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득관조(得貫祖)와 고려(高麗)
역경을 딛고 일가를 일으키신 시조(始祖) 이종금(李宗金)의 충절하고 용기있는 삶과 다난하였던 시대적 배경을 살펴보자.
고려(高麗)가 통일을 완성한 힘은 토호(土豪)의 이익을 최대로 보장한 왕건(王建)의 결연정책(結緣政策)에 있었음으로 고려(高麗)초기의 중앙정부는 지방토호(地方土豪)를 효과적으로 통치할 수 없었다. 태조(太祖)로 부터 국기(國基)를 튼튼히 하기 위하여 한반도 중남부의 호족세력(豪族勢力)을 평정해 가며 집안의 수많은 이복남매(異腹男妹)를 결혼케 하여 외척수(外戚數)를 줄이는 노력과 광종(光宗) 7년(956) 노비안검법(奴婢按檢法)을 시행하여 전쟁중 양민의 노비화를 환원복권(還元復權)케 하여 호족세력(豪族勢力)의 기반을 축소약화(縮少弱化)시키고 또한 광종(光宗) 9년(958)에 중국에 과거제도를 도입하여 유교(儒敎)의 학문성적(學問成績)으로 인재를 등용케 하여 벌족(閥族) 골품제약(骨品制約)의 유폐(遺廢)를 일신(一新)하고 신진세력을 확충(擴充), 무신(武臣)들을 점진적(漸進的)으로 교체케 하는 등 힘겨운 노력을 거쳐 국경을 청천강(淸川江) 이북으로 북진(北進)시키는데 6대 성종(成宗)까지 80년이란 세월이 걸려 겨우 성과를 거둘수 있게 되었다.
그 당시 중국과 만주지방의 정세는 서기 907년 당(唐)이 쇠망(衰亡)한 후 50년 동안 5,60국의 전란기를 거쳐 새로운 통일재국인 송(宋)이 세워졌다.
그러나 송(宋)이 북방에는 중국의 전란기를 틈타 부족을 통합한 거란족(契丹族)이 요(遼)나라를 건국하여 천진(天津)이북과 몽고지방, 만주일대를 석권하고 대륙의 송(宋)과 겨루는 강대한 세력으로 커졌다. 거란(契丹)이 송(宋)과 대결함에 있어서 고려(高麗)의 북진정책을 견제하고 불안한 후방의 적대세력을 말살하려는 것은 정해진 순서라 할 것이다.
성종(成宗) 12년(993년) 10월 거란(契丹)의 부마(駙馬) 소항덕(蕭恒德)이 대군을 거느리고 봉산군(蓬山郡: )을 공격하며 항복 할 것을 요구하여 왔다.
고려조정은 내사시랑중군사(內史侍郞中軍使) 서희(徐熙)를 화통사(和通使)로 하여 양국의 수호가 원만치 못한것은 중간에 여진족(女眞族)의 방해가 원인 임을 주장, 여진족을 몰아내고 국경인 압록강(鴨綠江) 근처에 성루(城樓)를 싸서 통호(通好)하기로 합의하여 싸우지않고 강화(講和)에 성공하고, 성종(成宗)13년 서희(徐熙)에게 명하여 압록강 이남지역에 장흥진(長興鎭: )․귀화진(歸化鎭)등 2개의 진(鎭)과 곽주(郭州: )․구주(龜洲: )에 성을 쌓게 하고 처음으로 압록강도구당(鴨綠江渡勾當: )을 건설하였다.
그간 요(遼)는 중원의 송(宋)과 10년에 걸쳐 일진일퇴(一進一退)를 거듭하다가 1003년 12월 강화를 하고 휴전기에 들어갔다. 요성종(遼聖宗)은 송(宋)과 교전할 때 고려(高麗)가 송나라와 우호(友好)를 청산하지 않음을 마음속으로 불만이 여기다가, 마침 고려(高麗) 목종(穆宗)12년(1009)에 목종(穆宗) 모후천추태후(母后天秋太后)가 외척(外戚)인 김치양(金致陽)과 정을 통하여 낳은 아들을 후계자로 삼으려 하자 목종(穆宗)이 서북면도순검사(西北面道巡檢使) 강조(康兆)에게 급사(急使)를 보내 군사 오천을 이끌고 와서 반역행위를 진압 하라고 하였다.
그러나 강조(康兆)는 개경(開京)으로 오던 중 변심하여 목종(穆宗)을 위시, 김치양(金致陽) 천추태후(天秋太后) 모두를 재거하고 18세의 현종(顯宗)을 추대하는 정변을 일으켰다.
