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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뵈프(François Noël Babeuf, dit Gracchus Babeuf, 1760-1797)
프랑스 혁명가이자 이론가이다. 1760년 프랑스 생깡땅(Saint-Quentin) [프랑스 북동부 삐까르디 지방(Picardie)의 에슨(Aisne, 02)의 부도시, 즉 제2도시]에서 태어나, 프랑스 혁명이 사그러지는 1797년에 방돔(Vendôme) [프랑스 중서부 오를레앙지방(Orléanais)의 르와르 에 셰르(Loire et Cher, 41)의 부수도]에서 사형 당했다.
그는 널리 알려진 바뵈프주의(Babouvisme)를 기초한 자이다. 느와용(Noyon)에서 측량사이었다가, 르화(Roye)에서 토목공사 위원(commissaire à terrier)을 지냈던 그는 1787년 파리로 나와서, 정부에 조세 개혁에 관한 방대한 계획을 부여하려했다. 1792년 솜므(Somme, 80, 삐까르디 지방)의 의원(conseil général)에 선출되었다.
1796년 초기에 바뵈프와 그의 친구들 다르떼(Augustin Darthé, 1765-1797)와 뷔오나로띠(Phillippe Buonarotti, 1761-1837, 이탈리아 출신 프랑스 혁명가)는 집정관 정부(Directoire)를 전복하고, 새로운 정체, 즉 공산주의정체를 세우기 위하여 비밀조직을 만들었다. 그것이 곧 ‘평등당의 음모(conspiration des Egaux)’이다. 그리젤(Georges Grisel, 1765-1812)에 의해 까르노(Lazare Nicolas Margueritte Carnot, 1753-1823)에게 고발된 이 가담자들은 체포되고 다음해(1797년 5월 26일) 방돔에서 처형되었다. [라자르 까르노는 열역학 제2원리를 창안한 사디 까르노(Sadi Carnot, 1796-1832)의 아버지이다. 라자르는 왕을 처형한 혁명파(régicide)에 속했기 때문에 1816년 둘째 아들(Lazare Hiyppolyte Carnot, 1801-1888)과 더불어 망명했다가(추방당했다가) 1823년 프랑스로 다시 돌아왔다]
봐뵈프 이론의 역사적 중요성은 처음으로 공산주의가 철학적 몽상이 아니라 정치적 계획이라는 사실에 있다. 또한 이 학설은 “평등 공화국”을 건설하기 위하여, (각자의 장점에 따라서가 아니라) 각자에게 동일한 것을 줄 것을 권하였다. 이 학설은 아주 추상적 성격을 간직하고 있어서, 근대 공산주의 이론과는 거리가 멀다. 왜냐하면 바뵈프 공산주의는 생산양식의 방식도 노동조직 방법도 아니며, 오히려 부의 단순한 분배(réparrition)이기 때문이다.
바슐라르 Gaston Bachelard 1884-1962
프랑스 철학자. 1884년 바쉬르오브(Bar-sur-Aube)에서 태어나 1962년 파리에서 죽었다.
우체국 직원이었던 그는 처음에는 과학들을 연구했고, 나중에야 철학에 관심을 가졌다. 그는 근대과학의 이론가이지 동시에 시적 태도의 철학자이다. 과학적 이론가로서 남긴 작품은 새로운 과학적 정신(Le nouvel esprit scientifique, 1934), 합리주의 응용(Le Rationalisme appliquée, 1949)이 있고, 이 후자의 작품에서 그는 모든 합리적 사유에 알맞은 체계화의 경향성이 있다는 것을 제시하고, 또 경험의 무한한 풍부함 앞에서 모든 체계의 분열도 제시하고 그리고 새로운 사실들의 드러남도 제시하였다.
시적 태도의 철학자로서 그는 개인의 임의적 상상과 영혼주의(psychisme)의 본성에 즉 시적 진지함의 근원에 연결된 심층적(profonde) 상상을 구별하였다. [표면적으로 일어나는 개인적 상상력과 인간 본성에서 우러나는 상상 사이를 구별하였다. 이 후자의 생각은 분석심리학자 융에 연결될 것이다.]
작품으로는 불의 정신분석학(La psychanalyse du feu 1938), 물과 꿈(L'eau et les rêves 1940), 공기와 꿈(L'Air et les songes, 1942), 땅과 의지의 몽상(La terre et les rêveries de la volonté, 1945), 공간의 시학(La poétique de l'espace, 1958) 등이 있다.
베이컨 Roger Bacon 1214-1292
영국 철학자이며 과학자이다. 그는 1214년 서머싯(Somerset)주의 일체스터(Ilchester)에 태어나 1292년(78살) 옥스포트(Oxford)에서 죽었다. 그는 경이 박사(lat. Doctor Mirabilis "wonderful teacher", fr. docteur admirable)란 칭호를 얻었다.
그는 프란체스코 수도원에 들어갔으며, 처음에는 아리스토텔레스 주석가 였다. 그리고 나서 De speculis, Metaphysica, De computo naturali 등에서 우주에 대한 그의 관점을 전개했다. Communia naturaliun에는 그의 시대의 모든 인식론들을 명확히 했다. 그의 주제들은 교회의 의심을 샀고, 교회는 그를 15년(1277-1292) 동안 그를 갇혀있게 했다. 그의 시대에 가장 노련한 과학적 정신을 가진 사람들 중의 하나인 그는 라틴 책력이 오류이라는 것을 깨달았던 첫 번째 사람이다. 그가 대포의 화약을 발명했다고 하나, 그는 아랍인들에게서 공식을 빌려왔을 것이다.
베이컨 Francis Bacon, baron Verulam 1561-1626
영국의 대법관이었으며, 철학자이다. 1561년 런던에서 태어나 1626년(65살) 그곳에서 죽었다. 엘리자베스 1세 여왕 통치 하에서 검찰총장의 아들로 태어나서, 그는 법학을 공부했으며, 왕실의 변호사가 되었다. 1621년(60살)에 수뢰혐의로 고발당하여, 자신의 직위에서 박탈당했으며, 공공생활에서 배제되었다. 그는 이 말년시기에 과학과 철학에 헌신하였다. 우선 도덕과 정치에 관한 수필집(Essais de morale et de politique, 1597)을 쓰기도 했던 그는 근대 인식론을 기초한 자로서 특히 유명하고, 경험과 연역의 과학방법론을 구해 냈다. 이 새로운 논리학은 과학적 탐구의 3가지 계기를 묘사하였다. 1. 사실의 관찰, 2. 귀납법에 의한 가설의 제시, 3. 보다 많은 사실에 의한 가설의 실험적 검증. 또한 베이컨은 “존재표”, “부재표”, “정도표”를 구성하면서 실험의 합리적 조직화를 권하였다. 이 표들은 진실한 원인들을 어떤 한 현상으로 구별하게 한다. 주요 작품으로 과학의 새로운 방법(Novum Organum Scientarum, Nouvelle méthode des sciences, 1620)는 우리의 인식론의 원리들을 포함하는 모든 원리들을 정의한다. (43SKD)
바덴학파 l'école de Bade, l'école axiologique
빈델반트(Wilhelm Windelband, 1848-1915)에 의해 창설되어 릭케르트(Heinrich Rickert 1863-1936)에 의해 이끌려졌던 철학 모임이다. 이 모임은 네오칸트주의의 견해를 표현한다. 그 학파의 반성들은 칸트의 선험적(transcendantale) 방법으로부터 영감을 받아서 주로 “가치”(valeurs)의 분석으로 향하고 있다.
벤 Alexander Bain 1818-1903
스코틀랜드 철학자. 1818년 스코틀랜드(Scotland)의 애버딘(Aberdeen)에서 태어나 1903년(85살) 같은 곳에서 죽었다.
