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0년 11월 8일 주일메시지 사사기 제 3 강
큰 용사여!
말씀: 사사기 6:1-32
요절: 사사기 6:12 "여호와의 사자가 기드온에게 나타나 이르되 큰 용사여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
용사는 어떤 사람입니까? 70년대 위인전을 읽던 시절에는 을지문덕, 김유신, 강감찬 구국의 영웅들이었습니다. 80년대에는 007, 람보, 터미네이터가 용사의 모습을 대표하였습니다. 요즘은 미디어에 불사조 같은 용사들이 아주 많이 나와 있습니다. 그들은 뛰어난 신체능력이 있으며 빠르고 명석한 판단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주식 투자하는 사람들은 적은 돈으로 출발하여 수십억 자산가가 된 사람이 큰 용사일 것입니다. 서울 시내에 아파트 소유한 사람이 우리 사회에서는 큰 용사인지 모르겠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하나님께서는 한 농부를 부르십니다. 평범한 그를 큰 용사로 부르십니다.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부르심이 어떠하며 하나님께서 어떻게 큰 용사로 키우시는지 배우고자 합니다.
I. 기드온을 부르신 하나님 (1-24)
1절을 보십시오. 이스라엘 백성또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시 징계하셨습니다. 이번에는 칠년 동안 미디안의 손에 붙이셨습니다. 미디안에게 붙이신 것은 그동안의 징계와 다른 것이었습니다. 훨씬 강도 높은 징계였습니다. 미디안 족속은 아라비아 지역의 유목민입니다. 농경민족이 농경민족과 전쟁할 때는 남겨두는 것이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유목민족이 농경민족을 약탈할 때는 남겨두는 것 없이 약탈하는 사례가 많았습니다. 2~5절을 보십시오. 미디안 족속은 수 많은 사람들이 낙타타고 쳐들어와 이스라엘을 약탈하였습니다. 그들은 남김없이 약탈하였습니다. 그들은 곡식만 털어가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가축들까지 남기지 않고 털어갔습니다. 그들은 곡식과 가축을 빼앗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이 점령한 땅의 농경지까지 파괴하였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미디안 족속에 대항하지 못하고 다 빼앗겼습니다. 그들은 애써 가꾼 농사짓는 땅을 포기하고 산으로 들어가 굴을 파고 살아야 했습니다. 이렇게 정치적 핍박을 피하거나 외부 침략자 때문에 산에 가서 굴 파고 살았던 유적이 터키 갑바도기아에 남아 있고, 조지아 지방에도 남아 있습니다. 산에서 굴 파고 사는 생활은 고달픕니다. 물이 부족하고 식량이 부족합니다. 아침 저녁으로 기온차가 크며 노인과 부녀자들 아이들의 기본적 이동이 힘듭니다. 적이 두려워 집으로 가지 못하고 농사지을 땅에 가지 못하며 산에 숨어 있는 생활은 비참합니다.
6절을 보십시오. 이스라엘은 궁핍함이 심한 생활이 이어지자 7년 만에야 여호와께 부르짖었습니다. 생활의 어려움이나 무슨 일이 생겼을 때, 하나님의 징계가 아닌가? 두려움이 생긴다면 그것은 영적으로 아직 살아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정말 문제가 큰 사람은 징계가 임하여도 이건 내가 잘하고 못하고와 상관없는 사건이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의 징계가 주어져 회개할 기회가 왔는데도 회개하지 않고 징계가 더 커지거나 지속되게 합니다. 하지만 더 심각한 사람이 있습니다. 왜 나에게 이런 징계가 왔는가? 오히려 반문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나에게 왜 힘든 일이 일어나는가?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없다고 여기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모독하고 있다는 것이 다른 사람에게는 보이는데 자기는 그것을 모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식재료 정도나 생각하고 가볍게 여기며 자기 욕망을 이루기 위한 도구로 여기면서 자기는 말씀을 사랑한다고 확신합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의 징계가 임하여도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없다고 호소합니다. 다른 사람의 가족이 아픈 사람이 생기면 죄 때문이라고 쉽게 정죄합니다. 자신과 가족이 아픈 것은 왜 이런 일이 생기는지 모르겠다고 말합니다. 이런 사람은 지금도 회개하지 않지만 앞으로도 회개할 가능성이 굉장히 낮습니다. 우리는 도덕적인 죄를 경계하여야 합니다. 우리는 사회적 범죄를 저지르지 말아야 합니다. 더 큰 죄는 영적인 죄입니다. 도덕적 죄는 양심이 죄를 깨닫게 합니다. 사회적 범죄는 형법과 민법, 상법이 죄를 깨닫게 하고 정죄합니다. 영적인 죄는 영적 감각이 둔해지면 죄를 깨닫지 못합니다. 지적하여도 소용없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하나님의 이름보다 자기 이름을 사랑하는 죄, 하나님의 말씀을 보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이용하는 죄, 하나님께 헌신하지만, 사람에게 돋보이려 하고 사람 앞에서 헌신을 자랑하는 죄, 예배드리지만 같이 예배드리는 사람을 가르치고 뜯어 고치고 지적하는 것이 즐겁고 신나는 것이 영적인 죄입니다. 이런 죄는 회개하기가 매우 어렵기 때문에 심각합니다.