거란(契丹)의 성종(聖宗)은 이 소식을 전해 듣고서 이를 구실로 제2차 고려침공(高麗侵攻)을 결행하였다.
현종(顯宗) 원년(元年:1010) 11월 1일 성종(聖宗)은 40만대군을 거느리고 친히 흥화진(興和鎭)을 포위하니 바야흐로 전단(戰端)의 막이 올랐다.
행영도통사(行營都統使) 강조(康兆)는 부통사(副統使) 이현운(李鉉雲)․장연우(張延祐)등 30만명의 장병을 거느리고 통천(通州: )에 방어선을 구축하였다. 성종(聖宗)은 흥화진(興和鎭)을 포위하고 순검사(巡檢使) 양규(楊規)에게 투항하도록 갖은 선무공작(宣撫工作)을 폈으나 장병이 일치단결 굳게 지켜 20 여일이 지나도록 함락시키지 못하자 20만 병력을 인주(麟州: ) 남방에 무노대(無老代: )에 주둔시킨 다음 나머지 20만군사를 이끌고 통주(通州)로 진격을 개시하였다.
11월 24일 통주성(通州城) 밖 삼수채(三水砦)에 진을 친 강조(康兆)는 지리적인 우위를 이용, 적절히 방어함으로 거란군(契丹軍)의 공격을 번번히 패퇴(敗退)시켰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강조(康兆)는 적을 경시(輕視)하게 되고 결국은 그 오만(傲慢)이 패전(敗戰)을 자초, 3만명의 병력 손실과 많은 군비를 잃고 강조(康兆)는 포로의 신세가 되었다.
성종(聖宗)은 강조(康兆)의 편지를 날조하여 흥화진(興化鎭) 양규(楊規)에게 항복을 권했으나 실패하자 거란군(契丹軍) 주력(主力)은 일로(一路) 완항령(緩項嶺: )까지 진격하다가 고려좌우기군(高麗左右奇軍) 김훈(金訓)등의 기습으로 주춤하여 물러섰다.
거란군(契丹軍)은 삼수채(三水砦)에서 나포(拿捕)한 노진(盧晉)등을 통주성(通州城)에 격문(檄文)을 보내 항복을 강요하였으나 중랑장(中郞將) 최질(崔質) 등과 방어사 이원구(李元龜) 등이 성문을 굳게 지키니 12월 6일 통주성(通州城)을 지나 곽주(郭州)로 진입하였다. 곽주방어사(郭州防禦使) 조성유(趙成裕)는 달아나고 대장군 대회덕(大懷德)등 많은 장사(將士)들이 항전하다가 낙성(落城)과 함께 전사하였다.
12월 8일 거란군(契丹軍)이 청수강(淸水江; )에 도달하고 안북도호부사(安北都護府使; ) 박섬(朴暹)은 성을 버리고 달아나니 주민들도 모두 흩어졌다.
12월 10일 거란군(契丹軍)은 숙주(肅州: )를 함락시키고 서경(西京)으로 향하였다.
서경(西京)은 혼란에 빠졌으나 현종(顯宗)의 지시로 화주(和州: ) 주둔군(駐屯軍) 지채문(智蔡文)의 원군이 원군으로 이동되어와서는 항복 동조자(降伏同調者)를 제거하고 동북계도순검사(東北界都巡檢使) 탁사정(卓思政)의 합류로 방어책을 강구하게 되었다. 거란군주(契丹君主)는 총력으로 서경(西京)을 공격함에 지채문(智蔡文)은 승장(僧將) 법언(法言)과 임원역(林原驛: )에서 승리하나 다음날 12월 17일 패주하는 적을 추격하다 오히려 대패하고 말았다. 세불리(勢不利)를 직감한 탁사정(卓思政)이 출전한 대도수(大道秀)를 속이고 달아나자 대도수(大道秀)는 자기 부대를 이끌고 거란군(契丹軍)에게 항복하고 말아, 서경(西京)은 일대 혼란에 빠졌다. 애수진장(隘守鎭將) 강민첨(姜民瞻) 등이 잔병을 수습(收拾)하고 군민이 통군록사(通軍錄事) 조원(趙元)을 병마사(兵馬使)로 추대하여 성문을 닫고 굳게 지켰다. 12월 27일 패장(敗將) 지채문(智蔡文)은 개경(開京)으로 돌아와 적정을 보고하자 여러 신하들이 항복하자고 하였으나 오직 예부시랑(禮部侍郞) 강감찬(姜邯贊)만은 전단(戰端)의 원인이 강조(康兆)의 난(亂)에 있는 만큼 우선 적의 예봉(銳鋒)을 피해 놓고 강화책을 씀이 옳다고 주장하여 현종(顯宗)으로 하여금 이부시랑(吏部侍郞) 채충순(蔡忠順)에게 금군(禁軍) 50명의 호위군을 딸려 남방(南方)으로 파천(播遷)토록 결정 실행하였다.
