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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위 교수(이란어과) |
《당시 시국선언에 참여했던 지식인들은 상당수 해직되고 구속되는 고초를 치렀다. 지식인들은 그 선언을 통해 이 나라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밝혔지만, 그러한 뜻과는 정반대로 이 선언은 신군부가 지식인을 탄압하는 빌미가 되고 말았다.》
1980년 3월, 봄이 오는 계절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좀처럼 봄은 올 것 같지 않았다. 흔히 「서울의 봄」 「정치의 봄」이라고 했지만 진정 봄이 올 것 같은 예감은 들지 않았다. 앞서 연말에 12·12 「예비쿠데타」로 실권을 장악한 신군부세력은 국민들의 소망에는 아랑곳없이 정치일정 발표를 유보하고 있었고, 무슨 음모를 꾸미는 듯한 불길한 느낌을 주었다. 3월2일 오후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당시 연세대 신학과 서남동 교수, 중앙대 경제학과 유인호 교수, 동아일보 편집국장을 역임했던 송건호씨, 그리고 필자 등이 세종문화회 관 옆의 초월다방에서 만났다. 서울대 백낙청 교수도 자리에 있었지만 백교수는 교육지표사건으로 집행유예상태였으므로 논의에서 빠질 것을 권했다. 동석했던 사람들은 당시의 시국을 걱정하면서 「우리 지식인들은 나라를 이끌어 나갈 능력을 갖고 있지는 못하지만, 나라가 어떤 방향으로 가야 하는가에 대한 방향제시는 할 수 있지 않겠느냐」 하는 데 의견을 모았고, 「양심을 가진 지식인이라면 혼미한 시대에 나라가 나아갈 방향을 올바로 제시해야 함은 하나의 책무」라는 얘기를 나누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군사정권이나 유신독재하에서 오염되지 않은 양심 있는 지식인들을 규합해서 「지식인모임」을 갖자고 합의했다. 발기모임에 대해서도 얘기를 나누었다. 이 지식인 모임의 규모를 1백명 내외로 하고 학계·언론계·법조계·종교계·문단 등 지적 사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총망라하기로 했다. 그리고 이 모임을 준비하는 위원을 15명 내외로 정하고, 우선 당시 참석자 4명에다 이문영(고려대) 한완상(서울대) 이호철(소설가) 현영학(이화여대) 이효재(이화여대) 홍성우(변호사) 임재경(한국일보 논설위원) 변형윤(서울대) 김철수(서울대) 등 9명을 보강하기로 했다. 모임에 필요한 일체의 경비는 회원들의 회비로 충당하기로 했다. 3월28일 오후 6시 정동에 있는 세실 레스토랑에서 1차 준비위원회를 열었다. 여기에 참석한 사람들은 서남동 유인호 이효재 송건호 이호철 홍성우 이문영 변형윤 교수와 필 자 등 9명이었다. 임재경 김철수 현영학 교수 등 3명은 위임했으며 한완상씨는 해외여행중이라 불참했다. 이날 모임에서는 김병걸(해직교수이자 문인)씨를 추가해서 준비위 원을 14명으로 정했다. 그리고 모임이 정식발족할 때까지 잠정적으로 「3·28친목계」로 부르기로 하고 서남동 송건호 유인호 씨 등 3명을 임시연락간사로 선임했다. 회원은 당분간 재경인사에 국한하기로 했다. 열흘 후인 4월8일 저녁 7시 세실 레스토랑에서 준비위원회 제2차 회의가 열렸다. 준비위원 14명 중 홍성우씨만 빠진 13명이 참석했다. 