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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성 바우덕이축제.
일시 : 2024.10.05(목)일. 아내동행.
장소 : 안성 안성맞춤랜드.
09 : 30경 . 천안역앞에서 201번 시내버스 타고.
10 : 15경 봉산회전로타리앞 안성시청(한마음세타장)종점도착.
10 : 30. 봉산회전로타리 정류소에서 바우덕이축제장가는 셔틀버스타고.
환경대 시점에서 사람이 많아 만차라서 한대는 그냥가고 다음차를탔다.
10 : 54. 안성맞춤랜드 행사장도착.
11 ; 05. 반달바당에서 각동별 사물놀이 경연대회.
11 : 20. 메인무대에서 남사당놀이 관람.
12 : 18. 예장터거리 둘러보고.
13 ; 00~14 : 00. 최재성의 렉쳐콘서트(남사당의 여섯 놀이공연얘기).
14: 26. 천문대 둘러보고.
14 : 35경. 환경대가는 1번 셔틀버스타고.
14 ; 55. 안성 봉산로터리 하차하여
15 : 20경. 천안오는 201번 버스타고 .
16시경 천안 터미널 도착.
안성남사당바우덕이축제[ 安城男寺黨-祝祭 ].
경기도 안성시에서 매년 9월 말이나 10월 초에 열리는 축제. 안성남사당바우덕이축제는 2001년에 시작되었다. 축제의 명칭은 안성 남사당패와 19세기 말에 15세의 나이로 이 남사당패를 이끌었던 바우덕이라는 여자 꼭두쇠에게서 축제의 이름이 비롯되었다. 남사당패의 여섯 가지 놀이 중 하나인 덜미(꼭두각시놀음)가 1964년에 중요무형문화재 제3호로 지정되었으며, 1988년에 여섯 가지 놀이가 모두 중요무형문화재 제3호로 확대 지정되었다.
남사당패는 솟대쟁이패나 사당패, 걸립패와 함께 전국적으로 퍼져 있던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유랑 예인 집단이다. 남사당은 한자로 男寺黨, 男社堂, 男寺堂으로 표기했는데, 이 중에서 어떤 표기가 정확한지는 현재의 문헌과 자료로는 파악하기 어렵다.
남사당패는 꼭두쇠가 우두머리로 패거리를 대내외적으로 책임졌으며, 그의 능력에 패거리 전체의 운명이 달려 있었다. 조직은 체계적으로 구성되었고, 50명 안팎의 인원을 필요로 하였다. 곰뱅이쇠는 꼭두쇠를 보좌하며 패거리의 규모에 따라서 두 사람일 때도 있었다. 곰뱅이란 남사당패의 은어로 ‘허가’란 뜻이며 곰뱅이쇠는 놀이마당을 열어도 좋다는 마을사람들의 사전승낙을 받는 일을 맡아보았다.
바우덕이는 19세기 중반에 안성 남사당패를 이끌었던 꼭두쇠로 22년의 짧은 생애를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남사당패는 남자들의 집단이기 때문에 남자가 우두머리를 맡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바우덕이는 여자 꼭두쇠였다. 바우덕이는 다섯 살 무렵에 안성 남사당패에 들어가 열다섯 살에 꼭두쇠가 되었다고 한다. 대원군은 경복궁 공사를 좀더 원활하게 진행하기 위해 소리꾼들을 불러들였는데, 1865년에 바우덕이와 그 패도 부름을 받고 서울로 올라가 놀이판을 벌였다. 이때 공사장 인부들에게 인기를 독차지했다고 한다. 대원군은 바우덕이의 기예를 칭찬하는 뜻으로 옥관자(玉貫子)를 하사했다. 옥관자는 조선시대 당상관 이상이 사용하는 것으로 바우덕이라는 천민으로 대표되는 남사당패에 대한 새로운 평가가 내려졌던 것이다.
안성시가 주최하고 안성남사당바우덕이축제위원회 주관으로 치러지는 이 축제는 2001년에 최초로 개최되었다. 축제는 안성이 남사당의 발생지이자 조선시대 최초의 대중연예인이자 국가로부터 인정을 받은 바우덕이를 배출한 것을 기념하고, 조선 전국 3대 장터였던 안성 옛 장터를 재현하여 지역 경제를 활성화시키기 위한 목적에서 시작되었다.
