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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야! 김향단!”
나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누구지? 기억이 틀리지 않는다면 방금 전까지 나는 분명 도서관에서 춘향전을 읽고 있었다. 그러다가 깜빡 졸았었다.
어울리지 않게 웬 고전이냐고? 글쎄 그 망할 어문 선생님이 다음 주에 춘향전에 대한 모든 내용을 숙지하고 조별로 주제토론 수업을 진행한다고 했으니까 말이다.
“정말 가지가지 하네.”
나는 수업이 끝나자 짜증이 솟구쳐 책을 탕 소리 나게 덮고 학교 도서실로 향했다. 춘향전만 나오면 나는 내게 향단이라는 촌스러운 이름을 지어준 부모님을 원망하느라 밤을 샐 지경이었다. 차라리 춘향이라 지어도 지금보다 열 배는 낫겠다. 이건 뭐 뛰어봤자 춘향의 몸종 이름이니……
“야, 김향단! 오늘 체육시간은 빠지면 안 된다는 거 잊었어?”
으휴…… 원수가 따로 없군. 내가 여기 있는 건 어떻게 알아가지고. 꼭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게 그 이름을 불러야 하겠니? 나는 혼잣말로 궁시렁거리며 책을 넣고 절친의 뒤를 따라 도서실을 나섰다.
나는 앞장서서 걸어가는 절친의 뒤통수를 구멍이 나도록 째려보면서 스적스적 걸음을 옮겼다. 저 년은 예쁘장하게 생겨가지고 오지랖은 또 얼마나 넓은지…… 남이사 체육시간 빠지든 말든…… 학급장이긴 해도 자기가 좋아하는 어문 시간도 모자라 이젠 체육시간까지 날 감독하려 들어? 나는 혼잣말로 온갖 육두문자를 다 날리며 운동장으로 향했다. 하지만 잠시 후, 나는 그런 절친에게 넙죽 엎드려 절이라도 하고 싶은 충동이 생겼다. 누가 남자는 뇌가 섹시해야 한다고 했는가…… 역시 남자는 몸이…… 쿨럭…… 중요하다.
“이번에 새로 온 체육 선생님이래. 어때? 잘 생겼지?” 옆에 선 절친이 내 귀에 대고 소곤거렸다. 얘, 저건 잘 생긴 정도가 아니야. 저건 아주 그냥 죽여줘……
그래, 차라리 그냥 죽여주라.
나는 정확히 1분 후 우리 앞에 설치된 높다란 그네를 쳐다보며 맥없이 중얼거렸다. 고소공포증이 있는 내가 그네라니…… 역시 이번 체육시간은 빠질 걸 그랬다.
“자, 한달 후에 열릴 체육대회에 우리 학교도 참가해야 하는 거 알지? 오늘 너희들 중 그네를 잘 타는 학생들만 뽑을 테니까 탈 줄 모르거나 겁이 나면 물러서도 좋다.” “저요! 저요…… 저 어릴 때부터 그네 잘 탔어요!”
절친이 손을 높게 들었다. 훈남 체육 선생님의 눈길이 우리 쪽으로 향한다.
“그래, 학생 이름이 뭐야?”
“성유리입니다.”
“성유리? 앞으로 나와 봐.”
“넵. 선생님.”
나는 아니꼬운 눈길로 절친이 체육 선생님 곁으로 포르르 달려 나가는 것을 보았다. 그네에 몸을 실으면 되었지 팔은 왜 선생님 목에 두른다니? 아니, 팔 근육은 왜 슬쩍 만져보는데? 저런저런…… 저게 어문 선생님 좋다 할 땐 언제고……
그네를 잡고 마주 보는 두 얼굴이 하도 다정해 보여 나는 갑자기 화가 났다. 나는 저도 모르게 손을 번쩍 쳐들었다.
“어, 그래. 학생…… 무슨 일이야?”
“선생님, 저는 어릴 때부터 그네 신동이었습니다.”
“오, 그래? 그럼 잠깐 여기로 나와 봐.”
체육 선생님이 절친에게 뭐라 했는지 그녀가 그네에서 내려오면서 내 쪽을 노려보는 게 느껴졌다. 나는 그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고 씩씩하게 그네 쪽으로 다가갔다.
“선생님께서 밀어주시는 거예요?”
“그래. 강약 조절할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고.”
나는 눈을 딱 감고 그네에 올라탔다. 별로 무서운 건 아니…… 지. 무섭다, 무서워…… 사람 살려…… 줘.
귓가에 바람이 쌩쌩 불고 눈앞이 현기증으로 어질어질해졌다. 그네가 높이 올라갈수록 심장이 목구멍으로 튀어나올 듯하고 호흡이 곤란해져서 나는 온몸을 사시나무 떨 듯 떨었다. 그러다보니 언제 두 손을 놓았는지 나도 모를 일이다.
털썩……
여학생들의 새된 소리가 들리고 나는 그만 까무룩 정신을 잃고 말았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다시 정신이 들었을 때, 나는 여전히 그네 옆에 엎드려 있었다. 이 사람들이 진짜…… 그네에서 떨어진 사람을 당장 의무실에 데리고 가는 것이 아니라 아직도 여기에 방치해 두다니…… 벌떡 일어서려다 발밑의 뭔가를 밟아 나는 다시 넘어져 버렸다.
“향단아, 괜찮아?”
그래도 절친이 그나마 안부라도 묻고 있는 것이었다.
“이 년아, 그네에서 떨어져 봐. 너라면 괜찮겠냐?”
아파서 머리도 쳐들지 않고 대답했을 뿐인데, 주위는 쥐죽은 듯 고요해졌다. 내가 뭐 못 할 말을 했나……
고개를 든 나는 느리게 눈을 감았다가 떴다. 싱그러운 풀 향기와 눈에 들어오는 꽃송이들, 이건 분명 학교 운동장이 아니다. 여긴 어딜까? 왜 이렇게도 낯선 풍경일까……
더 기가 막힌 건 눈앞에 있는 절친의 옷차림이었다. 체육대회 당일도 아닌데 절친은 벌써 연노랑 저고리에 핑크색 치마를 받쳐 입고 머리를 땋아 늘여 댕기까지 드리웠다. 아주 꼴갑을 해라 꼴갑을.
게다가 그녀는 내 반응을 보고 뭐가 그리 우스운지 해쭉해쭉 웃는다.
“우리 향단이가 그네에서 떨어지더니 아직 의식이 채 돌아오지 않은가 보구나. 괜찮다. 어디 다친 덴 없는 거냐? 어디 한 번 일어나 보거라.”
너야말로 저리 썩 비키 거라. 볼썽사나우니. 나 참.
나는 입속으로 궁시렁거리며 겨우 다시 몸을 일으켰다. 다행히 어디 다친 데는 없어 보였으나……
“돌아버리겠네!”
내 말에 절친의 눈이 올롱해진다.
“돌아? 혹시 머리가 어지러운 게냐?”
“어. 그래.” “혹…… 기억이 돌아서지 않은 게냐?”
“기억? 무슨 기억…… 그것보다 이거 당장 못 치워? 내 체육복은?”
나는 내 몸에 걸려있는 거추장스러운 옷가지들을 와락와락 벗어 내쳤다. 그런 내 행동에 절친은 경악의 표정을 지었다.
“향단아!”
“누가 나한테 이런 걸 입혔어? 내가 이런 한복 제일 싫어하는 거 몰라?”
저고리를 벗고 치마를 벗어 내쳤다. 이어서 속바지까지 벗으려던 내 행동이 저 멀리 앞쪽에서 울리는 떠들썩한 소리에 멈추어 버렸다.
“신임 사또 행차시다! 길을 비키 거라!”
나는 어리둥절해서 절친을 돌아보았다. 그녀는 눈물이 그렁그렁해서 나를 바라보며 마치 온 세상이 무너진 듯한 얼굴로 넋두리를 하고 있었다.
“도련님이 간 지 얼마 안 되었는데 향단이 너까지 그러면 나 어떡하냐……”
“도련…… 님?”
“몽룡 도련님 말이다. 가신 지 한달이나 되었는데 종무소식이구나. 떠나기 전 방자를 통해 꼭 서신을 주마 약조하셨건만……”
급기야 절친이 손수건을 꺼내 어깨까지 들먹인다. 이건 해도 너무한다는 생각이 들어 한숨을 내쉬려는 순간, 뭔가 뇌리를 스치는 것이 있어 나는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그러니까 내가…… 타.임.워.프.를 해버린 것이다! 여기 조선 시대로, 전라도 남원으로.
하느님 맙소사!
……
2
조선조 숙종년간. 그러니까 이게 바로 내가 뜬금없이 시간 여행을 해서 와버린 시간대다. 다 그 놈의 그네 탓을 하기에는 너무도 아이러니한 상황이라 나는 현대 내 절친을 닮은 그녀가 내게 옷을 도로 입혀주고 나를 집으로 데려올 때까지 한참이나 망연자실해 있었다.
절친을 닮은 그녀의 이름은 바로 그 유명한 성춘향이었다. 집에 도착하자 얼굴에 꽤 미색이 남아있는 중년의 부인이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야단치는 바람에 알게 된 사실이었다. 아마 춘향의 어머니 월매 쯤으로 추증되는 그 중년 부인의 말에 따르면, 남원 도호부사로 있던 이몽룡의 아버지가 동부승지로 부임해서 한양으로 올라간 지 한달이 되는 날이 바로 오늘이었고, 춘향은 단오 날 그네를 타던 그 자리에서 광한루 쪽을 바라보면서 이몽룡에게 소식이 오기를 눈이 빠지게 기다리다가 그네 곁에서 나를 발견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네에서 떨어진 게 확실해? 다른 조짐은 없었고? ……요?”
조선시대의 존댓말이 습관이 되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월매의 눈이 내 쪽을 무섭게 노려보았기 때문이다.
“어떤 조짐?”
춘향이 내게 물어왔다.