이날 모임에서 자연과학계의 준비위원이 1명 있었으면 좋겠다는 의견이 제시돼 고려대 화공과의 김용준 교수를 추가하기로 했다. 그리고 회원은 준비위원들이 추천하되 준비위원회에서 심사·결정하기로 했다. 당시 거명되고 심사를 거친 사람들은 1백20명 정도였다. 특히 이날 모임에서는 유인호 위원의 발의로 이 모임은 정치적으로 중립을 지켜야 하고, 회원이 정당에 가입할 경우에는 자동으로 회원에서 제외하기로 했다. 다만 특정정치 인에 대한 개인적인 자문 등은 회원의 자유의사에 맡긴다고 결의했다. 제3차 준비위 모임은 5월6일 저녁 같은 장소에서 열렸다. 이날 모임에는 준비위원 15명 중 11명이 참석했는데, 이미 심사완료된 1백20명에다 약 15명을 추가해서 다음 준비 위원회에서 회원을 확정하기로 했다. 그리고 이영희(한양대) 이돈명(변호사) 조요한(숭전대) 김승훈(신부) 등 4명을 준비위원에 추가했다. 또 5월15일 「시국선언」을 발표 하기로 이날 모임에서 결정을 내렸고, 시국선언문 기초위원으로는 서남동 유인호 송건호 등 3명의 연락간사와 이호철 장을병 등 5명을 선임했다. 그리고 시국선언문의 제목 을 「지식인 ○○○인 시국선언문」으로 할 것을 결정했다. 5월9일 오후 6시 서대문에 있는 선교교육원에서 제4차 준비위원회가 개최되었는데, 14명의 준비위원들이 참석했다. 이날 모임에서는 시국선언문 초안을 심의 확정했고, 이 선언문을 가지고 준비위원들이 분담해서 회원들에게 서명을 받기로 했다. 그리고 서명자의 명단을 확정짓고 마무리 작업을 위해 5월13일 준비위원회를 개최하기로 했다. 5월13일 하오 5시. 서대문 선교교육원에서 제5차 준비위원회가 열렸다. 참석자는 서남동 유인호 송건호 이호철 이효재 홍성우 임재경 이돈명 현영학 김병걸 김용준 장을병 교수 등 12명이었다. 변형윤 이문영 김철수 한완상 조요한 김승훈 이영희 씨 등 7명은 사정에 의해 참석하지 못했다. 이 모임이 준비위원회의 마지막 모임이었다. 여기서 서명자를 1백34명으로 확정짓고 15일 상오 9시 법원기자실에서 시국선언문을 발표하기로 결정했다. 드디어 우리의 의견을 밝힐 날이 찾아왔다. 5월15일 상오 8시40분 서남동 유인호 송건호 이효재 김병걸 홍성우 이돈명 임재경 씨와 필자 등 9명의 준비위원들이 법원기자실 을 찾아 시국선언문을 발표했다. 텔레비전 기자들의 요청으로 9시30분에 유인호 교수가 선언문을 낭독했다. 이날 다음 준비위원회를 5월22일 하오 6시 선교교육원에서 개최하기로 했지만, 신군부세력의 5·17쿠데타로 이 모임은 무산됐다.
『우리들 뜻을 같이 하는 1백34명 일동은 민주발전에 대한 과도정부의 모호한 태도, 더욱 심화되어 가는 경제위기, 그리고 민주화와 생존의 권리를 외치며 전국적으로 격화되고 있는 학생과 노동자들의 항의시위에 다만 강압적으로 맞서고 있는 당국의 무능무책을 더이상 좌시할 수 없다. 오늘의 난국은 기본적으로 지난 19년간 독재정권의 반민중적인 경제시책과 강권정치의 소산이다. 이는 민주발전을 저해하는 비상계엄령의 장기화로 빚어진 필연적인 사태 악화이다. 만약 국민이 납득할 만한 발전적 조치를 과정(過政)당국이 하루 빨리 취하지 않는다면 정국불안에 경제적 위기까지 겹쳐 회복할 수 없는 파국이 초래되지 않을까 염려된다. 이에 우리는 오늘의 시국을 근본적으로 타개할 몇 가지 당면책을 제시코자 한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7개 항목의 해결책을 제시했다. ▲비상계엄령은 즉각 해제되어야 한다. 