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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지산 하면 먼저 떠오르는 것이 빨치산과 관련하여 남부군 총사령관 이현상과 1963년에 생포된 마지막 여자 빨치산 정순덕일 것이다. 남부군은 영화로도 제작되었고 정순덕과 관련해서는 실록 정순덕이란 책을 통해서 알게 되었는데, 사실은 나의 고향이 전북 남원 수지면(견두산이라는 산을 넘으면 반야봉이 보임)인지라 자연스럽게 관심을 가지고 있던 터였다. 1998년 4월1일에는 특전사 천리행군도중 악천후로 6명의 특전사대원이 사망한 곳이기도하며 [아! 민주지산]이라는 영화도 만들어 졌다고도 한다. 하산후 오집사님과 마을 어르신과의 대화중에서도 그때의 기억을 생생하게 기억하는 촌노들을 아직도 쉽게 만날 수 있다. 이데올로기의 대립은 오늘날까지 많은 상흔을 가지고 있다. 그러한 연유로 이번 민주지산은 꼭 한번 가보고 싶은 산이기도 하였다. 표면적인 이유는 2주넘게 계속된 중부지방의 장마를 피한다는 것이었지만.... 휴가철이라 그런지 이런저런 이유로 5명만이 모여 출발하려 하니 봉고차보다는 승용차가 나을거 같아서 승용차로 중부와 경부고속도로를 거쳐 황간 IC를 지나 30여Km를 더 가니 물한계곡에 도착한다. 물한계곡(勿閑溪谷), 무슨 뜻일까? 勿이란
한자가 일반적으로 "금지"를 뜻하는 한자이고 그것도 말머리에 넣어 "~~하지마라"라는 뜻이니까 계곡물이 한가롭게 흘러내리지 않는다"는 뜻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민주지산이란 이름자체도 언뜻 민주주의와 관련된것처럼 들린다. 80년대에는 실제로 민주화운동하던 인사들이 이곳을 방문하기도 했다는 웃지 못할 얘기도 전해진다. 민(旼, 岷)자도 가지가지로 쓰인다. 충북 영동군 도로 입간판에는 민(旼)으로 표시되어 있는데, 필자가 보기에는 산이름 민을 뜻하는 민(岷)이 맞는거 같다. 뭐라 해도 상관없지만 어쨋든 민주지산 정상에서 보면 산들이 빼곡하게 주변을 둘러싼 형국이다. 물한계곡 주차장에 도착하니 산꾼들을 모셔온 관광버스가 8대가 서있고 산나물이며 옥수수등을 파는 노점과 계곡에서는 행락객들이 넘쳐 즐거운 목소리들이 계곡물과 같이 흘러 내린다. 등산로 입구에는 출렁다리가 있고 특이하게도 황룡사라는 절이 있는데 등산로와 바로 연접해있고 대웅전에서는 한 스님이 앞문 옆문을 다 열어 놓고 묵언수행중인듯 무릎을 꿇고 상념에 잠겨 있는 모습이 보인다. 그러나 10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계곡에서의 고기굽는 냄새가 진동을 하니 참으로 힘들겠다는 생각이 들며 피식 웃음이 나오는 것도 인지상정이리라... 참으로 더운 날씨이다. 오르는 길은 온통 돌길이다. 박권사님이 힘을 많이 내며 앞서 오른다. 요즘 헬스를 하신다고 하더니 효과를 보는 듯 하다. 출발점이 해발 500미터인지라 1240고지인 정상과는 고도차가 700미터이다 보니 아주 힘들지 않게 다들 정상에 이른다. 흔한 된비알도 없는 산이다. 미향씨의 가벼운 발걸음도 우리를 기쁘게 하고.... 정상에서의 시원한 전망과 바람은 이맛에 산을 오르는구나 하는 감탄이 절로 나온다. 저 멀리 덕유산과 희미하지만 지리산이 보인다.동쪽으로는 석기봉과 그 너머로 백두대간 마루금이 한민족의 정기를 내뿜는다. 정상부에서의 점심은 꿀맛이다. 박권사님은 반찬은 진수성찬으로 가져 오시고는 정작 밥은 집에 놓고 오셨다. 왠지 배낭이 가벼워서 이상했다고 한다. 오늘 두번째로 [소믈리에 오]님께서 소중한 와인을 꺼내 놓으신다. 역시 프랑스산... 전문가의 설명에도 듣는 무리는 모두 황소처럼 눈만 깜박깜할 뿐이고.... 와인이야기를 주제로 예향누리에 실릴 예정이니 열심히 공부해야겠다. 황제의 오찬을 한 후 석기봉을 향해 능선산행을 한다. 마치 돌도끼처럼 뾰죽한 석기봉을 지나 백두대간코스인 삼도봉에 이른다. 백두대간길이 바로 한발짝 앞이다. 10미터라도 밟아 보려 했지만 박명호집사님께서 계획없이 백두대간을 타다니.. 하고 힐책하는 소리에 멈칫한다. 그렇다... 계획없이 백두대간을 함부로 마구 대한 나를 자책하며 용서를 빈다... 하산길또한 편안하다. 삼도봉에서 물한계곡까지의 4.4Km역시 편한 길이다. 하산을 완료하니 5시30분이다. 서둘러 출발하여 9시25분에 교회 주차장에 도착하였다.
