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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무송윤씨 대사성공파 원문보기 글쓴이: 윤보상
본관 연혁
무송(茂松)은 전라북도 고창군(高敞郡) 무장면(茂長面) 지역에 있던 옛 행정구역명이다. 무장면은 무송과 장사(長沙)가 합쳐진 이름이다. 백제 때에는 송미지현(松彌知縣)과 상로현(上老縣)이었고, 757년(신라 경덕왕 16)에 무송과 장사현으로 개명하였으며, 1417년(태종 17)에 두 현을 통합하여 무장현(茂長縣)으로 개편하였다. 1906년에 전라북도로 소속되었고, 1914년 군면 폐합으로 무장군이 폐지되고 무장면으로 축소되어 고창군에 편입되었다.
성씨의역사 : 시조: 윤양비(尹良庇)
무송윤씨(茂松尹氏) 시조 윤양비(尹良庇)는 고려 예종 때 현리(縣吏)로서 등과하여, 보승낭장(保勝郎將)과 호장동정(戶長同正)을 지냈다. 윤양비의 선계는 윤경(尹鏡)으로 후당(後唐) 시대에 오계(五季)의 난을 피하여 중국에서 건너와 무송(茂松: 현재 전라북도 高敞郡 茂長面) 지방에 정착하면서 본관을 무송으로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후 계대(繼代)가 실전되면서 윤양비를 시조로 하고 본관을 무송으로 하면서 세계를 이어 오고 있다.
2대조 : 윤해 [ 尹諧 ]
출생-사망 1231년(고종 18) ~ 1307년(충렬왕 33)
성격 문신
출신지 무송현(茂松縣)
성별 남
본관 무송(茂松)
대표관직(경력) 전중시사(殿中侍史), 초군사(招軍使), 판비서시사(判祕書寺事), 전민변정도감사(田民辨正都監使), 정헌대부국학대사성문한사학(正獻大夫國學大司成文翰司學)
정의1231(고종 18)∼1307(충렬왕 33). 고려 후기의 문신.
내용본관은 무송(茂松)이며, 자는 강재(康哉)이다. 무송현(茂松縣) 호장 양비(良庇)의 아들이다. 과거에 급제하여 상주사록(尙州司錄)이 되었으며, 뒤에 내시에 입적한 뒤 충렬왕을 시종하여 원나라에 다녀왔다.
이 때 행리(行李)의 공용(供用)을 맡아 사리를 꾀하지 않고, 정확하게 일을 처리하여 남은 비용을 국고로 돌렸다. 그 뒤 통례문지후(通禮門祗候)가 되었다가, 곧 장흥부의 지사(知事)로 나아가 일본 정벌을 위한 여몽연합군의 전함건조를 감독하였다.
이 일로 순찰사 홍자번(洪子藩)이 천거하여 흥위위장사(興威衛長史)가 되고, 전중시사(殿中侍史)를 거쳐 1286년(충렬왕 12) 동계(東界)의 초군사(招軍使)로 파견되었으나, 영월수령을 살해한 적괴(賊魁) 강윤명(康允明)을 잡지 못한 책임으로 파면되었다.
뒤에 다시 복직하여 판비서시사(判祕書寺事)에 이르렀으나 사면(辭免)하고 고향에 돌아갔다가, 1298년 충선왕이 즉위하자 곧 전민변정도감사(田民辨正都監使)에 기용되었다. 얼마 뒤 충렬왕이 복위하자 정헌대부 국학대사성 문한사학(正獻大夫國學大司成文翰司學)으로 치사하였다.
청렴결백하여 전중시사로 있을 때는 죽도 먹지 못할 만큼 가난하여 콩으로 배를 채울 정도였으나, 강직하여 권세를 두려워하지 않았고 일에 과단성이 있었다고 한다.
참고문헌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목은문고(牧隱文藁)』
3대조: 윤수평 (尹守平) 관직: 봉익대부 밀직부사(奉翊大夫 密直副使)
4대조: 윤택 [ 尹澤 ]
이칭별칭 자 중덕(仲德), 호 율정(栗亭), 시호 문정(文貞)
시대 고려
출생-사망 1289년(충렬왕 15) ~ 1370년(공민왕 19)
성격 문신
출신지 미상
성별 남
본관 무송(茂松)
저서(작품) 율정집(栗亭集)
대표관직(경력) 경산부사록(京山府司錄), 우대언(右代言), 광양감무, 밀직제학,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
활동사항
정의1289(충렬왕 15)∼1370(공민왕 19). 고려 후기의 문신.