비상계엄령은 10·26, 12·12사태 등 전적으로 집권층의 내부사정에 의해 선포된 것으로 이는 분명히 위법일 뿐만 아니라 정치발전을 저해하는 가장 큰 요인이다. ▲최규하 과도정권은 평화적 정권이양의 시기를 금년 안으로 단축시켜야 하며 그 일정을 구체적으로 밝혀야 한다. 현과정은 의당 폐기될 유신헌법의 절차에 의한 시한적 정 권으로서 명분면에서 보나 체질면에서 보나 허약하여 난국의 극복을 기대할 수 없다. 우리는 현과정이 개헌에 관여하는 것은 명분 없는 개입이므로 이를 반대한다. 국회의 개헌심의라는 정권야욕에 사로잡힌 작태를 청산하고 민중의 의사를 올바로 반영하여야 한다. ▲학원은 병영적 성격을 일체 청산하고 학문의 연구와 발표의 자유가 보장되어야 하며 이같은 자유를 위한 대학인들의 자율적 민주화 운동은 존중되어야 한다. 사학에 뿌리 박은 족벌재단, 교수재임용제 등 학원의 민주화발전을 가로막는 모든 독소적 운영방식과 제도는 폐기되어야 한다. ▲언론의 독립과 자유는 민주발전에 가장 불가결한 요소로서 절대 보장되어야 한다. 언론인들은 그간의 잘못을 반성하고 특히 동아·조선 두 신문사는 부당하게 해직시킨 자유언론기자들을 전원 지체없이 복직시켜야 한다. 그들의 복직 없는 자유언론 표방은 국민에 대한 기만이다. 우리는 필요한 경우 성토, 집필거부, 불매운동 등 가능한 모든 방법을 써서 그들의 원상회복을 위한 운동을 벌일 것이다. ▲일터를 잃고 거리에서 방황하거나 기아임금으로 신음하는 수많은 근로자들을 위한 시급한 생활대책을 강구하여야 하며 근로자들의 양보할 수 없는 권리, 단체행동권을 포함한 노동기본권은 보장되어야 한다. 대기업 편중의 지원정책으로 희생을 강요당하고 있는 중소기업은 시급히 구제·육성되어야 한다. 저곡가정책으로 영농의욕을 잃은 농민들에 대한 정책적 전환이 있어야 한다. ▲일인독재의 영구화로 억울하게 희생당하고 있는 많은 민주인사에 대한 석방·복권·복직조치는 지체없이 이루어져야 한다. ▲국토방위의 신성한 임무를 수행하고 있는 우리 국군은 정치적으로 엄정중립을 지켜야 한다. 그런데 한 사람이 국군보안사령관직과 중앙정보부장직을 겸직하고 있다는 사실은 명백한 불법이므로 마땅히 시정되어야 한다. 아마 이상의 제안대로 됐더라면 우리나라 역사의 수레바퀴가 오늘과 같은 궤적을 그리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는 이런 제안과 함께 다음과 같이 경고하며 시국선언문을 끝맺었다. 『오늘의 난국은 국민의 자발적 합의와 민주적 절차에 의해서만 극복될 것이라고 확신한다. 우리의 이 정당한 요구가 외면되고 강권정치가 계속 자행된다면 과도정권은 국가를 파국으로 몰아넣는 역사적 책임을 면치 못할 것이다』 이 선언문과 더불어 이에 서명한 지식인들의 명단도 공개했다. 당시 서명자 1백34명의 분포를 보면, 학계가 74명으로 이화여대 13명, 고려대 11명, 연세대 10명, 서울대 9명, 성균관대 9명, 서강대 5명, 숭전대 4명, 중앙대 3명, 한양대 2명, 성심여대 2명, 한신대 2명, 외국어대 1명, 홍익대 1명, 동국대 1명, 서울여대 1명의 순이었으며, 언론계가 19 명, 종교계가 10명, 법조계가 10명, 그리고 문단 인사가 21명이었다. 길지만 참고로 당시 서명한 사람들을 소개한다(가나다 순). 