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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를 읽히는 두보시두보서거 1천2백주년 기념연을 앞두고 (1962년)
‘밀턴’의 ‘실락원’과 비교하기도
문학ㆍ사상의 지주로 세계시사 불후의 불꽃
평생을 하루같이 ‘사발농사’로 떠돈 생애
학두-송조 이래 우리나라에 전래
詩史(시사)의 頂上(정상)을 누빈 詩聖(시성) 杜甫(두보)가 損館(손관)한 大歷(대력) 5년(서기 770년) 가을을 거슬러 헤이면 아득한 1천2백년 전의 일이다. 우리나라는 한문자를 공동문자처럼 읽혀온 탓으로 중국에 맞설 만큼 杜甫(두보)의 자취가 짙다. 더구나 全集(전집)의 譯註(역주)인 ‘杜詩(두시)언解(해)’가 國學(국학)의 둘도 없는 곳집인 점으로 미루어 杜甫(두보)의 逝去(서거)를 기념한다는 것은 뜻 없지는 않다.
杜甫(두보)는 그 바탕부터가 문학의 계통이다. 그의 遠祖(원조)는 杜預(두예)는 左傳學(좌전학)의 元祖(원조)이며 그의 祖父(조부) 杜審言(두심언)은 ‘初唐四大(초당사대)’로 꼽히는 詩人(시인)이라 선뜻 “吾祖詩冠古(오조시관고)”를 내세움으로 미루어도 “詩是吾家事(시시오가사)”의 자랑이 꾸민 말이 아니었다. 비록 평생을 하루같이 ‘사발농사’로 떠돌았지만, 그 객관과 주관을 뜻대로 반죽한 空前絶後(공전절후)의 예술성은 제 멋에 감긴 風月(풍월)의 무리와는 同日(동일)하여 논할 수는 없다.
杜甫(두보)의 詩歌(시가)는 基調(기조)부터가 옹골차다. 스스로 “讀書破萬卷(독서파만권) 下筆如有神(하필여유신)”을 내뱉는 거기에는 이미 江河(강하)와 더불어 萬古流(만고류)할 오기를 베고 남았다. 더구나 내 아닌 남이 되어 더불어 웃고 더불어 울되, 보다 나은 사회, 보다 나은 내일을 사랑으로 수놓은 거기에 눈을 앗고 맘을 뺏는 槪(개)가 서렸다. 그 “每飯不忘君(매반불망군)”의 진국은 마침내 그 기립이 세상을 흔드는 바람을 일구었고, 그 가없는 詩材(시재)는 ‘能所不能(능소불능) 無可無不可(무가무불가)’의 대손으로 다듬겨져 戀人(연인)과 動人(동인)을 위해 새삼스럽지 않았다. 그 뜨거운 사랑과 진지한 시름과 넘나는 자랑은 이른바 꿈이 아닌 참을 實寫(실사)한 앙금인 虛實相配(허실상배)로 해서 引力(인력)이 거세다. 게다가 날카로운 비판과 개칠 없는 敍事(서사)와 사무치는 抒情(서정)으로 달궈진 强度(강도)로 해서 詩史(시사)의 일컬음과 詩聖(시성)의 받들음을 탔으니 可謂(가위) 萬有(만유)의 詩宗(시종)이요 天縱(천종)의 情聖(정성)이다.
한편 杜詩(두시)는 核心(핵심)을 비집는 성실이 높깊은 관조를 거쳐서 눈물로 먹을 갈아 沈痛(심통) 속에서 責人(책인)의 사북을 찾고, 내일에 보람을 안기는 마력이 章中(장중)에 넘침이 특색이다. 곧 눈에 드는 대상과 다다르는 현실에 파고들어 인간의 실존과 자연의 웅장을 얼버무려 자연과 인간의 신비를 승화하기에 붓방아를 찧었다. 인간이 인간을 탐구하여 자연에의 수순과 安分(안분)의 고비를 포착하여 詩歌(시가)에 代入(대입)하기에 大成(대성)하였다.
