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의 원한, 언제나 풀리려나 납북언론인 생사확인운동에 기대하며 李 台 永 (본회회원, 납북언론인 가족) 어느 시대이건 전쟁이란 공포, 그 자체이다. 살육과 파괴, 그 뒤에 남는 것은 절망과 폐허. 어디 땅위의 모습뿐이랴. 인간성의 파멸과 민족의 원한이 더 무섭다. 6.25전쟁은 우리에게 그렇게 큰 상처를 남겼다. 반세기가 지난 오늘 이 시간에도 그 악몽 같은 기억이 우리를 괴롭히고 있지 않은가. 붉은 깃발만 보아도 떨리던 가슴은 지난 번 월드컵축구열풍 속 '붉은 악마'와 '붉은 해일'을 보며 위안을 찾은 듯 다소 누그러진 상태다. 아무튼 6.25는 회상하고 싶지 않은 한(恨)의 숫자로 남아 있다. 나는 당시 세상 눈을 뜨지 못한 10살 소년이었다. 전쟁이 터진지 사흘째 되던 날. 지금도 어렴풋이 기억하거니와 평화롭기만 하던 서울 성북동 골짜기에 포탄이 날아들고 집안마당으로 '붉은 무리'들이 난데없이 닥쳐 들었다. 인민군이라는 이들은 불문곡직 아무 설명도 없이 아버지를 연행해갔다. 중학 5학년에 다니던 큰형은 학보를 만들던 우익선봉이었다는 이유로 좌익친구들에 끌려가 린치를 당하고 풀려났다. 그 후유증으로 오랜 세월 정신적 고통을 겪을 정도의 모진 고문이었다. 애국부인회 지역회장이었던 어머니는 역시 '반동'으로 분류되어 정치보위부에서 사흘 동안 취조를 받다가 구사일생 빠져 나왔다. 이러한 상처는 씻을 수 없는 증오심으로 가슴에 맺혀있다. 나의 아버지 이길용(李吉用) 기자는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우승자 손기정(孫基禎)선수 일장기말소사건(東亞日報)의 주역으로 항일운동에 앞장섰던 애국지사(훗날 건국훈장 애국장)의 한 사람이다. 이 사건으로 신문사에서 해직 당했다가 광복이후 현역에 복귀했지만 이미 기자직을 떠나 한국체육사를 집필하는 한편으로 한국 민주당 조직부 차장으로 정계투신을 준비하고 있을 때였다. 바로 이러한 정치, 사회활동이 요시찰인물의 요인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아버지는 1주일동안 고초를 겪은 다음 초췌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 때의 말씀 "일본압제에 맞서 싸우고 나라를 사랑한 나에게 무슨 죄가 있겠느냐"고 했다. 한 마을의 절친한 동지(고 李寬求씨, 훗날 경향신문 주필 역임)로부터 "피신하는 것이 좋겠다"는 권고를 받았지만 "당당하게 살겠다"며 거절하셨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러나 바로 눈앞에 함정이 있을 줄이야. 계속 감시를 받아온 아버지는 결국 7월 10일 북측 내무서원에 의해 북으로 끌려가 끝내 불귀의 객이 되고 만 것이다. 민족주의자로 항일투쟁에 앞장섰던 분. 그러나 좌우익 사상충돌이라는 비극의 희생자가 되리라고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다. 대다수의 납북인사가 그렇듯 그 이후의 소식은 전혀 알 길이 없다. 다만 한 분(黃信德 중앙여고 추계학원설립자)의 증언이 있었을 뿐이다. 광복이전 동아일보(여성동아) 기자였던 그는 다른 납북언론인들과 함께 서울을 떠나 평양으로 이송되었다가 공습경보를 틈타 도주, 고향 땅 평양주변에서 잠행 끝에 서울로 돌아왔는데 이미 평양에 도착했을 때 아버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니까 납북과정에서 무슨 사고가 있었을 것이라고 추측할 뿐이다. 그로부터 40여 년이 지난 1990년 한국의 각료로서 처음 평양을 방문한 체육청소년부 장관(鄭東星)을 통해 생사확인을 공식 요청했으나 한 달 뒤 서울에 온 북한취재기자단 대표의 답변은 "납북이란 있을 수 없는 일이며 그런 인물은 확인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세계체육기자연맹을 통한 호소와 확인 노력도 허사였다. 결국 어느 한 사람의 유명(幽冥)으로 끝나지 않는 그 많은 언론인의 고귀한 생명이 모두 역사의 비극 속에 묻혀 버리고 말았으니 이야말로 비극의 역사 속, 언론인의 불행을 비쳐주는 것이기도 하다. 훗날 역사가는 이를 어떻게 기술할까. 지난 날 2차 세계대전의 포화 속에 베를린에서, 바르샤바에서, 그리고 베트남전선에서 숨진 언론인들이 얼마이며 오늘 날 보스니아내전의 아비규환 속에, 그리고 아프간전쟁의 참화 속에 또 얼마나 많은 기자들이 희생되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한국전쟁처럼 당시 지식층을 대표하여 그 많은 신문사 발행인과 주필 등 편집간부, 그리고 문인, 사학자, 독립투사이기도 한 언론 저명인사들이 집단으로 납치되거나 피살된 또 다른 예가 있을까. 이제 반세기 이상의 긴 세월이 흘렀으니 생존의 기대는 접는 것이 옳을 듯 싶다. 다만 이제라도 인도적인 양심과 한 핏줄의 정으로 유해를 가족의 품으로 돌려보내는데 성의를 보여주었으면 하는 소망을 담아 북쪽의 그 사람들에게 다시 한번 탄원하고 싶다. "가슴 아픈 가족의 애달픈 사연, 이 한(恨)을 풀어주시오. 이제 무엇을 더 증오하리. 우리 슬픈 과거는 묻고 민족의 원혼( 魂)을 풀어 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