<이현상>
1. 이현상의 태생
이현상의 인물됨을 분석하기란 쉽지가 않습니다. 음험하다는 평가가 일반적일 정도로 말수가 적고 실언이 없다는 점, 자기 감정을 드러내는 발언이라곤 없이 남긴 말마다 교과서처럼 정중하고 원칙적이라는 점, 극단적인 탄압을 받는 조직일지라도 항상 그 주류에 있었으며 반조직적인 기질을 보인 적이 없다는 점, 다시 말하자면 늘 가장 혁명적이고 과격한 조직의 지도자였으면서도 인품자체는 매우 보수적인 느낌을 주는 점이 그의 인간성을 측정하기 어렵게 합니다.
그 런데 이현상의 출신을 생각해보면 그 성품의 비밀이 짐작이 되기도 합니다. 책에는 자세히 쓰지는 않았으나 이현상은 조선 태조 이성계의 직계 자손, 즉 왕손이었다고 합니다. 그의 8대조 할아버지 때까지 전주 덕진공원 근처에서 엄청난 부자로 살았는데 전주에 전염병이 창궐하자 금산군으로 이주를 했다고 합니다. 이주하면서 얼마나 많은 땅을 샀는지 - 혹은 본래 전주 이씨 소유 토지가 있었는지도 모릅니다만 - 금산군 군북면 일대에는 지금까지도 이 씨네 소유 토지가 5만여 평이나 남아있다고 합니다.
이현상의 가문이 이 일대에서 얼마나 유명한 정통 양반이었는가는 소설 <만다라>의 작가 김성동 씨의 증언으로도 확인됩니다. 김성동 씨의 부친은 금산과 대전 사이에 살던 김봉한이란 분으로, 일제 때부터 사회주의자로 항일운동을 하다가 한국전쟁 발발직후 남한 국군에 의해 처형됩니다. 김성동 씨가 겨우 네 살 때였습니다.
김성동 씨의 할아버지는 어린 손자에게 ‘대전에서 온 이상한 엿장수와 이 진사 댁 아들이 네 아버지를 그렇게 만들었다.’고 했다 합니다. 대전의 엿장수란 일제하 사회주의노동운동의 핵심이었으며 해방직후 조선공산당의 제 2인자였던 이관술을 가리킵니다. 이관술은 해방 전 두 해 이상, 이현상과 함께 대전에서 엿장수로 가장해 조직 활동을 했기 때문입니다. 이현상이 유명한 이 진사 댁 넷째 아들이란 것이 그래서 할아버지의 기억에 남았던 것입니다.
진사댁이던 이현상의 집안은 대단히 유교적 법도에 엄격해서 반드시 ‘의관을 정제하고’ 외출해야 했으며 이현상이 여름에 남방셔츠만 입고 집에 갔다가 형에게 그러고 어딜 다니냐고 따귀를 맞은 일도 있다고 합니다. 이현상도 빨치산 지도자로 있으면서 대원들에게 복장을 단정히 하라고 지시했다는 일화가 증언으로 남아있습니다.