개설본관은 무송(茂松), 자는 중덕(仲德)이며, 호는 율정(栗亭)이다. 국학대사성 문한사학(國學大司成文翰司學)을 지낸 해(諧)의 손자이고 아버지는 수평(守平)이다. 일찍부터 글을 잘해 고모부 윤선좌(尹宣佐)를 따라 공부했고, 특히 『춘추좌전(春秋左傳)』에 능통하였다.
활동사항1317년(충숙왕 4)에 등제해 경산부사록(京山府司錄)에 선임되었다가 교감(校勘)을 거쳐 검열에 올랐다. 연경(燕京)에 머물던 충숙왕으로부터 강릉대군 기(江陵大君祺 : 뒤의 공민왕)를 뒷날 후계자로 추대하라는 부탁을 받았다.
1338년 우부대언에 임명되어 전선(銓選 : 인사행정)을 관장했고, 우대언(右代言)을 거쳐 충목왕 초에 나주목사가 되었다. 충목왕이 돌아가자 밀직이었던 이승로(李承老)와 함께 중서성에 글을 올려 강릉대군을 왕으로 삼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실패하고 충정왕이 즉위하자 얼마 뒤 광양감무로 좌천되었다.
공민왕이 즉위하자 밀직제학에 임명되고, 이듬해 소를 올려 시사를 논했으나 윤허되지 않자 개성부윤으로 치사하였다. 향악(鄕樂)을 원나라에 보낼 것을 청하는 자가 있었으나 상소해 중지시켰다. 또 1357년(공민왕 6) 공민왕이 중 보우(普愚)의 건의대로 한양으로 천도할 것을 결심하고 이제현(李齊賢)에게 궁궐 터를 축조하도록 명했으나 간하여 이를 막았다.
한편 왕에게 『상서(尙書)』의 무일편(無逸篇), 진덕수(眞德秀)의 「대학연의(大學衍義)」, 「최승로상서문(崔承老上書文)」을 강의하고 유학에 힘쓰도록 권하였다. 1361년 정당문학(政堂文學)을 더하여 치사하였으나 은퇴한 뒤에도 항상 치국의 길을 직언하였다.
1363년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를 더했으나 이듬해 병이 나서 치사하고 금주(錦州 : 금산)로 은퇴하였다. 효성이 깊고 항상 정직하며 검소하게 지냈다. 공민왕이 손수 진용(眞容)을 그려주고 율정이라는 호 두 글자를 크게 써주기도 하였다. 저서로는 『율정집(栗亭集)』이 있으며,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참고문헌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목은고(牧隱藁)』
『동문선(東文選)』
5대조 : 윤구생 [ 尹龜生 ]
시대 고려
출생-사망 미상
성격 관료
출신지 미상
성별 남
대표관직(경력)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
정의생몰년 미상. 고려 후기의 관인.
내용『고려사(高麗史)』 효우열전(孝友列傳)에 올라 있는 효자이기도 하다. 찬성사를 지낸 택(澤)의 아들이며, 고려 말의 개혁론자인 소종(紹宗)의 아버지이다.
여러 관직을 거쳐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로 은퇴하여 금주(錦州 : 지금의 錦山)에 살면서 사우를 세우고 삭망과 사중(四仲 : 2월ㆍ5월ㆍ8월ㆍ11월)과 속절(俗節 : 풍속으로 내려오는 명절)에는 3대를, 동지에는 시조에게, 입춘에는 선조에게 제사하여 한결같이 『주문공가례』를 따랐다.
1391년 (공양왕 3)에 전라도도감찰사 노숭(盧崇)이 그의 효성을 기리기 위하여 정려(旌閭)를 내리고 효자비를 세울 것과 조세ㆍ부역을 면제하도록 하였다.
