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남의 주요 산편-관광을 중심으로

1. ,해남의 거대한 고대문화를 잉태한산,두륜산(頭輪山)

지금으로 부터 1,400여년전 해남에서는 어디지역에 많은 사람들이 살았을까.
우연하게도 많은 고분들이 분포한 지역은 두륜산 일대다.
두륜산의 동쪽사면에 자리잡고 있는 북일면 일대에 수십기의 고분들이 분포하고 있어 그지역에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었음을 짐작하게한다.또 현산면 월송리 증산부락이나 삼산면 용두리지역도 북일면 고분지역보다도 사람들이 적게 살았다 하더라도 큰세력를 이룬 사람들이 살았던 지역임을 짐작하게 한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살았던 이유는 무엇일까
북일면 고분지대로 흐르는 신월천의 발원지는 만일재에서 가련봉으로 오르면 암자터(원효암터로 추정가 나오는데 )바로 여기가 월성천의 발원지가 된다. 그리고 흥촌천의 발원지는 오소재에서 남쪽으로 험한 암릉이 가련봉으로 향하는데 암릉을 따라 1시간 여쯤 오르면 마치 용이 하늘로 승천한듯 흔적이 남아있는 거대한 황룡굴이 나오는데 바로 이부근에 암자터가 있다.이암자터에서 오소재 약수터를 바라보며 10여분쯤 내려가면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 옹달샘이 나오는데 바로 여기가 흥촌천의 발원지이다.
두륜산의 도솔봉 도솔암터과 만일암터,상원암,오소재에서 오도재로 오르면 오도재 못미쳐 큰바위가 나오는데 바로 여기에 금샘이 있는데 삼산천를 발원지다.바로 여기에 위치한 고분이 용두리 고분이다.
현산면 구산천은 구산리 봉동부락 구시골에서 발원하며,조산리 야골에서 발원하는 물은 구산리에서 합수한다.바로 여기에 위치한 고분이 증산리 고분이다.
이러하듯 모든 하천의 발원지가 두륜산이다.이러한 발원지에서 흐르는물이 우기든 건기즌 풍부한 토사를 하류에 퇴적 시킴으로서 영양분 많은 뻘을 이루고 ,민물과 바닷물이 만나 물고기가 서식하기에는 최적의 조건을 만들어 냄으로서 고대에 많은 사람들이 살기에는 최적의 조건아니었을까
어쨋든 두륜산을 중심으로 해남의 거대한 고대문화가 이루어졌던 것이다.
두륜산일까 대둔산일까

태초에 두륜산은 해남사람들에게는 그저 큰산이었을것이다.
해남의 거대한 문화를 두륜산지역에 자리잡았을때도 그당시의 사람들은 큰산이었을 것이다.
대둔사 대웅보전에 있는 남아있는 삼층석탑이나 북암에 있는 마애불의 흔적을 볼때
그 당시에도 사람들은 큰산이었을 것이다.
두륜산이 문헌에 처음으로 등장한것은 조선초기 1530년에 발행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부터 였다.그 이전부터 산이름은 정식으로 두륜산으로 불리워 지게되었던것은 의미한다.
처음으로 조선시대 해남의 유명한 문필가인 석천 임억령(1496~1568)이 처음으로 대둔산이란 명칭을 쓰게 되었지만 두륜산이 널리 알려진 탓이 아니였는지 절이름을 따서 대둔산이라 한것 같고 ,하여튼 이분이 대둔산으로 명명한 이후부터 산이름은 두륜산이나 대둔산으로 기록되었던 것이다.
그당시에 해남사람들은 어떻게 큰산을 불렀을까
옛날 어른들이 한듬,한듬절이라 불렀던것처럼 그당시에도 이 표현이 해남사람들에게는 친숙하였을 것이다.
1823년 초의선사가 대둔사에서 주석하면서 인근에 귀양왔던 다산 정약용 선생의
자문을 받아 대둔사의 역사를 기록한 사지가 대둔사지인데 절이름따서 대둔산이라
하였던지 높은 봉우리에 향로봉,혈망봉,도솔봉,두륜봉,가련봉,고계봉이라 이름짓고
봉우리의 대표 주자를 대둔산이라 하였다.
결국 두륜산은 대둔산의 한봉우리로 전락해버린것이다.
두륜산일까 대둔산일까
하여튼 21세에 발행된 국립지리원지도에 까지 두륜산과 대둔산은 혼용되어 왔다.
이러한 지명기록은 산자락에 살았던 사람들의 스님들의 독특한 사고관이나 문헌이나 지도에 기록하였던 사람들의 오류인듯
해남사람들은 그져 큰산,한듬,한듬절이란 표현이 적합하지 않을까

두륜산의 맛은 장춘동 구곡부터

이제 두륜봉 보다도 많은 산악인들이 산행하는 곳이 되버렸다.
 그래도 두륜산에서 많은 코스가 있다 할지라도 두륜산의 자연보호적인 측면을 고려한다면 장춘동 구곡에서 산행하는게 좋지 않을까.
 산을 좋아하는 해남산악인들이라면 해남유스호스텔~고계봉~가련봉~두륜봉~도솔봉~작전도로~장춘동 코스라든가, 북일면 쇄노재~위봉~두륜봉~가련봉~오심재~오소재약수터를 산행하면서 두륜산의 장쾌함을 맛보았을 것이다.
 이런 코스가 산악인들에게는 충분한 운동량을 제공하는 훌륭한 코스라 할지라도 그래도 쏠쏠한 재미를 느낄수 있는 코스는 장춘동(長春洞) 구곡(九曲) 부터다.
 두륜산 매표소에서 대둔사(대흥사)경내의 2.3Km구간은 전국의 어디에서나 볼수없는 유명한 숲길이다.포장도로여서 산악인들이 걷기에는 불편한 곳이지만 구곡(九曲)옆으로 한적한 오솔길이 조성되어, 사색하며 산친구들과 걷기에는 제격인 산책로다. 한적한 곳이 싫다면 포장도로를 따라 걸으면서 구곡(九曲)에 놓여 있는 구교(九僑)를 건너는 재미를 느낄수 있다.
 봄철이면 수십년 묵은 나무들이 뿜어내는 숲의 내음과 구곡(九曲)이 얼마나 유명하였던지 두륜산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마을이름을 장춘동(長春洞)이라하고, 두륜팔경 중에서 구곡유수(九曲流水)하지 않았던가.
 지금 수리중에 있는 유선여관을 거치고 비전, 대웅보전, 천불전, 표충사를 거쳐 일지암을 거쳐 두륜봉을 오르거나 북미륵암, 천년수, 만일암터를 거쳐 두륜봉을 올라 진불암으로 내려와, 물텅거리골로 내려오며 찌든 세상사를 흐르는 물에 흘러 보내는 쾌감을 느끼는 산행코스가 좋을 것이다.