여기에서 인간을 美(미)의 시계에서 眞(진)의 세계로, 善(선)의 세계로 이끄는 매력을 감추었다. 따라서 자연과 인생, 국가와 사회, 생활과 문학의 야릇한 문제를 풀기에 그의 다양한 체험이 모조리 적응되었다. 이 가멸찬 實在(실재)는 喪亂(상란)으로 인한 시달림과 衣食(의식)을 빌어먹기 위한 떠돌이로 품앗이된 반기이니, 가난과 구박과 그리움의 열패다. 그러므로 杜詩(두시)는 시대와 작자가 엉겨져 생생한 언어와 絨巧(융교)한 구성을 통해서 萬象(만상)을 寫實(사실)한 시대문학이며 생활문학이다.
杜甫(두보)는 곰살 맞은 성격에서인지 七言(칠언)보다도 五言(오언)을 즐겨 썼고, 絶句(절구)보다는 律詩(율시)와 古詩(고시)에 솔깃했다. 그것도 치밀한 통찰로 잡은 詩語(시어)의 엄선과, 표현의 정확을 위한 피나는 각고로 그 구성진 침울과 가라앉은 慷慨(강개)를 典雅(전아)와 端麗(단려)의 너울로 갈무린 新體(신체)이며, 고금의 집대성으로 맞물린 溫故崇新(온고숭신)은 祖述(조술)의 거풀을 벗기어 영원한 참신을 만고에 심었다.
특히 安史亂(안사란)으로 발이 묶여 愁恨(수한)에 잠겼던 때의 絶調(절조)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차원을 달리하는 현대에까지 거센 공명을 사는 동시에 멀리 巴蜀(파촉)에 더부살던 晩暮(만모)의 佳篇(가편) 역시 詩神(시신)의 성명을 뿌리박았으니 杜詩(두시)는 言外(언외)의 맥박과 향기와 음향까지 곁들인 영역을 다진 化城(화성)이다.
이 杜詩(두시)가 어떻게 읽혀왔으며 또한 세계에서 어떻게 읽히고 있는가를 살피어 杜甫(두보)의 逝去(서거) 1천2백년 기념의 뜻을 세우고자 한다.
杜詩(두시)는 生世(생세)에 진작 독보의 大名(대명)을 누렸지만 당시의 選集(선집)에는 들지 못하고 오히려 劇論(극론)의 낙인을 찍는 푸대접을 받아야 했다. 二詩文學(이시문학)을 몰라서가 아니라 야들한 구미와 낮가운 기호에 맞지 않아서였다. 二(이) 자상한 操心(조심)과 따끔한 紀事(기사)를 꺼려서였다. 그러나 杜詩(두시)는 一字(일자)의 加減(가감)을 불허하는 木刊(목간)의 문자도 차마 대치치 못할 萬世(만세)의 法程(법정)이다. 그 아리송과 우람스러움과 다부짐과 거세참이 어렵고 까다로워서 여간해서는 어깨나 비길 뿐 그 아랫목을 바랄 수 없음이 탈이다. 그래서 느꿔 풀은 千家注(천가주)가 나와 李白(이백)과 더불어 學詩者(학시자)의 본이 되었다.
李杜(이두)에 관한 명평을 간추리면 元(원)진의 揚杜斥李(양두척이)를 비롯으로 白居易(백거이)의 效杜(효두), 韓愈(한유)의 並稱(병칭), 歐陽脩(구양수)의 賞李抑杜(상이억두), 楊愼(양신)의 斥杜揚李(척두양이), 朱熹(주희)의 尙杜(상두), 蘇軾(소식)의 賞杜(상두), 黃廷堅(황정견)의 偏杜(편두), 陸游(육유)의 學杜(학두), 王士禎(왕사정)의 慕杜(모두), 乾隆帝(건륭제)의 右杜(우두) 등등 거의 學杜(학두)로 기울어 淸學(청학)의 산물인 注杜書(주두서)가 쏟아져 나왔던 것이다.
杜甫(두보)의 詩集(시집)은 워낙 60권이 있었다 하나 不傳(불전)이고 그 知己(지기)인 반晃(황)의
‘杜工部小集(두공부소집)’이 그 비롯이었다. 그러나 이 小集(소집)도 인멸되었고 北宋(북송)의 王洙(왕수)가 古詩(고시)와 近體別(근체별)로 編註(편주)한 ‘杜工部集(두공부집)’ (1039年刊(연간))이 最古本(최고본)이다.
