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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시를 만나서 지은 집
김명옥
십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데 내가 시와 만난 지 벌써 20년도 훌쩍 넘었으니 강산이 두 번도 더 변했다. 나름대로 부지런히 시를 만나서 집을 지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집에 차곡차곡 들어간 시를 끌어안고 온통 머릿속이 하얗도록 지새던 날들이 생각났다. 그랬다. 나는 시를 짝사랑했다.
짝사랑이란 남녀 사이에서 한쪽만 상대편을 사랑하는 일이다. 나 또한 마찬가지다. 나는 시 앞에서 얼마나 가슴 두근거렸고, 기뻤고, 뜨거웠는지 모른다. 그리고 또 얼마나 가슴 아팠고, 쓰렸고, 서러웠는지 모른다. 그것만 보아도 난 틀림없이 시를 짝사랑했고, 짝사랑하고, 짝사랑할 것 같다.
1.
난 항상 누군가를 그리워한다. 그래서 떠나기를 좋아한다. 떠나기에서 계절, 시간, 동행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특히 겨울바람이 매서운 날은 미치게 바다가 보고 싶었다. 그럴 때마다 무작정 찾아간 곳이 천수만이었다. 천수만의 바다는 뜨겁게 울부짖는 바다와 시리게 매달리는 파도가 있다. 그리고 천수만에는 밀려왔다 왈칵 솟구쳤다 수평선으로 거침없이 내달리는 바다와 방조제에 갇혀 바다로 돌아가지 못하고 추위에 떨고 있는 바다가 있다. 방조제에 갇혀 돌아갈 수 없는 바다를 조문하며 가슴이 시리도록 서 있기도 했다. 대한민국 수도 서울 종로 2가 낙원상가 앞 한 끼의 식사를 위해 차례를 기다리던 사람들의 얼굴이 겹쳐져서.
바닷물이 시린 날을 골라 천수만에 갔다.
새들도 발이 시린가 스트로폼 부표 위에 두 발을 올려놓고,
얼어붙은 고개를 날갯죽지에 묻고 햇볕에 졸고 있었다.
갈 곳을 잃은 천수만의 새들은,
아침을 먹고 스트로폼 부표 위에서 졸다가,
점심을 먹고 스트로폼 부표 위에서 졸다가,
저녁을 먹고 스트로폼 부표 위에서 졸다가, 그리고 잠이 들었다.
할 일을 잃은 천수만의 새들은
천수만의 출렁임에 잠시 눈을 떴다가는
또 다시 고개를 날갯죽지에 묻고 잠이 들었다.
먹고, 졸다가, 자는 천수만의 새 앞에 우리 시대의 얼굴이 걸어간다.
졸다가 자다가를 밥 먹듯 하면서
<우리 시대의 얼굴 1>의 전문
광화문에서 바라보는 세종로는 젊다. IMF 위기를 극복하고 경제대국으로 거듭난 대한민국의 젊은이처럼 젊다. 피맛골에서 바라보는 종로 뒷골목은 피곤하다. 생존을 위해 극한상황으로 내몰린 대한민국의 중년처럼 피로하다.
천수만에도 두 얼굴이 있다. 대양을 달리는 젊은 바닷새와 더 이상 날 수가 없는 피로한 바닷새가 있었다. 그들은 ‘스트로폼 부표 위에 두 발을 올려놓고 / 얼어붙은 고개를 날갯죽지에 묻고 햇볕에 졸고 있었다.’ 천수만의 새는 ‘아침을 먹고 스트로폼 부표 위에서 졸다가/ 점심을 먹고 스트로폼 부표 위에서 졸다가/ 저녁을 먹고 스트로폼 부표 위에서 졸다가, 그리고 잠이 들었다.’ 내가 본 건 틀림없는 천수만의 새였지만, 천수만의 새가 아니었다. 종로2가 낙원상가 앞, 탑골공원 돌담에서 무료한 햇살을 죽이면서 한 끼 식사를 해결할 수밖에 없는 우리 시대의 얼굴이었다. 도시는 늘 등 푸른 생선처럼 의욕이 넘치는데 그들은 늘 피로하다. 천수만 방조제에서 나는 피로와 추위에 생각마저 굳어버린 우리 시대의 얼굴을 수천수만 마리 만났다.
어느 초봄 충남 보령 만수산으로 산행을 갔다. 능선에서부터 휘몰아치는 칼바람에 옷깃 깊숙이 얼굴을 파묻고 구부능선 그 어디쯤을 걷고 있었다. 잠시 칼바람을 피해 바위 밑에 털썩 주저앉았는데 그곳에서 따스한 햇볕에 생각 없이 덜컥 꽃을 피우고는 추위에 오들오들 떨고 있는 진달래꽃을 만났다. 바위에 몸을 숨기고 칼바람을 피하기에는 너무 어려서 안타까움에 몇 마디를 나누었다.