2.해남읍의 진산(鎭山) 금강산 (金剛山)

전하는 이야기로는 금강산의 우슬재는 소가 무릎을 꿇고 있는 형국이어서 . 해남현 에 부임하였던 현감들은 임기도 못채우고 떠나는 현감들이 많았다고 한다.
풍수지리에 능한 김서구라는 현감이 금강산에 올라 좌우를 살피니 해남땅이 토호세력들이 기세가 등등한 형국이더란다.
그래서 우슬재를 3자 3치씩 깍았내렸다 하지만 그도 결국은 해남을 떠났다고 한다.
오죽 못난 현감들이면 토호세력의 기세를 풍수지리의 탓으로 돌리고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해남을 떠났겠는가
그 금강산은 해남읍의 600여년의 역사를 지켜준 해남읍의 진산(鎭山)이다.
조선초 해남의 유명한 문장가인 유희춘(柳希春) 선생의 호가 미암(眉岩)인데
선생은 금강산과 어우러진 해남읍의 형국을 선녀가 가야금을 타는 형국으로 보고,그 선녀의 아름다운 눈썹바위(眉岩)를 호로 쓰지 않았을까
우리나라에 불교가 전래된 이후 스님들의 일대기를 기록한 동사열전의 저자이며,대흥사의 13대 강사인 범해각안 스님은 전라해남금강산은적사적에서 금강산을 이렇게 예찬했다.
“해남은 뿌리요,금강산은 꽃이고,월출산은 열매이니,해남에 인물이 나오는 땅”이라 하였다.

해남에도 금강산(金剛山)이 있다.

해남에서 가장 멋있는 사람이 금강산의 이름를 지었을 것이다.
금강산이 얼마나 그리웠던지 자기가 자주 오르는 뒷산을 금강산이라 하였을까 .
해남의 금강산은 마산의 맹진과 화내를 경계짓는 만대산(萬垈山)과 옥천면과 해남읍을 경계짓는 만대산(萬垈山)을 좌우로 거느리는 산이다.
여기서 만대(萬垈)는 만종류의 큰 바위란 뜻이다.큰 바위를 한자로 대(垈)라 하고,대를 일반적으로 봉우리로 해석한다.결국 만대(萬垈)를 만봉(萬峯)으로 해석하는게 옳을 것이다.해남의 금강산은 만대(만봉)를 두개나 거느리는 산이니 봉우리가 이만봉이어서 북한에 있는 금강산의 일만이천봉보다 팔천봉이나 더 많은 아름다운 명산이다.
산이름이 너무나 아름다워 해남의 시인들은 해남 팔경에 미암청풍(眉岩淸風),금강폭포(金剛瀑布),은사모종(隱寺暮鍾이라 하였다.

미암파와 삼봉파가 만나면 최고의 산행코스가 된다.

해남읍 사람들은 하루 종일 미암과 삼봉을 오른다.
건강을 위해서 오르는 산이면서, 해남의 말많은 사람들은 미암을 오르는 사람들을 미암파라 하고,삼봉을 오르는 사람들을 삼봉파라 한다.
미암파와 삼봉파라 구태여 표현할 필요는 없겠지만 미암코스보다는 삼봉코스가 시간적으로 약 20여분 더 할애하는 코스라 할까
금강산을 오르는 사람들에게는 별부담없는 산행코스다.짧은 코스이지만 해남읍이 통채로 손에 잡힌다.미암과 삼봉에 올라 손을 휘저으면 해남읍의 어느곳이든 손에 닿지 않은 곳이 없다.건강과 호연지기를 기르기 좋은 산행 코스다.
금강곡 체육공원에서 계곡으로 접어들기 무렵 좌측으로 험한 능선이 나타나는데 암릉을 기어오르며 스릴를 맛볼수 있는 우정봉 코스다.금강산의 산악인이라고 자부하는 사람들이 산행하는 코스다.
아침밥을 먹고 팔각정체육공원에서 미암바위를 거치고 금강산성으로 올라 , 금강령을 넘고 가파른길을 30여분쯤 내려가면 은적사에 도착한다, 철조비로자나불의 미소를 볼수있다.결코 2시간여 동안 다리품을 팔았던것이 아깝지 않다.은적사의 한적함에 취해 다시 숨가쁘게 금강령에 올라서면 금강산성 넘어로 해남읍이 고개를 내민다. 금강령 산 바람에 몸을 싣고 즐겁게 산을 내려오면 어느덧 팔각정에 도착한다. 이미 해는 해남읍의 중천을 넘어설때다. 금강산을 두번이나 오르내리는 산행코스다.
해남사람들이 소풍이나 다니는 금강곡이었지만 외지 사람들이 많이 몰려들어 금강 곡은 올여름내내 몸살을 앓았다.그러나 죄측편에 금강산성으로 오르는 비경의 계곡이 숨겨져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금강곡 체육공원을 지나 10여분쯤 걸으면 좌측으로 숨겨진듯한 계곡이 나타난다. 금강산성으로 오르는 산성안골이다. 골을 따라 30여분쯤 오르면 장마철이면 장관을 이루는 금강폭포가 나타난다. 무려 높이가 20여미터 이단으로된 폭포인데 카메라 광각렌즈 28mm에는 잡히지도 않은 대단한 폭포다.장마철에는 폭포 흐르는 소리가 산성안골에 메아리친다.우측 폭포상단부를 거치고 약간 오르면 오른쪽으로 우정봉으로 오르는 코스를 만난다.금강산에서 비경의 코스다.
금강산 최고의 산행코스라 하면 미암파와 삼봉파가 산행시간을 연장하는 코스다.
팔각정체육공원~미암바위~금강산성 ~금강산 정상 ~ 금강령 ~ 금강재~ 만대산정상 ~ 헬기장 ~ 삼봉~ 이봉 ~ 일봉~ 금강저수지제방 코스는 약 5시간 소요되는데 금강산의 웅장함을 느낄수 있는 코스다. 이 코스를 산행하게 되면 흑석산과 월출산 넘어로 해남이 대륙으로 연결되었다는 느낌을 받는다.
저 멀리 땅끝기맥과 호남정맥의 힘찬 산기운을 볼수도 있고 ,
구부린듯 ,나르는듯 ,휘어지는듯 펼쳐지는 산군의 광활함을 마음껏 만끽할수 있다.
그 산군에서 떠오르는 해를 해남최고의 일출로 친다.
산에서 만난 사람