안성남사당바우덕이축제는 전통적으로 마을에서 남사당놀이를 해도 좋다고 허락을 받는 것에서 남사당 공연이 시작된 것에 착안하여 곰뱅이트기로부터 시작된다. 안성의 여러 자치 단체 주민들이 참여하는 길놀이가 아울러 행해진다. 길놀이에는 주민들이 다양한 주제에 따른 복장으로 참여하여 시민 축제의 성격을 강화한다. 이 축제에서 핵심이 되는 공연으로 남사당의 여섯 놀이 공연이 있으며, 일반 공연으로 음악회와 청소년 음악회가 있다. 아울러 다양한 체험 공간을 마련하여 시민들이 직접 남사당놀이를 경험할 수 있게 한다. 장작패기 등의 민속놀이도 직접 체험할 수가 있다. 그 밖에도 전국풍물경연대회나 풍물그리기대회를 개최한다. 또한 안성의 옛날장터와 가축장터를 재현하여 축제에 흥겨움을 제공한다.
남사당의 놀이는 이 축제의 핵심이다. 여섯 놀이의 첫째는 풍물인데 충청도와 경기 이북의 웃다리가락을 바탕으로 한다. 또 풍물이 관중의 흥미와 주목을 끌 수 있도록 연기를 확대한 묘기 중심으로 놀이가 최소 24명의 인원으로 구성되어 있다. 둘째 놀이는 버나인데 다른 말로 대접돌리기라고도 한다. 셋째 놀이는 살판으로 다른 말로 땅재주라고도 한다. “잘하면 살판이요, 못하면 죽을 판”이라는 속담에서 생긴 이름이다. 넷째는 어름이라고 하는 줄타기이다. 다섯째 순서인 탈놀음은 덧뵈기라고도 한다. 덧뵈기는 다른 지역에서 연희되는 전형적인 탈놀음보다는 간소화되어 있다. 마지막 놀이인 덜미는 꼭두각시놀음으로도 불리는데 박첨지놀음 또는 홍동지놀음이라는 명칭도 있다
행사는 전야제와 길놀이를 제외하고 시내에서 조금 먼 안성 종합운동장 일대에서 행해진다. 예산은 현재 안성시가 주축이 되어 부담을 하며 경기도와 국가가 일부를 분담하고 있다. 축제가 시작된 지 몇 해 되지 않았지만 시민들의 참여가 활발하며 안성시민 이외에 외부에서도 많은 참여를 하여 정착되어 가는 것으로 보인다.
[네이버 지식백과]
바우덕이(김암덕 (金岩德 .) 1848∼1870.
바우덕이는 조선시대 유일의 남사당패 여성 꼭두쇠로 본명은 김암덕(金岩德)이다.
조선시대 안성에서 가난한 소작농의 딸로 출생했으며, 5세때 안성 청룡사 안성남사당에 입단했다. 15세때 안성남사당 꼭두쇠로 추대되어 조선시대 유일의 남사당패 여성 꼭두쇠가 되었다.
남사당이란 조선 후기 장터와 마을을 다니며 춤과 노래, 곡예를 공연했던 단체로서 전문 공연예술가들로 결성된 우리나라 최초의 대중연예집단이라 할 수 있다. 남사당은 어린아이부터 노인까지 40∼50여명으로 조직되었고 이 단체를 이끌어 나간 대표를 '꼭두쇠'라고 불렀다. 그 밑에는 곰뱅이쇠, 뜬쇠, 가열, 삐리, 저승패, 등짐꾼 등으로 직책을 나누었다.
이들은 꼭두쇠를 중심으로 공연계획을 수립하여 기량을 연마하였고 전국 장터를 다니면서 풍물놀이는 물론이고 줄타기, 탈놀이, 창(노래), 인형극, 곡예(서커스)를 공연하였다.
바우덕이는 1865년 고종 2년 경복궁 중건 현장에 안성남사당패를 이끌고 출연하여 뛰어난 기예(技藝)를 선보였으며, 이에 대원군으로부터 당상관 정삼품의 벼슬과 옥관자를 하사받은 것으로 유명하다.