강만길(姜萬吉) 강문규(姜文奎) 강신옥(姜信玉) 고은(高銀) 구중서(具仲書) 길현모(吉玄謨) 김준보(金俊輔) 김철수(金哲洙) 김용준(金容駿) 김관석(金觀錫) 김승훈(金勝勳) 김윤환(金潤煥) 김성훈(金成勳) 김병태(金炳台) 김정위(金定慰) 김우창(金禹昌) 김치수(金治洙) 김병걸(金炳傑) 김규동(金奎東) 김국태(金國泰) 김상근(金相根) 김용복(金容福) 김태홍(金泰弘) 김명걸(金命傑) 김기태(金基台) 김욱곤(金旭坤) 김용섭(金容燮) 김찬국(金燦國) 김숙희(金淑喜) 김진균(金晋均) 김제형(金濟亨) 남정현(南廷賢) 남천우( 南天祐) 노명식(盧明植) 문익환(文益煥) 모혜창(毛惠昌) 문동환(文東煥) 박두진(朴斗鎭) 박홍(朴弘) 박현채(朴玄埰) 박태순(朴泰洵) 박완서(朴婉緖) 박연희(朴淵禧) 박순경( 朴淳敬) 박종만(朴鍾萬) 백기범(白基範) 백낙청(白樂晴) 백재봉(白宰奉) 변형윤(邊衡尹) 서남동(徐南同) 서정미(徐廷美) 서광선(徐洸善) 서인석(徐仁錫) 서제숙(徐悌淑) 성유보(成裕普) 소흥렬(蘇興烈) 손보기(孫寶基) 송건호(宋建鎬) 송상용(宋相庸) 송원희(宋媛熙) 송정석(宋正錫) 신일철(申一澈) 신경림(申庚林) 신홍범(愼洪範) 신상웅(申相雄) 심윤종(沈允宗) 안병무(安炳茂) 안병직(安秉直) 안성열(安聖悅) 양승규(梁承奎) 유종호(柳宗鎬) 유인호(兪仁浩) 유재방(劉載邦) 유재천(劉載天) 윤호미(尹浩美) 윤석범( 尹錫範) 윤흥길(尹興吉) 이상일(李相日) 이영호(李英浩) 이우성(李佑成) 이선영(李善榮) 이문원(李文遠) 이문구(李文求) 이종범(李鍾範) 이상희(李相禧) 이호철(李浩哲) 이시영(李時英) 이문영(李文永) 이영희(李泳禧) 이남덕(李男德) 이효재(李效再) 이병주(李炳注) 이종욱(李宗郁) 이경일(李耕一) 이재정(李在禎) 이해동(李海東) 이우정(李愚貞) 이돈명(李敦明) 이돈희(李敦熙) 이세중(李世中) 임철규(林喆規) 임종률(林鍾律) 임재경(任在慶) 장을병(張乙炳) 장윤환(張潤煥) 장희익 장명수(張明秀) 정태기(鄭泰基) 정자환(鄭姿煥) 정창렬(鄭昌烈) 정희성(鄭喜成) 정윤형(鄭允炯) 정석해(鄭錫海) 정춘용(鄭春溶) 조남기(趙南基) 조성(趙聲) 조태일(趙泰一) 조요한(趙要翰) 조기준(趙璣濬) 조준희(趙準熙) 진덕규(陳德奎) 차하순(車河淳) 차기벽(車基壁) 천관우(千寬宇) 최명관(崔明官) 최동식 최민지(崔民之) 한승원(韓勝源) 한남철(韓南哲) 한완상(韓完相) 함세 웅(咸世雄) 현영학(玄永學) 홍성우(洪性宇) 황인철(黃仁喆)
정치가 잘못되고 비리가 저질러지면 그것을 비판하고 그것에 저항하는 세력이 등장하게 마련이다. 그리고 그 시대의 잘못이나 비리에 맞서는 사람들은 흔히 시비곡직을 판별할 수 있는 지식인들이었다. 지식인들을 비판세력으로 간주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지식인(Intelligentsia)이란 용어가 처음 쓰인 것은 러시아의 소설가 보브리킨에 의해서였지만, 지식인들이 집단으로 사회적인 발언권을 행사한 것은 1890년 프랑스에서였다. 당시 프랑스는 이른바 「드레퓌스 사건」으로 소란스러웠고 극우파세력이 저지른 잘못이나 비리를 지켜보던 지식인들이 역사상 최초의 「지식인 선언」을 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프랑스 극우파는 부정·부패로 인해 고조된 국민들의 불만을 해소하는 책략으로 하나의 「속죄양」을 만들어내려 했다. 그래서 유태계 장교였던 알프레드 드레퓌스대위가 군사기밀을 독일에 팔아먹었다는 누명을 씌워 구속했다. 바로 유태인에게 비난의 화살을 돌림으로써 내적 불만을 은폐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실상 독일에 군사기밀을 팔아먹은 자는 군 수뇌부의 한 사람인 왈셍 장군의 조카였던 에스트라지 소령이었다. 