그는 영국 실증주의 학파에 속한다. 그의 심리학은 생리학과 병리학의 발견물을 이용하였고, 두뇌의 자발적인 활동성을 강조하면서 관념연합론을 새롭게 하고자 시도했다. 그의 관념론적 철학은 실험심리학을 기초하였다. 이 실험심리학에서 그는 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 1806-1873)의 방법을 심리생리학에 적용하였다. 즉 두되에 관한 피의 작용, 지성과 두뇌의 무게 관계, 회질과 백질 사이의 기능적 차이 등. 그는 특히 연역논리과 귀납논리(Logique déductive et inductive, 1870), 교육이란 학문(Science de l'éduction, 1879)의 저자이다. (43SKI)
[참조: 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 1806-1873)은 관찰을 중요시한다 / 현상 a다음에는 반드시 현상 b가 나타난다는 것을 관찰하였다면, a는 b의 원인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일치의 방법 méthode de concordance), 현상 b는 현상 a가 나타나면 반드시 나타나고, 현상 a가 나타나지 않으면 결코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을 관찰하면, a는 b와 인과관계를 가진다는 결론을 내리고 (차이의 방법 méthode des différences), 어떤 현상 전체 중에서 b를 제외한 일련의 결과들 전부를, a를 제외한 일련의 전건 전부와 결합할 수 있다면, '잉여a'는 '잉여b'의 원인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잉여의 방법 méthode des résidus); 또 두 현상 중에서 한 현상이 변하면 그와 관련되어서 다른 현상도 변한다는 것을 관찰한다면, 두 현상은 수반적으로 변한다는 결론을 내리기만 하면 된다(공변법méthode des variation concomitantes). 「물질과학: 이론과 경험」베르제즈 와 위스망 공저/ 남기영 옮김, 지식과 이성(프랑스 고교철학 3), 삼협출판사, 1999. pp. 209-258, (417쪽) / André Vergez et Denis Huisman, Nouveau "cours de philo" 3: La connaissance et la raison, Natan, 1980. pp. 100-126, (P. 256).]
바쿠닌 Mikhail Alexandrovitch Bakunin 1814-1876
러시아 아나키스트이다. 1814년에 [구 러시아의] 트베르(Tver)지방 프랴무히노(Prjamuchino)에서 태어나 1876년(62세)에 베른(Berne)에서 죽었다.
미하일 알렉산드로비치 바쿠닌는 귀족 집안 출신으로 포병 장교였으나, 혁명적인 생각을 가졌다는 이유로 추방을 강요당했다.
파리에서 맑스(Karl Heinrich Marx, 1818-1883)와 프루동(Pierre-Joseph Proudhon, 1809-1865)과 연결되었다. 그러다가 1857년(43살)에 그는 시베리아에서 감옥에 갇히게 된다. 1861년(47살)에 거기서 탈출하여 전 유럽을 돌아다니게 된다.
[1864 9월 런던에서 국제노동자협회(International Working Men's Association), 즉 제1인터내셔널이 창립되었을 때 마르크스는 독일노동자의 대표로 참가하였다.]
1867년(53살)에 이탈리아 나폴리에서 이탈리아국제노동자협회에 한 분파를 설립하였다. 모든 국가주의에 매우 적대적이었던 그는 1872년(58살) 헤이그(라에, La Haye)의 회의에서 맑스와 결별하였다. 그의 사상은 무정부주의 국가(Staat en anarchie, L'Etat et l'anarchie, 1873)에 결정적으로 표현되어 있으며, 그 속에서 그는 모든 권력 심지어 혁명적 권력까지도, 그 권력이 영구화되고자 하는 경우에, 인민을 배반한다고 보았다. 공산주의란 인민의 의회를 이용하여 국가의 점진적 소멸을 단지 예견하는 차원이었다. 바쿠닌은 공산주의의 최종단계에 단번에 이르기를 원했으리라. (42WNA)
작품: 압제의 게르만 제국과 사회혁명(L'Empire Knouto-germanique et la révolution sociale, 1871) (42WKK)
발드윈 James Mark Baldwin 1861-1934
미국 심리학자 이며 사회학자. 그는 1861년 남캐롤라이나주의 콜롬비아에서 태어나 1943년(73살)에 파리에서 죽었다.
그는 자신의 탐구를 어린이 심리학과 사회 심리학에 쏱았다. 그는 국제 심리학 초기회의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는 신체의 기관 또는 사회적 법칙이나 협약을 신체들의 기능들에 의해, 적은과 선택의 필연성에 의해 설명했다. 그것은 그의 기능주의적이고 다윈주의적 방향이었다. 그는 특히 정신발달에서 사회 윤리적 해석(Social and Ethical Interpretations in Mental Development (1898); Interprétation sociale et éthique dans le développement mental, 발전과 진화(Développement et Evolution, 1902), 개인과 사회(Individu et Société, 1910)(43SKI)
향연(le Banquet, Symposium)
기원전 385년경에 쓰여진 플라톤의 대화편이다. 이 대화편의 틀은 시인 아가톤(Agathon)이 그의 친구들에게 베푼 향연이며, 대화의 목적은 학문과 미에 대한 사랑이 주제였다. 거기서 회식자들은 사랑(amour)에 대한 찬사로 시작하였는데, 파이드로스(Phedre), 포자니아스(Pausanias), 에릭시만크(Eryximanque), 아리스토파네스(Aristophane), 아가톤(Agathon)의 순서이다. 소크라테스의 차례가 되어, 그는 미의 찬미와 사랑에 대한 반성을 말하였다. 사랑은 우리를 신체의 아름다움에 대한 사랑으로부터 아름다운 영혼의 사랑으로 고양시키고, 그리고 인간의 작품의 사랑 또는 미술의 사랑으로, 마지막에는 학문의 사랑으로 고양시킨다고 한다. 이 반성의 구체적 성격, 즉 텍스트에 나타난 시적 특성과 주제에 대한 참여한 사람들의 보편적 관심 등은 이 작품을 플라톤의 가장 유명한 대화편 중의 하나로 만들었다. (42RKI)
야만 barbarie
문명의 부재.
“야만인”(barbare)이란 개념은 그리스인들과 로마인들에게는 모든 이방인들에 적용된다. 그리고 크리스트교인이 크리스트교에 제자가 되지 않은 자들 모두에게 지칭하는 시대도 있었다. 사실상 “하나의” 서양 문명과 야만이 있는 것이[이분법적 구별이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 다른 문명들이 있다. 반대로 모든 문명은 야만의 행동을 일으킬 수 있다. 말하자면 인권을 침해하는 행동으로서 나찌즘의 범죄나 고문등, 그리고 문화적 기념물의 파괴 행동으로서 도서관 파괴와 동상들의 파괴 등이 있다. 모든 폭력의 형태는 야만의 행동이다. 야만은 아주 정확히 말하면, 휴머니즘(Humanisme)에 대립된다. (43SKI)
바르트 Roland Barthes 1915-1980
프랑스 비평가이다. 그는 1915년 망쉬(Manche, 50)주의 셰를부르(Cherbourg)에서 태어나 1980년(75살) 파리에서 죽었다.
그는 소쉬르(Ferdinand de Saussure, 1857-1913)의 언어학과 구조주의 인류학과 라캉(Jaques Lacan, 1901-1981)의 정신분석학에서 영감을 받았으며, 그의 작품은 특히 Le Degré zéro de l'écriture suivi de Nouveaux essais critiques, 1953에서 문학과 권력의 연관에 관한 연구의 길을 열었다. 그리고 중성 언어(langue neutre)라는 생각은 사회적 회로의 도용(falsification, 위조)에서 벗어나서, 신화학(Mythologies, 1957)과 유행의 체계(Système de la mode, 1967)에서 기호학의 탐구들과 현대사회의 신화와 특성들의 분석으로 방향을 잡았다. 뿌리에 관하여(Sur Racine, 1963)과 비평과 진리(Critique et Vérité, 1966에서는 문학의 학문조건에 관한 그의 작업이었고, 기호의 제국(L'Empire des signes, 1970)에서는 자유로운 기호의 시학에 관한 작업이었다. 이 작업들은 구조화된 언어에 앞선 자연언어(lagage naturel)에 관한 반성과 모든 언어학에 앞선 기호들의 과학에 관한 반성을 진행하게 되었다. 그의 작품은 의사소통의 본질에 관한 반성이었다. 그는 또한 사랑담론의 조작들(Fragments d'un discours amoureux, 1977), 밝은 방(La Chambre claire: Note sur la photographie, 1980)등이 있다. (43SKJ)
기본 인격 (personnalité de) base
이상적 전형으로서, 문화와 사회의 근본적 구성물을 구현하는 이상적 전형인격상
기본 “인격성”(base personnalité)의 아메리카의 사회학자 카디네(Abram Kardiner 1891-1981)에 의해 만들어졌다. 그는 객관적 제도들이 자주 사회적 실재성의 허위관념을 부여한다는 것을 확인하고, 그는 사회적 제도들과 사회적 삶의 인간적 경험을 대립시켰다. 예를 들어 객관점 관점에서 프랑스와 브라질에서 카톨릭 신자의 퍼센트는 동일하다. 그러나 브라질에서 종교는 아주 달리, 그리고 훨씬 더 깊이 체화되어 있다. 이 점에서 브라질 사람들의 인격성은 프랑스인들의 인격성과 전체적으로 달리 나타난다.