이 宋板(송판) 杜工部集(두공부집)은 詩(시) 18권 文(문) 2권 共(공) 20권으로 이래 杜甫詩集(두보시집)의 定本(정본)이 되었으며, 한편 分門別(분문별)로 編註(편주)한 ‘纂註分類杜詩(찬주분류두시)’(1200年刊(년간)) 25권과, 蔡夢弼(채몽필)이 作詩年別(작시년별)로 編註(편주)한 ‘杜工部草堂詩集(두공부초당시집)’(1204年刊(년간)) 40권과 萬鴻補註(만홍보주)의 ‘杜工部詩史補遺(두공부시사보유)’ 10권 등의 三種(삼종)이 累板(누판)을 보았으며, 이 밖에 吳若(오약)의 ‘杜工部集(두공부집)’, 孫僅(손근)의 ‘杜工部詩集(두공부시집)’, 郭知達(곽지달)의 ‘九家集註杜工部詩(구가집주두공부시)’, 徐居仁(서거인)의 ‘集千家注分類杜工部詩(집천가주분류두공부시)’, 劉辰翁(유진옹)의 ‘集千家注杜工部詩(집천가주두공부시)’ 등이 있다.
그러나, 杜詩(두시)는 元明(원명)은 前朝(전조)의 답습에 不外(불외)하였고, 淸朝(청조)에 내려와 考證學(고증학)의 蔚興(울흥)으로 비로소 크게 정리되었다. 저 錢謙益(전겸익)의 ‘杜工部集箋注(두공부집전주)’(1667)를 비롯하여 朱鶴齡(주학령)의 ‘杜工部集輯註(두공부집집주)’(1670), 仇兆煞(구조살)의 ‘杜詩詳註(두시상주)’(1703), 楊倫(양륜)의 ‘杜詩鏡銓(두시경전)’(1872) 등이 註解本(주해본)의 白眉(백미)이며, 批解本(비해본)으로는 王嗣奭(왕사석)의 ‘杜聰(두총)’(1645)을 위두로 金聖嘆(김성탄)의 ‘杜詩批解(두시비해)’(1659), 吳見思(오견사)의 ‘杜詩(두시)’(1672) 浦起龍(포기용)의 ‘讀杜心解(독두심해)’(1724), 沈德潜(심덕잠)의 ‘杜詩偶評(두시우평)’(1752) 등이 屈指(굴지)의 專書(전서)이며, 最近(최근) 발견된 施鴻保(시홍보)의 ‘讀杜詩說(독두시설)’(1870)은 仇註(구주)를 主(주)로 前人(전인)의 杜撰(두찬)을 발륜 考異(고이)이며, 이 밖에 趙註杜律(조주두율)(五言(오언))과 虞註杜律(우주두율)(七言(칠언))이 多讀(다독)되었고, 顧(고)신의 ‘杜詩註解(두시주해)’ 등이 紙價(지가)를 올린 快著(쾌저)다.
반면에 宋朝(송조)이래의 讀杜風潮(독두풍조)는 우리나라에도 이낭 傳來(전래)되었지만 高麗朝(고려조) 金富軾(김부식)이 蘇軾(소식)을 크게 숭상한 것이 흐름이 되어 慕蘇(모소)의 기풍이 휩쓸었다. 그리고 李奎報(이규보)의 영향으로 李白(이백)도 드세어졌다.