“뭐 하늘에서 상서로운 구름이 떠왔다든가 아지랑이 피는 곳에 갑자기 블랙홀 같은 것이 생겼다든가……”
춘향은 쟤 어떡해 하는 눈길로 나를 보았고, 아까부터 나를 째려보던 월매 마님이 내 쪽을 향해 버럭 소리 질렀다.
“이것아! 빨리 빨래나 하고 집안 청소나 해! 허황한 소리 지껄이지 말고.”
“어머니, 향단인 오늘 좀 쉬게 하자구요. 아직 몸이 채 회복되지 않은 것 같아요.”
다행히 월매 마님이 춘향이 말이라면 들어주는 것 같았다. 월매 마님이 휑하니 나가자 나는 춘향이 앞에 바싹 다가들었다.
“그러니까 말해 봐. 진짜로 털썩 소리밖에 들은 적 없어? ……요?”
“우리 둘 남았어. 향단아.”
춘향은 나를 향해 한쪽 눈을 찡긋해 보이며 웃었다. “평소대로 해. 우리끼린 여염의 말을 쓰기로 했잖아.”
“여염, 그러면 반말해도 돼?”
“니가 나보다 한 살 많아. 진작 그러기로 하지 않았어?”
“너 몇 살인데.”
“이팔.”
지금 머리가 아파 죽겠는데 뭔 구구단인지. 이팔, 열여섯?
이게 어디 열여섯 처자의 얼굴이며 몸매인가? 조선시대에도 식량은 그리 부족하지 않았나 보다. 아니면 월매 마님이 돈이 좀 있거나. 하긴 번듯한 집이며 춘향의 옷차림을 보니 너무 궁색하지는 않은 듯하다. 춘향뿐만 아니라 몸종 출신인 내 옷차림만 봐도 여느 여염집 처자들보다는 훨씬 더 화려하지 않은가. 그런데 잠깐, 내가 반나절 전까지만 해도 도서관에서 춘향에 관한 자료들을 찾아봤는데…… 우연인지 필연인지는 모르겠지만…… 춘향전은 어디까지나 픽션이고, 내가 온 이 시대는 소설 속 시간은 아니지 않는가.
“그래서, 이몽룡을 기다리겠다고?”
내 물음에 춘향은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이었다.
“기다려야지. 그 이가 내게 정표까지 두고 가셨는데……”
아닌 게 아니라 그녀의 손에는 옥반지가 정히 끼워져 있었다. 나는 고개를 돌려 무겁게 한숨을 내쉬었다.
“기다리지 마라.”
“왜 그러는데?”
“이몽룡 안 와.”
“아니야, 꼭 오신댔어.”
“오겠지. 하지만 그건 그가 늙었을 때 일이야.”
“무슨 말인지……”
나는 침까지 튕겨가며 내가 아는 역사 지식을 성춘향 그녀에게 과시했다.
“이몽룡 걔, 한양 가서 과거 급제 한다 쳐. 동부승지 아들에 과거까지 급제했으면 한양의 명문가들이 서로 사위로 삼자 안 하겠니? 그리고 과거 급제하면 임금을 뵈어야지, 벼슬을 받아야지…… 언제 널 생각할 겨를이라도 있겠니?”
“하지만 내게 약조를……”
“했겠지! 서로 좋아 죽고 못 살 땐 하늘의 별이라도 따준다 했겠지. 하지만 현실은 암울한 거야. 솔직히 넌 마님이 거금 들여 명문가 규수처럼 키운 거 빼곤 뭐가 있어?”
“그래도……”
솔직히 춘향의 울먹이는 얼굴을 보니 마음이 편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누가 그녀더러 내 절친을 닮으라 했던가. 현대의 내 절친이 호박을 쓰고 구렁텅이로 들어가려고 하면 나 역시 지금처럼 보따리를 싸고 말릴 것이다. 나는 남 몰래 주먹을 틀어쥐었다. 조선시대로 와서 첫 번째로 해야 하는 일이 이몽룡과 춘향을 갈라놓는 일이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지만 말이다. 암튼 춘향을 위해서나 절친을 위해서나 이몽룡은 반드시 아웃되어야 했다.
“그러니까 헛되이 기다리지 말고 좋은 신랑감 있으면 잡아. 그깟 과거? 살면서 그따윈 하나도 중요하지 않아.”
내 극진한 권유에 춘향은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내가 이렇게까지 춘향을 말리는 데엔 이유가 있었다. 현대에서 우리가 아는 춘향전은 픽션이었다. 사실 춘향과 이몽룡이 광한루에서 만나 서로 백년가약을 맺었다는 사실을 포함해서 그 뒤의 변학도의 횡포, 성춘향의 수청거부, 이몽룡의 암행어사 출도 등 모든 이야기는 어느 누군가가 지어낸 소설이었다. 이건 다 당시 백성들의 염원을 반영한 어느 무명인의 허황한 소설인데 후세사람들이 그것을 진실로 받아들이고 춘향전을 신분을 뛰어 넘는 고귀한 사랑이라고 떠받드는 게 나는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물론 여기에는 내 이름이 춘향전의 몸종 이름과 일치하다는 것도 한 몫 했다.
다들 못 믿겠다고? 그럼 어디 춘향전에 관한 내용을 조목조목 나열해보자.
우선 전라도 남원 도호부사라는 자리는 일반 고을의 사또가 아니라 종3품 관직이다. 즉 우리가 아는 대로 변학도가 낙하산으로 이런 중요한 지방관으로 발령 날 수는 없다는 얘기다. 분명 조정에서 엄한 선발을 거쳐서 남원부사로 부임을 했을 것이다.
그리고 도서관 어느 자료에선가 봤는데 변학도는 지금 겨우 23살이다. 실제로 아까 낮에 길옆에서 가마를 타고 지나는 모습을 얼핏 보았지만, 새로 부임된 신관 사또는 젊고 준수한 인물이었다. 우리가 알던 대로 나이 많고 여자만 밝히는 위인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이다.
백 번 양보해서 이몽룡이 한양에 가서 과거에 급제했다고 치자. 임금이 아무리 노망이 났기로 그런 왕초보한테 지방관을 숙청할 암행어사 보직을 맡긴다고? 지나가던 개가 웃겠다.
[지나가던 개: 하하하…… 그런데 날 왜 불렀니?
나: 아니야, 수고 했어. 가 봐.
지나가던 개: 불렀으면 뼈다귀라도……
나: 뼈다귀도 못 추리기 전에 꺼져.
지나가던 개: 깨갱, 알았어……]
뭐 암튼……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엔 우리 춘향이를 그런 양아치한테 못 보내지. 어디 아비가 부임된 고을에 와서 그 고을 퇴기의 딸이랑 정분이나 나고. 이 한림도 어지간히 속이 타시겠다.
[월매: 내 눈에 흙이…… 그거 내 대사인 것 같은데.
춘향: 우린 백년가약을 약조했어. 그리 비하하지 말아줘.
이 한림: 남이사~ 그리고 지금 난 동부승지거든?]
시끄럽고. “암튼 춘향이 너, 절대 이몽룡 기다리지 마. 점점 처녀귀신으로 늙어가기 싫으면……”
내가 단단히 모를 박아 하는 말에 춘향이 눈을 올롱하게 뜨고 나를 쳐다본다.
“처녀귀신?”
그제야 전설 속 그녀와 이몽룡 사이의 그렇고 그런 일이 생각나서 나는 그녀 대신 얼굴이 후끈 달아올랐다. 아아, 나 이제 17살인데 19금 상상을 해버렸다. 조선시대엔 무슨 애들이 이리 조숙하냐.
“이몽룡 기다릴 바엔 차라리 변학도가 나아. 변학도가 널 얼마나 사랑하게 되는지 넌 모르지? 네가 정인이 있다 해도 그는 집요하게 구애할 거야. 그게 어느 정도였냐면……”
한참 정설에 외설에 야사까지 섞어서 이야기에 열을 올리고 있는데 문득 대문간에서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뉘시오?”
문간에서 월매 마님의 묻는 소리에 누군가가 대답했다.
“이방이오. 사또 나리께서 급히 보내셨소이다.”
드디어 올 것이 왔군. 나는 느리게 한숨을 내쉬었다.
……
3
“이게 다 무엇이오?”
이방이 줄느런히 내놓은 보따리들을 바라보는 월매 마님의 눈이 반짝인다. 호기심에 구경 나온 나와 춘향이는 월매 마님의 속된 모습에 약속이나 한 듯 동시에 한숨을 내쉬었다.
“신임 사또 나리께서 성 참판 나리의 가솔이 여기 있다는 소리에 특히 이 소인을 보내셨수다.”
이방이 얼굴 한 가득 요상한 미소를 지은 채 금은보화며 비단 필륙들을 내어놓는다. 월매 마님의 눈이 그 보따리들을 떠나지 못했다.
“돌아가신 나으리께서 얼마나 고마워하시겠소. 사또 나리께 이리 마음 써주시어 송구하다는 인사를 전해주시오.”
월매 마님의 말이 끝나자 이방은 또 한 번 헤헤거렸다.
“그 외에 간단한 청이 하나 있수다.”
“그것이 무엇이오.”
“사또 나리께서 이 댁에 귀한 소저가 계시다 하여 한 번 뵙기를 청하온데……”
“아, 언제요? 시간, 장소……”
“마님.”
참다못해 내가 버럭 소리를 내버렸다. 이방과 월매 마님이 나를 돌아보았다. 월매 마님은 나를 향해 못마땅한 기색을 지었다.
“향단이, 너 이게 무슨 경망한 작태더냐. 내가 평소에 너희를 어떻게 가르쳤느냐.”
“마님, 드릴 말씀이 있사오니 행랑방으로 잠시 납시옵소서.”
평소에 어떻게 가르쳤건 나야 알 바 없고. 까짓 거, 조선시대 코스프레 한 번 하지 머. 평소 사극을 많이 봤으니 이 정도 사극 톤쯤이야 쉽게 흉내 낼 수 있다.
