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사를 마치고 바자회겸 사랑의 나눔장터인 지하로 내려갔다.
원래의 계획이 이곳의 먹거리로 점심을 하기로 했던것이다.
햄을 조리하시는 야곱수사님.
그런데 요기를 할 수있는 것이 햄 뿐이다.
나야 햄 몇조각 먹으면 그것으로 점심이 될 수 있지만 다른 분들이 문제였다.
하는 수없이 신부님께서 성당 밖 식당으로 가자신다.
일행은 성당밖 식당에서 부지런히 점심을 먹고 다시 성당으로 돌아왔다.
이승구,조명혜부부님의 펜화로 그린 성당 전시회를 먼저 본다.
대구 계산동 "계산주교좌 성당".
왜관 성당의 옛 모습. (1961년도 풍경이란다.)
펜화를 구경하고 있는데 신부님께서 모두 모이라신다.
복도 끝에 있는 소성당으로 모두 들어간다.
복도 끝에 있는 소성당.
이곳 수도원장님께서 우리의 방문을 환영하신다고 하셨단다.
박현동 블라시오 아빠스 수도원장님.
원장님께서 여러가지 이야기를 해주시는데 인상이 참 부드러우시다.
그중에서도 6.25당시 흥남철수작전과 베네딕도 수도회의 사연과
소성당 좌측에 있는 聖母子像의 이야기는 정말 놀라운 이야기였다.
흥남 철수작전의 이야기를 먼저 해 주신다.
아빠스님의 이야기와 공지영 작가의 글, 그리고 인터넷에서 찾아본 이야기를 합쳐본다.
1950년이 저물어 가는 때.
미국 센프란시스코항에서 길이 138.7m의 7천600t급 배 하나가 출항을 한다.
메리더스 빅토리(SS Meredith Victory)라는 이름을 가진 배이다.
당시 배 이름 뒤에 빅토리라는 단어가 있으면 짐을 옮기는 화물선을 뜻했다고 한다.
12일 간 항해를 하여 일본 요코하마에 도착을 한다.
당시의 선장은 35세의 "레너드 라 누"(Leonard La Rue)였다.
레너드 라 누 선장.
요코하마에서 전투장비와 비행기 연료(항공유)를 가득 채운 "메리더스 빅토리호"는 한국의 부산항으로 가서
물자 일부를 내려놓고 슬며시 부산항을 빠져 나가 흥남항으로 향했다.
선장은 선장만이 보도록 되어 있는 명령서에 의해 한국 전쟁의 상황도 알지 못하면서 전장터 깊숙히 들어간 것이다.
흥남부두에 도착한 것이 1950년 12월 19일.
흥남 철수작전이 이루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메리더스 빅토리호"는 군수물자와 무기를 싣고 와야 하는 것이였다.
흥남부두에서 철수를 기다리는 군수물자들.
"메리더스 빅토리호"는 명령대로 이 군수물자들을 배에 올리고 있었다.
이 때 흥남부두에는 미군과 한국군 10만5천명과 피난민 9만명여명이 몰려 있어 대 혼잡을 이루고 있었다.
중공군은 이미 지척에 다가와 간혹 포탄이 부두에 떨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이 많은 사람들이 어찌할 줄 모르고 있었다.
모든 군함에는 군인들이 승선하기 때문에 민간인들은 탈 차례도 되지 않았다.
이때 미군 군사고문으로 통역을 하고 있던 "현봉학"씨가 메리더스 호를 보았다.
저 배에 사람을 태운다면 많은 인원이 탈수 있을거라는 생각을 했다.
현봉학씨는 곧장 10군단장인 "알몬드"씨에게 달려가 사정을 하기 시작했다.
군단장은 절대 안된다고 거절을 했다.
군수물자를 가져가야 전쟁을 할 수있고, 또 그것을 남겨두면 적에게 큰 이로움이 될것이기 때문이였다.
현봉학씨는 계속하여 탄원을 하자 알몬드 장군은 "레나드 라 누 선장에게 연락을 취했다.
출항 준비를 하던 레너드 선장은 난색을 표했다.
시간은 촉박하고 눈에 비치는 광경은 참혹하고,,,,,,
레너드 선장은 그 때를 이헐게 회고했다.
