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티나무 종교
나이 듦이 증거일까. ‘아직’이란 말이 갈수록 좋다. 아직 남아있는 온기, 아직 오지 않은 이별, 아직 그대로인 흔적. 63빌딩이 가장 높은 건물이라고 알고 있던 유년시절의 기억 틈으로 어느새 롯데월드타워가 들어서고 주거공간도 타워펠리스로 바뀌고 있는 요즘, 내 곁에 느티나무는 아직 굳건하다. 바깥바람이 불어도 외면한 채 그 자리에 꿋꿋하게 있다.
느티나무를 본다. 훤칠해 보이는 그 나무는 나를 지켜보고 있다. 출근하면서도, 퇴근하면서도, 저녁밥 먹고 어슬렁거릴 때에도 나를 보고 있을 것이다. 간혹 술 마시고 대문을 들어갈 때도 나는 그를 보지 않았어도 그는 나를 보고 있을 것이다.
입춘이 지나면 온몸이 간지럽듯 나뭇가지 끝이 파랗게 상기되기 시작한다. 그러다가 어느새 짙푸른 넓은 그늘을 만들어 주고, 그 새 온 통 물인가 싶더니 세상을 죄다 투명하게 균일한 풍경을 만들어 주고 있다. 이 겨울을 나는 느티나무는 항상 변함이 없다. 매일 나는 그를 중심으로 움직인다.
느티나무야말로 열 살 부터 내가 조금씩 커가는 걸 지켜보았고, 이제는 조금씩 늙어가는 걸 지켜보는, 의연한 관객이자 호젓한 목격자인 셈이다. 모든 것이 세월 따라 주변이 흔적도 없이 변해갔지만 그 느티나무는 아직 그대로 남아있다.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으로 시작되는 박인희의 ‘세월이 가면’을 읊조리다 보면 오래된 느티나무 풍경들이 흑백영화처럼 펼쳐지곤 한다.
“금요일 오후 5시 느티나무 앞에서 기다리겠습니다.” 누군가와 약속을 한 듯한 여학생이 느티나무 앞에서 서성인다.
문득 학생시절 때 어느 여학생이 보내온 학보 속에는 간단히 안부와 덕수궁 앞에서 기다리겠다는 메모지가 문득 떠오른다. 기다리다 가겠지, 하며 유아무야 한 계절을 넘기고 있다.
내가 다니던 서울사대부속중학교는 동대문구 용두동에 있었고, 인근에 성동역이 있었다. 경춘선 신공덕역에서 성동역까지 기차통학을 하곤 했다. 버스도 있었으나 늘 만원이었고 승객들을 밀어 넣고 문을 닫는 게 버스 차장의 주된 임무였을 때이다. 한명의 승객이라도 덜 태우려는 버스는 늘 정거장으로부터 가능한 멀리에서 문을 열곤 하였는데 그 버스를 놓치지 않으려고 무거운 책가방을 들고 이리저리 뛰곤 했다. 항상 잠이 부족한 나는 기차통학을 하고 싶어도 1시간에 한번 오는 기차를 탄다는 것이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부랴부랴 뛰는 모습이 그리운 듯 아득한 것처럼 언제나 느티나무와 함께 온다.
중학교 1학년 때 교실 뒤에서 가수 남진의 흉내를 내면서 춤추는, 소위 잘나가는 애들이 연습을 하고 있었다. 음악 선생님이 쉬는 시간에 지나가다 보시고는 수업시간에 말씀하신 게 지금도 기억에 남는다. "남진이 왜 남진인줄 알아? 그렇게 춤추고 노래하려고 얼마나 피나는 연습과 노력을 했겠어? 그래서 남진이야. 그냥 대충 그러지 말고 남진처럼 죽을 둥 살 둥 모르게 해봐. 그럼 공부보다 빨라." 난 선생님이 칭찬하는 그를 마냥 부러워했었다. 느티나무는 그 사실을 알기나 할까.
고등학생 때 과외가 금지되던 시절 비행하듯 성문종합영어를 듣기 위해 종로에 있던 한 학원을 다녔던 기억이 있다. 그때 휴일이면 나는 종로구 화동에 있는 정독도서관을 다니곤 했다. 좋은 좌석을 차지하려면 아침밥도 먹지 않은 채 서둘러야 했다. 시험이 끝나는 날이면 종로2가에 있던 화신백화점이나 신신백화점을 어슬렁거리기도 하고, 가끔은 광화문 로터리의 국제극장에서 영화를 보기도 했다. 그는 모르는 척 할지 몰라도 일탈된 내 모습을 알고 있을 것이다.
한참 대학시절 문학에 흠뻑 취하고 있을 때 그 느티나무 아래에서 알베르카뮈 소설《이방인》을 읽었다. 아마 그 기억은 아직까지 진행하고 있는지 모른다. “부조리란 무엇일까.” 나이 먹은 나에게도 아직도 화두인 것이다. 영원히 진행될 것이다. 나무가 세월이 흘러도 제자리이듯 ‘존재(存在)의 부조리’는 사카린처럼 달콤하게 다가온다. 일본문학을 전공하는 아들 녀석도 그 자리에서 알베르카뮈의 ‘합리적으로 설명될 수 있는 질서도 구원도 없는 존재’ 에 대하여 고민하고 있을까.
결혼해서도 그 집에서 그리고 아이들도 그 집에서 태어나 벌써 큰아이가 28살이나 되었다. 직장도 노원구청을 다니니 변한 것이라면 할머니가 돌아가셨고, 이 집에 함께 살고 계시는 부모님의 건강을 걱정하게 되는 나이가 되었다. 그러고 보니 느티나무를 축으로 원을 그리며 그 안쪽이 내 삶의 공간이었고 그 밖을 넘어가면 내게는 먼 곳이었다. 그러니 나는 아직도 나의 중심이 집에서 바라본 느티나무라고 생각한다, 나는 그 안을 오간 데만 오가며 살았다.
큰 이변이 없는 한 오가는 만큼을 다시 오가며 살 것이다. 느티나무가 내 삶의 중심축이며 배꼽이니 서정주 선생님이 광화문을 ‘차라리 한 채의 소슬한 종교’라고 하였듯이 느티나무 또한 나의 소슬한 종교라 할 만 하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