이 때부터 바우덕이가 이끌던 안성남사당패는 "바우덕이"라는 인물명칭으로 불리게 되었으며, 전국을 다니며 공연활동을 펼쳤다. 바우덕이는 1870년 폐병에 걸려 23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네이버 지식백과]
09 : 30경 . 천안역앞에서 201번 시내버스 타고.
10 : 15경 봉산회전로타리앞 안성시청(한마음세타장)종점도착.
10 : 30. 봉산회전로타리 정류소에서 바우덕이축제장가는 셔틀버스타고.
환경대 시점에서 사람이 많아 만차라서 한대는 그냥가고 다음차를탔다.
안성 봉산회전로타리.
10 : 54. 안성맞춤랜드 행사장도착.
12번이 셔틀버스 정류장. 7번이 메인무대.11번이 반달마당. 8.9번이 실내외공연장.4번이 옛장터.
행사장을 내려가며 본 좌측 안성을 빛낸인물들.
행사장을 내려가며 본 우측 언덕위의 천문대.
수변공원과 뒤로 상설공연장인 실내공연장.
반달마당 가는길.
11 ; 05. 반달바당에서 각동별 사물놀이 경연대회.
동별 경연대회.
수변공원과 천문대.
11 : 20. 메인무대에서 남사당놀이 관람.
남사당상설공연장.
남사당놀이 여섯마당중 마지막 여섯마당인 덜미(꼭두각시놀음)전시장.
남사당놀이 여섯마당중 둘째마당인 버나(대접돌리기) 체험장.
상설공연장 2층은 연화관.
12 : 18. 예장터거리 둘러보고.
13 ; 00~14 : 00. 최재성의 렉쳐콘서트(남사당의 여섯 놀이공연얘기)
남사당 여섯 놀이의 첫째는 풍물. 둘째 놀이는 버나인데 다른 말로 대접돌리기.
셋째 놀이는 살판으로 다른 말로 땅재주라고도 한다. 넷째는 어름이라고 하는 줄타기.
다섯째는 탈놀음으로 덧뵈기라고도 한다.
마지막 여섯째 놀이인 덜미는 꼭두각시놀음으로도 불리는데 박첨지놀음 또는 홍동지놀음이라는 명칭도 있다
천문대여 정자로 오르며 뒤돌아 본 눈썰매장
안성천문대.
14: 26. 천문대 둘러보고.
지구에서 1kg은 태양에선 28kg. 수성에선 380g. 달에서는 170g이란다.
14 : 35경. 환경대가는 1번 셔틀버스타고.
14 ; 55. 안성 봉산로터리 하차하여
15 : 20경. 천안오는 201번 버스타고 .
16시경 천안 터미널 도착.
2016.1.17(일) 내고향 안성 서운산(548m)에 쓴 바우덕이 묘와 사당 사진을 옮겨본다.
청룡저수지로 올라가는 34번국도에서 바우덕이묘 들어가는 입구인데
표지판은 저앞 모랭이를 돌아가라 돼 있어 그쪽으로 가보니 U턴하여 들어가야하니
여기서 들어가는게 낫다.
U턴하여 들어온길과 만나는곳.
10 ; 8/10. 축대위가 바우덕이 묘. <2012년 처음 목 디스크 치료할때 찍은것).
묘뒤능선으로 서운산 둘레길이 있다.
바우덕이 묘 안나판.
바우덕이(金巖德)은 누구인가?
1848년(헌종 14)∼1870년(고종 7). 조선후기의 예능인.
바우덕이는 열 다섯 살에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로 여자로써 남사당패 우두머리인 꼭두쇠가 되어 남사당패를 이끌던 천재 예인이다.
1848년 안성의 가난한 소작농의 딸로 태어나 5세때인 1853년에 안성시 서운면 청룡리 불당골에서 남사당패에 맡겨져 줄타기, 살판 등의 남사당 놀이를 익히게 된다. 바우덕이가 15세 되던해에 안성 남사당패의 꼭두쇠로 추대되어 조선시대 유일의 남사당패 여성 꼭두쇠가 되었다.