사실, 이현상이 조선 최고의 양반집안 출신이라는 점은 큰 의미는 없습니다. 봉건시대의 유물인 양반 출신이란 것이 이현상의 품위를 높여주는 것도 아니고, 반대로 이현상이 반민중적인 보수주의자로 산 것도 아니니 말입니다. 다만, 그의 신중하고 재미없는, 농담이라곤 할 줄 모르는 엄격하면서도 자상한 ... 다소 복잡하고 난해한 인품을 설명하는 기초가 됩니다.
2. 파괴된 집안
조선조뿐 아니라 일제강점기까지도 왕손이자 지주로 우대받던 이씨 집안은 해방 후 완전히 쑥밭이 됩니다. 일제 때는 창씨개명을 거부해도 대지주 가문으로 존중받았으나 해방 후에는 빨갱이 집안으로 몰려 스스로 빨갱이가 되지 않으면 살 길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이현상의 아버지 대는 세 형제로 이뤄졌는데 세 집 모두 쑥대밭이 됩니다. 특히 이현상이 1948년 가을부터 빨치산 지도자가 된 후로는 극도의 탄압과 살해위협에 시달리다 못해 대부분 고향을 등지게 됩니다.
남북한에 생존한 가족들에게 누가 될 수 있으니 자세한 내용을 공개하지는 말아달라는 이씨 문중의 요청이 있어 정확한 내용을 공개할 수 없지만, 이현상의 형제와 사촌들은 대부분 고향을 떠났을 뿐 아니라 다수가 전쟁의 와중에 월북하게 됩니다. 남한에 남아 있어봐야 살해될 처지였기 때문입니다. 제일 큰집이던 이현상의 부친과 형들은 나이가 많아 일찍 죽었고 형수를 포함한 이현상의 직계가족들이 모두 월북한 이야기는 책에도 써놨는데, 이현상의 사촌들도 여럿이 월북을 하거나 월북하던 도중 숨진 것입니다.
예컨대 이현상의 둘째 삼촌 집안의 경우 일곱 형제자매의 대부분이 우익에 죽거나 월북하거나 혹은 월북도중 사망해 사실상 작은 아버지 혼자 고향에 남게 됩니다. 이현상이 죽은 후 경찰은 이 분에게 그 시신을 인수해가라고 요청하는데 ‘집안 망친 빨갱이는 보기도 싫다’며 단호히 거부한 것으로 책에 써있습니다.
이는 사실입니다만, 그 내면을 보면 그렇게 말해야만 했던 작은아버지의 마음이 이해가 됩니다. 일곱 자식 모두 좌익 활동을 하거나 혹은 빨갱이집안으로 몰려 살해당하거나 월북한 상황에서 유일하게 고향에 혼자 남은 늙은 그가 어떻게 이현상의 시신을 인수해 장례를 치룰 수 있었겠습니까? 전쟁직후의 살풍경한 상황에서 우익들의 준동으로 장례 자체도 불가능했을 것이고, 하더라도 손님 하나 올 리 없으니 말입니다.
막내 삼촌 집안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막내 삼촌은 이현상보다 겨우 일곱 살 더 많았던 분으로, 일제 때부터 조카와 뜻을 같이 했다고 합니다. 지리산에 들어간 이현상은 대원들을 시켜 막내 삼촌에게 돈과 쌀을 보내달라고 요청했는데, 작은삼촌의 심부름으로 몰래 짐을 실어 나르던 사람이 경찰에 잡히는 바람에 작은삼촌도 연행되어 호되게 고생하고 나왔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전쟁이 터지자마자 곧장 끌려가 총살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물론 그 자식들의 고난도 말할 나위없습니다.