현종(顯宗)은 전 상서좌사랑중(尙書左司郞中) 하공진(河拱辰)의 건의를 받아 화친사로 정하고 12월 28일 창화현(昌化縣; )에서 거란군(契丹軍)을 만나 화친(和親)을 거론하였으나 서기1011년 현종(顯宗) 2년 1월 1일 거란군(契丹軍)은 마침내 개경(開京)에 입성(入城)하고 태묘(太廟)와 궁궐(宮闕) 민가를 위시, 주변 주군(州郡) 중요시설을 모조리 태워 버렸다. 그러나 급한 진군으로 미함락주성(未陷落州城)의 항거로 후방의 불안을 더 이상 감당하기 어려운 거란주(契丹主)는 고려왕이 입조(入朝)한다는 조건으로 하공진(河拱辰)의 화친을 받아들여 1월 11일 철군령을 발(發)하였다.
1월 17일 구주별장(龜州別將) 김숙흥(金叔興) 등의 추격과 1월 18일 양규(楊規)는 무노대주둔적(無老代駐屯敵)을 치고 1월 19일에는 이수(梨樹; )에서 적을 맞아 석령(石嶺; )까지 몰아내고 1월 22일 여리참(餘里站; )에서 양규군(楊規軍)은 3차에 걸친 교전을 모두 승리하여 적에게 막대한 인명과 군수품의 손실과 포로로 끌려가는 3만명의 동족을 구출하는 대공을 세웠으나, 1월 28일 애전(艾田; )에서 거란군(契丹軍) 주력과 하루종일 접전, 적에게 막대한 타격을 주고, 중과부적(衆寡不敵)의 기진절시(氣盡切矢)하여 전원이 전사하였다.
거란군(契丹軍)은 철수 도중 도처에서 고려군의 공격을 받아 막대한 피해 속에 1월 29일 간신히 압록강 도강(渡江)을 하던 중 흥화진사(興化鎭使) 정성(鄭成)이 후미를 기습하여 마지막 통타(痛打)를 주었으며 점령 당한 주군(州郡)이 모두 수복하게 되고 나주(羅州)까지 파천(播遷)했던 현종(顯宗)이 개경(開京)에 돌아옴으로 약 3개월간에 걸친 거란(契丹)의 2차침공이 끝나게 되었다.
거란성종(契丹聖宗)은 철수중 고려군의 결사적 반격에 막대한 출혈을 강요당하고 간신히 귀국하였던 것이다. 고려왕이 입조(入朝)가 이행되지 않자 재출병을 준비하는 한편, 고려 북방지역에 6년간 유목민 특유의 기마전인 타초곡작전(打草穀作戰; )으로 분풀이를 하였으나 고려군은 이에 대비, 조직적인 방어에 거란군(契丹軍)은 번번히 실효를 거두지 못하였다.
현종(顯宗) 9년(1018) 12월 10일 거란주(契丹主)는 3년 동안 엄선한 정예 10만여를 도통 소배압(都統 蕭排押)에게 주어 3차침공을 단행하였다. 고려(高麗)는 상원사 강감찬(上元師 姜邯贊) 부원사 강민첨(副元師 姜民瞻)에게 20만여의 군병을 거느리고 영주(寧州)로 진출하여 지금의 삼교천(三橋川)을 막아 거란군(契丹軍) 선진(先陣)의 도착에 맞추어 터놓아 일만이천의 복병으로 수공과 함께 엄습(掩襲)하여 대패시켜 초전(初戰)을 승리로 이끌었다.
소배압(蕭排押)은 조전강공(早戰强功)으로 일로(一路) 개경(開京)을 향하여 전진하자 강민첨(姜民瞻)은 이들을 추격, 자주(慈州; ) 내구산(來口山)에 서 따라잡아 격전 끝에 승리하였고, 한편 시랑 조원(侍郞 趙元)의 부대는 마탄(馬灘; )에서 추격하여 일만여명의 거란군(契丹軍)의 손실을 입혔다.
