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마파다dharmapada 法句經』에
설해진 불타의 지혜를 하루에 하나씩만
깨닫는 ‘일일일오一日一悟’,
『남전법구경南傳法句經』을 원문과 번역
그리고 약간의 설명을 덧붙입니다.
『단마파다Dhammapada 法句經』
제1장 대구對句의 장, 雙品
제2구
(모든 행위는 마음이 선도하고,
마음이 주인이며, 마음이 조작한다.
만일, 청정한 마음으로
혹 말하거나, 또는 행동하면,
이는 곧, 즐거움이 그를 따르듯이,
그림자가 형상을 떠나지 않는 것과 같다.)
“제법의선도 의주의조작
諸法意先導 意主意造作
약이청정의 혹어혹행업
若以淸淨意 或語或行業
시즉락수피 여영불리형
是則樂隨彼 如影不離形”
앞의 제1구에서는, 마음의 특성을 말하고,
먼저 ‘악’에 대해 경계하고,
그리고 제2구에서는 ‘선’을 권장하고 있다.
이 2구는 ‘대구對句’가 된다.
<칠불통계게>에,
“諸惡莫作 衆善奉行 自淨其意 是諸佛敎”,
곧, ‘먼저 악을 짓지 말고,
그 다음에 선을 행하고,
그리고 자신의 마음을
청정하게 하는 그것이,
諸佛의 동등한 가르침이다’라고 있다.
이것은, ‘밑빠진 독에 물붓는 격’
이라고 하듯이, 아무리 좋은 일을 해도,
인위적으로 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어디론가 공덕이 샌다는 것이다.
그래서 밑바닥을 때우는, 악을
행하지 않는 그것이 먼저이고,
그후에 선을 행하라고, 그 순서가
맞는 것이라는 것이다.
곧, 남이 기뻐하는 일도 좋지만,
남이 싫어하는 일을 먼저
안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아무리 좋은 일을 많이 해도,
그것은 실은 위선이 된다.
그 위선을 없애는 그것이,
‘악’ 곧, 남이 싫어하는, 남이
혐오하는 그것을 안 하는 것이다.
남을 공경하고 생각하는 그것이 마음에 점령하면,
마음은, 온통 다 청정이 차지하기 때문이다.
유교에서는 ‘마음性’은, 선인가/악인가?
고래, 논란이 많았다.
유교의 개조𐤟공자는,
성선설/성악설의 그 어느 쪽에도
손들고 있지 않다.
‘마음性’에 관하는 그의 발언은,
『논어』 에 “子曰 性相近也 習相遠也”
(타고난 본성은 서로 비슷하지만,
배우는 것에 의해 서로 달라진다).
즉 공자는, 인간의 천성에는 차이는 없지만,
교육, 생활습관에 의해 차이가
생긴다고 생각한 것이다.
다음, ‘성선설’의 맹자는, 『맹자』에,
“惻隱之心 仁之端也
羞惡之心 義之端也
辭讓之心 禮之端也
是非之心 智之端也”이라고 있다.
즉, 측은지심, 수오지심, 사양지심, 시비지심의
이 네 가지 감정(四端)은 단서이고,
악 그것은 아니다. 이것을 실마리로 하면
인𐤟의𐤟예𐤟지라고 한 四德이 된다.
그리고 모든 인간에게 이 四端이
갖추어지고 있으므로, 인간은
생득적으로 善이 될 가능성을
갖고 있다. 이것이 맹자의 성선설이다.
그렇지만, 이 맹자의 성선설에서는,
현실적으로 性惡의 사람이 많다.
그 이유를 설명할 수 없다.
그래서 순자가 ‘성악설’을 주창했다.
『순자』 에, “人之性惡 其善者僞也”라고.
인간의 본성은 惡이다.
놓아 두면 惡으로 향한다.
그래서 인간을 善으로 향하게 하기에는
‘위僞’가 필요하다,고 말하고 있다.
‘위僞’라고 하는 것은,
문자 그대로 ‘人’+‘爲’다.
곧 ‘인위人爲, 인간의 힘으로 하는 것.
인간의 소행’이다.
구체적으로는 禮나 학문에 의하는 교화다.
‘性惡說’은, 인간은 방임해 두면
악으로 향하지만, 교육𐤟교화에 의해
善으로 향하게 할 수가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을 신뢰하고 있는 것이다.
그 부분을 그르치면 안 되는 것이다.
이것으로, 공부를 해야 하는 이유를 알 수 있다.
나는 좋은데, 상대는 싫어한다.
나는 싫은데, 상대는 좋다고 한다.
둘로 갈라지면 불행이고,
하나로 합치면 행복이다.
그것(一)에 대해,
앞으로 공부를 해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