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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기병을 말 한다
< 아래 글들은 박기병 회장이 미수를 기념해 펴낸 자서전 '격동의 수레바퀴 언론의 길 60년' 에 게재된 '언론인 박기병'을 올긴것이다.>
1) 50년을 하루같이 언론계의 거목 박기병 사장
(전 원주문화방송 편성제작국장 김한철)...............................
50년을 하루같이 언론계의 거목 朴基秉 社長
전 원주문화방송 편성제작국장 김한철
하루에 한번 좋은 일하고 열사람 만나 담소하고 100자 글 쓰고 1,000자 좋은 글 읽고 10,000보 걸으며 사색하고 건강 다질 것이라고 49년 언론생활을 마감하신 박기병 사장님은 신문 방송계를 두두 섭렵하신 언론계의 보기드문 거목이셨다. 부산일보기자로 출발 중앙으로 진출, 청와대 출입기자 시절 두각을 나타내어 한국기자협회회장 대전MBC상무 강릉MBC, 춘천MBC 사장 등 승승장구 눈부신 성취였다.
MBC 정년 이후에도 서울 구로케이블 방송과 GTB강원민방을 설립하였다. 그에게는 정년이란 말 자체가 무의미했다. 일선기자시절 12년간 국회를 출입하였고 1973년 평양에서 열린 제 5차남북적십자 회담을 취재 지방지 기자로서는 최초의 북한 방문기록도 장랑스럽다. 1년이 모자란 50년을 부침 좌절심한 언론계에서 가장 성공적인 언론인으로 후진들의 귀감이 되어 있다. 언제나 소탈한 모습에 덥석 손을 잡아주는 인간미에 끌려 한두 번 만나면 누구나 격의 없이 친숙해 진곤 한다.
연찬의지와 학구열도 뛰어나 대학원 석사 과정과 서울대학교 최고경영자과정 등 세 곳이나 연마하였다. 한참 선배인 그는 필자를 각별한 관심으로 이끌어 주셨다. 강릉 MBC 사장취임 전 잠시 한국문화방송기획심의실장으로 계실 때 시청자 불만사항을 방송사상 처음으로 접수창구를 개설해서 시청자 의견을 방송에 적극 반영하는 새로운 지평을 열어 놓아 방송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이른바 쌍방 커뮤니케이션의 효시였다.
그때 원주MBC 심의실도 시청자센터를 개설하여 본사 시청자업무에 동참하여 좋은 성과를 거두었던 관계로 표창으로 격려해 주셨다. 이보다 앞어 대전MBC상무 재임시 고향 양구에 오실 때에는 원주에 들리시거나 안부전화를 주시고 해서 대범하면서도 소탈하고 인정 깊은 분으로 각인되어 있다.
서울 홍제동 자택에서 구로케이블 옆 곱창집에서 추천 막국수집에서 박기병사장님은 찾아 갈 때마다 바쁘신간을 쪼개어 필자를 환대해 주셨다. 현직에 있을 때 모시고 일해보고 싶은 분이었다. 받은 사랑과 여러차례 진 빛을 조금이나마 갚아 드려야 할 어른이다. 신문 방송을 무려 반세기동안 종횡무진 관통하셨다. 기자협회장 방송사 최고경영인등 급자탑 이뤄 내신 언론계의 거목, 사회적으로 갈구하는 이른바 명품인생을 만들어 내셨다.
2008. 8. 10
2) 내가 만난 박기병 상무
(전 대전문화방송 총구국장 박천규)......................................
내가 만난 朴基秉 常務
전 대전문화방송 총무국장 박천규
박상무(앞으로 그)를 만난 것은 대전문화방송에 근무할 때였다. 그가 1980년 3월 새봄에 대전문화방송 상무이사(관리담당)로 부임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그 만남은 짧았다. 그는 1988년 3월 임기를 마치고 떠났다. 그러나 만날 수 있던 시간은 2년즘 되었다. 그 2년 중에 그를 직접모신 것은 87년 1월부터 떠날 때까지 1년 2개월 동안 총무부서에 있을 때라고 할 수 있다.
그 당시 회사 사장은 상무보다 1년 앞어 부임한 전두환 전 대통령의 육사 동기생이었다. 그 당시 온 나라 사회와 회사 분위기는 계속되는 시국적 긴장과 무거운 불안 끝이 보이지 않는 침묵만이 이어지는 상황이었다.
이런 때 큰 집 서울 문화방송 본사 보도출신이 임원으로 부임한 것이다. 사원들 대부분은 터놓고 말들은 하지 않았지만 외인이 임원으로 오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라며 신임 상무에 대한 환영과 함께 커다란 기대를 걸고 그의 일거일투족을 주목했다.
그가 부임하면서 회사에 전에 없던 변화가 조금씩 일어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임원실에 버티고 않아 보고나 받고 지시와 지적만 하는 것이 아니었다. 시간을 내어 수시로 각 부서 사무실을 찾아 직원들에게 따뜻한 미소를 보내며 등을 도닥아 주었다. 수고가 많다는 말부터 일하며 회사에 바라는 것은 무엇이냐는 등 현업 현장을 살피고 다니며 파악된 어려움을 하나하나 풀어주었다.
이런 시간 지나면서 한 직원의 말처럼 형님 같이 부드러운 그에게 다가가서 함께 자리를 하는 직원들이 늘어났으며 회사 안에는 봄바람이 서서히 불기 시작했다. 뿐더러 어려웠던 일을 잘 처리한 부서와 직원들에게는 포상과 함께 소탈한 자리라도 만들어 노고를 풀어주고 격려하며 즐거운 시간 갖기를 좋아했다.
그는 이와 같이 자리에서 회사에 대한 불만을 들어 여과해 풀어주며 최고 경영자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혀가며 편안하게 일 할 수 있는 회사분위기를 만들러주는 데 늘 힘 섰다. 직원들로부터 청취한 여론은 보다 나은 회사 경영과 발전을 위한 유용한 자양분으로 활요했다.