현종(顯宗) 10년 1월 2일 강감찬(姜邯贊)은 병마판관(兵馬判官)김종현(金宗鉉)에게 일만과 동북면병마사(東北面兵馬使)에게 3300의 군사를 주어 개경(開京)의 왕궁(王宮)을 호위(扈衛)하게 하고 도성(都城)밖 백성을 성안으로 수용하여,청야작전(淸野作戰)으로 적을 대비하게 하였다.
<姜甘贊軍의 龜州城戰鬪>
이러한 철통방어(鐵通防禦)에 거란군(契丹軍)은 개경(開京) 주변을 유답(蹂踏)할 뿐 시일을 끌다가 불안한 후반의 보급부진으로 1월 23일 드디어 거란군(契丹軍)은 연주(漣州: ) 위주(渭州: )로 철수하게 되자 이를 기다려 기습하여 많은 피해를 주었고 2월 1일 거란(契丹) 주력부대가 구주성(龜州城)을 통과하게 되자 강감찬(姜邯贊)수하의 전군(全軍)은 구주성(龜州城)동쪽 벌판에서 처음으로 일대결전(一大決戰)을 벌였다.
마침 개경(開京)을 수호(守護)하던 김종현(金宗鉉)부대가 도착 가세(加勢)하니 갑자기 바람이 남에서 북으로 휘몰아치면서 깃발이 북쪽으로 세차게 펄럭이자 용기백배(勇氣百倍)한 고려군(高麗軍)이 분발 총공격을 감행하여 거란군(契丹軍)은 대패(大敗)하여 달아나게 되니 이 전투에서 거란군(契丹軍)주력 천운(天雲) 석피실(石皮室)의 2개군이 전멸 당하고 요련장상온(遙輦帳詳穩) 아과달(阿果達),객성사(客省使) 작고(酌古),발해상온고청명(渤海詳穩高淸名),천운군산온(天雲軍詳穩)․해리(海里) 등 거란(契丹) 용장(勇將)들이 전사하는 혹심(酷甚)한 참패는 거란(契丹) 건국(建國)후 처음 당하는 일이었다.
고려군(高麗軍)은 도주하는 적을 석천(石川: )을 건너 반령(盤嶺: )까지 추격하였다. 거란군(契丹軍)의 사체(死體)는 들판을 메웠고 획득한 전리품은 산을 이루었다. 겨우 생명을 부지하여 돌아간 거란군(契丹軍)은 수천명에 지나지 않았다. 이를 역사는 구주대첩(龜州大捷)이라 하며 강감찬(姜邯贊)은 실로 고구려(高句麗) 26대 영양왕(瓔陽王) 23년(612) 7월 수군(隨軍)을 청천강(淸川江)에서 격멸(擊滅)한 을지문덕(乙支文德)과 아울러 일컫는 해동(海東)의 명장(名將)이었다.
참패의 보고를 받은 거란주(契丹主)는 대노(大怒)하여 소배압(蕭排押)에게 "경적(輕敵)하다. 패전하였으니 내 기어이 네 낯가죽을 벗겨 죽이고야 말겠다" 고 분통을 터뜨렸다고 한다.
이후 거란군(契丹軍)은 두번 다시 고려국(高麗國)을 침입하지 못했다.
현종(顯宗)은 영파역(迎波驛: )까지 삼군을 영접 채붕(綵棚: )을 치고 왕은 친히 금화팔지(金花八枝)를 강감찬(姜邯贊)의 머리에 꽂아주고 잔을 들어 장병들과 큰 잔치를 베풀어 승전을 경하(慶賀)하였다.
우리의 조상(祖上) 휘(諱)종금(宗金)께서도 현종(顯宗) 원년(1010년) 거란군(契丹軍)이 침입하자 장사(壯士)로서 어찌 우국(憂國)의 충정(衷情)이 없었겠는가? 강감찬(姜邯贊)의 수하에 투신 대소전후(大小戰後)에 참전하여 허다한 공훈(功勳)을 세웠으며, 특히 거란국주 성종(契丹國主 聖宗)의 친정과 소배압(蕭排押)의 침공으로 개경(開京) 주변이 초토화(焦土化)하는 와중에 강감찬장군(姜邯贊將軍)의 휘하주군(麾下州軍)을 거느리고 강화성(江華城)을 굳게 지켜 나라의 귀중한 재화를 전화(戰禍)에서 보전하는데 크나큰 공적이 인정되어 덕종(德宗) 2년(1033)에 광산군(光山君)에 봉하여지고 이종금(李宗金)이라 사성명(賜姓名)받았다.(註5)
<江華城의 高麗宮趾>
이후 이종금(李宗金)을 후손이 광산이씨(光山李氏)의 시조(始祖)로 받들게 되었으며 광산군(光山郡)에 세거(世居)하였다.
