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다시 찾은 대마도
지난 여행기
만보 모객 인솔(30명)
2016. 03. 20(일)~22(화)
AM트레킹이 주관한 대마도 산행과 여행을 접목시킨 팸투어(답사여행)를 다녀왔다. 그렇다면 당연지사 여행기를 써야 하는 의무감과 책임감을 갖고 온라인과 모바일을 통해 사진과 느낌을 올렸더니 ~ 지인들이 관심을 보여 이번 여행 인솔자로 나선 만보의 발걸음을 따라가보자.
대마도는
본래 신라에 속한 땅이었으나 점차 일본인들이 거주하게 되면서 왜구의 땅으로 넘어갔으며, 신라 이후 고려와 조선시대 박위, 김사형, 이종무 등이 대마도를 수차례 정벌하였다.
지도상으로도 19세기 후반까지 고려, 조선의 영토로 표기돼 있다. 1855년 영국 지도, 1865년 미국 지도 등에도 한국 영토라는 기록이 있다. 그런데 왜 일본 땅? 조선 정부가 대마도를 실효적으로 지배하려고 했으나, 비용 문제 때문에 '자치주' 비슷하게 방치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대마도는 이렇게 일본 땅이 된 일본 본토보다 우리나라와 더 가까워 일본 같지 않고 / 우리의 선조들이 선진문물을 전해주고 통상을 통해 보살펴 주었지만 오히려 일본의 우리나라 침략 전진기지 역할을 한 잃어버린 배반의 땅~ 거기에 더해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고 한사코 우기는 / 적반하장도 유분수인 이거야 원~ 배은망덕의 극치가 아니겠는가!!!
부산국제여객터미널
제1일
부산항~히다카츠항~한국전망대~중식~미우다하마~에보시타케전망대~와타즈미신사~만제키바시~해수온천욕~조선통신사비~석식~숙소배정~자유시간
▼ 부산항 출항~히타카츠항
▼ 오션플라워 08:40
이날 첫 출항인
오션플라워~
히다카츠항 도착
시간조차 쉬어가는 섬~
대마도~
바람의 향기를 느끼다.
여행 코스
히타카츠항↔이즈하라항
대마도는
일본보다 우리나라와 더 가까운 곳에 위치해 109개의 크고 작은 섬으로 이루어진 제주도 면적의 40%가량 정도의 크기로 울릉도의 10배, 거제도의 2배쯤 되는 생각보다 큰 섬이다.
대마도는 원래 하나의 섬이었으나, 1900년 러일전쟁을 앞두고 인공해로를 내 상(上)대마, 하(下)대마로 나눴다. 부산에서 49.5Km 떨어져 있으며 길이는 약 82Km~ 폭 약 16Km에 이르며, 부산에서 뱃길로 1시간 10분이면 닿기 때문에 아침 일찍 떠나 저녁에 돌아오는 당일치기 쇼핑객들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공장 하나 없고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섬~ 대마도의 경제생활은 면적 88%가 산지로 예로부터 우리나라의 문물을 일본에 전달하는 중계무역으로 살림을 꾸려왔다.
지금은 주로 어업과 임업에 종사하고 있으며, 한국인을 상대로 한 관광객이 큰 몫을 차지하고 있다. 인구는 점차 줄어드는 추세로 약 3만 명이며, 우리의 농촌처럼 젊은이들이 떠나 초고령화 사회로 접어든 심각한 사회문제가 되고 있다.
한국 관광객을 맞는 버스
10대 중 9대가 산행팀~
우리 팀만 유일하게 여행에 나섰다~ 우리나라 등산 인구가 대략 1800만 명이라는 통계가 나와 있듯이~ 지금 대한민국은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도 등산 열풍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이윽고 본격적인 여행이 시작되고 / 제주도를 비롯한 전국 각지에서 모인 우리 일행 모두는 하나같이 배려하는 마음이 깊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다 / '척 보면 앱니다' / 이번 여행은 별 어려움 없이 잘 마무리 되리라 생각이 들며 느낌이 좋다.
첫 번째 여정지▼한국전망대
밤이 되면 현란한 불빛이 만드는 밤바다의 예술인 부산항을 비롯한 부산 전 지역이 뚜렷하게 보이는 한국전망대는 / 일제 강점기 때 대마도에 잡혀온 우리 선조들이 명절 때가 되면 이곳에 올라 조국을 그리워했던 망향의 동산이다.
위치는 나가사키 현 쓰시마 최북단에 자리 잡고 있으며, 전망대 오른편에 조선역관 순난비(朝鮮譯官殉難之碑)가 서 있다.
1703년 위문행역관사(慰問行譯官使) 선박이 대마도로 입항하다 암초에 좌초되어 침몰돼 정사 한천석(韓天錫)과 부사 박세양(朴世亮)을 비롯해 113명의 사절단 전원이 사망한 그들의 넋을 기리는 비석이다.