"나는 쌍안경으로 비참한 광경을 봤다.
피난민들은 이거나 지거나 끌 수 있는 모든 것을 가지고 항구로 몰려들었고,
그들 옆에 닭과 겁에 질린 아이들이 있었다"
"메리더스 빅토리호"는 화물선이므로 승선 정원은 60명이였는데, 이미 선원 47명이 타고 있었다.
레너드 선장은 결단을 내려야 했다.
"모든 화물을 내리고 민간인을 승선시켜라!"
레너드 선장은 명령을 내렸다. 그 때가 밤 9시였다.
민간인들은 배 옆에 내린 그물형 로프를 잡고 배에 올랐다.
그것은 그야말로 아비규환이였다.
배에 오르다가 떨어지는 사람들,
가족을 찾아 울부짓는 사람들,
부모를 잃고 울어대는 아이들,,,,,,,,
밤새도록 사람들은 로프를 타고 배에 올랐다.
중공군의 포격이 두려워 불을 비출수도 없어 칠흑같이 어두운 곳에서,,,,,
그러나 그 많은 사람들이 모두 배에 오를 수는 없었다.
먼저 배에 오른사람들은 화물용 엘리베이터를 타고 5층 지하로 내려갔다.
아래층에 사람이 꽉 차면 입구를 철판으로 막고 그 위에 또 사람들이 내려왔다.
아래 화물칸을 사람들로 모두 채우고 갑판까지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승선한 민간인은 14000명.
이들을 통제하기 위한 국군 헌병이 17명.
배에는 먹을것도, 마실것도, 입을 것도 없었다.
화물선이기에 이들이 탄 자리에는 조명, 난방은 물론 화장실도 없었다.
어둠과 추위 속에서도 그들은 배에 탔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했으리라,,,,
1950년 12월 23일 아침 11시.
드디어 "메리더스 빅토리호"는 흥남항을 벗어난다.
영하 20도를 넘나드는 강추위 속에 피난민들은 철판속에서, 파도속에서 참고 견뎌야 했다.
1950년 12월 24일 저녁.
배는 부산항에 도착했다.
그러나 이미 부산항은 배들로 꽉 차있었고, 피난민도 많아 사람들을 내릴 수가 없다는 통보를 받는다.
"메리더스 빅토리호"는 다시 거제도로 향하여 12월 25일에야 사람들을 내릴 수가 있었다.
3~4일동안을 먹지도 마시지도 못하고 추위와 두려움에 떨며 온 보람이 있었던 것이다.
그동안 배에서는 다섯명의 아이가 태어났다고 한다.
처음 출산 보고를 받은 레너드 선장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고 한다.
배에는 아이를 받을 장비도, 전문의사도, 먹일 우유도 없었기 때문이였다.
그 때 보고를 한 부하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한국인은 나이든 부인들은 모두 산파능력이 있었고, 옷을 벗어 아이를 감싸주었고,
한국인 어머니는 모유를 수유하기 때문에 우유가 필요 없노라고,,,"
하선하기 위해 아래층 뚜껑을 열었을 때 선장은 몇가지를 각오하고 있었다고 한다.
살기위해서 서로간의 싸움, 약탈, 허기진 주검, 부상자 등등,,,,
실제로 식량문제로 약간의 소요는 있었지만 한사람도 상한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레너드선장은 하선할 때의 광경을 이렇게 회고하고 있다.
"팔꿈치로 밀치는 사람 하나 없었다. 그들은 난민이 아니였다. 품위를 간직한 사람들이였다."
레너드 선장은 그 일이 있은 후 얼마 있다가 제대를 한다.
제대를 한 후 몇 년간 많이 아팠다고 한다.
아마도 흥남철수 때의 엄청난 충격이 그를 아프게 했으리라.
그는 후에 이런 말을 했다.
"때때로 그 항해에 대해서 생각한다.
어떻게 그렇게 작은 배가 그리도 많은 사람들을 태울 수 있었는지,
그리고 어떻게 한 사람도 잃지 않고
그 끝없는 위험들을 극복할 수 있었는지 믿어지지 않았다.