이종원(43세,해남거주 ,자영업)
토요일 오후 미암파를 만나기위해서 팔각정체육공원에 올랐다.
마치 샌드백 같은 무거운 짐을 지고 산을 오르는 사람에게 물었더니 패러그라이딩 하러 간다고 하였다.
해남에서 패러글라이딩을 처음으로 보급시켰던 이종원이란 사람이다.
무거운 짐을 지고 있기에 부담을 줄까봐 짐을 풀고 체육공원 벤취에 앉았다.
- 금강산이 패러글라이딩에 좋은 곳입니까
해남에서 제일좋은 곳이라면 금강산과 달마산이죠
달마산은 멀어 서 금강산을 자주 찾거든요.바람이 좋다고 할까요
- 바람이라뇨
산바람이 활공하기에는 좋다는 뜻이죠 .
-어디에서 활공 하나요
미암바위 윗편 봉우리에서 하거든요
- 매일 활공하나요 .
토요일과 일요일에 합니다. 바람이 좋지 않은 날은 산아래서 봉우리만 쳐다보거든요
-오늘도 활공 하나요
바람이 좋지 않아 미암바위에서 기다릴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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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남도의 소금강 달마산(達 摩 山 )

달마산의 기암 괴석들은 마치 많은 부처님의 모습처럼 보여 그 신비로움은 미황사의 창건설화에도 등장한다.
엣날 뱃길이 발달한 시절, 배를 타고 왕래하던 외국사람들의 눈에는 달마산의 모습은 범상치 않았으리라 미황사사적비의 미황사 창건설화에 의하면 , 신라경덕왈 8년, 의조화상의 꿈에 “ 나는 본래 우전국의 왕인데 여러나라를 편력하면서 경상 봉안할곳을 구하였다. 산 정상을 바라보니 일만불(一 萬 佛) 이 다투었으므로 여기에 온 것이다. 마땅히 소에 경을 싣고 소가 누워 일어나지 않은 곳에 안치” 하라고 일렀다.
여기에서 달마산의 기암괴석들을 일만불이 다투었다로 표현 하였다.
달마산의 이름이 불리워지는 시기와 달마산의 유래를 짐작할수 있는 자료로는
조선시대 간행된 지지류 신증동국여지승람인데, 이 지리지의 영암군 산천조 달마산을 보면 ( 그당시에는 달마산 일대는 영암군소속이었다)
고려시대 무외스님의 기행문에 남송의 한고관이“ 내가듣기에 이나라에 달마산이 있다하는데 이 산이 그 산아닌가 하므로 주민들이 그렇다 하였다. 그 고관은 그 산을 향하여 예를 향하고 우리나라는 다만 이름만 듣고 멀리 공경할 뿐인데 ,그대들은 이곳에 생장했으니 부럽고 부럽도다 .이산은 달마대사가 상주할 땅이다. ” 하고 그림으로 그려갔다.
이 지지류에 따르면 달마산은 이미 고려시대 이전에도 명성이 외국에 까지 알려질 정도로 유명한 산이었다는 것을 알수 있고, 인도의 스님이며 중국 선종의 비조인 달마대사와 관련되어 산이름은 유래되었을 것으로 추측되어진다.
미황사의 창건설화와 고려스대의 무외스님의 기행문은 바닷길이 발달한 시절 배에서 달마산의 신비스럼움에 취해 비롯된 것이리라
달마산의 신비스러운 모습이 미황사를 창건하지 않았을까
달마산에 오르면 사람들은 금강산을 옮긴듯 기암괴석들의 행렬에 남도의 소금강이라 찬탄한다.

