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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보에 담긴 성탄의 복음 (마 1:1-17) - 류영모목사
I. 성탄절의 주인공은 예수
밤새도록 술을 마시고 만취한 사람이 성탄절 아침 예배당 앞을 지나고 있었습니다. 교회당 안에서 성탄절을 축하하는 요란한 잔치 소리가 들리자 술취한 이 사람하는 말 "어 어, 교회에서도 크리스마스를 하네" 하더랍니다.
성탄절의 주인공은 산타가 아니라 예수님입니다. 성탄절을 지키는 주인 또한 백화점이나 술집주인이 아니라 교회요 성도들입니다. 유럽의 한 교회에 가면 교회당 벽면에 성경 영웅들의 성화가 그려져 있는데 모든 사람들이 어느 한 쪽 똑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다고 합니다. 그들의 눈길을 따라가 보면 거기 예수님의 성화가 있습니다. 성경의 주인공은 예수요 역사의 주인공도 예수입니다. 성경의 모든 인물과 모든 사건이 예수님을 가르키고 있습니다.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것도 예수요 우리의 소망도 예수입니다. 우리에게 가장 귀한 이름이 예수요 우리가 엎드려 경배할 이름도 예수입니다.
천지에 있는 이름 중 귀하고 높은 이름 나시기 전에 지으신 구주의 이름 예수
주앞에 내가 엎드려 그 이름 찬송함은 내 귀에 들린 말씀중 귀하신 이름 예수
(찬송가 101장)
II. 족보 이야기
성경과 역사의 주인공 예수님의 탄생 사건은 마태복음 1장 18절부터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 1장 1절부터 17절까지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부터 예수님까지 지루한 족보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신약성경을 읽기 위해 펼쳤다가 지루한 1장의 족보에 막혀 덮어 버리곤 합니다. 오래 신앙생활을 해온 사람도 이 족보가 정성스럽게 읽혀지지가 않습니다. 마음먹고 읽어보지만 우리네 이름과 다르기 때문에 때로 발음이 꼬이고 쉽게 읽혀지지가 않습니다. 더구나 이 족보가 주는 의미를 알 길이 없어 또박 또박 읽어봐도 뭔가 가슴에 와 닿지가 않습니다. 참 재미없는게 족보책입니다. 그러나 그 얘기가 자신과 관련이 되어 있을 때는 얘기가 달라집니다. 대단한 의미를 가지게 됩니다.
사람들은 족보를 통해 과거 즉 자기의 뿌리를 알게 됩니다. 그 뿌리를 통해 현재의 의미를 알게되고 미래를 만들어 가게 되는 것입니다.
미국의 흑인 작가 알렉스 헤일리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미국안에서 백인들에 비해 흑인들은 자존감이 모자라고 주체성이 모자라는 것을 보고 안타깝게 생각하다가 그 뿌리를 캐 보기로 했습니다. 어린시절 외할머니에게서 들은 아프리카 조상에 대한 단편적 이야기에 10여년간 자료를 조사하고 재구성했습니다. 200년전 노예로 납치되어온 아프리카 소년 - 헤일리의 9대 조상 쿤타킨테와 그 후손이 겪는 파란만장한 미국 흑인들의 뼈아픈 역사를 그려낸 「뿌리」라는 소설이지요. 이 소설과 영화를 통해 미국에서 흑인의 역사는 처음부터 잘못만들어진 역사라는 것입니다. 헤일리는 강요되고 조작된 흑인의 역사를 새롭게 만들어 보고 싶었습니다. 하나님이 만들어 주신 인간의 존귀함을 동료들에게 찾아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뿌리를 아는 사람은 자신의 현재를 바로 알 수 있고 미래를 건강하게 만들어 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자신의 성씨, 족보를 소중히 여기는 민족이 우리민족입니다. 여자들이 시집을 가도 자기 성씨를 가지고 사는 민족이 우리민족입니다. 지금 우리나라엔 251개의 성씨가 있습니다. 본관으로 보면 1000여 개의 성씨가 있다고 합니다. 잘 들어 보지 못한 희귀 성씨 중에는 궉씨, 뇌씨, 애씨, 탄씨, 판씨, 포씨, 풍씨, 필씨 등이 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만큼이나 족보를 귀하게 여기는 민족이 유대민족입니다. 신약성경도 족보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 족보를 오늘 본문에서는 "계보"라고 번역했습니다. 개역성경에서는 "세계"라고 했지요. 창세기 5장 1절에서도 "계보"라고 번역합니다. 반면 창세기 10장 1절, 11장 10절, 25장 12절 똑같은 말을 개역판에서는 "후예"로, 개역 개정판 "족보"라고 번역했습니다.
