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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최초침례교회
– 구(舊)강경침례교회(향토유적 제38호 2009.10)
이곳은 지금부터 125년전 1896년 2월 9일 에드워드 클레이톤 폴링(Edward Clayton Pauling), 메이블 발렌타인 홀(Mabel Valentine Hall)선교사 부부, 아만다 가데린(Amanda Gardeline) 선교사 그리고 지병석과 그의 부인 천성녀가 예배 드린 최초 강경침례교회 예배지이며, 침례교단의 시작점이 되는 아주 중요한 곳이다(현재 133개 지방회, 3,548여 교회, 80만 명의 성도로 성장 / 유아세례를 거부하고 개인적 신앙고백에 의한 믿는 자에게 베푸는 침례를 강조하는 부분과 의식의 방법에서 침수례가 두드러지게 강조). 이곳에서 최초로 예배를 드리고, 교회를 세울 수 있었던 것은 미국 보스턴 클라랜돈 스트리트 침례교회(Clarendon Street Baptist Church in Boston)를 출석하는 사무엘 씽(Samuel B. Thing)집사의 헌신에서 비롯되었다. 씽 집사는 사업에 성공한 사람이었고, 슬하에 외동딸 엘라 씽(Ella Thing)이 있었다. 그녀는 일찍이 주님을 영접했으나 애석하게도 오래 살지 못하고 주님 곁으로 갔다. 그녀는 죽기 전에 아버지인 씽 집사에게 자신에게 상속될 유산을 자신이 생전에 소원하던 주님의 복음 사업을 위해 사용할 수 있도록 요청하였다. 이에 씽 집사는 이 문제를 당시 담임목사였던 고든(Adoniram Judson Gordon) 목사와 의논하여 엘라 씽에게 상속될 유산을 보스톤 선교사 훈련학교(Boston Missionary School)를 통하여 선교사업에 사용하도록 결정하게 된다. 그리고 1985년 고든 목사와 씽 집사는 그의 딸의 이름을 따서 엘라 씽 기념선교회(The Ella Thing Memorial Mission)를 조직하였고, 보스톤 선교사 훈련학교 출신의 선교사를 해외로 보낼 수 있게 했다. 이에 보스톤 선교사 훈련학교 출신인 에드워드 폴링 부부와 가데린 선교사를 제1진 선교사로 한국에 파송하기로 결정하게 된다. 이들이 한국에 와서 인천과 경성 그리고 강경을 배 타고 오가며 포목장사를 하던 지병석씨를 만나서 전도하게 되었고, 그에게 서울에서 침례를 베풀어 한국 최초 침례교인이 되게 하였다. 이에 폴링선교사 일행은 지병석 성도와 함께 그가 살고 있는 강경으로 내려와 북옥동 지병석씨의 가정집을 예배 터전으로 삼아 강경침례교회가 설립되어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1895년 가을 강경을 처음 방문한 폴링은 지병석에게 임시 선교 거점으로 사용할 부지와 주택의 매입을 부탁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에 따라 지병석은 1896년 2월 이전 옥녀봉 왼쪽의 일부 부지를 매입하는 한편 그 안에 주택을 마련했던 것 같다. 폴링은 옥녀봉 임시 선교 사택 지근거리에 자신의 집을 짓고 살았는데 후에 이 집은 스테드맨이 강경침례교회의 예배방(ㄱ자형교회)으로 개조하여 사용하였다.
에드워드 클레이튼 폴링(Edward Clayton Pauling)은 1894년 4월 보스톤 클라랜돈 스트리트 침례교회에서 펜윅과 목사 안수를 고든 목사로부터 받는다. 1894년 5월 엘라씽 기념선교회 선교를 시작하여 1895년에서 1899년 약 5년 동안 선교를 하는 동안 강경에서 한국침례교회를 창립하고, 3개 선교지를 설립하게 된다. 1898년 북옥동 136번지에 초가 ㄱ자 한옥을 지어 사택으로 사용한다. 1899년 12월 25일 개인 사정으로 미국에 영구 귀국하여 1960년 향년 96세로 별세하게 된다. 1895년 12월 21일 출생한 큰 아들이 1899년 1월 11일에 사망하여 양화진 묘지 A묘역 58번에 안장 되었다.
