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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를 믿게된 이야기
이 명 희
나는 강원도 울진군 평해면 후포리 505번지에서 할아버지 이화백, 아버지 이용범, 어머니 이재봉의 1남3녀 중 장녀로 태어났다.
4대가 한 집안에서 살았다. 나는 장손녀로서 많은 사랑을 받으며 남부럽지 않게 자랐다. 4살때부터 할아버지 무릅 앞에 앉아 천자문을 배웠다. 6살 때 천자문을 떼었다. 면소재지에 있는 평해초등학교를 15리 길을 걸어서 졸업을 했다. 서울에 와서 중학교 입학시험을 치렀으나 안 가겠다고 떼를 썼다. 집에서 독학을 했다. 공부는 잘 했다.
14살 때 대구에 가서 2개월 동안 타자학원에서 타자를 배우고 고향에 돌아와 일본 마루한회사에 취직했다. 경리과 출납부와 타자 책임을 맡았다. 17살 때 해방을 맞았고, 20살 때 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셨다.
18살 때 박도학 친구가 우리집에 놀러왔다가 저녁을 먹고 “자고 가도 되겠니?” 한다. “그래.” 내방에 와서 이부자리를 펴는데 그 친구가 말한다. “너 교회 나가 봐. 참 좋다. 눈물이 난다.” “그래, 자라” 나는 교회 나가는 사람들 아주 싫었다. 질질 울고 가난하고.....
그런데 할아버지 임종을 지켜보는 순간, 만경창파에 홀로 떠 있는 배와 같은 느낌이었다. 그래 교회 가자. 예수라 하시는 분의 교훈을 받자 마음 먹고, 21살 때 어머님께 말씀 드렸다. “엄마, 나 교회 가도 되?” 했더니 엄마가 한참 내 얼굴을 처다보더니 부엌으로 들어가신다. 안 되는가보다 생각했다.
저녁을 먹고 내방에 들어가 있는데 어머님이 건너 오라고 하신다.
큰방에 들어가니 작은아버지 내외와 작은고모님 내외가 오셨고 할머니도 함께 계신다. 어머님께서 “얘가 교회 나가겠다 하는데....” 하시니 모두 깜짝 놀라 내 얼굴을 처다보신다. 나도 깜짝 놀랐다. 한참 있다가 작은고모부께서 입을 여셨다. “내 친구 개망나니가 하나 있었는데 예수귀신이 머리에 들어가니 충머리가 되더라. 남이 욕을 해도 씨익 웃고 싸움을 걸면 피해 가고 하던데...너같이 순한 사람이 예수귀신이 머리에 들어가면 네 입에 들어가는 밥도 뺏기고 말 것 어떡하니?” 내가 말했다. “고모부, 예수귀신은 머리에 안 넣고 예수 교훈만 받을 께요” 했더니 “그래 네 말을 믿지!”
그렇게 허락을 받고 어느날 저녁 교회에 갔다. 계단을 올라가면 마당이 있고 거기 교회가 있다. 정문으로 들어갈 수는 없고 창문으로 들여다보니 강단에 한 남자가 있고 그 아래 남자 두 사람이 모두 업드려 있다. 이것이 내가 처움 본 교회의 광경이다. 그런데 “너는 도둑이다”라는 소리에 깜짝 놀라 두리번 거렸으나 아무도 없었다. “나는 도둑이 아니에요. 남의 것은 풀잎 하나도 가져본 일이 없어요” “남의 집에 왔으면 들어가지 어찌 들여다만 보느냐?” 나는 무서워 계단을 뛰어내려와 교회 밑 큰 길에 내려왔을 때 어떤 노래소리가 들려왔고 그 노래소리에 완전히 취해 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러갔는지 모른다. 깜짝 놀라 정신을 차리고 집으로 돌아왔다.