따라서 기본 인격성은 제도의 반영이 아니라, 오히려 문화의 실재적 경험의 반영이다. 기본 인격성은 모든 반작용의 전반적 표현이며, 태도 일체의 표현이다. 이 태도들은 어떤 문화의 전형 또는 사회적 삶의 전형을 특징지운다.
참조: 카디너(Abram Kardiner 1891-1981) 뉴욕출생 코네티컷에서 죽었다. 정신과의사 정신분석가 인류학자. 문화주의 운동과 자아 심리학에 기여하였다. (43SKJ)
벨(Pierre Bayle, 1647-1706)
프랑스의 박학다식한 작가, 비평가, 철학자이다. 1647년 르카를라(Le Carla)에서 태어나, 1706년 네델란드 항구도시 로테르담(Rotterdam)에서 몰했다.
로렌지방의 아르덴(Ardennes 08)주에 있는 스당(Sedan)에서 1681년까지 교수를 지냈다. 거기서 그는 혜성에 관한 편지(Lettre dur la comète)를 작성했다. 또 로테르담에서 가르쳤는데, 여기서는 학자들의 공화국의 소식(Nouvelles de République des lettres, 1684-1687)을 썼다.
또 그는 역사와 비평 사전(Dictionnaire historique et ciritique,1696-1697)을 썼는데, 여기서는 역사철학자의 모습을 지닌다. 이 작품에서 그의 비평적적 정신은 몽테뉴를 이어받고 있으며, 도덕문제, 성서주해 문제, 신학문제 등을 새롭게 했다.
벨은 루이 14세(Louis XIV) 시기의 주요 저술가이며, 백과전서의 정신을 알리는 전조였다. 그는 모든 것들에, 즉 독단에, 당국의 권위에, 합리주의자의 체계들의 총체적 정신에 대들었다. 그래도 그의 사상은 관용의 철학으로 남아있다. (41RMA)
예술 Beaux-arts 미술
예술 일체를 말한다. 이 용어는 특별히 회화, 조각 등 조소예술을 지칭한다. 그러나, 사실상 이 용어는 음악, 무용(chorégraphie), 게다가 시에까지 확장되었다.
행실주의 le béhaviorisme 행동주의 행태주의
객관적 관찰에 근거한 심리학적 방법. 행실주의에 있어서, 심리학의 대상은 주체의 내재성이 아니라, 인간들의 외적 행동이다.
행실주의는 “행실의 심리학”(psychologie du comportement), “반작용의 심리학”(psychologie de réaction)라 불리기도 하며, 19세기 말에 손다이크(Edward Lee Thorndike, 1874-1949)의 동물의 지능(Animal intelligence, an experimental study of associative process in animals 1898)로부터 생겨났다. 미국에서 왓슨*(John Broadus Watson 1878-1958)과 소련에서 베흐테레프(Vladimir Bekhterev ou Bechterew 1857-1927)도 이 학문의 창시자이다. 행실주의의 한계는 인간의 개관적 연구의 한계이기도 하다. 인간의 반작용은 외부로부터 묘사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내부로부터 이해되어야 한다. 행실의 서술심리학은 품행(conduite)의 이해 심리학에 의해 그리고 내재 관철에 의해 보충되어야 한다.(참조: 심리학) (43RLB)
블라발 Yvon Belaval 1908-1988.
프랑스 작가, 철학자이다. 그는 1908년 랑그독-루시용(Languedoc-Roussillon)지역의 에로(l'Hérault 34)주 세트(Sète)에서 태어났다. 1988년(80살)에 죽었다. [라이프니츠 전공자로서 릴과 파리 소르본에서 대학교수를 지냈다.]
블라발은 진솔성의 근심(Souci de sincérité, 1944)이라는 도덕 철학의 분석들에 이어서 미학적 시론과 작품들 막스 쟈콥과 만남(Rencontre avec Max Jacob), 시의 탐구(La recherche de la poésie, 1947), 디드로의 파라독스 없는 미학(L'esthétique sans paradoxe de Diderot, 1950)을 보태고, 철학적 시론인 철학자들과 그 언어(Les philosophes et leur langage, 1952)를 보태고, 심리학적 분석인 좌절의 행실(Les conduites d'échec, 1953)를 보태고, 그리고 나서 과학철학사의 중요한 작품 라이프니츠, 데카르트의 비판자(Leibniz, critique de Descartes, 1960)으로 나아갔다. [(fr.Wiki에서) 그리고 나서 라이프니츠 철학입문(Leibniz, initiation à sa philosophie, 1961), 잃어버린 미래(L'avenir perdu, 1975), 라이프니츠 연구(Etudes leibniziennes, 1976 등이 있다. 참조 쟈콥(Max Jacob 1876-1944) 프랑스 시인, 소설가, 화가.] 참조 (43SLA)
벤담 Jeremy Bentham 1748-1832
영국 법학자 철학자. 벤담은 1748년 영국 런던에서 태어나 1832년(84살)에 런던에서 죽었다. 홉스(Thomas Hobbes, 1588-1679)의 제자이며, 오웬(Robert Owen, 1771-1858)과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 1806-1873)의 선구자이다.
그의 “실용적”(utilitaire) 도덕론은 “최대 다수의 최대행복”(plus grand bonheur du plus grand nombre d'hommes)을 목표로 하였다. 이 도덕론은 특히 “쾌락의 산술학”을 발전시켰고, 행복의 많은 양을 얻는 것으로 방향을 잡았다. 그의 입법에 대한 작품은 교육의 발전과 구빈법의 개선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그의 작품으로 도덕과 입법의 원리 입문(Introduction to Principles of Morals and Legislation (printed for publication 1780, published 1789), 시민법과 형법 개론(Traité de Législation Civile et Pénale, 1802)(en, Wiki에 불어로 되어 있다), (Déontologie, 1834)[유고] 등이 있다. (43SLA)
베르디에프 Nicolas Berdiaeff 1874-1948, Nicolas Berdiaev
러시아 철학자. 베르디에프는 1874년 러시아 우크라이나(Ukraine)의 키에프(Kiev)에서 태어나서, 1948년 프랑스 일드프랑스(Ile-de-France)지역 오뜨드센(Hauts-de-Seine 92)주, 파리 서남쪽에 있는, 끌라마르(Clamart)에서 죽었다.
1920년 러시아의 모스크바대학의 문헌학과 교수였다. 그는 [1922년에] 소비에트 정부에 의해 추방되어 [베를린을 거쳐서 1924년에] 프랑스 파리에 왔다. 그의 철학적 반성은 합리주의의 비판이며 크리스트교 신앙에 비추어서 개인적 실존에 관해 성찰하는 것이었다. 그는 우리에게 자유의 철학(La Philosophie de la liberté, 1911), 창조의 의미(Le Sens créateur, La Signification de l'acte créateur, 1916), 인간과 기계(L'Homme et la machine, 1933), 인간의 예속과 자유(De l'esclavage et de la liberté de l'homme, 1946)등을 남겼다. (43SLA)
베르그송 Henri Bergson 1859-1941
프랑스 철학자. 베르그송은 1859년 프랑스 파리에서 태어나 1941년(82살) 파리에서 죽었다. 그는 매우 공부를 잘했고, 19살의 나이에 파리고등사범학교에 들어갔으며, 30살에 박사학위를 받았다. 1900년(41살)에서 1914년(55살)까지 꼴레쥬드프랑스 교수를 지냈으며, 1914년에 프랑스학술원에 선출되었다. 1928년(69살)에 노벨 문학상을 탔다. 종교적 신비주의에 대한 그의 반성은 카톨릭으로 개종을 예고했으나, 1939년(80살) 전쟁이 터지면서, 그는 독일인들에 의해 박해받는 동족 종교인들과 연대를 유지하려 하였다.[그를 가톨릭의 개종자로 보려는 것은 프랑스 카톨릭신자의 바램일 뿐이다. 그의 사상을 보아 크리스트교인이 될 수 없고, 누구나 종교성을 지닌 철학자로 남았다.] 그는 식량배급표를 얻기 위해 여러시간 동안에 줄을 섰기에 폐혈증이 닥쳤다. [전쟁 중에 갈탄 배급의 부족으로 추위로 1월 4일에 죽었다.]