참고문헌
『고려사(高麗史)』
6대조: 윤소종 [ 尹紹宗 ]
시대 고려
출생 - 사망 1345 (충목왕 1) ~ 1393 (태조 2)
본관 무송(茂松)
이명 자 : 헌숙(憲淑)
호 : 동헌(桐軒)
직업 문신
가족관계 조부 : 윤택(尹澤)
아들 : 윤회
고려의 문신. 자는 헌숙(憲淑), 호는 동헌(桐軒). 본관은 무송(茂松). 찬성사 택(澤)의 손자. 이색(李穡)에게서 배웠고 시문(詩文)에 뛰어났으며 성리학(性理學)에 밝았다. 고려 공민왕 때 괴과에 급제, 사관(史官)에 보직됐다가 정언(正言)에 이르러 시사(時事)를 논하는 소를 올렸다가 파직되었다. 우왕 초에 전교시승(典校寺丞)ㆍ전교부령(典校副令)을 지내고 우왕 말년에는 이성계가 위화도(威化島)에서 회군할 때 군전(軍前)에 나가 곽광부(霍光傅)를 바쳤는데 그 까닭은 고려 왕조를 계속 세울 것을 원했기 때문이었다. 창왕 때 우사의 대부(右司議大夫)ㆍ대사성(大司成)에 이르러 재상 이인임(李仁任)의 죄를 추론하여 그의 자손들을 금고(禁錮)시켰으며, 공양왕이 즉위하자 조준(趙浚)의 천거를 받아 좌상시 경연강독관(左常侍經筵講讀官)이 되어 변안렬(邊安烈)의 신우(辛禑) 영립의 죄를 논하여 살해하고 회군공신(回軍功臣)에 책록되었으나 남을 헐뜯기를 잘하여 왕의 미움을 받고 금주(錦州)에 귀양갔다가 용서받았으나 다시 간관(諫官 : 鄭夢周一派)에게 탄핵되어 먼 곳에 귀양갔다. 1392년 정몽주(鄭夢周)가 피살되자 용서되고 조선이 개국하자 병조 판서ㆍ수문전학사(修文殿學士)ㆍ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에 이르렀다.
정의1345(충목왕 1)∼1393(태조 2). 고려말 조선초의 문신.
개설본관은 무송(茂松). 자는 헌숙(憲叔), 호는 동정(桐亭). 할아버지는 찬성사 택(澤)이다. 총민하고 학문을 좋아해 20세 전에 시문에 능해 이제현(李齊賢)에게 특이하다고 보였다.
생애 및 활동사항1360년(공민왕 9) 성균시에 합격했고, 이색(李穡)의 문인으로 1365년 예부시에 을과 제1인으로 대책이 가장 뛰어나 춘추수찬(春秋修撰)을 배수받았다. 이어 좌정언에 있을 때 행신(幸臣) 김흥경(金興慶)과 내시 김사행(金師幸)이 병국해민(病國害民)한다고 극언하는 소를 올렸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1379년(우왕 5) 전교시승(典校寺丞)·전의부령(典儀副令)·예문응교 등을 지내고, 1381년 모친상으로 금주(錦州 : 錦山)에서 복상을 마치는 동안 남방의 학자들이 많이 와서 수학하였다.
1386년 성균사예로 기용되었으며, 1388년 이성계(李成桂)가 위화도에서 회군할 때에 동문 밖에 나가 영접하고 곽광전(霍光傳)을 바쳤다. 그것은 우왕을 폐하고 다른 왕씨를 왕으로 추대할 것을 암시하기 위해서였다.
그 뒤 전리총랑(典理摠郎)이 되었고 이어 우사의대부(右司議大夫)로 승진하였다. 1389년(창왕 1) 이인임(李仁任)의 죄를 논해 참관저택(斬棺瀦宅)을 청했으며, 이어 성균관대사성이 되었다. 이성계가 조준(趙浚) 등과 함께 사전(私田)을 혁파하고자 했을 때, 정도전(鄭道傳)과 함께 힘써 협력하였다.
공양왕 때 대사헌 조준의 천거로 좌상시경연강독관(左常侍經筵講讀官)이 되어 변안열(邊安烈)을 우왕 영립(迎立 : 맞아들여 임금으로 세움)의 죄로 극론해 살해하고, 승려 찬영(粲英)을 왕사로 맞이하려는 공양왕의 계획을 반대해 중지시켰다.
그 뒤 남을 비방하는 것으로 왕의 미움을 받아 금주로 유배되었다가 풀렸으며, 다시 정몽주 일파의 간관에게 탄핵을 당해 유배되었다가 1392년(공양왕 4) 정몽주가 피살되자 비로소 유배에서 풀렸다.