그 상계(上系)를 도시(圖示)하면 다음과 같다.
팔전(八傳)한 290여년간( ) 직계손(直系孫)만 기록되어 전하여올 뿐 지손(支孫)들의 종지(宗支)는 알길이 없다.
다만 충렬왕(忠烈王)조(朝)에 영광김씨(靈光金氏) 장흥파시조(長興派始祖)인 김태용(金台用)의 배위(配位)가 광산이보광(光山李寶光: )의 따님임을 확인시켜 주고있다. 이를 추고(推考)하건대 충렬왕(忠烈王) 조(朝)이전 부터 분파된 광산이씨(氏山李氏)일파는 정승(政丞: )의 배열에 자리하고 있음을 알수 있겠고 그간 여러 보서(譜序)중에도 평양(平壤)․개성(開城) 등 종인(宗人)의 합보(合譜)를 거론 만하고 뜻을 이루지 못함은 상계(上系)가 일치하지 않는 종인(宗人)이 있음에 기인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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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5) 이종금(李宗金) 사성명(賜姓名), 봉군(封君)의 년도고증(年度考證)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하여 그 시대의 실상을 기술할 필요가 있을것이다.
요(遼)가 성종(成宗) 12년(993)에 1차,현종(顯宗) 원년(1010)에 2차,동 9년(1018)까지 3차에 걸친 거란(契丹)측의 일방적인 도전행위로 시작되어 비록 구주대첩(龜州大捷)으로 고려(高麗)는 당시 조야(朝野)의 인심을 통쾌(痛快)하게 하였으나 쌍방의 피해는 필설(筆說)로 다하지 못할 것이다. 요(遼) 성종(聖宗)은 무력으로 고려(高麗) 정복이 불가능 함을 깨닫고 국교의 수립과 요(遼) 년호(年號)의 사용 및 압록강(鴨綠江) 동(東) 6주중 보주(保州)․선주(宣州), 2개주의 점거(占據)를 조건으로 강화를 재시해 옴으로 고려(高麗)도 현종(顯宗) 11년(1020) 한계에 달한 현실로 동의할 수 밖에 없었다. 그후 복구에 전념하던 조정은 오랜 잰쟁후 나포(拿捕)되어간 부로송환(孚虜送還)과 강점(强占)된 2성의 철퇴문제로 고려조야(高麗朝野)의 적개심은 가시지 않았다.
현종(顯宗) 20년(1029) 9월 요(遼)의 동경(東京:요양(遼陽))사리군(舍利軍) 상온(詳穩)인 대연림(大延琳:발해인)이 반란을 일으켜 국호(國號)를 흥요(興遼)라 하고 년호(年號)를 천경(天慶)이라 하여 일시는 보주황룡부(保州黃龍府:금풍안(今豊安))의 발해인까지 호응하는 세력으로 커져 고려(高麗)에도 구원을 청하여 왔다.고려의 형부상서(刑部尙書) 곽원(郭元) 등은 이 기회에 북벌(北伐)을 감행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나 문하시중 최사위(門下侍中 崔士威)등의 신중론(愼重論)으로 응하지 않으니 곧 평정되고 말았다. 고려(高麗) 9대 덕종(德宗) 원년(1031) 10월에 류교(柳喬), 김행공(金行恭)을 요흥종(遼興宗:重熙元年)에게 보내 요(遼)가 압록강(鴨綠江)에 가설한 부교(浮橋)와 보주(保州)․선주(宣州)2성의 파괴와 부로반환(孚虜返還)의 요구가 거부되자 고려(高麗)는 단호히 국교를 단절하고 국가비상(國家非常)을 선포하여 다음 세가지 조치를 취하였다.
