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학자인 앨빈 토플러는 저서 『부의 미래』 중 <한반도의 시간과의 충돌> 장에서 “한반도보다 더 관심을 끄는 지역은 없다. 이곳만큼 미래에 대한 이미지가 다양하면서 예측 불가능한 곳은 없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그가 본 것은 대단히 단편적이다. 오직 열강에 둘러싸인 채 남북이 대치한 상황에서 핵 협상에 대한 시간과 시기를 언급한 것이다. 한국만큼 용융점이 낮고 또 자주 끓는 곳에 대한 지정학적인 깊은 사유는 없었다.
그에게 한국은 관심 밖의 나라였을 수도 있다. 하지만 미래를 다루는 학자라면 더 다양한 시각으로 한반도를 톺아 보아야 한다. 디지털 세상이 되면서 세계인이 관심을 가질 수 있는 뉴스 생산국치고 한국만 한 나라도 드물다.
한국은 매일 달라지고 하루 걸러 변한다. 0과 1이 지배하는 세상에 가장 알맞은 민족성과 감성을 지니고 있지 않은지 연구해 볼 필요를 느낀다. 변신하지 못하면 소멸되는 것이 지금의 현실이다.
프란츠 카프카의 소설 『변신』의 주인공 그레고르는 잠을 자고 있던 어느 날 아침 벌레로 변신한다. 아니 정확하게 이야기하자면 벌레로 변하여 졌다. 이유도 설명도 없다. 그저 벌레로 변하여 졌을 뿐이다. 그는 벌레로 변신한 자신을 알았고 가족들도 거대한 벌레를 그레고르로 알게 된다. 벌레로 변신한 그를 가족들은 버린다.
벌레가 된 그레고르는 자신의 지난 삶을 생각한다. 출장 외판원이라는 고달픈 직업, 그 일에서 오는 스트레스. 이미 벌레가 된 그레고르는 벌레의 언어로 절규한다.
“악마여, 제발 좀 이 모든 것들을 다 가져가다오.”
그레고르가 악마에게 소원한 것은 벌레가 된 자신이 아니다. 자신의 고통 어린 과거의 삶, 그리고 바로 그 자신이다. 소설 『변신』은 다양한 평론가들이 철학적, 종교적 관점에서 해석했지만 카프카가 매일 같이 변신을 강요당하는 현대인을 그레고르에 비유했다고도 설명할 수 있다.
현대인들은 그레고르가 겪는 변신의 과정을 겪고 있다. 매일 같이 일어나는 국내외의 사건사고,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전쟁, 이스라엘과 하마스 간 돌발적 휴전,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에 북한의 우러 전쟁 참전 등 자고 일어나면 수많은 정보가 우리를 놀라게 한다. 작금의 국내 정변이나 이런저런 사고는 말할 것도 없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끊임없이 변화를 강요당하고 있다. 그렇다면 차라리 앞장서서 변화를 꾀하고 스스로 그 변화를 즐기는 것이 현명할 것이다. 일전에 어느 노부부의 키오스크 좌절이 많은 사람들에게 논란을 불러왔다.
사건의 전말을 간단히 정리해 보면 이렇다.
노부부는 손주를 돌봐주기 위해 시골에서 올라와 서울 시내 아들집에 한동안 와있었다. 주말이긴 했지만 아들 내외는 불가피하게 출근을 해야 할 사정이 있었다. 마침 그날이 어머니 생일이라는 것을 안 아들이 출근하면서 아버지께 카드를 건네면서 맛있는 거라도 사드리라며 나갔다.
아파트 가까운 곳에 있는 식당으로 갔다. 닭고기 요리 전문집이었다. 소위 말하는 맛집인 탓에 한 시간 가까이 기다리다 겨우 자리를 잡았다. 문제는 음식 주문이었다.
종업원 누구도 관심이 없는 듯했다. 음식을 나르고 식탁을 치우기에 분주했다. 물어볼 종업원이 없으니 옆자리 눈치를 슬금슬금 보며 주문 장치를 만지작거렸다.
그때 옆 식탁의 젊은이가 “도와드릴까요?” 하고 말을 걸어왔다. 삼계탕 두 그릇을 주문하고 싶다고 했다. 젊은이의 친절이 눈물 나게 고마웠다. 더듬대는 남편을 보고 있던 아내는 불안한 얼굴로 그냥 집으로 가자는 기색이 역력했다.
