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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베드로전서 1강
말씀/ 베드로전서 1:1-25
요절/ 베드로전서 1:3절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우리 주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소망이 있게 하시며”
25년 새해 베드로전서를 나가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UBF 전체 모임에서 베드로전서 말씀으로 새해 방향을 잡았을 때, 누군가에게 이리 말했던 기억이 납니다. ‘베드로전서를 나가면 고난이 많은데..., 말씀과 하나님의 손길이 함께 가니까, 전체 흐름대로 따라갈지 고민되네’, 크든지 작든지 정도의 크기를 떠나, 고난은 고통스럽기에 고민스러웠습니다. 다만 고난을 통해서도 좋은 것을 주시는 하나님을 믿기에, 베드로전서 말씀을 따라갑니다.
베드로전서의 발신자는 당연히 사도 베드로입니다. 수신자는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져 있는 성도들이었습니다.(1) 지도를 보면 이렇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성도들에게’라는 표현보다 ‘나그네에게’라는 표현을 씁니다. ‘나그네’를 여행객으로 이해하는 분들이 있는데 - 나그네라는 우리말은 그렇게 오해할 소지가 있습니다 - ‘정착하지 못하고 이곳저곳 떠돌아다니는 사람’을 말합니다. 영어성경은 ‘strangers’(이방인), ‘aliens’(외계인), ‘exiles’(망명자,추방자) 등으로 번역했습니다. 우리 성경보다 영어성경 표현이 조금 더 본래 의미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아시아 성도들이 겪었을 어려움을 잘 표현해줍니다. 같이 어울리지 못하고 이방인 취급, 외계인 취급을 당하는 것은 정말 힘든 것입니다.
비난받고 모욕당하는 것은 커다란 고통입니다. 주먹으로 린치를 당하건, 말로 언어폭력을 당하건, 미움 받는 것 자체는 끔찍합니다. 며칠 전 아저씨라는 영화에서 아역배우로 인기를 끌었던 젊은 여배우가 자살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한참 뜰만한 시기에 음주운전사고로 비난을 한 몸에 받으며 연예 활동을 접게 된 것이 결정적인 이유가 아니었을까 추정합니다. 누구든지 주변으로부터 비난과 조롱을 받게 된다면, 그런 위기에 빠져들 수 있습니다. 마음이 망가져 심각한 병을 앓기도 하고 살아갈 의욕마저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그런 아픔을 가진 사람이라면, 1세기 성도들의 아픔이 얼마나 컸을 지를 조금은 실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사도 베드로는 어둡게 보지 않고 은혜와 평안을 선포합니다. 2절을 보십시오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이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피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 긴 문장을 한마디로 압축하면 ‘피뿌림을 위해 택함받은 자들이여! 평안할지어다’입니다. 인간적인 측면에서 보면 나그네처럼 고난받고 있지만, 영적으로는 하나님께 쓰임받는 거룩한 사람으로 택함받은 것입니다. 레위기를 보면 제사장은 피뿌림을 통해 직분을 시작했습니다. 그와 같이 성도들의 고난은 하나님을 섬기는 거룩한 백성으로 택함받았다는 표시입니다. 택함받은 자이기에 고난을 받는 것입니다. 악한 세상에서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려고 할수록 당연히 고난받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고난이 없으면 사생자라고까지 말씀했습니다. 고난은 아픔과 상처만 남기는 것이 아닙니다. 고난은 정금같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빚어지는 연단이 됩니다. 고난은 불순물을 빼고 복음 자체를 붙들게 합니다. 거짓 소망, 죽은 소망을 빼내고 산 소망을 붙들게 됩니다.