3. 이현상의 최후
이현상의 최후에 대해서는 참으로 여러 가지 주장들이 있습니다. 경찰이 죽였다, 국군이 죽였다, 북한의 지시로 빨치산이 죽였다, 아니다 자살했다는 의견까지 다양합니다. 사실, 그가 어떻게 죽었는가는 본질적인 문제는 아닙니다. 설사 북한의 지시로 죽었다 해도, 남이나 북에서의 그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달라지지 않을테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이 나간 후 새로 입수한 증언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북한의 명령으로 그가 암살되었다는 증언입니다. 이 증언을 한 사람은 남로당 말기 김삼룡과 정태식을 보필했던 했던 박갑동 씨로, 현재 반북운동을 하고 있어 증언의 신뢰성에 의심받을 소지가 있지만 일본까지 찾아가 취재해본 결과 상황묘사나 당시 인물들에 대한 지식이 상당히 구체적이어서 외면할 수 없었습니다.
박갑동 씨에 따르면 전쟁이 끝난 후 1957년 경 평양시내에서 우연히 조복애를 만났다고 합니다. 조복애는 이현상의 산중 동지의 한 사람으로, 남부군 중에 드물게 살아 북한에 생존했다고 알려진 인물이었습니다. 같은 경남 출신으로 박갑동 씨와는 오빠 동생으로 부르며 잘 알고 지내던 사이이기도 했습니다.
조복애를 만날 당시 이미 남한 출신들은 대부분 숙청되고, 박갑동 역시 처지가 곤란한 때였습니다. 이를 의식해서인지, 평양거리에서 만난 조복애는 ‘빨치산에서 두 번째로 높은 사람에게 북한으로부터 이현상을 죽이라는 무전이 내려왔다. 이에 따라 이현상을 암살했다. 빨치산 고위간부들은 모두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조복애의 말이 신뢰성을 갖는 것은, 이현상이 죽기 전부터 죽은 후까지도 지리산을 비롯한 모든 잔존 빨치산들 사이에서 그에 대한 비판회가 연일 열렸는데 이는 북한의 직접적인 지시가 없이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또한 국군이나 경찰은 서로 이현상을 죽였다고 주장했지만 어떤 부대가 죽였다는 식으로만 발표할 뿐, 어느 누구도 훗날 나서서 자기가 이현상을 죽였다고 자랑한 이가 없습니다. 이현상을 쏘았거나 그 자리에 있던 사람이라면 평생을 두고 자랑을 했을 것입니다. 당시는 보복이 두려웠다 해도 나중에라도 영웅담을 남겼을 텐데 그런 기록은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공식적 기록에서 이현상을 사살한 부대로 알려진 경찰 제2연대장이던 차일혁은 부하들로부터 사실은 죽은 시체를 발견했을 뿐이라는 사후 보고를 받았다고 토로합니다.
박 갑동씨의 상황묘사와 여러 인적관계의 증언은 상당히 신뢰성이 있어, 이 증언 역시 맞으리라 추측이 됩니다. 다만 이중의 간접증언이라서 공식적으로 기술하기는 어렵겠지요. 만일 조복애의 말이 사실이라면, 또 다른 논란이 될만합니다.
4. 남원에서의 시신 전시
또 다른 증언은 이현상의 시신이 남원읍 장날에 이동 전시되었다는 것입니다. 이현상은 죽었다는 내용의 깃발이 걸린 트럭에 이현상의 시신이 담긴 검은 관을 싣고 장터를 누비고 다니며 나와서 구경하라고 방송했는데, 시신을 보러온 이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고 합니다. 관속의 시신은 단정히 염이 되어 검정색 가죽 잠바가 입혀져 있었는데, 사람들 사이에는 그것이 임실경찰서인가에서 빼앗은 경찰의 옷이라는 이야기가 돌았다고 합니다. 아마도 죽은 후 서울에 올라가 이십여 일의 전시를 마치고 내려와 지리산으로 돌아가는 길에 주민들을 선무하기 위해 남원에서 이동 전시를 한 모양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이현상 사망 후, 빨치산의 몰락은 급속히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이 무렵 남원읍에는 커다란 반공호 위에 사살해 싣고 온 빨치산들의 시신과 생포자들이 매일 전시되어 강제로 주민들이 끌려나와 구경해야 했다고 합니다.