그해 크리스마스에 하느님은 나에게 분명한 메세지를 보내왔다.
하느님은 황량하고 차가운 한국의 바다 위에서 작은 우리 배의 키를 잡고 계셨다."
1956년 12월 25일.
40세의 레너드 라 누 선장은 세상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베네딕도會의 뉴튼 쎄인트 폴 수도원(St. Paul's Abbey)에 마리너스(Marinus)라는 이름으로 수도사가 된것이다.
그는 87세로 2001년 세상을 떠날 때 까지 단 두 번 세상에 나왔었다고 한다.
한 번은 훈장을 받기 위해서이고, 한 번은 병원에 가기 위해서라고 한다.
훈장을 주기 위해 미국 정부에서 레너드 선장을 찾기에 매우 힘들었다고 한다.
정부에서 그를 찾아 왔을 때 까지 수도원에서는 그의 그러한 일을 전혀 몰랐고,,,,
메리더스 빅토리호는 그후 월남전에 참전했다가 1971년 퇴역을 한다.
가장 많은 사람을 태운 화물선으로 기네스북에까지 오른 이배는
아이러니하게도 1993년 중국에 고철로 팔려 해체되고 말았다고 한다
여기까지는 옛이야기이다.
이 이야기는 계속 된다.
뉴튼 쎄인트 폴 수도원은 근래에 들어오면서 재정난에 빠지게 되었다.
이에 독일의 베네딕도 수도회에서 왜관 베네딕도 수도회에
폴 수도원을 인수해 주기를 원했다.
비공식적인 이야기이지만
이때 폴 수도원의 사정을 살피러 가신 왜관의 수도사가 계시는데,
이중의 한 분이 메리더스 빅토리호가 남하하던 중 태어난 다섯 아기 중의 한 사람이란다.
그리고 폴 수도원의 인수를 결정한 다음날 마리너스 수사님은 하느님의 품으로 가신다.
또한 지금 박현동 아빠스 님은 마리너스 수사님이 타계하신 날 사제 서품을 받으셨다고 한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은 가장 위대한 로맨스이다."
"하느님을 추구하는 것은 가장 위대한 모험이다."
"하느님을 만나는 것은 인간의 가장 위대한 성취이다."
마리너스 수사님의 말씀이다.
소성당 좌측에 있는 聖母子像의 이야기도 정말 놀라운 이야기였다.
2007년 4월 6일 새벽에 수도원 구관 건물에 화재가 발생했다고 한다.
2009년 8월에 복구는 됐지만 성물, 서적, 개인 소장품, 사진등 중요한 소장품들이 소실됐다고 한다.
이 聖母子像은 독일인 수사님이 고향에서 가져 오신 성물이라고 한다.
전소된 방안에서 이 성모자상만이 홀로 남아 있었다고 한다.
처음에 소성당에 들어가 멀리서 이 성모자상을 보고 왜 저런 흉한 성물을 모셔놨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었다.
그 독일인 수사님은 그후 독일 수도원에서 꼭 필요한 분이라고 모셔갔다고 한다.
그런데 쉴 때마다 그곳의 성모님께 한국으로 둘아갈수 있게 해 달라고 빌고 있었단다.
그런 것을 본 수도원에서 하는 수 없이 한국으로 돌려 보냈다고 한다.
자세히 보면 불에 타 갈라진 모습에서도 인자한 웃음이 스며 나온다.
손도, 발의 일부도 떨어져 나간 모습이지만 보면 볼수록 처음처럼 흉하다는 생각은 사라지고,
자꾸 가까이 보게 되는 것은 왜 일까?
아빠스님의 이야기 중 밖에 잠깐 보셔야 할 일이 있다고 다른 수사님께서 알리신다.
그리고는 그 막간에 팻말을 보여주시면서 뭐 같으냐고 물으신다.
"부활"이라고 흘려 쓰면서 형상화 시킨 그림인데 그림도 그림이지만 이 나무판이
화재로 소실된 구관의 마루바닥을 뜯어낸 것이라고 하신다.
그리고는 찾아주신 기념으로 하나씩 선물로 주시겠단다.
그 어느것보다 값진 성물을 받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