남사당이란 조선 후기 장터와 마을을 다니며 춤과 노래, 곡예를 공연했던 단체로서 전문 공연예술가들로 결성된 우리나라 최초의 대중연예집단이라 할 수 있다. 남사당은 어린아이부터 노인까지 40∼50여명으로 조직되었고 이 단체를 이끌어 나간 대표를 '꼭두쇠'라고 불렀다. 그 밑에는 곰뱅이쇠, 뜬쇠, 가열, 삐리, 저승패, 등짐꾼 등으로 직책을 나누었다.
이들은 꼭두쇠를 중심으로 공연계획을 수립하여 기량을 연마하였고 전국 장터를 다니면서 풍물놀이는 물론이고 줄타기, 탈놀이, 창(노래), 인형극, 곡예(서커스)를 공연하였다.
이후 바우덕이가 이끄는 남사당패는 전국적으로 그 명성이 알려지게 되었으며 1865년 고종 2년 흥선대원군이 경복궁 중건에 지친 노역자를 위로하기 위해 남사당패를 불러서 공연을 펼쳤는데 그 때 뛰어난 공연으로 흥선대원군은 바우덕이가 이끈 천민 잡단인 안성 남사당 패에 당상관 정삼품의 벼슬을 내려주었는데, 이것이 바로 안성남사당패 영기에 걸어준 옥관자였다.당시로서는 상상하기 힘든일이었다. 유랑 천민집단이 당상관의 고관벼슬을 받은것도 그러려니와 일개 놀이패에 벼슬을 내린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정삼품을 받은 사당패 깃발을 앞세우고 가면 전국의 모든 사당패가 절을 드렸다
(만장기를 숙여서 예의를 표시함) 고 하는데 당상관에 대한 예우의 사정을 미루어 볼 때 이 또한 사실이라 하겠다. 그러므로 전국 공연단체 중에서 대장 역할을 담당한 바우덕이가 이끄는 안성 남사당 패는 전국 어디에서건 공연이 가능한 최초의 전국구 공연단체가 되었다고 하겠다. 그리고 이 때부터 바우덕이가 이끌던 안성 남사당패는 "바우덕이" 라는 인물명칭으로 불리게 되었다.
바우덕이는 이후에도 전국을 돌면서 남사당을 대중공연으로 발전시키는데 큰 기여를 하였다. 그러나 힘든 유랑 생활 속에서 폐병을 얻어 1870년 23세의 젊은 나이에 요절하고 만다.
바우덕이는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스타로서 인정을 받는다. "남사당패"가 왔다가 아니라 "바우덕이" 가 왔다는 그 시점이 바로 우리나라 연예가 시작된 것이며 민중에게 사랑과 동경의 대상이 형성된 일대 사건이라 할 것이다
"안성 청룡 바우덕이 / 소고만 들어도 돈 나온다 / 안성 청룡 바우덕이 / 치마만 들어도 돈 나온다 / 안성 청룡 바우덕이 / 줄 위에 오르니 돈 쏟아진다 / 안성 청룡 바우덕이 / 바람을 날리며 떠나를 가네"라는 가사의 민요도 전하는데, 바우덕이의 뛰어난 기·예능과 대중적 인기를 말하는 내용이다.
안성시 서운면 청룡리에 무덤이 있다.
남사당[ 男寺黨 ]
남사당패라고도 하며, 일종의 유랑예인 집단이다. 유랑예인 집단은 대광대패, 솟대쟁이패, 사당패, 걸립패 등을 들 수 있으며, 이중 규모가 가장 큰 것이 남사당이다. 남사당의 연원을 구체적으로 알 수 있는 자료는 매우 빈약하여 《고려사》《해동역사》《문헌통고》 등에 기록된 단편적인 것 밖에 없다. 위의 기록도 지배층의 관점에서 기록되어 남사당을, 풍속을 해치는 패륜집단으로 보았다.
조선 후기에 자연발생적인 민중놀이 집단으로 출발하여 지배층이 주관한 놀이와는 성격이 매우 달랐으며, 유지도 그 만큼 어려웠다. 처음에는 사당패라고 하여 여자들이 떼를 지어 다니며 술자리에서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는 한편, 매춘을 부업으로 삼는 집단에서 출발하였다. 조선 후기에는 남자들만의 사당패가 출현함으로써 이를 남사당이라 하였다.