이렇듯 잘못을 은폐하고 전가시키려는 부당한 처사로 프랑스의 국론은 분열되고 있었다. 지배세력은 드레퓌스의 유죄를 주장했지만 양심세력은 드레퓌스의 무죄를 확신하고 있었다. 이럴 때 프랑스의 지식인들은 이른바 「지식인 선언」을 발표해서 드레퓌스의 무죄를 주장하고 나섰다. 이 「지식인 선언」에는 에밀 졸라, 아나톨 프랑스, 클로드 모네 등 당시 프랑스의 대표적인 지식인들이 모두 참여했던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주목할 것은 나라의 지배세력이 비리를 저지르지 않고 역사가 순리대로 흘러가면 지식인들이 구태여 아우성치고 목소리를 높일 필요가 없다는 사실이다. 지배세력이 잘못을 다반사로 저지르고 역사가 순리를 어길 때, 판별력과 양심을 지니고 있는 지식인들이 몸부림칠 수밖에 없고 목소리를 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 현대사는 비리로 얼룩져 있고 순리를 어긴 역리(逆理)의 역사였다. 해방공간에서 일제와 목숨 걸고 싸우던 민족주의세력이 친일세력에게 역습당하는가 하면 급기야 외세의존세력이 나라를 지배하는 사태를 빚어내고 말았다. 첫 단추부터 잘못 끼운 상황에서 잘못은 다반사로 저질러졌고 역리의 역사로 점철되고 말았다. 따라서 양심을 가진 지식인들은 몸부림칠 수밖에 없었고, 목소리를 높일 수밖에 없었다. 지식인들이 불의에 맞서 집단으로 항거하고 나선 것은 오래 전부터의 일이었지만, 우리의 기억에 생생히 남는 것은 60년 4·19혁명 때였다. 4월19일의 시위로 수많은 학생들이 희생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집권세력은 반성의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이에 4월25일 교수들은 「학생들의 피에 보답하라」는 플래카드를 들고 종로거리로 나와 시위를 벌였다. 이러한 교수들의 시위로 혼란은 걷잡을 수 없게 됐고, 급기야 이승만 정권은 퇴진을 발표하기에 이러렀다. 이 교수들의 시위가 4·19혁명을 마무리지은 셈이었다. 그후 64년 군부세력이 대일 굴욕외교로 한일국교 파동을 빚었을 때, 교수들을 비롯한 양심세력들이 또 한번 일어나 굴욕외교를 반대하는 선언문을 잇따라 발표했다. 그후 선언문을 주도했던 교수들은 해직당하는 고초를 겪기도 했다. 69년 3선 개헌 때에도 교수들을 비롯한 양심세력들의 항의선언문이 잇따라 발표되었고, 72년 유신쿠데타 이후에는 양심세력들의 선언문이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80년 이전의 시위나 선언문의 발표는 각계 각층의 양심세력들이 분야별로 제각기 따로 했다는 점에서 80년의 지식인 선언과는 다르다. 그전까지는 이를테면 학계는 학계대로, 법조계는 법조계대로, 언론계는 언론계대로, 종교계는 종교계대로, 그리고 문단은 문단대로 따로따로 시위를 벌이거나 선언문을 발표했던 것이다. 그러나 80년 5월15일 발표된 「지식인 1백34인 시국선언」은 각계의 지식인들이 뜻을 모아 하나의 목소리로 발표했다는 데 특성이 있다. 당시 시국선언문에 참여했던 사람들은 학계 언론계 법조계 종교계 그리고 문단에 종사하고 있던 범지식인 1백34인이었다. 아마도 이 선언문은 우리 현대사에서 범지식인의 명의로 발표된 최초의 시국선언문으로 자리매김하리라. 그후에도 신군부세력의 전횡으로 어지럽던 역사 속에서 수없는 선언문들이 발표되었지만, 지식인들이 함께 모여 한 목소리로 선언문을 발표했던 적은 없었다. 이렇게 보면, 80년 「지식인 1백34인 시국선언」은 범지식인들의 명의로 발표된 처음이자 마지막 선언문이 아닐까 생각된다. 여기서 「마지막 선언문」일 것이라고 하는 것은 지난날 군사독재와 같은 혼탁하고 순리를 어기는 현상이 다시는 되풀이되지 않으리라는 확신과 희망이 깃들여 있기 때문이다.