7~10절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이번에는 이스라엘의 부르짖음에 대하여 구원자를 바로 보내지 않으셨습니다. 한 선지자를 먼저 보내셨습니다. “너희가 내 목소리를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은혜, 애굽에서 해방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상기시켰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가나안 땅을 주시며 주신 명령, 너희가 거주하는 사람의 땅의 신들을 두려워 하지 말라 하신 것을 듣지 않았음을 지적하셨습니다. 징계는 은혜입니다. 징계를 통하여 우리는 우리를 파멸하게 하는 죄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징계가 우리에게 유익이 되려면 왜 징계가 임한 것인지 인지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징계는 우리에게 유익합니다. 하지만, 이 징계가 진정 유익이 되기 위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진실하게 받아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보내시는 사람을 통하여 주시는 지적을 겸손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럴 때 징계가 유익이 됩니다. 올바로 징계 받은 사람에게는 복이 있습니다. 죄에서 벗어나 그 영혼이 살아납니다. 죄에서 벗어난 그 영혼, 인생에게 하나님께서 마음껏 복 주실 수 있습니다. 우리 학생들 중에 잠깐 말씀을 보고 별 유익이 없다고 판단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말씀을 깊이 보고 말씀의 종들이 주는 교훈과 지적을 깊이 생각하며 받아들이기를 기도합니다.
11절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선지자를 보내어 죄를 지적하셨고 한편으로는 하나님께서 택하신 구원자를 준비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사자를 아비에셀 사람 요아스에게 속한 오브라에 이르러 푸르른 상수리나무 아래로 보내셨습니다. 요아스의 아들 기드온이 밀 타작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농부였습니다. 그는 소심한 농부였습니다. 밀타작을 하려면 넓은 마당에서 도리깨질 하여야 합니다. 그는 바위를 파서 만든 좁다란 포도주 틀에 대고 밀타작을 조심조심 몰래몰래 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미디안 사람에게 들킬까봐 이렇게 하고 있습니다. 그는 겁내고 근심하고 염려하는 소심한 농부였습니다.
12절을 보십시오. '큰 용사여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 ‘큰 용사여!’ 새번역 성경에는 ‘힘센 장사야’라고 기록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사자는 기드온을 향하여 ‘큰 용사’ ‘힘 센 장사’라고 불렀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성경에서 자주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식 하나 없는 아브람에게 ‘아브라함!’ 열국의 아비라고 부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불안정하고 허물을 자주 노출하는 시몬(모래)을 베드로! 반석이라 부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아브라함이라 부르셨을 때, 아브람은 실제로 아브라함, 열국의 아비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모래알 같은 시몬을 베드로라 부르셨을 때, 그는 교회의 반석이 실제로 되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존재를 어떻게 인식합니까? 우리는 눈에 보이는 어려운 환경 속에 있는 자신을 인식합니다. 나약하고 부족합니다. 우리는 자신의 경험과 이성을 근거로 자신을 인식합니다. 때로 오만방자하기도 하고 때로 두려움과 열등감으로 다운되기도 합니다. 오늘 말씀에 나오는 기드온도 그러하였습니다.