월매 마님이 툴툴거리며 나를 따라 나왔고 춘향이도 뒤따라 나왔다. 나는 두 손을 내저어 춘향을 내쫓았다. “아씨, 아씨는 방에 가서 어서 수놓이나 하셔요.”
“무슨 일인데, 나도 듣고 싶어.”
“애들 들으면 안 되는 거예요. 가세요.”
춘향을 훠이훠이 내쫓고 월매 마님을 돌아보자, 월매 마님은 나를 쳐다본다.
“우리 집이 노비나 몸종들에게 관대하긴 해도 너 이런……”
“됐고요, 마님. 이몽룡 마음에 안 드시는 거죠?”
단도직입적인 내 말에 월매 마님의 눈이 가늘어졌다.
“응?”
“마님 이 도련님을 싫어하시잖아요. 저 앞에선 커밍아웃 하셔도 돼요.”
“커…… 뭣이라?”
“뭐 암튼, 아씨와 이몽룡 떼어놓는 일 저랑 한 번 손잡고 해보지 않으실래요?”
월매 마님은 고개를 기웃하더니 잠시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나야 그 놈 한량끼가 마음에 안 들어 그렇다 치고, 넌 왜?”
“저야 당연히 아씨가 잘 되길 바라는 마음이죠. 생각해 보셔요. 아씨께서 기약도 없는 사랑을 기다리면 저 또한 처녀귀신으로 아씨를 따라 늙어야 하지 않겠어요?”
“음……” “저도 시집을 가야겠다구요. 그러려면 아씨부터 좋은 데로 보내야죠.”
“그건 그렇지. 그래서 춘향일 변 사또한테 보내려는데 니가 이리 불러낸 거잖냐.”
월매 마님의 말에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마님도 참, 그깟 선물공세에 넘어가시면 딸을 팔았다는 소리나 들어요. 좀 밀당을 합시다, 밀당. 오케이?”
“오…… 오케이?”
“마님께서 전직을 한 번 되살려 보세요. 남자가 만나자는데 덥석 좋습니다 하면 아무리 예뻐도 매력이 절감되지 않겠어요?”
“음…… 그럼 향단이 니 생각엔?”
월매 마님이 솔깃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나는 가슴을 두드리며 호기를 부렸다.
“제가 가서 탐문해 볼게요. 신관 사또가 어떤 사내인지, 우리 춘향 아씨를 과연 행복하게 해주실 수 있는 지를…… 제가 가서 잘 보고 올게요.”
“그래, 하긴 네가 저 춘향이보다 기민하긴 하지.”
월매 마님은 미간을 모으고 한참 생각에 잠겼다.
“그러면 이방한테는 어떻게 얘기하면 좋겠느냐.”
“저 쪽에서 이방을 보냈으니 이쪽에서도 몸종을 보내죠. 간단한 답례품이라도 챙겨서요. 그게 수순이죠.”
“답례품이라……”
“최대한 돈 안 드는 걸로요. 아씨께서 수놓으신 비단 손수건 정도가 좋겠어요. 적당히 은근하고 의미 깊은 걸로.”
“그러자꾸나.”
밀모를 끝내고 다시 사랑채로 나온 월매 마님이 이방에게 말했다.
“우선 사또께 고맙다는 인사를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저희 쪽에서도 답례로 작은 선물 하나 보내드리겠으니 이 아이로 하여금 동행하게 하소서.”
월매 마님이 나를 가리키자 이방의 게슴츠레한 눈빛이 나를 한 번 훑었다.
“이 아이는……”
“우리 아이의 몸종인데 영민하여 딸처럼 아끼는 아이입니다. 가서 사또 나리께 제 뜻을 잘 전달하겠지요.”
“그럽시다.”
심부름이 헛탕을 치는가 싶었는데 그나마 교대를 할 수 있어서 이방은 흡족한 눈치였다. 봇짐들을 두고 이방은 대문간을 나섰고 나는 작은 함을 들고 그 뒤를 따랐다.
하지만 길에서 행인들이 적어지자 이방이 지분거리기 시작했다. 하여간 남자들이란……
“너 이름이 뭐냐.”
“향단입니다.”
“향단…… 거 참 고운 이름이구나. 나이는 몇 살……”
“17이에요.”
“나이도 꽃…… 꽃다운 나이구나.”
이방의 좁은 낯짝이 문득 가까이 다가와서 나는 뒤로 흠칫 몸을 뺐다.
“뭐하시는 거예요?”
“얼굴에 뭐가 묻은 것 같구나.”
그러면서 이방이 손을 내밀어 내 얼굴을 다치려 했다.
“춘향이보다 네가 더 어여쁘구나. 어떠냐? 이 참에 팔자를 고칠 생각은……”
“사또께 이르겠습니다.”
내가 딱딱하게 말하자 이방은 금세 김이 샌 표정을 지었다.
“고 참 맹랑한 계집이로다.”
“이런 말들, 새로 부임한 사또께서 딱히 듣기 좋아하실 말은 아닌 것 같습니다만.”
내가 또 한 번 또렷하게 말하자 이방은 혀를 차며 뒤로 물러섰다.
“누가 뭐랬느냐? 네 상전이 사또를 따르면 네 또한 팔자를 고치는 것이 아니냐? 그 말이 하고 싶었던 게야.”
“네~ 네.” 나는 무심하게 응수하며 이방을 따라 발길을 재우쳤다. 해가 기울 무렵 겨우 관아에 도착하자 이방은 내게 뜰 안에서 기다리라 한 후 사또를 찾아 동헌 안으로 들어갔다.
동헌 뜰에 비낀 저녁노을을 보며 해가 지는 황혼의 아름다움에 잠시 서글픈 생각이 들 때였다.
“어찌 당신이……”
누군가가 등 뒤에서 나를 와락 껴안았다. 나는 작게 숨을 들이켰다.
“……여기까지 걸음 하셨소? 정녕 내가 헛것을 본 것이요?”
나는 몸부림을 치며 벗어나려 했으나 등 뒤의 사람은 억센 팔로 나를 휘감은 채 꿈쩍도 하지 않았다. 문득 선득한 것이 나의 목에 떨어졌고 나는 그의 절절한 모습에 잠시 모든 행동을 멈췄다.
……
4
“그러니 사람을 잘못 보았단 말이지요.”
나는 눈앞의 준수한 사내에게 최대한 화사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잘 생기면 모든 게 용서가 된다. 음, 되구 말구.
그런데 잠깐, 다시 보니 얼굴 한 가득 민망한 표정을 지은 이 남자, 누군가와 닮아있었다. 누굴까…… 맞다, 그 체육 선생님……
그네를 밀어주던 그 훈남 선생님에게 말 몇 마디 더 붙이지 못하고 여기에 와버렸는데 역시 하늘은 내게 관대했다. 나 김향단이 전생에 나라를 구했나, 사람을 구했나.
“아내와 닮았소.”
남자가 작게 중얼거렸다. 아아…… 첫사랑 콤플렉스인가.
“그건 참 영광이에요. 부인께선 지금 어디 계신지……”
부인은 당연히 멀리 떨어져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물어본 것인데 남자의 표정에 언뜻 슬픈 기색이 어렸다.
“사별…… 했소.”
“아아……”
멀리 떨어진 것뿐이 아니라 저승과 이승의 거리구나…… 나는 그 뒤의 말을 잇지 못 했다. 바로 그때 이방이 동헌에서 나와 급히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여기 계셨군요. 사또 나리.”
“사…… 또?”
눈이 휘둥그래진 채 나는 그를 보았고, 그는 고개를 돌려 이방에게 물었다.
“갔던 일은 어떻게 되었는가.”
“여기 그 댁 사람이 와있습니다만.”
이방이 눈짓으로 나를 가리키자 그의 시선이 다시 나게로 향하였다.
“혹, 혹시 춘향…… 아씨?”
“아니예요, 아씨가 이리 직접 걸음할 리는 만무하죠.”
나는 그제야 월매 마님의 당부를 떠올리고 그에게 살짝 허리를 굽혀보였다.
“성 참판 댁 전갈을 가져온 향단이라 하옵니다. 사또 나리께 문안 여쭙겠습니다.”
“이쪽으로 오시오.”
그가 몸을 돌려 동헌 뒤쪽의 작은 별당으로 나를 안내했다. 서로 좌정해서 앉자 나는 가지고 있던 함을 그의 앞에 내려놓았다.
“마님께서 사또 나리의 호의에 감사 인사를 전하라 하셨사옵니다. 이것은 간단한 답례품이오니 받아 주십시오.”
“마님께 고맙다 전하시오.”
그가 함을 한쪽으로 밀어놓았다. 내 시선이 함에서 그의 얼굴로 옮겨졌다.
“안 열어 보십니까.”
“당면에서 열어봐야 하는 것이요?”
“꼭 그런 건 아니지만…… 궁금하지 않으신지요. 아씨께서 주시는 선물이.”
“궁금하지 않소.”
그가 여전히 뚫어지게 보고 있어서 나는 민망한 느낌에 고개를 살짝 돌렸다. “아씨께서 직접 수놓으신 비단 향낭이십니다.”
“그렇소?”
“아씨를 뵙자고 한 일, 혹 전달할 말이 있으시면 소녀가 전달해 드리리다.”
“그건 직접 만나서 할 얘기여서.”
그러면서도 그의 시선이 여전히 내 얼굴에 고정되어 있었다. 나는 하는 수 없이 고개를 돌려 그의 절절한 눈빛을 마주했다.
“구멍이 나겠습니다.”
“……?”
“그리 보시면 제 얼굴이 닳겠습니다. 다시 말씀 드리지만 소녀는 나리의 그 분이 아닙니다. 하오니 그런 눈빛을 거두어 주십시오.”
“그런 눈빛이라니.”
“슬프고 절절한 그런 눈빛 말입니다.”
“……”
“세상 다 끝난 듯 체념하던 사람이 한 가닥 희망의 빛을 발견했다가, 다시 그 불씨가 꺼져버려 절망으로 가득 찬 눈빛 말입니다.”
