라는 뜻입니다. 가인이 아들 이름을 ‘시작’이라고 지은 것은 인생을 다시 시작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이것은 또한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인간 계보가 시작된 것을 시사합니다. 특히 5대 후손 라멕은 일부일처를 깨뜨리고 자기 욕망에 따라 두 여인을 아내로 둔 첫 케이스입니다. 첫째 부인 아다의 장자 야발은 천막에 살면서 짐승 치는 유목민들의 조상이 되고, 그의 동생 유발은 수금을 켜고 퉁소를 부는 기악인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둘째 부인 씰라의 아들 두발가인은 구리와 쇠로 철 연장을 만드는 대장장이 일을 했습니다.
우리는 라멕의 아들에게 와서 나름 서로 다른 세속적인 전문직업이 생겨난 걸 볼 수 있습니다. 천막 짜는 기술이든, 목축일이든, 악기를 다루는 재능이든 철 연장을 만드는 기술이든 무슨 일을 하느냐에 따라 평가되는 사회가 시작된 겁니다. 이런 사회에선 아무 것도 하는 일이 없는 사람은 무익한 존재로 취급당합니다. 이런 사회에선 인간이라는 사실 만으로는 존귀한 존재가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은 인간을 도구적 가치로 평가하는 사회를 만듭니다.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반성하건데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신학적 혹은 철학적 고찰이 없이 그냥 세속적 관점을 받아들이고 사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무엇을 하느냐에 따라서 가치 있는 사람인지 무용한 사람인지 차별합니다. 평생 수고롭게 일했으니 마땅히 쉬면서 대접받아야 부모님들을 부담스럽게 생각하고 그런 대접을 받다 보니 자괴감이 들어 이젠 쓸모 없는 사람이 되었다고 한탄하게 만듭니다. 이것은 하나님 자녀들이 지켜야 할 문화는 아닙니다. 인간의 가치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다는 사실에 있는 것이지 무슨 일을 하느냐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하나님은 컴퓨터를 잘 다루든지, 음악을 잘 한다고 더 가치있게 평가하시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하는 일로 사람으로 대우합니다. 지금 세계적으로 유명인사들은 물건을 만들어 돈을 많이 버는 사람들, 예컨데 가인의 후예들입니다. 빌게이츠는 컴퓨터 관련 제품(Software)을 만들어 돈을 벌어 세계 1등 부자가 되어 최고 대접을 받으며 살고 있습니다. 그 외에 자동차 만들어 부자된 사람들, 스마트폰 만들어 부자된 사람들, TV만들어 부자된 사람들, 항공기 만들어 부자된 사람 등 모두 그들이 한 일 때문에 대접받습니다. 여러분들도 이런 세상에서 성공하려고 공부하고 일하고 있잖습니까? 이런 곳에서 대개 하나님의 뜻이니 하나님의 나라니, 옳고 그른 인생이니 뭐 이런 건 없습니다.
기계나 물건을 소유하는 것을 중시하는 사회에서 물질적 풍요를 추구하며 사는 사람들에게는 성경적 하나님은 그들에게 너무 매력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을 찾지 않거나 찾을 경우는 하나님의 이미지를 바꾸려고 들겠죠. 그것이 바로 세속적 축복을 가져다 주는 물질중심의 하나님입니다. 요즘 많은 설교에서 전후 문맥 없이 이렇게 물질로 복주시는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를 쉽게 들을 수 있을 겁니다.
물론 기독교는 물질을 악으로 보지 않습니다. 물질 그 자체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선한 것이며 인간의 생존에 필수적인 것입니다. 문제는 물질에 대한 인간의 과도한 탐욕입니다. 인간이 하나님보다 물질을 더 열망하면서 물질은 우상이 되어버리고 그렇게 될 때 물질은 악한 기능을 하게 됩니다. 물질 자체는 악한 것이 아닌데 인간의 탐욕이 물질을 하나님자리에 올려 놓기 때문에 물질중심의 사회는 반기독교적인 성향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태어나면서 선택의 여지 없이 이 물질 중심의 사회 속에 편입됩니다. 물질 중심의 세상이 문제가 있다는 걸 알지만 그걸 거부하기엔 세상은 너무 강하고 개인은 너무 약하기 때문에 생존의 과정에서 물질 중심의 사회에 적응하거나 약간의 양심을 유지하면서 적당히 타협하며 살아갑니다. 물질 중심의 가치관 내지 생활방식은 가정과 학교에서 자녀들에게 심어집니다. 이런 사이클을 통해 우리는 물질 중심의 사회에서 탐욕을 정당화하며 살고 있습니다.
예수 믿고 거듭난 후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며 예수님의 가르침에 근거하여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은 문제가 보이기 시작할 것입니다. 물론 물질중심의 세상과 타협한 교회에서 신앙생활하고 있는 교인들 중에는 그게 뭐가 문제냐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을 읽고 묵상하는 그리스도인들은 머잖아 심령이 가난한 자들의 하나님 나라와 물질적 탐욕을 추구하는 세상 사이에 끼어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한계를 정직하게 인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 중에 누구도 물질적 필요에 대해 자유롭지 못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독립해 살려는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세상의 시스템 속에서 생존해야 합니다. 그런 사람들이 도시를 건설하고 자동차를 만들고 컴퓨터를 보급시키고 스마트폰을 사용하지 않을 수 없는 사회를 만듭니다. 사람들은 그걸 구입할 돈을 벌기 위해 또 일합니다. 집이든 자동차든 더 좋은 물건을 얻기 위해 우리는 일하다 늙어갈 것입니다.
뭘 그렇게 따지며 살 게 있나 그런 생각을 하는 분도 있겠죠. 이건 따져서 그런 생각이 드는 게 아니고 참 신앙에 대해 고민할 때 따라오는 생각입니다. 본래는 어떻게 하면 이 세상에서 진짜 예수님을 잘 믿고 따라갈 것인가 생각한 것인데, 그러다 보니 이 세상이 어떤 속성을 가지고 있고 무엇이 예수님을 따르는데 힘들게 하는가 그런 차원에서 물질중심의 세상이 문제라는 걸 인식하게 되는 겁니다.
