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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名作 에세이] 오스트리아 어느 도시에서의 청춘 잉게보르크 바하만[오스트리아] 잉게보르크 바하만(Ingeborg Bachmann) 시인, 작가 /출생-사망; 1926년 6월 25일, 오스트리아 - 1973년 10월 17일/ 학력; 빈대학교 대학원 박사/ 데뷔; 1953년 47 그룹을 통해 문단에 데뷔/ 수상; 게오르크 뷔히너 상, 브레멘 시 문학상, 1968년 오스트리아 문학부문 국가대상 등 수상. 쾌청한 10월, 라데츠키 가로부터 오노라면 우리는 시립 극장 옆에서 햇빛을 받고 있는 한 무리의 나무를 보게 된다. 열매를 맺지 않는 저 검붉은 태양의 벚나무 숲을 배경으로 하고 서 있는 첫번째 나무는 가을과 함께 불타올라, 천사가 떨어뜨리고 간 횃불처럼, 어울리지 않게 금빛 찬란한 얼룩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바로 지금 그 나무는 불타고 있다. 그리고 가을 바람도 서리도 나무의 불을 끌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한그루 나무를 앞에 두고 내게 낙엽과 흰빛 죽음에 대해 말하고자 하는 자는 누구인가. 내가 이 나무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이 나무야말로 지금 이 순간처럼 언제든지 빛나리라고 믿는 것을, 세계의 법칙도 이 나무에는 해당되지 않으리라고 믿는 것을 방해하는 자가 누구인가? 이 나무의 빛 속에서 지금 우리는 옛 도시와 운하를 다시 알아 볼 수 있다. 어두운 벽돌 지붕 밑에서 회복되어 가는 창백한 집들이 있는 도시와, 간혹 호수로부터 보트를 한 척 운반해 들여 도심부에 정박시키는 운하를. 화물이 열차나 트럭에 의해 훨씬 빨리 시내로 운반되게 된 이래로 항구는 확실히 죽어버렸다. 그렇지만 높은 선창으로부터는 지금도 꽃이나 과일이, 흐르지 않는 물 위로 떨어지고, 눈송이가 나뭇가지로부터 무너져내리며 눈 녹은 물이 소리를 내며 아래로 흘러내린다. 그러고 나면 항구는 다시금 기꺼이 물이 불어나 하나의 파도를 일으키며 파도와 함께 한 척의 배를 높이 들어올린다. 우리가 여기 도착했을 때 알록달록한 돛을 감아 올렸던 바로 그 배를. 이 도시에는 다른 도시로부터 이주해 오는 사람이 퍽 드물었다. 이 도시에는 별로 유혹이 없기 때문이었다. 농촌이 궁색해졌기 때문에 시골에서부터 농부들이 올라와, 집세가 가장 싼 도시 변두리에 집을 구했다. 변두리에는 아직 밭이나 자갈 웅덩이가 있었고, 나무를 심을 만한 넓은 터와 집터가 있었던 것이다. 그 터에서는 오랫동안, 가난한 이주자들에게 양식이라 할 수 있는 무나 배추, 완두콩이 수확되었다. 이주자들은 지하실을 손수 팠다. 지하실에는 지하수가 고였다. 또 그들은 봄과 가을 사이의 짧은 밤 동안 자기네들 손으로 대들보를 올렸다. 하지만 그들이 죽기 전에 상량식을 볼 수 있었는지의 여부는 아무도 모른다. 그들의 아이들은 그런 것을 상관하지 않았다. 실상 그 아이들은, 감자 줄기를 태우는 불이 지펴지고, 집시들이 거칠게 낯선 말을 주고받으며 묘지와 비행장 사이의 이 주인 없는 땅에 살림을 차릴 때마다 이미 아득히 먼 곳의 알 수 없는 향기에 마음이 쏠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두르크라스 가에 있는 셋집에 사는 아이들은 집주인의 머리 위에 살고 있는 이유로 신발을 벗고 버선발로 놀아야 한다. 