스테드맨 선교사(Fredrisk W. Stead man) : 폴링이 철수 후 1896년 4월경 2차로 한국에 들어와 공주에서 선교 활동을 하던 스테드맨이 자신의 근거지를 강경으로 옮기던 1900년 초의 선교지 상황은 기존 신자들의 감소로 어려움이 예상 되고 있었다. 아마 1899년 하반기 폴링의 철수 논의를 전후로 기존 신자들의 일부 이탈이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그해 스테드맨은 모두 12명의 침례 교인을 얻는 기쁨을 맛볼 수 있다. 1900년 스테드맨 선교사는 폴링 선교사가 매입한 옥녀봉 스테이션 부지 위에 두 동의 건물을 더 지었다고 한다. 아마 자신의 집과 엑클스(Salie Ackles)의 집이었을 것이다. 당시 옥녀봉에는 임시 선교 거점이었던 최초의 사택과 예배당(폴링이 거주하는 집으로 1898년에 신축하였고, 스테드맨이 1900년 경 약간 개조하여 강경침례교회 ㄱ자 예배당으로 사용한 곳) 등 모두 4채의 건물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1900년부터 엘라 씽 기념 선교회는 재정난으로 선교 후원을 중단하게 되고 스테드맨 선교사가 귀국한다. 아마도 엘라씽기념선교회의 후원자 사무엘 씽 집사의 사망(1900년)으로 인해 재정 지원 중단이 없었더라면 스테드맨과 엑클스의 한국 선교는 조금 더 진행되었을 것이다. 그 이유는 1900년 스테드맨이 강경으로 옮겨 사역하면서부터 선교의 결실이 맺어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스테드맨은 원산에서 선교활동을 하고 있는 펜윅에게 강경·칠산·공주의 재산권까지 위임하고 엘라 씽 선교회는 철수하게 된다. 스테드맨 선교사는 강경으로와 1899년 여름 최초의 침례식을 금강변에서 군산에 있는 남장로교 부위렴(Bull William) 선교사를 초청하여 거행한다(당시 스테드맨 선교사는 목사 안수를 받지 못해 침례식을 집례할 수 없었다). 이 때 침례 받은 사람이 홍봉춘, 장교환, 김치화, 고래수, 김도정, 최춘명씨 등이다. 이들이 한국 최초 뱁티스트(baptist)들로 한국 땅에 침례교회 뿌리를 내리게 한 분들이다. 엑클스는 스테드맨 부부와 함께 활동하다가 1901년 4월 동반 귀국하였던 것 같다. 스테드맨이 떠난지 약 3개월 후인 1901년 7월 무렵 금강 변에는 강경교회와 칠산교회 두 개의 회당이 있었는데 두 곳을 합쳐 교인 수는 40-50명이었다. 그들은 주일마다 30리 길을 배를 타고 오가며 번갈아 함께 예배를 드렸다. 비록 스테드맨은 떠났지만 그 사이 강경과 칠산공동체의 구성원 수는 다시 늘어나 그 규모가 더욱 커졌다.
펜윅(Malcolm C. Fenwick 1863-1935 한국명 편위익) 선교사 : 1889년 8월 26세에 한국으로 떠나 12월 8일 한국에 도착하여 약 4년의 기간을 통해서 한국의 문화와 언어를 체득하는 데 전력을 하였다. 그는 비록 토론토대학교 기독청년회(University YMCA of Toronto)와 밀접한 관계가 있었지만, 토론토대학교 YMCA가 공식으로 파송한 선교사는 아니었다. 그는 어떠한 교단의 배경이나 조직화된 도움을 받지 않은 독립 선교사(Independent missionary)로 한국에 왔다. 펜윅은 한국에 도착하여 서울과 황해도 소래(솔내)에서 잠시 지낸 후에 함경도 원산에 정착하였다. 그곳을 한국 선교사업의 거점으로 삼게 되는데 이유는 당시 그 지역은 어떠한 외국 선교단체들도 선교활동을 하고 있지 않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펜윅은 꽤 넓은 땅을 사서 그곳에 집을 짓고 농장을 세웠다고 한다. 후에 대한기독교회의 본부가 있는 도시가 되었다고 한다. 1893년 펜윅은 목사 안수를 받는 것과 선교자금 확보를 위해 캐나다로 돌아가게 된다. 1893년에서 1896년 봄까지 3년간 캐나다와 미국에 머물던 펜윅은 당시 전세계에서 선교에 가장 앞선 보스턴 클라랜돈 스트리트 침례교회 담임목사인 고든박사와 피어슨 목사로부터 1894년 폴링선교사와 함께 목사 안수를 받고, 한국순회선교회를 조직하였으며 한국선교의 필요성을 주위의 사람들에게 알리는 활동을 하였다. 1896년 4월에 재내한하여 자신이 전도한 신자들과 함께 순회 선교를 통하여 한국, 만주, 시베리아 등지에 교회들을 개척하기 시작하였다. 펜윅은 한국인과 접촉하고 거기서 얻게 된 경험을 통하여 한국인과 한국이라는 풍토에 대하여 남달리 예민한 관찰과 인식을 갖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인식과 경험에서 얻어진 확신은 그에게 한국 선교의 토착적 원리와 방법의 기틀을 제공하여였을 뿐만 아니라 결정적인 작용을 한 것으로 보여진다.
