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없어
홍 경 화
길을 가다가 사거리 건널목에 멈췄다. 빛바랜 헝겊이 너덜거리는 릭샤, 모서리가 삭아서 철판 조각이 떨어져나가는 중인 낡은 버스, 그 틈을 비집고 들어서는 자전거와 오토바이, 빽빽한 그 틈을 비집고 나란히 서서 익숙한 자세로 기다리고 있는 비쩍 마른 소까지 혼란스럽고도 생소한 삶의 어우러짐이 신기하다.
사계절이 뚜렷한 나라에만 살아 본 눈에는 공원의 계절조차 무분별하다. 이파리가 막 돋아나는가 하면, 가을인 듯 누렇게 단풍이 들었거나, 여름인 듯 녹음이 무성한가 하면 겨울인 듯 헐벗고 가지만 앙상하다. 숲속의 계절을 종잡을 수 없다. 간혹, 밖으로 드러난 뿌리를 삼지창처럼 땅에 찔러 박고 서 있는 나무가 눈에 띈다. 이웃한 나무들 또한 꼬이고 삐딱하고 뒤틀린 자세로 힘들게 서 있다. 요가의 나라 인도는 수행하는 사람이 많다더니 나무도 덩달아 수행하는 자세다. 그 나무 밑을 지나다가는 고행의 진득한 비지땀이라도 우두둑 떨어져 맞을 것 같아 지레 비켜 간다.
시간이 흐르자 인파의 물결이 물 흐르듯 흐른다. 마구 뒤엉켜 뒤죽박죽이던 길이 트인다. 누가 뭐라 안 해도 사람과 소들이 서로서로 비켜서며 오고간다. 문제없이 사람이나 짐승이나 동등한 그들 삶의 면면이 혈관처럼 섞여 흐른다.
한참을 가다보니 묘한 광경이 눈에 잡힌다. 자로 잰 듯 동그랗게 빚어진 물건이 담벼락에 납작납작 달라붙어 있다. 거무스름한 모양으로 빈틈없이 촘촘히 붙어 있다. 그 옆을 보니 바짝 마른 것은 벽에서 떼어 수북하게 쌓아 놓았다. 도미노처럼 열 맞춰 세워 볕에 말리는 것도 있어서, 그중 하나를 툭 건드려보고 싶은 충동이 인다. 도공이 도자기를 빚듯 소의 배설물을 동글납작 주물러 놨다. 몸과 밥을 따스하게 데워 줄 연료이니 공들여 빚어놓았음이 역력하다. 오물을 재활용하여 자연으로 되돌리는 생활의 발견!
그뿐인가. 새벽의 갠지스에서는 어린아이의 주검이 수장으로 바쳐진다.
때마침 나룻배 한 척이 조용히 노를 저어 스쳐간다. 갠지스와 하나가 된 듯 물처럼 흘러 움직인다. 인적이 드문 반대편 강가로 미끄러져 간다. 흰옷을 입은 남자가 하얀 보자기에 싼 자그마한 물체를 강물에 가만히 내려놓고 묵념한다. 침묵의 수장. 아무렇지 않다고, 문제없다고, 걱정 말고 흐르는 강물처럼 흘러가면 된다고 아이에게 말하고 있을 것이다. 윤회로 보자면 나 또한 어느 순간에 갠지스 강으로 흘러들지 알 수 없는 일이다. 빈 물병을 꺼내 온갖 오물이 떠다니는 강물을 휘휘 저어 가득 담는다. 한국으로 가져갈 갠지스의 물이다. 누렇고 탁하지만 그래 봬도 성스러운 강물이다.
강가의 제단에는 주검을 태우는 연기와 그을음이 무심히 허공을 타고 오른다. 뼈와 살이 녹는 냄새가 짙다. 한 무리의 까마귀들이 주변을 낮게 선회한다. 울다가 지친 양, 목 쉰 소리로 가막가막 울며 위로한다.
으슬으슬 춥다. 강가의 음울한 습기가 발목을 타고 올라온다. 갠지스의 한가운데에선 피할 수도 없다. 18도나 되는 2월의 추위를 타기는 그들도 마찬가지인지, 남녀노소 머리나 목 언저리에 두꺼운 천을 친친 둘러매었다. 입성은 얄팍하고 남루하다. 언뜻 보니 거처하는 집들도 성치 않다. 지붕이라고는 쭈그러진 양철판 한 장 얹어 놓은 게 전부다. 고만고만한 엉성한 누옥들이 길가에 즐비하다.