그의 사랑과 믿음을 누구보다 많이 받았던 한 직원은 ‘아무리 어려운 난제가 있더라고 얼굴 한번 찡그리지 않아 어쩌면 살아있는 부처님이라 해도 마땅하다 며 ‘당신이 믿는 부하에게는 간이라도 빼어주고 싶어 하는 인간미를 가지신 분’ 이라 회상했다. 또한 ‘누구를 미워하거나 원망하지 않는 그분의 특유한 웃음과 손사례 치는 모습은 천진난만하다 못해 순박하셨다’ 고 생생하게 그려냈다.
어려웠던 시절 한국기자협회 회장을 두 번이나 하며 희생과 봉사를 한 그가 관리상무로 부임했을 때 보도부서에서 있던 나는 은근히 그의 간섭이나 지적 지시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며 쓸 데 없는 용심을 했던 것이 부끄럽다.
그는 어떤 부서나 직원이 일을 하다 잘 못을 저질렀을 때는 소방수가 되어 진화에 앞장섰다. 최고경영자의 굳어진 문책 결심도 번번이 한 단계 낮추어 이해와 용서를 이끌어 내 직원에게 새 힘을 넣어주어 열심히 일하도록 밀어주었다.
그는 늘 전화번호 수첩과 동전을 필수처럼 지니고 다니며 시간이 나는 틈틈이 공중전화박스(그 당시에는 휴대폰이 극히 귀하신 몸)를 이용해 국내외 사람과 통화하기에 바쁘던 일상 모습에서 인간관계를 다지는 면을 보여주었다.
그런 그가 언론의길 반세기의 자랑스럽고 소중한 기록을 한국 언론사에 세우고 현역에서 떠났다. 그러나 그는 그 후 ‘정부 취재지원 선진화 방안은 국민의 알 권리 수호 차원에서 모두 혼연일체가 돼 꼭 막아야 한다’ 며 현역 못지않은 결연한 투지를 두러냈다.
2007. 7. 2
3) 내가 아는 박기병 사장
(전 공화당 원내총무 김용태)................................................
내가 아는 朴基秉 社長
金龍泰(전 공화당 원내총무)
署中人事드립니다. 朴社長께서 항상 正義로운 生活者였습니다.
言論界에서 出發해서 言論界에서 職業을 마친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어느 言論人을 만났더니 朴社長의 記者協會때를 회고 하면서 “가장 조용하고 實利를 얻었던 분”이라고 칭찬을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누구에게도 好感을 주는 朴社長의 天性들이 强한 記者들에게 호감을 줄 수 있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죠. 朴社長께서는 어떻게 생각하고 계셨는지는 몰라도 한때 自由中國에 쏟은 熱情운 대단했습니다. 中國의 高位人士들까지 眞情 朴社長을 救世主처럼 고마워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지금까지도 記者村에서 살고 계신지 궁굼합니다. 살림살이가 나아졌다고 해서 洗劒亭같은 山中에 別莊같은 집을 짓고 떵떵댔던 친구가 하루아침에 公職에서 쫏겨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일....이런일 생각할 때 朴社長은 정녕 모든 生活人들의 模範이 십니다. 來來 今年의 三伏더위도 무사히 넘기시기고 더욱더 건강 하시기를 빕니다.
1998. 7. 13
4) 내가 아는 박기병 사장
(曺 煜/ 中國杭州有線 電視대 대長)...................................
내가 알고 있는 朴基秉 社長
曺 煜(中國杭州有線 電視대 대長)
내가 처음 朴基秉선생을 만나게 된 것은 지난 1989년 일본의 福井TV방송국의 창립 20주년 경축행사에 항주TV방송국과 한국의 춘천문화방송사가 초청되었을 때이다. 비록 당시에는 중국 한국간의 정식 국교가 수립되지 않은 상화이었지만 당시 춘천문화방송 사장을 맡고 계시던 朴선생은 항주TV방송국 陣來法 사장에게 양국간의 우호협력 의사를 보였다. 당시 우리도 한국에 대해 관심이 지대한지라 朴사장을 통해 양국간의 방송교류를 해야겠다고 결심하였다.
이듬해인 1990년 朴선생은 친히 여행객의 신분으로서 항주를 방문하고 양사의 교류를 위해 우호협정을 추진하자고 하였다. 항주TV 陳來法사장이 항주의 서호변에 위치한 望湖 호텔에서 朴선생을 위한 환영회를 베풀었을 때 나는 처음으로 朴基秉선생을 만났다. 그는 아담한 키에 예순을 넘긴 듯 한 나이의 강한 친화력을 소유하고 있었다.
비록 상대방의 언어는 알아듣지 못했지만 내가 약간의 일어를 할 수 있었기에 유창한 일본어를 구사하는 朴선생과의 의사소통은 그런대로 가능하였다. 일어로서의 의사소통은 의외로 순조로웠으며 朴선생의 우호적이고 유신하신 면은 나로 하여금 잊지못할 인상을 남겨주었다. 朴선생의 부단한 노력을 통하여 1995년 5월 항주방송국 창립 2주년이 되던해에 친히 방문단을 이끌고 창립기념 행사를 축하해 주었으며 동시에 본사와 구로케이블TV와의 자매결연도 맺음으로서 마침내 양사의 우호교류가 정상의 궤도에 오르게 되었다.
1995년 12월 나는 항주의 언론 대표단을 인솔하여 일본을 방문하고 귀국길에 한국을 방문하였다. 당시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우리 일행 모두가 받았던 열렬한 환영인사는 잊을 수 없다. 공항에는 우리를 환영하는 차들이 대기하고 있었고 곳곳에 환영 플랭카드를 걸어놓았으며 또 朴선생이 직접 모든 일정을 인솔하는 등 여러번 있었던 외국방문중 이러한 성대한 접대를 처음 받았던 것이라 잊을 수 없었다.
지금까지 朴선생과 교류한 세월을 통하여 나는 그가 진정으로 인격적인 매력과 박학한 지식을 겸비한 분이라는 인상을 깊게 받았다. 당시 나는 이 방송언론 분야 뿐만 아니라 방문단에서 비서장도 겸하고 대외교류 분야에 있어 구체적인 업무를 책임지고 있었다. 당시 준비한 선물도 많지 않았는데 어떤 선물은 항공운반시 겉포장이 손상되어 구로케이블TV 방송국이 항주일보사 직원에게 베풀러준 성대한 접대에 답례할만한 정성스런 선물이 아닌것 같아 걱정하고 있을때 마침 朴선생이 이런 나의 뜻을 꿰뚫어 보고 있었는지 대신 선물증정 대상을 정도에 따라 구분하고 또한 어떻게 배분해야 하는지를 말씀해 주셨다.