“……”
“부인께서도 나리께서 이러시는 걸 원치 않으실 겁니다. 그 누구보다 나리께서 행복하게 지내길 원하시는 분일 터이니.”
“……”
“올곧고, 정직하게 정무를 보시어 고을 백성들의 아픔과 슬픔을 헤아려 주시는 훌륭한 사또가 되어주시옵소서. 그러다보면 지금의 이 슬픔, 어느 정도 치유는 되실 겁니다. 자고로 슬픔을 잊는 것에는 바쁜 것보다 더 좋은 약은 없습니다.”
“……”
“그럼 소인은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내가 자리에서 일어서자 그가 급히 따라 일어섰다.
“소저의 성함이 무엇이라 하였소.”
“저희 소저는 성가 춘향……”
“아니, 난 그대의 함자를 물었소.”
나는 잠시 시선을 돌려 그를 다시 찬찬히 보았다.
“김향단입니다.”
“김향단…… 내 단단히 기억하리다.”
그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여 보이고 나는 별당을 나왔다. 날이 어두워졌으니 집으로 돌아가려면 바로 서둘러야 했다. 지금 이 시대에는 가로등도 없고 전기도 없으니 말이다. 다행이 그가 이방을 불러 포졸 두 명을 내게 붙여 집까지 배웅하라고 지시했다. 이방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소인이 다 알아서 조처하리다.”
그도, 나도 이방의 이 말을 믿는 게 아니었는데 말이다……
5
칠흑 같은 밤, 장옷을 머리에 쓰고 길을 재촉하던 나는 인적이 드문 구간에 이르자 뒤에서 따라오는 포졸들의 발걸음소리가 차츰 사라지는 감을 느꼈다.
뭔가 이상하다 여기면서도 설마 하는 생각에 길을 조이던 순간, 앞에서 서너 명의 장정이 길을 가로 막았다. 조선시대에도 강도가 득실거리는군…… 나는 천천히 걸음을 멈추었다.
“이 년이 확실해?”
장정 한 명이 묻자 다른 한 명이 대답했다.
“저 미색을 보니 맞겠군. 손 써.”
“당신들 뭐야.”
나는 뒤로 비실비실 물러섰다. 김향단 인생도 참 버라이어티하다. 타임워프도 모자라서 이젠 강도까지 만나다니. 체육시간에 배운 호신술 정도가 먹힐런지……
“우리를 알 필요까진 없고. 황천에 가서 우리를 절대 원망하진 말거라. 다 시켜서 하는 짓이니.”
장정 하나가 입을 열자 나머지 장정들이 일제히 칼을 뽑아들었다. 아아…… 겁탈이 아닌 청부살인? 내가 뭘 그리 잘못했단 말인가!
장정의 칼이 허공을 가르고 나는 눈을 감았다. 눈물 한 줄기가 얼굴을 타고 흘러내렸다. 이것들 다 죽었어. 내가 조선시대 처녀귀신이 되어 너희들 다 잡아먹을 테니. 목에 선득한 것이 닿는가 싶더니 문득 챙 하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그것이 바로 거두어졌다. 간신히 눈을 뜬 내 앞에 누군가가 막아 나섰다. 방금 전의 칼도 그가 쳐낸 것 같았다. 아아 ,역시 조선시대라 협객이 존재하는 군…… 그리 감탄을 금치 못할 때였다.
어스름한 달빛을 빌어 눈부신 무예로 장정들을 물리치는 도포차림의 남자, 아니 저 사람은 대체……
“사또 나리……”
나는 저도 모르게 울컥 하는 기분이 들었다. 이방에게 지시하고는 마음이 놓이지 않아 몰래 뒤따라온 모양이다. 저런 젠틀함에 단단한 무예실력까지…… 아아, 대체 저 남자는 못하는 게 뭐야.
마지막 남은 장정까지 물리친 그가 나를 향해 돌아섰다.
“괜찮소?”
“저는 괜찮습니다만……”
그의 다정한 눈빛을 보다가 나는 문득 그 뒤의 번뜩이는 칼날을 발견했다.
“나리!”
그는 재빨리 몸을 피했으나 칼날을 완전히 비켜가지는 못했다. 빨간 피가 그의 도포자락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를 향해 칼을 날린 장정은 어둠을 타서 도주해 버렸고 그는 더 이상 쫓지 않고 나를 향해 다가왔다.
“괜찮으시오?”
“피가 납니다.”
“어디?”
그의 눈이 순간 긴장한 빛을 띄는 것을 보며 나는 왠지 가슴이 스르르 해졌다.
“제가 아니라 나리께서 말입니다.”
“아…… 작은 상처요. 소저가 다치지 않았으면 되었소.”
바보 같은 양반…… 나는 입속으로 궁시렁거리며 그에게로 바싹 다가섰다.
“어디 한 번 봐요. 어머…… 상처가 깊네요. 어떡해요?”
“관아에 가서 다시 처치하면 되지요.”
“그래도 지혈은 시켜야지요.”
나는 치마를 걷고 속바지를 북 찢었다. 흰 천으로 그의 팔을 동여낸 후 상처자리에서 피가 더 이상 흐르지 않는 것을 확인하고 나는 고개를 들었다. 그제야 그가 나를 보는 시선이 퍽 괴이한 감을 느끼고 내가 물었다.
“왜 그렇게 보세요?”
“치마……”
“네?”
“그 치마를 내려주시오.” 나는 고개를 숙여 차림을 본 후 급히 치마로 드러난 속곳을 덮었다. 속바지가 찢어져서 단속곳이 드러났고 지금 이 시대에서는 그것이 맨다리를 드러낸 것보다도 더 미묘하고 은밀한 느낌을 줄 수 있다는 것을 그의 복잡한 눈빛에서 알 수 있었다.
“실…… 실은 보려고 한 것이 아니라……”
그가 떠듬거렸고 나는 한참 그를 바라보다가 풋 웃었다.
“알아요.”
“……”
“구해주셔서 고마워요. 나리가 아니었다면 저는 오늘 죽은 목숨이었을 거예요.”
“……”
“저자들은 누구일까요? 왜 절 죽이려 하는 거죠?”
그가 잠시 미간을 모았다. 그리고는 한참 생각에 잠겨 있다가 말했다.
“저자들은 한양 말투를 썼소.”
“네?”
“한양에서 내려온 자들이요. 아마도 성 소저를 노린 자들 같소.”
“춘향 아씨를……”
“내가 오늘 성 소저를 불렀다는 것을 아는 자들이 틀림없소. 그 뜻인즉……”
“그 뜻인즉 관이에 내응하는 자가 있다는 말씀이신가요?”
잠시 이방의 얼굴이 뇌리를 스쳤다. 그가 경이로운 시선으로 나를 보았다.
“소저는 참 기이한 분이시오.”
“제가요?”
“담략이나 지혜가…… 성 소저 댁 식솔로 있기엔 아까운 사람이요.”
“그것이 소인의 팔자인 걸요.”
어울리지 않게 웬 팔자소관이지.
나는 입속말로 궁시렁거린 후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하지만 춘향 아씨의 팔자는 저리 되어선 아니 되지요.”
“나 역시 성 소저를 보호해야 하오. 저 놈들이 오늘 헛탕을 쳤지만 이제 또 성 소저를 해할까 염려되오.”
나는 생각에 잠겨 있다가 살짝 입술을 옥물었다.
한 가지 생각이 뇌리를 스쳤고 그것은 곧 구체적인 방안이 되어 머릿속에서 윤곽을 그려갔다.
“그러면 이렇게 해요. 이제 날이 밝아지는 대로……”
나는 그의 귓가에 낮게 속삭였다. 멀리서 새벽닭이 홰를 치고 있었다.
……
6
“퇴기 월매의 딸 성춘향은 관아로 와서 점고를 받을 지어다.”
이른 아침, 대문간에서 전하는 포졸의 말에 월매 마님의 얼굴은 사색이 되었다.
“향단아, 이게 무슨 변고냐? 내가 기적에서 제명을 한 지도 수십 년인데 왜 춘향이 점고를 받아야 하느냐?”
“그건 저도 잘 모르는 일인데요. 어젠 아무 말씀도 없으시다가…… 혹시 사또께서 답례품이 마음에 드시지 않아서 그럴까요?”
나도 일부러 얼떠름한 기색을 지었다. 우리 둘이 주고받는 말소리에 춘향이는 이불 밖으로 머리를 내밀었다.
“아이 참…… 한양 가신 몽룡 도련님과 상봉하는 꿈을 꾸는 중인데…… 좀 나가서 얘기해요.”
“이것아, 그런 허황한 꿈 얘기는 하지 말고 빨리 일어나.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월매 마님은 춘향의 등을 짝 소리 나게 스매싱했다.
“어제 사또가 부르는데 가지를 않았더니 오늘은 관아에 가서 점고를 받으라는 구나.”
“점고? 난 기녀가 아닌데 왜 그런 과정을 거쳐야 해요?” “누가 아니? 다 이 에미가 못 나서 네게 좋은 출신을 주지 못한 탓이니라.”
월매 마님답지 않게 손수건을 꺼내 눈굽을 찍는다. 나는 악의 섞이지 않은 눈길로 월매 마님을 흘겨보았다.
“그만하세요, 마님. 아씨께선 관아로 걸음하실 거예요.”
“그래주겠니?”
언제 울었냐싶게 월매 마님이 반색을 하며 춘향의 앞에 바싹 다가들었다.
“상처를 해서 혼자라더구나. 나이는 23, 대궐에 뜨르르한 뒷배가 있다는 소문도 돌아. 도호부사들 사이에선 제일 젊다더구나.”
“어머니!”
“깜짝이야, 그렇게 큰 소리 낼 필요 없어 얘, 한양 가신 이 도련님이 언제 온다고 그렇게 기다리겠니? 지금 봐. 간지 한 달인데 서신조차 없잖냐.”
“……”
“향단의 말을 들어보니 생긴 것도 훤칠하니 미남이라고 하더구나. 향단아, 맞지?”