너무 일찍 핀 진달래꽃 몇 송이가 바위에 바짝 붙어 오들오들 떨고 있데요. 나도 몰래 그만, 안쓰러움에 무에 그리 급해서 이리 일찍 피었냐고 핀잔 아닌 핀잔을 했네요. / 그런데, / 찬바람에 터질 대로 터진 얼굴은 그저 배시시 웃기만 하데요.
<우리 시대의 얼굴 2>의 일부
자신의 의견을 표출하지 않는 것이 미덕이라고 배운 우리 는 늘 대답을 웃음으로 대신했다. ‘무에 그리 급했냐’는 핀잔 아닌 핀잔에 ‘그저 배시시 웃기만 하’는 수줍은 진달래꽃은 내 주위에서 늘 나와 함께 살아가는 우리 시대의 얼굴이었다. 그것이 고통이어도, 슬픔이어도 상관없다. ‘찬바람에 터질 대로 터진 얼굴’이지만 핀잔도 관심이요, 배려라고 생각하는, 너무 평범해서 이웃 같은 우리 시대의 얼굴을 만수산 구부능선에서 만나고 오는 날은 이른 봄이었다.
나는 비오는 날을 좋아한다. 비오는 날은 나에게만 존재하는 우요일이다. 가을, 덕수궁 돌담길을 걸으면서 내려다보는 내 신발 코, 나보다 딱 한 발 앞서서 걸어가는 빗방울이 노란색이어서 우(雨)요일을 사랑했다. 그러나 세월이 가고 시대가 가고, 지금은 우(雨)요일에도 난 걷지 않는다. 대신 자동차를 탄다. 빗방울도 노랗지 않다. 그저 비에 젖은 낙엽만 서러울 뿐이다.
낙엽을 보면 아프다.
바람이 불 때마다 숨넘어가게 하늘을 향해 뛰어올랐다가 내동댕이쳐지는 몸뚱이를 아파할 사이도 없이 또 다시 하늘을 향해 뛰어올라야 하는 그 가벼움이 아프다.
피할 사이도 없이 비 맞은 몸을 아스팔트에 붙이고 밟혀도 그 자리를 떠날 수 없는 숙명이 아프다.
달리는 차창에 달라붙어 끝까지 떨어지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는 낙엽이 세상에 등 떠밀리지 않기 위해 발버둥치는 얼굴과 같아서 아프다.
낙엽이 아파서 가을은 내내 몸살중이다.
<우리 시대의 얼굴 7>의 전문
달리는 차창에 달라붙어 끝까지 떨어지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는 낙엽은 세상에 등 떠밀리지 않기 위해 발버둥치는 70, 80세대는 어쩌면 그리도 닮은 모습인지. 구조조정과 조기은퇴, 실직으로 내몰린 중년의 가장은 삶의 무게를 혼자 감당하기에는 너무 버겁다. 피로에 젖은 몸으로 ‘아직은’ 이라고 외쳐보지만 늘 기계에 서툴고, 정보에 서툴고, 그래서 늘 허둥대는 우리 시대의 얼굴과 너무도 닮았다.
2.
물체의 진동에 의하여 생긴 음파가 귀청을 울리어 귀에 들리는 것을 소리라고 한다. 소리에는 휴식이 있고, 이국의 풍경이 있고, 솔바람이 있다. 소리에는 과거가 있고, 현재가 있고, 미래가 있다. 그리움이 있고, 아쉬움이 있고, 행복이 있다.
갑갑한 도시생활의 일상에서 벗어나고 싶을 때면 문득 그리워지는 소리가 있다.
일요일 아침.
아파트 지붕위로 하늘이 빠끔히 보인다.
늦은 아침을 먹고, 리모컨을 켠다.
대한민국은 온통 코미디 바다에 빠졌다. 1박2일, 무한도전, 무릎 팍 도사, 스타킹, 봉숭아학당, 패밀리가 떴다, 놀러와……, 그것도 모자라 재방송까지 보다가, 잠이 들었다.
잠속에 계단을 따라 길게 올라오는 소리가 있다.
‘세 ~ 탁, 세 ~ 탁’
잠속에서 세탁 소리는 똥차를 만났다.