13절을 보십시오. 기드온은 자신이 처한 환경을 거론하며 불평을 쏟아놓았습니다. 그는 어려운 이스라엘의 형편이 먼저 떠올랐습니다. 기드온에게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인식하는 것보다 눈에 보이는 현실, 힘든 상황이 더 커보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자각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언제든 어디에서든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 앞에서의 자신을 깨달아야 합니다.
14절을 보십시오. '너는 이 네 힘을 의지하고 가서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라 내가 너를 보낸 것이 아니냐' 하나님께서는 기드온에게 놀라운 사명을 주십니다.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라’ 하십니다. 기드온은 겉으로 볼 때 소심한 농부입니다. 기드온은 영적으로 볼 때도 하나님의 큰 뜻을 알지 못하고 상황과 형편을 보며 부정적 생각을 하는 중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소심한 농부인 그를 큰 용사여! 부르시고 주변 환경을 보며 불평하는 그에게 이스라엘을 구원하라 위대한 사명을 맡겨 주십니다. 이 때 ‘네 힘으로 하라’ 하십니다. 기드온은 자신을 과소평가하지 말아야 합니다. 기드온은 눈을 떠야 합니다. 기드온은 용기를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큰 용사라 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라 사명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큰 용사라 칭하기만 하지 않으십니다. 그와 함께 해주시겠다 약속도 함께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큰 과업만 주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 보내는 것이다! 하나님의 권위도 함께 주십니다.
15절을 보십시오. 큰 용사여 부르심을 받은 기드온이 처음에 환경과 조건을 바라보았다면 이제는 자신을 바라봅니다. 므낫세 지파는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의 땅을 제대로 차지 하지 못한 지파의 대표입니다. 그런 므낫세 지파 중에서 그의 집안은 미약합니다. 그의 집안에서도 기드온은 가장 미약한 사람입니다. 숨어서 타작하는 모습을 보니 그 말은 맞습니다. 사람을 보고 자기를 보면 누구도 만족할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 아산센터는 특히, 환경을 보지 말고 하나님을 보아야 합니다. 사람을 보지 말고 하나님을 보아야 합니다. 자기를 보지 말고 하나님을 보아야 합니다. 도움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16절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기드온의 자기 불의와 절망과 그의 주장을 오래 참아 주셨습니다.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하리니 네가 미디안 사람 치기를 한 사람을 치듯 하리라” 하나님께서는 기드온에게 ‘반드시 함께 하리라’ 말씀해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부르실 때, 참으로 오래 참으시고 감당해주십니다. 오늘 오래 참으시고 감당해주시는 하나님을 보니 저의 어릴 적 기억이 떠오릅니다. 저는 마루에 엎드려서 숙제하다가 ‘아부지 배가 차가워요’ 했습니다. ‘상펴고 해라’ 저는 상펴고 숙제를 하였습니다. ‘아부지 양반다리 하니 다리가 저려요’ 했습니다. ‘삼촌 책상에 가서 공부해라’ 하였습니다. 책상에서 숙제하던 저는 ‘아부지 삼촌 책상이 높아요’ 했습니다. 그러자 ‘공부 때려치워!’ 소리 지르셨습니다. 하하! 저의 아버지는 하나 뿐인 아들의 끊임없는 불평에 끝내 소리 지르셨는데, 오늘 말씀에 기록된 하나님은 어떠하십니까? 하나님께서는 기드온을 오래 참으시며 감당해 주십니다.
17절을 보십시오. '내가 주의 은혜를 입었사오면 나와 말씀하신 이가 주 되시는 표징을 내게 보이소서' 기드온은 하나님께 표징을 구하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능력에 대해서 확신을 얻고 싶었습니다. 18~21절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그의 요구를 들어주셨습니다. 그가 염소 새끼를 잡아 고기를 준비하고 국을 끓여 가져 오기까지 기다려주셨습니다. 국을 부어 젖은 바위에서 불이 나와 고기와 국을 사르게 하셨습니다.