신비스러운 샘과 연못

달마산의 신비스러움에 걸맞게 산속에 금샘과 연못이 있다.
달마산의 암질은 규암인데,규암 탓인지 산에는 많은 굴이 존재한다.
굴에 지하수가 흐르면 샘이 되는데 바로 이샘이 금샘이다. 송촌쪽의 총창샘 , 신평뒷편의 작은금샘 , 평암 뒷편의 큰 금샘 , 마봉리 뒷편의 용담샘이다.
일반적으로 송지 사람들은 달마산의 금샘이라 하면 신평뒷편의 금샘을 금샘이라 하는데 필자가 자주 오르면서 관찰하기로는 샘 4개를 모두 금샘이라해도 무방할것 같다.
굴안의 바위에 수정이 있는데, 그 수정을 자세하게 보면 수정에 일종의 사금같은 같은 물질이 반짝인다. .이 금물질이 지하수에 녹아 내리면 물에 금물질이 떠있어 샘물은 마치 금빛이 나는듯하다.
이 금물질이 수년간 물에 녹아 금 물질이 모아져셔 금샘이 된듯하다.
총참샘, 작은 금샘, 큰금샘 ,용담샘은 좋은물이라 하여 많은 사람들이 마시다 보니 이제는 금빛나는 금샘을 볼수가 없다. 금샘의 모습을 볼려면 5년간 아무도 마시지 않으면 가능할수도 있다.
금샘을 아끼는 것은 마시지 않고 그대로 방치하는 것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의 영암군 산천조 달마산를 보면 “ 산꼭대기 천길이나 되는 벽아래 미타혈이라는 구멍이 있는데 대패로 민듯 칼로 깍은듯 한것이 두 세 사람은 앉을 만하다. 그리고 앞에는 층대가 있어 창망한 바다와 산들이 지호지간에 있는 것 같다. 그 구멍으로 부터 남쪽으로 백여보를 가면 높은 바위아래 작고 네모진 연못이 있는데 바다로 통하고 깊어서 바닥을 알지 못한다. 그물은 짜고 조수를 따라 늘었다. 줄었다 한다.”
발견만되면 금샘보다도 더 신비스러운 연못일것이다. 대략 미타혈의 위치는 불썬봉 동쪽 민어굴일 가능성이 높지만 수차례 답사해도 찾지 못했다.

해남제일경을 볼수있는 종주코스

가족끼리 가볍게 산행할려면 미황사 순환코스를 오르내리면된다.
미황사~ 헬기장~ 불썬봉(봉화대) ~석문 ~ 작은금샘 ~ 미황사에 이르는 코스인데
약 2시간 걸린다. 헬기장에서 불썬봉 까지 오르면 겨울에도 땀이 날정도로 가파른 산길이다.
불썬봉에 오르면 완도가 손에 잡힐듯하다.잠시 휴식을 취하고 남쪽으로 가게되면 마치 달마산의 암릉은 마치 용의 등을 타는듯 한다. 석문에 들러 굴을 끼고,사닥다리 타고 30여분 가면 작은 금샘이 나타난다. 금샘에서 목을 축이고 미황사로 내려오면 등이 축축하다.
많은 산악인들이 산행하는 코스로는
송촌마을~ 송촌저수지~수정골~ 작은바람재~ 큰바람재~ 불썬봉(봉화대) ~ 석문~ 미황사인데 점심먹고, 쉬고 하면 대략 4시간 정도 걸린다.
달마산이 남도의 소금강임을 한눈에 볼수 있고 ,좌우로 완도와 진도의 다도해를 마음껏 볼수 있다.
시종일관 긴장의 연속 눈을 잠시 다른데로 돌리면 떨어지기 십상이다.
종주코스로는 송촌마을 ~송촌저수지 ~ 작은바람재~ 큰바람재~ 불썬봉~ 석문~ 작은금샘~ 하숙골재 ~ 떡봉~ 웃골재~ 도솔암터~ 도솔봉 ~ 몰골이재~ 통호마을인데
해남산악인의 소수만 종주 했을뿐 대단히 어려운 코스다. 대략 8시간 정도 걸린다. 날쌘 산악이라면 대략 5시간 정도 걸린다고 한다.
무려 크고 작은 봉우리 30개를 거치면 누구나 산도사가 된 기분이다. 종주할때 필수는 수양하며 산을 오른다는 기분으로 거북이처럼 오르면 누구나 가능한 코스다. 도솔봉에 닿으면 해남제일경을 볼수 있는 코스다.
도솔봉에 다다르면 해남(海南)을 느낄수 있다. 바다에 인접한 해남의 광활함을 달마산의 도솔봉만 올라가야 볼수있는 광경이다.
“ 사자가 찡그리고 하품하는 것 같기도 하고 혹은 용과 범이 발톱과 이빨을 벌리고 있는것 같기도 하며,멀리 바라보면 쌓인 눈이 공중에 떠 있는 것 같기도 한다. ” 무외스님의 달마산이다.

4.학이 멍에를 얹고 있는 산 흑석산 (일명 가학산)

가학산(駕鶴山)은 해남에서 유명한 산이었던지 조선시대지리지인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처음으로 등장한다.
산의 형국이 마치 학이 멍에를 얹고 있는 산처럼 생겼다 하여 가학산으로 한듯하다. 가학산의 모습을 계곡면 장소리쪽에서 바라보면,흑석산기도원 뒷편에 높은 봉우리가 있는데 그 모습이 팔자형 멍에 모양을 하고 있어, 멀리서 바라보면 산은 모습은 영락없이 학의 목에 멍에를 얹고 있는 형국이다.
멍에를 얹고 있는 학은 영원히 날으지 않고 그 자리에 항상 남아 있으므로.남아있는 자리의 땅의 기운은 살아있어, 학이 알을 품고 있는 형국의 자리, 즉 한자어로 금학포란형(金鶴抱卵形)의 길지인, 해남의 명촌 방춘마을이 이루어 졌을 것이다. .
가학산과 흑석산(黑石山)은 신증동국여지승람 이후에 발간된 대동지지에 이르러 동시에 나타난다.
산의 바위가 비가온후 빗물을 머금으면 흑색으로 변하게 되는데 이런 이유 대문에 산이름을 흑석산이라 하지 않았을까.
가학산은 산의 형국으로 보아 가학산이라하고, 산의 바위가 검기 때문에 흑석산이라 하였기에 계곡의 뒷산을 가학산과 흑석산이라 불러도 무방할것 같다.
필자는 제1회 흑석산 철쭉제때 흑석산의 아름다움을 글로 기고한적이 있었는데
어느날 계곡면의 어느 촌로로 부터 항의를 받았다.
“ 천선생, 흑석산의 명주가 진양주(眞釀酒)지, 가학산의 명주 진양주는 아니네.”
흑석산의 명주가 가학산의 명주로 둔갑되어서는 안된다는 단호함이 배어있었다.
흑석산의 자연과 문화