키오스크 주문기를 들여다본 젊은이는 재빨리 주방 쪽으로 갔다. 주방 관리자인 듯한 사람과 한참 이야기를 하던 그가 돌아오더니 난감한 표정으로 말을 했다. “어르신 이미 닭볶음탕 큰 것이 주문되었답니다. 벌써 요리를 시작했기 때문에 취소가 안 된다는군요. 그냥 포장해서 달라고 할까요? 아니면 삼계탕을 추가로 시켜서 여기서 드시고 볶음탕은 포장하시는 걸로 하시면 어떨지.....”
이 사건에서 누구의 잘잘못을 탓할 수는 없다. 모두 그럴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인건비를 줄이기 위한 키오스크 시스템 도입은 대세다. 디지털 세상으로의 변화에 준비하지 못한 아날로그 세대가 문제다. 하지만 십진법이 뼛속 깊이 박혀있는 세대가 이진법을 배우고 적응하기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요즘 아이들이 옛 놀이문화를 능숙하게 즐기려면 엄청난 노력과 숙달이 필요하다. 게다가 나이가 들면 새로운 배움은커녕 가지고 있던 지식을 잊지 않기조차 어렵다.
진보하는 세상은 그래도 끊임없이 달라질 것을 요구한다. 어쩌면 앞으로의 인생 성공 실패는 변화, 변신의 기차를 올라타느냐 그렇지 못하느냐로 판가름 될지도 모른다. 안타깝지만 세상이라는 열차는 변화에 둔감한 나를 남겨두고 떠나버릴 수도 있다.
얼마 전에 세상을 떠난 미래학자 앨빈 토플러(Alvin Toffler)가 제1의 물결(농경시대), 제2의 물결(산업화 시대), 제3의 물결(지식 정보 시대)을 정의한 이후 제4의 물결을 예견하는 시도는 오랫동안 계속되어 왔다.
이 모든 논쟁의 핵심에는 바이오테크(Biotech)가 있다. 그가 정의한 제3의 물결을 이끈 학문분야는 화학과 물리학, 이것을 토대로 한 응용학문인 전자공학이었다. 그러나 21세기를 이끌 학문 분야는 생물학과 소재 과학이다.
인간은 수렵채취 시대에서 농경시대로 넘어오면서 먹을 것을 정복하기 시작했고, 농경시대에서 산업시대로 전환되면서 공간을 정복하기 시작했다. 이후 정보 시대에는 시간을 정복했으며, 앞으로 바이오 시대에는 생명공학과 우주공학이 중심이 되어 물질을 정복하기 시작할 것이다.
결국 인간은 끝없는 진화와 변화를 이끌어 왔으며, 이 변화는 번성도 몰락도 동시에 가져온다. 다시 말하자면 변화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개인이나 국가는 번성하지만, 이를 부정하거나 소극적으로 수용하는 이들은 어쩔 수 없이 도태되는 것이 자연의 섭리이자 진리다.
불행하게도 사람이 살아온 환경은 그 사람의 변화를 수용하는 능력을 제공하는 데 상당한 영향을 미친다. 사람마다 다르긴 하지만 대체적으로 도시인보다 시골 사람이 변화를 수용하는 데 좀 더 힘들어한다.
우리는 매일매일 변화할 것인지 그냥 정체해 머물러 있을 것인지 선택을 강요당한다. 변화지 못하면 어느 사이에 우리는 카프카의 벌레가 되고 만다. 그러나 어쩌면 이미 우리는 변화가 귀찮고 두려운 나이가 되었다. 고요와 침묵 속에서 헤쳐 나온 시간들을 반추하며 우아한 저녁 밥상을 차리는 것이 제격일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인간은 삶의 끈을 놓는 그 순간까지 변화하는 지구, 살아 움직이는 우주의 한 부분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우리도 바이오 테크가 세상을 지배하려는 시대에 어떻게 변화해 가야 할 것인지 깊은 고민이 필요하다. 하루라도 인간답게 살려면.
첫댓글 네네 저도 끝없이 변하려 노력하고 있으나 이제는 숫자만큼 빠릿빠릿하지 못하네요..ㅋㅋ 감사합니다.
시인은 깨어있는 자며 변하는 자고 완결하는 자라고 하더군요
시인님은 거기다 깨우는 능력도 있으시잖아요
댓글도 달아주시고~~
감사합니다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