‘똥 ~ 퍼, 똥 ~ 퍼’
똥차가 당당하게 골목길에 들어서고, 부릉부릉 몇 번에 똥차의 빨대가 팽팽해지고, 푸르르 몇 번에 구석까지 말끔히 핥고 나면, 똥차의 엄청난 식탐에 감탄하고, 홀쭉해진 똥통에 신기해하고, 골목골목, 집집마다 차별 없이 퍼지는 똥내에 가슴 훈훈해 하는 사이, 똥차는 기세 좋게 불룩한 배를 출렁이며 골목길을 나갔다. 좁은 골목을 비추는 햇살이 길게 뒤따랐다.
한낮이 훨씬 지난 햇살을 뚫고
아파트 지붕위로 빠끔한 하늘이 보인다.
‘세 ~ 탁, 세 ~ 탁’
<소리, 그 따뜻한 1>의 전문
도시의 섬에 갇혀 살고 있는 나는 일요일이라도 딱히 할 일이 없다. 단절과 고립의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텔레비전을 틀어놓고 텔레비전이 토해 내는 소리에 그냥 나를 맡긴 채 잠이 드는 게 고작이다. 그럴 때 아파트 복도를 따라 길게 내 귀를 적시는 ‘세 ~ 탁’ 소리는 내 과거를 깨우는 ‘똥 ~ 퍼’ 소리를 닮아서 나를 행복하게 한다. 70년대만 해도 햇볕 좋은 날이면 똥차는 당당한 기세로 온 골목길을 휘젓고 다녔다. 암모니아 냄새가 코를 찌르면 찌를수록 ‘똥 ~ 퍼’ 소리는 건강을 장담했다. 일요일 도시의 섬 저 밑바닥에서 울려오는 ‘세 ~ 탁’ 소리는 ‘똥 ~ 퍼’ 소리와 함께 아파트 지붕위로 빠끔히 보이는 하늘을 한층 넓게 만드는 따뜻한 소리라서 자꾸만 웃음이 나왔다.
살다보면 문상(問喪)을 가는 일이 종종 있다. 문상을 가면 난 늘 영정 사진 속의 얼굴을 한참동안 바라본다. 꼭 그가 나에게 무언가 할 말이 있을 것 같아서다. 특히 가고 오는 길에 비가 오거나, 싸락눈이 내리거나, 바람이 불면 난 그들이 하고 싶은 말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곤 했다.
문상 가는 길, 무거운 진눈개비가 왔다.
진눈개비에 차들도, 사람들도 칭얼댔다.
차안의 사람들은 모두 앞만 보았다.
갑자기 침묵을 쪼는 소리가 있었다.
타닥, 타닥, 타닥,
싸락눈이었다.
그는,
어느 날부터인가 하염없이 주무셨단다.
또 어느 날부터인가 미음만 드셨단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보약 3첩만 먹고 가겠다고 하셨단다.
보약 한재 지어드렸단다.
그날부터, 그 보약을, 딱 3첩만 들고 가셨단다.
그가 이 세상과 마지막 약속을 지키고 떠난 날 늦은 저녁.
문상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 타박걸음으로 따라온 그가
투박한 손으로 시린 차창을 두드렸다.
타닥, 타닥, 타닥,
싸락눈이었다.
<소리, 그 따뜻한 2>의 전문
그는 살아생전 해병대아저씨로 통했다. 그리고 그는 해병대전우로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것을 무척 자랑스러워했다. 그는 나를 만나면 늘 해병대 무용담을 늘어놓곤 했다. 다들 믿지 않는 듯했지만 난 늘 최선을 다해서 들었다. 그런 그가 세상을 떠났다는 부음을 듣고 그를 뵈러갔다. 그날 진눈개비가 내렸다. 가족은 나에게 해병대아저씨가 어느 날부터인가 하염없이 주무셨다고, 또 어느 날부터인가 미음만 드셨다고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보약 3첩만 먹고 가겠다고 해서 보약 한재 지어드렸더니 딱 3첩만 들고 가셨다고 했다. 자신보다는 자식, 가족이 우선이었던 분이셨기에 그가 가족과 지킨 약속이 너무 가슴 아팠다. 문상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싸락눈이 더 세차게 내렸다. 나는 해병대아저씨가 나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거라 생각하고 차창에 손을 댔다. 참 따뜻했다.
자연은 살아있다. 살아있는 것은 소리가 있다. 우리 학교에는 모과나무가 몇 그루 있다. 여름 그늘이 짙어서 나는 모과나무 밑에 주차를 자주 한다. 그런 어느 날, 자동차 시동을 걸려고 하는데 갑자기 ‘쿵’하고 뭔가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그 소리가 하도 커서 깜짝 놀랐다. 자동차 문을 열고 나가보니 모과 하나가 떨어져 있었다. 그동안 여름 그늘이 짙은 푸른색이었는데 어느새 노랗게 물들어 있었다.