3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우리 주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소망이 있게 하시며” 소망 없이 사는 사람은 없습니다. 만약 소망 없이 사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지옥에 가까운 세계에서 살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단테는 ‘신곡’에서 ‘지옥은 희망이 없는 곳’라고 말했습니다. 소망이 있는 사람은 아무리 힘든 상황을 만나도 견딜 수 있습니다. 직장을 들어갈 소망이 있을 때 엉덩이에서 땀이 나도록 공부합니다. 집을 가질 수 있다는 소망이 있기에 직장생활의 구차함을 견딥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소망은 소망인데, 어떤 소망이냐’입니다. 어떤 소망은 잠깐의 만족으로 끝나는 썩은 소망입니다. 요즘 좋은 화장품과 피부 관리를 하는 청년들이 점점 늘고 있습니다. 저도 지난주 사마귀 제거시술을 받았습니다. 우리 청년들이 할 수 있는대로 좋은 피부와 매력적인 외모를 유지하면 좋겠습니다. 다만 아무리 관리하고 노력해도 언젠가는 얼굴의 피부는 쭈글쭈글해지고 등은 구부러지고 손과 발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 날이 오고야 말 것입니다. 어떤 소망은 거짓과 불법을 동원하게 만드는 더러운 소망이 되기도 합니다. 그렇게 똑똑한 대통령이 계엄이라는 자충수를 두게 된 이유입니다. 나의 어머니는 가문의 영광을 소망하며 첫째와 셋째 아들을 국민학교도 졸업하지 않은 어린 나이에 도시로 유학 보냈습니다. 그때는 시골마을의 부러움을 모았는데, 지금은 자식들과 함께 하는 행복을 놓쳐버린 어리석은 결정이었다며 후회합니다. 그때는 반짝였는데, 지금은 빛바랜 쇠하는 소망입니다. 만약 그때 아들들을 유학 보내지 않았다면 후회하지 않았을까요? 보내지 않았더라도 후회했을 것입니다. 세상의 소망이 그러합니다. 솔로몬은 최고의 지식, 최고의 쾌락, 최고의 왕국을 세우기를 소망하며 힘을 다해 달리고나서 탄식했습니다.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나폴레옹이 산 정상을 올라서 ‘이 산이 아닌게비여!’라고 말했던 개그처럼, 사람들은 썩은 소망, 더러운 소망, 쇠하는 소망을 따라 살다가 실망하고 낙심하고 허무에 빠집니다.
사도 베드로가 산소망이 있게 하심을 찬송했던 이유입니다. 4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산 소망이란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않는 유업을 잇는 것입니다. 그것은 한마디로 예수님과 예수님의 나라를 얻는 것입니다. 죄사함을 얻고 부르심과 사명의 축복을 얻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고 성령의 열매를 맺습니다. 세상나라는 누군가를 짓밟고 올라서며 발전합니다. 트럼프 2.0 시대는 어느 때보다도 이를 실감나게 보여줄 것으로 예상됩니다. 예를 들면 미국과 러시아가 휴전협상을 벌이는데, 우크라이나는 빠져 있습니다. 우크라이나 사람들은 피눈물 나오게 하는 이야기이지만, 미국 사람들과 러시아 사람들은 환호성을 지릅니다. 나라도 그러하고 기업도 그러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나라는 당신의 피뿌림으로 세워졌습니다. 희생과 사랑, 용기와 진리위에 세워졌으며 성령의 열매를 맺고 영원한 생명으로 연결됩니다. 그 나라는 어떤 시련과 어려움을 만나도 쇠하지 않습니다. 1세기 성도들은 제국의 박해로 말미암아 때마다 생존의 위협을 느꼈을 것입니다. 언제 교회문을 닫아도 이상하지 않는 현실이었습니다. 믿는 자들은 교회의 미래를 두고 걱정와 염려하는 마음을 안고 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소멸하지 아니하고 줄기차게 자라고 성장했습니다. 예루살렘으로 끝나지 아니하고 유대와 사마리아와 유럽과 땅 끝까지 퍼져나갑니다. 결국 무너진 것은 교회가 아니라 로마제국이었습니다. 주님의 나라는 끊임없이 자라고 성장하여 우리에게까지 이르렀으며 중국과 이슬람과 북한을 향해 나아갈 것이며, 결국에는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연결될 것입니다. 죽음으로 소멸되지 아니하고 영원한 생명, 하늘의 영광으로 연결됩니다.