이들은 당시 사회에서 가장 천대받는 계급으로 광대·장인·상인보다도 못한 집단이었지만 특별히 볼거리가 없는 민중들로부터 환영받았다. 사회에서 격리되어 자기들만의 남색사회(男色社會)를 이루고 유랑생활을 하면서 가는 곳마다 절과 관련을 맺고 절을 집결지로 삼기도 하였다. 알려진 남사당패의 은거지는 경기도 안성·진위, 경상남도 진양·남해, 전라남도 구례·강진, 황해도 은율·송화 등 지이다.
조직은 모갑이 또는 꼭두쇠라고 부르는 대장 밑에 그를 보좌하는 곰뱅이쇠(기획:1~2명)가 있고, 각 연희분야의 선임자인 뜬쇠(조장:약 14명), 수련생인 가열, 초입자인 삐리, 고문격인 저승패, 잔심부름을 맡는 등짐꾼 등 40∼50명으로 이루어지며, 대내외적으로 책임지는 우두머리인 꼭두쇠의 능력에 따라 단원들이 모여들거나 흩어진다. 곰뱅이쇠는 남사당의 은어로 허가라는 뜻인데, 놀이판을 벌여도 좋다는 승낙을 얻는 일을 맡았다. 뜬쇠는 자신들이 하는 연기의 규모에 따라 몇 명씩의 가열을 둔다. 삐리는 잔심부름부터 시작하여 연기의 능력을 인정받으면 가열이 되며, 여장(女裝)하는 것이 상례이다.
남사당패거리 사이에서 삐리를 서로 차지하려고 하는데, 그 이유는 외모가 뛰어난 삐리가 많은 패거리일수록 인기가 많았기 때문이다. 단원들은 보통 가난한 집의 어린이를 받아들이거나 가출아로 충원하였으며, 때로는 유괴도 서슴지 않았다고 한다. 비록 가난한 농가 출신이나 고아 등으로 이루어진 조직이었으나 규율은 엄격하여 일사불란하였으며, 흥행을 통하여 민중의식을 일깨우는 역할도 하였다. 놀이가 없는 겨울에는 삐리들에게 연기를 지도하였다.
연기 종목은 획일적인 것으로 풍물, 버나, 살판, 어름, 덧뵈기, 덜미 등 6가지가 있다. 풍물은 첫째 순서로, 꽹과리·징·장구·날라리(태평소)를 불고 치며 노는 농악이다. 버나는 대접이나 접시를 돌리는 묘기이며, 묘기로 끝나지 않고 버나잡이와 어릿광대가 주고받는 대사와 소리가 재미를 더한다. 살판은 땅재주 묘기로, '잘하면 살 판이요, 못하면 죽을 판'이라는 뜻에서 불렀다.
어름은 줄타기로, 버나와 마찬가지로 어릿광대의 대사와 소리가 그만이다. 덧뵈기는 탈놀음이며, 4마당(마당씻이·옴탈잡이·샌님잡이·먹중잡이)으로 구성된다. 춤보다는 재담과 연기가 좋은 풍자극이다. 덜미는 맨 마지막 순서로 꼭두각시놀음이다.
꼭두각시놀음은 인형극이며, 1964년 중요무형문화재 제3호로 지정되었다. 지방에 따라서 '박첨지(朴僉知) 놀음' 또는 '홍동지(洪同知) 놀음'이라고도 한다.
<두산백과에서>
바우덕이묘.
바우덕이묘에서 내려다 본 풍경 .
좌측 빨간집, 우측 공장앞쪽에 34번국도가 있다.
청룡사입구의 청룡사 사적비.
우측 시계탑 뒤로 부도군이 보이고 골짜기 안으로 들아가면 바우덕이 사당이 있다.
15 ; 44. 청룡사 부도군.
요리로 들아가면 바우덕이 사당.
15 ; 52. 바우덕이사당.
15 ; 52. 바우덕이사당과 바우덕이 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