그들은 소곤소곤 숨을 죽여 얘기해야만 하며 이러한 생활 속에서는 아마 소곤거리는 버릇을 벗어날 수 없으리라. 학교에서 선생님들은 그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 너희들의 입을 열게 하려면 때리는 수밖에 없구나... 너무 시끄럽게 군다는 집에서의 비난과, 목소리가 너무 작다는 학교에서의 비난 사이에서 아이들은 묵묵히 생활에 순응해 가는 것이다. 두르크라스(Durchlass)(통과하게 함, 통로라는 뜻)라는 거리 이름은 도둑놈들이 통과하여 빠져나가는 놀이(아이들 놀이의 한 종류)에서 연유된 것이 아닌데도 아이들은 오랫동안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훗날 걸어서 멀리까지 진출할 수 있었을 때에야 비로소 그들은 그 동행의 현장을 보게 되었다. 그것은 작은 입체 교차로인데, 그 위로는 비엔나행 열차가 달리는 것이다. 비행장으로 가 보고 싶은 호기심에 동한 아이들은 이 교차로를 통과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밭을 지나 다채롭게 수놓인 가을 풍경을 가로질러. 비행장을 묘지 옆에 설치하도록 생각해낸 자는 누구였던가. -- K시에 사는 사람들은, 한동안 비행 연습을 진행하고 있던 비행사들의 매장을 위해서는 그 점이 편리할 것이라고 추측했다. 하지만 비행사들이 추락하여 사람들의 기대를 충족시켜주는 일은 결코 없었다. 아이들은 언제나 비행사! 비행사! 하고 환성을 질렀고, 마치 그것을 잡아보겠다는 듯이 비행기를 향해 두 팔을 높이 올렸다. 그리고 비행사들이 짐승의 머리와 도깨비 사이를 날고 있는 구름 속의 동물원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것이었다. 아이들은 판 초콜릿에서 은종이를 벗겨내어 그것에 대고 '마리아 잘의 종'(마리아 잘은 클라겐푸르트의 북쪽 도시)을 휘파람으로 분다. 아이들의 머리에는 이가 붙어 있어 학교에 있는 여의사의 손에 의해 샅샅이 검사를 당한다. 또 아이들은 시계가 몇 번을 쳤는지조차 모른다. 시 성당구 교회의 시계는 항상 잠자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언제나 학교에서 늦게 집으로 돌아간다. 아이들! (그들은 자기들의 이름이 무엇인지를 겨우 알고 있지만, 그래도 '얘들아'라고 불리기만 귀를 모아 기다리는 것이다.) 여러 가지 과제. -- 똑바른 글자 위의 획과 아래 획, 이해력 획득과 꿈의 상실 속에서의 연습, 기억력을 바탕으로 암기한 것, 기름칠한 마룻바닥의 냄새 속에서 몇 백 명의 아동의 생활과 난쟁이 외투, 손때로 불이 난 고무 지우개가 내뿜는 냄새 속에서, 눈물과 꾸지람, 교실 구석에 세워진 벌과 꿇어앉는 벌, 가라앉히기 어려운 재잘거림 사이에서 이룩되는 것은 -- 알파벳과 구구법, 철자법, 그리고 십계명인 것이다. 아이들은 낡은 언어를 집어던지고 새 것을 걸친다. 