참 두렵고 무서웠다. 그런데 교회는 여전히 가고 싶었다. 하루는 마음 먹고 두 친구를 꼬셨다. “나를 교회안에 들어가게만 해주고 너희들은 집에 와도 되” 약속하고 교회에 가기는 갔는데 서로 먼저 들어가라고 밀퉁질하다가 그만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해가 바뀌었다. 2월에 결심하고 주일낮 교회에 가는데 길에서 친구를 만났다. “얘, 너 일할 줄도 모르니 밥 다 해놓고 부르려고 했는데 잘 됐다. 들어가. 다 했어.” 들어가니 친구들이 있었다. 교회 가는 것 포기했다.
4월에 결심하고 또 교회에 나갔다. 예수귀신이 내 머리에 들어갈까봐 정신을 차리고, 기도 시간에도 강대상만 쳐다보고 있노라면 모두 뭐라고 하는데 자기들끼리 통하는가 보다 생각했다. 나는 설교만은 똑똑히 들었다. 다시 하라면 할 정도였다. 설교 중 내가 고처야 할 것은 고치고, 지켜야 할 것은 지켰다.
십일조는 세 번째 주일날 평생에 잊지 못할 설교였다. 한국백성으로서 세금을 내지 아니하면 백성으로서의 자격을 잃어버린 자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십일조를 내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자격을 잃어버린 사람이다. 그때부터 십일조를 꼭 바친다.
6.25 사변이 일어났다. 교회에 나갈 수가 없다. 하루는 엄마에게 어떻게 교회에 나갈 수 없겠느냐고 물었더니 산으로 돌아서 교회에 가라고 하신다. 말씀대로 교회에 갔다. 처움으로 기도를 했다. 뭐라고 말을 했는지 모른다. 한 없이 울었다. 응 응 울었다. 나라를 위해서 울었다. 그때부터 울보가 되었다. 그리고 기도 중에 꿈으로 이 나라가 되어져가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누구한데도 말하지는 않았다.
피난을 갔다. 그때 오빠가 서울에서 포항에 왔다. 포항 해군숙소에 피난민들이 들어 있었다. 오빠가 사람 같지 않다. 그래도 우리는 기뻤다. 후포리 고향을 30리 앞두고 큰 고개길이 있었다. 큰 추럭에 오빠 말에 의하면 63명이 탔다고 한다. 그런데 피난민 중에 어떤 사람이 외첬다고 한다. “거기 조합장네 손자가 탔으면 내려서 포항으로 가세요. 식구들이 피난 갔어요” 그 말을 듣고 오빠는 고개길을 힘들게 올라가는 차에서 뛰어 내렸다 한다. 그래서 170리가 되는 포항으로 걸어서 왔다. 포항경찰서에서 빨갱이라고 취조를 받았다. 그때 사실을 말씀 드렸다. 가족이 강원도 후포리에서 온 피난민 중에 있을 거라고... 밤 중에 안내 방송이 있었다. “후포리에서 온 이종만씨 가족이 있으면 내일 아침에 포항경찰서로 와서 이종만씨를 데려가세요” 우리 식구들 그 방송을 듣고 하늘을 날아 오르듯 너무너무 기뻤다. 새벽에 작은아버지께서 경찰서 가서 오빠를 데려고 오셨다. 우리 식구들, 피난 온 후포리 사람들의 표정이 말할 수 없었다. 입빠른 한 사람은 “아이고 조합장의 손주 그 똑똑한 사람이 등신이 되었구나” 하고, 눈물을 흠치는 사람도 있는 것 같았다. 다만 우리 엄마만 아들을 붓잡고 그렇게 기뻐하신다. “네가 살아 왔구나”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아들의 손을 잡고 방으로 들어가신다. 작은어머니와 나는 말없이 부엌에 들어갔다. 아침상을 방으로 차렸다. 식구들이 말없이 아침 밥을 먹었다. 그리고 엄마는 아들과 함께 평안히 잠들었다. 나는 뜨개질을 하고 있는데 오빠가 벌떡 일어나더니 밖으로 나가신다. 그런데 오빠가 나가고 5분도 안되어 싸이렌이 운다. 그 소리에 엄마가 깨어나셨다. “얘가 어디 갔니? 왜 너는 오빠가 나가는 데도 아무 소리 안했니?” 나를 야단치신다. 싸이렌 소리가 나면 밖앝으로 못나간다. 나가면 총살이다. 엄마는 방안에서 발을 굴린다. 20분이 못되어 오빠가 웃으며 방안으로 들어오신다. 우리는 죽은 귀신을 보는 것같이 놀랐다. 오빠 말씀이 “내일 아침 8시까지 시청에 출근해야 하니 아침 밥 일직이 해줘” 엄마는 좋아서 오빠 잡고 방안으로 들어가신다. 숙모님이 “명희야 내일 아침 일직이 밥해서 삼촌하고 같이 나가게 하면 되잖아!” 하신다. 취직했다는 생각은 아무도 믿지 않았다. 가족을 알아본다는 것만 해도 고마웠다.