죽은 빨치산의 참혹함은 말할 필요도 없었습니다. 머리나 가슴이나 배가 터져 내장이 끔찍하게 흘러나왔거나 절단되어 차마 볼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생포된 빨치산들도 신발을 제대로 신은 이가 없고 옷은 전부 너덜거려 속이 다 들여다보였다고 합니다. 머리칼이며 수염을 자르지 못하고 감지 못해 거지도 그런 거지가 없구요.
그런데, 간혹 임신을 한 여자 빨치산들도 눈에 띠었다고 합니다. 배가 불룩 나온 젊은 여자빨치산들은 속이 다 들여다보이도록 낡은 옷을 걸친 채 더럽고 비참한 모습으로 앉혀져 있었답니다. 다른 생포자들은 시체 뒤에 줄지어 세워놓는데 임신한 빨치산들은 자리에 앉도록 배려를 해주었다네요.
5. 이관술의 만세
이현상의 동지들이 모두 남과 북에서 처형되었다는 것은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주지의 사실입니다. 그런데 새로 채록된 증언 중에는 그동안 어디에도 알려지지 않았던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이관술이란 인물은 1930년대부터 전쟁전까지 김삼룡, 이현상과 둘도 없는 선배요 동지였습니다. 그는 조선공산당이 정판사에서 위조지폐를 인쇄했다는 소위 ‘정판사 사건’의 누명을 쓰고 돌아오지 못할 감옥에 수감됩니다.
정 판사 사건이 나던 당시 이관술, 이현상과 같은 건물에서 일하고 있던 박갑동 씨는 60년이 더 지난 지금까지도 위조지폐 사건은 미국과 이승만이 조작한 누명이라고 강력하게 주장합니다. 자세한 내용은 제가 쓴 <이관술 1902-19950>에 잘 나오는데 박갑동 씨는 그 내용이 정확하다고 말합니다. 백 살에 가까운 나이로 죽음을 앞둔 노인이, 더구나 지난 수십 년은 우익과 함께 반공운동에 앞장서온 그가 정판사 사건이 확실한 누명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의미심장합니다.
아무튼, 누명을 쓴 채 대전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집단처형 되기 위해 끌려나온 이관술에게 사형집행인들이 ‘대한민국 만세 한 번 외치고 죽어라’고 말합니다. 이에 이관술은 ‘그럴 수는 없다’고 대꾸합니다. 그러면 무슨 유언을 할 거냐고 물으니 이관술은 ‘조선민중만세!’를 외치며 총탄을 맞았습니다.
당시 함께 처형당한 좌익들은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만세’나 ‘김일성장군 만세!’를 부르며 죽어간 이들이 많았다고 하며 간혹 ‘대한민국 만세!’를 외치며 총을 맞은 특이한 경우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조선공산당의 제2인자이던 이관술이 북한도 김일성도 아닌, 남북을 통 털어 조선민중 만세를 부르고 죽어간 것은 대단히 의미심장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북한과 김일성에 대한 충성을 거부한 이관술의 만세에는 당시 남로당 지도부를 포함해 일제하부터 사회주의운동을 해온 이들의 심리가 내포되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불과 수십 명의 빨치산을 이끌고 수삼 년 간 만주에서 활동하다 소련령으로 달아나 편히 살다 돌아온, 감옥살이 한 번, 고문 한 번 제대로 받지 않고 당 조직 한 번 제대로 하지 않은 김일성이 소련의 지원으로 영웅화되고 있는 북한의 현실에 대한 반발이었을 것입니다. 또 자기 세력을 구축하기 위해 남로당을 고립시키려 온갖 술수를 펴온 북로당에 대한 불만이었을 것입니다.
물론 남한의 현실은 더욱 끔찍했겠지요. 제 정신을 가진 사람이라면 일제하에서 그토록 승승장구하던 친일파 지식인 지주 경찰 따위가 지배하는 남한에서 어떻게 저항운동을 하지 않을 수 있었겠습니까? 북한이나 소련의 사회주의가 이미 태생부터 심각한 문제를 갖고 있었지만, 적어도 ‘정의를 위한 희생’이었지, ‘불의가 판치는 사회’는 아니었으니까요. 우리가 그 시대에 태어났더라도 선택은 불가피했을 것입니다.