朴선생은 보내주신 선물의 좋고 나쁨을 떠나 모두 흔쾌히 받아주셨고 그가 가장 중시하였던것은 양사간의 빈번한 교류를 통하여 상호 우의를 강화하고자한 점이었다. 그렇다. 관연 어떤 선물이 우리의 우정 보다도 더욱 소중할 수 있겠는가?
1990년 朴선생을 항주에서 만났을 때 그의 촉박한 일정으로 자세한 이야기를 나눌 시간과 기회가 없었지만 이번 한국 방문에서 직법 만나 뵙고 오랬동안 이야기 나눌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것은 여간 좋은일이 아니었다. 그때도 역시 일어로 그와 의사소통을 하였는데 나는 마치 朴선생과 수십 년 동안 알고 지낸 옛 친구와도 같은 느낌을 받았다.
대화를 나누는 도중에 나는 朴선생이 중.한 양국의 과거 역사에 대하여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을뿐 아니라 현황에 대해서도 자신만의 독특한 견해를 갖고 있을뿐 아니라 박학다식하고 민첩한 사고를 갖고 있는 분이라는 것을 발견하였다. 朴선생은 한국의 여러 방송언론사를 맡아 한국의 어디를 가든 각 지역 언론계의 추앙받는 “권위자”로 부리웠다. 그가 우리 일행을 직접 인솔하여 각 지역을 참관 방문하였을때 한국의 같은 업계 인사들이 朴선생에 대한 존경과 겸손 그리고 모든 일정을 함께한 東樺건설주식회사의 崔圭東사장까지 朴선생에 대한 공경과 존경하는 모습을 통하여 朴선생의 높은 위신과 사업적으로 성공하신 참모습 등을 엿볼 수 있었다.
현재 朴선생이 사장직을 맡고 있는 구로케이븡TV 방송국을 방문하였을 때 내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비록 방송국 규모는 그다지 크지는 않았지만 엄격한 관리 질서정연한 모습 순조롭게 운영되고 있는 방송국의 내부 모습이었다. 외관상으로는 소박해 보이지만 사무실의 내부는 대단히 고급스럽고 우아한 설비를 갖추고 있어 사람들로 하여금 한국의 문화품격과 예술적인 분위기를 느끼는데 충분했다.
40-50명이 한 조를 이루어 프로그램 제작, 편집, 방영, 광고등을 운영하는 경영일체 방식은 빠른 진행속도로 높은 효율를 보이고 있었다. 이 방송국에서 나를 독점 취재하였을 때 몇 몇 젊은 방송국 직원(카메라맨의 위치 선택이었든 숙달된 취재 초첨이든지 간에)모두 이 방송국의 전문적인 기술과 수준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이렇듯 충분한 활동력과 끝없는 잠재력을 지닌 구로케이블TV 방송국의 朴선생은 결코 현시점에 만족하지 않고 어떻게 하면 거듭나고 발전할 것인지에 대하여 꾸준히 연구하고 있는 인물이다. 朴선생이 보여주는 개척정신과 사업에 전념하는 정신은 확실히 지금의 연대에서는 매우 찾아보기 힘들지 않을가 여겨진다.
항주방송국이 구로케이블TV방송국과 우호협력 관계를 수립한후 양사간의 상호 방문과 업무 교류는 점점 빈번해지고 있다. 그동안 항주방송국은 구로방송국과 합작하여 일제시대 임시정부 주석이자 애국자이신 김구선생의 상해, 항주, 중경등지의 발자취를 취재 촬영하였다.
작년 朴선생이 중국을 방문하였을때에는 특별히 상해 중경에 가서 한국이 항일운동 당시 설립한 임시정부 기념관을 참관하였다. 이은 朴선생의 애국정신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진정으로 나라를 사랑하고 민족을 위하는 사람만이 몸과 마음을 자신이 종사하는 사업에 투신할 수 있으며 이를 위해 평생의 정력을 후회없이 헌신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인물이야 말로 진정으로 사람들을 탄복하게 할 수 있다.
나는 朴선생이야 말로 흠모할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으로 생각한다. 작년 朴선생이 부인과 함께 항주를 방문하였을때 8일 전후한 일정을 통하여 나는 매번 성공한 남성 뒤에 온후하고 가정적인 부인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朴선생은 가는 곳 마다 부인에게 자상하게 대하였다. 그는 부인을 위해 특산품을 구입하여 자신의 뜻을 표하였는데 이렇듯 셈세하고 자상한 관심과 보호는 우리들로 하여금 朴선생과 그가 모시고 다니는 부인의 정답고 행복하신 모습을 옆에서 느낄 수 있게 하였다.
8년 전 우리가 만나게 된 것은 우연이였다. 더욱 가치있게 여겨야 하는 것은 만남 이후에 더욱 서로를 이해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우리의 교류는 단지 수단일 뿐이고 소중히 간직해야 하는것은 교류하는 동안 우리가 마음속에 새긴 黙約이다.
8년이라는 세월동안 桑田碧海와 세상만사의 변천이 있었지만 우리들의 교류는 오히려 변함이 없었으며 내가 알고있는 朴선생은 더욱더 그러했다. 친절하고 자상하고 다른 사람을 성의껏 대하는 태도는 영원히 변치않을 것이다.
1998 . 7. 25
5) 내가 아는 박기병 사장
(春師 8회 동기 吳文煥).......................................................
내가 아는 朴基秉 社長
春師 8회 동기 吳文煥
내가 朴사장을 처음 만난 것은 중학교 1학년 14살 때 일이다. 그후 지금 67세에 이르기까지 50여년을 사귀어오고 있다. 그 긴 세월 동안 그가 나에게 투영하고 있는 짙은 인상은 어떤 경우에도 흐트러짐이 없는 인품의 불변성이요 인생 경영의 무군함이요 또 때로는 환경 변화에 대응하는 개척과 도전성이다.