첫째, 유소(柳韶)에게 압록강구(鴨綠江口)에서 동으로 뻗쳐 영흥(永興)에 이르는 천리장성(千里長城)을 축조하는 공역(工役)을 명하였고,
둘째, 고려대장경(高麗大藏經-구판(舊板)) 주조를 더욱 서둘러 불심(佛心)에 의지(依持)하여 환란을 극복할 수 있다는 백성들의 믿음을 편케하고 또한 요구(遼寇) 때부터 유공(有功)하였던 조정의 중신에 대한 포상․봉군(封君:이종금 광산이씨시조(李宗金 光山李氏始祖), 이광고성이씨시조(李壙固城李氏始祖))을 시행하여 국민의 단결과 화합을 도모케하고,
셋째,태조(太祖)로부터 목종(穆宗)까지 7대에 이르는 소실된 실록을 수국사(修國史) 황량주(黃亮周)등에게 찬수(撰修)하도록 명하니 고려(高麗)는 상하가 일체되어 이 일에전념하여 점차 실효를 거두어가자 정종(靖宗)원년(1035년) 요국(遼國)의 강경한 항의가있었고 같은왕 3년 10월 요(遼) 병선(兵船)이 정주 (靜州)에 침입하였으나 곧 격퇴 되었다. 그 후 요국(遼國)은 강성 해지는 고려(高麗)를 어쩌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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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중세조(中世祖)와 고려(高麗)
우리 조상들의 영명(英明)함은 나라가 위태로울 때 신명(身命)을 바쳐 보국(報國)하였으니 중세조(中世祖)로 숭앙(崇仰)하는 이순백(李珣白)께서는 고려(高麗) 충숙왕(忠肅王)조(朝:1314~1339)에 청주장서기(靑州掌書記: )에서 기신(起身)하여 한림학사(翰林學士) 좌복사사공상서(左僕射司空尙書)에 이르기까지 남다른 충절과 인고(忍苦)로 그 당시 일신(一身)의 영달(榮達)을 위하여는 못하는 짓이 없던 암흑시대에서 참으로 우리 종문(宗門)에 등불이라하여 마땅할 것이다.
그 시대상에서 꿋꿋이 성심을 다한 이야기를 적어보자.
외구(外寇)를 물리친 고려(高麗)는 11대 문종(文宗:1048~1083) 때부터 서(西)는 송(宋)과 서북은 요(遼)와 평화책을 쓰고 일본(日本), 기타 해외원방(海外遠邦)과 통호(通好)하고 국력을 내치(內治)에 충실하니 16대 예종(睿宗)때까지 76년간 고려문화의 황금기를 구가(謳歌)하였다.
그러나 17대 인종(仁宗) 조(朝:1123)부터 외척세력(外戚勢力)의 발호(跋扈)는 귀족의 패로 시작하여 국권문란(國權紊亂)은 내란과 외구(外寇) 등이 꼬리를 물고 일어나며 19대 명종(明宗) 26년(1196) 최충헌(崔忠獻)이 외척(外戚)를 몰아내고 다음해 명종(明宗)을 패위시키고 신종(神宗)을 옹립(擁立)하니 이로부터 고종(高宗) 46년(1259)까지 60여년간의 최씨세습무단정치(崔氏世襲武斷政治)로 국권을 전단(專斷)하니 국왕은 유명무실하게 되고 문무(文武)의 분규(紛糾)와 내란은 국력을 더욱 약화시키게 되었다. 이때 몽고족(蒙古族)의 징기스칸(成吉思汗)이 송(宋)의 북부를 장악(掌握)하고 구라파까지 정복하여 원(元)나라를 세워 동쪽으로 전국을 장악하려던 중 병사하였다. 원(元)의 태종(太宗)이 고종(高宗) 17년(1230) 금국(金國)을 정복하면서 별군을 사리타이(撤禮塔)에게 주어 고려(高麗)를 침공케 하였다.
고종(高宗) 18년 8월 고려군(高麗軍)은 항전하는 한편 같은해 12월 1일 강화하였으나 이로부터 기나긴 30년 항전의 제1차 몽고(蒙古)의 침공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고종(高宗) 19년 국력의 피폐(疲弊)로 개경(開京)을 지키지 못 할 것을 우려하여 단행한 강화도(江華島)로의 천도(遷都)로 원(元)의 재침(再侵)을 불렀음으로 원장(元將) 사라타이(撤禮塔)가 처인성(處仁城: )에서 화살을 맞고 죽으니 부장(副將) 철가(鐵哥)는 군을 철수시켰다.
고종(高宗) 22년 원(元)의 3차침공은 26년 봄 고려(高麗)가 항복할 때까지 전국이 유린 당하는 참화(慘禍)를 입으면서 강도(江島)에 있는 조정은 어찌할 수 없었다. 국왕입조(國王入朝)를 왕족으로 대신케 하고 왕족의 질자(質子)와 매년 과중한 세공(歲貢)을 조건으로 군사를 거두어갔으니 이로인하여 나라는 점점 피폐하여 갔다.