그의 반성은 의식의 무매개적 자료들에 관한 시론(Essai sur les données immédiates de la conscience, 1889)과 물질과 기억(Matière et mémoire, 1896)에서 보이듯이, 심리학적 자아의 철학으로부터 출발하였고, 그리고 창조적 진화(L'Evolution créatrice, 1907)에서 생명의 직관 속으로 파고들었으며, 도덕과 종교의 두 원천(Les Deux Sources de la morale et de la religion, 1932)에서 정신 철학으로 꽃 피웠다. 사회적 인격성의 그 밑에 깔린 “심층 자아”, 즉 지속의 내적 경험과 동일한 심층자아의 이론과, 그리고 창조적 천재들의 “열린” 도덕론은 그를 유명하게 만들었다. 사유와 운동자(La pensée et le mouvant 1934)에 모아져 실린 [제4장]「철학적 직관(L'intuition philosophique, 1911)」과 [제5장]「변화의 지각(La perception du changement, 1911)」같은 일련의 논문들과 형이상학과 과학의 연관에 관한 심오하고 독창적인 전개한 [제6장 「형이상학 입문(Introdution à la métaphysique, 1903)」] 글들이 실려있다.
베르그송은 또한 상대성의 이론에 관한 아주 정당한 철학적 반성을 분명하게 표현했다. 그리고 아인슈타인과 가졌던 긴 대담에 의해 확인하였고 지속과 동시성(Durée et simutanéité, 1922)을 썼다.
베르그송은 처음에 어떠한 제한도 없이 찬사를 받았으나 그리고 나서 비판을 받기도 하지만, 우리 철학사에서 그의 정당한 자리를 매김하고 있다. 사람들은 티보데(Albert Thibaudet 1874-1936)의 베르그송주의(Bergsonisme, 1922)와 쟝켈레비치(Vladimir Jankélévitch, 1903-1985)의 앙리 베르그송(Henri Bergson, 1959)을 읽을 수 있다. (43SLA)
버클리 George Berkely 1685-1753 [위키에 ‘바’클리로 발음하라고 되어있다]
아일랜드 주교이자 철학자이다. 그는 1685년 아일랜드의 킬케니(Kilkenny) 부근에서 태어나 1753년 영국 옥스퍼드(Oxford)에서 죽었다.
그는 아일랜드 더블린(Dublin)에서 그리스어, 해브류어, 신학 교수를 지냈다. 그는 1713년-1720년(35살) 프랑스, 스페인, 이탈리아를 여행했다. 그리고 [1725년에] 카리브해역에 있는 버뮤더(Bermuda, fr. Bermudes)군도에 크리스트교 신앙을 전파하기 위해 떠났다. 1731년(46살) 영국으로 돌아와서, 아일랜드의 클로인(Cloyne)의 주교로 지명되었다.
버클리의 주관적 관념론은 세계의 모든 실재성을 우리가 세계에 대해 갖는 현상들에 귀착시키는 것이다. 그의 유명한 정식으로, “존재는 지각된 것이다”(esse est percipi; l'être, c'est perçu) 요약했다. 단순한 양식(le bon sens)을 요구하는 이 주관주의는 칸트를 심히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그 혼란이란 [데카르트의] 양식이 우리에게 세계가 우리 밖에 실재성을 갖는다는 것과 동시에 세계를 증명하기란 극히 어렵다는 것을 가르쳐준다 점에서 이다. 그의 작품으로 새로운 통찰론을 향한 시론(An Essay towards a New Theory of Vision, Essai sur une nouvelle théorie de la vision, 1709), 인간 지식의 원리론(A Treatise Concerning the Principles of Human Knowledge, Traité sur les principes de la connaissance humaine, 1710), (Three Dialogues between Hylas and Philonous, Dialogues entre Hylas et Philonoüs, 1713) 등이 있다.
사람들은 게루(Marcial Gueroult 1891-1978)의 연구 작품인 버클리: 지각과 신에 관한 네가지 연구(Berkeley: quatre études sur la perception et sur Dieu, 1956)을 읽을 수 있다. (43SLA)
베르나르(Claude Bernard, 1813-1878)
끌로드 베르나르는 프랑스 생리학자이다.
그는 1813년에 리요네(Lyonnais) 지역 론(Rhône, 69번주이며 리용이 주도)주에서 태어나 1878년에 파리에서 몰했다.
1854년에 소르본에서 실험생리학의 교수가 되었고, 1855년에 꼴레쥬 드 프랑스에서 실험의학의 교수가 되었다.
그의 작업들은 소화의 화학적 현상에 주목하였고, 특히 비자율 신경체계(système nerveux sympatique)에 주목하였다. [공감(sympathie)의 용어가 생리학적으로 비자율신경체계와 연관있으며, 공감은 심리적 공통성으로 알려져 있지만, 의식하지 못하는 본능의 인식이 생명에 내재함을 설명하는 것으로 확장될 수 있다.] 그는, 예를 들어 개의 순수성(pureté)[생명성]에서 생명현상만을 간직하기 위해서 개의 유기적 기능들 모두를 조금씩 조금씩 멈추게 하면서, 물리화학적으로부터 유래하는 것과 생명으로부터 유래하는 것 사이를 분리할 수 없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생명현상이 생명내의 물리화학적 진행과 분리 불가능하다. 즉 생명은 외재적인 것이 아니라 내재적 작용에 있다.]
생명에 대한 사유는 환원 불가능하다고 보았다. 생명 사유에서 “지도이념(idée directrice)”이 생명에 대한 사유가 물리화확적 현상들을 주제한다고 보았다. [벩송은 사유와 운동자(La pensée et le mouvant, 1934) 속에 들어있는 논문 「끌로드 베르나르의 철학(La philosophie de Claude Bernard」(1913), 즉 베르나르 탄생 100주년 기념하여 쓴 논문에서, 베르나르 철학에서 경험[실험]을 통하여 생명의 형이상학이 성립할 수 있음을 알린다. 이 형이상학에는 두 가지 중요성을 강조했다. 하나는 생명(생성)의 원리(principe vital)가 존재(형상)의 원리와 대등한 형이상학적 (질료)존재론이며, 다른 하나는 이 원리가 형식 논리 수리 논리에 버금가는 유기적이고 창조적(위에서 말하는 지도적) 이념(idée organisatrice et créatrice)라는 것이다. 후자에 설명을 보태면, 이 이념은 논리학의 공리와 정리가 설명을 풀어나가는 규제적이고 지도적 이념이라면, 생명의 원리의 이념은 유기화이며 또한 창조화이다. 그래서 생성(창조)의 철학이다. 우리는 이것의 토대가 형상이 아니라 질료라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여기서 한가지 덧붙일 것은 사회라는 조직체이다. 사회(société)의 지도 이념은 다른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 사회의 이념은, 생명의 이념의 생명체의 단일성을 유기화하는 측면인데 비하여, 인격들간의 연관을 다양체로서 조직화하는 측면이다. 유기화와 조직화 사이는 전자는 생물학적이고 후자는 심리학적이며, 전자는 분자적이라면, 후자는 인격적 통일체가 단위라는 것이다.]