그가 강원도 춘천에서 학교를 나와 취직하게 된 이야기는 우리들 동기동창간에 유명한 일화로 되어 있다. 그는 서울에서 직장을 얻고자 단신으로 서울에 올라와 광화문 네거리 길가에서서 지나가는 사람을 한 사람씩 붙들고 자신의 취직을 호소했다. 말하자면 “직장구걸” 행각을 한 것이다. 물론 수 많은 사람이 거들떠 보지도 않고 지나갔다. 그러다가 한 사람이 어떻게 생각했던지 그를 데리고 어는 신문사에 소개 했다.
그것이 인간 박기병의 수십년 기자생활의 인생을 형성케 하는 계기가 된 것이다.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여기서 인간 박기병의 깊은 속에 숨겨져 있는 개척과 도전 정신을 엿볼 수 있게한다. 물론 이러한 강인한 개척 정신을 평소의 은근하고 진중한 그의 생활태도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평소 그는 과묵하고 침착하며 바위처럼 묵직할 뿐이다. 그러나 그에게 무언가 어려움이 닥치면 깊은 속에 숨겨져 자리하던 개척과 도전을 위한 에너지가 마치 화산 밑에 꿈틀거리는 마그마처럼 그의 생활 패턴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그의 일상적 묵직함이나 인간적 불변성은 그와 나와의 관계에서 잘 나타나 있다. 여기서 필자인 나 자신의 부끄러운 과거사를 고백하고자 한다. 왜냐 하면 그것이 인간 박기병의 놀라운 무게를 실감케 해 주는 일이기 때문이다. 나는 젊어서 교사직을 그만 두고 건방지게 “사업”이라는 것을 한 일이있다. 물론 그 사업은 실패했다.
실패했을 당시 그 때가 아마도 제1차 석유파동이 난 직후인 1974년이라 기억되는데 그 때 나는 그 당시 화폐로 30만원인가 하는 긴급하게 갚아야할 부채 때문에 자칫 체포되게 되는 벼랑 끝에 서게 되었다. 지금의 화폐 가치로는 30만원이 큰 돈이 아니지만 당시로서는 이 금액이 엄청난 큰 돈이었고 그래서 사업에 망한 나로서는 어찌할 방도가 없었다. 벼랑 끝에 몰린 나는 마지막으로 “친구”라는 이름에 기대어 뻔뻔스럽게도 당시 일개 신문사의 평 기자였던 박기병 사장을 찾아간 것이다. 내 사정을 들은 박사장은 “그렇게 어려운 일을 왜 막판에 와서 다급하게 알리나? 좀 미리 오지 않고”라고 나무라더니 가까이에 있던 다방에서 기다리게 하더니 황급하게 사무실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약 1시간쯤 지났을까 다시 다방으로 뛰어든 그는 나를 끌고 다짜고짜 택시에 올라탔다. 그 때 그의 사무실(신문사)은 광화문 네거리에 있었는데 그는 택시로 지금 미도파 백화점 옆에 있던 경향신문사 사옥에 가서 내렸다. 그리고 거기서 나를 기다리게 하고는 경향신문사로 뛰어들어 갔다가 나오더니 나에게 30만원을 건네 주는 것이었다.
그때까지 그는 나에게 말 한마디가 없었다. 그저 궁지에 몰린 친구인 나를 구출하기 위해 뛰어 다니기만 했을 뿐이다. 물론 그는 사업에 망한 내가 그 돈을 갚지 못할 것이란 것을 알고 있었다. 그것도 자기의 여유돈이 아니라 아마도 그때 자기가 알고 지내던 경향신문사의 누군가로부터 꾸어서 내게 건네준 것이다.
놀라운 것은 그 급하게 뛰어 다니는동안 그는 내게 한마디의 말도 하지않은채 그저 묵묵히 행동만 재촉하였다는 사실이다. 나도 물론 할말이 없으니까 더더욱 입을 다물고 있었다. 물론 그 돈은 지금껏 갚지 못하였다. 못 갚고 지내온 수십년간 박사장은 지금껏 그 일에 대해서 한마디도 내게 말을 꺼낸 적이 없었다. 다만 그의 부인이 그후에 나를 만났을때 “지금 오선생의 형편이 그렇지 못하니 이 다음 세월이 흐른 다음 제 자식에게 도움을 주십시오” 라고 말 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나는 지금껏 그의 자식에게도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하고 있다. 그의 부인마저도 박사장의 영향 인지아닌지도 몰라도 참으로 놀라운 인품이라고 나는 감탄하고 있다. 나에게는 아주 수치수런 과거사이지만 이 일을 여기에 적은 것은 이 일 한가지가 백마디 형용사보다도 인간 박기병을 가장 잘 나타낸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후 나 자신은 험난하고 고난에 찬 인생길을 걸어왔다. 그 과정에서도 박사장을 수없이 많은 정신적 지주로서 내게 존재해 왔다. 지금 이기회를 통해 그동안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이일을 천하에 공개하게 된 것이 마음에 후련하다. 나의 친구 박기병사장! 그리고 부인! 내 인생에 잊지 못할 두분이 앞으로 남은 여생도 여전히 바위처럼 묵직하게 그리고 때로는 용감하게 살아가기 바라오. 못난 친구 오문환은 그렇게 밖에는 할 말이 없소.
1998. 3. 8
학생 시절의 朴基秉
春師동기 오문환
박사장과 나는 중(中) 고(高)시절을 옛날 춘천사범학교 지금의 춘천교육대학 전신에서 보냈다. 당시 박기병 학생은 춘천시내 죽림동에서 5寸 댁에서 그야말로 조촐하게 지내고 있었으며 나는 그 시내에서 약 3km쯤 떨어진 석사동에 있었던 학교 바로 옆에서 살고 있었으므로 친한 사이였던 “기병이”를 거의 날마다 집으로 데리고 와 함께 놀고 점심도 함께 먹고 했었다.
나의 부친과 모친 그리고 누이들도 “기병이”를 무척 귀여워 했었다. 그러나 학생 시절의 가장 그리운 추억은 뭐니 뭐니 해도 “지리 연구부”에서의 활동이었다. 당시는 해방 직후의 혼란이 채 가시기 이전이었으므로 학교 수업이 덜 정착돼 있었고 더구나 특활 조직이란 전무한 상태였다.