고종(高宗) 38년 원(元)의 헌종(憲宗)이 즉위하고 다시 왕의 입조(入朝)와 개경환도(開京還都)를 요구하다 실현되지 아니하매 고종(高宗) 40년 4차 몽고(蒙古)의 침공을 당하였다. 충주(忠州)까지 내려간 원군(元軍)을 승장(僧將)김윤후(金允候)는 성안의 군사들과 일치단결하여 선방하니 적은 예기(銳氣)가 꺾이어 더 남하하지 못하매 조정(朝廷)은 원장(元將) 야굴(也窟)과 교섭(交涉),왕이 강도(江島) 대안(對岸)인 승천부(昇天府)에서 원장(元將)을 영견(迎見)하고 왕자 창(昌)을 원도(元都)에 보내어 항복하는 조건으로 철군케 하였다.
고종(高宗) 41년 원주(元主)는 고려왕(高麗王)의 입조(入朝)를 요구, 다시 원장(元將) 차라대(車羅大)로 5차침공을 감행한바 이 전란으로 고려(高麗)는 최대의 피화(被禍)를 당하는데 포로 남녀 206,800여명이 끌려가고 살륙 당한자 수를 헤아릴 수 없다고 고려사(高麗史)는 기록하고 있다.
고종(高宗) 42년 6월 6차침공이 있었는데 주로 호남지방을 공략하였으나 항거가 심하여 원군(元軍)도 상당한 피해를 입어 다음해(1256) 가을 퇴병(退兵)하였다.
고종(高宗) 44년(1257) 권신(權臣) 최항(崔沆)이 침공이 거듭되니 세공(歲貢)을 정지해 버리자 7차침공을 면할 수 없게 되었다. 원장(元將) 차라대(車羅大)는 안북부(安北府: )에 본영을 두고 성읍을 차례로 침략하기 시작하였다.
고종(高宗)은 김수강(金守剛)을 원주(元主)에게 보내 군사를 거두어 줄 것을 애걸하니 원(元) 헌종(憲宗)이 이를 허락하여 철병(撤兵)이 이루어졌다.
다음해 최항(崔沆)이 죽자 최의(崔 )가 뒤를 이었는데 고종(高宗)45년 김인준(金仁俊: )이 최의(崔 )의 심복을 죽이고 대사성(大司成) 유왕경(柳王敬) 등과 더불어 최의(崔 )를 습격하여 죽이고 대권을 고종(高宗)에게 바치니 4대 60여년 간의 최씨병정(崔氏秉政)은 끝나게 되었다.
고종(高宗) 46년(1259) 더 이상 항전할 수 없음을 느낀 왕은 태자(太子) 전( )에게 항표(降表)를 가지고 원도(元都)로 출발하게 하니 이로써 30년 긴 전란은 끝이 났다.
고려(高麗) 원종(元宗) 11년(1270) 강도(江都)에서 개경(開京) 환도(還都)가 결정되자 배중손(裴仲孫)을 중심한 삼별초(三別抄)가 항몽(抗蒙)을 부르짖고 강화(江華)․진도(珍島)․제주도(濟州島)로 옮겨가며 4년간을 결사 항전하여 비록 패하기는 하였으나 고려무인(高麗武人)의 기개를 보여주었다.
원(元)의 위력에 굴복한 고려(高麗)는 양차에 걸친 원(元)의 일본정벌에 끌려 다니는 피해를 당해야 했다. 자주성을 잃은 고려(高麗)는 충렬왕(忠烈王) 2년 (1276) 왕의 품계(品階)도 격하 당하는 일련의 조치를 감수하였으며 왕후(王后)는 원국공주(元國公主)로 짝지어지고 태자왕손(太子王孫)은 질자(質子)로 원도(元都)에 체재(滯在)하여야 하는 수모(受侮)와 절제를 제31대 공민왕(恭愍王) 5년(1356)까지 일세기에 걸쳐 감내(堪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원나라에 대한 참을 수 없는 신고(辛苦)는 우리 민족으로 하여금 그 간 저변(低邊)에 깔려있던 삼국 유민( )들의 뿌리깊은 지방색(地方色)이 희석(稀釋)되면서 모두가 단군(檀君)의 뿌리임을 이후 민족사에 확고한 동질성이 이루어지는 원인이 된다.(註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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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6) 일연(一然) : 고려 희종2년(1206년) ~ 충렬왕15년(1289년)
고려시대의 중(僧),학자. 호(號)는 무극(無極) 목암(睦菴)이고 속성명(俗姓名)은 김경명(金炅明)ꡐ일연ꡑ은 자(字)이다. 언필(彦弼)의 아들로서 경북 경산(慶山)에서 출생,고려 고종(高宗) 1년(1214년)에 해양(海陽) 무량사(無量寺)에 중이되고 1227년 승과(僧科)에 급제(及第) 불문에 요직을 두루거쳐 원종(元宗) 9년(1266년) 조지(朝旨)를 받고 대장경낙성회(大藏經落城會)의 맹주(盟主)가 되고 1283년 국존(國尊)으로 추대되기도 했다.