교우 여러분,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가 사는 세상이 얼마나 하나님을 멀리하고 하나님으로부터 달아나려고 하는 지 볼 수 있었습니까? 어떻게 살 것인가는 항상 우리 자신의 몫입니다. 설교자는 더 힘써 자기가 설교한 말씀대로 살아야 합니다. 설교를 듣는 분들 또한 듣고 감명받은 것으로 끝나면 자신을 속이는 것과 다를 게 없습니다. 설교를 듣고 감명을 받을 때는 설교자를 칭찬할 게 아니고 그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는 부담을 느껴야 합니다. 감명이란 성령께서 그 말씀대로 살라고 깨우쳐주시는 것입니다.
앞으로 세상은 지금보다도 더 물질 중심적인 사회가 될 겁니다. 그 어느 세대보다 여러분은 돈과 물질에 더 얽매여 살 게 될 것입니다. 이미 그렇게 얽매여 사는 게 보입니다. 하나님을 잘 믿고 섬기는 신앙생활과 물질 중심의 세상에서 한 평생 남부럽지 않게 살아보고 싶은 사회생활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것은 어느 한쪽을 택하는 것보다 더 어렵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중용의 미덕을 말하지만, 신앙생활과 사회생활 사이에는 이걸 적용하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어떻게 살 것이냐는 우리 각자의 몫입니다. 좁고 험해도 생명의 길을 찾아가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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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인의 아내 | 박창성 세계창조선교회 회장 지구과학 지질학 전공 한국창조과학회 명예이사 | | 아담의 첫째 아들 가인은 어디서 아내를 구했습니까? 아담의 후손들 이외에도 다른 부족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성경에 이름이 기록된 아담의 제1세대 자손은 맏아들 가인과 그리고 그의 남자 동생들인 아벨과 셋 뿐이기 때문에 이들이 누구와 결혼하였는가에 대해 의문이 생기는 것은 당연합니다. 이 문제로 인해서 성경의 창세기를 역사적 사실로 믿지 않는 분들이 많을 뿐만 아니라, 무신론자들은 이것을 근거로 하여 아담과 하와를 모든 인류의 조상으로 기록한 성경을 공격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경 안에는 이 문제에 대한 충분한 해답이 들어 있습니다. 이 3명의 아들 이외에도 다른 아들과 딸들이 있었음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창세기 5장 3-5절에는 ”아담이 일백 삼십 세에 자기 모양 곧 자기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 아담이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가 구백 삼십 세를 향수하고 죽었더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담이 모두 몇 명의 자녀를 두었는지 성경에는 적혀져 있지 않지만, 아담이 930세까지 살았다는 점과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창세기 1:28)고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것을 생각해보면 많은 자녀들을 낳았으리라는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유대인 역사학자인 요세푸스(Josephus)는 그가 쓴 책에서, 오래 전부터 유대인들 사이에 전해 내려오는 말에 따르면, 아담의 자손은 33명의 아들과 23명의 딸들이 있다고 기록하였습니다.
이것으로 보아 아담이 셋을 낳기 전 130년 동안에도 아들, 딸들을 많이 낳았을 것입니다. 특별히 셋의 이름만이 나타나 있는 것은 그의 후손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성경에는 가인의 결혼에 대한 자세한 언급이 없지만, 가인의 아내는 그의 여동생들 중의 한 명이었을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다음과 같은 이유를 들어서 아담과 하와의 혈통을 이어받은 후손들 이외에 다른 부족들이 있었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1) 모세의 율법(레위기 18-20)에 근친결혼이 금지되어 있는데 어떻게 오빠와 동생이 결혼할 수 있습니까?
처음에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지으신 후, 한 남자가 한 여자와 결혼하라고 하셨을 때는 근친결혼이 하나님의 법을 어기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이 그의 이복 여동생과 결혼한 사례(창세기 20:12)를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근친결혼을 금지하신 것은 모세 때부터입니다. 오늘날에도 오누이간의 결혼은 법으로 금지되어 있는데 그 이유는, 근친결혼일수록 유전병에 걸리거나 정상적이지 못한 자손을 낳을 가능성이 많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처음에 사람을 창조하셨을 때는 완전하게 창조하셨습니다. 그런데 아담이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죄를 지었고, 하나님께서 벌로서 이 땅에 내리신 저주로 말미암아 오늘날의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유전자에는 돌연변이로 인한 많은 결함들이 포함된 것입니다. 사람들의 유전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로부터 각각 물려받기 때문에 2개씩 짝을 이루고 있는데, 이중에서 어느 하나가 결함이 있는 유전자라고 할지라도 좋은 유전자가 결함이 있는 유전자보다 강해서 결함이 겉으로 나타나지 않으나, 친족들 중에는 결함이 있는 같은 유전자를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근친결혼을 할 경우, 결함이 있는 유전자끼리만 만나서 정상적이지 못한 자손을 얻을 확률이 높아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가인을 비롯한 처음 세대들은 아직 결함이 있는 유전자가 문제를 일으킬 정도로 많이 누적되지 않은 상태였고 사람들의 수가 아직 많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근친결혼을 허락하셨으나, 그후 오랜 세월이 지나서 사람들 몸에 결함이 있는 유전자가 점점 많아지고 사람들의 수가 충분히 늘어나게 되자,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근친결혼을 금지하는 율법을 주신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2) 창세기 4장 14절에서 가인이 다른 사람들이 자기를 알아보고 죽일까봐 겁을 낸 것은 아담의 후손이 아닌 사람들이 많이 살고있었다는 이야기가 아닙니까?
가인을 죽이려고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벨과 가까운 관계에 있는 사람들일 것입니다. 전혀 낯선 사람들이라면 관심을 가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다른 종족일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아담이 130세 때 셋을 낳았는데 하와가 ”하나님이 내게 가인의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창세기 4:25)고 생각한 것으로 보아, 셋이 태어나기 얼마 전에 아벨이 죽었다고 가정한다면, 가인의 출생과 아벨의 죽음 사이에는 100년 이상의 시간적 간격이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사이에 아담의 후손들이 충분히 많이 퍼져있었을 것입니다.