순난비의 오른쪽 방향 아래 섬에는 눈에 거슬리게 일본해상자위대▲레이더 기지가 부산항 바다를 향해 마주하고 있어 꺼림칙하고▼토요호다이~~~ ㅠㅠ
한국전망대 인근에 위치한 대마도 판 나바론 요새 '토요호다이'는 1929년 일본제국주의 식민정권이 조선 강제 징용인 노역으로 만든 당시 최대 포대적 요새로, 북한 땅굴은 깜도 안 되는 가히 땅굴의▼원조다.
▼ 중 식
대마도 여행을 하면서 한 끼니 점심은 보통 이 정도의 양이다. 먹성 좋은 만보도 그런대로 괜찮은 편이었고, 일행 중 한 여성은 깔끔 담백한 부담 없는 맛으로 만족이라고 했다. 입맛 까다로운 동백이는 양이 적은 듯 유구무언~~~ 양이 부족하면 공깃밥을 추가하면 된다. 물론 추가는 곧 쩐이 필요한 얄짤없는 일본의 음식 문화에 고추장 김~ 정도의 밑반찬을 챙겨가면 되겠다.
▼ 미우다 해변
미우다 해수욕장은
일본 100선에 선정된 만큼 WOW~ 그야말로 에메랄드 빛을 내뿜는 맑고 투명한 물빛이 오묘하고 아름다워 우리나라 제주의 협제 해변을 연상케 한다.
캠핑장을 갖추고 있는 미우다 해수욕장은 한여름 가족 자유 여행지로 정해 맘껏 즐겨며 쉴 수 있는 힐링 공간으로 손색이 없을 듯싶다.
▼ 에보시타케 전망대
하롱베이 닮은
아소만 일대
에보시(烏帽子)는
일본의 옛 무사들이 쓴 삼각형 관모를 뜻한다. 섬이 펼쳐진 모습이 모자가 바다에 떠 있는 모습과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리아스식 해안을 따라 수십여 개의 크고 작은 무인도가 둥둥 떠 있는 듯한 모습으로, 한눈에 펼쳐지는 아름다운 이곳 풍경을 두고, 베트남 제2의 '하롱베이'라고 비교를 하며 대마도에서 가장 뛰어난 풍광을 자랑한다.
▼ 와타즈미 신사
와타즈미(和多都美) 신사는
일본 왕의 직계와 바다의 수호신으로 여겨지는 도요타마히메노미코토를 신으로 모시는 해궁의 문을 형상을 한 도리이(鳥居)가 물안에 세워져 있다. 신사 정면으로 이어진 다섯 개의 도리이(고도리)는 해탈을 의미하며, 용궁 전설이 어우러진 신화의 세계다.
꼰 새끼줄에 끼워 있는
흰종이(도리이)의 의미는?
인생사 꼬인 것을 다 없애 준다는 깨끗한 마음으로, 내 어릴 적 아기를 낳으면 보았던 새끼줄에 붉은 고추와 숯을 걸어 악귀를 쫓았다는 우리나라 풍습이 떠올랐다.
모진 세월을 견뎌 온 끈질긴 생명력을 보여주는 나무뿌리에 왠지 숙연해지고 경건해진다. 역시 도리이(흰종이)로 신성함을 더하며 해탈의 가르침을 나타낸다.
이렇듯 일본에는 크고 작은 신사들이 8만여 개가 존재하고 있다는 가이드의 설명에 과연 '일본은 신사(神社)의 나라' 임을 나타냈다. 아베를 비롯한 일본 극우 보수 정치인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와 성격이 다른 선조나 자연을 숭배하는 토착 신앙이다.
한쪽에선 추억을 쌓기에
여념이 없고 ~
오지랖 넓은 만보는 순간순간을 놓칠세라 카메라에 주워 담느라 정신이 없고 ~
다른 한쪽에선 만보가 지난 팸투어 때 맛을 봐 추천한 고로케를 맛보려고 나라비(ならび)~ 줄 서 있는 와타즈미 신사 고로케의 감칠맛 나는 맛을 즐기고 있다.
▼ 만제키바시(만관교)
일제가 1900년 전쟁을 준비하기 위해 만든 만제키세토(운하)와 만제키바시(만관교) 만제키세토는 아소만과 미우라만 사이에 인공적으로 개설된 운하로~~아소만에 있는 군함을 대마도 동쪽으로 빨리 이동시키기 위해 1900년에 만들고, 그 위에 건설된 다리가 만제키바시이다.
▼ 해수 ♨ 온천욕
1박 2일 짧은 여정으로 일정에 없었지만 해수 온천욕을 끼워 넣어 일행 모두가 만족하며 망중한을 즐겼다.