조선이 개창되자 병조전서(兵曹典書)로 부름을 받아 원종공신이 되었으며, 수문관대제학(修文館大提學)을 지냈다. 경사(經史)를 두루 섭렵했고, 성리학에 더욱 정밀하였다. 시문집으로 ≪동정집≫ 8권이 있다.
참고문헌
高麗史
太祖實錄
海東雜錄
燃藜室記述
7대조: 윤회 [ 尹淮 ]
선비 윤회가 어느 날 길을 가다가 주막집에 묵게 되었습니다
마당에 거위가 반짝이는 것을 주워먹는 걸 보았습니다.
이윽고, 주막주인이 아끼는 구슬이 없어졌다고 소동이 일어났고
급기야는 나그네인 윤회를 의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짓 아니했다고 말을 해도 주인은 막무가내
주인은 윤회를 기둥에 묵어두고 실토하라고 윽박질렀습니다.
윤회는 저 거위를 내 곁에 하루만 묶어달라고 했습니다.
다음날, 거위의 배변을 하자 윤회는 주인에게
‘저 O을 헤쳐 보시오’
주인은 거기서 구슬을 찾아냈고 윤회에게 물었습니다.
‘왜 거위가 구슬을 먹었다고 진즉 말 해 주지 않았소’
윤회는 ‘그 구슬을 거위가 먹었다고 당신께 말을 했다면
필시 당신은 저 거위를 잡았을 것이오‘
주인은 엎드려 잘못을 사과했습니다.
한 발자욱 물러서서 기다려보는 생활로 하루를 시작해 보심이 어떨런지요.
【성 명】 윤회(尹淮)
【생몰년】 1380(우왕 6)∼1436(세종 18)
【본 관】 무송(茂松) 윤(尹)
【자·호】 청경(淸卿), 청향당(淸香堂), 학천(鶴川)
【시 호】 문도(文度)
【저서·작품】 《팔도지리지(八道地理誌)》, 《자치통감훈의(資治通鑑訓義)》, 《청경집(淸卿集)》
【시 대】 조선 전기
【성 격】 문신
1380(우왕 6)∼1436(세종 18). 본관은 무송(茂松), 자는 청경(淸卿), 호는 청향당(淸香堂) · 학천(鶴川)이다. 고려말 찬성사 윤택(尹澤)의 증손이자 판전농시사 윤구생(尹龜生)의 손자이며, 동지춘추관사 윤소종(尹紹宗)의 아들이다.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10세의 어린 나이에 《통감강목(通鑑綱目)》을 외울 정도로 총명하였으며, 경사(經史)에 통달하여 이름을 떨쳤다. 태종 1년(1401)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한 뒤 사재감 직장(司宰監直長)에 임명되었고, 좌정언 · 이조 좌랑 · 예조 정랑을 거쳐 1409년 이조 정랑 겸 춘추관 기사관이 되었다. 태종 14년(1414) 공사(公私)노비의 쟁송(爭訟)이 복잡하여 시일이 많이 소요되어 처결이 원활하지 못하므로 이 쟁송을 호적에 의거하여 신속히 처리토록 하기 위하여 설치되었던 전민변정 도감(田民辨正都監)의 지승문원사로 있으면서 제10방(第十房)의 담당자로 임명되었다. 1417년에는 승정원의 대언(代言)이 되었고, 이 때 태종은 그의 학문과 재질을 높이 평가하여 병조 참의로 승진시켰다.
세종 2년(1420) 집현전이 설치되자 1422년 부제학으로 발탁되어 그곳에서 생활하는 학사들을 총괄하기도 하였다. 그 후 한때 동지 우군총제로 임명되었다가 동지경연사를 역임하고, 1424년에는 정도전(鄭道傳)이 편찬한 《고려사(高麗史)》를 다시 개정하는 일에 관여하였으며, 1427년에는 예문관 제학으로 척불(斥佛)을 건의하였다. 세종 14년(1432) 세종의 명을 받고 신장(申檣)과 함께 《팔도지리지(八道地理誌)》를 편찬했다. 1433년에는 중추원사 겸 성균관 대사성이 되어 대제학 정초(鄭招)와 함께 사대문서(事大文書)를 관장하였고, 이듬해에는 역시 왕명으로 집현전에서 《자치통감훈의(資治通鑑訓義)》를 찬집하였다. 후에 벼슬이 병조 판서를 거쳐 예문관 대제학에 이르렀다.