「지식인 1백34인 시국선언」을 발의했던 4명 중 서남동 교수와 유인호 교수는 유명을 달리했고, 송건호 선생은 지금 병석에 있다. 그나마 아직 일상 활동을 하고 있는 사람은 필자뿐이어서, 필자가 「지식인 1백34인 시국선언」을 정리하고 발표할 수밖에 없었다. 유명을 달리한 서남동 유인호 두 교수에게 다시 한 번 명복을 빌고, 병석에서 신음하고 있는 송건호 선생은 하루 빨리 쾌유하시길 기원한다. 80년 5월15일 지식인 1백34인은 무거운 사명감을 갖고 나라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시국선언문으로 밝혔지만, 그 뜻과는 정반대로 이 선언은 신군부세력이 지식인을 탄압하는 빌미가 되고 말았다. 「지식인 1백34인 시국선언」을 주도했거나 서명한 사람들 일부가 구속 내지 구금되어 숱한 고초를 겪었고 상당수는 직장에서 추방당하는 해직의 아픔을 겪어야만 했다. 설사 구속·구금되거나 해직당하지는 않았다손 치더라도 대부분이 기관의 「부르심(?)」을 받거나 협박을 당하는 등 정신적인 고통을 겪어야 했다. 1890년 프랑스의 지식인 선언은 정치적인 비리를 시정하는 데 이바지했지만 1980년 한국의 지식인 선언은 비리를 시정하기는커녕 지식인 탄압의 자료가 되는 뼈아픈 상처 만을 남긴 것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지식인 1백34인 시국선언」을 무가치한 것으로 볼 수밖에 없는 것일까? 필자는 결단코 그렇게 생각하고 싶지 않다. 오히려 뼈아픈 상처를 남겼기에 새살이 돋아나길 기다릴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하고 있다. 5·17쿠데타로 처절하게 당했기에 한국의 지식인들은 신군부 독재체제를 확인할 수 있었고, 반독재 투쟁에 투신할 수 있었으며 참담한 해직생활을 겪었기에 인권의 소중함 을 깨칠 수 있었고 권력의 남용을 막아줄 민주주의의 값어치를 올바로 인식할 수 있었다. 「지식인 1백34인 시국선언」이 처절한 희생을 수반했기에 80년대 민주화운동의 밑거름으로 이바지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지식인 1백34인 시국선언」 후 많은 사람들이 고초를 겪었다. 필자는 40일간의 은신생활을 하다가 공개지명수배를 받으면서 숨겨준 제자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당시 포고령에는 「은닉자는 엄벌에 처한다」는 내용이 있었다) 뒤늦게 출두했다. 그때 출두해 이런 웃지 못할 일도 겪었다. 시국선언을 어디서 「모의」했느냐 하는 발기장소가 문제였다. 