오늘 성탄절 아침, 예수님의 족보 속에 담긴 은혜의 메시지를 통해 성탄절 말씀을 받고자 합니다. 예수님의 족보 안에는 깊은 신앙적 신비가 담겨져 있습니다. 은혜의 비밀이 담겨있습니다. 성탄절 아침 주시는 기쁜 소식이 가득 담겨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성탄절 설교제목이 「예수님의 족보에 담긴 성탄의 복음」입니다.
III.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오늘 본문의 시작 - 즉 신약성서의 첫 말씀은 이렇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마1:1)
성경의 족보 연구가로 알려진 헬버그(J.C. Helberg)는 "계보"라는 말씀을 이렇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이야기는 곧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말씀이다"
·아브라함과 다윗에게 약속했던 모든 약속은 곧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약속이었다는 겁니다.
·아브라함이 가진 믿음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었다는 것입니다.
·다윗에게 약속했던 그 영원한 왕국은 곧 예수 그리스도의 왕국이었다는 것입니다.
·마태가 본 예수는 그래서 이 땅에 왕으로 오신 예수였습니다.
·아브라함의 이야기, 다윗의 이야기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완성이 되어집니다.
예수께서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으로 이 땅에 오셨다고 하니까 흔히들 아브라함과 다윗이 얼마나 훌륭했으면 구세주가 그 가문에서 오셨을까 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오늘 마태복음의 족보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그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라고 하는 말은 그가 특별한 믿음을 처음부터 가졌다기보다는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조상이라는 뜻입니다. 아브라함은 갈대아 우르에서 우상을 숭배하던 평범한 사람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무슨 선한 일을 많이 해서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남다른 믿음이 있어서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보통 사람 아브라함을 하나님이 특별히 부르시니 특별한 사람이 되고 믿음의 사람이 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도 우리에게 특별한 믿음과 선행이 있어서 된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애초부터 믿음 밖에 있었습니다. 약속의 자손이 아니었습니다. 그리스도밖에 있던 존재였습니다. 구원과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가문이 불교가문 혹은 유교가문 심지어 무당, 미신, 잡신 가문이었습니다. 철저히 버림받은 존재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어느날 나를 부르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을 통해 전도를 받았습니다. 알파코스로 인도 받았습니다. 평생 하나님을 믿지 않겠다고 발버둥을 쳐 왔는데 이상하게 예수가 믿어집니다. 교회가 좋고 예배가 좋아졌습니다. 어느 순간 하나님이 내 아버지요 예수가 내 주님이며 구세주이심이 믿어졌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부르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기로 작정하신 것입니다. 그때부터 아브라함이 복의 근원이 되었듯이 내가 복의 근원이 된 것입니다. 나 때문에 우리 가정이 구원받고 나 때문에 우리 가문이 복을 받고 나 때문에 또 다른 가문이 구원을 받게 된 것입니다.
아브라함도 우리처럼 허물과 실수가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거짓말쟁이었습니다. 의리가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아내를 두 번씩이나 버릴 뻔 했습니다. 다윗은 어땠습니까? 충복의 아내를 빼앗고 그 충복을 위험한 전쟁터 선봉에 세워 죽게 만들었습니다. 의도적 살인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다윗을 선택하셨으니 그 가계에서 구원의 왕이 나와 다윗을 구원하고 우리를 구원하게 하신 것입니다.