그들은 시나이 산(홍해 북쪽 끝에 있는 산, 모세가 십계를 받은 산)에 대한 얘기를 듣고, 히말라야 삼나무나 가시덤불에 대해 어리둥절해 하면서, 무밭과 낙엽송, 가문비나무가 울창한 울리히 산(클라겐푸르트 북쪽에 있는 산)을 바라보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수영(마디풀과의 다년초. 승아)을 먹고, 미처 영글기도 전에 옥수수를 자루째로 갉아먹거나 장작불에 굽기 위해 집으로 가져간다. 다 먹어치운 옥수수자루는 땔감통으로 사라져 불쏘시개로 이용되는 것이다. 그리고 공상 속의 히말라야 삼나무와 올리브나무가 덧붙여 지펴져, 옥수수자루 위에서 뭉근하게 그을리며, 아득히 먼 곳으로부터의 열을 가져오고, 벽 위에 그림자를 던지는 것이었다. 앞을 보는 일도 뒤돌아보는 일도 없는 상패의 시절, 크리스마스 시즌, 호박의 밤들(할로윈 절 때 호박을 파내고 초롱을 만들어드는 일), 끊임없는 유령과 공포의 시절. 좋은 일이 있어도 궂은 일이 있어도 -- 희망이 없던 시절. 아이들은 미래라는 것을 모른다. 그들은 온 세계에 대해 두려움을 갖고 있다. 그들은 세계의 모습을 마음속에 그려보지도 않고, 단지 이쪽 편, 저쪽 편이라고만 생각하려 한다. 그렇게 한다면 분필로 그어놓은 선을 가지고도 경계를 짓는 일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한 발로 지옥 위를 깡총깡총 뛰어가고, 양쪽 발로 천국안으로 펄쩍 뛰어 들어간다(아이들의 돌차기 놀이를 뜻함). 어느날 아이들은 헨젤 가로 이사를 했다. 집주인이 없는 건물로. 저당을 잡히고 각박하고 소심하게 갓 생겨난 부락으로. 그 주택지는 웅장하고 중앙 난방을 갖춘 저택만이 즐비한 베토벤 가에서 두 블록 떨어져 있었고, 전기의 빨간빛을 하고, 커다랗게 입을 벌린 전차가 통과하는 라데츠커 가와는 길 하나 사이였다. 그들은 정원의 주인이 되었다. 앞뜰에는 장미가 심어졌고 뒤뜰에는 어린 사과 나무와 구즈베리(범의귀과의 낙엽 소관목. 과실은 생식, 또는 잼을 만들어 먹음) 덤불이 심어졌다. 나무들은 아이들 자신보다 크지 않아서 결국 나무나 아이들이나 함께 성장해야 될 상황이었다. 그들의 집 왼편으로는 복서 종의 개를 기르는 이웃이 있고, 오른편에는 바나나를 먹으며, 철봉과 시합장을 정원에 설치해놓고 온종일 몸을 흔들어 대며 소일하는 이웃 아이들이 있었다. 그들은 '알리'라는 이름의 복서와는 친구가 되었지만, 자기네들보다 무엇이든 잘하고, 모든 것을 잘 아는 이웃 아이들과는 사이가 나빴다. 그들은 자기네끼리 노는 것이 한결 즐겁다. 그래서 지붕밑 다락방에 보금자리를 틀고, 이따금 이 은신처에서 발육부진의 목소리를 시험해보려고 크게 고함을 질렀다. 거미줄 앞에서 살그머니 반란의 비명을 내지르고는 하는 것이다. 그들은 쥐와 사과 냄새 때문에 지하실을 싫어했다. 매일처럼 그 밑으로 내려가 썩은 사과를 끄집어내어 썩은 데를 도려내고 먹는 일이라니! 썩은 사과를 모조리 먹어치울 수 있는 날은 결코 오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사과는 꼬리를 물고 끊임없이 썩는데다가, 결코 버려서는 안 되기 때문에, 그들은 미지의 금지된 과일을 갈망했다. 그들은 사과를 좋아하지 않는다. 친척과 일요일을 좋아하지 않는다. 일요일만 되면, 그들은 집 위쪽에 있는 크로이츠 산으로 산책을 가야 하며, 꽃 이름을 맞추고, 새 이름을 맞추어야 했기 때문이다. 여름이 되면 아이들은 눈이 부셔 깜빡이며 초록빛 덧창 너머로 햇빛을 바라보았고, 겨울이면 눈사람을 만들어 눈이 있어야 할 자리에 석탄 뭉치를 끼운다. 