흔히, ”가인이 아내를 어디서 구했겠느냐, 아담과 하와 이외에 혈통이 다른 부족들이 먼저 있었을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인간이 유인원에서 진화하였다고 믿고,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아담과 하와가 우리의 조상이라고 기록한 성경을 의심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아담과 하와가 모든 인류의 조상이라는 사실을 부인할 만한 이유는 없습니다. 성경에는 분명히 아담을 ”첫 사람”(고린도전서 15:45)라고 하였고, 하와는 ”모든 산 자의 어미”(창세기 3:20)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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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인의 후손들
형벌과 두려움 가인은 농사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아벨이 흘린 피가 땅에 흘려졌고 그로인해 더 이상 농사를 지을 수 없게 되었다. 범죄 이후 가인은 다시는 이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 땅에서 피하여 유리하는 자가 되는 것. 이것이 농부였던 가인에게 주어진 형벌이었다. 네가 밭을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 창세기 4:12 더 이상 농사를 지을 수 없다는 것과 땅에 피하여 유리하는 삶을 사는 것. 하나님께서 내리신 형벌은 여기까지였다. 그러나 여기에 두려움이 더해졌다. 이 두려움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 아니었다. 두려움은 죄가 가져온 열매 중 하나였다. ‘저를 만나는 사람마다 저를 죽이려고 할 것입니다’. 이것은 가인의 두려움이었다.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 창세기 4:14 두려움은 가인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가인은 살인자였다. 가인을 만나는 사람마다 가인을 죽이고자 마음 먹게 되는 것 역시 두려움 때문이었다(죄와 두려움은 언제나 함께 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가인을 죽이면 가인이 받은 벌의 칠곱 배를 받을 것이라 말씀하시면서 누가 봐도 확연하게 드러나는 어떤 표를 가인에게 주셨다. 그래서 가인은 죽임을 면할 수 있었다. 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서 에덴 동쪽 놋 땅에 거주하더니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의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니라 / 창세기 4:16-17 가인은 여호와 앞을 떠났다. 그리고 성을 쌓았다. 하나님의 심판에 따라 ‘유리하는 자’가 되어야 했지만 놋 땅에 거주하며 자식을 낳고 성을 쌓았다. 더 이상 유리하지 않고 그곳에 들어가 정착하겠다는 뜻이다. 놋의 뜻은 ‘유리하다’였지만 가인은 더 이상 유리하기를 거부했다. 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난 것은 장소적인 의미가 아니었다. 성의 이름은 아들 에녹의 이름으로 불렀다. 자신은 유리하는 자가 되었으나 아들 에녹은 성을 소유한 정착민으로 살게하고 싶었던 것이다. 가인은 하나님께서 주신 ‘유리하는’ 형벌을 자기 당대에 끝내고자 했다. 여호와 앞을 떠났고 여호와께서 주신 형벌도 스스로 종료시켰다. 가인의 자손들은 에녹성을 중심으로 번성했고 다섯 세대가 지나 라멕이 태어난다. 라멕은 처음으로 두 아내를 맞이하여 일부다처를 시작한 인물이 되었고 자신에게 상처나 상함을 입히면 나이 어린 소년이라도 죽여 버렸다. 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 하였더라 / 창세기 4:23-24 아벨을 죽인 가인을 죽이면 칠 배의 벌이 주어진다는 선언을 하신 분은 하나님이셨다. 그러나 라멕은 자신을 죽이면 칠십칠 배의 벌이 주어질 것이라 스스로 선언한다. 여호와 앞을 떠난 가인의 후손은 스스로 여호와를 대신하여 형벌을 선언하는 사람이 되었다. 라멕의 세 아들은 가축을 치고 악기를 만들어 음악을 연주하며 구리와 쇠로 여러 기구(무기)를 만드는 자들이 되었다. 가인이 쌓은 성에서 가인의 자손들은 더 많이 생산하고 즐기며 강력한 힘을 소유한 자들이 되었다. 그들은 부유했다. 안전한 성에서 거주했고 강력한 무기도 있었고 문화적으로 풍요로웠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하나님이 없었다. 아무도 하나님을 찾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주신 형벌인 유리하는 삶은 가인이 성을 쌓고 거주함으로써 끝내 버렸다. 그들은 점점 부유하고 세련된 삶을 영위하게 되었지만 동시에 점점 더 잔혹한 사람들이 되어갔다. 여호와 앞을 떠나 자신들의 힘으로 스스로를 지키며 살아간 결과였다. --------------------------------------------------------------------------------------
가인의 후손들 (창세기 4장 16-26절) 16절, 가인이 여호와의 앞을 떠나 나가 에덴동편 놋 땅에 거 하였더니 17절, 아내와 동침하니 그가 잉태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 인이 성을 쌓고 그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 녹이라 하였더라 18절, 에녹이 이랏을 낳았고 이랏은 므후야엘을 낳았고 므 후야엘은 므드사엘을 낳았고 므드사엘은 라멕을 낳았 더라 19절, 라멕이 두 아내를 취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며 20절, 아다는 야발을 낳았으니 그는 장막에 거하여 육축치 는 자의 조상이 되었고 21절, 그 아우의 이름은 유발이니 그는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었으며 22절, 씰라는 두발가인을 낳았으니 그는 동철로 각양 날카 로운 기계를 만드는 자요 두발가인의 누이는 나아마이 었더라 23절, 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어라 나의 창상을 인하여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을 인하여 소년 을 죽였도다 24절,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 칠 배이리로다 하였더라 25절, 아담이 다시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의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26절, 셋도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교회 안에 있어야 될 것이 두 가지인데 인정과 신앙입니다. 그 중에서 아벨은 사랑과 인정에 속한 것을 가인은 신앙에 속한 것을 나타냅니다. 인간은 신앙(믿음)을 통하여 선한 생활을 하는 인정으로 나아감으로 구원받을 수 있기 때문에 가인인(신앙을) 형으로 아벨인(인정을) 동생으로 나타내었습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것은 교회 안에서 인정을 무시해버리고 없이하여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만 있고 신앙만 있는 교회를 나타내며 이것이 곧 교회의 타락을 의미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가인이 여호와의 앞을 떠나 나가 에덴동편 놋 땅에 거하였더니
가인이 여호와로부터 떠나는 순간은 주님으로부터 떠나는 순간입니다. 주님으로부터 떠나는 순간은 사랑으로부터 멀어지는 현상을 나타냅니다. 말씀 속에서는 주님이 내어쫓은 것으로 되어 있지만, 더 이상 그 마음속에 인정과 사랑이 자리잡고 있지 않은 신앙 안에 있는 사람들은 주님으로부터 등을 돌리는 사람들이고, 그런 사람들은 에덴동산으로부터 쫓겨나는 것과 같은 현상을 나타냅니다.
