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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3월 20일 아산UBF 주일메시지 데살로니가전서 3강
너희 믿음이 부족한 것을 보충하려 함이라
말씀 / 데살로니가전서 2:17-3:13
요절 / 데살로니가전서 3:10 “주야로 심히 간구함은 너희 얼굴을 보고 너희 믿음이 부족한 것을 보충하게 하려 함이라”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에서 세 안식일 동안 성경을 풀어 전하였습니다. 그랬을 때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하고 거듭 난 헬라인 신자들이 나왔습니다. 시기한 유대인들이 불량배들을 시켜 바울 일행을 위협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은 바울에게 당장 떠나지 않으면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해를 가하겠다고 하였습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양들을 두고 떠나야 하였습니다. 이것을 두고 사도 바울을 비방하는 자들이 비난과 공격을 시작했습니다. "양들을 내버려 두고 떠나는 목자가 어디 있는가? 바울은 목자가 아니다" 바울은 자신의 진심을 편지에 담아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전달합니다.
2장 17절을 보십시오. "형제들아 우리가 잠시 너희를 떠난 것은 얼굴이요 마음은 아니니 너희 얼굴 보기를 열정으로 더욱 힘썼노라" 바울은 데살로니가를 떠날 때 마치 자녀들을 두고 떠나야 하는 부모의 심정과 같았습니다. 거듭 난 지 얼마 안 되는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두고 떠나야 했을 때 마음이 몹시 아팠습니다. 바울은 베뢰아를 거쳐 아덴까지 오는 동안 데살로니가의 양들에 대한 걱정으로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말합니다. “떠난 것은 얼굴이지 마음이 아니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로 돌아가려고 여러 번 시도하였습니다. 사탄이 길을 막아섰습니다. 다시 돌아가고자 하는 수차례의 시도가 계속 좌절되었습니다. 그때마다 바울의 마음은 안타까움에 타들어 갔습니다. 데살로니가 형제들을 생각하면 바울은 마음이 아팠습니다.
19절, 20절을 보십시오.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가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 너희는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이니라" 사도 바울은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 예수님 앞에서의 자랑의 면류관이 데살로니가 양이라는 사실을 밝힙니다. 이것은 그가 얼마나 데살로니가의 형제들을 귀하게 여기는지 밝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에서 3주 밖에 함께 하지 못한 양들은 문화도 다르고 옷 입는 것도 다르고 생활방식도 다른 사람들이었습니다. 이질적이고 낯선 모습을 한 사람들일지라도 사랑스럽고 소중한 것은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 주 앞에서 누리는 영광이며 기쁨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사람들에게 자랑하려고 양치는 사람입니다. 양은 사람들 앞에 세워놓고 자랑하고 사람들 앞에서 업적으로 보이려고 감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사람은 굉장히 생각을 잘못하는 것이며 그런 시도 때문에 낭패와 부끄러움을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의 양들을 섬기는 것은 예수님께 잘 했다 칭찬 받기 위한 것이며 예수님께로부터 생명의 면류관을 얻기 위한 것입니다.
다니엘 12:3절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나리라” 사도 바울은 주 예수님께서 다시 오셔서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나게 하실 것을 바라보며 각 나라와 각 지방의 모든 양들을 사랑하고 복음을 전하며 섬겼습니다. 그는 내가 이렇게 양들 많이 치고 있으니 나의 영적 역량과 위대성을 알아달라며 양을 치지 않았습니다. 요한계시록 2:10절 후반절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복음 전파의 이 귀한 사명을 죽도록 충성하며 감당하기를 기도합니다.
