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승불교가 등장하였다고 해서 기존의 부파불교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동시대에 대승불교와 부파불교는 각각 가르침을 펼치면서 함께 존재하였다. 또한 대승불교의 태동과 더불어 여러 대승경전이 등장하였다. 대승경전은 <반야경>, <법화경>, <화엄경> 등으로서 부파불교에서 전승되던 경전이 아니었다. 아니 인정하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아예 무시한 듯하다. 부파불교의 논서 등에서는 대승경전에 대한 언급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대승불교는 기존 전승되던 경전뿐만 아니라 대승경전의 가르침에 의거하여 교리체계를 세우고 부파불교의 견해를 비판하며 불교사의 전면에 나섰다.
이렇게 인도 땅에서 불교사의 전면에 나선 대승불교사상의 대표적인 양대 산맥은 중관사상과 유식사상이다. 앞서 대승불교의 태동에서 언급한 불탑신앙 등의내용을 통해 부파불교와 대승불교의 차이점을 잠시 짐작할 수 있었다. 단지 그런 점에서만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니다. 무엇보다 교리에서 뚜렷한 차이가 있다. 대승불교에서는 모든 법이 인연화합에 의해 마음으로 드러난 것이며 마음을 떠나서 별도로 있지 않다고 본다. 그런데 대승불교에서 불 때, 부파불교에서는 나름대로 연기법을 설명한다고 하지만, 연기하여 법을 이루게 되는 각각의 조건(인과 연)을 그릇되게 집착할 뿐만 아니라, 각각의 조건과 드러난 법 등을 마음 밖에 있다고 본다. 오늘날 간혹 부파불교, 특히 설일체유부를 ‘유(有)의 철학’이라고 한다. ‘유’라고 한 이유를 이런 측면에서 이해해도 무방하지 않을까 한다.
이러한 부파불교의 가르침 등에 대해 포문을 연 분이 바로 용수 보살이다. 용수 보살이 활동한 시기는 대략 2~3세기 무렵으로 추정한다. 중관사상은 용수 보살로부터 시작되었다. 용수 보살의 대표 저작인 <중론> 또는 <중송>에서는 부파불교뿐만 아니라 인도 철학 전반에 대해 비판하였다. 모든 것은 연기(緣起), 무자성(無自性), 공(空)이다. 연기하는 것은 자성이 없는 것이며, 자성이 없이 연기된 것은 곧 공이다. 이러한 내용은 <중론> 제24품에 잘 나타나 있다.
여러 인과 연으로 생긴 법,
이것을 나는 공이라고 설하고,
또한 이것을 가명이라고 하네.
또 이것은 중도의 내용이네.
衆因緣生法
我說卽是空
亦爲是假名
亦是中道義
우리 앞에 있는 모든 법은 인과 연으로 생긴 것이니, 그것이라고 할 자성이 없다. 그렇지만 이름을 통해 우리에게 드러난다. 있다고 하자니 인연화합으로 생긴 것이므로 그것이라고 할 자성이 없고[非有] 없다고 하자니 이름을 통해서 우리에게 드러난다[非無], 따라서 비유비무(非有非無)로서 중도의 뜻이 함께 한다. 이때 이름은 마음의 분별작용에 의해 붙여진다. 여기서 용수 보살이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의 게송이 담긴 <화엄경> 등에 대한 주석서를 남겼다는 점에서, 용수 보살의 기본 사상에도 ‘모든 법은 마음으로 이루어졌다’는 점이 전제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따라서 게송의 내용은, ‘모든 법은 인과 연이 화합하여 마음을 통해 드러나므로 실로 마음 밖에 그것이라고 할 자성이 없지만, 그렇다고 전혀 없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분별을 통해 우리 앞에 이름을 빌려서 드러난다. 그러므로 중도의 뜻이 드러난다’라고 이해할 수 있다.