결국 남한의 사회주의지도자들, 이관술뿐 아니라 이주하, 김삼룡, 정태식, 이현상은 북한에 올라가지 않은 채 대부분 남한에서 저항운동을 계속하다 죽어갑니다. 이현상 역시 지리산에 가지 않았더라도 남한에서 지하운동을 하다 죽었을 것입니다.
6. 그는 영웅인가?
이현상평전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는 크게 두 가지로 요약됩니다. 첫째 이현상을 위인 화 혹은 영웅화했다는 것, 둘째 주석을 달지 않아 신뢰성이 떨어진다는 점입니다.
위인전이란 비판은 분명 일리가 있습니다. 저자가 이현상에 대해 지나치게 동정적이고 우호적이다보니 평전이라는 형식에 맞지 않게 중고등학생용 위인전처럼 기술해 버린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저는 이 점에 대해 별 가책을 느끼지 않습니다. 오십 평생을 민중의 해방을 위해 헌신한, 마지막 5년은 그 험한 지리산 자락에서 추위와 굶주림을 이기며 투쟁한 이현상이란 인물에게 영웅이란 단어를 쓰지 못한다면 이 세상 누구에게 영웅이란 단어를 붙일 수 있겠습니까?
특이한 점은, 우익들이 이런 비판을 하는 건 당연한데, 친북적인 이들도 똑같은 비판을 한다는 점입니다. 북한이나 김일성에 대한 비판적 묘사를 거의 하지 않았음에도 언뜻언뜻 드러나는 반북적인 요소들이 반감을 산 것 같습니다. 혹은 김일성 외에 누구도 우상화해서는 안 되는 법칙을 어겼다고 생각하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주석을 달지 않아 믿기 어렵다는 지적도 여러 사람들이 하는데, 역사학적인 지적이라면 당연히 옳으며, 대중적인 독서를 염두에 두고 주석을 달지 않은 점은 아쉽다고 생각됩니다. 또한 부분적으로 작가의 시각을 그대로 드러냄으로써, 다른 부분도 이것이 작가의 의견인지, 사실인지 의문이 가게 만든 것도 잘못입니다.
그러나 주석 문제 역시 친북적인 입장에서의 문제 제기라면 수용하기 어렵습니다. 친북적인 잡지 기자 중에 남로당과 이현상에 대한, 혹은 김일성에 대한 묘사에 불만을 갖고 이렇게 쓴 근거를 왜 안 밝혔느냐고 따지는 경우도 있었던 게 사실입니다.
만일 주석을 달았다면 그들의 의구심이 사라질까요? 이 책의 상당부분은 서류가 아닌 증언이나 회고록에 의존하고 있는데, 그것들의 출처를 명시한다 해도 증언 자체를 믿을 수 없다고 주장하면 그만 아닐까요? 그래서 출판사와도 마지막까지도 주석을 달 것인가 말 것인가를 상의한 결과, 최종적으로 그냥 내기로 했습니다. 전문가용 역사 서적이 아니라 대중용 인물평전이라는 점, 설사 주석을 달더라도 주로 개인 증언이기 때문에 상대방이 믿을 수 없다면 그만이니까요.
필자 입장에서 보면 어떠한 증언 녹취록도, 서류 기록, 신문도, 경찰조서도 온전히 믿을 수는 없는 게 우리나라 역사 연구의 현실이기도 합니다. 때문에 논란이 되는 부분마다 여러 가지 주장 중에 하나를 선택하고 나머지는 무시하는 방법을 취하게 되었습니다. 그 선택의 과정에서 필자의 오류가 드러나면 할 말이 없지만, 아직까지는 확실히 틀렸다고 인정할 만한 근거를 들이댄 경우는 없었으니 다행입니다.
물론 연표나 이름 등에서 여러 군데 오류가 발견된 것은 명백히 필자의 잘못이며, 완벽하게 보완하기 위해 계속 수정 작업을 하는 중입니다.
7. 역사적 의미
이관술이 조선민중만세를 부르며 죽었다는 것, 이현상이 북한의 지시에 따라 암살되었다는 것, 그것은 한국의 진보운동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는 생각이 듭니다. 일제하 국내사회주의자들과 그들로 이뤄졌던 조선공산당 중앙의 역사적 의미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만듭니다.