소위 과학적 연구를 한 이 작가, 베르나르는 실험의학의 연구 입문(Introduction à l'étude de la médicine expériementale, 1865)에서 그의 방법의 일반적 원리를 제시하였다. [벩송은 그가 생리학을 독립된 과학으로 만들었다고 평가한다. 이것은 생리적 현상이 물질적 현상을 설명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질 수 없고, 새로운 학문의 영역으로 독립함을 의미한다. 이로서 생명은 물질과 다른 차원의 영역으로 성립한다.] (40WKH)
베텔하임 Bruno Bettelheim 1903-1990
오스트리아 출신 미국 정신분석학자. 베텔하임은 1903년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태어나서 1990년(87살)에 미국 메리랜드(Maryland)주의 실버 스프링(Silver Spring)에서 죽었다.
그는 1944년(41살)에 교육심리학을 가르쳤고, 그리고 1963년(60살)에 일리노이즈 (Illinois)주 시카고 대학에서 정신의학을 가르쳤다. 빈 요새(La Forteresse vide, 1967, tr.fr. 1969)의 작품으로 그는 어린이 정신병에 관한 작업들 때문에 세계적으로 알려졌다. 그는 시카고 대학의 정향발생학파(Ecole orthogénique de Chicago, Sonia Shankman Orthogenic School)를 설립하였다. 거기에서 사회 생활에 적응하는데 이르지 못한 자폐증 어린이들을 돌보고 책임지고 있다.
그의 작품으로는 사랑은 충분하지 않다(L'Amour ne suffit pas, 1950)(tr.fr.1970), 엄마들과 대화(Dialogue avec les mères, 1962)(tr.fr. 1973), 요정 이야기의 정신분석학(Psychanalyse des contes de fées, 1973)(tr.fr. 1976) 등이 있다. (43SLB)
비네 Alfred Binet 1857-1911
1857년 프랑스 프로방스 지방(Provence)의 알프스-마리띰(Alpes-Maritimes, 06)의 가장 큰 도시 니스(Nice)에서 태어나서, 1911년(54살)에 파리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실험심리학의 창설자로 알려질 수 있었을 정도로, 그는 단번에 지성[지능]의 연구로 방향을 잡았다. 그리고 그는 추론 심리학: 최면에 의한 실험적 탐구(La psychologie du raisonnement : recherches expérimentales par l'hypnotisme, 1886), 동물자기론(Le magnétisme animal 1887), 인격성의 변질(Les Altérations de la Personnalité, 1892), 실험심리학 입문(Introduction a la psychologie expérimentale 1894) 저술을 출판했다.
1903년(46살)에 지성의 심리학적 연구(L'Etude expérimentale de l'intelligence 1903)를 실현해 냈다. 그는 지체 아동들에게 주어진 교육을 개선하기 위하여, 그들의 단서를 찾아가는 수단을 탐구하는 공공교육 위원회에서 일을 맡았다. 그래서 그는 일련의 시험들을 만들어낼 생각을 했으며, 이 시험들은 정상어린이들이 몇 살의 나이에 이 시험을 통과했는지를 검토할 생각을 했다. 이리하여 그는 시몬(Théodore Simon 1873-1961)과 함께 최초의 “지능 측정 단계”(Echelle métrque de l'intelligence 1905 et 1908)를 만들었고, 이 측정은 정신 검사 방법으로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43SLB)
생물학(la biologie)
생물학이란 생명에 대한 과학이다. 이 용어는 1802년에 프랑스의 라마르크(chevalierde Lamarck, Jean-Baptiste-Pierre Antoine de Monet, 1744-1829)와 독일의 트레비라누스(Gottfried Reinhold Treviranus, 1776-1837)가 동시에 만들어 낸 것이다. 이 용어는 동물의 삶과 식물의 삶을 동시에 포함한다.
생물학의 방법은 다음과 같다. 1.유비(analogie)의 방법. 발견을 위한 방법이다. 이방법으로 뀌비에(Cuvier 1769-1832)는 말발굽의 뼈로부터 제3기 시신세(始新世)의 화석 포유류(Paléothérium)의 골격으로 전체를 구성할 수 있었다. 그가 재구성했던 것이, 그리고 나서 사람들이 발견했던 원본과 절대적으로 동일한 것으로 발견되었다. 2.변종들의 일치(concordance variée)의 방법. 증명을 위한 방법이다. 유비의 방법이 자구 증명되었을 때 그 방법은 진실이 된다.
그러나 생물학의 근본적 문제는 생명의 본성과 기원의 문제이다. 시원적 세포질의 핵이 하나의 명세서일 뿐일 텐데, 생명은 하나의 시원적 세포질(cytoplasme)로부터 발생하는가? 파리 교외의 세네와즈(Seine-et-Oise, 95)에 있는 뷔르(Bures) 실험실의 프랑스 과학자들이 직접적으로 공격받고 있는 것은 바로 이 근본적 문제[시원적 세포질 문제]에 있다. 이 과학자들의 탐구들은 현재 가장 멀리까지 밀고 나갔었다. 그래도 암의 원인에 관한 문제는 세포 생명의 기원의 문제에 연결되어 있는 것 같다.
참조: 뷔르-쉬르-이베뜨(Bures-sur-Yvette) 1971년에 창설된 파리11대학(l'Université Paris-Sud 11) 캠퍼스 일부가 있다. 이 대학에는 127개 탐구 실험실이 있다. 그 중에서 뷔르(Bures)에는 양봉과 농학연구소가 있다. (43LLG)
블랑(Louis Blanc 1811-1882)
역사가, 정치가, 사회주의 프랑스 이론가이다. 그는 [스페인의 수도] 마드리드(Madrid)에서 1811년에 태어나, 깐느(Cannes)에서 1882년에 죽었다.
신문기자로서 그는 노동의 조직화(Organisation du travail)(1839)란 소책자(brochure)를 내었고, 그리고 나서 노동권(Droit au travail)이란 책을 출판하였다. 여기에 “각자에 필요에 따라; 각자에게 능력에 따라(à chacun selon ses besoins ; à chacun selon ses facultés)”라는 구절이 나온다. 또한 이 책에서 그는 매우 실증적이고 독창적인 이론을 발전시켰다.
그는 [자유] 경쟁의 원리를 비판하고, “사회적 작업장(atliers sociaux)” 속에서 노동자들의 연합에 대한 주장을 옹호하였다. 그러나 그의 경제적 사상의 독창성은 다음과 같은 생각 속에 남아 있다. 국가는 사회적 개혁의 필수적 요소들 중의 하나이라고 한다. 따라서 그의 사상은 공산주의에 대립되어 있다.
그는 현존하는 국가를 파괴하는 사회 혁명의 사상 대신에 보다 현실적이고 근대적인 사회 개혁과 국가 행정당국의 개혁으로 대체하는 계획을 주장했다. 이 때 국가는 단지 사회 장치를 효과적으로 실현할 권력만을 소유하는 것으로 한정한다.
그는 프랑스 혁명의 역사(Histoire de la révolution française(1847-1862)를 썼다. (39PLH)
블로흐 Ernst Bloch 1885-1977
유태계 독일 철학자. 블로흐는 1885년 독일 남서부 라인란트-팔쯔(Rheinland-Pfalz)주의 루드비히샤펜(Ludwigshafen am Rhein)에서 태어나 1977년(92살) 바덴-뷔르템베르크(Baden-Württemberg)주의 튀빙겐(Tübingen)에서 죽었다.
그의 반나찌즘 저작, 이 시대의 유산(Erbschaft dieser Zeit, 1935; Héritage de ce temps)은 그를 독일을 떠나 뉴욕으로 가도록 강요했다. 이차세계대전 끝나고 나서, 그는 서독의 프랑크푸르트의 괴테 대학의 교수 제안을 마다하고, 1949년(64살) 동독의 라이프찌히 칼 맑스 대학의 교수로 갔다. 그 당시 그는 희망의 원리(Das Prinzip Hoffnung, 3 Bde, 1954-1959; Principe espérence)를 출판했다. 1957년(72살)에 수정주의자로 고발되어었고, 1959년(74살)에 청년을 타락시켰다는 고발되어서, 그는 공직에서 은퇴했다. 1959년에 희망의 원리 제3권은 동독에서 출판되었고, 서독에서는 세 권 합본을 출판하였다. 그리고 그는 서부독일 튀빙겐 대학에서 저술을 계속할 수 있었다. 그는 크리스트교에서 무신론(Atheismus im Christentum, 1968), Experimentum Mundi, Frage, Kategorien des Herausbringens, Praxis, 1975; Experimentum mundi: question, catégories de l'élaboration, praxis)를 출판했다. 맑스주의 전망에서 그리고 스탈린의 정통주의에 반대하여, 그는 항상 필연적인 “유토피아”들이 있다는 것, 그리고 사회적 유토피아는 소외가 아니고, 인간에게 전반적 역사를 사유하는 수단을 주는 의식적 파악이라는 것을 주장한다. (43SLF)
블롱델(Maurice Blondel, 1861-1949)
블롱델은 1861년 [부르고뉴지방, 21 dép. Côte-d'Or의 주도시인] 디종(Dijon)에서 태어나 [프로방스 지방, 13 dép. Bouches-du-Rhône의 부도시인] 엑상프로방스(Aix-en-Provnence)에서 몰했다.