아이들은 프랑스 말을 배운다. 마들렌느 에 튄느 쁘띠뜨 피유. 엘레 아 라 프네트르. 엘 르갸르드 라 뤼(마들렌느는 작은 여자아이입니다. 그녀는 창가에 기대어 있습니다. 그녀는 거리를 봅니다). 그들은 피아노를 친다. 샴페인의 노래. 여름의 마지막 장미. 봄의 찬가를. 그들은 이제 철자법 연습은 하지 않는다. 그들은 신문을 읽는다. 신문에서는 지청 살인범이 튀어나온다. 종교 시간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올 때, 침침한 어둠 속에서 어른거리는 나무 그림자가 그 살인범으로 변한다. 그리고 앞뜰을 따라 흔들리며 서 있는 라일락의 살랑거림도 그 사나이를 연상시킨다. 구즈베리 덤부로가 협죽도가 갈라지는 곳에서 그 살인범은 한순간 모습을 드러낸다. 아이들은 몸을 조이고 살인범의 손가락을 느끼고, 치정이라는 말 뒤에 숨어 있는 비밀, 살인범이라는 것 이상으로 무서운 비밀을 느낀다. 아이들은 지나치게 심하게 읽어서 눈이 나빠진다. 밤마다 너무 오랫동안 쿠르디스탄(이란 지방)의 황야에 가 있기도 하고, 알래스카의 금광에 가 있느라고 밤을 지새우기도 한다. 그들은 사랑의 대화에 잠복하고서 이해할 수 없는 말을 위해 사전을 갖고 싶어한다. 아이들은 자기들의 육체에 대하여, 그리고 어느 날 밤 부모님 방에서 일어나는 말다툼에 대하여, 노심초사한다. 아이들은 기회만 있으면 웃는다. 웃음에 못이겨 가만히 몸을 지탱할 수 없어 걸상에서 떨어질 지경이다. 그래서 일어서서 경련을 일으킬 정도로 웃기를 계속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치정 살인범은 얼마 안 가서 로젠탈의 어느 마을 헛간에서 잡혔다. 마른풀이 장식되어 있고 부연 잿빛 안개가 얼룩진, 사진 속의 얼굴로써. 그 안개는 살인범을 비단 조간 신문에서 뿐만아니라, 영원히 알아볼 수 없는 인상으로 바꿔버렸다. 집에는 돈이 없었다. 돼지 저금통에는 이제 동전 한 닢 떨어지지 않는다. 아이들 앞에서 어른들은 오로지 암시로만 얘기한다. 나라가 팔려가는 판국에 있다는 것을 아이들은 눈치채지 못한다. 나라의 땅덩어리뿐만 아니라 하늘까지 덧붙여서. 만인의 운명이 이어져 있는 하늘까지 결국은 찢어져 시커먼 구멍이 난다는 것을. 아이들은 말없이 식탁에 앉아서 음식을 한 입 넣고는 오래오래 씹는다. 그 동안에 라디오는 형세가 심상치 않음을 알린다. 뉴스를 전하는 아나운서의 음성이 총알의 섬광처럼 부엌 안을 휘돌아서, 깜짝 놀란 남비 뚜껑이, 터진 감자 위에서 들먹이는 지점에 와서 멈춘다. 거리에서는 행군하는 수많은 종렬이 계속된다. 병사들의 머리 위에서 깃발들이 맞부딪친다. "...모든 것이 진토로 돌아갈때까지" 이러한 노랫소리가 밖에서 들려온다. 라디오의 시보가 울린다. 아이들은 훈련된 손가락 말로 무언의 뉴스를 주고 받게끔 변해 간다. 아이들은 사랑에 빠져 있으면서, 그것이 누구를 향한 사랑인지를 모른다. 그들은 알아들을 수 없는 은어를 쓰며, 규정할 수 없는 회색의 세계를 꼬치꼬치 캐며 생각한다. 그리고 그 이상 알 수 없게되면, 어떤 말을 하나 만들어내어 그것에 열광한다. 나의 물고기. 나의 낚시바늘. 나의 여우. 나의 함정. 나의 불. 너, 나의 물. 너, 나의 파도. 나의 어스. 너, 나의 조건. 그리고 너, 나의 의혹. 저것, 아니면 이것. 나의 모든 것.....나의 모든 것...