3장 1절과 2절을 보십시오. 데살로니가에 갈 수 있는 길이 막혔을 때 바울은 어떻게 하였습니까? 디모데를 보내기로 하였습니다. 디모데는 바울이 신뢰하는 제자요 동역자입니다. 바울은 디모데를 파송한 이유를 말합니다. "이는 너희를 굳건하게 하고 너희 믿음에 대하여 위로함으로 아무도 이 여러 환난 중에 흔들리지 않게 하려 함이라(2,3)" 바울은 떠나기 전에 그들이 앞으로 받을 환난에 대해 미리 말해 주었습니다. 환난을 당했을 때 놀라지 않고 대처할 수 있도록 그들의 마음을 미리 준비시켜 둘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양들은 믿음이 자라야 하고 그 믿음을 견고하게 하도록 양육이 필요합니다. 바울의 대적자들은 바울이 무책임한 아버지 같다고 비난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항상 양들의 상황을 살피고, 굳게 하고 위로하면서, 어떤 환난이나 시험에도 흔들리지 않을 믿음의 사람이 되도록 힘을 다해 섬기고자 했습니다.
6절을 보십시오. "지금은 디모데가 너희에게로부터 와서 너희 믿음과 사랑의 기쁜 소식을 우리에게 전하고 또 너희가 항상 우리를 잘 생각하여 우리가 너희를 간절히 보고자 함과 같이 너희도 우리를 간절히 보고자 한다 하니" 데살로니가에 다녀온 디모데는 데살로니가 교회가 고난 중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있으며 믿음과 사랑이 풍성한 교회로 성장했다는 소식을 전하였습니다. 디모데는 바울이 그들을 보고 싶어 하는 것만큼 데살로니가 성도들 또한 바울을 보고 싶어 한다고 전하였습니다. 바울은 디모데가 전해 온 소식을 근거로 데살로니가 형제들에 대한 기쁜 심정을 전합니다. 7절을 보면 이 소식이 고난 중에 있는 바울에게 큰 위로가 되었습니다. 바울은 물질을 스스로 감당하는 수고를 하였고 유대인들로부터 박해를 받아 갈리오 총독의 법정에 섰었습니다. 고된 상황 속에서 인내하면서도 늘 데살로니가의 형제들에 대한 걱정으로 마음이 쓰였는데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잘 있다는 소식을 들었으므로 바울은 큰 위로를 받았습니다. 그는 아주 기뻐하였습니다. 8절을 보면 '너희가 주 안에 굳게 서 있다고 하니 이제는 내가 살겠다!' 합니다. 얼마나 노심초사하다가 기뻤으면 이제 내가 살겠다고 할까요?
9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우리 하나님 앞에서 너희로 말미암아 모든 기쁨으로 기뻐하니 너희를 위하여 능히 어떠한 감사로 하나님께 보답할까" 바울은 데살로니가 형제들을 향하여 그의 가진 기쁨을 전합니다. 이 기쁨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목자가 없어도 하나님께서 친히 목자가 되셔서 데살로니가 양들을 키우셨음을 생각할 때 하나님께 큰 감사가 흘러나왔습니다. 그는 모든 기쁨으로 기뻐한다고 하였습니다. 보지 않으면 양들이 잘 있을까 걱정하고 잘 있다는 소식을 듣고는 모든 기쁨으로 기뻐하는 심정을 솔직히 밝히는 것은 바울이 얼마나 데살로니가 형제들을 진심으로 사랑하는지 보여주는 것입니다.
10절을 보십시오. "주야로 심히 간구함은 너희 얼굴을 보고 너희 믿음이 부족한 것을 보충하게 하려 함이라" 사도 바울은 잘 있다는 소식으로 만족하고 그냥 다른 일 하러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기쁨을 얻은 바울은 더욱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바울은 낮밤 간절하고 지속적으로 데살로니가의 양들을 위하여 기도하였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기도하는 목적이 너희 믿음이 부족한 것을 보충하게 하려 함이라고 합니다. ‘보충하다’는 말은 '완성하게 하다'는 뜻이 있습니다. 바울은 양들이 믿음의 완성자가 되기까지 섬기기를 원하였습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주님께서 받으시는 가장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기까지 완전해 지기를 원하였습니다. 그는 이를 위하여 간절하게 기도하였습니다.