5절을 보십시오. 우리 믿는 자들은 구원을 얻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받는 자들입니다. 나 혼자만의 힘으로 세상을 살아가야한다면 정말 두렵고 불안한 일입니다. 우리 자신만의 힘으로는 믿음을 가질 수도 없고 지킬 수도 없습니다. 신앙의 여정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시련만 있는 것이 아니라 보호의 손길도 있습니다. 어느 날에는 풍성한 말씀의 은혜로, 어느 날에는 기도의 응답으로 도와주십니다. 어느 날에는 뼈아픈 상처를 통해 마음을 깨고 낮추어 연단하십니다. 온탕과 냉탕을 오가는 것이 최고의 건강요법이 되는 것처럼, 하나님은 구원하기로 예비하신 자들을 때마다 적당한 코스로 이끌어 가십니다. 그러므로 지금의 상황이 아무리 힘들지라도 너무 낙심하거나 절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6절을 보십시오. 지금 초대교회 성도들은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고 있습니다. ‘잠깐’이 어느 정도일까요? 정말 어려운 시간이 닥치면, 하루가 ‘잠깐’이 아니라 ‘천년처럼, 영원처럼’ 느껴집니다. 6절의 ‘잠깐’은 아무리 힘들고 길지라도 ‘잠깐’으로 여기라는 말씀일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7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될 것이니라” 믿는 자가 당하는 고난은 금보다도 더 귀한 것을 제련하는 연단입니다. 금광석이 뜨거운 용광로에서 연단을 받으면 불순물이 녹아나가고 금을 뽑아냅니다. 철광석을 연단하면 단단한 철이 나옵니다. 그와 같이 믿는 자가 당하는 시련은 금보다 더 귀한 칭찬과 영광과 존귀한 것을 얻게 하는 통로가 됩니다. 최근 몇 년동안의 목자생활은 어느 시기보다 고난스럽게 보였습니다. 그런데 돌이켜보면 어느 시기보다 말씀에 대해 눈을 뜨고 자기 발견과 내적 성장에 눈을 뜨게 된 시간이 되었습니다. 비록 겉사람은 많이 썩었지만 속사람은 이전과 다르게 깊이가 생겼습니다. 저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경민목자는 1년여의 휴직과 복직을 통해 온탕과 냉탕을 오가는 연단을 받고 있습니다. 많이 힘들겠지만 많이 달라졌습니다. 우리는 힘든 사건을 만날 때, 마냥 슬퍼하고 어둔 생각만 할 것이 아닙니다. 암환자중에는 암은 축복의 통로였다고 고백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건강의 위기를 통해 자신을 돌아보고 이전과 다른 인간관계, 이전과 다른 생활습관을 얻는다고 합니다. 물론 여전히 달라지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그냥 불행이고 저주일 것입니다. 몸과 마음을 바꾸는 계기로 삼은 사람들에게 암은 축복의 통로가 됩니다. 그와같이 고난을 마냥 힘들게만 생각하고 피하려고만 할 것이 아닙니다. 연단 받고자 기도해야 합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사랑하는 자들이며,(8) 온전한 영혼의 구원으로 연결될 것입니다.(9) 무늬만 신자가 아닌 마음 깊은 곳까지 하늘 백성으로 빚어지는 구원을 이룹니다.