잘 잘못에 구애됨이 없이 믿음이 있고 없음에 상관치 아니하시고 다윗에게 약속을하셨습니다. "너를 통하여 메시아가 태어나고 네 왕위가 영원히 견고할 것이다"
하나님의 선택, 하나님의 사랑은 절대적입니다. 변함이 없으십니다. 하나님이 당신을 선택하시고 당신을 사랑하셨다면 반드시 당신을 구원하시고 반드시 축복하십니다. 우리가 도망가면 손을 묶어서라도 다리를 부러뜨려서라도 하나님은 당신을 천국으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실수가 없으신 분이십니다. 실수로 당신을 선택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실수보다 크십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의 죄보다 크십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에게 있었던 수많은 도전과 유혹, 끝없는 시련과 공격, 다양한 실수와 허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약속대로 그 가계에서 예수님이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당신의 어떤 약점과 고난에도 불구하고 당신을 향한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
"나와 여러분의 역사는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이 되어집니다."
이것이 성탄절 이 아침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무엇 무엇 때문에 나를 사랑한 것이 아닙니다. Because of의 사랑이 아닙니다. 허물과 약점에도 불구하고 나를 불러 나를 구원하시고 나를 사랑하신 in spite of의 사랑입니다.
IV. 메시아 족보에 기록된 여인들
본문 메시아 족보를 자세히 살펴보면 퍽 재미있는 사실이 있습니다. 여인들이 몇 사람 등장합니다. 당시 유대인의 관습상 이것은 너무나 엄청난 파격이었습니다. 당시 여인들은 법률상 아무런 권리가 없는, 인격이라기보다는 가정의 부속품처럼 취급되었습니다. 때문에 여인들이 족보에 들어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더구나 여기 등장하는 여인들은 메시아 족보에 이름을 올릴만한 품위있는 자격이나 아름다운 경력이 전혀 없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아니, 성경에 그들의 과거를 기록하기조차 낯뜨거운 이상한 경력의 소유자들이었습니다.
3절에 나오는 다말이 누구입니까?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라스와 세라를 낳고"
여기서 유다와 다말은 부부사이이구나 라고 생각하시겠지만 다말은 유다의 며느리입니다. 며느리가 시아버지와의 관계 속에서 아이를 낳습니다. 이쯤되면 사정이 대단히 복잡해 집니다. 이런 배경을 가진 다말이 감히 메시야의 족보에 올라있습니다.
라합은 여리고성의 기생이었습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황진이 같은 기생이라기 보다는 매춘부였습니다. 이방땅 매춘부가 예수님의 족보에 실려있습니다.
룻은 그 당시 이스라엘로부터 개처럼 취급받던 이방여인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질색하고 싫어하던 롯과 그의 딸 사이에서 난 모압의 후손이었습니다. 이런 여인이 거룩한 족보에 이름이 올라 있습니다.
그리고 6절입니다. "다윗은 우리아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다윗은 다윗의 아내에게서 아이를 낳고 우리아는 우리아의 아내에게서 아이를 낳아야 하지요. 그런데 다윗이 우리아의 아내에게서 아이를 낳습니다. 이런 여인이 어찌 메시야의 족보에 이름을 올릴 수 있겠습니까?
이들은 모두 출신성분이 좋지 못했습니다. 세 여자는 이방인이었습니다. 죄중에도 수치스런 죄를 지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의 이름이 버젖이 예수님의 족보, 구속사에 올라있습니다. 구약엔 얼마든지 사라, 리브가, 라헬등 대족장들의 어머니가 있었는데 이들은 모두 빠져있고 왜 상처투성이의 여인들이 기록되었을까요?
마태가 그들의 과거를 모르고 기록했을까요? No. 아닙니다. 바로 여기에 성탄절의 신비, 복음의 비밀, 은혜의 소식이 담겨있습니다. 그들의 모든 죄악, 허물과 실수, 수치스런 과거가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모두 허물어지고 용서함 받았습니다. 예수 안에서 다말, 라합, 룻 그리고 밧세바 같은 당신의 상처와 부끄러움이 용서받고 메시야 족보, 구원계보에 당신의 이름이 기록되었습니다. 이것이 복음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것이 은혜가 아니고 또 무엇이겠습니까?