11절부터 13절에는 사도 바울의 구체적인 기도제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첫째 기도 제목은 하나님께서 바울이 다시 데살로니가로 가는 길을 열어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두 번째 기도 제목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피차간에 모든 사람을 향한 사랑이 넘치게 하여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피차간의 사랑은 성도간의 형제사랑을 뜻합니다. 모든 사람을 향한 사랑이란 교회 밖의 불신자들과 박해자와 원수들을 향한 사랑을 의미합니다. 세 번째 기도 제목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예수님이 재림 하실 때 하나님 앞에 거룩함에서 흠 없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이상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하여 양들에 대하여 사도 바울이 가졌던 목자의 심정과 기도를 배울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먼저 우리가 오늘 말씀의 사도 바울을 통하여 배우는 것은 양들에 대한 진심입니다. 오늘날 양치는 일에 별 관심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양들 돕는 일에 관심과 열정이 있는 목자도 많습니다. 예수님의 양들 돕는 일에 관심과 열정이 없는 분들은 장차 오실 예수님께서 다시 오셔서 무엇을 보실 것인지 오늘 말씀에 기록된 것을 잘 보고 기억하여야 할 것입니다. 한편, 양들을 섬기고자 하는 분들은 양들에 대한 마음을 새롭게 정비하여야 합니다. 오늘 말씀을 볼 때, 사도 바울의 진심은 양들을 귀하게 여긴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양들을 열정적으로 돕기는 하는데 양들을 귀하게 여기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양을 자기 영광을 위한 수단으로 보는 사람이 그렇게 합니다. 양을 수단과 방법으로 여길 때 그 영혼에 대하여 존귀하게 여기는 마음이 없습니다. 이용대상이기 때문입니다. 빨리 자라서 목자를 영광스럽게 해주기를 원하는데 그렇지 않으니 그런 사람에게 있어서 양들은 언제나 답답하고 문제가 있는 인간군상으로 느껴집니다. 양들을 귀하게 보지 않는 또 다른 경우가 있는데 근본적으로 인간관이 잘못 된 경우입니다. 자신이 하나님도 아니면서, 자신은 더 큰 죄인임을 망각하고 늘 사람을 죄인으로 보고 뜯어고치려고 합니다. 이런 사람을 계몽군주적 관점을 가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백성은 어리석은 존재이므로 자기 같이 지각이 뛰어난 왕이 가르치고 또 가르쳐서 바꾸어야 한다는 관점입니다. 이런 관점을 나이 많은 이전 세대 사람들 소위 꼰대 들이나 갖는 줄 알지만 의외로 나이 젊은 사람도 가지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양들을 늘 ‘나보다 못한 존재’, ‘어리고 미숙하며 수준 낮은 인간’이라는 관점을 가지고 있으면 양치기 어렵습니다. 양들 무시하는 그 관점과 생각을 양들이 먼저 알아차립니다. 어린 양 한 사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어주신 예수님을 배우고 알았다면 절대로 한 영혼을 낮추어보거나 뜯어고쳐야 할 대상으로 보지 말아야 합니다. 오만한 ‘인간관’을 근본적으로 회개하여야 합니다.