그래서 최고대 교회에 속한 신앙의 상태가 이와 같이 주님의 사랑과 선으로부터 등을 돌려 그들이 거한 곳은 에덴동산 동편 놋 땅에 거하였습니다. 이 놋 땅은 내적인 것이 없고, 오로지 선과 진리에 속한 지식만이 있는 곳에 머물러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에게는 이 두 가지 신앙 안에 있는 인정과 신앙의 요인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 두 가지 교회의 특성은 인간에게 있어서는 이성과 의지로 나타냅니다. 사람이 그 마음과 뜻이 하나 되어서 움직일 때, 다시 말해서 생각과 의지가 하나 되어서 움직일 때에는 그 사람은 정직한 사람이고 또 참된 신앙 안에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생각은 있으되 몸이 따라주지 않고, 또 행동은 하되 마음과 다르게 행동하는 것은 가식적이고 위선적인 것입니다. 그러한 사람이 있음으로 이 사회가 병들고 점점 타락해 가는 현상으로 나타납니다.
이것은 곧 교회가 인정을 무시하고 믿음만 또는 신앙만 나타내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에게 있어서 이와 같이 본 마음속에 있는 대로 솔직하게 행동으로 옮기는 사람과 마음은 따로 있고, 겉으로 보이기 위해서 바르게 행동하는 사람과의 차이는 그 정도가 전혀 다르게 나타나는 것과 마찬가지로 교회 안에서도 이와 같이 인정과 신앙이 결합된 상태로 교인들을 가르치고, 전달하는 상태와 인정과 신앙이 분리된 상태에서 인정은 무시하고 오로지 믿음만, 신앙만 있는 것을 나타냈을 때에는 이와 같이 에덴동산 안에 거할 수 없어서 쫓겨나는 그래서 놋 땅에 거할 수밖에 없는 것으로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가인이 아내와 동침하니 그가 잉태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였더라
이러한 가인에게서 후손이 태어난 것은 인정이 없는 신앙으로부터 거짓된 가르침, 거짓된 교리가 태어나는 것을 그 후손이 태어나는 것으로 기록하였습니다.
가인이 성을 쌓고 그 이름을 아들의 이름을 따서 에녹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주변에 있는 성을 보면 커다란 돌덩이들을 하나하나 차곡차곡 규칙적으로 쌓아놓은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돌은 말씀 안에서 진리의 상징입니다. 그래서 진리에 속한 것들을 질서적으로 하나하나 쌓아놓은 것이 성입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말씀 속에 있는 참된 진리를 질서정연하게 가르치는 것이 교리이고, 성을 쌓아 그 안에 사람들이 거주하고,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보호를 받기 위해 성을 쌓았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교리를 가르치는 것이 말씀의 참된 진리에 속한 것을 가르침으로 그 진리 안에 있는 사람들이 악과 거짓의 피해를 받지 않게 하는 것이 교리입니다.
그래서 이 교리를 성으로 상징해서 말씀을 기록해 놓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교리가 잘못된 것은 그 신앙이 잘못된 데서 나옵니다. 다시 말해서 참된 신앙과 인정이 자리잡고 있는 곳에서는 올바른 교리가 전달될 수 있으나, 인정이나 선을 무시해버린 상태에서는 그릇된 교리가 나타날 수밖에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그릇된 교리를 가리켜서 가인의 후손인 에녹이라는 아들로 나타냈습니다. 그 교리로 가르치는 것은 수도 없이 많이 있습니다. 주님에 관한 것, 아버지에 관한 것, 성령에 관한 것, 안식일에 관한 것, 신앙과 인정과 새교회에 관한 것, 세례에 관한 것, 성찬에 관한 것 이와 같이 기독교 안에 자리잡고 있는 수많은 교리들이 있습니다. 그 교리에 대해서 각기 나름대로 잘못된 해석을 붙임으로 인해서 타락의 길로 가게 하는 것이 그릇된 교리입니다. 그러한 교리를 성이라고 했고, 그 성을 에녹이라고 했습니다.
에녹이 이랏을 낳았고 이랏은 므후야엘을 낳았고 므후야엘은 므드사엘을 낳았고 므드사엘은 라멕을 낳았더라
가인으로부터 라멕까지 여섯 세대로 나타냅니다. 6이라는 숫자는 천지창조에서도 6일이 걸렸고, 또 여기서도 그 후손이 여섯 세대로 나타냅니다. 여섯이라는 숫자는 갖가지 시련과 고통을 통해서 변화되어 가는 과정입니다. 이것이 올바른 상태로 변화되어 갔을 때에는 거듭나는 과정입니다.
아무 것도 모르고 무지의 상태에서 참이 무엇이고, 거짓이 무엇인가를 아는 지식의 상태로, 그 지식의 상태에서 좀더 나은 총명의 상태로, 그 총명의 상태에서 좀더 나은 지혜의 상태로 그래서 사람이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그 사랑의 상태로 옮겨짐으로 점점 거듭나가는 과정을 육일의 상태로 나타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의 육대 후손의 관계는 그 반대입니다.
인정을 무시하고 사랑과 선을 무시한 믿음 또한 신앙만 있는 가르침으로부터 점점더 참된 것에서 멀어져 라멕에 이르기까지 그들에 속한 것이 점점더 인정이 무시됨으로 신앙까지 변질되어서 나중에는 신앙에 속한 것까지도 하나도 제대로 남아있지 않는 상태로 나타내었습니다. 그래서 인정이 없는 신앙으로부터 갖가지 이단 교리들이 태어나는 과정들입니다. 이단 교리라는 것은 참된 신앙과 인정이 결합된 가르침이 정통이지, 그 중에 어느 하나라도 무시되어 버린 상태에서는 이단 교리밖에 될 수 없습니다. 모든 교리들 가운데에서 그 안에 참된 신앙과 인정에 속한 것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서 그것이 정통이나 인단이 결정되는 것이지, 어느 특정한 사람이 말한다고 정통이고, 사제나 목회자들이 모여서 의논하여 정의로운 것으로 판단하여 교리로 정한다면, 이것은 인간적인 판단에 의해 내려진 것이지, 꼭 주님 편에서 내려진 판단은 아닙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서 가르치는 수많은 교리들은 각 종파마다 다르게 말하는 것을 볼 수 있으나 어느 것 하나 정통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가르침 안에 참된 올바른 인정과 신앙에 속한 것들이 그중 하나라도 없을 때에는 정통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가인의 6대 후손으로 나타난 것은 철저하게 인정을 무시해 버려서 결국에 신앙까지도 타락되어 버리는 상태를 라멕이라는 사람으로 나타내었습니다. 그래서 이 라멕이 인정뿐만 아니라 신앙까지도 남아있지 않는 타락된 신앙을 나타낸 것이 바로 라멕이 스스로 그 아내들에게 고백한 23절에 있는 말씀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라멕이 아내들을 불러 내가 창상을 인하여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을 인하여 소년을 죽였도다
그가 상처를 내고 남에게 아픔과 고통을 주어 사람과 소년을 죽였다고 고백합니다. 사람은 신앙에 속한 것이고, 소년은 인정에 속한 것입니다. 그 스스로가 이와 같이 신앙과 인정에 속한 것을 무시해 버리고 파괴시켜 버린 것을 고백합니다.