그는 1895년부터 엑스(Aix) 대학(faculté)에서 가르쳤다.
행동에 대한 그의 철학은 진실로 행동의 종교였고, 이 종교는 작동하는 의지의 경험 속에서 초현상적인 세계, 육화된 신앙의 세계를 발견하는 행동의 종교이다.
그의 박사학위논문은 행동: 생명과 실천과학에 대한 비판적 시론(L'Action, essai d'une critique de la vie et d'une science de la pratique, 1893)이다. 이 작품은 그대로 그의 나머지 작품들 관념론의 착각(L'illusion idéaliste, 1898)에서 크리스트교정신과 철학(L'Esprit chrétien et la philosophie, 1939)까지 영향을 미친다. (39RKF).
보에티우스 Boèce 480년경-525
철학자, 국가적 인물, 라틴계 시인. 그는 480년 경에 로마에서 태어나, 525년(약45살)에 파비아(Pavia, Pavie)가까이에서 [사형 당해] 죽었다. [라벤나(Ravenna)라는 설도 있으나, 위키에는 파비아에 보에티우스 묘가 산 피에트로 성당(La basilique San Pietro in Ciel d'Oro, Saint-Pierre-au-Ciel-d'or)에 있다고 한다.]
테오도리쿠스(Théodoric le Grand, lat. Flavius Theodoricus, vers 451-526, 동고트 왕 재위 471-526) 황제 치하에서 장관[집정관]으로 지냈으며, 철학의 위안(Consolation de la philosophie, 524)을 썼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작품을 주석하였고, 철학적 주석의 방법을 이용한 초기학자들 중 한사람이다. 이 방법은 교육에서 긴 전통으로 소개된다.
참조: 이자고게 주석(Isagoge de Porphyre de Tyr, 508)(43SLF)
뵈메(Jacob Böhme 1575-1624)
야콥 뵈메는 1575년 독일 괴르리쯔(Görlitz) 가까이에 있는 알트자이덴베르크(Altseidenberg)에서 태어나 1624년 괴르리쯔에서 죽었다.
토마스주의자들이 아리스토텔레스를 “그 철학자”라 부르듯이, 그는 “그 독일의 철학자”란 명칭을 얻었다. 그는 처음에는 구두장이였다.
그의 첫 번째 작품 오로라(Aurora, 1612)는 신, 인간, 자연에 관한 그의 계시(révélation)를 내용으로 하고 있다. 그는 자신의 수사적 문체를 신적 계명(illumination)에 맞게 했다. 이 신적 계명이란 모든 인식의 첫 번째 조건이었다. [신적 계명을 신비적 인식 즉 직관적 인식으로 보아도 좋다.]
뵈메는 칸트(Immanuel Kant, 1724-1804) 다음의 철학자들, 즉 피히테(Johann Gottlieb Fichte, 1762-1814), 셸링(Friedrich Wilhelm Joseph von Schelling, 1775-1854), 헤겔(Georg Wilhelm Friedrich Hegel, 1770-1831) 등에게 주목을 받았고, 독일 낭만주의 전 흐름에 영향을 미쳤다.
우리에게 영향을 준 그의 작품으로 삼중 삶(Triple vie), 세 가지 원리(Trois Principes) 등이 있고, 그의 가장 유명한 작품은 큰 신비(Mysterium magnum, 1623)이다.
(40WKH)
보날(Louis, vicomte de Bonald, 1754-1840)
보날은 프랑스 철학자이다. 그는 1754년 랑그독 지역(Languedoc)지방의 아베롱(Aveyron, 12)주의 밀로(Millau) 가까이에 있는 샤또 드 모나(Château de Monna)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1840년 죽었다.
그는 1785년에서 1789년에 밀로 시장이었고, 1790년 아베롱주 의회의 의장이었다. 그는 군주제와 종교를 옹호하였다. 그는 1816년 아카데미 프랑스 회원이 되었다. 그의 작품으로 정치와 종교 권력론(Théorie du pouvoir politique et religieux, 1796), 자연법과 사회질서(Essai analytique sur les lois naturelles de l'ordre social, 1800), 철학적 탐구(Recherches philosophiques, 1818) 등이 있다.
보날드는 인간의 사회적 본성은 루소가 말하듯이 계약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오히려 인간을 창조한 신으로부터 온다. 왜냐하면 그 인간은 신으로부터 언어를 부여받아 사회적 존재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종교적 사회는 시민적 사회로부터 분리되지 않는다. 이 철학자의 생각들은 19세기의 군주제 사상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 (42MKJ)
행복 le bonheur
행복이란 완전히 만족하는 상태를 말한다.
일반적으로 고대의 도덕과 근대의 도덕을 구별한다. 고대인에게서 행복은 인간의 최후의 목적이다(쾌락주의, hédonisme). 근대의 도덕은 크리스트교의 교리로 표시되는데, 이들에게 덕(vertu)이 최후의 목표이다. 이 때 덕이란 행복을 칭찬하는데 있으나, 행복을 소유한다고 해서 그 자체로 도덕적 가치를 가지는 것은 아니다(칸트Kant의 엄격주의)
피히테(Johann Gottlieb Fichte, 1762-1814)나 겔렌(Arnold Gehlen, 1904-1976)에서 나온 요즘의 철학에서는 행복에 실증적 가치를 부여한다. 이 철학은 행복에서 지혜의 형식을 보았다. 지혜는 자기 존재의 근본적인 경향성(tendances)을 완전하게 인식하고 또 만족할 줄 아는 자에게서 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상적인 “행복이 우리의 모든 성향(inclinations)의 만족”(칸트)이라는 것이 사실이라면, 실재로 행복하기 위해서 인간은 스스로 자기의 가장 깊은 성향을 스스로 제한 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행복은 쾌락(plaisir)에 환원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행복을 다루는 자들은 쾌락을 경멸하는 잘 못을 범하지 않는다. 그런데 사실상 쾌락은 곧 바로 바뀌어 “싫증나게 하고, 또 혐오하기”(알랭 Alain, 본명 Emile-Auguste Chartier, 1868-1951)십상이다.
행복은 결코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항상 인간 활동의 결과이다. 사람들은 매우 자주 행복을 자유로운 작업과 동일시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사람들은 쾌락(plaisir)과 환희(joie)를 행복과 지복(béatitude)를 구별한다. 전자의 것들은 우리에게 사건들로부터 오는 것이고, 후자의 것들은 우리 자신에서 끌어내야 하고 항상 우리의 범위 안에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강하고 가장 순수한 행복은 자주 가장 원시적인(primitif) 것이다. 이 원시적인 것은 살아가는 감정, 작동하는(agir) 감정과 동일시된다.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행복일 경우가 있다. 이 행복은 원초적인 생명에 대한 행복일 것이다. 이것이 디지탈적인 사유에 포함될 수 있겠는가? 그렇다고 삶 자체가 고(苦, douleur)라는 사람에게 행복을 말할 수 있을까? 그들에게 행복은 체념이이나 무상일 것이다.]
알랭(Alain, 본명 Emile-Auguste Chartier, 1868-1951)은 “행복이란 삶(vie) 자체의 향기이다. ... 작동하는 것은 환희이다. ... 모든 삶은 희열의 영역이다”라고 말한다.