강가를 빠져나오며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그만 미끈덩 길바닥에 미끄러진다. 물컹한 것이 여지없이 밟혔다. 위만 쳐다보지 말고 아래를 보고 걸었어야 했다.
발을 들고 쩔쩔매자 소의 눈을 닮은, 사람을 어쩌지 못하게 하는 순진한 눈, 눈들이 구경거리 만난 듯 반짝이며 쳐다본다. 별것도 아닌 그런 일로 뭘 얼굴을 찡그리냐는 낙천적인 음성이 들려온다.
“노 프라블럼. 자네가 지금 소똥을 밟은 것은 그리 대단한 일이 아니구먼.”
찌그러졌던 내 표정을 얼결에 풀어헤친다.
“그래, 문제없어. 인도여 내게로 오라.”
땅바닥에 발을 대충 문지르고 주문처럼 외우며 전진한다. 최면에 걸린 듯 점점 더 깊숙한 인도로 끌려간다. 차량의 통행으로 혼잡한 도로의 중앙분리대에 소 한 마리가 철푸덕 누워 쉬고 있다. 태연히 눈을 껌뻑이던 그 눈이 내 눈과 마주친다. 설사 그놈이 오물의 범인이라도 마주치는 순간 그냥 지나치고 만다. 영혼 깊숙이까지 들여다보는 혜안의 눈 같아 맥없이 뜨끔하다.
보따리를 끼듯 작은 아이를 옆구리에 끼고 그보다 조금 큰 아이는 걸린 채 꼬질꼬질한 아낙네가 손을 벌리며 앞을 막는다. 바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으니 동전이 잡힌다. 2루피를 아낙의 거무튀튀한 손바닥에 올려놓았다. 왼손에 들려 있던 심장처럼 붉은 석류 한 알도 내미니 해맑은 웃음이 보답으로 날아온다. 맨발인 그녀의 뒤꿈치가 석류 벌어지듯 터졌다. 안쓰러움에 손가락으로 가리키자 아낙은 별문제 아니라는 듯이 대꾸한다. “노 프라블럼.” 순간 내 발에 신겨진 운동화가 눈에 걸린다. 한 꺼풀 방어벽이 있어도 나는 발이 아픈데 진창길, 자갈길, 마다않고 맨발로 삶의 여로를 걸어갈 모양이다. 주어진 길이라면 끝 간 데까지 걸어갈 듯한 그녀의 마음은 지금 행복과 불행 어느 기로쯤 머물러 있는 걸까. 하지만 내가 본 그녀의 겉모습이 전부가 아니라는 걸 나는 안다.
삶은 반드시 아름답기만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본래 인생은 규격처럼 짜여져 있는 게 아니지 않는가. 세상사 학습한 대로의 사실이 아니라고 당황하지도 말자. 모든 삶이 틀에 맞추듯 교과서적이어야 한다면 지루하고 재미없는 놀이가 되고 말 것이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명쾌하게 외치는 그들의 목청이 들려온다.
노우 프라블럼!
사방팔방이 문제투성이로 보이는 데도 거침없이 쏟아 내던 그 수행자들의 한마디는 부족한 내 의식의 지평을 넓혀주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서로에게 조금씩 영향을 주고받는다. 지구상의 생명체 모두는 거대한 더불어 공동체가 맞다.
첫댓글 갑자기 수필이 쓰고 싶어지네요..~~
생생힌 인도 이야기네요
갠지스 강물이 아직 영을 불어 넣은 듯 생의 희비가 글로써 전달됩니다
문제없어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들에게 던지는 메시지 같습니다
최근 인구 수가 중국을 따라 잡았다지요, 그 많은 사람속에 유영할려면 모던것이, 왠만하면 문제가 될수 없을듯 합니다, 인구 증가 율이 0.으로 시작되는 대한민국이 문제 입니다. 문제 없어 잘 읽었습니다.
인도 힌두교의 성지, 숭배의 강, 어떤 이에게는 충격이기도 하면서 복합적인 감정에 휩싸였다는 말을 들었지요.
티브이로 갠지스강을 보고 여행객들의 말을 듣고, 홍경화 선생님의 수필을 읽으면서 제목<문제없어> 이 네 글자로 그들의 삶에 거부감 없이 잠시 머물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