흑석산은 해남의 북풍을 막아주는 수문장이기에 엣 별진역 입구에는 지나가는 나그네들이 목을 축이며 시를 읊었던 말삼정터와 샘이 있고 , 옛날 해남땅을 오갔던 현감들의 송덕비가 남아있다.
계곡과 영암의 학계리를 오갔던 가리재 아래에 사람들이 쉬어가는 길이라 하여 쉰거리가 하였는데 이름에 걸맞게 가학산자연휴림이 조성되어 많은 사람들이 안락한 휴식을 취할수 있는 곳이다.
금학포란형의 길지인 해남의 명촌 방춘마을은 해남에서는 유일하게 많은 법관을 배출한 곳이며, 김종서를 배향한 방춘서원이 있다.
산자락엔 일본인들이 은을 채굴했다는 은굴이 있는데 한여름에 굴에 들어가면 냉기가 서린다. 은굴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곳에 1급수에만 서식한다는 도룡용의 서식처 은샘이 있는데 사람들이 찾지 않은탓인지 샘주위는 이끼가 무성하여 신비스럽기만 하다.
산의 계곡에서 흐르는 맑은물은 계곡의 명주 진양주를 빚어낸다.
능선에 많은 철쭉들이 자생하고 있어 매년 5월이면 흑석산철쭉제가 열린다.
산의 곳곳에 펼쳐져 있는 소사나무는 전국 어느 산에서도 볼수없는 거대한 군락지다.
산의 지천에 깔려있는 두릅과 취나물은 봄내음이 가득한 산임을 알려준다.

흑석산의 등산코스

흑석산은 인근의 월출산과 두륜산의 유명세에 밀려 등산객들이 별로 찾지 않은 한적한 산이었다.
매년 5월에 열리는 철쭉제 때문에 지금은 많은 산악인들이 즐겨 찾는 곳이다.
예전에는 많은 산악인들이 애용하였던 코스는 흑석산기도원~ 기도원 뒷편 가학봉 ~ 학목덜미~ 깃대봉~ 가리재~ 영암 학계리인데 최근에 가학산휴양림이 조성되어 이제는 가리재에서 휴양림쪽으로 하산한다.
가학산자연휴양림의 순환코스는 가학산자연휴양림~ 가리재 ~ 삼거리~ 깃대봉~ 삼거리 ~ 은굴~ 가학산자연휴양림인데 약 4시간 걸린다. 5월에 이코스를 산행하게되면 만발한 철쭉을 볼수도 있고 , 가족끼리 암봉에 올라 봄빛을 즐기는 가족형 산행코스다.
종주코스는 강진 성전면 월평리 제전마을~ 기도원 뒷편 가학봉 ~ 학목덜미 ~ 깃대봉~ 가리재~ 가학산 자연휴양림 인데 약 7시간 정도 걸린다.아침부터 산행하면 가학산자연휴양림에 게으른 산악인이라도 오후 5시 정도면 도착한다.
학날개의 퍼덕거림을 느낄수 있는 코스는 당산리 사촌마을~학의 오른쪽 날개~학목덜미~학왼쪽 날개~ 깃대봉~가학산자연휴양림인데, 이 코스를 산행하게 되면 월출산줄기에서 흘러내리는 땅끝기맥의 힘찬 용트림과 영암호와 산이반도가 널리 펼쳐지는 모습을 볼수 있다. 학의 목덜미에 이르러 북쪽을 바라보면 학의 날개짓을 느낄수 있다.
인근의 월출산은 천황(天皇)의 거룩한 모습이라면 ,두륜산은 부드러운 품을 연상하는 모산(母山)이고 ,학의 날개에 올라 구름속에서 세상을 내려다보는 산은 신선풍(神仙風)의 가학산(일명 흑석산 )이다.

5. 고산 윤선도 산중신곡의 산실 병풍산

삼산면 구림리 불성동에서 해창리 수림마을의 나불치에 걸쳐져 있는 길다란 산을 병풍산(屛風山)이라한다.
마치 펼쳐놓은 병풍처럼 생겼다 하여 사람들은 병풍산이라 한다.
얕으막한 산이고,삼산의 야산쯤으로 여기는 산이어서 동네의 약초꾼이나 산을 오를뿐, 산악인들의 출입이 거의 없는 산이었다.
그러나 이 산의 뒷편에 골짜기가 있는데,골짜기 안에 조선시대 해남의 유명한 시인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가 산중신곡(山中新曲)을 집필했던 수정동(水晶洞),문소동(聞簫洞),금쇄동(金鎖洞)터가 자리잡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고산 윤선도가 금쇄동에 은거하면서 산중생활을 수필로 옮긴것이 금쇄동기인데, 금쇄동기의 기록은 대략 병풍산의 위용을 짐작하게한다. “ 대둔산(두륜산)으로 부터 문소동 어귀까지 여러 봉우리가 십여리에 나열되어 있어서 ,마치 길고 짧은 비단 울타리를 수 놓은것 같고,구비구비 병폭을 쳐 놓은 ..... ”
일반적으로 병풍은 바람막이와 지저분한것을 가리는 역할을 하지만
자연적으로 생겨난 병풍산의 산세는 이상하게도 고산 윤선도의 은거지를 감싸는 역할을 하고 있어 속세의 병풍과는 다른 역할을 하고 있다.
신선이 되고 싶은 고산이 이러한 자연적인 산세에 이끌리지 않았을까
운무가 병풍산 자락을 감돌 무렵 고산은 금쇄동의 회심당에서 금강산의 선녀가 가야금 타는 소리를 감상하며 시상에 잠겼으리라