물론 그들의 오류와 한계에 대해서는 무수히 지적이 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돌이켜 보면 지난 노무현 5년이 얼마나 빨리 지나가던가요? 평화와 번영의 시기라는 이즈음도 이렇게 정신없이 빠르게 흘려 바른 정책을 만들고 펼 여유도 없는데, 해방직후 수년 간 아무도 예측할 수 없던 혼란의 정점에 서있던 그들이 무얼 얼마나 제대로 대처할 수 있었겠습니까? 하루하루 변하는 정세와 사건에 대응할 겨를도 없이 시간은 훌쩍 지나갔겠지요.
어쩌면 그래서 우리가 역사를 공부하는 건지 모릅니다. 앞으로 다가올 특정한 여건에 적응하기 위해, 역사 속에서 경험과 교훈을 배우려는 것이지요. 같은 오류를 번복하지 않기 위하여 말입니다.
<정순덕>
2004년에 사망한 지리산 최후의 여자 공비 정순덕을 아시는 분들도 있을 것이나 모르시는 분이 더 많을 듯하다. 한국 전쟁 동안 전선 후방 남쪽 지리산 지역에 둥지를 틀고 치안과 경제를 위협하던 일 만여 명의 공비들을 군과 경찰이 끈질기게 토벌하였다. 휴전 후 1956년경에는 총 두목 이현상을 비롯해 주력은 거의 소멸된채로 단 50여 명 만이 지리산 언저리 산간 지역에 붙어서 도둑질로 명맥을 이어갔다. 경찰은 이들을 망실공비[亡失共匪]라는 무리로 분류했다.
체포 직후의 정순덕- 아직 살기가 등등하다.
경찰들은 지리산 주변의 공비들이 소멸되고 지리산 출입금지가 해제 된 1960년대에 들어서도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다. 아직도 댓 명의 공비들이 도둑질과 살인질을 해대어 주민들을 불안하게 했기 때문이다. 50년대 후반부터 국내 언론은 지리산에서 방황하는 망실공비중의 한 명이 정순덕이라는 여성이라는 사실을 보도하기 시작했다.
지금 상식으로는 상상이 안 되지만 남한을 좀쓸던 공비들중에 여성 공비들이 정말 많았었다. 한 공비 부대에서는 풍기문란 방지를 위해서 여성들만 모아 일개 소대의 여성부대를 편성하기도 했다. 이 소대원들은 특히 목포의 M여고 출신들이 많아 M여고 부대라고 불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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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 공비들이 넘쳐나게 많으니 공비 두목들은 용모가 반반한 여자를 데리고 살았다. 이현상, 남도부, 이영회, 방준표 등 두목급 공비 지도자들 모두가 소위 말하는 산중처[山中妻]가 있었고 일부는 아기까지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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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은 정순덕이 속한 공비조는 3인조로, 두목급되는 자는 북에서 내려온 이응조라는 40대 남자였고 다른 남자 대원인 산청군 삼장면 홍계리 출신의 이홍희가 있었고 그리고 이들 사이에 정순덕이 끼어있다고 파악하고 있었다. 정순덕은 산청군 삼장면의 내원리의 빈한한 농가 태생으로 4남매 중 두 번째였다.(1933년 생)
그녀는 아주 이른 18세이었던 1950년 1월에 성석조라는 옆 동네 청년과 결혼했다. 정순덕 집안에서는 병약하여 소박맞고 돌아온 언니 때문에 힘들어진 집안 식량 사정에 입 하나라도 덜어 해결하자는, 정말 불쌍한 이유로 보낸 시집이었고 성석조 집안에서는 어머니가 죽어 살림살이를 해줄 여자가 필요하여 맞은 며느리였다니 참 힘든 시절의 결혼이었다고 하겠다.
두 사람은 금슬이 좋았다. 그러나 행복한 결혼 생활은 얼마가지 않았다. 북한군이 진주하자 성석조는 적색 분자가 되어 활동하다가 북한이 패주하자 산으로 달아나서 공비 부대의 자동소총 사수가 되었다. 성석조는 좀 얼띤 성격으로 뭘 잘 모르면서도 주변에 휩쓸려 돌아다니다가 얼떨결에 공비가 되었다는 말도 있다.