이 족보 안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의 장벽이 무너집니다. 남자와 여자의 장벽이 무너집니다. 성도와 죄인의 장벽이 무너집니다. 저주가 축복으로 바뀌어집니다. 수치가 영광으로 바뀌어집니다. 할렐루야.
오늘 아침 예수님의 족보는 우리에게 놀라운 것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종류의 인간이었다할지라도, 어떤 종류의 죄를 지었다 할지라도 예수 안에 들어오면 당신은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당신의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었습니다. 메시아 구원족보에 이름이 새겨져 있습니다. 이 놀라운 사실을 믿으십니까?
이제 오늘 본문의 족보는 재미없고 지루한 책이 아니라 눈물과 감사없이 읽을 수 없는 복음이요 은혜입니다. 나를 구원한 가슴벅찬 구원 사건입니다.
V. 마리아
오늘 본문 16절에 예수님의 족보에 등장하는 마지막 한 여인이 더 있습니다.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16절)
바로 마리아입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을 낳았다는 사실 때문에 마리아를 특별히 순결한 여인으로 우상화하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로마 천주교회가 이런 오류에 빠졌습니다. 마리아를 우상화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다. 그렇다면 마리아는 하나님의 어머니가 아니겠느냐"는 것이지요. 불경한 생각입니다. 카토릭 교리에 보면 마리아를 우상화하는 몇 가지 사상이 있습니다.
첫째는 마리아 무죄설입니다. 예수님이 죄가 없으려면 마리아가 죄가 없어야 한다고 생각한 게지요. 둘째는 마리아 승천설입니다. 마리아는 죽음을 맛보지 아니하고 승천했다는 것입니다. 셋째는 마리아가 우리의 기도를 들어 응답해 주는 하나님이라는 생각입니다. 모두 비성경적이고 근거없는 교리들입니다.
마리아는 우리의 사랑을 받고 존경받아 마땅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도 죄인입니다. 오히려 평범한 여인이었습니다. 절대로 우상화되어서는 안되는 사람이었습니다. 마리아 우상화는 오히려 마리아를 욕되게 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28에 보면 마리아에게 천사 가브리엘이 축복하며 "은혜를 받은 자여"라고 말합니다.
보십시요.
마리아도 은혜를 받은 자이며 은혜를 받아야 살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마리아는 경배의 대상이 아닙니다. 그도 하나님 앞에 무릎 꿇어 경배해야 할 피조물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처럼 마리아도 하나님께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해야 할 사람이었습니다. 기도를 응답해 주는 신이 아닙니다. 그도 역시 은혜를 받은 자이지 은혜를 주는 자가 아닙니다. 우리에게 구세주가 필요하듯 마리아도 구세주가 필요했습니다. 그가 아름다운 것은 그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하나님의 선택을 받아 하나님께 쓰임 받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잘났든 못났든 우리가 좀더 순결하든 그렇지 못하든 -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하나님께 쓰임 받는다면 우리는 아름다운 존재들입니다. 예수 안에서 - 예수 안에서. 예수 안에서 우리는 우리의 잘남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부족과 못났음을 자랑합니다. 그래야 예수님을 드러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탄절의 메시지는 마리아의 위대함을 찾아내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님만을 드러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님만 경배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크리스마스입니다. 크리스는 그리스도, 마스는 미사, 경배입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경배하는 날이 크리스마스입니다. 오늘 오직 예수님만이 높아지고 오직 예수님만이 경배를 받으시옵소서. 성탄절아침 아기 예수 앞에서 마리아는 우상화될 수 없습니다. 예수 앞에서 이 땅의 그 누구도 그 무엇도 높아질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 뿐입니다.
VI. 이스라엘에 오신 예수
오늘 본문 마지막절입니다.
"그런즉 모든 대 수가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열네 대요 다윗부터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갈 때까지 열네 대요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간 후부터 그리스도까지 열네 대더라"(17절)
이는 이스라엘 역사를 편리하게 세 시기로 나누어 본 것입니다. 이 말은 "이스라엘 역사가 대단한 역사였다" 이런 뜻이 아닙니다.