금쇄동기에 나타난 고산의 산행관

금쇄동기는 자연에 동화되지 않고서는 쓸수 없는 산중수필이다. 고산은 꿈속에서 금쇄석궤(金鎖錫櫃)를 발견하고 며칠 지나서 금쇄동을 답사하였던 길은 문소동에서 고산의 묘소를 거친 길로 추정된다.
처음에는 수정동에서 금쇄동을 오르려면 반드시 문소동을 거쳐 올랐지만,고산은 금쇄동의 지름길을 발견, 보통 사람들이라면 가까운 길을 택해 금쇄동을 오를 것이지만, 고산은 오히려 지름길보다는 먼길이면서 바위가 많은 길을 인위적으로 개척 바위마다 이름을 짓고, 자연주의의 심취하며 자기자신만이 유일하게 오르는 독특한 산행길을 개척하였다. 일종의 신선이 오르는 길이랄까.
고산 손 윤위(尹偉)의 보길도지(甫吉島識)에 따르면 “고산은 때로는 암석을 붙들고 산행할때의 발걸음은 나이 젊은 건각들도 공의 뒤를 따르지 못했다는 것이다.”
고산의 산행하는 모습이다.
금쇄동기에 나오는 지명을 이름지을 정도면 , 고산은 이 산책로를 수백번 오르내렸을 것이다.
산행길을 구태여 따지자면 금강산의 미암파나 삼봉파 정도의 산책길 정도나 될까.
금쇄동 산책로는 신선이 오르는 길이라면, 미암과 삼봉을 오르는 사람들은 평범한 사람들이 오르는 산책로다.
병풍산 등산로

고산의 흔적을 찾은 코스는 레미콘석산~수정동~병풍산 정상~ 병풍능선~ 재~ 윤재준씨 농가~ 문소천~ 고산산책로~금쇄성터입구~고산 산책로~ 고산묘지~고산신도~ 문소동제~윤재준씨 농가인데 약 6시간 정도 걸린다. 레미콘석산의 소음이 시끌시끌하지만 허가를 받고 들어가면 그림같은 오솔길도 따라 10여분쯤 걸으면, 수정동의 옛터를 만난다. 능선으로 곧바로 올라 30여분 숨을 고르면 정상이다. 정상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 다음, 능선을 따라 산행하면 좌우로 금쇄동의 모습과 삼산벌이 시원스럽게 펼쳐진다. 재에서 윤재준 농가로 내려서 문소천을 거쳐 고산 산책로로 접어들어 해남문화원에서 발행한 “ 고산문학현장보고서”를 지참하고 고산이 명명한 지명의 흔적을 찾으며 산행하면 약 2시간 정도 걸린다. 산성의 서문지에서 약 20여분쯤 걸으면 임도가 나타나는데, 여기서 고산 묘소까지는 20여분정도 걸린다. 고산 묘소에서 문소동제각 까지는 10여분 걸리고 다시 여기서 윤재준씨 농가까지는 30분이다. 윤재준씨 농가~ 문소천 ~ 고산산책로 ~ 금쇄성터입구~고산산책로~ 고산묘지~고산 신도비~ 문소동제각~ 윤재준씨 농가 코스는 고산 산책코스인데 약 3시간 걸린다.
금쇄동에 오르면“ 산과 바다가 눈아래에 있어, 흐르는물, 우뚝 솟은산, 높고, 낮고, 곧고, 굽고, 길고, 짧고, 펴지고, 쭈구리고, 아득하고, 운애 낀 모양들이 멀고 가까운 곳에 활짝 펼쳐 있으니” 병풍산의 보물이다.

6. 전설속의 산 주작산(朱雀山)

해남읍에서 우슬재를 넘어 옥천면계로 접어들면 오른쪽으로 멀리 마치 꿈뜰거리는 용의 모습을 지닌 산이 나타난다. 주작산(朱雀山)이다.
주작산은 조선시대 지리지인 여지도서(1759~1765) 강진현편에 처음으로 등장한 산이며, 다산 정약용 선생의 외손인 윤기정의 동환록(1859)에 주작산은 덕룡산(德龍山)으로 나타난다.
동환록 이후에 간행된 모든 지리서에 산이름은 다시 주작산으로 기록되어지고, 덕룡산의 이름은 사라지게된다.
국립지리원 지도에는 강진 도암면 뒷쪽의 산을 덕룡산으로, 신전면 신전초등학교 뒷편의 봉우리는 주작산으로 표기되었다.
이 지도를 보고 산행하는 산악인들 조차도 한 산덩어리에 주작산과 덕룡산이 두개의 산이 존재하는 것 처럼 생각한다.
주작산일까. 덕룡산일까.
북일면 신월리에서 강진쪽으로 향하게 되면 왼쪽으로 뾰쪽뾰쪽한 산 봉우리들이 길게 펼쳐진다.강진군 신전면 신전초등학교의 뒷봉우리는 마치 새의 머리 처럼 보이고,다시 도암면 수양리에서 석문리 까지 북쪽으로 길게 산군이 펼쳐진다.
산세를 자세히 살펴보면 날아가는 새의 모습이다,
풍수지리에 관심이 많은 어떤 자가 그러한 새의 모습을 보고, 전설속에 나타나는 신비스러운 주작(朱雀)의 모습으로 형상화 하였을 것이다.
주작(朱雀)은 남방을 지키는 신령인데, 주조(朱鳥)라고도 한다.
주조는 예로부터 붉은 봉황을 형상하여 무덤과 관 앞 쪽에 그렸던 신비스러운 새다.
그래서 주작산의 이름이 유래된 듯하다.
북일면 오소재에서 강진군 신전면 영귀리 금학동 뒷편의 능선을 새의 오른쪽 날개라면,강진군 신전면 신전초등학교의 뒷편의 산봉우리는 새의 머리고,강진군 도암면 수양리에서 석문리에 이르는 능선은 새의 왼쪽날개다.
그리고 새의 몸통은 해남군 옥천면의 첨봉에서 덕음산에 이르는 능선이다.
영락없이 남해를 향하여 나르는 주작(朱雀)의 모습이다.
덕룡산은 마치 산세가 꿈뜰거리는 용의 모습을 하고 있어 산이름은 유래된 듯하다.
덕룡산은 윤기정의 동환록이나 국립지리원에서 발행한 지도에서 살펴볼때 지금의 봉황리 입구인 소석문에서 도암면의 수양리 수양관광농원의 뒷편에 이르는 능선을 지칭한다.
주작산은 지리지 동환록과 국립지리원지도에서 왼쪽 날개능선이 덕룡산으로 이름붙여 지게되어 결국 주작은 왼쪽 날개를 잃게 되버린 것이다.
일종의 지명폭력에 의해 신비스러운 주작은 한쪽 날개가 희생된것이다.
산이 인간이라면 현실적인 세상에서 고소도 할수 있겠지만 신비스러운 모습을 지닌 주작은 한쪽 날개를 잃어 버린채 고통속에 퍼덕거리고 있다.
주작의 신비스러움을 되찾는 방법은 한쪽 날개를 복원 시키는 방법일것이다. 일종의 지명폭력에 희생되었다면 산의 원래 이름을 찾아주면 되는 것이다. 지리지가 잘못되었다고 수정할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러나 이름을 되찾은 방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국립지리원지도에서 덕룡산의 산이름만 지워버리면 끝이다.
지도에서 덕룡산을 지우면, 당연하게 주작산만 남게된다.