앞서 붙들려 들어간 사람들의 조서에는 시국선언의 발기 장소가 세종문화회관 옆의 「초원다방」으로 기록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나중에 필자가 들어가 「초원다방」이 아니라 「초월다방」이라고 진술하니, 『다른 피의자들의 조서에 모두 초원다방으로 기록되어 있으니, 너도 초월다방이고 우기지 말고 초원다방이라로 진술하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필자가 『사실대로 진술하라면서 왜 거짓을 꾸미느냐』고 했더니,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지 왜 군소리 하느냐』고 필자를 쥐어박았다. 「사실대로 말해도 시키는 대로 안하면 얻어맞는 곳이구나」 하고 탄식하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더욱 문제가 된 것은 시국선언문의 마지막 항목이었다. 이것은 그렇게 쉽게 넘어가려 하지 않았다. 『국토방위의 신성한 임무를 수행하고 있는 우리 국군은 정치적으로 엄정 중립을 지켜야 한다. 그런데 한 사람이 국가보안사령관직과 중앙정보부장직을 겸직하고 있다는 사실은 명백한 불법이므로 마땅히 시정되어야 한다』는 이 구절이 당시 신군 부세력에는 상당히 자극적이었던 모양이었다. 조사관들의 말에 의하면, 이 구절은 원래 초안에는 없었는데, 필자가 우겨서 새로 첨가했다는 것이었다. 앞서 잡혀온 지식인모임 준비위원들의 진술에도 필자가 그 항목을 첨가하자고 우겼다고 돼 있었다. 사실 필자가 우겨서 이 항목을 집어넣은 것은 아니었다. 필자의 기억으로는 5월13일 제5차 준비위 모임에서 한 법률학자가 이 조항을 첨가하자고 제의했던 것이다. 그가 이 항목을 넣자고 제의할 때까지 필자는 중앙정보부장을 현역군인이 맡을 수 없다는 사실조차 몰랐던 것이다. 사실이 이러한데도 필자가 우겨서 이 항목을 첨가했다니, 억울하고 딱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필자가 출두할 때까지 그 항목을 첨가하자고 주장했던 법률학자는 붙들려 가지 않고 있었다. 그 때문에 모씨가 했다고 실토해 그 사람에게 고통을 전가할 수도 없어 난감했던 것이다. 조사관들이 『네가 우겨서 이 항목을 첨가했지?』 하고 윽박지를 때, 사실이 아니니까 『아니오』라고 부정했지만, 『누가 첨가하자고 했느냐』고 되물었을 때는 『모르겠다』로 버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면서 조사관들로부터 『너 어디 소풍온 줄 아느냐』 『우리가 바보인 줄 아느냐』며 욕설과 함께 매질도 많이 당했다. 이 문제를 놓고 한나절 승강이를 벌였다. 필자로서 는 뼈가 저리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필자는 끝내 이름을 대지 않았다. 적어도 남에게 고통을 전가해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에서 이를 악물고 참았던 것이다. 결국 그 법률학자는 무사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나중에 필자가 안 불었기 때문에 그 법률학자가 무사했던 것이 아니라 다른 이유 때문이었음을 알게 됐다. 그 얘기를 듣고 무의미하게 매만 맞은 것이 후회스러웠지만, 그 이름을 대지 않은 것은 잘한 일 아니겠느냐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다시는 정당한 주장을 펴고 고통당하는 일이 없기를 빌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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