물론 용수 보살의 <중론> 등에서는 뚜렷하게 마음 등을 드러내놓고 논리를 전개하지는 않는다. 단지 상대방의 논리적 모순을 밝혀 그릇된 견해를 논파한다. 연기, 무자성, 공의 입장에서 모든 집착을 논파한다. 이렇게 논파함으로 자연스럽게 바른 도리를 드러낸다고 본다. 이를 파사현정(破邪顯正)이라고 한다. <중론>이라고 이름 짓는 중(中)은 유무에 걸리지 않는 공관(空罐)의 중도이며, 이것이 불교의 근본 입장에 직결된다. 흔히 용수 보살의 가르침을 공사상, 중관사상이라고 한다. 이때 공이란 전적으로 없다는 뜻이 아님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후 용수 보살의 가르침이 이어지면서 공을 전적으로 없다는 입장으로 이해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4~5세기 무렵 모든 법은 전적으로 없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의해 펼쳐졌다는 주장이 부각되었다. 마음을 중심으로 살펴보는, 모든 것은 마음이 만들고[일체유심조] 오직 식뿐[만법유식]이라는 유식사상이 등장하였다. 마음에 의해 펼쳐진 이 세상은 인연화합에 의해 드러난 것인데, 중생들은 보는 나와 보이는 세상이 마음 밖에 실로 있다고 집착한다. 이렇게 집착된 세상을 결코 있지 않다. 그러나 인연화합에 의해 마음으로부터 언제나 펼쳐진다. 이 주장은 앞에서 본 <중론>의 가르침과 다르지 않다. 즉 유식사상은 이 세상이 공인 이유를, 연기의 가르침을, 마음 중심으로 설명한다. 이 세상이 단지 우리 마음의 현현일 뿐 결코 우리가 본 대로 있지 않음을 밝혀낸다. 이처럼 마음을 중심으로 논리를 전개하다 보니 마음을 세밀하게 분석한다. 이러한 분석을 위해 아비달마불교의 용어를 대부분 가져와 새로운 뜻으로 풀이한다. 이에 유식사상을 대승아비달마라고 부르기도 한다. 가령 유식 논서 가운데 <대승아비달마잡집론> 등이 있다.
이때쯤 인도 땅에서는 다양한 논쟁이 일어났다. 대승불교와 부파불교의 논쟁뿐만 아니라 대승불교 내에서도 중관학파와 유가행파(유식사상)의 논쟁 그리고 각 사상 내부의 논쟁 등 치열한 논쟁이 진행되었다. 치열한 논쟁 속에 서로 영향을 주고 받았다. 그리고 여래장사상, 밀교 등 여러 대승경전에 근거한 교리가 등장하였다. 그런데 여래장사상, 밀교 등도 역시 그 바탕에는 중관사상과 유식사상이 깔려 잇다. 불교 교리를 알고자 한다면 중관사상과 유식사상이라는 커다란 산맥을 넘어야 하는 이유 하나가 여기서 드러난다. 특히 대승아비달마라고 불리는 유식사상은 전반적인 불교 용어를 아우르고 있기 때문에 불교 용어를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살펴보아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불교는 마음을 다스리는 공부라는 점에서, 마음을 중심으로 부처님 가르침을 펼치는 유식사상이야말로 반드시 넘어야 하는 중요한 산맥이다. 높은 산 위에서 더 넓은 세상이 보이듯이, 대승불교의 거대한 산 위에서는 초기경전이라고 일컬어지는 <아함경>등도 더 넓게 보인다. 
첫댓글 여기 아주 중요한 말이 나옵니다.
[이 세상이 단지 우리 마음의 현현일 뿐 결코 우리가 본 대로 있지 않음을 밝혀낸다. 이처럼 마음을 중심으로 논리를 전개하다 보니 마음을 세밀하게 분석한다. 이러한 분석을 위해 아비달마불교의 용어를 대부분 가져와 새로운 뜻으로 풀이한다. 이에 유식사상을 대승아비달마라고 부르기도 한다. 가령 유식 논서 가운데 <대승아비달마잡집론> 등이 있다]
[특히 대승아비달마라고 불리는 유식사상은 전반적인 불교 용어를 아우르고 있기 때문에 불교 용어를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살펴보아야 한다]
- 유식은 아비달마 구사론을 쓴 세친이 집대성을 했습니다.
아비달마 영향을 않받을수 없겠지요.
유식을 대승아비달마 라고 설명한 부분
심히 공감합니다
대승아비달마잡집론 한글대장경에서 검색하니 (안혜 저) 나오네요.
대승아비달마집론 (무착 저) 도 나오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