다음날 아침 밥을 드시고 나가셨는데 점심시간이 지나서 삼촌과 오빠가 완전히 새사람이 되어 웃으며 들어오신다. 보니 목욕도 하시고 이발도 하시고 하얀 남방과 바지, 운동화로 새사람이 되었다. 이웃사람들은 “조합장의 손주 역시 똑똑하다”고 난리들이다.
그때 어떻게 되었냐고 물었더니 자다가 밖에 나가니 미군 짚차가 오기에 손을 들고 말을 하니 미군 장교가 뛰어내려와 오빠를 덜렁 안아 짚차에 실고는 차를 돌려 시내 시청으로 가서 시청 통역관으로 세웠다는 것이다. 당시만 해도 포항에서 영어 통역을 할만 한 사람이 없어 매우 답답하던 터였다. 오빠는 포항시 통역관으로 있으면서 강원도에서 피난온 사람들, 이북에서 피난온 사람들에게 먹을 것 입을 것을 참 많이 도와주었다.
나는 아침만 먹으면 교회에 가서 이일 저일을 하며 저녁에야 집에 돌아왔다. 오빠가 돈을 주면 교회에 갖다 주었다. 그러면 청년들이 종이 사고 잉크를 사서 어린이 노래를 프린트 해서 주일날 주일학교 학생들에게 가르쳤고, 쪽복음을 사서 전도하러 다니느라 포항 죽도 옥수동 안 가 본 데가 없다.
한 20년 전에 전국 여선교회 집회가 동대문교회에서 열려서 갔더니 한 50대즘 되는 분이 반갑게 인사를 한다. 누구냐고 물었더니 처녀때 죽도시장 근처에 집이 있었고 친구들과 모여 있을 때 댁이 와서 전도를 하면 우리가 웃으며 도망을 치곤 했는데, 나중에 믿는 집에 시집을 가서 가만이 생각을 해보니 당신이 전도해서 내가 믿게 되었고 시집이 충청도라 여선교회 회장으로 참석했다는 것이다. 한번 보고 싶었는데 이렇게 뵙게 되어 반갑다고 한다. 오랜 세월이 지나서 그분 생각을 했다. 그때 이름과 주소라도 알아 둘 것을...후회스러웠다.
포항 사변 때 엄마 오빠 동생을 잃어버리고, 윤희 동생 하나를 데리고 영일 천방을 거닐다가 친척 오빠를 만났다. 추럭을 가지고 장사를 했는데 차가 고장이 나서 고치고 있었다. 우리를 보더니 난리 끝나고 아주머니를 만나면 어떻게 하니, 죽어도 같이 죽자. 차에 타라. 아주머니 찾을 때까지 같이 있자 하신다. 그래서 그 차에 타고 포항 시내로 들어오니 막내 이모님을 만났다. 그래서 우리는 이모님네 식구와 피난을 같이하기로 했다. 그런데 15세 되는 아픈 동생을 내가 업고 다녀야 했다. 참 고달팠다.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그런데 음력 7월 7일날 아침에 세상을 떠났다. 이모는 우시는데 나는 시원했다.