22절을 보십시오. 기드온은 그제서야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사자를 보내셨음과 자신이 깊은 불신속에 있었음을 알았습니다.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내가 여호와의 사자를 대면하여 보았나이다.' 기드온은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능력을 체험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알았을 때 그의 내면에는 자신의 영적 무지와 고집으로 인하여 두려움이 생겼습니다. 시몬 베드로가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은 후, 자신이 죄인이라 고백한 것과 같습니다.
23절을 보십시오.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너는 안심하라, 두려워말라, 죽지 아니하리라” 하나님께서는 기드온의 모든 죄를 사하여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한 번 부르신 자의 모든 허물과 실수와 약점을 감당해 주시고 그의 죄를 모두 사하셨습니다.
25,26 절을 보십시오. 그날 밤 하나님께서 기드온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아비의 수소 곧 칠년된 둘째 수소를 취하고 네 아비에게 있는 바알의 단을 헐며 단 곁의 아세라 상을 찍고 또 이 견고한 성 위에 네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규례대로 한 단을 쌓고 그 둘째 수소를 취하여 네가 찍은 아세라 나무로 번제를 드릴지니라' 기드온의 집에 동네 우상의 제단이 있었습니다. 우상은 종 열명을 데리고 부수어야할 정도로 큰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것을 찍어버리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나라를 구하기 전에 먼저 자기 집의 문제에 도전하게 하셨습니다. 미디안을 무찌르기 전에 먼저 기드온이 사람의 정과 내면의 두려움을 무찌르게 하셨습니다.
27절을 보십시오. 기드온은 연약했습니다. 그는 성읍 사람들이 두려워 차마 낮에 행하지 못하였습니다. 성경은 기드온에 대하여 있는 그대로 기록하였습니다. 그는 하루 아침에 영웅으로 탈바꿈하지 못하였습니다. 다만, 연약한 가운데에서 믿음으로 용기를 내기 시작했습니다. 밤에 종 열 사람을 데리고 가 바알 제단을 파괴하고 아세라 상을 찍어 넘어뜨렸습니다. 기드온은 하나님께 순종하여 아버지의 둘째 수소를 잡아 번제로 드렸습니다. 이 제사에 땔감으로 바알과 아세라 목상과 제단을 부순 것을 사용하였습니다.
28절을 보십시오. 성읍 사람들은 아침에 바알의 단이 훼파되고 곁의 아세라가 찍혔으며 새로 쌓아 올린 단 위에 번제로 수소가 드려진 것을 보았습니다. 사람들은 기드온이 이렇게 한 것을 알아내고 요아스에게 기드온을 끌어내 죽이기를 요구하였습니다. 요아스는 바알이 과연 살아 있는 신이면 단을 훼파한 자기 아들을 죽일 것이니 사람인 너희들은 가만 있으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버지를 통하여 기드온을 보호해주셨습니다. 이 사건을 통하여 성읍 사람들은 바알과 아세라가 나무토막인 것을 알았습니다. 사람들은 담대하게 바알을 찍어버린 기드온을 ‘여룹바알’이라고 불렀습니다. 바알과 싸웠다는 뜻 입니다. 사람들은 기드온의 과감한 용기를 인정하였습니다. 이 사건을 통하여 기드온은 힘을 얻었습니다. 혹시 죽거나 배척 당하여 쫓겨 날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았습니다.