그런 가운데 당시 지리학 선생님이 유일하게 “지리 연구부”라는 것을 개설하였고 이에 나 “문환이”와 “기병이” 그리고“환식이”가 이에 가입하였다. 이 연구부의 소위 연구실은 일정시대 기숙사로 쓰이던 방 하나에 설치 됐었다. 연구실이라야 특별난 시설이 있었던 것은 아니고 그저 책상 몇 개와 의자가 있었을 뿐이었고 선생님도 거의 나오시지 않았으므로 우리들이 단지 그곳에 모여 서로 이야기나 나누는 자리로 삼고 있는 형편이었다.
그런데 여기에 획기적인 일이 생겨났다. 그것은 이 연구부에 여학생 몇 사람이 가입한 사실이다. 당시 춘천 사범학교눈 해방과 동시에 남녀 공학이었던 것이다. 여학생의 참가를 우리 지리 연구부는 아연 활기를 띄기 시작했다. 그 중에도 “기병이”는 “재정이”와 가까이 지냈고 “환식이”는 “재정이”와 자주 만났다. 나 “문환이”는 “기정이”와 아주 가까이 지내면서 어른들 사이에 사돈 약속까지 했었던 터였다. 물론 그 약속은 6.25난리 판에 저절로 유명무실화 되었지만 그러니 “기병이”는 “재정이”등 자매 여학생과 꾸준히 잘 지내고 나와 함께 이들 자매 학생네 집에도 여러번 방문한 바 있었다.
요사이는 남녀 학생의 교제라는것이 일반화 되고 어떤 의미로는 시시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지만 1940년 대인 당시로서는 정말 짜릿한 “행복감”이 넘쳐나던 일이었다. 우리들의 학창 시절 그것은 결코 “공부”위주의 그것이 아니었다. 박사장과 나 오문환의 추언 그것은 그 착하고 아름답던 여핵생과의 순진하고 짜릿했던 교제였다 할 것이다.
6) 내가 만난 박기병 사장
(日本福井縣 福井TV株式會社 常務理事 永上和伸).............
내가 만난 朴基秉 社長
日本福井縣 福井TV株式會社 常務理事 永上和伸
생각해 보면 벌써 몇 년이 흘렀을까. 나와 박기병씨와의 첫 만남은 지극히 사무적인 것이었다. 그것은 내가 우리 회사가 개최한 “호쿠리쿠 여자 역전마라톤” 대회가 열리던 그 해 후쿠이현 대표팀을 이끌고 89년 4월 강원도 춘천시에서 개최한 “제6회 강원도 역전마라톤대회”에 후쿠이현 대표단의 단장으로서 출장 참가한 때였다. 나에게 있어서는 첫 한국방문이었다.
이 역전마라톤대회에 참가한 후쿠이현 대표팀은 모두가 젊은 선수들로서 가장 어린선수는 고교 1년생의 “고야나가 유키“로 첫 번째 외국원정으로 처음 비행기를 탄 듯 했다. 비행기에서는 내 옆 좌석이었는데 나고야 공항을 이룩하여 10분밖에 지나지 않은것 같은데 창밖 눈 앞에 보이는 지형을 보고는 ⌜벌써 한국영토⌟ 라는 말을 되풀이 하곤 했다. 드디어 서울의 김포공항에 도착 낯익은 얼굴의 춘천문화방송 사원의 마중과 안내로 시내의 일본식당(초밥집)에서 우선 점심을 먹고 외길의 한강변을 타고 춘천으로 향했다.
그리고 아룸다운 풍광속에 위치한 ⌜춘천문화방송⌟에 도착했다. 박사장 이하 강건 상무를 비롯하여 다수의 사원들의 박수로 맞이하는 환대속에 회의실에서 ⌜환영식⌟ 이 시작됐다. 통역을 맡은 양씨를 통해 양측의 인사와 함께 나도 준비한 스피치 원고를 양씨에게 건네주고 ″아름다운 한강을 따라 더욱 아름다운 호반의 춘천문화방송에 왔습니다. 마치 그림속에와 있느듯 합니다.
매우 훌륭한 환경속에서 생활하고 있는 춘천문화방송의 여러분과 앞으로 교류를 돈독히 하고 평생동안 좋은 이웃이 되고 싶습니다. 우리들에게 앞으로 서먹서먹하다는 말은 필요 없을 것입니다. 솔직한 마음들이 통하는 의사표시만 있다면 그것으로 족할 것입니다. 서로의 뜨거운 우정이 앞으로 더욱 환영에 감사드립니다″
라고 있사했다. 간부사원의 소개 그리고 선물교환후 먼저 숙소인 세종호텔에 체크인 했다. 그리고나서 가까운 곳에 있는 전통식당인 ⌜초옥⌟에서 환영회가 열렸다.이야기로는 들은바 있던 ⌜온돌⌟을 처음 접하고 실감한 자리였다. 서두를 장황하게 늘어놓았지만 여기에서 나는 깜짝 놀랄 사실을 알고 감복할 수 밖에 없었다. 지금까지 전부 통역인 양씨를 통해 이야기를 주고받아 조금은 서먹한 분위기의 대화였는데 환영 리셉션 자리에서 박기병 사장은 유창한 일본어로 이야기를 걸어왔다. 깜짝 놀란것은 물론 이제 공식성상이 아니기 때문이라는 의미있인지도 모른다. 그로부터 한층 연회가 고조된 것은 말할 나위 없다. 그 이후 나와 박기병 사장과는 가족과 같은 만남이 시작됐다. 몇 차례의 왕래 이외에도 노동조합 간부들과 함께 대만에서 귀국길에 사적인 형태로 후쿠이에 들러 가기도 하고 박사장은 간부들만의 교류가 아닌 양측 젊은 사원들의 교류 계획을 세워 우리 회사에 제안하여 즉시 실행에 옮기는 등 지금까지 그 제도는 지속되고 있으며 거의 과반수의 사원이 이 교류에 참가했고 매우 유익한 제도로 자리를 잡았다.
아마 지금도 박기병 사장을 잘 모르는 양사의 사원들이 그 은혜를 입고 있다고 생각된다. 아드님이 배낭을 등에 메고 우리집을 찾아논 일도 있었고 따님이 도쿄에 유학할 때는 내가 보증인이 되어 주기도 했다. 아내와 함께 한국에 처음으로 개인적인 여행을 한 것은 94년 3월 이었다. 무천 추운시기였지만 박 사장의 댁에까지 초대받아 부인이 손수 만든 요리로 따뜻하게 가족같은 환대를 받았다.