사람이라고 했을 때에는 그 진리에 속한 것, 또는 신앙에 속한 것을 나타내고, 소년이라고 했을 때에는 선과 인정과 그리고 사랑에 속한 것을 나타냅니다. 엄마 품에서 젖을 빠는 아이는 부드럽고 순진함을 나타내고, 그것보다 조금 자란 3-4살된 아이는 부모에 대한 순수한 사랑을 나타내고, 좀더 커서 글을 배우는 어린아이와 같은 모습은 가르치는 사람들에 대한 애정과 선한 의지를 나타낸다고 합니다.
이와 같이 성경에서의 어린아이들은 순진성과 천진난만한 애정과 사랑의 속성을 나타냅니다. 여기에서 소년을 죽였다고 하는 것은 인정과 선에 속한 것을 무시해 버리고 파괴해 버린 것을 나타냅니다. 그렇게 함으로 스스로 더 많은 고통과 아픔을 당했다는 것이 라멕의 상징입니다. 이것을 알아야 이 말씀의 속뜻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매번 보면 마지막 순간까지 주님은 기다리셨다가 더 이상 참된 것과 인정과 신앙에 속한 것이 남아있지 않은 결정적인 순간이 왔을 때, 주님께서는 또 다른 세계를 부여해 주십니다. 그것이 라멕에게 두 아내 아다와 씰라를 준 것입니다.
그대로 놓아두었다가는 인류가 멸망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인간들을 구제하기 위해서 타락된 신앙조차 없는 상태에서 새로운 생명을 넣어주는 것이 아다와 씰라입니다.
그 중에 아다는 교회의 천적이고 영적인 것의 모태가 되는 것이라고 했고, 씰라는 교회의 자연적인 것의 모태가 되는 것입니다. 영적이고 천적인 모태가 되는 것은 영적인 선과 진리의 모태가 되는 것이고, 자연적인 것의 모태는 자연적인 선과 진리의 모태가 되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영적인 것과 자연적인 것을 다시 주어서 새롭게 교회를 이끌어 나아가고, 새로워지도록 허용해 주셨다는 말씀입니다.
여기까지 말씀을 살펴볼 때에 최고대 교회의 후손들이 스스로 타락했을 때는 에덴동산에서 쫓겨나는 것으로 기록해 놓으시고, 이제 라멕에게 두 아내를 줌으로써 그 후손들이 다시 새로운 신앙과 인정 안에서 구원받을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 주님의 자비에서 나온 속성입니다.
역사적으로 보았을 때 이러한 것들은 에덴동산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고대교회 시대에도 있었습니다. 고대교회 후손들은 노아 홍수로 멸망했습니다. 그들의 타락상태가 극단적인 극에 달했을 때 그대로 놓아둘 수가 없어서 방주를 만들어 노아의 가족들을 보호하고 보존하도록 다시 새로운 땅에서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게 배려해 주시는 것을 노아의 방주로 나타냈습니다. 또 유대교회가 타락해서 말씀이 있어도 더 이상 그 뜻을 알지 못하는 상태가 될 때에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심으로 인해서 다시 주님의 세계가 그들에게 주어지고, 그래서 새로운 교회가 탄생하는 모습으로 나타냈습니다. 마지막으로 주님의 사도들에 의해서 만들어진 기독교회가 타락하고 변질될 때, 그래서 오로지 믿음만 제일이라고 가르치고, 인간이 만들어 놓은 교리가 제일이라고 가르치는 그릇된 양상으로 나타날 때 다시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당신의 새 교회를 허락하셨습니다.
이것이 당신의 종을 통해서 가르침 받고, 교육을 받은 내용으로 알 수 있는 것이고, 이러한 새 교회가 역사적으로 보았을 때에 여러 번 있어왔고, 그것은 꼭 한 교회의 상태가 극단적으로 타락하여 더 이상 구원받을 수 없는 절망적인 상태가 될 때 주님께서는 새 교회를 허락하셔서 다시 인류를 구원의 길로 이끌으시는 구원의 역사가 진행되어 온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교회가 타락한 상태로 이대로 놓아둔다면, 마치 가라지가 선한 씨를 파괴해 버리듯이 곡식을 심었는데 그것을 제대로 가꾸지 않고, 거두지 않아 잡초들이 무성해서 그 안에 곡식들이 고사되어 버리고 더 이상 자라지 않고 열매를 맺지 못하고 그대로 말라죽어 버리는 현상을 막기 위해서 다시 새로운 교회에 속한 것을 허락해 줄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두 아내를 주었는데 이것이 바로 새 교회의 모태가 되는 속성을 나타낸 것입니다. 그들에게서 야발과 유발이 태어납니다.
야발은 장막에 거하여 육축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고
장막 안에 거하는 것은 바로 오늘날 집안에 거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옛날 사람들은 유목생활을 했기 때문에 텐트 안에서 생활했습니다. 그 텐트 안에서 사람들은 회의도 했고 기거도 했고, 또 제사도 드렸습니다. 그 안에는 사랑이 있었고, 인정이 있었던 곳임으로 장막 안에 거하는 것은 사랑을 나타낸다고 했습니다. 육축(가축)을 기르는 자는 인정과 선에 속한 것을 가르쳐주는 자의 모태가 되는 사람이라는 뜻이고, 또
유발은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었다
악기는 영적인 것, 영적인 것은 진리에 속한 것, 신앙에 속한 것이고, 앞에 것은 사랑에 속한 것임으로 천적인 것이라면, 유발은 신앙에 속한 것으로 영적인 것을 가르치는 자들입니다.