1901년 엘라씽기념선교회의 인적·물적 자원을 인수받은 원산의 펜윅은 1902년까지 세 차례에 걸쳐 강경과 칠산 그리고 공주를 방문하여 자신의 선교 계획을 구체화시켰다. 이때 펜윅이 투입한 한국인 사역자는 신명균이었다. 1901년 4월을 전후로 원산에서 펜윅과 운명적인 만남을 가진 신명균은 펜윅의 강경·공주 방문에 동행하여 현지 사정을 숙지한 후 일정한 준비 기간을 거쳐 1903년부터 본격적인 활동에 나섰다. 신명균은 공주에 머물면서 강경과 칠산교회를 순회 사역을 했던 것으로 짐작이 된다. 그 후 2년 동안 신명균은 스테드맨이 조직한 23개의 학습반을 바탕으로 12개의 교회를 세웠다. 그리고 1906년 그 숫자는 31개로 늘어났다.
신명균의 놀라운 사역의 결과에 고무된 펜윅은 좀 더 효율적인 한국인 선교사역을 위하여 교단적인 조직의 필요를 느껴 1905년 8월 15일 교단설립을 목적으로 신명균 목사에게 교규 초안을 구상토록하고 1년 이상 계획 연구하여 1906년 10월 6일 강경침례교회에서 역사적인 최초 침례교단 총회에 해당하는 대화회(Conclave)를 창립하였다. 이 총회에서 펜윅을 초대 총회장격인 감목(Director)으로 선출하고 교규 14장 46조로 정하여 교단 명칭을 대한기독교회(the Church of Christ in Coreaea)라 칭하니 한국기독교 역사에 등장한 후 현 기독교 한국침례회 총회인 교단 출발점이었다. 이후 교세를 확장하고, 1919년 신약성서를 번역하고, 복음찬미(1899년 14장, 1911년 25장, 1921년 78장, 1926년 150장, 1933년 256장)를 만들었다. 1925년 러시아, 중국 등 순회 전도를 하였고, 1935년 12월 6일 원산 자택에서 72세를 일기로 별세하셨다. 1889년 12월 8일 26세에 한국에 선교사로 와 45년 동안 한국기독교 침례교회의 초석을 놓아 주고, 일생을 헌신하였다.
이곳 옥녀봉 성지는 정상 일대 약 4,732평의 대지 위에 1943년까지 강경침례교회가 위치하고 있었으나 1939년 9월 12일에 주변 토지와 1943년 5월 14일에 교회 토지를 일제 치하에서 기독교 말살 정책 하에 동방 요배 신사참배 반대 등 항일 항거한다는 이유로 핍박의 대상이 되었다. 즉 일제는 중일전쟁 이후 신사참배를 강요하기 시작했는데, 강경교회 역시 이러한 시대적 흐름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강경의 신사가 처음 세워진 것은 1908년으로 이곳에 살던 일본인들에 의해 옥녀봉 중앙에 먼저 재사(齋祠)가 건설되었다. 그 후 강경신사는 1917년 공식 창립되었고, 1919년에는 장인을 초빙하여 어신전(御神殿)을 건립하였다. 이어서 1922년에는 독지가의 기부로 배전(拜殿 : 참배단)이 신축 되었고, 또 사무소도 정비 되었다. 그리고 1932년 어제기고(御祭器庫)가 지어진데 이어 1936년에는 읍공진사(邑供進社 : 지역 거점 신사)로 지정되었다. 처음에 옥녀봉 강경침례교회 오른쪽에 조그맣게 시작된 신사가 계속에서 확장되어 갔다. 급기야 신사참배가 강요되기 시작한 1930년대 후반 강경신사는 어조영(御造營)의 계획을 수립 하게 된다. 1919년에 지어진 신전이 작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신사참배 관계로 옥녀봉에 있던 신사의 중요성이 커지고 이제 큰 규모의 신축 공사가 계획되면서 신사 바로 옆의 강경침례교회 소유재산이 문제가 되기 시작했다. 폴링에 의해 조성된 옥녀봉 강경스테이션 구내의 면적은 모두 15,616㎡(4,732평)에 달한다. 옥녀봉 전체크기 15,000여 평의 1/3의 규모이다. 스테드맨 강경을 떠나면서 이 재산을 인수한 펜윅은 일제의 제정된 토지조사법(1910년 8월)에 따라 1912년 10월 1일 토지대장에 자신을 토지소유자로 하여 4,732평을 등재시켰다. 펜윅은 1935년 사망하면서 유서(1929년 작성)를 남겼는데, 원산·공주·칠산(갈밭)과 아울러 강경의 재산을 팔아 전도자들을 위해 사용할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위임받은 위원들(안대벽·김재형·전치규)은 대부분 그대로 실행하였으나 강경(봉화채)의 재산은 처분하지 못했다. 아마 신사 인접 재산이라 매매가 곤란했을 것이다. 