이전에 학생이었던 아들은 훌륭한 의사가 되어 있었고 일본어가 능숙한 부인 손자들에게 둘러쌓인 밝고 행복한 가정을 보았다. 생각해 보면 나에게 있어서는 크나큰 기념이된 여행이었다. 이전에 나는 우리 회사의 계열사 사장에 임명된 적이 있었다. 그 때 박기병 사장은 일부러 전화를 걸어와 나에게 “지금이야말로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세계를 공부해야 한다. 언젠가는 틀림없이 본사로 돌아가게 된다. 그 때 양식이 될 소중한 과정이라고 생각하고 힘내라” 고 힘을 복돋아 주었던적도 있었다.
그는 또 아직 한국이 중국과 완전하게 국교를 회복하지 않았던 93년에 우리 회사의 중개로 중국 절강성 항주전시대의 진래법 대장과 교섭하여 중국의 TV방송국과도 우호관계를 갖고자 한국, 일본, 중국, 3개국의 우호협역(트라이앵글 우호)조인을 체결 하는 등의 정치력을 발휘했다. 원래 박기병 사장은 정치부 기자였다고 들었다. 거시적으로 판단하고 신중하면서도 진취적인 포석으로 단호한 판단과 행동을 통해 착실한 실적을 쌓아왔다.
나는 그러한 그가 춘천문화방송을 퇴임한후 잠깐동안 일을 손에서 놓았을 때 많은 걱정을 했었다. 한번은 서울의 수해상황을 묻는 핑계로 전화를 걸어보았는데 여유롭게 유연히 응대하는것을 보고 실로 큰 인물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지금의 구로종합유선방송의 사장에 취임했을 때에는 재일 먼저 내가 소식을 접했다. 나는 아내와 함께 우리의 일처럼 기뻐했다. 우리들의 만남도 두 자리수의 년수가 되면서 함께 장년이 되었다. 지극히 사무적인 만남이 이렇게까지 열매를 맺는 만남이 될 줄은 생각지 못했다. 나라를 달리하고 언어를 달리해도 마음 깊은 곳에서 서로 소통을 느끼고 서로 위로해주면서 평생 지속하고 싶은 생각을 갖고 있다. 박기병 사장의 더욱 큰 번영과 가족의 영원한 행복을 기원하며 깊이 감사드린다.
<書 信>
7) 존경하는 박기병 사장
(전 춘천문화방송 TV기술 국장 김우용)..........................
존경하는 박기병 사장님께
춘천MBC TV기술국장 김우용
창밖의 푸른초원들이 넘실대는 싱그런 6월 하늘에는 뭉게 구름이 두둥실 떠있는 오후 창문틈으로 살포시 밀려오는 순풍은 피곤에 지친 저의 얼굴에 부딛쳐 아픈 저의 마음을 달래줍니다. 책상 위에 놓여진 많은 우편물들 사이에 유난히도 눈에 뛰는 파란글씨의 봉투를 보는 순간 예사롭지 않은 편지가 아님을 직감했습니다.
놀랍게도 사장님의 존함을 대하고 아차! 하는 황송스러움에 몸둘바를 몰랐습니다. 진작에 안부를 여쭙고 인사를 올려야 마땅함에 어치할마를 모르겠습니다. 사장님글을 읽고 또한번 사장님의 자상하심에 감탄하면서 저의 잘못을 뉘우칩니다. 저는 마땅히 제가 해야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만 사장님께서 겪을 높여 주시니 더욱 송구할 뿐입니다. 오히려 저 자신과 더 나아가 춘천MBC 식구들이 많은 부분에 있어서 박사장님의 은혜를 입었고 많은 가르침을 받았다고 믿고 있습니다.
또한 항상 사수증대를 위하여 고심하시고 연구하시는 사장님의 모습을 저의 가슴이 많은 감동을 주셨고 회사발전은 물론 사원들이 복지 및 해외연수의 기회를 부여해 주신 것은 평생토록 잊지 못할것입니다. 더구나 한번 맺어진 인연을 소홀하지 않으시고 끝까지 성심껏 최선을 다하시는 사장님의 덕망은 저에게 많은것을 느끼게 했습니다.
후꾸이TV 나가다 사장님과 대만의 봉명 중국의 항주방송사와의 자매관계를 원만히 유지토록 배려 하심은 춘천MBC에 대한 크나큰 은총이라 생각하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지금도 후꾸이TV 사원들과 계속 편지와 전화연락을 하고 있습니다. 지난 2월말에는 결혼 10주년 기념으로 제 처와 부부동반으로 후꾸이에 다녀 왔습니다.
그때 후지모또와 사또미양만 일이있어 나오지 못하고 나머지 교류 사원들을 모두 만났습니다. 박사장님의 말씀도 많이 했습니다. 참으로 훌륭하신 분이라고 높이 말해 주어 그 순간에도 사장님께 고마움의 인사를 마음으로부터 간직했습니다. 그중 出雲路씨는 도꾜와 나리다 공항까지 배웅을 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어머니께서 저와 처에게 선물을 주셨습니다. 또한 한국으로 잘 돌아가라고 숙소에 직접 전화까지 해 주었습니다. 돌아오는 비행기 속에서 저는 집사람에게 사장님께 대한 애기와 지난 10년 동안의 결혼생활 이야기와 앞으로의 설계도 새롭게 의논하면서 유익한 여행을 했습니다. 이 모든 것들도 사장님께서 춘천MBC에 재임하시는 동안 저희들에게 베플어 주신 은혜라 생각하고 항상 감사의 마음을 잊지 않고 있습니다.
존경하는 사장님!
사장님께서 말씀하신 구절이 생각납니다. 사람은 만났다가 헤어지고 굿은날이 있으면 좋은날도 있기 마련이라고 말입니다. 사장님께서는 춘천MBC에 계시는 동안 가장 어려웠던 시기에 가장 기억에 남는 일들을 많이 하셨고 어려움과 역경을 회사의 발전에 밑거름으로 만드셨습니다.