씰라는 두발가인을 낳았으니 그는 동철로 각양 날카로운 기계를 만드는 자라
씰라는 자연적인 것의 모체이고, 그에게서 낳은 두발가인인 아들은 동과 철로써 날카로운 기계를 만드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자연적인 선과 진리로써 가르치는 사람을 나타냈고 이들을 통해 천적인 것과 영적인 것과 자연적인 것을 가르치는 사람을 상징해서 나타냈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에덴동산에 살던 사람들의 속성은 지각을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말씀을 배우는 사람들이고, 이 지각은 느낌의 세계입니다. 가르쳐주지 않아도 본인의 마음에 와서 닿는 느낌의 세계가 지각의 세계입니다. 그것으로 가르침을 받았기 때문에 굳이 누가 옆에서 이건 이렇고, 저건 저렇다고 가르칠 필요가 없는 상태였으나, 그들의 상태가 점점 타락해서 이와 같이 신앙에 속한 것까지 있지 않는 상태까지 되었을 때에는 그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가르침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야발은 사랑에 속한 것을 가르치는 자이고, 유발은 신앙에 속한 것을 가르치는 자이고, 또 두발가인은 자연적인 것을 가르치는 자의 조상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가르치는 자는 천사들이나 어떤 계시나 말씀을 통해서 직접 듣고 지각할 수 있는 마음의 문이 닫혀져 버렸기 때문에 이제는 그의 이성에 호소하여 올바른 것을 가르쳐 주고 깨우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이렇게 가르치는 자의 조상으로 나타내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것보다 더 타락하고 변질되어서 가르쳐 주어도 그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상태로 되어버린 것이 오늘날의 상태입니다. 이제는 그 이성까지도 마비가 되어 버렸다는 것입니다.
애정과 의지에 속한 것이 변질되고, 그 이성까지도 변질되고 타락해 버렸기 때문에 가르쳐 주어도 그 말을 이해하기 힘들고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 오늘날 사람들의 영적인 상태입니다.
23절에 라멕에 대해서는 19절에서 말씀을 드렸기 때문에 더 말씀드릴 필요가 없겠습니다. 결국은 라멕으로 가인의 6대째 후손으로 나타낸 것은 인정이 없는 신앙이 타락하고 변질되었을 때, 그 신앙에서 나온 모든 가르침의 교리가 이와같이 결국 신앙에 속한 것까지도 남아있지 않은 상태까지 될 수밖에 없고, 그래서 그 최후의 수단으로 라멕에게 아다와 씰라라고 하는 두여인을 아내로 줌으로써 다시 새로운 교회를 주어서 인류를 구원하시는 주님의 섭리이고 자비라고 합니다.
가인을 위하여 벌이 칠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 칠 배이로다 하였더라
가인보다 라멕이 훨씬 더 열 배의 더 많은 벌을 받는다는 것은 가인은 교회 안에 있어야될 신앙에 대한 상징이고, 아벨은 교회 안에 반드시 있어야될 인정의 상징입니다. 비록 인정에서 떠났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가인이 신앙을 상징합니다. 그래서 인정에서 떠나 신앙만 있는 것에는 칠 배의 벌이 주어진다면, 신앙조차 남아있지 않은 상태에 있어서는 칠십 배의 벌을 줄 수밖에 없다는 것은 신앙까지 무시해 버리는 사람은 결국 더 큰 벌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인정과 신앙은 주님에게서 나온 것임으로 이를 모독하는 것은 결국 주님을 모독하는 것이 됩니다. 그 중에 어느 것 하나라도 분리시키는 것도 주님을 모독하는 것인데, 인정도 신앙도 다 무시해 버리는 것은 더욱 신성을 모독하는 죄를 범하게 되기 때문에 결국 더 큰 벌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벨 대신에 다른 씨 셋을 주십니다.
아벨 대신 셋을 주신 것은 주께서 인정에서 나온 새로운 신앙을 그의 아내에게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정과 신앙이 다시 결합하도록 허락하셔서 그 안에서 교회가 이루어지고 그 안에서 예배를 드릴 때 그 때 사람들은 여호와를 불렀더라입니다. 교회 안에 있어야될 이 두 가지가 같이 결합해서 한 마음으로 인정과 신앙으로 결합해서 예배를 드릴 때 비로소 그들의 입에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참된 사랑과 인정으로 예배드리는 모습으로 나타냈습니다. 인정에서 나온 신앙으로 교회의 참예배를 드렸다는 것입니다. 사랑이 없는 예배는 마음이 없는 입술만으로 드리는 예배이고, 이러한 것들은 그릇된 예배로 나타나기 때문에 여호와의 이름을 부를 수 없고, 또 주님께서는 그러한 예배는 받아들일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께로부터 주어지는 참된 신앙이 인정과 결합된 상태로 예배를 드릴 때에는 개인에게 있어서는 그 이성과 의지가 하나로 다시 그 몸과 마음이 하나로 결합된 상태로 주님께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인정으로 예배드리는 것이기 때문에 그러한 예배가 참예배가 되어서 여호와의 이름을 부를 수 있고, 주께서 받으시는 예배가 될 수 있다는 것이 오늘 말씀의 요지였습니다.