그들은 좌충우돌하며 주먹을 쥐고 덤벼들며, 존재하지도 않은 대칭어를 찾아서 부딪쳐 싸우는 것이다. 무의미한 일이다. 이런 아이들! 그들은 열이 나고, 토하며, 오한에 떨고, 인후염, 백일해, 홍역. 성홍열에 걸린다. 그들은 위기에 빠져들어 포기 상태에 이르러 죽음과 삶의 틈바구니에 걸려 있다. 그러던 어느 날, 모든 것에 대한 새로운 생각을 안고, 무기력하고 무감각하게 드러누워 있는 것이다. 전쟁이 터졌다고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말해준다. 폭탄이 빙판 위로 날기까지는, 그래도 몇 해 겨울 동안 크로이츠 산기슭의 연못에서 스케이트를 탈 수가 있었다. 한가운데 있는, 섬세한 유리알 같은 빙판은 소녀들 몫으로 마련되어 있었다. 소녀들은 종처럼 퍼진 스커트를 입고 그 안에서 안쪽으로, 바깥쪽으로 활모양을 긋거나 8자를 그렸다. 그 주위를 에워싼 코스는 스피드 주자의 몫이었다. 난방이 되어 있는 방 안에서 좀 나이든 사내 아이들은, 나이든 소녀들에게 스케이트 구두를 신겨주며, 귀가리개로 앙상한 다리를 덮고 있는, 백조의 모가지 같은 가죽을 스치는 것이다. 나사로 조이는 활대를 갖고 있지 않으면, 자랑스럽게 뻐길 수가 없다. 그래서 이 아이들처럼 가죽끈이 달린 나막신으로 된 스케이트 구두밖에 가지지 못한 사람은, 눈이 불어 쌓인 연못 구석으로 밀리거나 구경꾼이 되는 것이다. 저녁이 되어 남녀 스케이트 무리들이 스케이트 구두에서 미끄러져 빠져나와, 그것을 어깨에 걸치고 작별 인사를 하며 나무로 된 관람석으로 올라갈때면, 모든 얼굴들이 갓 떠오른 달처럼 생기 있게 어스름한 빛 속에서 빛날 때면, 눈받이 파라솔 밑에는 등불이 켜지기 시작한다. 확성기가 울리기 시작하고, 이 도시에서 소문난 열여섯 살짜리 남녀 쌍둥이가 나무 계단에서 내려온다. 소년은 흰 스웨터에 푸른 바지, 소녀는 살색의 트리코트 바지 위에 푸른 옷으로 벗다시피 가리우고. 그들은 침착하게 서곡이 울리기를 기다린다. 마침내 그들은 끝에서 두 번째 계단으로부터 -- 소녀는 날개치는 듯한 모습으로, 소년은 멋지게 헤엄을 치는 듯한 도약으로 -- 얼음판 위로 뛰어내려, 두세 번의 깊고 힘찬 동작으로 중앙에까지 이른다. 그곳에서 소녀는 최초의 피겨를 그리기 시작한다. 그때 소년은 등불로 된 둥근 테를 소녀를 향해 떠받치고 있고, 축음기의 바늘이 음반을 긁어대며 쥐어뜯는 듯한 음악을 울리는 동안, 소녀는 안개에 싸인 듯 몽롱한 모습으로 그 둥근 테 사이를 뛰어넘는다. 노신사들은 허옇게 센 눈썹 밑으로 눈을 둥그렇게 뜨고, 양발에 누더기를 감은 채 눈삽을 들고 연못 둘레의 장거리용 코스를 쓸고 있던 사나이는 삽자루에 턱을 고이고 소녀의 발자취를 쫓는다. 그 발자국이 마치 구원으로 인도하는 것인 양. 아이들은 다시 한 번 놀라운 경험에 빠진다. -- 이듬해의 크리스마스 트리는 그야말로 하늘로부터 떨어져 온 것이다. 불꽃을 튕기면서. 아이들에게 기대하지도 않게 닥쳐온 선물은 한결 더 많아진 자유로운 시간이었다. 그들은 사이렌이 울리면 공책을 팽개친 채 방공호로 들어가도 무방하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서 부상자를 위해 과자를 아낀다든가, 군인 아저씨를 위해, 육군, 공군, 해군 아저씨를 위해 양말을 짠다든가, 나무 껍질로 바구니를 엮어도 좋은 것이다. 또 땅밑이나 물 속에 잠들어 있는 병사들을 작문 속에서 추도한다. 