제자 어릴적(강원도 인제군 남면 신월리)에 농사를 지으며 살아가는 아버지를 도와 농사일을 눈에 익히며 벼를 베다가 손가락도 베어 보고하며 자라면서 전 그때
당시 이 세상에서 지금이 제일 행복하다고 생각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리고 중학교때(인제군 남면 신남중학교)는 의사가 되는 것이 꿈이었고 그때는 또 그 나름대로 부모님 슬하에서 행복을 느끼며 잘았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너무나 힘들게 살아가고 있다고 비판적인 때가 한두번이 아닙니다.
사람이 사람을 못 믿고 자기위주로 살아가는 이기적인 사회가 싫어졌습니다. 그렇다고 외면하고 돌아설 수도 없는 현실이 더욱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사장님의 말씀대로 人生이란 어데서오고 어데로가는 것인지! 아니면 진정한 인생의 의미와 삶의 가치는 무었인지 왜 제가 이 자리에 서있어야 하는지 조차 모를 때가 있습니다. 또 저의 목표가 무엇인지!
누군가가 왜! 사느냐고 묻는다면 무어라고 대답할지 조차 막연해진 현실에 저 자신이 미워질때도 있습니다. 공자의 빈 낚시대로 고기를 낚으려는 것이 아닌 시간낚기일까! 아니면 주어진 인생의 의무감에서 일까? 해답을 얻으려 하지만 그것은 고뇌일뿐! 역시 인간의 본능인 욕심이란 욕망을 버리지 못하는 저 자신을 발견할때는 나약한 한 사람에 지나지 않음을 느낍니다.
그래서 지금은 어릴적 행복을 느낀대로 지금 저의 자식들에게 그 행복을 만들어 주고 부모님께 하지 못한 효도를 조금이나마 하려고 애써 봅니다. 솔직히 그런 고민이 저 자신을 더욱 괴롭게 합니다. 사장님! 죄송합니다. 넋두리와 같은 두서없는 이야기를 왜 사장님께 하는지 저 자신도 모르겠습니다. 어찌되었든 사장님은 저에게 많은 것을 느끼게 해주셨고 베풀어 주셨습니다. 근무환경 개선도 상당부분 많이 개선이 되었고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셨습니다. 만사동정이 때가 있는것처럼 사장님께서 잘 가꾸어 놓고 씨를 뿌리고 가꾸어 놓으셨으니 다음 사장님께서 또다시 다듬어 나가지 않겠습니까? 사장님의 아쉬움이 큰 마큼 춘천MBC를 사랑 하셨다는 애착입니다. 비록 멀리 계시지만 항상 지켜와 주시고 지도편달 부탁드리겠습니다.
언젠가 될지 모르겠지만 아버지와 아들 사이처럼 아니면 선생님과 제자처럼 좋은 말씀 많이 들을 수 있기를 기다리 겠습니다. 지금까지 기억에 남는 분들이 계십니다. 초등학교 1학년때 담임 김정열 선생님 6학년때 전갑산 선생님 고등하교 1학년 담임 김종철 선생님 춘천MBC 박기병 사장님입니다. 스승의 날을 맞이하여 국민하교 1학년때 담임 선생님(김정열)을 찾으려고 교육위원회에 연락을 하려고 마음만 먹고 아직 실행으로 옮기지 못했습니다.
그때는 어여쁜 처녀 선생님이었는데 지금쯤은 할머니 선생님이 되셨겠죠. 지금까지 저를 올바르게 지도해 주신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그 고마움은 영원토록 간직할 것비니다. 사장님! 항상 건강에 유의하시고 가내 행운과 발전을 기원하면서 오늘은 이만 줄입니다ㅣ. 안녕히 계십시오.
1992. 6. 8
8) 마나 뵙고 싶은 박기병 사장
(전 춘천문화방송 TV기술 국장 김우용)............................
<書 信>
만나 뵙고 싶은 박기병 사장님
춘천MBC TV기술국장 김우용
오늘도 사장님의 인자하신 모습을 그려봅니다.
사장님 그동안 안녕하시오며 가내 두루 평안하시 온지요 이곳은 언제나처럼 맑은 하늘아래 호수가의 햇살을 받으며 열심히 살아가고 있습니다. 저 또한 그 속에서 사장님께서 염려해 주시는 덕택으로 저의 일에 충실하고 있고요. 지금은 TV기술부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지만 예전처럼 인간미는 찾기 어렵습니다. 왜! 이렇게 세상이 바뀌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희망을 갖고 살다보면 언젠가는 새롭게 피어날 수 있고 웃으며 살 수 있는 날이 오겠죠.
사장님!
자주 연락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사장님의 고마움을 잊지 않고 있습니다. 어느덧 또 한해가 저물어 갑니다. 사장님 늘 건강하시고 새해를 맞이하여 하시는 모든일 뜻 대로 이룰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그리고 후꾸이TV 사원들과 계속 편지를 주고 받고 있습니다. 특히 出雲路씨와는 각별한 사이가 되었습니다. 만날 때 또는 편지로 사장님의 안부를 여쭙고는 합니다. 그럼 사장님 오늘은 여기서 인사를 마칩니다.
항상 건강하시고 가내에 행운이 충만하길 비옵니다.
1992. 12. 21
9) 망년지교(忘年之交)
(중국연변텔레비전 방송국장 蔡永春).............................
망년지교(忘年之交)
중국연변텔레비전 방송국장 蔡永春
나에게는 년령이나 경륜 국적에 관계없이 아주 특별한 망년지교의 친구 한 분이 계신다. 내가 일곱 살 개구쟁이로 중국의 자그마한 도회지 소학교 문턱을 넘을 때 그이는 이미 한국언론계에 진출하고 계셨고 내가 열일곱살에 청년학생들은 농민대중의 “재교육”을 받으라는 중국의 시류에 편승하여 도시를 떠나 시골에서 농부의 삶을 경험하고 있을 때 그이는 유일한 한국 지방언론지 기자로 평야에서 개최된 남북적십자회담에서 활약했던 유망한 언론인이셨다.