최고대 교회 후손들이 타락된 양상으로 나타냈고, 결국은 인정과 신앙 모두를 무시했을 때, 새로운 신앙을 넣어줄 수밖에 없고, 이것이 아다와 씰라라고 하는 두 아내를 주는 것, 그리고 그 후손이 하나는 육축을 기르는 자이고, 또 하나는 수금과 퉁소를 치는 자, 또 하나는 동과 철로 날카로운 기계를 만드는 자라고 한 이 셋으로 후손들이 나타내는 것은 하나는 사랑에 속한 것을 가르치는 자이고, 하나는 신앙에 속한 것을 가르치는 자, 또 하나는 자연적인 것으로 가르치는 자로 나타냈습니다. 이렇게 된 것은 옛날에는 지각을 통해서 말씀과 신앙을 배웠지만, 그 상태가 마비된 뒤에는 이성에 호소하여 가르침을 통해서 깨우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이렇게 가르치는 자들로써 나타냈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지금 이 시대에는 가르침을 주어도 가르침조차도 이해하지 못하는 세계가 되어 버렸기 때문에 더욱 안타까운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 속에 감추어진 신비의 진리가 일깨워질 때마다 말씀 속에 감추어진 진리가 얼마나 오묘하고 신비한 것인가를 알 수가 있사옵니다.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우리가 그 진리를 감당하기조차도 벅차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주님! 저희들을 불쌍히 여겨 주시옵시고, 우리들의 더러워져 있고, 탁한 심령을 다시금 맑고 깨끗하게 유지할 수 있게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너무나도 이 세상에서 불어닥친 세파가 강하고, 너무 둔한 가운데 살고 있기 때문에 저항할 힘이 약하여져 있사오니 저희들에게 힘과 능력을 허락하여 주시어서 그릇된 것은 물리칠 수 있게 하시고, 아닌 것들은 과감하게 끊어버릴 수 있게 하셔서 우리 영혼이 당장 주님께 나아갈 수 있게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오로지 당신께서 주신 가르침에 따라서 우리 영혼들이 보존될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간구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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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속 사람들의 이야기] 카인과 아벨(창세 4,1-16)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인류의 이야기는 카인과 아벨 이야기(창세 4,1-16), 곧 형제살해 이야기로 이어집니다. 형제를 죽이고 자리를 차지한다는 주제는 고대 영웅들의 이야기에 자주 등장하는 소재 중의 하나입니다. 고대 로마를 건설했다는 로물루스도 자신의 형제인 레무스를 죽이고 도시를 세웠다고 합니다. 카인과 아벨의 이야기도 이러한 과정으로 이해해야 할까요? 권력을 위한 싸움 또는 하느님의 사랑을 독차지하기 위한 경쟁 과정에서 발생한 폭력의 문제일까요? 이 이야기를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누가 이야기의 중심인물인가 이해해야 합니다. 이야기를 만들어가고 이끄는 인물은 카인과 하느님입니다. 아벨(헛됨, 미풍, 가느다란 숨)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지나가는 조연일 뿐입니다. 카인(하느님의 도우심으로 얻은 아들)이야말로 하느님과 대화하고 부딪히고 행동하는 중심인물입니다. 그러니까 이 이야기는 ‘카인의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이야기는 하느님께 제물을 바치는 데서 시작합니다. 카인은 땅의 소출을, 아벨은 양떼 가운데서 맏배들과 굳기름을 바쳤다고 합니다. 아벨은 좋은 것을 바치고 카인은 나쁜 것을 바쳤다고 쉽게 생각하지만, 성경은 그들이 바친 제물의 질(質)에 대해 어떤 비교나 판단을 제공하지 않습니다. 단지 하느님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을 받아들이시고(‘굽어보시고’) 카인 쪽은 받아들이지 않으셨다고 할 뿐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제물을 받아들이고 마는 것은 하느님의 자유에 속한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인간의 정성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유로운 선택이 우선된다는 것입니다. 카인의 잘못이 여기서 생겨납니다. 카인은 하느님의 자유로운 선택이 자신의 의지와 뜻과 맞지 않는다고 화를 냅니다. 하느님을 섬기는 자로서 주(主) 하느님을 찾는 것이 아니라, 나를 따라오는 하느님, 내 마음대로 조정할 수 있는 하느님을 찾고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그런 카인에게 경고하십니다. “너는 어찌하여 화를 내고, 어찌하여 얼굴을 떨어뜨리느냐? 네가 옳게 행동하면 얼굴을 들 수 있지 않느냐? 그러나 네가 옳게 행동하지 않으면, 죄악이 문 앞에 도사리고 앉아 너를 노리게 될 터인데, 너는 그 죄악을 잘 다스려야 하지 않겠느냐?”(창세 4,7) ‘옳게 행동하라!’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고 그에 따르는 자가 되라는 충고입니다. 이는 또한 카인을 지키고자 하는 하느님의 의지를 드러내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카인은 하느님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 결국 그는 자신의 뜻대로 합니다. 아벨을 들로 나가자고 불러냅니다. 그리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 카인이 자기 아우 아벨에게 달려들어 그를 죽였다.”(4,8) 간단하게 묘사되었지만, 너무나도 참혹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아무도 없는 곳, 오직 둘만 있는 곳, 그래서 형제로서 서로 더 의지해야 할 그 들판 한 가운데서 살인의 폭력이 행해졌습니다. 하느님께서 다시 개입하십니다. “네 아우 아벨은 어디 있느냐?”(4,9ㄱ) 이 질문은 에덴동산에서 금단의 열매를 먹고 숨은 아담을 찾을 때 하신 말씀, “너 어디 있느냐?”(3,9)의 다른 표현입니다. 죄를 지은 이를 찾는 말이며, 죄에 대한 책임을 묻는 말이며, 또한 회개로 부르시는 말씀입니다. 곧 당신께로 나아오라는 초대의 말입니다. 그러나 카인은 아버지를 그대로 닮았습니다. 책임지지 않고 뉘우치지 않던 아담처럼 그도 책임지지 않습니다. “모릅니다. 제가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4,9ㄴ) 거짓과 무책임의 말입니다. 이제 에덴의 남자와 여자와 같은 길을 카인도 걷습니다. 