또한 사람들은 럿셀(Bertrand Arthur Willam Russell 1872-1970, 영국)의 행복론(A la conquete du bonheur)을 읽을 수 있다.(40PKE)
보산케트(Bernard Bosanquet, 1848-1923)
보산케트는 영국 철학자이다. 그는 1848년 노템버랜드(Northumberland)의 안위크(Alnwick)에서 태어나 1923 런던에서 죽었다.
그는 논리학, 미학, 도덕론에 관한 수많은 연구서를 냈다. 그 중에서 미학사(History of Aesthetics, 1892), 국가의 철학적 이론(The Philosophical Theory of State, 1899) 등이 있다. 그 사상은 헤겔 사상에 물들어 있다. (42LMH)
불교 bouddhisme
부다 사키아무니(Sâkyamuni, 석가, 釋迦)가 기원전 6세기경에 창설한 종교와 학설. 사키야(Sakyas) 즉 갈대들(roseaux)의 고독을 의미한다. [석가(Sâkyamuni, Gotama Siddhârtha, 563?-483?]는 BC 563년 4월 8일(음력) 해뜰 무렵 북인도 카필라 왕국(지금의 네팔 지방)의 왕 슈도다나(Suddhodâna)와 마야(Mâyâ)부인 사이에서 태어났다.]
힌두이즘에서는 반박되고 있지만, 중국 전설에 의하면, 부다를 노자(老子)와 동일시한다. 불교는 기원전 6세기 말에 네팔의 접경에 있는 인도에서 나타나서, 아시사 여러 나라에 여러 형태로 퍼졌다. 학설은 모든 아집(désirs)의 소멸을 목표로 한다. 아집은 모든 사물의 실재성을 우리에게 감추고(Mâyâ, voiler) 덮고 있다. [철학의 동서양이 모두 진실의 은폐를 드러내는 것이다. 탈은폐(aletheia)이다]
요가의 수행을 기초로 하는 금욕의 끝은 광명(illumination) 즉 열반(nirvana)에 이르는 것이다. 지혜는 영혼의 안식인 완전한 지혜의 획득에까지 이르러, 윤회(transmigration)로부터, 즉 다른 생명 속으로 영속적으로 재생하는 것으로부터, 해방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독단적 학설은 브라만 철학으로부터, 즉 고통은 현존에 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독단으로부터 빌려온 것이다. 무지에 의해 생겨난 현존의 감정은 그 자체가 아집(욕망)에 연결되어 있다. 불교는 사유의 형식이라기보다 생명(la vie 삶)의 형식이며, 철학적이라기보다 종교적이다.
불교 분파들 가운데 “요가”파, “탄트라”는 중국에서, “선”(禪) 파는 일본에 널리 퍼져 있다. (43SLH)
부트루(Emile Boutroux 1845-1921)
프랑스 철학자이며, 1845년 파리 교외의 오트 드 센(Hauts-de-Seine, 92)의 몽루쥬(Montrouge)에서 태어나 1921년(76살)에 파리에서 죽었다. [그의 부인은 수학자 푸앙카레(Henri Poincaré 1854-1912)의 누이인 알리스 푸앙카레(Alice Poincaré)이며, 그의 아들은 수학자, 수학철학자인 피에르 부트루(Pierre Boutroux, 1880-1922)이다.. ]
자연법칙의 우연성에 대하여(De la contingence des lois de la nature, soutenance de thèse, 1874)의 저자인 그는 1877년 파리의 고등사범학교에서 그리고 1885년에 소르본에 가르쳤다. [1898년에 도덕 정치학 아카데미(Academie des sciences morales et politiques) 회원,] 1912년에 프랑스 아카데미 회원이었다.
부트루는 자연 속의 현상들의 다양한 질서들, 기계적 질서, 물리화학적 질서, 생물학적, 심리학적질서 등은 우연적이고 환원할 수 없는 방식으로 서로서로 포개져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또한 과학과 철학에서 자연법칙의 관념(De l'idée de loi naturelle dans la science et la philosophie, 1895), 철학사 연구(Etudes d'histoire de la philosophie, 1897)를 썼다. [그리고, La Grece vaincue et les premiers stoiciens (1875), La Monadologie de Leibnitz (1881), Socrate, fondateur de la science morale (1883), Pascal (1900), La Philosophie de Fichte: Psychologie du mysticisme (1902), Science et religion dans la philosophie contemporaine (1908), William James (1911) 등 다수의 작품이 있다.] (42VLJ)
브라만 brahman
인도 철학에서 보편적 삶의 표현으로서 영혼을 의미한다.
브라만[보편 영혼]은 아트만(atman)에 대립된다 아트만은 각 인간의 개별 영혼을 말한다. (43SLH)
브레이어 Emile Bréhier 1876-1952
프랑스 철학자이다. 그는 로렌(Lorraine)지역의 뫼즈(Meuse, 55)의 바르뒥(Bar-le-Duc)에서 태어나 1952년(76살)에 파리에서 죽었다.
그의 기념비적 작품 철학사(Histoire de la philosophie, 1926-1932)에는 소크라테스 이전 시기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인두이즘 철학도 보충으로 포함하고 있다. (43SLH)
브렌타노(Franz Brentano 1838-1917)
독일 철학자이자 심리학자이다. 그는 1838년 마리엔베르그(Marienberg)에서 태어나서 1917년(79살)에 쮜리히(Zürich)에서 죽었다. 그는 1895년(57살)까지 뷔르쯔부르그(Würzburg)대학에서, 비엔나 대학에서 철학 교수였고, 그리고 1915년(77살)부터 플로랑스에서, 쮜리히에서 철학교수였다. 그는 논리학을 심리학과 구별하였고, 의식의 현상에 작용하는 법칙을 서술한다 라는 현상학을 기초하였다. 그는 지향성(intentionnalité) 개념을 통해 후설(Edmund Husserl, 1859-1938)에게 영향을 주었다.
그가 남긴 작품으로 경험적 관점의 심리학(Psychologie du point de vue empirique, 1874-1928)), 도덕의식의 기원에 관하여(Sur l'origine de la morale, 1889), 심리현상들의 분류(Sur la classification des phénomenes psychiques, 1911) 등이 있다. (42UKF)
브루노 Giordano Bruno 1548-1600
[베르그송은 영웅으로 소크라테스 예수를 예로 든다. 우리는 브루노가 들어가야 한다고 본다. 우리 땅에는 수운 최제우, 노동자 전태일. 이들은 위 처럼 단순한 주장을 했다. ]
이탈리아 사상가 저술가. 그는 1548년 나폴리 왕국의 놀라(Nola)에서 태어나, 1600년(52살)에 로마에서 죽었다.
그의 생애는 사상의 자유의 상징이다. 그는 17살에 나폴리(Napoli, Naple)에 있는 도미니크파의 수도원에 들어갔다. 그는 신학을 공부하고 또한 고대 철학과 근대 철학자들을 연구했다. 헤라클레이토스, 데모크리토스 등도 연구했다. [1573년(25살)에 성직 서품을 받았다] 범신론으로부터 영감받은 그의 사상 때문에 1576년(28살)에 로마 교황청으로부터 그는 이단으로 단죄받았다. 그는 우선 스위스 제네바에, 그리고 프랑스 툴루즈, 파리로 도망 다녔다. 그는 [1583년]영국의 옥스퍼드의 교수를 지내기도 하고 독일, 프라하, 비엔나에 체류하기도 하였다. 비엔나에서 그는 교황청으로 이송되었고, [1592년 체포되었다] 고문을 받았다. 그는 자신의 생각을 바꾸지 않았다. 그래서 교회는 그를 산채로 불태워 죽였다.
죠르다로 브루노는 르네상스의 여명을 알리는 대표자이며, 독단에 반대하는 개인적 반성의 표상이다. 신플라톤주의의 영감을 받아서 그는 세계를 인식하기 위하여 경험과 이성만을 사용할 것을 권했다. 또 추상적 신앙과 전통의 사용 대신에 경험과 이성의 사용을 대체할 것을 권했다.