주작의 압권은 소석문(小石門)

해남사람들은 주작산의 뒤편과, 오른쪽 날개만 감상하다보니 주작의 모습을 알수가 없다.
주작산을 삼등분하면 1/3이 해남땅이고,2/3는 강진땅이기에 주작산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는 것이다.
더구나 해남군과 강진군의 군계에 자리잡고 있는 산이여서 해남사람들에게는 관심밖의 산이었다.
한때 주작산의 2/3가 해남땅이고, 1/3이 강진 땅인 시기가 있었다.
1990년 대통령령(제13046호) 의해 해남군 옥천면 봉황리가 강진군 도암면으로 편입되어 지면서 일어난 현상이었다.
봉황리(鳳凰里)는 말할 나위없이 주작에서 유래된 마을이다. 봉황리 골짜기에 덕룡사란 절터가 있는데 절이름은 산이름에서 빌려온 듯하다.
해남군 옥천면의 용동리 자경동이나 강진군 도암면 봉황리는 한적한 산골을 연상한다. 해남이나 강진쪽에서 가장 한적한 곳이라 할까. 강원도 산골에서 볼수 있는 하늘아래 첫동네다.
강진군 도암면 항촌리 월하부락 뒷편에 아스콘공장이 있는데, 바로 그 뒤에 용이 승천하였다는 용혈(龍 穴 )이 있다.
고려시대 만덕사(지금의 백련사)의 유명한 스님들이 주석하였던 터다. 조선시대 강진으로 귀양왔던 다산 정약용 선생이 스님들이 흔적을 찾았던 곳인데 지금은 아스콘공장의 소음만 진동한다,
북일면 흥촌리 석정에서 한적한 시골길을 따라 30여분쯤 차로 산을 오르면 관악사란 절이 있다.
이층 누각에 오르면 남해로 떠오르는 일출은 장관이다.
산악인들은 제2의 달마산이라 하지만 암릉의 길이로는 달마산의 암릉보다 약 5km 정도 더 길다.
기암괴석과 어우러진 빼어난 경관은 오히려 달마산을 압도한다.
압권이라면 빼어난 암릉의 경괘함도 있지만 석문리에서 봉황리로 들어가는 소석문(小石門)이다. 마치 서있는 바위들의 키큰 모습은 하늘로 오르는 신선들의 무리인듯 좌우로 도열해 있다.
인근에 대석문(大石門)에 비해 규모는 작지만 봉황(鳳凰)이 사는 마을을 들어가는데는 걸맞는 문이다.

주작산을 종주해야만 해남 산악인이다.

해남에서 산악인 행세를 한다면 달마산의 종주를 자랑거리로 삼는다.
4~5시간에 주파했던 산악인들이다.
주작산 코스는 달마산과 다를게 없지만, 난이도는 결코 쉽지 않다.
오히려 시종일관 긴장된 코스가 달마산 보다 더 길다 할까.
우리나라에 유명한 산악잡지로 “월간 산”과 “월간 사람과산”이 있다.
1994년 2월 “월간 사람과산”에서 강진 만덕산 부터 땅끝까지 종주를 하였는데 주작산의 오른쪽 날개만 통과한 시간이 11시간 정도 걸렸고, 왼쪽 날개를 거친 시간이 약 12시간 정도 였다.
그 당시에는 전혀 길이 없는 난 코스였다.
1999년 1월 “월간 산”에서 취재할 당시에 필자도 동행하였는데 거의 유사한 시간이었다.
“월간 산”에 주작산이 전국에 소개되면서 많은 산악인들이 몰려 들고, 이제 등산로는 고속도로 처럼 나있어 소요시간은 오른쪽 날개는 7시간 정도 소요되고,인쪽날개는 6시간 정도 걸린다. 산에 자신있는 해남산악인이라면 낮이 긴 봄철을 이용하여 도전해볼만 산행코스다.
코스는 대략 오소재~ 오른쪽 날개능선 ~ 난농장 ~ 수양관광농원이나, 수양관광농원 ~ 왼쪽날개능선 ~ 소석문이다. 이틀간 구간을 나누어서 산행하는 코스다.
코스를 연장하여 주작산의 참맛을 느낄려면, 오소재~ 오른쪽 날개능선 ~ 난농장 ~ 주작머리봉(헬기장) ~ 수양관광농원 이나 , 소석문~ 왼쪽날개능선 ~주작머리봉(헬기장) ~ 수양관광농원 코스다.
주작머리봉에 오르면 전설속의 나타나는 주작의 날개짓을 느낄수 있다.
남해를 바라보면 구름속으로 자신이 모습이 나르는 모습을 발견할것이다.
주작산을 종주해야만 해남산악인이다.