양을 귀하게 여기는 마음과 함께 양을 향하여 긍휼의 마음도 가져야 합니다. 이 마음은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베풀어 주시는 것은 자비와 긍휼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셔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은 사랑과 은혜입니다. 우리는 양들을 향하여 긍휼의 마음 사랑의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외모나 타이틀을 보며 함부로 평가하지 말아야 합니다. 한 영혼을 마음 아픈 사랑으로 바라보고 마음에 받아들이는 인간애가 있어야 합니다. 외모를 보며 성급하게 내리는 미숙한 판단, 겉으로 드러난 일부의 모습을 그의 전체로 여기는 편협하고 조급한 눈길을 거두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어떻게 보셨습니까? 예수님께서 나의 죄와 허물에 상관없이 나를 긍휼히 여겨 주셨는데, 그 사랑에 감격만 하고 정작 본인은 양들을 향하여 긍휼의 마음을 품지 않는 모습을 민망하게도 수없이 목격합니다. 우리는 한 영혼을 귀하게 여기되 예수님의 마음으로 긍휼의 눈, 애타는 사랑의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두 번째로 사도 바울은 행동하는 사랑을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형제들에게 계속하여 다시 가고자 도전하였습니다. 가지 못하고 번번히 가는 길이 막혔습니다. 사도 바울은 입으로만 사랑한다. 소중하다 립서비스만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움직였습니다. 데살로니가의 형제들을 사랑하기에 가만히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여러 가지로 움직였습니다. 그는 자기가 져야 할 사랑의 수고를 하였으며, 자기의 십자가와 양들을 위한 수고를 누가 알아서 져주기를 바라지 않았습니다. 자기가 사랑의 수고를 감당하고자 부단히 도전하였습니다. 끝내 그의 모든 길이 막히자 자기가 가장 아끼는 디모데를 기꺼이 데살로니가로 보냈습니다. 디모데는 늘 곁에 두고 싶은 가장 아끼는 제자요 힘이 되는 동역자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를 위하여 아끼는 디모데로 하여금 가보게 하였습니다. 디모데가 없으면 겪게 될 자신의 불편은 전혀 고려하지 않았습니다. 사랑은 행하는 것입니다. 행하는 것 없는 사랑은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하기에 나의 눈물이 흐르는 것이고 사랑하니까 내가 먼저 움직이는 것입니다. 이때 우리가 조심하여야 하는 것은 내방식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사랑한다면 양들에게 필요한 것을 행하여야 합니다. 양들은 속 깊은 대화를 원하는데 일어나 운동장에 나가 뛰자고 한다면 양들이 사랑을 느끼지 못할 것입니다. 양이 간절하게 살 빼고 싶어 하는데, 이거 비싼 거니까 먹으라며 초코렛, 사탕을 들이 민다면 얼마나 일방적인 것입니까? 자기중심적인 행동, 양을 알지 못하는 행동은 사랑의 열매를 얻지 못하게 할 것입니다.
세 번째로 목자는 양의 영적 성장을 도와야 합니다. 의사는 환자의 질병을 고쳐주어야 합니다. 선생은 제자가 공부하게 하여야 합니다. 감독은 선수들이 경기에서 승리하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목자는 양들이 예수님을 잘 배우고 영적으로 성장하도록 도와야 합니다. 말씀공부 와 예배를 시작하였으면 안도하지 말고 믿음이 자라게 하여야 합니다. 관념적으로 아는 데서 성장하여 실제로 믿도록 하고, 하나님을 두려움의 대상으로 여기고 있으면 거기서 머물지 말고 찬양하고 감사하는 마음을 갖도록 믿음이 자라나야 합니다. 그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믿음이 자라 감당할 수 있게 되었으면 영적 연단을 받도록 하여야 합니다. 연단을 통하여 세상 가치관을 털어내야 합니다. 스스로 좋은 사람이라고 여기며 고수하는 거북한 인간적 습관을 버리도록 하여야 합니다. 인간적인 말버릇, 절제 없는 사고방식, 끊지 않고 있는 과거의 행동 패턴을 개선하도록 하여야 합니다. 그리하여 말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이나 행동하는 것이 예수님 중심이 되고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는 것이 되도록 연단하여야 합니다. 연단받았다고 끝이 아닙니다. 영적인 연단이 되었다면 말씀의 샘을 파고 다른 사람을 능히 도울 수 있는 제자 역량을 갖도록 하여야 합니다. 이런 모든 과정들-영적 성장이 이루어지도록 하는 데는 많은 시간이 필요합니다. 이를 위하여 목자는 계속 관심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유명해지려는 욕심을 가진 목자는 이런 과정동안 오래 지켜보지 않습니다. 또 사람 끌어 모으고 또 모임의 규모를 키워야 하겠다고 생각하므로 무엇이 중요한지 망각하고 사람 모으는 일이나 계속 하려고 합니다. 결국, 목자 자신이 성장하여 있어야 합니다. 목자가 먼저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목자 자신이 믿음 안에서 충분히 자라나야 하며, 목자부터 연단을 받아 오만과 욕심의 불순물을 제거하여야 합니다. 자신이 먼저 말씀을 올바로 분변하여 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하려면 기도하는 것이 동반되어야 합니다. 기도하여야 사람을 도울 수 있는 영적 권세를 덧입을 수 없으며, 기도하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성령의 능력을 부어주시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체험하게 하십니다. 사도 바울은 특별히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교회 안에서 형제 사랑과 교회 밖에서까지 행하는 사랑의 사람이 되도록 도왔습니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의 형제들이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거룩함에 흠이 없는 수준이 되도록 돕고자 하였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이와 같은 목자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진심으로 양들을 사랑하시기를 기도합니다. 말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으로 사랑을 보이는 목자들이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양들이 하나님 앞에서 흠이 없는 주님의 사람이 되기까지 전인격적인 제자양성을 감당하시기를 기도합니다. 간절히 기도하며 위대한 제자양성에서 열매 맺으시기를 기도합니다.