그는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미신과 대결하고 도덕 개혁을 제안하는] 승리하는 짐승의 추방(Spaccio de la Bestia Trionfante; L'expulsion de la bête triomphante, 1584), 원인 원리 단위(De la causa, principio, et Uno; De la cause, du principe et de l'unité, 1584), 우주와 세계의 무한에 대하여(De l'infinito universo et Mondi; De l'infini, de l'univers et des mondes, 1584) (43SLH)
브룅쉬비끄(Brunschvicg 1869-1944)
브룅쉬비끄는 프랑스 철학자이며 철학사가이다. 그는 1869년 파리에서 태어났으며, 1944년 사브와(Savoie)지방의 사브와(73 dép)주의 엑스레방(Aix-les-Bains)에서 죽었다. [독일 나찌 치하에서 사브와로 피난 간 모양이다.]
1909년 소르본 대학의 교수가 되었던 그는 간트 비판이 발단이 되어, 제반과학을 깊이있게 연구한 것에 비추어서, 인식의 분석을 다시 다루었다. 1879년 판단의 양상론(Modalité du jugement)에서 판단을 다룬 이후, 그의 철학은 수학 철학의 제 단계(Eapes de la philosophie mathématique, 1912)를 통하여 수학에서 정신의 무한한 창조적 활동을 높이 평가했다.
철학사에 관한 반성에 대한 방법으로 스피노자와 그 동시대인들(Spinoza et les contemporains, 1894)을 썼으며, 이 책은 각 저술가들에서, 좋은 것 가운데서 나쁜 것을 골라내며, 진리와 거짓을 분간하려 하였다. 그의 방법은 가끔은 순수 객관성을 위반하기도 한다. (42NKC)
부버 Martin Buber 1878-1965
오스트리아 출생 이스라엘 철학자. 부버는 1878년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태어나서 1965년(87살)에 이스라엘 예루살렘에서 죽었다.
그는 유태인 전통에 대한 연구를 새롭게 했고, 그리고 하시딤(hassidim)에 대한 연구를 생애를 보냈다. 하시딤의 역사(Histoire du Hassidim)를 썼다.
[시리아의 셀레우코스 왕조(Les Séleucides) 8대왕, 안티오코스 4세, 에피파네스(Antiochus IV, Epiphanes, BC 215-164, 재위 175-164)시절에 예루살렘에서 마카베오 형제의 유대인 반란의 시작했다. 안티오코스 4세의 그리스화 정책과 종교탄압 정책에 강한 반발로 일어난 것이 바로 하시딤 운동(Hasidim))이다. 하시딤은 히브리어로 '경건'을 의미한다.]
그의 사회 철학은 공동체 안에서 개인들 상호관계에 기초하고 있다. 작품으로는 나와 너(Je et Tu, 1923), Gog et Magog, 1941, 유토피아의 길들(Les chemins de l'utopie, 1949). (43SMC)
뷔셰 Philippe Buchez 1796-1865
프랑스 철학자이자 정치가이다. 1796년에 나뮈르 지방, 그 당시 아르덴(Ardennes 08)주, 현재는 벨기에에 있는 마따뉴 라 쁘띠뜨(Matagne-la-Petite)에서 태어나 1865년(69살)에 프랑스 미디 필레네 지역(Midi-Pyrénées) 아베이롱(Aveyron 12)주의 로데(Rodez)에서 죽었다.
그는 신문 아틀리에(L'Atelier)를 통해서 기독교 사회주의의 퍼트리는 주요 인물들 중의 한사람이다. 그는 카톨릭과 진보의 관점으로 본 철학개론(Essai d'un traité complet de philosophie, du point de vue du catholicisme et du progrès, 1838-1840)(3권)을 남겼다. (43SMC)
뷔데 Guillame Budé 1467-1540
프랑스 인문주의자. 1467년에 파리에서 태어나 1540(73살)그곳에서 죽었다. 그는 프랑스에 그리스 연구와 법의 과학을 퍼트렸다. 그리고 그는 “꼴레쥬 드 프랑스”(Collège de France)의 창설에 기여하였다. [이 교육기관은 1530년 뷔데가 프랑스와 1세에게 건의하였고, 왕이 지불하는 이 교수들은 파리 대학이 무시하는 학문을 가르치게 하였다.] (43SMC)
뷔퐁(Georges Louis Leclerc, comte de Buffon, 1707-1788) 인명1001뷔퐁
뷔퐁은 프랑스 박물학자이며 작가이다. 그는 1707년 부르고뉴 지방(Bourgogne)의 꼬뜨드도르(Côte de d'or, 21)주에 있는 몽바르(Montbard)에서 태어나서 1788년(81살)에 파리에서 죽었다. [*린네(Carl von Linne, Carolus Linaeus, 1707-1778) 스웨덴의 식물학자.]
그는 우선 제스위트 학교에서 배웠으며, 그리고 법학으로 학사학위를 하고, 프랑스와 외국을 여행하였다. 그는 1739년(32살)에 자연사(Histoire naturelle)를 쓴다는 거대한 생각을 품었다. 그 책은 그가 죽기 전까지 36권이 출판되었다. 천천히 스스로 변형한다는 자연에 대한 그의 이론은, 기후와 대륙의 느린 진화도 포함하여 지구상에 생명의 조건에 관해도 또한 심지어 인간의 전형을 포함하여 살아있는 종들에 관해서도, 진화론을 알리는 명철한 관점을 구성하고 있다.
그는 문학적 작품과 통속적 과학에 대한 감성으로 스타일에 관해 기초를 놓았다.“스타일은 그 사람 자체이다.”("Le style, c'est l'homme même"). 이 감성은 분명하게 약간 좁은 의미로 남아있다. 그러나 이 감성은 그의 작품에 예외적인 명석함을 부여하기도 한다.
저술에는 도덕 산술학의 시론(Essai d'arithmétique morale)도 있다. (43LLF)
관료정 bureaucratie
사무[행정]들의 행실에 미치는 행정직[행정관료 및 제도]의 힘과 영향.
관료정[관료행정]이란 언제나 기생하는 또는 남용하는 행정조직의 이탈로서 묘사된다. 1843년부터 맑스(Karl Marx, 1818-1883)는 헤겔의 정치법의 비판(Critique du droit politique hégélien, 1843)에서 관료적 현상이 생겨나는 것을 묘사했다. [미국 사회학자] 글드너(Alvin Ward Gouldner, 1920-1980)는 산업 관료체제의 패턴(Patterns of Industrial Bureaucracy 1954)에서 엄밀한 [체제] 순응주의(conformisme)를 묘사했는데, 이 순응주의는 정치지도자, 집행자들, 공중들 사이에 충돌을 일으킨다는 것이다. 프랑스에서 크로지에(Michel Crozier, 1922-)는 관료적 현상(Phénomène burocratique, 1964)에서 관료의 발생을 묘사하고, 봉쇄된 사회(Société bloquée, 1970)에서 “프랑스 관료정의 모델”로서, 집중화, 지도자와 공무원 사이의 거리, 소통의 봉쇄, 구성원의 안정감 등을 분석하였다. 르포르(Claude Lefort 1924-)의 관료정 비판(Eléments d'une critique de la bureaucratie, 1971)과 그레프(X. Greffe ??)의 관료정의 경제분석(Analyse énconimique de la bureaucratie, 1981)은 관료정 현상의 분석을 현실화하였다. (43SMC)
뷔리당의 당나귀 âne de Buridan
스콜라 철학자 뷔리당(Jean Buridan 1300-1358)에게 부여한 유명한 우화. 이 우화는 물통과 여물통 사이에서 두 개의 동등한 재화들 사이에 선택을 할 수 없다면 배고파서 죽을 것이라는 당나귀의 연출 장면이다. [한편으로 배고픔 다른 한편으로 목마름이 동등한 경우에, 당나귀가 선택하지 못하고 굶어죽는다고 한 것이다.]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믿는 것과 반대로 이것은 부조리(l'absurde)의 증명이다. 실재상으로 그 선택은 여전히 이루어지고 있고, 또 객관적 모든 동기에 독립해서 행동의 역동성이 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우리에게 지금까지 전승되어 오는 뷔리당이 작품들 속에서 이 우화의 흔적을 발견하지 못한다. [뷔리당이 말한 것으로 전해질 뿐 아직 그 흔적을 발견한 적은 없다.] (43SM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