그렇다고 杜學(두학)이 전혀 무색했던 것은 아니다. 특히 元明(원명)의 文風(문풍)에 젖은 李齊賢(이제현)과 李穡(이색)의 출현으로 學杜(학두)의 바람이 일었고, 李王朝(이왕조)에 접어들자 중국의 右杜風(우두풍)과, 崇儒政策(숭유정책)의 각광을 받아 讀杜(독두)의 경향이 짙어졌다. 따라서 杜詩(두시)에 토를 단 ‘橫殺門(횡살문)’이 노래로 불리는가 하면 杜詩集(두시집)의 刊行(간행)도 잦아 ‘杜工部草堂詩箋(두공부초당시전)’과 ‘杜工部詩史補遺(두공부시사보유)’의 覆刻(복각)이 나왔고, ‘箋註分類杜詩(전주분류두시)’는 무려 五種(오종)의 印本(인본)을 내는 한편 그 全註譯本(전주역본)인 ‘杜詩諺解(두시언해)’(1481) 25권을 印出(인출)했다. 이는 당시 문단의 여력을 中外(중외)에 과시한 譯註書(역주서)로 學杜(학두)는 물론 詩學啓發(시학계발)에 큰 파문을 던져 2백년래의 慕蘇風(모소풍)을 가시는 빌미가 되었던 것이다. 이 새로운 기세는 드디어 ‘虞註杜律(우주두율)’ 등의 板(판)을 거듭하게 하였으며, 기타 劉辰翁批點本(유진옹비점본)과 單復(단복)의 ‘讀杜詩愚得(독두시우득)’(1501) 등의 印行(인행)으로 學杜熱(학두열)은 바야흐로 절정에 다다라 드디어는 宣祖朝(선조조)의 開花(개화)를 자아내는 밑바대를 굳혔던 것이다.
본시 宋學(송학)에 기울은 李王朝(이왕조)에 있어서 右杜(우두)는 당연한 귀착이었다. 따라서 各人(각인)의 詩文集(시문집)에는 杜詩(두시)의 摘句(적구)가 지천이고, 저마다 和韻(화운)하여 손속을 내기에 애도 무진 썼다. 그 중에서도 徐居正(서거정)과 金宗直(김종직)이 出衆(출중)하고, 朴(박)은 李滉(이황) 鄭澈(정철) 權(권)율의 傾杜(경두) 또한 一鶴(일학)이었다. 그러나 壬辰亂(임진란)의 島有(도유)와 丙子亂(병자란)의 유린은 詩壇(시단)의 위축을 가져와 희미하다가 李植(이식)의 ‘纂註杜詩澤風堂批解(찬주두시택풍당비해)’(1640) 26권의 專著(전저)가 나왔고, 兩亂(양란)으로 말미암은 갑작스런 수요에 따라 ‘杜詩諺解(두시언해)’의 重刻本(중각본)(1632)이 간행되었고, 이를 전후하여 柳夢寅(유몽인) 尹善道(윤선도) 金昌翕(김창흡) 丁若鏞(정약용)의 대손이 나왔다. 또한 詩文學中興(시문학중흥)의 指道(지도)인 正祖(정조)의 ‘由陸入杜(유륙입두)’의 제창은 南宋(남송)의 陸游(육유)를 거쳐서 杜甫(두보)에로 들자는 詩程(시정)의 가르침이다. 그 바람에 ‘杜陸千選(두육천선)’과 ‘杜律分韻(두율분운)’의 대대적인 印出(인출)을 보았다. 이는 科詩(과시)를 익히기 위해 袖珍本(수진본)까지 나온 ‘虞註杜律(우주두율)’과 함께 杜詩(두시)로서 가장 많은 板種(판종)을 남겼다.
한편 淸學(청학)의 東漸(동점)으로 일은 實學思想(실학사상)의 뒷받침은 ‘李杜韓蘇(이두한소)’에서 學杜(학두)를 우선하게 익혀 後四家(후사가)의 奇怪崇新(기괴숭신)과 申緯(신위)의 ‘由蘇入杜(유소입두)’를 부르짖게 했다. 그러나 國步(국보)의 어수선은 蘇軾(소식)보다는 王士禎(왕사정)에 팔렸고, 李白(이백)에 기웃하여 韓末(한말)의 掉尾(도미)를 장식했다.
이상으로 미루건대 우리의 讀杜史(독두사)는 申緯(신위)가 지적한대는 “天下幾人學杜甫(천하기인학두보) 家家戶祝最東方(가가호축최동방)”의 풍성이었으나 그 功課(공과)에 비겨 수확은 푸짐치 못함이 사실이다.