일제는 1939년 9월 강경침례교회 재산 중 먼저 135번지(3,237평)의 일부(399평, 후에 135-1로 지번 분할)와 139번지(800평)의 일부(182평, 후에 139-1로 지번 분할)를 매매 등의 방법을 통해 강경신사부지로 편입시켰다. 지적도를 보면 이 두 곳은 강경침례교회 소유 재산 가운데 신사와 가장 인접해 있는 부분임을 알 수 있다. 강경신사를 위해 그렇게 하는 것이다. 이 때 139-1번지는 매매를 통해 소유권 이전이 이루어진 것이 확실하지만, 135-1번지는 확인이 불가능하다. 139-1번지의 당시 지가는 50원 96전이었다. 이 토지의 매매계약은 1939년 9월 8일 체결되었는데, 이때까지 옥녀봉 강경침례교회 모든 재산은 아직 펜윅의 이름으로 등재되어 있었다. 그런데 계약이 체결된 지 나흘 뒤인 9월 12일에 펜윅 소유 옥녀봉 모든 재산의 소유주가 안대벽·김재형·전치규로 보존 등기가 이루어진다. 아마 이 두 토지의 매매에 필요성 때문에 보전 등기를 서들러 진행시켰다는 것으로 보인다.
1915년부터 일제는 한국의 종교단체들에게 총독부에 포교규칙을 제출하라는 명령을 내리지만 대한(동아)기독교회는 교회와 세속 정부와의 분리를 믿었기에 이 명령에 순종하지 않았다. 1938년부터 일본 정부는 한국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신사참배를 강력하게 강요하기 시작하였다. 일본은 신사참배를 통해 일본과 한국을 진정한 의미에서 통일된 하나의 국가로 만들려고 하였던 것이다. 당시 한국의 가장 큰 개신교 교단인 장로교와 감리교는 결국 일본 정부의 정책에 순응하였다. 그러나 동아기독교는 신사참배는 우상숭배라고 주장하고 끝까지 거부하였다. 그러자 일본 정부는 동아기독교를 점점 더 심하게 감시하고 박해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1942년 소위 ‘원산사건’이라고 불리는 사건이 발생되었다.
우태호라는 사람이 원산에 있는 교단의 총부 사무실에 방문하여 교단에서 일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히며 함께 일하자고 요청하였으나 교단의 지도자들은 그에 대해 전혀 아는 바가 없어서 그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리고 안대벽과 강규수는 평소 친분이 있던 일본 경찰에게 우태호에 대한 조사를 의뢰하였으나 도리어 우태호는 일본헌병대에 동아기독교는 위험한 교단이라고 고발하였다. 그는 또한 자신의 친구이며 장로교 목사인 오문환에게 동아기독교의 신약성서와 복음찬미를 주었고, 오문환은 그것들을 불온서적이라고 하면서 일본 총독부에 제출하였다. 이 일로 인하여 일본 헌병대는 원산 총부에 비치되어 있던 6,500권의 성서와 복음찬미, 그리고 교단의 문서들을 압수해 갔다. 특히 복음찬미는 그리스도의 재림과 천년왕국에 대한 내용을 많이 담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은 동아기독교를 불순한 단체로 보게 되었고, 결국 당시 감목인 이종근 목사가 심문을 받게 되었다. 일본 경찰은 1942년 6월 10일 전국에 걸쳐 32명의 교단 지도자들을 체포하여 구금하였다. 특히 강경에서 사역하던 김용해 목사는 그 가운데 가장 먼저 9월 4일 원산구치소에 수감되었고, 강경침례교회 부지 명의자인 김재형, 전치규 목사도 함께 체포되어 원산으로 압송되었다. 이들의 죄명은 치안유지법 위반이었다. 그러나 교단의 재산을 관리하던(펜윅의 토지 등기 명의자) 안대벽은 회유 목적으로 체포하지 않았다. 안대벽은 일제의 강압에 따라 모든 부지를 증여형식으로 기부할 수 밖에 없었다. 일제는 동아기독교의 재산 기부가 완료되자 원산으로 끌려간 지도자들 중에 9명을 제외하고, 김용해 목사를 비롯한 23명은 기소유예로 풀려났다(1943. 5. 15). 하지만 9명의 지도자들은 함흥형무소로 이감되어 폭행과 고문을 당하였다. 이들 가운데 전치규 목사는 1944년 2월 13일 옥중 순교를 한다. 실제로 옥녀봉 강경침례교회의 나머지 재산은 김용해 목사 등이 풀려나기 하루 전에 증여의 형식을 통해 강경신사로 소유권이 이전되었다. 그리고 마침네 일제는 1944년 5월 10일 동아기독교(침례교)에 대하여 교단 해체령을 내렸다. 일제의 국체명징(國體明徵)에 위배되는 불온사상(치안유지 방해죄)을 지닌 교단이라는 함흥재산소의 판결에 따른 것이다. 이미 그 전해에 모든 재산을 일제에 강탈당한 강경침례교회 역시 이 조치에 따라 방화, 소실시켜 폐교하였다.