태종 · 세종의 지극한 사랑을 받았으며, 이름난 주호(酒豪)로 세종이 술을 석잔 이상 못 마시게 하자 연회 때마다 큰 그릇으로 석잔을 마셨다고 한다. 어느 날은 술에 만취되어 부축을 받고 왕 앞에 불리어 나가 선지(宣旨)를 기초하라는 명을 받고는 붓대가 날으는 듯이 움직이자 세종은 참으로 천재라고 탄복하였으며, 이에 세상 사람들은 ‘문성(文星)과 주성(酒星)의 정기가 합하여 윤회와 같은 현인을 낳았다’고 하였다 한다. 시호는 문도(文度)이며, 저서로 《청경집(淸卿集)》이 있다.
【참고문헌】 太宗實錄, 世宗實錄, 燃藜室記述, 國朝名臣錄, 國朝榜目
【관련항목】 남수문(南秀文) 설순(첁循) 윤자운(尹子雲)
신숙주와 청의동자 (부인 윤씨부인)
의정부시 고산동 구성말에는 신숙주(申叔舟)의 묘가 있다. 무송군부인(茂松郡夫人) 윤씨의 묘와 나란히 쌍문을 이루고 있으며, 묘 앞에는 묘비석·상석·문인상·신도비·한글창제사적비 등 각종 석물(石物)들이 있는데, 그 중 한글창제 사적비는 최근에 세워진 것이다.
신숙주는 조선 초기의 학자이며 정치가로서 자는 범옹(泛翁), 호는 보한제(保閒齊)·회현당(希賢堂)이고, 고령 신씨 공조참판 신장(申檣)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윤경연(尹景淵)의 딸 윤씨를 부인으로 맞아 아들 여덟 명을 두었는데 그 아들들도 모두 글재주가 좋았다. 그는 세종 때부터 성종에 이르기까지 일곱 임금을 충실히 보필하였고, 특히 그는 당대에 뛰어난 문장가·저술가·외교관으로서 빛나는 업적을 수없이 남긴 인물이다. 한편, 그에 대한 기담(奇談)과 일화가 오늘날까지 많이 전해지고 있다. 그가 젊었을 때의 일이다. 경복궁으로 과거시험을 보러 갔는데, 대궐문 앞에서 갑자기 이상한 빛이 돌더니 커다란 괴물이 입을 딱 벌리고 서 있었다.
신숙주는 참으로 이상한 것을 다 보았다고 생각하면서 계속 지켜보고 있는데 그 때 푸른 옷을 입은 동자가 와서 말을 건넸다. 공께서는 저기 입을 벌리고 있는 괴물을 보셨습니까? 잠시 제가 조화를 부렸을 뿐입니다.? 너는 누구인가? 신숙주가 호령하듯 물었다. 저 역시 사람입니다. 공을 뵈오니 앞으로 귀히되실 상을 타고 나셨습니다. 그러니 제가 평생동안 공을 모시고자 합니다. 신숙주는 과거를 치루고 나서 처의동자(靑衣童子)와 함께 집으로 돌아왔다. 푸른 옷을 입었기 때문에 청의동자라 이름했다. 그러나 집안식구들은 청의동자를 보지 못하고 다만, 신숙주의 눈에만 보였다. 그 날부터 두 사람이 잠도 같이 자고, 밥도 같이 먹는데 음식을 주면 먹는 소리만 들리고 음식은 조금도 줄지 않았다.
8대조: 윤경연(尹景淵) 관직:사재부정(司宰副正)
9대조: 윤자운(尹子雲)
상세정보 인명전거정보 자료수정내역 [요약정보]
UCI G002+AKS-KHF_13C724C790C6B4B1415X0
자 망지(望之)
호 낙한재(樂閑齋)
시호 문헌(文憲)
생년 1416(태종 16)
졸년 1478(성종 9)
시대 조선 전기
본관 무송(茂松)
활동분야 문신 > 문신
부 윤경연(尹景淵)
조부 윤회(尹淮)
증조부 윤소종(尹紹宗)
공신호 추충좌익공신(推忠佐翼功臣)
공신호 좌리공신(佐理功臣)
[관련정보]
[문과] 세종(世宗) 26년(1444) 갑자(甲子)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 1위(4/32)
[상세내용]
윤자운(尹子雲)에 대하여
1416년(태종 16)∼1478년(성종 9).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무송(茂松). 자는 망지(望之), 호는 낙한재(樂閑齋). 윤소종(尹紹宗)의 증손이며, 집현전학사 윤회(尹淮)의 손자이고, 윤경연(尹景淵)의 아들이다.