다음 日本(일본)에서는 예부터 杜甫(두보)보다는 白居易(백거이)를 즐겨 읽었다. 그는 ‘源氏物語(원씨물어)’를 비롯한 墳典(분전)이 가리는 바다. 그러나 德川幕府(덕천막부)이래의 漢學中興(한학중흥)은 津坂東陽(진판동양)의 ‘杜詩集解(두시집해)’(1685) <抄解(초해)>가 판을 쳤고, 松尾芭蕉(송미파초)의 賞杜(상두)로 한 빛을 받았다. 그 뒤 ‘杜詩偶評(두시우평)’의 飜印(번인) 등이 杜學(두학)의 명맥을 잇다가 이른바 明治維新(명치유신)으로 말미암아 本軌(본궤)에 올랐다. 森槐南(삼괴남)의 ‘杜詩講義(두시강의)’, 德富猪一郎(덕부저일랑)의 ‘杜甫(두보)와 彌耳敦(미이돈)’ 등의 專著(전저)가 나왔다.
그러나 杜詩(두시)보다는 대개 ‘唐詩選(당시선)’으로 기울었고, 실은 仇註(구주)를 번역한 鈴木虎雄(영목호웅)의 ‘杜少陸集(두소육집)’(1931)의 刊行(간행)으로 해서 正道(정도)에 올랐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뒤 中國學(중국학)의 勃興(발흥)에 이받아 吉川幸次節(길천행차절)의 ‘杜甫私記(두보사기)’와 ‘杜甫(두보)노트’가 알뜰하고 最近版(최근판)의 ‘杜甫(두보)’는 日本讚杜史上(일본찬두사상) 決定版(결정판)이다. 그 밖에 英文學者(영문학자) 齊蔚勇(제울용)의 ‘杜甫(두보)’는 밀튼의 ‘失樂園(실락원)’과의 對比(대비)이며, 哲學者(철학자) 吉川利一(길천리일)의 ‘杜甫(두보)의 遺産(유산)’은 야스퍼스의 實存的(실존적) 探究(탐구)를 꾀한 快著(쾌저)다. 또한 黑川洋一(흑천양일)의 ‘杜甫(두보)’, 目加田誠(목가전성)의 ‘杜甫(두보)’, 土岐善(토기선)마의 ‘新譯杜甫詩選(신역두보시선)’과 ‘杜甫草堂記(두보초당기)’ 등이 있다. 그리고 지난 1962년 杜甫生誕(두보생탄) 1천2백5십주년 기념회가 열려 기념강연 및 古杜詩書展觀會(고두시서전관회)까지 차렸다. 따라서 이번 逝去(서거) 1천2백주년기념은 기대가 자못 크다. 특히 讀杜會(독두회)가 활발하여 杜學(두학)은 本社(본사)에도 사양 못한다는 吉川(길천)씨에 注目(주목)을 아끼지 않는다.
다음 英文版(영문판)으로는 Wiliam Hung이 TuFChinas Gieatest Poet-1952와 獨文版(독문판)으로는 Erwin von Zach의 全譯(전역) Tu Fus' Gedichte-1952가 각각 Harvard Yenching Institute Studies에서 출간되었고, 기타 佛語版(불어판)과 露語版(노어판)은 미처 通覽(통람)한 바가 없어 書目(서목)조차 略(략)한다. 특히 露語版(노어판)의 論著(논저)는 解詩(해시)의 관점이 懸殊(현수)하여 언급조차 삼간다.
다음 자유중국에서는 香港(향항)과 아울러 杜甫(두보)보다는 子史(자사)에 눈을 쏘아 오직 前著(전저)의 縮寫(축사)가 전부다. 곧 ‘杜工部集(두공부집)’을 비롯하여 ‘杜詩箋注(두시전주) 杜詩詳註(두시상주) 杜詩鏡銓(두시경전)’이 版(판)을 거듭했고, ‘杜甫詩選(두보시선)’, ‘秋興八百集說(추흥팔백집설)’ ‘杜甫評傳(두보평전)’ 등이 빛을 받아 杜甫(두보)의 愛國(애국)과 愛人(애인)과 愛鄕(애향)을 깊이 아로새기고 있다.
이를테면 杜甫(두보)의 望鄕詩(망향시)를 오늘날 臺灣(대만)에서 외우며 失地回復(실지회복)을 다지고 있는 처지다.
한편 中共(중공)에서의 杜學(두학)은 淸學(청학)의 되풀이기는 하지만 역시 제 나름대로의 해석으로 말미암아 좌우간 각광을 받는 것은 사실이다. 杜甫(두보)의 憂國憐民(우국연민)의 도타운 詩心(시심)이 主義(주의)로 흐려지는 것이 未圓(미원)하나 이념을 달리하는 紅賊(홍적)의 일이라 그나마 말살치 않는 것만 다행으로 매김이 편안하다.