▼ 조선통신사비
朝鮮通信使対馬易地聘礼
200周年記念壁画
2011. 8. 22
2015년 조선통신사
한일 문화교류사업
'쓰시마 행사'
출처▲부산문화재단
'조선통신사'는
임진왜란 이후 기유조약(1609 광해1년)에 의거하여 조선에서 일본으로 보낸 파견 사절로 정사와 부사, 종사관 등 약 500명에 이르는 대규모로 한양에서 출발해 부산을 거쳐 일본의 대마도, 시모노세키 등을 지나 에도까지 가는 데 반년 이상 걸렸다.
<1607년~1811년> 당시만 해도 일본보다 한수 위였던 통신사 일행이 일본에 머무는 동안 한시, 그림, 유학 등을 일본인들에게 전수하였다. 이렇게 대마도에는 조선의 통신사가 일본으로 건너갈 때 대마도를 거쳐 갔기 때문에 사절단 일행이 머물렀던 유적이 남아있으며, 대마도 번주의 관사로 들어가는 출입문은 고려문이라는 이름으로 남아있다.
▼ 자발적 쇼핑
▼ 석 식
바비큐 요리에 사케 한 잔 들이켜니 캬~ 긴장된 하루의 피로가 모두 풀리는 듯하다. 몇 차례 술잔이 돌고 취기도 조금 오르고 저녁식사를 마친 숙소에서의 뒤풀이가 은근히 기다려진다.
▼ 숙소 도착
한국인이 임대해서
운영하는
민숙 친구에서의 하룻밤~
끼리끼리 모여 술잔을 기울이며 화두는 역시 인생은 '일장춘몽 화무십일홍'이 아니던가. "인생 뭐 있나?" 요로콤 틈틈이 짬을 내 여행을 즐기며 살면 되지~~~
▼ 제2일
아침 산책~
조식~아유모도시 계곡~면세점~수선사(최익현순국비)~중식~가네이시성터~덕혜옹주결혼봉축비~이즈하라항 출항~부산항~
만보가 여행을 떠나면
꼭 실행하는 아침 산책
▼ 민숙집에서의 조식
도시락 하면 역시 벤또(도시락 べんとう)의 나라 일본이 빠질 수 없다. 맛은 차치하고 깔끔하고 담백해서 좋다.
▼ 아유모도시 자연공원
짙푸른 숲과 대마도 깊은 속살을 흐르는 맑은 물이 인상적인 아유모도시 계곡~ 계곡 이름은 '세가와' 맑은 계곡이라는 뜻을 가졌으며, 은어가 돌아온다는 의미도 내포하고 있다.
이즈하라▲차창 밖 풍경
▼ 수선사
(면암 최익현 순국비)
내 머리를 자를지언정
내 머리카락은 자를 수 없다.
수선사는 최익현 선생 순국비가 있는 곳으로, 조선통신사의 첫 관문이자 656년 백제 귀족 비구니가 구품원 암자를 설립했다. 구한말 위정척사운동의 거두이자 의병장인 최익현은 전라도에서 일본군의 지원을 받은 관군과 싸우다 사로잡혔다.
당시 74세였던 선생은 대마도로 압송돼 5개월간 저항하다가 1907년 1월 1일 단식 순국했다. 대마도 유배생활 동안 대마도인들은 그의 절개와 기품을 높이 평가해 최익현 선생의 유해를 모시고 제사를 지냈다. 2m 높이의 순국비에는 '대한인최익현선생순국비'라고 쓰여 있다. 1986년 한국과 일본의 뜻있는 사람이 세웠다.
▼ 중 식
▼ 가네이시성터
▼ 덕혜옹주봉축비
덕혜옹주는
고종이 환갑에 낳은 딸이다. 정식 비가 아니라 양귀인에게서 낳았다고 공주가 아니라 옹주다. 덕혜옹주는 13세 때 '유학'이라는 명목으로 일본에 강제로 가게 된다. 19세 때 1931년 대마도주 소 다케유키 백작과 정략결혼을 해 다마도에 와서 일주일간 머물렀다.
이를 기념해 대마도 사람들이 결혼봉축비를 세웠다. 하지만 두 사람이 이혼한 뒤(1955년) 비석은 깨졌으며, 기념비는 대마도 내성인 가네이시조 밖에 버려졌다. 1962년 귀국한 덕혜옹주는 1989년 창덕궁 낙선재에서 별세했다.
21세기 들어 대마도를 찾는 관광객이 늘어나자 한국과 일본의 뜻있는 지식인이 2001년 가네이시조 스미즈 공원에 다시 세웠다. 대마도 여행은 보통 이 정도인 소소한 여행으로 모든 여행이 근사하고 멋지기만 한 것은 아니다.
잃어버린 우리 땅~
배반의 땅으로 애증이 교차하는 역사의식 속에 한 번은 둘러봐야 할 곳으로 추천한다.
▼ 이즈하라 시내 약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