1438년(세종 20)에 진사가 되고, 1444년에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예문관검열을 시작으로 집현전 부수찬‧이조좌랑‧사간원좌헌납, 응교 등의 요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집현전부수찬으로 있을 때 수사관(修史官)이 되어 정인지(鄭麟趾) 등과 함께 《고려사》 편찬에 참여하였다.
그뒤 1453년(단종 1) 수양대군(首陽大君)이 계유정난을 일으켜 정권과 병권을 장악하자 그의 요속(僚屬)으로 활약하였으며, 수양대군이 즉위하자 추충좌익공신(推忠佐翼功臣)이 되어 대호군으로서 지사간원사(知司諫院事)를 겸하고, 이어 승정원동부승지‧도승지에 올랐다가 1460년(세조 6)어머니상을 당하여 일시 관직에서 물러났다.
그때 세조가 여진족의 모련위(毛憐衛)를 정벌하기 위하여 장재(將材)를 구하게 되었는데 단연 그가 뽑혀 기복(起復)되어 이조참판이 되고 무송군(茂松君)에 봉하여져 군사를 지휘하게 되었다. 원정에서 돌아와 인수부윤(仁壽府尹)이 되었는데 3년상을 나게 해주기를 원하였으나 허락을 받지 못하고, 그뒤 1462년에 병조판서, 1465년에 의정부우참찬에 올랐다.
그러나 당시 그의 매서(妹壻)였던 신숙주(申叔舟)가 영의정이었으므로 그를 의정부에 임명하는 것은 상피관계(相避關係)에 저촉된다 하여 반대하는 사람이 많았으나 세조는 의정부에는 마땅한 사람이 아니면 임명할 수 없다 하여 1466년에 그를 의정부좌참찬으로 승진시키고, 이듬해에는 다시 의정부우찬성으로 승진시켰다.
이때 마침 함경도에 이시애(李施愛)의 난이 일어나 그를 함길도체찰사(咸吉道體察使)에 임명하여 난을 집압하도록 하였는데, 이시애가 이미 관찰사‧절도사와 제진장(諸鎭將)을 죽이고, 또 그마저 죽이려고 칼을 빼들고 둘러싸 7일이나 지키고 있어서 하는 수 없이 적(賊)이 정부를 속이는 위조문서에 서명하고 살아 돌아왔다.
그러나 세조는 그를 위로하고 1469년에는 우의정으로 승진시켰다.
그뒤 곧 좌의정이 되었다가 이듬해에 영의정으로 승진하고, 성종이 즉위하자 좌리공신(佐理功臣) 등이 되어 무송부원군 겸 예조판서(茂松府院君兼禮曹判書)에 피봉(被封)되었다. 그리고 잠시 관직에서 물러났으나 1476년(성종 7)에 다시 우의정이 되었다.
사람됨이 단아(端雅)하고 상밀(詳密)하여 일생 동안 관부(官府)의 탄핵을 한번도 받은 적이 없었다. 그리고 국가에 큰 일이 있을 때마다 여러번 순찰사로 나아가 일을 처리하기도 하였는데, 이것은 모두 좌리공신으로서 권세를 누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명회(韓明澮)‧신숙주‧구치관(具致寬) 등과 함께 예종이 죽은 뒤에는 원상(院相)으로서 국정을 좌우하였다.
그러나 사신(史臣)은 그를 성품이 편협하고 아무런 재능이 없으면서도 의정부의 고관이 되어 별다른 정책을 건의한 것도 없으며 이시애의 난 때에는 협박을 받고 적이 조정을 속이려는 문서에 서명하고 적을 대할 때마다 대인(大人)이라 칭하였다고 혹평하였다.
뿐만 아니라 조석으로 어머니가 사는 집 앞을 지나다니면서도 찾아보지 않는 일이 많아서 사람들이 이 노파는 자식이 없다고 할 정도였다 한다. 시호는 문헌(文憲)이다.
첫댓글 좋은 자료 감사합니다.
많은 회원님들이 열람 할수있고 조상을 알수 있게 하여 주심 감사 드립니다.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