쿵!
모과 하나가 떨어졌다.
지구는 실금이 갔지만
모과는 아린 기억에 온몸이 무너졌다.
노랗게.
<소리, 그 따뜻한 9>의 전문
푸른색의 무게가 더 무거운지 노란색의 무게가 더 무거운지의 판단은 잠시 유보했다. ‘쿵’ 소리에 지구는 실금이 갔겠지만, 모과는 온몸이 무너졌다. 쳐다보니 온통 노란 모과가 가지가 휘어지도록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여름 내 그늘이 짙은 곳에 주차를 하면서도 모과가 그렇게도 많이 열린 줄을 몰랐다. 그걸 나에게 알려주기 위해 모과는 온몸으로 따뜻한 가을을 열어주었다.
3.
간혹 나는 세상과 소통하고, 삼라만상의 법칙을 진단 해 보고 싶다. 혹자는 세상과 소통하는 방법으로 ‘늘 밝고 예쁜 표정을 지을 것, 자주 웃을 것, 남의 말을 잘 들어줄 것, 좋은 자리에서 질문을 할 것’이라고 했다. 나는 세상과 소통하기 위해 늘 같은 표정으로 세상을 바라만 본다.
입춘을 앞두고 갑작스런 서설.
하늘이 온통 하얗다.
괜찮다, 괜찮다 했는데……
기다림이 성큼 자란 그리움 위로
우수수 벚꽃이 흩날린다.
대설경보다.
<진단 1>의 전문
사람들은 모두 계절에 대한 선입견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선입견과 다르면 기상이변이라고 야단법석이다. 입춘을 앞두고 내린 눈이니 그야말로 상서로운 눈이다. 춘래불래춘(春來不來春봄이 왔지만 아직 봄이 오지 않았다.)이라 했지만 봄이 오지 않은 게 아니라, 봄이 멀지 않았다고 벚꽃처럼 흩날리는 눈은 대설경보로 세상과 소통하고 있었고 나는 기다림과 그리움을 진단했다.
도시 생활을 미로라고 한다. 어지럽게 갈래가져서 한번 들어가면 다시 빠져나오기 어려운 길처럼 도시생활 또한 서로 얽히고설켜서 한번 들어가면 빠져나오기가 어렵다. 사람도 그런데 하물며 동물은 어떻겠는가. 어느 날 출근길에 나는 철쭉꽃이 붉게 일어서는 교차로에 갇혀버린 개 한 마리를 만났다. 개는 달려드는 자동차를 온몸으로 피하면서 꼬리를 다리에 묻고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개를 못 본 척, 철쭉꽃만 보던 내 눈이 개 눈과 마주쳤다.
출근길.
복잡한 교차로 한복판에서 개 한 마리를 만났다.
철쭉꽃이 붉게 일어서는 교차로에 포위당한 개는
주인을 잃었는지 횡단보도를 잃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저, 달려드는 자동차를 온몸으로 피하면서,
다리 사이로 떨리는 꼬리를 숨기고 있었다.
못 본 척, 철쭉꽃만 보던 내 눈이 개 눈과 마주쳤다.
개 눈에는 내가 자동차였고
내 눈에는 개가 철쭉꽃이었다.
그날 저녁 난, 교차로에 갇힌 개 구출작전을 읽었다.
<진단 2>의 전문
동물에게 도시는 전쟁터다. 동선이 차단된 공간 속에서 동물은 대책 없이 전장으로 내몰릴 수밖에 없다. 특히 ‘출근길/ 복잡한 교차로 한복판’에 갇힌 개는 더욱 그렇다. 사방에서 밀려오는 자동차의 포위망을 탈출하기 위해 개는 죽음을 담보로 한 모험을 강행할 수밖에 없다. 개의 눈에는 개만 보이고 부처의 눈에는 부처만 보인다고 했는데 개의 눈에 나는 포위를 좁혀오는 자동차로 보였을 것이고, 내 눈에 개는 교차로의 철쭉꽃으로 보인 아이러니. 전쟁터가 된 도시는 출구 없는 미로라고 진단한 그날 저녁 ‘교차로에 갇힌 개 구출작전’을 읽고 나의 진단이 오진이라서 행복하게 웃었다.