입버릇처럼 뇌까리는 社會詩(사회시)와 反戰詩(반전시)란 誤判(오판)으로 해서 杜詩(두시)는 애꿎게 붉어졌지만 그들이 좀처럼 풀어주지 않는 他詩(타시)에 비겨 널리 읽히는 것은 물론이며, 그로 인하여 宋板(송판) ‘杜工部集(두공부집)’의 호화판이 續古逸叢書(속고일총서)로 印出(인출)되었고 ‘杜臟(두장)’과 ‘讀杜詩說(독두시설)’의 印行(인행)도 보았다. 그 밖에 ‘杜甫傳(두보전)’, ‘杜甫年譜(두보연보)’, ‘杜詩硏究(두시연구)’, ‘杜甫詩論(두보시론)’ 등이 나왔고, 1910년 이래의 杜甫(두보)연구논문을 모은 ‘杜甫硏究論文集(두보연구논문집)’(三冊(삼책))이 나왔으며, 또한 ‘杜詩硏究휘編(두시연구휘편)’까지 보임은 論杜(논두)의 整理(정리)를 위해 반가운 일이다.
더구나 杜甫(두보)가 卜居(복거)했던 成部草堂(성부초당)에는 杜甫(두보)연구도서관을 지어 杜甫(두보)연구의 보람을 엿보이고 있는 실정이다.
끝으로 광복 후 우리나라에서는 고전의 보전과 보급을 위해 初刊本(초간본) ‘杜詩諺解(두시언해)’의 縮刷景印(축쇄경인)이 부분적으로 간행되었고, 그 復元版(복원판)까지 마련 중에 있다. 拙著(졸저) ‘杜詩諺解批注(두시언해비주)’(1958)는 杜甫(두보)의 名篇(명편) 81首(수)를 各體(각체)로 가려 批注(비주)한 것이며, ‘杜甫硏究論文集(두보연구논문집)’(1969)은 杜詩(두시)의 영향을 비롯하여 秋興八首(추흥팔수)의 評說(평설) 등 數篇(수편)의 論說(논설)을 모은 것이며 ‘杜詩硏究(두시연구)’는 한국문학에 끼친 杜詩(두시)의 영향을 다룬 논설이다. 이 밖에 敎材用(교재용)의 ‘杜詩諺解抄(두시언해초)’와 全在昊(전재호)의 ‘杜詩諺解論釋(두시언해논석)’(1968)이 있어 杜學(두학)의 계통을 재현시키기에 안간힘을 쓰고 있다.
위의 讀杜相(독두상)을 종합하면 杜詩(두시)는 文字(문자)가 전하는 한 영원히 새로운 寶庫(보고)로 세계를 읽히는 詩歌(시가)로 못 박혔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杜甫(두보)의 詩文集(시문집) ‘杜工部集(두공부집)’은 世界詩史(세계시사)의 寶塔(보탑)으로 우러르는 詞華集(사화집)이니 그 불후의 불꽃은 문학예술은 물론 사상의 지주로 저 日月(일월)과 더불어 찬란하리라 믿는다. 時(시)의 고금은커녕 洋(양)의 동서가 한가지로 익히고 받드는 그 참뜻이 杜甫(두보)의 철두철미한 憐憫(연민)에 있음을 상기할 때 우리의 前修(전수)들이 가꿔놓은 杜學(두학)의 터밭인 ‘杜詩諺解(두시언해)’의 眞價(진가)가 보태짐은 비단 이에 전념하고 있어서만은 아닌 듯하다.
세계를 두루 읽히는 杜詩(두시)가 4백년 전에 이미 우리말로 옮겨졌고, 그 ‘杜詩諺解(두시언해)’가 한국문학에 끼친 자취의 실마리를 풀어볼 때, 杜甫(두보)의 紀念燕(기념연)을 베푼다는 것은 남이 아닌 우리의 일임을 새삼 느낀다.
첫댓글 소설가 이병주선생님이 아니고 전 동국대 문리대 교수 이병주 박사님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