월매 마님이 팔굽으로 나를 툭툭 쳤다. 나는 시선을 들어 옆으로 돌아앉아 입술을 감쳐물고 있는 춘향의 고운 자태를 물끄러미 앉아 바라보았다.
“향단아!”
월매 마님이 이번에는 내 등짝을 사정없이 내리쳤다.
“이건 왜 또 이리 청승맞은 표정이냐? 외간 남자에게 혼이라도 뺐겼냐?”
“아, 쫌!”
나는 고개를 돌리고 저도 모르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아프다고요! 그리고 혼? 정말 낯선 사내들에게 목숨을 빼앗길 뻔 했어요! 그 분이 구해주시지 않았다면……”
“그 분?”
월매 마님과 춘향의 시선이 동시에 내게로 향했다. 나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사또 나리 말씀이에요.”
“그 준수한 사또 나리께서 그리 무예까지 출중하시다니……”
월매 마님은 반색하며 춘향에게로 돌아앉았다.
“들었냐? 당장 관아로 가자. 사또께서 널 부르신다질 않느냐.”
“정확히 말하면 기녀 점고에요.”
나는 월매 마님의 말을 정정했다. 찬물을 끼얹는 게 아니었다. 괜히 기쁘게 갔다가 실망이 클까봐 하는 소리였다.
“내가 가보겠어요.”
춘향이 치맛자락에 바람을 일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월매 마님의 희색만면한 얼굴을 뒤로 하고 춘향을 따라 나선 내 마음은 그리 편하지 않았다.
관아로 가니 이미 한껏 단장을 마친 기녀들이 줄느런히 서있었다. 말이 점고지 실은 신관 사또의 눈에 들어보겠다는 기녀들의 처절한 몸부림이라 하는 게 더 적절하겠다. 그 기녀들을 헤치며 춘향이 서슬 푸르게 안으로 들어갔다. 기녀들이 숙덕거리는 소리가 바람을 타고 우리 귀에 들려왔다.
“누구래?”
“그 한 달 전 소문 짜했던 광한루 앞 그네인연…… 이몽룡을 위해 수절하는 성춘향이라잖아.”
“아, 퇴기 월매의 딸?”
“응. 다들 성참판댁 여식이라고 추켜 세워주지만 기녀가 낳은 딸도 기녀야. 제가 우리보다 나은 게 뭔데.”
“사또 납시오.”
기녀들의 말을 중단하며 전갈소리와 함께 변학도가 동헌 앞에 나타났다. 기녀들의 숙덕소리가 삽시에 감탄소리로 바뀌었다.
“어머, 저 분이 변 사또?”
“최연소 도호부사님?”
“어쩜 귀티가 좔좔 흐르니. 대궐에 빽이 있다는 게 참말이군.”
“빽이 뭐니, 빽이. 우리도 그런 저속한 단어는 좀 쓰지 말자. 뒷배라고 해야지.”
“그런데 노랑머리 쟤는 뭐야? 아까부터 괜히 눈에 거슬리는데.”
“그러게, 처음 보는 얼굴이네. 야, 거기 너. 그래 노랑머리에 얼굴 희고 코 큰 너. 너 어느 기방 소속이니?”
“나? 이태리에서 왔다 왜?”
“다들 조용!”
이방이 소리치자 기녀들이 잠잠해졌다. 이방은 기녀들을 한 번 둘러보면서 입을 열었다.
“성가 춘향이만 남고 다 물러가시오.”
“왜요? 아니 이야말로 짜고 치는 고스톱 아녀?”
“나 새벽부터 일어나서 신부화장 했는데 뭐지?”
“우리 이태리에도 이런 일 없었어요.”
이방은 기녀들을 쫓아냈지만 몇몇 기녀들은 여전히 미련을 버리지 않고 관아 대문에서 기웃거렸다. 뒤이어 넓은 동헌 뜰에서 이방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춘향이 네 본읍 기생으로 신관 도임 초에 현신 아니 하기를 잘했느냐.”
춘향이 고개를 들고 또렷하게 대답하였다.
“소녀는 구관 사또 자제 도련님을 모시는 고로 대령치 못하였습니다.”
“뭬야! 너 같은 기생 따위가 수절이라니! 쳇, 잔말 말고 오늘부터 신관 사또의 수청을 들거라.”
“소녀 만 번 죽어도 그것만은 절대, 절대 못하옵니다.”
오오, 그래, 바로 이거야. 나는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이것이 바로 후세에 전해진 “춘향전”의 내용이지 않은가. 또한 어젯밤 변학도에게 내가 대어준 계책이기도 했던 것이다.
……
7
어젯밤, 난 변학도에게 이리 알려주었다.
“춘향 아씨를 보호하고 싶다면 방법이 없진 않죠.”
“무슨 방법이오?”
“날이 밝는 대로 성 참판 댁에 사람을 보내세요. 기녀 점고를 한다 하시고 춘향 아씨를 불러내세요.”
“연후엔?”
“그리고 춘향 아씨한테 사또 나리의 수청을 들라 하세요.”
“아…… 그건.”
“연기를 잘 하지 못하겠거든 이방을 시키세요. 그런 거 잘할 거에요.”
“아……”
과연 지금 보니 이방은 변학도가 시키는 대로 착실하게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저런 고얀 년을 보았나. 여 봐라…… 당장 형틀을 대령하거라.”
이방이 집장을 바라보자 집장이 머뭇머뭇거렸다.
“저기…… 이방나리.”
“뭣이?”
“형틀이 고장났는뎁쇼.”
“뭐라.”
“수리를 불렀는데 요즘 이놈들이 업무태만이 장난 아닙니다. 24시간 지났는데 그냥 기다리라는 전갈만……”
“에라이, 이런 바보 멍충이들.”
이방이 벌컥 화를 내자 변학도가 손을 들어 그를 제지시켰다.
“일단 성소…… 성춘향을 하옥하시오.”
“네, 사또 나리.”
춘향이 옥으로 끌려가자 나는 변학도를 바라보았다.
“저도 같이 들어가겠습니다.”
“아니…… 같이 들어가시면 소식을 전할 이가 없습니다.”
변학도가 나지막하게 대꾸했다. 그는 동헌 뜰 안의 사람들이 다 물러가기를 기다렸다가 그제야 내게 시선을 주었다.
“옥바라지는 춘향의 어머니를 부를 테니 소저는 다음 일정을 알려주시오.”
“다음…… 다음은 저도 전혀 모르는 일입니다.”
“네?”
“이몽룡이 암행어사가 되는 일은 그리 현실적이지 않으니 말입니다.”
“네에?”
변학도는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소저는 이몽룡을 잘 아시오?”
“저야 잘 모르죠. 다만 아무리 과거에 급제 한다 쳐도 그 누구든 암행어사 직을 바로 전수받을 수는 없잖아요.”
“그렇소만.”
“일단은 지금으로서는 옥이 제일 안전해요. 누가 옥까지 뛰어 들어서 목숨을 해하겠습니까. 어제 범인은 제대로 알아보셨나요?”
“아…… 아무래도 한양에 있는 성 참판 댁 자제들이 하수인 같소.”
변학도의 말에 나는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성 참판의 자제들…… 그 사람들이 왜 춘향을 해하려 할까요? 그것도 지금껏 뭐하다가 이제야 와서.” “글쎄, 그 사람들을 빼고 딱히 짐작 가는 사람들이 없소. 성 소저를 해하려는 이유는 범인을 잡아야 추궁할 수 있소.”
나는 머리를 끄덕였다. 변학도에게 왜 춘향을 보호하고 싶어 하는 지를 묻고 싶었으나 그것만은 참았다. 사내가 여인을 보호하고 싶어 한다면 연정 밖에 무엇이 있겠는가. 묻는 내가 바보일 것 같았다.
그 후의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월매 마님이 통곡하면서 관아로 와서 춘향이를 옥바라지 한 것을 제외하고는 별로 특별한 일이 없었다. 동헌에서, 별당에서, 혹은 그날 내가 봉변을 당할 뻔한 수림이나 번화한 저잣거리에 나와 변학도의 모습이 심심찮게 보였다. 우리는 한양말투를 쓰는 장정들을 찾았으나 수확은 거의 없었다.
“춘향 아씨를 너무 안전하게 숨겼어요. 놈들에게 미끼를 던져줘야 해요.”
내가 미간을 모으며 말하자 변학도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곧 내 생일이요. 춘향을 생일날에 수청을 들라고 옥에서 나오게 하는 방법은 어떻겠소?”
“그게 좋겠네요. 내가 아는 책 내용과도 맞군요. 그러면 일단 소문을 퍼뜨리세요.”
나는 말을 멈추고 잠시 그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괜찮으세요? 이번 일로 나리 평판이……”
“그런 건 상관없소. 성 소저만 무사할 수 있다면.”
춘향에 대한 그의 마음이 과연 이렇게도 컸던 것인가. 나는 이제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관아로 돌아오는 길에 작은 웅덩이가 있었다. 금방 비가 내렸는지라 웅덩이에는 물이 잔뜩 고여 있었다. 춘향에 대한 변학도의 마음을 생각하느라 골똘해있던 나는 웅덩이를 지나는 마차 한 대를 미처 발견하지 못하고 말았다. 이랴 소리를 듣고 펄쩍 피하려 했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촤악. 물이 튕기는 소리와 함께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예상했던 물벼락은 없었다. 조심스럽게 눈을 떠보니 누군가가 내 앞을 버티고 서있었다. 흙탕물이 얼굴이며 몸에 튕겨 엉망진창으로 된 변학도가 넓은 도포 소매로 나를 감싸고 있었다.
“나리……”
잠시 고개를 든 나의 시선이 순식간에 그의 눈빛과 엉켰다. 비록 흙물이 흘러내려 그의 준수한 얼굴이 거뭇하게 변했지만, 비록 진흙이 튕겨 그의 단정한 옷차림이 엉성하게 보였지만, 나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그토록 깊고 진지했다. 나는 입술을 달싹거렸지만 끝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길을 조심하시오.”
