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시란,
전재완
시를 읽을 때 그 시를 감상하는 독자의 마음에 따라 그 시는 다시 찾아 읽는 시가 되기도 하며
순간의 마주침으로 차갑게 식어버리는 시가 있다. 전자를 좋은 시라하고 후자를 좋지 않다고
해도 될까? 시를 읽는 이들에게 판단을 맡겨두자. 여하간 하나의 텍스트를 두고
그 텍스트의 어느 발화가 읽는 이의 마음의 초에다 성냥불을 그었다면 그 시는
성공한 시라 하겠다. 읽는 이의 마음의 촛불을 영영 태우지 못하고 점화되었다
끝내는 풍전등화같이 꺼져버리면 그 시는 독자 한 명을 잃게 된다.
시를 두고 정형시와 산문시로 크게 나눈다. 또한 서정시와 참여시로도 나눈다.
시를 발화하는 화자가 어떤 생각과 주의로 대상을 묘사하였는가에 따라
혹은 일정한 리듬과 자수, 행갈이를 규칙적으로 했느냐와 이를 무시하고
자동기술적으로 철길위를 내달리는 산문 형식의 장시를 두고 하는 말이다.
그 형식이나 발화하고자 하는 내용이 단순이 시적화자의 개인적인 내면의 정서를
노래하였느냐? 그렇지 않고 사회적인 여러 다층의 목소리와 결합되어 굴곡진
노래를 하였느냐? 목소리의 차이에 따라 시맛이 다르게 느껴질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형식이나 내용적인 면을 떠나 눈 밝은 독자의 마음 한
구석을 전광석화같은 죽비로 후려쳤다면 그 시는 좋은 시임에 틀리지 않다.
좋은 시란, 결국 독자의 마음과 닿아 독자가 느끼지 못한 오르가슴을 일으킨다.
여기에 시를 다듬는 언어기능공의 보이지 않는 , 피를 말리는 창작의 고통이
감추어져 있을 것이다.
그러나 비수같은 말로 독자의 심금을 후벼 팠다 하더라도 그 말의 윤리학적
책임이 전가되어 있지 않다면 곤란하다. 시를 쓰는 언어기능공은 시를 다루는
기술도 필요하지만 시대를 읽는 카라니아의 후각이 절대 필요하다.
예를 들면 오염되고 병든 대상(사물/사회)을 두고 병들지 않고 건강한 것으로 견강부회하는
우를 범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일제식민지하 친일로 변절을 한 일군의 사이비예술꾼들이 그 대표적 예라 하겠다.
붓을 잡기는 싶다. 그러나 시대 앞에서 붓을 절필하기란 각고의 선지자적
고통과 희생이 따른다. 한국시사에 소월과 백석, 그리고 만해가 사랑받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