내가 중국의 지방 방송사 사장으로 자리를 잡을 때 그이는 이미 한국의 통신, 신문, 방송언론인으로서의 수십년간 화려한 경력을 바탕으로 3개 방송 언론사의 사장을 죽 지내오신 분이셨다. 22년간 신문언론인으로 26간의 방송언론인으로 근 반세기의 언론 외길을 다져오신 그이는 내가 어느 면으로든 우러러 쳐다보아야 할 언론의 대선배이시고 인생의 스승님과 같은 어르신이셨다.
그이가 바로 한국언론계의 거목으로 인정받는 박기병 사장님이시다. 나의 박기병사장님과의 첫 만남은 1993년 중국남방에서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연변TV방송국장으로 재임한지 얼마되지 않아 방송파트너 관계를 맺고있는 항주TV방송국 개국 15주년 기념행사에 참석하게 되었는데 마침 초청을 받고 항주에 오신 박기병사장님과 만날 기회를 갖게 된 것이다. 때는 중.한교류가 이루어진지 불과 1년도 채 안된 시점이어서 이미 중국의 방송업계와 돈돈한 관계를 맺고 계시는 박기병 사장님에 대한 존경이 앞섰다.
항주에서 짧은 만남에서 박기병 사장님이 나에게 준 인상착의는 한마디로 품위있 고 근엄하면서도 편안하고 따뜻하고 친근한 느낌을 주는 중후한 학자타입의 성직자 같은 분이셨다. 박기병 사장님과의 인연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박기병 사장님은 나에게 글로벌시대 국제감각과 개방시야를 뛰어준 스승님이시고 따라서 연변방송문화계와 출판문화계가 국제화에 맞먹는 열린 자세로 한국방송계와 신문출판문화계와의 접촉과 료해, 교류의 협력을 다지기 위한 가교역할을 실질적으로 해준 선배 지성인이셨다.
1994년 12월 한국PD연합회 초청으로 나의 첫 한국방문이 성사되어 박기병 사장님과의 두 번째 만남이 한국에서 이루어지게 되었다. 나의 그번 방문은 연변방송을 포함한 연변지역사회의 민족문화생태를 한국사회에 알리기 위한데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국제화시대 지역방송발전에 대한 국제심포지엄” 에서의 특별 제주발언, 한국 KBS, MBC, SBS등 방송사 프로그램 출연, 연변방송프로그램 시사 및 간담회 등 한국PD연합회가 마련한 공식적인 스케줄을 소화하는 한편 한국의 문화지성인들과의 광범한 인맥관계를 맺는 것이 나의 첫 한국방문에서의 소망이었다.
나의 방문목적을 파악하신 박기병 사장님은 마치 나의 엄격한 “매니저”처럼 한국에서의 나의 스케줄을 일일이 검토하시고 꼼꼼히 체크하시면서 다년간 쌓아온 당신의 화려한 경력과 두터운 인맥관계를 남김없이 동원하여 나의 연변 알리기 행보에 만전을 기하셨다. 한국유선방송위원회, 한국공보처, 한국방송위원회, 국회문화공보위원회, 국회의장실, 한국문화관광부, 한국언론인협회 등 부문의 요인들과의 만남이 박기병 사장님에 의해 전부 이루어졌고 나의 첫 한국방문은 기대이상의 성과를 거두게 되었다.
첫 한국방문 후 지금까지 십여차례 한국에 다녀왔다. 매번 방문때마다 박기병 사장님은 나의 방문스케줄에 각별히 신경을 쓰시면서 내가 만족스럽게 귀국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시었다. 당신이 경영하는 방송사 전체 임원들한테 중국과 연변을 소개하는 나의 특강시간을 마련하시기도 하고 나를 방송사 명예 자문위원으로 위촉하시기도 하고 내가 대학교강의에 참고할 수 있도록 구하기 힘든 소중한 책자들을 안겨주시기도 하고 새로운 지성인들과의 만남을 적극 주선하시기도 하면서 박기병 사장님은 나에 대한 두터운 배려와 사랑의 끈을 놓지 않으셨다.
박기병 사장님과 맞어진 18년 망년지교의 인연은 단순한 선배사이의 친구관계를 떠나 잘 알려지지 않았거나 틀리게 각인된 연변을 확실하게 한국사회에 소개하려 노심초사해 오신 한 지성인의 바다 같이 넓은 흉금과 중.한 문화교류를 위해 정렬을 불태워온 한 가교자의 덕목을 보여준 소중한 년보가 아닌가 한다.
박기병 사장님은 근 반세기 동안 한국언론의 발전을 빛나게 장식하시는데 일획을 긋는 한편 근 스무해 세월을 중국조선족 방송문화와 출판문화의 발전과 함께 해온 분이시다. 그래서 나는 박기병 사장님의 언론 외길 49년은 67년으로 아니 지금 계속 이어지고 있다고 느낀다. 중국말에 사재인위(事在人爲)라는 성구가 있다. 일이란 사람 하기 나름이라는 뜻으로 풀이 된다. 공직자에게 주어진 현역 활동시간은 한국이나 중국이나 제한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제한된 시간안에 얼마만한 일을 하는가는 시간으로 도무지 계산이 불가능하다. 박기병 사장님의 49년 현역언로인 생활이 제시한 도리이다. 박기병 사장님의 언론 외길 반세기의 여유있도 아름다운 하직이 후배들한데 등대가 되리라 생각한다. 진실한 친구가 있는 사람은 복된 사람이다. 나에게는 대선배이시지만 박기병 사장님이 망년지교의 친구임은 틀림없다.
그런데 나는 늘 박기병 사장님께 죄짓고 사는 마음이다. 18년 세월을 나는 박기병 사장님으로부터 혜택만 입고 한번도 베풀지 못한 유감을 안고 있다. 단 한번도 연변에서 정중히 모신적이 없다. 2002년 여름철에 요행 박기병 사장님의 연변행이 이루어졌지만 공교롭게도 내가 유럽으로 해외출장을 나가있어 유일한 기회를 또 놓치고 말았다. 얼마나 섭섭했던지 모른다.
박기병 사장님과 같은 어르신을 친구로 사귀고 있는 나는 참으로 행복하다. 그래서 나는 “친구는 네 자신의 생명의 열쇄를 걸어 간직해두라”는 세익스피어의 명언을 아로새기며 박기병 친구와의 인연을 두고두고 소중히 이어나갈것이다.
2011. 8. 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