그리고 좀더 지나 그들은, 이미 어느 틈엔가 묘지에 경의를 표하게 된 비행장과 묘지를 연결하는 교통호를 파도 무방하다. 그들은 라틴어를 잊어버리고 하늘에서 울리는 엔진의 소음을 분간하는 방법을 배워도 무방하다. 그들은 지금까지처럼 그렇게 자주 몸을 씻을 수 없다. 그들의 손톱에 신경을 쓰는 이는 아무도 없다. 새 것이 아예 없기 때문에, 아이들은 헌 줄넘기 줄을 손질한다. 그리고 시한 폭탄과 쟁반 모양의 폭탄 이야기를 신이 나서 주고받는다. 폭격 맞은 폐허 속에서 아이들은 '도둑놈을 행진시켜라'라는 놀이를 하고 논다. 그러면서도 때로는 그 자리에 웅크리고 앉아, 멍한 눈망울로 앞을 보며, 누구인가 "얘들아!" 라고 불러도 이제는 들은 척도 않는다. 천국과 지옥 놀이를 위한 깨진 기와 조각도 얼마든지 있지만, 아이들은 벌벌 떨고 있을 따름이다. 흠뻑 젖어 꽁꽁 언 모습으로. 아이들은 죽어간다. 그리고 아이들은 7년 전쟁과 30년 전쟁의 연대를 배운다. 설사 모든 적대관계를 뒤섞어 그 동기와 원인을 뒤바꾸어 놓는다 해도, 아이들에게는 똑같았으리라. 그것들을 정확하게 구별해야만 역사시간에 점수를 잘 받을 수 있었던 원인과 동기를 말이다. 아이들은 개 알리와, 또 알리의 주인을 장사지냈다. 암시의 시기는 지났다. 어른들은 아이들 앞에서 목을 꺾는 총살형과 교수형, 숙청과 폭격에 대해 드러내놓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듣지도 보지도 못한 일을, 그들은 냄새맡는다. 성 류프레히트의 사자들을 냄새맡듯이. 그것은 '단조 로망스'를 보기 위해 아이들이 몰래 갔었던 영화관이 무너져서 파낼 수 없었던 시체들이었다. 청소년들은 구경이 허용되어 있지 않았는데도 그때 그들은 갔었다. 그리고 2,3일 후에는 그 대량의 죽음과 살육을 보러 갔고, 그 다음에는 매일처럼 갔었다. 집에는 이미 등불이 없다. 창유리도 없다. 경첩에 달려 있는 문은 한 짝도 없다. 움직이는 사람도, 몸을 일으키는 사람도 없다. 글란 강은 위로도 아래로도 흐르지 않는다. 이 작은 강은 멈추어 서 있다. 그리고 치글른 성도 서 있기는 하되 위용을 자랑하지는 않는다. 노이엔 광장에 서 있는 성 게오르크는 몽둥이를 들고 있기는 하지만 용을 때려죽일 기세는 아니다. 그 옆에 서 있는 여왕도 자랑스러운 위엄을 잃고 있다. 오오, 도시여, 온갖 뿌리를 내리고 있는 쥐똥나무 같은 도시여. 집에는 등불 하나, 빵 한 조각 없다. 아이들에게 일러지는 말은 오로지 -- 조용히 해라. 어떤 일이 있어도 조용히 해라, 뿐이다. 이 성벽들 가운데, 환상 도로 사이에, 아직도 남아 있는 벽은 얼마나 되는가? 기적의 새여, 그대는 아직도 살아 있는가? 그 새는 7년 동안 침묵을 계속하고 있었다. 이제 그 7년이 지났다. 너, 나의 장소, 너, 장소 아닌 장소여, 구름 위에, 카르스트(알프스 산맥의 석회암으로 된 고원) 아래, 밤 아래, 낮 위에 있는 나의 도시, 나의 강물이여. 그리고 나, 너의 파도 -- 너, 나의 어스여. 비크트링 환상가, 성 화이트 환상가를 지닌 도시여... 모든 환상가는 위대한 별의 궤도처럼 마땅히 그런 이름으로 불리워야 한다. 별의 궤도라 할지라도, 아이들에게 그 환상도로보다 더 위대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또 모든 좁은 거리들, 부르크 가, 게트라이데 가, 그렇다, 그런 이름이었다. 