강경침례교회 최초 예배지는 봉우리 뒤에 있었던 관계로 직접적으로 보이지 않아 그대로 보존될 수 있었다. 침례교 최초 예배를 드린 지병석의 집은 존속하게 되었다. 2009년 논산시는 지병석의 집을 향토유적 38호로 지정하여 2013년에 한국 침례교 최초 예배지(교회)를 복원하였다.
광복후 이 토지를 되찾는 일을 못했고, 현재까지도 지목은 종교부지로 국유지 공원화 되었으나 이곳에는 첫 예배를 드린 지병석씨의 고가가 변형된 상태로 지금도 124년을 버티고 있다.
펜윅선교사 후임으로 이종덕 목사는 침례교단 2대 감목으로 취임하였다. 1904년 20세 때에 독립당에 가담하여 독립운동을 하시다 체포되어 임천 주재소에 감금 되었다. 펜윅선교사와 임천 유지 장기영씨 도움으로 풀려나 1905년 공주교회 내 성서학원에 입학 최초의 신학생이 되었다. 1906년 펜윅선교사로부터 성경학을 배우고 1911년 교사(선교사) 직분을 받고, 1913년 예천구역 총찰직을 받았다. 1914년 12월 원산 대화회에서 1대 펜윅에 이어 2대 감목으로 선출 임명 받아 1915년 일제 명령에 불복 구속 수감되었으나 풀려나 1917년 간도 종성동으로 이사, 1921년 간도 종성동 국자가 교회 내 성경학원(1922년 12월 26일 일제에 의해 강제 폐교)을 설립 원장직을 역임 하였다. 1924년 감목직을 3대 전치규 목사에게 물려 주었다. 1945년 8월 조국광복이 되어 윤석훈, 나상순 집사와 전 성도들의 역사로 홍교리 114번지에 있었던 일본인들의 사찰을 매입 교회당으로 삼고 이종덕 목사를 제4대 담임목사로 추대하게 된다. 1946년 9월 강경침례교회에서 제36회 대화회 총회를 열어 총회장직에 피선 일인 독재 교단정치를 회중정치인 민주주의 체제로 전환하였고, 강경침례교회에 고등성경학원을 설립하고 원장으로 취임했으며, 김용해, 한기춘, 장일수, 이건창 등을 교사로 하여 52명의 젊은 후진을 양성하는 신학교육을 실시하였다. 1947년에는 복음 찬미를 재출간하였고, 1949년 총회에서 동아기독교를 대한기독교침례회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1950년 6.25 동란이 발발 한 후 이종덕 목사는 교회와 교단을 지키며 피난을 하지 않고, 오히려 목사임을 손으로 크게 쓴 명함을 들고 인민 위원회와 내무서 등을 찾아가 신분을 밝히고 전도까지 하였다. 이종덕 목사는 한국전쟁 때 퇴각하는 공산군에게 끌려가 논산천과 강경천 삼각지 강가 갈대밭에서 순교 향연 66세를 일기로 첫 성지교회의 성인이 되었다(순교 현지에 기념비 설립).
현재 강경읍 계백로 167번길 10호에 위치하고 있는 강경침례교회 2007년 9월 3일 침례교 선교역사 기념교회 성전 기공예배를 드렸고, 2009년 10월 완공하여 2010년 4월 10일 성전 봉헌하게 된다. 침례교의 태동과 강경침례교회의 역사를 담아낸 공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