·아브라함부터 족장들의 삶은 끊임없는 방황의 삶이였습니다.
·모세의 때는 노예로 살아야 했던 서러운 삶이었습니다.
·다윗부터 시작된 왕정시대는 한없는 불순종과 실패, 분열과 죄악으로 얼룩진 역사였습니다.
·그리고 바벨론으로 끌려가 다시 이스라엘은 포로로 살아야 했던 좌절과 오욕으로 이어진 역사였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예수님은 바로 이런 역사의 땅에 오셨습니다. 흔히 유대인이 위대하기 때문에 메시아가 그 곳에 오셨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닙니다. 하도 못난 민족, 못난 역사인지라 그곳에 오신 것입니다. 잘난 민족, 영광스런 역사속에 오시길 원했다면 당대 세계를 지배하고 있던 로마제국에 오셨겠지요. 그러나 예수님은 철저히 버림받은 민족, 고난과 죄악으로 얼룩진 어두운 민족을 선택하셨습니다.
왜요?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쥬(Jew)라고 경멸받는 이스라엘은 곧 나의 모습입니다. 나처럼 못나고 구원받을 아무런 조건이 없는 자를 선택하여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백성 삼으신다는 위대한 메시지가 이스라엘이라는 역사속에 담겨 있는 것입니다. 방황과 고난의 삶, 범죄와 어둠의 인생걸음을 걸어오신 분들이여, 낙심하지 마십시요. 주님은 오늘 아침 바로 당신을 위해 오셨습니다. 바로 당신에게 오셨습니다. 여기 이스라엘은 바로 나요 이스라엘의 역사는 바로 나의 역사입니다.
그 역사는 예수안에서 이제 구원역사, 축복의 역사, 영광의 역사, 생명의 역사로 바뀌어 졌습니다. 임마누엘 역사!
미국 인디아나 주 어느 시골 학교에 열 네 살 한 학생이 뇌종양으로 입원해 여러번 방사선 치료를 받게 되었습니다. 퇴원할 무렵엔 머리카락이 다 빠졌습니다. 하루 이틀 후면 등교를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선생님은 종래 시간에 광고를 했습니다. "내일이면 브라운이 퇴원을 하고 학교에 올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친구의 머리가 다 빠져 어쩌면 부끄럽게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너희들이 놀라지 말고 잘 위로해 주었으면 좋겠다. 선생님이 나가신 다음 학급 친구들이 모여 의논을 했습니다. 머리가 다 빠져버린 브라운을 어떻게 위로해 줄 수 있을까? 친구들은 오늘 오후 브라운의 집으로 방문을 해 축하해 주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친구 중 한 사람이 머리를 깎고 브라운을 찾아가겠다고 제안했습니다. 브라운의 집으로 친구들이 몰려들어 오는데 모든 친구들이 머리를 깎은 것입니다. 이 아름다운 모습을 보고 브라운의 부모님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브라운도 울고 선생님도 울고 친구들도 함께 울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마음이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연약한 우리를 구원하시려 약한 애기로 오셨습니다. 죄 없으신 분이 죄악의 땅에 죄인을 구하려 오셨습니다. 머리 빠진 브라운의 친구가 되기 위해 머리 깎고 나타난 친구처럼 우리와 함께 하려 오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본문에서 제일 많이 반복되는 단어가 뭔지 아십니까?
"낳고 낳고 낳고..." 그것이 뭐가 대단하냐고요? 구약의 족보는 모두 누구는 몇 살에 죽었고 누구는 몇 살에 죽었다는 "죽고 죽고 죽고..."의 역사로 기록됩니다. 예수 안에서 우리의 역사는 새로운 역사, 생명의 역사를 낳고 또 낳는 새로운 시작을 맞이한 것입니다.
신약성경은 족보라는 서곡과 함께 크리스마스의 무대가 열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오십니다. 이것이 기쁜 소식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것이 은혜가 아니고 또 무엇이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