파라다이스 가. 광장도 잊을 수 없다. 호이 광장과 하일리게 가이스트 광장. -- 이렇듯 이 광장에서는 모든 것의 이름이 한꺼번에 불리워지고 있었다. 모든 광장의 이름이 불리워지고 있었다. 파도와 어스 가. 그리고 어느 날, 이미 아이들에게 성적표를 건네줄 사람은 아무도 없게 되었다. 이제 아이들은 떠나도 좋은 것이다. 그들은 인생에 발을 들여놓도록 재촉을 받는다. 봄은 광란하는 맑은 시냇물과 함께 내려와, 한 가닥 풀줄기를 낳는다. 이제 아이들을 향해서 평화가 왔구나, 라고 이야기해 줄 필요는 없다. 그들은 떠난다. 너덜너덜 풀어진 주머니에 양손을 찔러넣고, 그들 자신에게 경고가 될 휘파람을 불면서. 그 시대, 그 장소에 아이들의 틈바구니에 내가 한몫 끼어 있었고, 새로운 광장을 만들어낸 것이 우리였기 때문에, 그는 지금 헨젤 가를 포기하고 떠난다. 크로이츠 산의 전망도 함께. 그러면서 모든 가문비나무와 어치(까마귀과의 새), 그리고 수다스러운 잎새들을 증인으로 삼는다. 그리고 가게 주인이 빈 탄산수 병 값으로 1그로센을 쳐주지도 않고, 나를 위해 레몬수를 부어주지도 않는다는 의식이 들었기 때문에, 나는 두르크라스 가의 거리를 타인들에게 양도하고, 그 거리에 눈길도 주지 않고 지나치며 외투깃을 세운다. 그렇게 나는 아무도 나의 혈통을 알아채는 이 없는 한낱 스쳐가는 나그네로서 마을 밖의 묘지로 빠져나가는 것이다. 시가지가 끝나는 곳. 웅덩이가 있는 곳. 조약돌의 잔재가 가득 찬, 모래 걸르는 체가 놓여 있고, 발밑에서 모래의 사박거림이 멈추는 곳. 그곳에서 우리는 잠시 주저앉아 얼굴을 양손으로 감싸도 좋으리라. 그때 우리는, 모든 것이 과거에는 과거대로, 현재에는 현재대로, 있는 그대로 존재한다는 것을 깨닫고, 모든 것에 대해 근원을 추구하기를 포기하게 되리라. 왜냐하면 너를 감동시키는 막대기 하나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무런 변화도 없기 때문이다. 보리수와 라일락 수풀은...? 아무래도 너의 가슴에 와닿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어릴 때의 비탈도, 복구된 집도. 그리고 치글룬 성의 탑도, 갇혀 있는 두 마리 곰도, 연못도, 장미도, 노란 등꽃 가득 핀 정원도. 이 모든 것이 가슴에 와닿지는 않는다. 길을 떠나기 전에, 모든 출발에 앞서서, 아무런 감동 없는 이 회상 속에서 우리의 마음속에 떠오르는 것이 무엇인가? 우리에게 한 가닥 깨우침의 빛을 가져다 주는 최소한의 것이 거기에 있는 것이다. 청춘도, 청춘의 무대가 된 도시도 거기에 속해 있지는 않다. 오로지 극장 앞의 한 그루 나무가 기적을 보여줄 때, 횃불이 타오를 때에야, 비로소 나는 마치 바다 속의 물처럼 모든 것이 고르게 뒤섞이는 것을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 어린 시절의 몽매함과 극도의 정열 속에 싸인 구름의 비행이 뒤섞이는 것을. 노이엔 광장과 그곳에 서 있는 바보 같은 기념비가 유토피아를 향하는 눈길에 뒤섞이는 것을. 그 옛날의 사이렌 소리와 고층 건물에서 나는 엘리베이터의 소음이, 그리고 말라빠진 잼 빵과 대서양의 바닷가에서 내가 깨물었던 자갈의 맛이 뒤섞이는 것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