“옷은…… 제가 세탁해 드리리다.”
이것이 관아까지 오면서 우리가 유일하게 주고받은 말이었다.
……
8
관아로 돌아온 나는 곧바로 옥으로 가 춘향을 만났다.
“일단 수확은 크지 않고, 우리 계획은 대개 이래……”
춘향은 옥 안에 있다 뿐이지 기거에 전혀 불편함이 없게 해주었다. 그리고 그녀에게는 언녕 우리 계획을 오픈했다. 얼굴에 바로 표가 나는 월매 마님에게 비밀로 하라는 전제를 붙여서 말이다. 월매 마님이 집에 옷을 가지러 간 틈을 타 나는 그녀에게 우리 계획을 상세하게 얘기했고 그녀는 내 말에 고개를 기웃거렸다.
“사또 나리 생신?”
“응, 아직 보름 남았어.”
“그렇구나.”
나는 고개를 숙여 품속에서 흰 명주수건 몇 개를 꺼냈다. 아까 변학도와 나갔을 때 저자거리에서 사온 것이었다.
“이건 네가 일전에 부탁한 거. 명주수건에 수놓이를 하고 싶다며?”
나는 고개를 돌려 그녀가 한 쪽에 쌓아놓은 일거리들을 보았다.
“재주가 좋으니 바느질 부탁하는 사람들도 많네. 그거 쉬워?”
“뭐가?”
내가 눈짓으로 그녀의 손에 들려있는 명주수건을 가리켰다.
“수놓이 말인데, 나도 좀 가르쳐줘.”
“지금 배워서 뭐하려고?”
“나도 수놓이 손수건을 선물로 해주고 싶어서.”
“네가? 누구한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춘향은 나를 빤히 쳐다보더니 웃으면서 내게 손짓했다.
“얼른 들어와.”
나는 옥 안으로 들어가서 그녀 옆에 바싹 붙어 앉았다. 그녀가 수놓이 틀 하나에 명주수건을 고정시켜서 내게 주었다. 수놓이 틀에 바늘을 대던 나는 그만 아야 하고 비명을 질렀다.
“찔렸어……”
빨간 피가 삽시에 하얀 명주천 귀퉁이를 물들였다. 춘향은 그 곳을 유심히 내려다보다가 첫 코를 떼기 시작했다. “향단이 니 이름을 본 따서 여기 귀퉁이에 목단 꽃을 수놓자꾸나.”
“알았어. 하나하나 가르쳐줘.”
“그런데 너 수놓이를 할 줄 몰라?”
“내가 허드렛일만 했지, 언제 수놓이를 할 새 있냐?”
다행이 그녀는 내 말에 더 이상 의심을 하지 않았다. 수놓이를 하면서 나는 그녀에게 물었다.
“한양 가신 이 도련님 말이야.”
“응.”
“만일 돌아오지 않으신다면 넌 도대체 어떡할 거야.”
“수절하지.”
“정말?”
“당연하지.”
“변 사또는 어떻게 생각하는 거야?”
“사또 나리?”
춘향이 잠시 수놓이를 멈추었다. 나는 감히 그녀의 눈을 쳐다보지 못하고 수놓이틀에만 시선을 고정시켰다.
“향단이 너, 사또 나리가 정말 나한테 마음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춘향이의 말에 나는 고개를 숙였고, 그녀는 풋 하고 웃으며 손으로 내 이마를 찔렀다.
“바보.”
“내가 왜 바보야.” 나는 저도 모르게 발칵 했고 그녀는 입술을 오무리고 웃었다.
“암튼, 너나 사또 나리는 둘 다 바보야.”
“내가 바보일지는 몰라도 사또 나리는 아니거든.”
그 분이 얼마나 머리가 좋고 훌륭한 사람인지 모른다고 어필하려던 나는 그만 입을 다물고 말았다. 인정하기 싫었지만 마음 한 구석에서 작게 속삭이는 소리를 나는 듣고야 말았다. 아아…… 나 설마, 그 사람을 좋아하는 건가.
생각해보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는 젊고, 준수했고, 착하고, 다정다감했다. 그런 그를 누가 좋아하지 않으랴. 어쩌면 동헌 뜰 안에서 처음 그를 만났을 때부터, 나의 마음은 이미 그 한 사람으로 가득 차 있었을 지도 모른다. 수놓이 틀을 내리고 나는 가늘게 한숨을 내쉬었다.
“나 어떤 책을 봤는데 말야.”
“책? 어떤 책? 금서야? 어느 세책방에서 빌렸어?”
춘향이 눈을 반짝거렸고 이번에는 내가 그녀의 이마를 콕 찔렀다.
“그저 금서만 밝히면서…… 그 책의 주인공 이름이 바로 춘향이어서 인상 깊었어.”
“그래? 어떤 내용인데?”
“응, 책 제목은 춘향전이라고…… 주인공 춘향이 한양 가신 도련님을 위해 수절하다가 옥에 갇혔는데, 그 도련님이 암행어사로 내려와서 춘향이를 구해주고 아내로 맞이한 이야기인 거야.”
“어머, 그거 내 이야기네? 향단이 니가 세책방에 팔았어? 내 이야기를?”
춘향의 말에 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게 어떻게 네 이야기냐? 넌 몽룡 도련님이 암행어사로 내려오는 게 현실적으로 가능하다고 생각해?”
“못 될 것도 없지.”
“그래, 내려온다고 치자. 그 집안에서 널 받아들일 수 있을 거 같아?”
“그렇게 이것저것 다 겁내면 그게 어떻게 사랑이냐?”
춘향의 당당한 말에 나는 머리를 한 대 호되게 얻어맞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나는 멍하니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사랑?”
“그래, 이것저것 조건 따지면 그게 어떻게 사랑이야? 사랑은 그런 거 다 배제되어야 해. 집안, 가문, 현실적인 가능성 다 따지면 그건 맞선이지 사랑이 아니야.”
“……”
“한양 가신 도련님과 백년가약을 약속할 때, 난 도련님이 꼭 돌아와서 나를 아내로 맞이하기를 바라서가 아니었어.” “그럼 왜 수절하고 기다리는데.”
“내 마음을 지키기 위해서.”
“마음……”
“향단아, 니가 아무리 나더러 도련님 기다리지 말라고 하여도, 어머니가 아무리 나를 사또 나리께 밀어도, 내 마음은 오직 몽룡 도련님 한 사람만 바라보고 있으니까. 그걸로 된 거니까.”
“……”
“설령 도련님이 평생 다시 여기로 못 오신다 해도, 내겐 추억이 있으니까. 평생 그 추억을 간직하고 살아갈 거야.”
“춘향……”
“수동적으로 기다리는 게 아니라, 그 사람이 편하게 살아갈 수 있게 해주는 거야. 집안이 반대하면 안 와도 되니까. 과거에 급제하고 명문가 부인 맞이해도 되니까…… 나, 그냥…… 지금 이 자리에서…… 조용히 내 마음 지킬 수 있게 해주라.”
나는 고개를 떨구고 나직이 중얼거렸다.
“바보는 우리가 아니구나.”
“응?”
춘향이 시선을 들자 나는 희미하게 웃어보였다.
“고마워. 그런 얘길 해줘서.”
“고맙긴 뭘……” “나도 이젠, 다시 용기를 낼 수 있을 거 같아.”
“무슨 말이야?”
“암튼…… 수놓이만 잘 가르쳐줘. 목단을 수놓는다 했었지?”
우리는 옥 안에 나란히 붙어 앉았다. 달빛이 처마 밑에 걸려 춤추고 있었고 수놓이의 밤은 깊어만 가고 있었다.
……
9
드디어 변 사또의 생일이 되었다. 아침부터 여러 고을 부사들이 들이닥쳤고 관아는 하객들로 북적거렸다. 내가 일러준 대로 소문을 퍼뜨린 결과였다. 어쩌면 모여든 사람들은 사또의 생일을 축하하기보다 춘향의 운명이 궁금해서일 지도 몰랐다.
별당 앞에서 나는 의관을 정제하고 나가는 변학도를 잠시 만났다.
오늘따라 그의 얼굴이 더 눈부셔 보이는 건 단지 의상 탓이었을까.
“경계를 삼엄하게 하고 성 소저의 곁도 단단히 보호하라 일렀소.”
변학도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인 후 소매 안에서 뭔가 꺼내어 조심스럽게 그의 앞으로 내밀었다.
“받아요.”
“이건……”
그것을 받아 펼쳐보던 그의 얼굴이 야릇하게 일그러졌다. 나는 고개를 숙이고 혀 아래 소리로 중얼거렸다.
“선물이에요. 나리께서 여러 가지로 도와주시니……”
문득 그의 그림자가 나를 덮었다. 뒤이어 그의 손이 덥석 내 손을 잡아 눈앞에 끌어당겼다. 나는 깜짝 놀랐다.
“사또 나리……”
“대체……!”
그가 화를 내는 것을 나는 처음 보았다. 아아…… 잘 생긴 사람은 뭘 해도 그냥 그림이다. 나는 멍하니 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이게 뭐라고 손이 이 지경까지 된단 말이요!”
그제야 이 며칠 바늘에 찔려 엉망이 된 내 손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급히 손을 빼낸 후 소매 안으로 감추었다.
“아프지 않아요.”
“손이 이 지경이 된 이유가 고작 명주수건에 수국을 수놓기 위함이었소?”
“……목단인데요……”
“아.” 그가 금세 표정을 풀었고 나는 울상이 되어 그를 보았다.
“그렇게도 알아보기 힘든가요?”
“아니오. 절대 아니오. 내가 꽃에 무지하여 그렇소. 어디 보자. 이게 바로 목단이라는 게요?”
“차라리 바느질이 엉망이라 웃는 것이 그런 어설픈 위로보단 낫습니다.”
말을 내뱉고 보니 그가 정말로 입귀를 당겨 웃고 있어서 나는 바짝 약이 올랐다.