우리 학교 담벼락 밑, 버려진 공터를 지나 나는 학교식당으로 간다. 한동안 그곳은 주차장으로 이용되었는데, 어느 날부터 주차장 이용이 불가능하게 되면서 공터에는 잡초만 무성했다. 그런 잡초를 누가 제거했는지 하나, 둘씩 텃밭이 생겨났다. 나는 식당을 오가면서 바라보는 텃밭이 황량한 생활에 지친 나에게 오아시스가 되길 기원한다.
학교 담벼락 밑 버려진 공터
언제부턴가, 누군가가 작은 텃밭을 일구었다.
텃밭이라 할 것도 없지만, 그래도
엉성한 돌 몇 개로 만든 경계선 안을
모두들 텃밭이라고 인정했는지
지나가는 발걸음이 조심스럽다.
언제 씨앗을 뿌렸는지, 새싹이 나고, 잎이 나고.
한 여름 땡볕에도 우줄우줄 푸르렀다.
담벼락 그림자가 와르르 운동장으로 몰려와도
퍼들어진 잎사귀로 느긋하게 햇살을 즐기던 배추가
드디어 속이 꽉 찼는지 배가 많이 불렀다 했는데
언제 베었는가, 담벼락 밑 텃밭이 텅 비었다.
이 겨울 어느 집 누군가는 김장 몇 포기에
올 겨울은 아무리 추워도 괜찮아, 김장을 했으니……
환한 웃음에 겨울은 더 이상 춥지 않았다.
<진단 15>의 전문
돌 몇 개로 경계선 안과 밖이 나뉘었고, 경계선 안을 우리는 텃밭이라고 불렀다. 언제 뿌렸는지 몇 번의 봄비 끝에 새싹이 나오고, 잎이 나오고, 땡볕에도 우줄우줄 푸르더니 드디어 이름이 생겼다. 배추였다. 가난하고 힘들었던 시절, 우리는 긴 겨울을 나기 위해 집집마다 김장을 했고, 겨우내 김치를 먹으면서 봄을 기다렸다. 물론 지금은 김장을 하기보다는 백화점에서 사다 먹는 게 편리한 세상이 되었지만, 나는 학교 담벼락 밑 조그만 텃밭에서 겨울 준비와 봄을 기다리는 가족의 넉넉한 웃음을 진단했다.
4.
인연이 있으면 만나고, 인연이 없으면 헤어진다고 했던가. 만나고 헤어짐이 인지상정이라지만, 헤어진 사람은 언젠가는 돌아온다(去者必返)는 말은 헤어짐을 아쉬워하는 마음이 만들어 낸 것이라면 내가 나를 만난 건 어쩌면 행운인지도 모른다.
간혹 TV를 보면서 깜짝 놀랄 때가 있다. 어디서 만났던가를 곰곰이 생각해 보지만 생각날 리가 없다. 그러면 가장 적당한 대답으로 나는 아마 전생에 만났던 얼굴일 거라고 웃는다.
TV를 보다가 깜짝 놀랐다.
어디선가 많이 본 얼굴이다 생각했지만
생각나지 않는 얼굴이
그리움으로 살아났다.
내 전생이 연결된 거리에서
한 번은 마주했을 얼굴들.
명동거리, 청계천 변, 동대문 시장, 남대문 시장, 경복궁… 에 던져진
수많은 얼굴이 저리도 가까운 건
내가 혼자가 아니어서 인 것을.
TV를 보았다.
TV 속에서 낯익은 얼굴이 나를 웃었다.
어쩌면 내 전생일지도 모르는 얼굴이.
<얼굴>의 전문
우리는 모두 인연으로 얽혀 있다. 길거리에서 오고 가며 마주치는 사람, 직장에서 만나는 사람, 여행을 하다가 마주치는 사람, 만나지는 않았지만 한번쯤은 만날 뻔했던 사람, 그 모두가 인연으로 얽힌 것이라면, 모두가 나에게 낯익게 보이는 건 당연하다. 그래서 난 ‘TV를 보다가 깜짝 놀랐’고 ‘TV 속에서 낯익은 얼굴이 나를 웃었’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내 전생일지도 모르는 얼굴이.’ 정말로 전생이 있다면 그들은 모두 내 전생과 인연이 있는 얼굴이다. 그리고 후생이 있다면 나는 또 그들과 다음 세상에서 만날지도 모르는 얼굴이다. 모두 인연이니까.
내가 시를 만나서 지은 집에는 내가 만난 사람이 있고, 내가 만난 사물이 있고, 내가 만난 이야기가 있다. 그래서 그것을 자연스럽게 말해주고 싶었기에 제 7시집 <소리, 그 따뜻한>의 해설을 나는 내 시작 노트로 대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