소심한 농부 기드온은 하루아침에 큰 용사가 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셨을 때, 옵티머스 프라임이나 범블비처럼 즉시 트랜스폼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부르시면 평범한 사람이라도 위대한 용사가 된다는 것을 오늘 말씀을 통하여 보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소심한 농부를 큰 용사로 부르신 은혜를 말씀을 통하여 배우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드온을 부르신 후, 점진적으로 변화시키시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인격적으로 도우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점진적으로 강하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요셉에게 꿈을 주시고 그 꿈을 이루기까지 충분한 시간을 사용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이 골리앗을 쓰러뜨리고 일약 스타가 되었지만, 이스라엘의 왕이 되기까지 오랜 시간을 쓰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시고 점진적으로 강하게 하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시고 변화시키실 때, 어느 날 우연한 사건으로 뜻밖의 초능력을 갑자기 보유하는 슈퍼 히어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점진적으로 강하게 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무엇을 하여야 합니까? 하나님께서 때되면 강하게 하시겠지 하고 가만히 있어야 합니까? 오늘 기드온은 하나님께 표징을 구하였습니다. 우리는 기드온과 같이 하나님께 구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관념이 아니라 능력인 것을 체험하고자 기도하여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마음의 위안만 주는 차원이 아니라 살아 역사하는 능력임을 체험하고자 기도하여야 합니다. 저는 예전에 분명한 기도제목을 받았습니다. ‘목원대에 올라가서 복음의 능력을 체험하라’ ‘복음의 능력을 체험하는 것’이야말로 20대였던 저에게 분명하고 중요한 기도제목이었습니다. 이 기도제목대로 복음의 능력을 체험하고자 하였을 때, 하나님 앞에서 인내와 용서와 기다림과 낮아짐을 하나하나 배울 수 있었습니다. 그곳에 있었던 5년 시간동안 복음의 능력이 어떻게 역사하는가? 복음의 능력을 덧입기 위해서 무엇을 준비하여야 하는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능력은 어떻게 어디에서 언제 나타나는가? 배울 수 있었습니다. 복음의 능력을 체험하고자 기도를 배우고, 동역을 배우고, 낮아짐을 배우고, 믿음의 성실과 믿음의 도전을 차근차근 배워 나갈 수 있었습니다.
오늘 기드온을 ‘큰 용사여!’ 부르신 하나님은 놀랍고 은혜롭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태어날 때부터 용감하고 근육으로 뭉쳐진 장사를 부르지 않으셨습니다. 농부를 부르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천성적으로 담대한 사람을 부르지 않으셨습니다. 숨어서 밀 타작하고 있는 소심한 기드온을 부르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빨리 자라나 즉시 큰 용사가 되는 사람을 부르지 않으셨습니다. 자신의 연약함을 알고 하나님께 표징을 구하는 솔직한 기드온을 부르셨습니다.
오늘 ‘큰 용사여!’ 부르심을 받은 기드온은 우리에게 아주 친밀하게 느껴집니다. 그의 소심한 모습과 두려워하는 모습은 우리로 하여금 그의 심정을 공감하게 합니다. 기드온의 훌륭한 점은 ‘큰 용사여’ 부르시고 ‘이스라엘을 구원하리라’ 하셨을 때, 큰 과제 앞에서 뒤로 물러나지 않은 것입니다. 그는 비록 소심하고 연약하였지만, 자신의 연약함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하나님께 표징을 구하였습니다. 자신의 죄를 깨달았을 때에는 솔직하게 죄를 고백하고 하나님 앞에 엎드렸습니다. 우리는 뒤로 물러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자신이 비록 연약할지라도 앞으로 나가야 합니다. 하나님 앞으로 나가야 합니다.
기드온을 향하여 큰 용사여! 부르신 하나님을 바라볼 때 우리의 가슴에 소망이 넘칩니다. 우리가 비록 소심하지만 하나님의 안에서 용사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비록 스펙이 빈약하지만 하나님의 부르심을 영접하기만 하면 큰 용사로 쓰임 받을 수 있습니다. 위대한 용사가 되는 것은 근육량과 비례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말씀을 영접하는 것과 비례합니다. 위대한 큰 용사가 되는 것은 스펙과 비례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함께 하시는 은혜와 비례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환경을 보며 자신을 폄하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사람을 보고 자기를 보며 소심해지는 길을 가지 않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뒤로 물러나지 않기를 바랍니다. 큰 용사여!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부르심대로 큰 용사가 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 안에 거하시기 바랍니다. 목자님들은 보내주신 학생들이 ‘큰 용사’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학생들은 하나님께서 곧 나를 ‘큰 용사’로 세우실 것을 확신하기를 바랍니다.
결론적으로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를 ‘큰 용사여!’ 부르십니다. 비범하지 않은 우리를 큰 용사로 부르시고 큰 용사가 되게 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바라봅시다. 소심한 기드온을 큰 용사가 되게 하신 하나님께서 오늘날 우리에게도 동일한 은혜를 주실 것을 믿습니다. 오늘날 우리도 복음의 능력을 확신하고자 구하고 기도하여야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의 능력을 분명하게 알도록 도우실 것입니다. 기도 하고 마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