그런데 꿈으로 하나님께서 지시해 주신다. 그래서 그 마을을 떠나면 30분도 채 못되어 그 마을이 불바다가 된다. 포항 난리 때 나는 동생 손잡고 노인들을 안내했다. 사람들에게 빨리 포항을 빠저 나가야 한다고... 누구든지 빨리 나가야 한다고 하며 사람들을 이끌었다. 군인이 내가 하는 것을 한참 보고 있었나보다. “아가씨 이것 잡습고 하세요” 하면서 건빵을 넣어 준다. 나는 피난길에서 다친 사람을 보면 옆사람에게 옷이라도 얻어서 싸매어 주곤 했다.
후포리에서 포항으로 피난오던 길에 모두 앉아 쉬고 있는데, 현병 둘이 지나가다가 한 학생을 보고 “너 어디서 왔냐?” 하니 “후포리에서 왔습니다.” “어디 학생증 내놔 봐” 보더니 “너 후포리가 아니고 기성인데” 하니 “아닙니다. 후포리에요” 하니 따귀를 몇 차례 때리더니 “가자!” 앉아 있는 사람들이 벌벌 떨고 있다. 내가 앉은 채 “집이 기성인데 후포리 누나네 집에 왔다가 피난 왔다고 하지!” 헌병이 나를 보더니 “알아요?”한다. “녜” 그제서야 마을 사람들이 “녜, 알아요” 한다. 헌병이 “이 자식 정신 차려” 하며 가버린다. 그때 헌병대에 끌려가면 죽든지 병신 되어 나온다.
포항에 13일 있다가 또 피난 나갈 때 엄마 오빠를 잃어버리고 이모 집에서 한 달, 외삼촌 집에서 한 달, 두달만인 9.28 수복 때 엄마를 만났다. 마을 사람들이 그 똑똑한 아이 이북으로 넘어갔지. 엄마 마음을 아프게 하고, 그런 처녀 둘이 어디서 봤다 하면 엄마가 거기를 수없이 찾아 다녔다 하신다.
우리가 빨갱이들이 점령한 곳에 들어와 있으니 외가에 있을 때 친척 아주머니가 와서 “너는 들어오면 대 환영인데 왜 이리 고생하니. 얼른 본부로 가자” 한다. 나한 테 할머니뻘이 되지만 화를 냈다. 다시 오지 말라고. 그리고 아침을 먹으면서 “외삼촌(순경이었다) 절대 자수하지 마세요.” 했는데 그날 저녁에 외숙모 하고 자수했다. 형님 되는 사람을 꼬셔서 이국도 한포님도 다 넘어갔다. 그리고 몇일 있다가 뒷산에 굴을 팠다고 한다. 그것이 자기가 묻힐 자리라는 것을 알았다.
추석날 아침에 부엌에서 밥상을 차려 뒤 방공호로 가저가려고 마루에 올라섰는데 초등학교 앞에 큰 산이 있다. 이상하다. 학교 앞 어디서 저 큰 산이...하며 가만히 지켜보니 움직인다. 깜짝 놀라 뒤 방공호를 향하여 “학교 앞에 산이 움직인다”고 소리 첬더니 옆방 문이 열리면서 인민군 장교가 둘이 처마 밑으로 엎드려 대문으로 빠저 나간다. 산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국군이 북진하는 것이었다.
총소리가 난다. 외삼촌이 대문으로 뛰어 나가신다. 그때 나는 외삼촌을 붙들고 “삼촌, 말씀을 조심하세요. 이 마을에는 빨갱이가 있는 것이 아니라 피난을 못한 사람들이 그 사람들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말씀하세요. 마을 사람들 한 사람도 상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라고 했더니 “그래”하고 나가신다.