사실 정순덕은 이데올로기와는 거리가 먼 환경이었다. 그녀는 경찰의 닥달에 시달리다가 단지 남편을 찾기 위해 입산했다. 그러나 두 부부는 별로 길게 같이 살지 못하였고 1952년 1월 성석조는 토벌군에게 사살되어 정순덕의 곁을 영원히 떠났다.
정순덕의 언니 정순점과 여동생 정판남- 정순덕이 항상 지니고 다녔다고 한다.
오갈데 없는 젊은 과부 정순덕만 살아남아 충실한 빨치산으로 변모해갔다. 시골 농부의 억척스런 아낙으로 가정을 이끌어가며 아들 딸 잘낳고 평범한 노년을 맞았을 정순덕을 한국민이 겪은 이데올로기 갈등으로 13년의 공비 생활과 21년 6개월의 교도소 생활을 하게하는 비운의 여인으로 만들었다.
산청 경찰서의 끈질긴 수색과 매복에 걸린 정순덕과 이홍희는 입산 13년만인 1963년 11월 18일 새벽에 산청군 삼장면 내원리의 한 농가에서 산청 경찰서 김영국 경사와 박기수 순경이 쏜 총탄 세례에 이홍희가 사살되고 정순덕은 오른쪽 다리에 두 발의 실탄을 맞고 체포되었다. (두목 이응조는 미리 죽었음 -후에 설명-) 실탄이 허벅지에서 골반 뼈로 관통해 절단 수술을 받은 그녀는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고달픈 여생을 살아야 했다.
정순덕은 법정에서 사형을 구형받았지만 선고에서 종신형이 확정되어 오랜 복역을 하다가 1985년 석방되었다. 그녀는 1964년에 이미 전향서에 서명을 했었기 때문에 그 점이 참작되었을 것이다. 정순덕은 여자 빨치산 출신이라는 희귀성이 있었는데다가 그의 자전적 책이 출판되어 많이 알려졌다.
석방 뒤에 정충제라는 분이 그녀를 집에 모시고 살면서 자료를 수집하고 관계되는 주변 사람들을 광범하게 정밀 취재해서 쓴 “실록 정순덕‘이라는 책이 1989년에 출판되었다. 당시는 진보주의자들이 크게 목소리를 내기 시작할 때였다. 금기시되었던 과거 좌익들의 활동이 관심을 끌어 남부군이라는 책을 비롯해 여러 빨치산 관계 서적들이 출판되었었다.
정순덕은 그 뒤에 계속 외롭게 외다리로 여기저기 전전하며 살았고 진보 편향의 인간들이 자주 접촉하자 세간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며 관심과 동정을 받는 대상이 되었다.
정순덕과 이홍희가 체포 될 때 소지했던 칼빈총
그러던 그녀가 비교적 크게 언론에 오른 것은 김대중 정부에서 비전향 장기수들을 대거 북으로 보낼 때였다. 그녀는 북송 되기를 희망했었다. 고달픈 생활은 버티기가 힘들어서 북행을 희망한 것이지만 이번에는 보수 진영에서 비아냥거리는 소리가 나오기도 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잠잠했던 그녀는 언론에 반짝 점멸했다. 하지만 당국은 이미 전향서를 제출했다는 이유로 그녀의 북행 신청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리고 언론이 잠잠해지나 했더니 2004년 그녀가 고통 많은 세월을 하직하고 저 세상으로 갔다는 소식이 다시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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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민주지산 이름을 들었을때 가슴한켠이 아린다는 표현이..... 설마 했었는데
잠깐동안 빨치산이 되어보았습니다. 내가 속한 대장이 썼을 우리의 기록이
세상에 알려지길 바라면서..... ㅋㅋ
이런 느낌 알아요^^
민주지산을 넘 자~알 다녀왔다는 생각이!.... 많은 사람들의 한이 서린 산!
많은 역사적 비극을 품고 있는 산이라 하니 더 잊지못할 산!
나 또한 민주지산에 한조각의 기억을 남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