이러한 것이 인각사(麟角寺)의 탑과 비석에 기록되어 있고 행적비(行跡碑)는 운문사(雲門寺)에 있다. 그는 귀중한 저서(著書)를 남겼는데 그 중 삼국유사(三國遺事)는삼국사기(三國史記)와 함께 우리나라 고대사 연구에 귀중한 사료(史料)가 된다.
일연(一然)의 시호(詩號)는 보각(普覺)이고 탑호(塔號)는 정조(靜照)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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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사실은 중 일연(一然)이 저술한 삼국유사(三國遺事)의 단군신화(檀君神話)에서 그 깊은 뜻이 있슴을 확인하게 된다.
이러한 압제로 정치에 싫증을 느낀 충렬왕(忠烈王)은 23년에 원주(元主)에게 상주(上奏)하여 세자(世子: )에게 양위하고 상왕(上王)으로 물러났다.
충선왕(忠宣王)은 왕비(王妃: )와 더불어 귀국하여 젊은이답게(당시24세) 대륙국가에서 자란 포부와 견식으로 과단성있게 구제(舊制)를 개혁하고 인재를 등용하여 나라의 '좀'을 도려내는 유신(維新)의 정치를 함에, 기존 권문세족이 크게 반발하여 비난과 참무(讒誣)가 원정(元廷)에 비화(飛火)되고 또한 왕비(王妃)가 총(寵)을 오로지하려고 조비(趙妃: )을 원태후(元太后)에 참소(讒訴)함에 이르러서는 원주(元主)는 일년을 넘지 못해 조비(趙妃)를 잡아가고 왕(王)과 왕비(王妃)를 소환하여 8개월만에 왕위(王位)를 다시 충렬왕(忠烈王)에게 양위(讓位)하도록 했다.
간신(姦臣) 오잠(吳潛)등은 이를 다행으로 원정(元廷)에 뇌물(賂物)을 써서 충선왕(忠宣王)을 귀국치 못하도록 하고 충렬왕(忠烈王) 부자(父子)를 이간케 하여 서흥후전(瑞興侯琠: )을 후사(後嗣)로 삼고 충선왕비(忠宣王妃)를 전(琠)에게 개가(改嫁) 시키려는 공작이 시작될 즈음 충선왕(忠宣王)은 원(元) 무종(武宗)의 왕위영립(王位迎立)에 공이있어 원주(元主)의 총우(寵遇)를 받고 있을때라. 부왕(父王) 충렬왕(忠烈王)을 원국(元國) 경수사(慶壽寺)에 연금(軟禁)하고 본국재상(本國宰相) 홍자번(洪子藩)을 시켜 왕유소(王維紹), 전(琠)등을 검거(檢擧)하여 원도(元都)에서 주참(誅斬)하였으며 오잠(吳潛)은 안서(安西)로 장류(杖流)케 하였다.
충렬왕(忠烈王) 34년 원(元)에서 환국(還國)한 이듬해 왕(王)이 승하(昇遐)하니 충선왕(忠宣王)이 위(位)를 계승하고 친재(親裁)하니 의염창(義鹽倉)을 두어 소금을 국가전매(國家專賣)로 하여 모리(謀利)를 막고 균전제(均田制) 운영을 바로잡아 호활도(豪猾徒)의 피해로부터 공조(貢租)를 확보하는데 힘을 기우렸다.
그러나 왕(王)의 유신정치(維新政治)에 불평하는 자가 많음으로 재위(在位)5년에 세자(世子: )에게 전위(傳位)하고 상왕(上王)이 되어 다음해 원도(元都)로 가서 고서(古書)를 수집(蒐集)하고 이제현(李齊賢: ) 조맹조(趙孟兆: ) 등 거유(巨儒)들과 학문에 몰두하였다.또한 상왕(上王)은 재세(在世)시 장질(長侄) 고(暠: )를 사랑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