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옛날 중학교 다니다 중퇴한 ...... 학다리중고교
제 '10-7 호
"아들의 졸업식을 보며“
얼마 전에는 눈이 기상관측사상 최고로 많이 내리더니 입춘이 지나서인지 이른 봄비가 내린다. 요즘은 졸업시즌으로 눈이 내릴 때인데 비가 오는 것을 보면 벌써 봄이 턱밑까지 왔나보다. 지난2월9일 화요일에는 큰 아들 중학교 졸업식이 있었다. 아침부터 비가 내려 우산을 받치고 아내와 성안중학교로 향했다. 열시 반쯤에 학교에 도착하니 길에는 비가 내리는 중에도 화사한 꽃, 붉은 장미, 노란 꽃, 보랏빛 꽃들이 길가에 늘어서서 오늘의 주인공들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지난 해 지은 강당에서 처음 졸업식이 열린다. 3학년만 18학급, 약800명이 강당에 들어가니 학부형들은 들어설 곳이 없어서 로비와 계단과 강당입구에 서있다. 형식적인 순서가 금방 지나갔다. 난 아내와 비좁은 틈에 끼어 앞자리에서 학생들만 바라볼 수 있었다. 식이 끝나자 한꺼번에 2층에서 내려가면 혼잡하고 위험하니 학부형들이 먼저 나가라고 방송한다. 밖에 나가도 비가오고 추워서 어디 서 있을 곳도 마땅치 않아 운동장교단에 올라가서 비를 피하며 기다렸다. 아들에게는 문자메시지로 그 곳에 오라고 연락해두었다.
아들은 전날 앨범과 정근 상을 받아 왔다. 오늘은 졸업장만 받아오면 된다. 아들의 졸업식에 참석해도 사실 별 감동이 없다. 왜일까? 사람들은 차를 몰고 오고 여기저기서 시끌벅적하고 디지털 카메라 불이 터지고 하는데도 말이다. 사실, 난 중학교 졸업장이 없다. 그래서 중학교 졸업장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파온다. 시골에서 중학교 3년은 다 다녔지만 졸업장은 받지 못했다. 3년 내내 납부금, 보충수업비, 여러 잡비에 저축도 강제로 하게 해서 그것을 제 때에 내지 못해서 얼마나 시달리고 힘들었는지 모른다.
2학년에서 3학년으로 올라갈 때 2, 3, 4기분 납부금을 내지 못해서 등반도 못할 지경이었는데 반배치는 3학년 1반으로 된 것을 알고 막연했지만 그렇게 등교했다. 선생님은 돈 낼 수 있는 날짜를 일주일 안에 정하라고 한다. 난 집에서 늘 형편이 안돼서 어려운 줄 알고 멀리 토요일로 정하면 선생님은 머리를 막대기로 탁탁 때리면서 '이 뺀 질한 놈' '늦게 내려고 용을 쓴다.'고 하며 야단하셨다. 물론 토요일이 되어도 약속은 못 지킨 것은 다음 월요일에 또 몸으로 때웠다.
부모님은 농사는 없고 장사하셨는데 사기를 당하여 빚을 지고 그것을 이겨내느라 몸부림쳤다. 매일 빚쟁이들이 아침마다 새벽을 깨워서 우리도 그 소리에서 귀가 따가워서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난 학비를 벌기 위해 일요일이 되면 남의 집에 품팔이를 했다. 어른들이 400원정도 받을 때, 난 모심기, 벼 베기, 양파 캐어 나르기, 보리 베기, 담배 잎 따고 엮기 등등 하면 일당50원정도 받았다. 모심기나 보리배기나, 벼 베기에서 어른에 뒤지지 않으려고 허리도 잘 펴지 않고, 땀이 흘러 얼굴과 옷에 하얀 소금가루가 생길 정도로 열심히 했다. 그 돈을 조금씩 모아 학급비, 보충수업비(그 때는 모두 수업하고 돈을 내야했다)를 냈다. 강제로? 저축도 하고 졸업앨범비도 냈다. 소풍갈 때 학생회에서 선생님을 위해 20원이나 30원씩 거두어 선물해드리자고 하면 얼마나 가슴이 조마조마 하던지. 맘은 있으나 그것도 내게는 큰돈이어 부담이 되었다. 매일 아침 학교에 갈 때는 소리 없는 눈물을 흘리며 갔다. 돈을 줄 수 없는 부모님 마음은 얼마나 아플까 생각해서 달라고 보채지도 못하고 그냥 학교에 갔다. 가면 매일 종례시간에 시달렸다. 손바닥, 종아리 맞고, 책상에 올라가 무릎을 꿇고, 발바닥도 맞고 무릎도 맞았다. '이 질긴 놈!'하면서 때리셨다.
학교에 가기 싫었다. 하지만 이를 악물고 다녔다. 학교에서 그만 오라고 할 때가지는 가자 다짐하면서……. 학교가면 집에 가서 돈 가져오라, 부모 데려 오라 해서 수업 중에도 불려 나와서 집에 갔다 오기도 했다. 어느 날은 너무나 힘들고 괴로워서 학교에 가지 않았다. 그래서 하루 종일 쑥을 캐서 서울로 보내는 동네 장사하시는 분에게 팔았더니 130원 정도 받았다. 친구와 나누고 빵 하나 사먹고 나머지 돈을 가지고 해질녘에 집으로 왔다. 난 말 그대로 피땀 흘려 학교에 저축했다. 한약재 반하(반하의 알줄기 담·구토·습증·해수 등에 약용함)를 캐서 말린 것도 팔고, 품팔이도 해서 3500원이나 저축했는데 선생님은 돌려주지 않았다. 졸업앨범도 주지 않았다. 앨범 값은 힘겹게 일해서 냈는데……. 무척이나 아쉬웠지만 그렇다고 선생님을 원망하지 않았다.
난 눈이 흩날리는 졸업식 날 아침에 학교에 갈까 말까 하고 망설였다. 가봐야 졸업장도 못 받는데 뭐 하러 가나하고 생각도 해보았지만 그래도 친구들 축하도 하고 구경삼아 가보자고 생각해서 학교로 향했다. 당시에는 검은 교복을 입었는데 친구들은 졸업장도 받고 꽃다발도 받아서 그런지 얼굴에 환하게 상기된 얼굴들이었다. 난 졸업식을 조용히 지켜보다가 다른 친구들과 얼굴을 마주칠까봐 조용히 집으로 왔다. 그 땐 아무도 위로해 주는 사람도 없었다.
아들의 졸업식을 보고 있자니 옛 기억이 떠오른다. 이상하게 감동도 없고 멍하다. 수요일에는 막내초등학생 졸업식 때 가서 사진도 찍어주고, 막내 졸업식 때 한꺼번에 거금을? 들여 중국집에 가서 자장면 곱빼기에 탕수육까지 시켜 성대한 졸업식을 치러주면서 마음속으로 속삭였다.'그래도 돈 걱정 없이 공부하고 졸업한 너희들은 행복한 거야! 나도 너희들이 건강하고 공부도 열심히 해서 졸업한 것 기쁘단다. 축하해. 앞날에 하나님의 큰 사랑과 축복이 함께 하길 바란다.'
주후 2010년 2월 14일 김영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