한참 있다가 경찰서 앞에 있는 마을회관으로 모이라 해서 나가면서 숨는 사람들에게 “숨지 마세요. 우리 같이 나갑시다. 피난을 못가서 그 사람들 시키는 대로 했다고 하세요.” 그래서 그 마을사람들은 한 사람도 상하지 않았다.
그런데 3일만에 경찰서에 불이 나고 동네가 요란해졌다. 외삼촌이 집에 돌아왔다. 말을 들으니 지방 빨갱이들이 경찰서에 불을 지르고 마을이 쑥대밭으로.. 그런데 외삼촌을 보더니 “아이고 미안합니다. 조용히 집으로 가세요” 하지만 무서워 집에 오지 못하고 남의 집 뒤에 가서 숨어 있으면 “아이고 걱정 마시고 집에 가세요.” 하여 집으로 돌아오셨다.
그 다음날 경찰서는 불타고 순경 한 사람은 죽었다 한다. 순경이 죽자 갓 결혼한 부인이, 숟가락 하나 가슴에 품고 다니면서 이집 저집 밥을 얻어 먹고 살았는데, 남편 만나 그렇게 좋아했다는데 만난 지 삼일만에 남편이 죽었다. 참 참혹한 일이다. 6.25 사변이란 이런 것이었다.
엄마가 와서 고향(30리길)으로 돌아갔다. 마을 사람들이 깜짝 놀란다. 서 공의 선생님이 놀라 맨발로 뛰어나와 “모친요 따님은 함부로 놀지 않는다고, 아무일 없을거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하시면서 허 허 크게 웃으신다. 한 1,000호 가량 되는 마을에 내 선후배 청년들은 없다. 이북으로 끌려갔든지 죽든지 했다. 초등학교 2년 선배 언니는 결혼식 올린지 10일 만에 남편이 군대에 나가서 아직 소식이 없다. 2년 전에 고향에 가서 만났는데 아직도 시집에 혼자 살고 있었다.
9.28 수복 전날 밤에 방공호에서 외삼촌과 외숙모가 서로 싸우고 있는 것 같아서 큰방에 나와 누웠으나 B29 폭격기 소리와 함포사격 소리에 도저이 잠을 잘 수가 없는데도 자꾸 잠이 온다. 엣다 모르겠다 자자 하고 자는데 꿈에 누가 “이 세상은 물과 불이다. 깨어 있어라” 하는데도 자꾸 잠이 온다.
나는 세례도 아직 안 받고 목사님의 추천으로 대구고등성경학교에 갔다. 학교에서 추천장을 보시더니 “이런 일은 없는데 목사님께서 자격이 있으니 입학시켜달라고 간곡히 부탁을 했으니 그렇게 합시다.” 하여 시험을 치루고 입학을 했다. 교장선생님은 홍대위 목사, 부교장은 이상근 목사.. 장로교회에서는 유명한 목사님들이다. 이제는 그 훌륭하신 목사님들이 하늘나라에 가셨지만,,,
나라의 되어가는 일들을 항상 꿈에 알려주신다. 그래도 나는 입밖에 낸 일이 없다.
몇 가지 기억하는 것....
4.19때 이승만 박사님이 이기붕씨 내외가 살려달라 하는데, 광주리 안에 집어 넣고 발로 콱콱 밟고 훨훨 밝은 길로 두분이 걸어가시는 모습.
선거 앞두고 조병옥 선생이 수술 받으러 일본 갔다가 죽어서 돌아 온 것.
나라가 어떻게 되는 것.. 꿈으로 나타났다. 내가 나를 생각할 때 좀 게으르다 그리고 말을 안했다.
어느날 기도 중에 "이북 철의 장막 속에서 눈물로 호소하는 신도들이 있다. 위해서 기도하라." 그때부터 기도했는데 이북과 길이 열리고 상봉하고, 중국과도 길이 열리고 보니 철의 장막 속에서 기도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