주님의 양을 향하여 진심을 가지고 사랑하는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주님의 양을 치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셔서 제자들을 만나 부탁하셨습니다. “내 양을 치라”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내 양을 먹이라”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시며 우리에게 당부하신 말씀이 “내 양을 치라” 하신 것입니다. 나의 모든 죄와 어두움을 다 멸하시고 하나님의 자녀 삼으신 주 예수님의 당부하신 말씀에 순종하는 것은 지극히 복된 일입니다. “내 양을 먹이라” 하신 말씀에 대한 순종은 선택이 아니라 우리의 자발적인 의무입니다.
잘 생각해야 할 것은 주님의 양을 도우면 스탶목자나 요회목자가 복을 받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복을 받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양을 진심으로 사랑하면 예수님을 배울 수 있습니다. 영생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예수님 다시 오실 때 주시는 영원한 생명이고 또 하나는 이 땅에서 예수님과 함께 하는 자체가 영생입니다. 한 사람을 사랑하고 그를 위하여 기도하며 한 영혼이 살아나기를 바라며 수고하는 목자에게 예수님의 형상이 그 내면에 조각됩니다. 원래 우유 받아먹는 사람보다 우유 배달하는 사람이 더 건강해진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양들을 사랑하는 사람, 양들에게 예수님의 사랑을 전하는 목자는 예수님을 가장 실제적으로 배울 수 있습니다. 사랑을 행하는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형상이 내면에 새겨지도록 성령께도 도우십니다. 이 복된 사명을 외면하는 사람이나, 이런 귀한 일을 사람에게 자랑하려고 하는 사람은 자신의 영혼에 구정물을 주입하는 것과 같습니다. 자녀에게 불량식품을 먹이는 부모가 없고 자기의 건강에 해가 되는 것을 몸에 쌓는 사람이 없는 법인데, 예수님을 배우고 따를 수 있는 가장 좋은 길을 마다한 것은 주님 앞에 섰을 때 핑계 댈 수 없는 인생의 무책임이 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오늘 말씀은 주님 다시 오실 때, 양들이 주 예수님 앞에 자랑의 면류관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성경말씀 하나님의 말씀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사도 바울에게는 주님 재림 하시는 날의 영광이며 기쁨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 다시 오실 때 우리 인생은 다시 기회를 얻을 수 없습니다. 그 날은 모든 것이 드러나는 날이며 모든 것이 평가받는 날입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오셨을 때, ‘다시 돌아가 사랑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 ‘다시 살 수 있으면 좋겠어요’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맡겨진 사랑하는 일을 주저 없이 모든 힘을 다하여 행하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재림의 주 예수님 앞에 섰을 때를 생각하여야 합니다.
마태복음 25:31~46절에는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것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구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 같이 하여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그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대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헐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을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대에 돌보지 아니하였느니라 하시니 그들도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헐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공양하지 아니하더이까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 그들은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
결론을 맺겠습니다. 죄와 사망에 사로잡힌 주님의 양들을 진심과 행함으로 먹이는 좋은 목자로 사시기를 기도합니다. 주님 오시는 날 영생에 참여하고 생명의 면류관을 얻으시기를 기도합니다. 기도하고 마치겠습니다.
Asan UB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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