7. 보배로운 산 땅끝, 갈두산(葛頭山)

지금까지 두륜산,금강산,달마산,흑석산,병풍산,주작산을 연재하였다.
고산 윤선도 고택이 있는 덕음산이라든가.이별의 아픔을 지닌 현산의 백방산과 망부산,신선이 은거한 화산의 선은산,구름이 쉬어가는 화원의 운거산,해남의 동쪽 언저리에서 해남의 기상이 서리게한 서기산,해남의 안산 말뫼봉을 자료가 미비하여 다음 기회에 미루게됨을 아쉽게 생각한다.
산이야기를 쓸려면 최소한 그 산에 10번정도는 올라야 무언가 이야기 한다고 할까
그래야 그 산에 대한 예의를 지킬것이다.
해남 사람들이나 땅끝을 찾는 관광객들은 땅끝에 있는 산을 사자봉(獅子峰)이라 한다.
200여미터도 못되는 산이지만, 해남의 산 중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오르며, 해남에 막대한 관광수입을 안겨주는 보배로운 산이다.
땅끝일대의 산이 마치 사자 형상의 산이어서 사자봉이라 한듯하다.
조선시대에 간행된 세종실록지리지(1454년)에 사자봉의 지명은 갈두(葛頭)로 나와있다.
갈두(葛頭)의 두(頭)자는 산이란 의미를 지니므로 뒤에 산이란 명칭을 구태여 붙이지 않아도 그냥 갈두산 이라해도 무방한 지명이다.
갈두(葛頭)는 갈두마을 사람들의 이야기를 빌리자면 산의 머리 부분에 칡이 많아 유래된 지명이라고 한다.
갈두산이 지리지에 등장하였던 이유는 조선초부터 왜구의 침략을 알리는 봉화대가 있 어 군사적요충지로 각광을 받았던 곳이었기 때문이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1530년)에 이르러 정식으로 갈두산이라 하였다.
그 이후에 갈두산이란 명칭은 계속 사용되어 지다가, 1980년 무렵에 사자봉이라 한듯하다.
결국 갈두산이 사자봉으로 불러지게 된것이다.

땅끝일대의 지명

산이름은 산의 형세에 따라 명명되어진다고 생각한다.
산머리에 칡이 많아 갈두라 명명한것은 자연적인 것이라면 현재 땅끝일대를
사자와 관련하여 명명하였다면 당연하게 사자봉이라 하여야 할것이다.
그러나 땅끝일대의 산세는 유감스럽게도 용맹스러운 사자의 모습을 지니고 있지않다.
누군가에 의해 사자봉으로 명명되었을 것이다.
미황사사적비에 나오는 미황사 창건설화의 사자포구와 관련되어서 사자봉과 관련되어서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통일신라시대 때는 달마산 아래는 유감스럽게도 현재의 지형과는 달리 현산면 월송리, 송지면 군곡리, 산정리, 통호리, 북일면 영전 일대는 바다였다.
전설에 나오는 사자포는 바다에서 볼때 달마산의 어떤 부분이 사자형상을 하고 있을수도 있어 달마산 아래의 어딘가로 추정할수도 있다. 사적비에도 사자포는 달마산 아래로 기록되어져 있어 그 추정을 뒷받침하고 있다.
땅끝의 한자어는 지말(地末)과 토말(土末)이다.
해남의 유식한자가 지말보다는 토말이 어감상 표현이 좋아서 토말이라 하지 않았을까
1995년 해남군에서 지명위원회을 열어 토말을 땅끝으로 개명하였다.
1994년 7월 필자가 땅끝. 해남지도를 제작하면서 해남에서는 처음으로 지도에 정식으로 땅끝으로 표기하였다.

갈두산에서 백두산까지

갈두산의 땅끝에서 산줄기 만 따라 걸으면 물을 한번도 건너지 않고 백두산까지 도착할수 있을까.
우리나라 지도를 펴놓고 색연필로 산줄기를 연결하면 물을 한번도 건너지 않고
백두산까지 갈수 있다는 사실을 알것이다.
우리나라의 산줄기는 마치 사람의 혈관 처럼 연결되어 있어 산줄기로 연결되지 않은 산이 없다.
그 의문을 풀기 위해서 지금도 해남을 찾는 많은 산악인들은 땅끝에서 백두까지의 기치를 걸고 능선을 종주하고 있다.
필자가 1995년 2박3일 동안 “월간 사람과 산” 잡지사와 두륜산에서 땅끝까지 종주를 한적이 있었다. 땅끝~백두의 일부분에 그치는 일이었지만, 그 당시에는 등산로가 없어 무모한 산행이었다.
2박3일 동안 걷는 동안 등산복은 세탁소에서 수선할수 없을 정도로 살벌하게 가시의 세례를 받았다.
산줄기를 타고 땅끝으로 가려는 여망이었다.
해남산악인이라면 도전할만한 코스다.
해남의 유명한 산악인 임영옥(자영업,56세)씨는 3월쯤 땅끝기맥,호남정맥,백두대간을 종주한다고 한다.
통일에 대한 멸망이요 우리산에 대한 사랑일것이다.
다행이도 해남군에서는 올해에 달마산 도솔봉~십자혈~땅끝까지 등산로를 개설한다고 한다.
달마산 종주산행을 하는 산악인들은 달마산 도솔봉에 이르르면 땅끝으로 향하는 능선을 바라보며 땅끝으로 향하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힌다.
등산로가 개설되면 도솔봉에서 땅끝으로 향하는 산행객들로 붐빌것이다.
통일에 대한 열망에서 백두산과 갈두산을 사진을 실어 해남의 산이야기를 마무리한다.
“산은 산이로되,물은 물이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