“웃으라고 진짜 웃는가요?”
“내가 어떻게 하면 좋겠소.”
“……”
“사과하리까, 아니면 마음에 품은 말을 하리까.”
문득 진지하게 물어오는 그의 질문에 내 심장이 한 박자 놓쳤다가 다시 세차게 뛰었다. 나는 짐짓 딴청을 피웠다.
“지가 송중기인가.”
“어떻게 해야 그대가……”
“나리! 사또 나리!”
아오, 저 놈의 이방을 거저 확…… 정말이지 인생에 도움이 안 돼.
“무슨 일인가.”
“곡성의 도호부사 나으리께서 뵙기를 청하옵니다.”
“곧 나간다 일러주시오.” 이방이 나가자 변학도는 고개를 돌려 연연한 눈빛으로 나를 보았다.
“오늘 연회를 파하면 잠깐 나 좀 볼 수 있겠소?”
“네, 어디서요.”
“여기 별당에서 기다리시오. 그대에게 할 말이 있으니.”
“저도 할 얘기가 있어요. 여기서 기다릴게요.”
내가 대답하자 그는 머리를 끄덕인 후 명주수건을 정히 접어 품 안에 넣고 동헌 앞으로 나갔다. 나는 할 일이 크게 없는 지라 주방 쪽으로 가서 기웃거리며 일을 도왔다. 하지만 그의 말이 신경 쓰여서인지 하루 종일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그렇게 오후가 되어 연회에 올려야 할 과일접시를 세 개 째 깨뜨렸을 때 나는 문득 뭔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그러니까 놈들이 너무 조용했다. 애초에 춘향을 노린 놈들이라면 아마 춘향이 그들의 전정을 막는 걸림돌이 되어서 제거하려는 목적일 것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우리가 조사한 결과 성참판댁 자제들은 각 지역에 뿔뿔이 흩어져 딱히 조정의 세력구도를 이루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놈들의 타깃은……
문득 어둠 속에서 변학도를 향해 칼을 날리던 장정의 모습이 떠올라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치맛자락에 바람을 일구며 동헌 앞뜰에 도착했을 때였다.
마침 내 쪽을 바라보는 변학도와 면바로 시선을 마주쳤다. 내가 가만히 손짓하자 그는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누군가가 그에게 술을 권했고 그는 급히 그것을 받아 마신 후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는 몸을 돌려 먼저 별당으로 향했다.
“무슨 일이요.”
술기운이 올라 살짝 붉어진 얼굴과 다소 거칠어진 숨결로 다가온 그가 나를 향해 물었다. 나는 다급히 말했다.
“아무래도 수상합니다.”
“뭐가요.”
“놈들이 너무 조용해요. 춘향 아씨가 목적이 아닐 수도 있다는 얘기에요.”
“성참판댁 자제들이 혹 춘향과 이몽룡의 일이 세간에 퍼지면 가문 망신이 된다 생각해서 그러는 거 아니겠소?”
“그것을 따질 위인들이 못 돼요. 이미 성 참판 나으리께서 수십 년 전부터 이곳에 자리 잡고 계셔서 가문망신은 그때 다 한 거죠. 지금 와서 새삼스럽게 춘향 아씨를 꺼리다니요.”
“듣고 보니 그렇소. 그렇다면 수사의 방향을……”
“네, 소득이 없었던 건 지금까지 수사의 방향이 틀렸기 때문이에요.”
“범인의 동기부터 다시 찾아야겠소. 누굴 노린 것인지.”
나는 그를 바라보며 오랫동안 우려해왔던 일을 드디어 입 밖으로 꺼내기로 마음먹었다.
“범인의 목적은 바로…… 사또 나리가 아닐까요?”
놀랄 줄 알았는데 의외로 담담해있는 걸 보면 그 또한 어느 정도 짐작은 하고 있은 듯 했다. 그가 느리게 말했다.
“내가 그 목적이라면 난 하수인이 누군지 알겠소.”
“네?”
“이제 성 소저와 그대는 이 사건에서 빠지시오. 오늘 연회를 파하면 내가 자연……”
문득 그가 말을 중단했고 그를 바라보던 나는 놀라서 두 손으로 입을 막았다. 붉은 피가 그의 입가에서 흘러내려 옷 앞섶을 둥글게 적시고 있었다.
……
10
“사람을 부르겠어요!”
나는 당황해서 소리 질렀다. 변학도가 손을 들어 나를 제지시켰다. 아플 텐데…… 아팠을 텐데…… 어찌 참고 있었을까.
“극독이요. 시간 낭비 하지 마시오.”
“어느 놈들이에요? 하수인이 대체 누구인 거예요?”
나는 이를 악물었다. 이리 순수한 사람을, 이리 올곧은 사람의 목숨을 거두어가는 사람은 대체 누구란 말인가!
“이리 와주시오.”
그가 손을 내밀었고 나는 바싹 다가가서 그의 손을 잡았다. 내 손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그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많이 아팠을 텐데.”
“사람이 왜 그리 바보에요!”
눈물이 걷잡을 새 없이 후드득 떨어졌다. 나는 울면서 그에게 푸념했다.
“지금 이까짓 손의 상처가 뭐라고……”
“사람은 말이요…… 죽기 전에 참 회한이 많이 드는군.”
그가 천천히 시선을 들어 나의 얼굴을 응시했다.
“그동안 왜 내 마음을 말하지 않았는지…… 그동안 왜 우리 시간을 아끼지 않았었는지……”
“사또 나리……”
“은애하오.” “……” “은애하고 또 은애하오. 이 말이 하고 싶었던 거였소. 이런 상황에 말하는 건 아니지만.”
“……”
“아내의 그림자로서가 아닌, 성 소저도 아닌, 오롯이 당신을 말이요.”
“그걸 왜 이제야 말해요!”
나는 눈물범벅이 된 얼굴을 들고 그를 쳐다보았다.
“춘향 아씨가 아닐까, 돌아가신 부인 대신이 아닐까…… 그동안 나더러 온갖 상상 다 하게 만들면서 말이에요!”
“미안하오……”
“나빠요…… 당신, 나빴어요……”
“이 한림과는…… 사제의 교분이 있소.”
그가 화제를 돌렸고, 나는 한 마디라도 놓칠 세라 귀를 기울였다.
“몽룡은 문, 나는 무를 좋아했는데, 이 한림께 문장을 가르침 받으면서 몽룡과도 막역한 사이가 되었소.”
그가 춘향을 연모한다는 엉뚱한 상상은 대체 왜 한 걸까.
“몽룡의 부탁을 받았소. 신관 사또로 이 한림께서 나를 추천하셨으니, 부임하면 부디 성 소저를 보호해 달라고 말이요. 그가 다시 올 때까지……”
“아……” “내 소임을 다 하지 못해…… 몹시 유감이오.”
“그런 말 하지 마세요. 당신은 최선을 다했어요. 덕분에 저희도 안전 했구요……”
“마지막으로 한 가지 부탁이 있소.”
내 손을 잡은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나는 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내 죽음을…… 덮으시오. 세간에 알리지 마시오.”
“그게 어떻게 가능해요?”
“소저의 지혜로 가능하오. 이 길로 나는 변복을 하고 빠져나가 조용한 곳을 찾아 생을 마감하겠소. 나를 아는 사람이 없는 곳까지 최대한 말을 달려보려 하오. 그러니 이 일은 그대만 함구하면 되오.”
“저도 같이 가겠어요!”
“그건 안 되오. 그대에게 그런 모습을 보일 수 없으니……”
“누가 뭐라도 난 같이 가겠어요!”
내가 고집을 부리자 그는 무가내한 한숨을 내쉬었다. 바로 그때 동헌 앞뜰에서 뭔가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암행어사 출도야……”
변학도는 희미한 미소를 얼굴에 그렸다.
“끝내…… 왔군.”
“몽룡 도련님인가요? 이제 막 과거 급제한 분에게 이런 요직을 줄 수도 있군요……”
“주상 그 분은…… 바로 그런 분이기도 하오.”
변학도가 쓸쓸하게 입 꼬리를 올려 웃었다. 그리고는 뭔가 결심을 다진 듯한 눈빛으로 그가 나를 보았다.
“물 한 대접만 떠줄 수 있겠소?”
“아…… 네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급히 일어서려는 나를 그가 힘주어 끌어당겼다. 나는 몸을 가누지 못하고 그의 품 안으로 쓰러졌다.
잠시 서로의 온기를 느끼며 우리는 그 자세로 한참 가만히 있었다. 그리고 그는 떨리는 손으로 내 어깨를 밀어냈다.
“만일 다음 생이 있으면……”
“……”
“이 손을 놓지 않겠소.”
“……”
“약조하리다.”
“물 금방 떠올 게요. 조금만 더 기다려 주세요.”
왈칵 쏟아져 나오는 눈물을 보이기 싫어 나는 일어섰다. 우리에게 다음 생은 있다. 당신의 후생과도 만났다. 그리고 내가 여기로 오게 된 것이다. 그에게 이런 말들을 들려줘야겠다. 내가 알고 있는 춘향전의 이야기도 들려줄 것이다. 내가 그를 얼마나 연모한다는 것도 알려줘야겠다. 그리 생각하며 물 한 사발을 떠서 되돌아왔을 때였다.
물 사발이 내 손에서 미끌어져 산산조각이 났다. 내 마음도 커다란 슬픔에 휘감겨 산산이 부서지고 말았다.
……
11
그네 터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자그마한 봉분 하나가 섰다. 이름도 밝히지 않은 봉분이었다. 그의 유언대로 우리는 그의 마지막을 비밀에 부쳤다. 암행어사가 출도해서 신관은 파직을 당하는 걸로 그 번 소동이 마무리 되었다.
“향단아.”
춘향이 옆에서 내 어깨를 끌어안았다. 나는 퉁퉁 부은 눈을 간신히 들어 그녀를 보았다. “나 괜찮아.”
“얼굴이 그 모양인 데도 괜찮아?”
