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할매
금양 윤월수
아내의 교회 친구 셋이 찾아왔다. 며칠 전 오기로 통화하고 왔다. 봄 싹이 푸릇푸릇 피어나는 계절 이맘때면 으레 한두 번은 다녀간다. 나물 뜯는 재미로 야외 나들이 하는 셈이다. 구름, 하늘, 바람, 별과 새들이 좋아 시골에 들어와 산 지 벌써 이십 년이다. 시내 살면 아무리 친하여도 찾아 올 턱이 없는데 턱이 생겨 좋다. 시인 이은상은 봄을 처녀라고 노래했는데 내겐 할매들이 실체로 온 것이다. 자연은 그녀들을 봄의 전령으로 보내온 것 같다.
오후에 비가 온다는 예보에 일찍 온 듯하다. 도착하자마자 각자 메고 온 가방을 챙겨서 산속으로 들어갔다. 이슬비가 슬슬 내리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멈추기에는 애매하다. 두어 시간 남짓 헤매다 돌아왔다. 욕심 때문인지 옷이 젖고 흙이 바지가랑이에 묻어도 아랑곳 하지 않은 모습이다. 다시 마당에 들어선 이들을 보니 물에 빠진 병아리 꼴이다. 희끗한 머리가 촉촉이 젖어 딱 달라붙었다. 지나온 세월의 흔적이 묻어난다.
젖은 몸에 티끌들이 달라붙어 모양새가 안 좋다. 집 안으로 들어오면 더럽혀질까 무척 주저한다. 마당에 있는 들마루에 앉아 싸 갖고 온 김밥을 먹겠다고 했다. 내리는 비는 이슬 같지만 태양은 구름에 가려 기온이 차다.
"아니, 추워서 안 돼요. 들어오세요.”
“괜찮아요.”
“더러워지면 닦으면 되는 거지요····."하고 강권하여 안으로 들어오게 하였다.
거실 가운데에는 탁구대가 차지하고 있다. 우리 내외가 밤마다 운동하려고 미들 사이즈로 구입했다. 정식보다 삼분의 일이 작으니 여유가 있다. 그 위에 가져온 음식을 펼쳐 놓자 연회장이 됐다. 남의 집이라 무척 조심스러워 하는 눈치이다. "이 탁구대는 식사하면 식탁이요, 공부하면 책상이요, 공을 치면 탁구대요". 라고 농을 했다. 순간 웃음으로 공감하며 다섯이 둘러앉으니 비로소 안정이 됐다. 조크는 딱딱함을 풀어주는 조미료이다.
우선 따끈한 차로 몸을 덥히자 교회 소식이 쏟아져 나온다. 일요 예배 때나 참석하는 우리에게는 뉴스이다. 목사님의 근황부터 교인들의 동정, 교회 돌아가는 모양 등이 훤해진다. 사람들은 본디 남 얘기 전하는 본능이 있는가 보다. 다음 주에 만나면 좋은 얘기는 축하하고 슬픈 얘기는 위로해야만 한다. 세상 살아가는 지혜이다.
한참을 쏟아내더니 밥알이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모를 지경이다. 볼이 터져라 웃음이 터져라 체면은 사라졌다. 친목이 두터워지는 현장이다. 실내가 따뜻해지니 더욱 편안해졌다. 하루 이틀 사귄 이들도 아니다. 추운 밖에서 움츠리고 앉아 식사하게 두면 도리가 아니다. 화창한 날이라면 방 안보다 바깥이 훨씬 낫다. 흐드러지게 핀 산벚꽃이 여기저기서 손짓하고 있다. 바라보고 식사한다면 캠핑이라도 온 듯한 기분이었을 게다. 추억의 한 컷으로 남을 텐데 아쉽다.
시민대학 수업도 코로나 때문에 줌 수업으로 전환되었다. 외국어 공부나 해볼까 영어 회화를 신청했다. 외국에 가면 외마디 영어 솜씨가 부끄럽기도 했지만 치매 예방에도 좋다고 한다. 의료보험공단에서 검사 받으라는 안내서가 왔었다. 아직은 아닌 것 같아 무시했다. 다른 사유로 동네 보건소에 갔었다. 잘 왔다 싶은지 검사지 주고 시험을 치게 했다. 불심검문 받은 느낌이었다. 구두로 기억력 테스트도 받았다. 결과는 정상이라지만 강 건너 불이 아니고 현실임이 실감되었다. 대비책으로 외국어 수업을 선택했다. 오늘이 처음 받는 수업이다. 핸드폰에 능하지 못해 다소 걱정하고 있었다. 내심 시간이 되기 전에 돌아가 주었으면 했다. 그녀들의 수다는 지루하지 않는 시점에서 멈추었다. 우리들 편하라고 돌아갈 차비를 서두르니 조금은 다행이었다.
떠나는 차 안에 배추 한 포기씩 밀어 넣어 주었다. 지난해에 김장하고 남은 것이다. 아직도 싱싱하다. 신문지에 꼭꼭 싸서 저온 창고에 보관한 덕분이다. 된장 소스에 묻혀 쌈 싸먹으라 했더니 횡재했다고 환호하며 떠났다. 뒷모습이 잔향같이 남는다. 앞에서 시인은 ‘봄’을 처녀로 은유하여 글로 남겼고, 내게는 ‘할매’가 다가와 실상(實像)을 남겨놓고 갔다.
잠시 뒤의 수업은 잊어버리고 어느새 피아노 앞에 앉아 있다. ‘봄 처녀 제 오시네, 새 풀 옷을 입으셨네, 하얀 구름 너울 쓰고 진주 이슬 신으셨네····’아내도 곁에서 따라 흥얼댄다. 흥이 고조되니 점차 소리가 커진다. 노래의 가사는 시(詩)이다. 시는 눈으로 읽는 것보다 소리 내어 읽어야 맛이 난다. 그 소리에 음정을 실으면 노래가 된다. 느낌은 더욱 좋아진다. 우리는 그 셋째 단계를 즐기고 있으니 이보다 더 좋은 건 없다.
조그만 것들을 베풀며 살아가는 시골살이다. 정겨움이 느껴지는 하루이다. 예보와는 달리 우중충했던 하늘이 열리고 햇살이 내밀고 있다. 다음 주에는 또 누가 오실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