아담이 자신의 출발점인 땅과의 관계가 끊어졌듯이, ‘땅을 부치던 농부’(4,3) 카인도 ‘땅에서 쫓겨나’(4,11) ‘세상을 떠돌며 헤매는 신세’(4,12.14)가 됩니다. 더 나아가 카인은 이제 하느님 앞에서도 살지 못합니다. 그는 ‘하느님 앞에서 물러나’(4,16) 다른 곳으로 옮겨갑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끝까지 그와의 관계를 끊지 않으십니다. 형제를 죽이고 책임마저 회피하는 그를 찾아와 대화하시며, 그의 죄를 깨우쳐주십니다. 그때에 카인은 자신의 죄가 얼마나 큰 지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목숨이 위험함을 하느님께 호소합니다. “만나는 자마다 저를 죽이려 할 것입니다.”(4,14). 하느님은 비록 카인을 땅에서 쫓아내는 형벌을 내리시지만, 그를 보호하시겠다고 선언하십니다. 그리고 다른 이들이 그를 해치지 못하게 하는 ‘표’(4,15)까지 찍어주십니다. 하느님의 카인을 향한 관심은 거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표’을 받은 카인에게도 자녀의 축복이 계속 이어집니다. 뒤따르는 ‘카인의 자손’(4,17-22)은 하느님께서 카인과의 관계를 계속 이어가심을 보여주는 단서입니다. 성경은 십계명에서 말하듯이 모든 살인에 분명하게 반대합니다. 어떤 형태로든 다른 누군가의 목숨을 빼앗는 모든 행위를 단죄합니다. 예수님은 아예 모욕조차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살인해서는 안 된다. 살인한 자는 재판에 넘겨진다.’고 옛사람들에게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 그리고 자기 형제에게 ‘바보!’라고 하는 자는 최고의회에 넘겨지고, ‘멍청이!’라고 하는 자는 불붙는 지옥에 넘겨질 것이다.”(마태 5,21-28). 살인, 상해, 사형제도만이 아니라 형제-다른 사람을 공격하는 말과 행동은 생명의 원천에서 스스로 자신을 떼어놓는 행위입니다. ‘저런 놈들은 죽어 마땅하다.’는 말조차도 하느님의 뜻과는 맞지 않습니다. “네가 옳게 행동하면 얼굴을 들 수 있지 않느냐?”(4,7) 카인에게 하시는 이 말씀은 우리에게도 주어지는 말씀입니다. 내 마음에 드는 대로가 아니라 하느님 보시기에 올바르게 행동하는 것, 그것이 하느님 앞에 똑바로 서는 길입니다. [2018년 2월 4일 연중 제5주일 의정부주보 5-6면, 이용권 안드레아 신부(선교사목국 성서사도직)] ----------------------------------------------------------------------------------------------------
카인의 상처와 눈물 아담과 하와는 카인과 아벨이라는 두 아들을 낳았다. 카인은 농부가 되었고 아벨은 양치는 목동이 되었다. 카인은 땅에서 추수한 곡식을 떼어 하느님께 제사를 지냈다. 아벨은 양의 첫새끼를 잡아 좋은 부분을 정성을 다해 바쳤다. 그런데 하느님은 아벨의 제물만 받으셨다. 카인은 화가 머리 끝까지 났다. “아벨의 제물만 받으시다니… 어디 두고 보자. 아벨!" 어느날 카인은 들로 아벨을 꾀어 돌로 쳐죽인다. “으악! 사람살려!" 하느님께서 물으셨다. “카인아, 네 아우 아벨은 어디있느냐?" “제가 뭐 아벨을 지키는 사람입니까, 딴데가서 물어보슈…." 카인은 퉁명스럽게 거짓말을 했다. 하느님은 이미 다 알고 계셨다. 카인에게 벌을 주셨다. “이제부터 너의 땅에서는 곡식을 내지 못한다. 너는 나그네처럼 떠돌아다닐 것이다." 카인은 왜 피붙이인 아벨을 죽였는가? 도대체 어떤 마음이 살인으로까지 치닫게 했나? 카인은 농사를 짓고 있었으니 당연히 제물로 땅의 소산물을 바쳤다. 아벨은 양의 첫새끼와 기름기를 바쳤다. 물론 아벨은 정성스레 제물을 준비했고 진실한 마음으로 제사를 지냈다. 하느님께서는 아벨의 제물만 받으셨다. 이때 카인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아니 이럴 수가 있나. 나 이거야 원 창피해서 못살겠네. 내가 그래도 장남인데 내 제물을 쳐다보지도 않으시다니… 하느님이 어떻게 이렇게 편애하고 불공평하실 수가 있나. 내가 무엇을 잘못했다고…." 편애를 당해본 사람은 안다. 그것이 얼마나 사람을 비참하고 우울하게 만드는지를. 부모로부터, 특히 가까운 형제와 비교되어 열등한 존재로 낙인 찍히는 것처럼 큰 상처가 있을까. 카인은 하느님께 화가 치밀었다. 아니 어쩌면 자기자신에게 화가 났는지도 모른다. 인간은 자신의 기대가 좌절될 때 화가 난다. 때로는 극도로 분노해 이성을 잃어 인간관계에 상처를 주는 일도 자주 일어난다. 화가 나는 것 자체는 어찌할 수 없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자신의 마음을 어떻게 조절하고 다스리는가 하는 점이다. 카인의 분노의 화살은 전혀 엉뚱하게 날아갔다. 카인은 하느님의 사랑을 차지한 아벨을 질투하고 미워했다. “저 나쁜 놈 아벨, 저놈 때문이야, 저 놈이 나타나면서 모든 게 뒤틀어졌어. 저놈을 없애는 것만이 내가 살길이야…." 미움과 시기는 어느덧 살기를 느끼게 한다. 카인은 아벨의 행동이 못마땅한 것뿐 아니라 그의 존재자체를 부정하고 싶었다. 그래서 결국 카인은 동생 아벨을 살해하게 된다. 카인은 동생을 땅에 묻은 후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 자신이 한 행동이 잘한 것이라고 계속 생각했을까? 카인은 정신을 차린 후 “아니, 내가 무엇을 한 거지. 동생을 죽이다니. 나는 화를 참았어야 했는데…하며 후회했을 것이다. 그러나 땅을 치고 눈물을 흘리며 후회해도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자신이 죽도록 밉고 싫어졌을 것이다. 사실 아벨은 아무런 잘못이 없었다. 하느님께 드리는 진실한 감사와 믿음의 제사는 칭찬받아 마땅한 것이었다. 하느님께서 믿음이 담긴 아벨의 제물만을 받으신 것은 공평한 행위였다. 그런데 우리의 현실에서도 늘 칭찬받는 사람곁에는 소외되고 상처받는 이가 함께 존재한다. 동생 아벨은 형 카인의 상처받은 마음을 얼마나 알고 배려했을까? 내가 독차지한 사랑 때문에 가슴이 시리고 아픈 이들은 혹시 없는가? 그러나 카인은 분명 자기 자신을 똑바로 보지 못하는 잘못을 저질렀다. 그의 시선은 자신보다 밖을 향해있었다. “나는 왜 화가 났는가?" “동생 아벨이 과연 무엇을 잘못했는가? 왜 나는 전혀 잘못이 없는 너를 시기하고 질투하고 공격하는가?” 그것은 마음의 상처 때문이다. 이유모를 분노와 폭력도 마음의 상처 때문인 경우가 많다. 인간은 누구나 마음의 상처가 있다. 이제 고통을 감수하고 마음의 눈을 뜨자. 상처난 내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자. 내 마음 안에 상처받은 카인이 서있고, 피투성이가 된 아벨이 쓰러져 있다. 상처받은 내 자신의 두 모습이다. 평생 카인의 후예로 나그네가 되어 떠도는 나와 너의 마음속에 두 개의 평행선으로 공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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