내가 대답이 없자 그녀는 뒤에 선 이몽룡을 돌아보았다. 이몽룡은 천천히 내 쪽으로 다가왔다.
“학도 형의 서신을 받았소.”
이몽룡이 입을 열었다. 나는 현대 어문 선생님을 닮은 그의 단정한 얼굴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우리에게 춘향전 주제토론을 시키던 어문 선생님의 전생이 이몽룡이었다는 사실은 이젠 놀랍지도 않았다. 그를 떠나보낸 내 마음 속이 이토록 텅 비었음에야.
“향단에 대해 언급했소.”
“뭐라고…… 하시던가요.”
“사랑스러운 처자라 하셨소. 언젠가 모든 것을 내려놓고 은퇴할 때엔, 향단이와 함께 갔다고 생각하라 하였소.”
말라서 더 이상 없을 것 같던 눈물이 또 주르륵 흘러내렸다.
“왜 그런 분을 이렇게…… 대체 누가 한 짓일까요.”
“……환국의 희생품이요.”
“환국……”
“지금의 주상께서는 여러 차례 환국을 거쳐서 왕권을 든든히 하신 분이요. 그런 피비린 과정을 거친 조정이기에 단 하나의 티끌도 용납하지 않소. 학도 형은 아마 출신이 죄가 된 것이요.”
“과거 급제한 신인을 암행어사로 파견하는 패기도 있으신 분이, 당쟁의 희생은 결국 막지 못하는 군요.”
나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보면 변학도 역시 그런 말을 했었다. 그러고 보면 그는 누가 자신의 목숨을 거두어 가는지 알면서도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은 채 초연하게 생을 마감한 것이었다. 충직하고 사려 깊은 그에게 세간은 어떤 평가를 내렸던가.
춘향과 이몽룡의 모습이 차츰 멀어져가는 것을 보다가 나는 그의 봉분 앞에 소책자 하나를 내려놓았다.
“당신…… 이 모든 것이 오픈되길 원하지 않으신다고 하셨죠. 그러면 저도 당신 뜻을 존중해 드릴게요. 세책방에 이야기를 풀어 이 책을 쓰게 했어요. 제가 여기 와서 할 수 있는 일은 이젠 더 이상 없는 것 같네요……”
나는 허리를 굽혀 봉분을 향해 정중히 절을 올렸다.
“다음 생에…… 다시 만나면…… 저를 기억해 주세요.”
바람에 책자가 날려 [춘향전]이라는 제목이 드러난다. 나는 마지막으로 그것을 눈 안에 넣은 후 그네 터로 향했다.
그네 터에는 나 말고도 또 한사람이 더 있었다.
“날 불렀다고 들었는데, 왜? 대체 용건이 뭐야?”
월매 마님이 속하여 있던 기방에 새로 왔다는 노랑머리 이태리 기생은 우리말을 아주 능숙하게 잘하였다.“너도 현대에서 왔냐?” 단도직입적인 내 말에 이태리 기생은 눈을 크게 떴다.
“그럼 너도?”
“당연히 나도 현대에서 왔으니 알지. 넌 어떻게 왔는데?”
“유학 와서 그네를 타다가…… 이건 사고였어.”
“역시 그네였구나.”
나는 쓸쓸한 미소를 입가에 머금었다. 현대로 돌아갈 방법을 나는 어쩌면 미리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돌아가기 싫어서 미적거렸을 수 있었다.
이태리 기생의 놀란 시선을 뒤로 하고 그네에 올라서서 발을 동동 굴렀다.
저 멀리 아스라이 떠있는 붉은 구름과 높은 하늘이 차츰 발밑으로 가까워오고 있었다.
나는 그의 얼굴을 눈 앞에 떠올리며 조용히 두 눈을 감아보았다. 그리고는 다시 두 손을 놓았다.
“사랑해요……”
……
12
하얀 벽과 커튼이 쳐진 이곳, 그래…… 이 곳은 바로 학교 의무실이다. 나는 몸을 일으키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향단아!”
절친 년의 소프라노 목소리에 나는 와뜰 놀랐다.
“깜짝이야, 여자가 좀 조신할 수는 없겠느냐?”
“뭐야?”
나는 정신을 가다듬고 머리를 마구 가로저었다.
“아니다, 너 언제부터 이러고 있었어?”
“별로 다친 덴 없는데 줄창 자서 걱정하고 있었잖아!”
“그래?”
“거의 하루 종일 잤어. 더 안 깨면 병원 데리고 가야 한다 하셨어.”
절친 년의 말이 끝나기 바쁘게 드르륵 커튼이 열렸다.
“깼으면 좀 가지? 의무실이 이제 니네 집이냐?”
나는 부랴부랴 침대에서 내려 절친과 함께 의무실을 나왔다.
“체육 선생님은?”
“아, 아까 니 일로 교장 쌤한테 불려갔어. 아마 한소리 들을 걸.”
“체육 선생님 탓이 아니잖아.” “그걸 누가 모르냐? 그래도 실습도중 사고가 났으니 책임질 사람이 필요한 거지.”
대체 전생이나 이생이나 이 남자의 운명은 왜 이리 짠한지…… 나는 그 길로 교장실로 찾아갔으나 문이 잠겨 있었다. 그 후 체육 선생님을 다시 만나서 해명이라도 해주려고 했는데 이상하게 그를 만날 수 없었다. 다행이 절친의 인맥이 넓었다.
“체육 선생님 원래부터 여긴 임시로 실습 오신 거래. 지금 다시 학교로 복귀하셨대.”
“뭐? 어느 학교인데?”
“그것까진…… 너도 참, 그걸 꼭 알아내야 하냐? 너도 이쯤하면 됐지 않아?”
드디어 절친이 짜증을 냈고 나는 할 말이 구구해졌다. 절친에게 이 모든 것을 설명한다면 나는 그 이튿날 정신병원에 수감될 수도 있었다.
이렇게 그와 나의 기묘한 인연은 이대로 끝인 걸까. 나는 고개를 들고 시리도록 허한 웃음을 지었다.
……
4년 후, 모 대학 캠퍼스 안.
이미 2학년생이 된 나는 캠퍼스를 산책하다가 놀랍게도 한 익숙한 얼굴을 보았다. 다가가서 어깨를 터치했더니 그녀도 깜짝 놀라 뒤돌아보았다. 우리는 서로 이름을 알지 못하는 지라 눈을 크게 뜨고 마주보기만 했다. 드디어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유학 온 학교가 이 학교야?”
“언제 돌아온 건데?”
노랑머리 이태리 기생…… 아니, 이태리 유학생이었다. 그네에서 떨어진 내가…… 아니, 향단이 꼼짝도 하지 않자 더럭 겁이 난 노랑머리는 달려가서 춘향과 이몽룡을 불렀다고 한다. 하지만 다시 돌아왔을 때 향단은 그 자리에 없었고, 결국 그들은 향단이 변학도를 따라 순정(殉情)했다고 여기고 둘의 봉분을 합장해 주었다고 노랑머리는 전했다.
“그러면 후생에 다시 만나 인연을 이어갈 수 있다고 했어.”
후에 기방에서 그네 시합이 있었는데 그녀를 시기하는 누군가가 뒤에서 밀어 그녀는 그네에서 떨어졌다고 했다. 그렇지 않으면 겁이 많아 아직도 돌아오지 못했을 거라고 노랑머리는 웃으면서 말했다. 나는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노랑머리와 헤어진 후 나는 묵묵히 캠퍼스 체육관을 배회했다.
인연…… 그 번 그네 사고 이후 백방으로 수소문 했지만 체육 선생님은 어디에도 없었다. 나와 그의 인연은 그 번이 끝일 지도 모른다고 나는 체념하던 참이었다.
체육관 뒷문을 지나다가 나는 부지중 걸음을 멈추었다. 잠시 고개를 숙이고 있던 나는 다시 오던 걸음을 되돌아갔다. 체육관 안에서 누군가가 농구를 하고 있었고 나는 뒷문에 가만히 서서 그것을 바라보았다.
잠시 후 인기척을 느꼈는지 그 사람이 나를 돌아보았다.
“신입?”
“아니요.”
그 한 마디를 끝으로 한동안 정적이 이어졌다. 다시 농구를 하던 그가 아무래도 신경이 씌었는지 나를 돌아보았다.
“그런데 왜 거기 그러고 있어?”
나는 천천히 앞으로 다가가서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김향단이에요.”
그가 얼떨결에 내가 내민 손을 잡는다. 그리고는 바로 놓으려는 걸 이번엔 내가 손목을 돌려 그의 손을 잡았다.
“이젠 이 손 놓지 말아요……”
그는 말없이 나를 바라보았다. 나도 살짝 고개를 들어 그의 올곧고 청량한 눈빛을 마주했다. 그를 보는 내 눈에 차츰 뜨거운 눈물이 고이고 있었다. 내가 사랑했던, 그리고 나를 사랑해준 그 사람…… 때로는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란 그러한 것이다.
어디까지가 진실인지, 또 어디까지가 픽션인지…… 오랜 시간과 수많은 화자들을 거쳐 원색을 알아내기 힘들다 해도, 춘향과 이몽룡 같은 순수한 사랑도 분명 존재하는 것이니까. 그리고 그와 나의 이야기도…… 분명 끝나지 않은 것이니까.
가끔은 기득권의 정치적 도구로, 또 가끔은 서민들의 아름다운 염원으로 만들어진 이름다운 이야기들이 어찌 춘향전 하나뿐이며, 그런 화려한 전설 속에 묻혀 역사의 뒷안길로 사라진 사람이 어찌 그 하나뿐이랴……
몇 백 년을 사이 두고 서로의 눈빛이 마침내 하나로 뒤엉켰다. 우리 사이에는 더 이상 아무 말이 필요하지 않았다.
봄바람이 창문을 가볍게 두드린 후, 행여 둘에게 방해될까봐 멀리 달아나는 소리가 들려왔다.
내 생에도 이제 봄이 지나 다시 여름이 오려나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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