이 구원에 대해서는 구약의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 예언했습니다.(10) 그들은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죽음의 고난과 후에 받으실 부활의 영광까지 미리 증언했습니다.(11) 12절을 보십시오. 구약의 선지자들이 미리 기록한 것은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요 신약의 백성들을 위해 예비한 것입니다. 십자가와 부활의 비밀은 인간의 이성으로 도저히 이해할 수도 없고 믿을 수도 없습니다. 오직 하늘로부터 보내신 성령을 힘입어 복음을 들어야 믿고 영접할 수 있습니다. 복음을 듣고 믿게 되었다는 그 자체가 특별한 은혜의 손길입니다. 천사들도 알기를 원했던 세계입니다. 그러므로 박해로 인해 너무 쪼그라들 것이 아닙니다. 너무 슬퍼하거나 손해의식에 시달릴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라는 자부심을 갖고 믿음 편에 서서 생각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13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다 주실 은혜를 온전히 바랄지어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출애굽 당시, 하나님은 그들에게 허리띠를 동이라고 명령했습니다. 애굽에 미련두지 말고 길이 열릴 때 신속히 출발할 수 있도록 마음준비하라는 말씀입니다. 언제든지 순종하겠다는 각오와 결단이 없으면 애굽에 발목 잡힐 수 있음을 경고하신 것입니다. 그와 같이 신약의 백성들도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해야 합니다. 이생의 자랑과 세상의 염려에 발목 잡히지 않도록 늘 마음의 각오를 새롭게 해야 합니다. 채영삼 교수는 ‘구원은 이동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애굽의 노예에서 애굽의 귀족으로’, 신분 이동이 아니라 ‘노예 백성의 멘탈’에서 ‘하늘 백성의 멘탈’로 ‘멘탈 이동’하는 것입니다. 구원은 끝이 아니라 시작입니다. 죄의 종되었던 때의 언행을 버리고 하늘 백성의 말과 행동을 하고자 매순간 노력해야 합니다. 그리할 때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에 칭찬과 영광을 받는 은혜를 누릴 것입니다.
14절을 보십시오. 스스로를 순종하는 자녀로 생각해야 합니다. 전에 뭘 모르고 좇았던 욕망을 따라 살지 말아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힘든 일을 만나면 애굽을 그리워했던 것처럼, 우리 또한 힘든 시간을 만나면 복음을 모르고 살았던 그때 그 시절을 그리워할 수 있습니다. 술에 익숙했던 사람은 ‘양도 도망가고 기분도 꿀꿀한데, 술 한잔 할까?’ 그때 그 방식으로 스트레스와 염려를 풀려는 욕망을 버려야 합니다. 이전의 망령된 행실은 지나간 때로 족합니다. 15절을 읽겠습니다.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언어 사용이나 감정표현도 거룩해야 하고 취미 활동도 거룩해야 합니다. 거룩한 것은 종교적 예식을 말하지 않습니다.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생각하는 것입니다.(고전10:31) 서로 사랑하기에 힘쓰는 것입니다. 자녀는 부모를 닮아야 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 거룩하신 주님을 따라 우리도 거룩해야 합니다.(16) 하나님은 외모로 사람을 평가하지 않습니다.(17)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자들은 이 땅에서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피의 은혜를 아는 자라면 그리해야 합니다. 18,19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이 물려 준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은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 우리가 헛된 행실에서 구원받은 것은 좋은 스펙을 가졌기 때문이 아닙니다. 아무리 좋은 스펙을 가진 사람도 하나님 보시기에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우리의 구원은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입니다. 나의 교만과 정욕과 시기심과 시기심과 비교의식과 냉랭함의 죄를 씻고자 흠 없고 점 없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셨습니다. 주홍같이 붉은 죄를 씻어 주시고 눈 같이 희게 했습니다. 그는 창세전부터 예고된 분,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이십니다.(20)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원수였던 우리가 부활의 주, 영광의 하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21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부활의 하나님, 영광의 하나님을 믿게 된 자들은 믿음과 소망을 오로지 하나님께 두어야 합니다.(21) 믿음과 소망을 하나님께 둔다는 것은 하나님 한분으로 만족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저런 문제가 현실에서 쌓여갈지라도 하나님을 믿는 믿음 위에 서게 된 것으로 자족하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가끔씩 내가 목자로 살지 않고 오로지 돈을 목적 삼아 달렸다면 지금쯤 어떤 모습일까를 상상해봅니다. 돈을 많이 벌었을까? 아니면 돈에 올인했는데도 그저 그렇게 벌어먹고 살고 있을까? 인생은 노력대로 되는 것은 아니니, 알 수 없을 것입니다. 다시 돌이켜보면 예수님 믿고 목자로 살게 되어서 다행입니다. 가장 큰 이유는 예수님 믿고 목자로 살면서 많이 사람이 되어가는 것 같습니다. 내가 누구인줄 알고 사람 귀한 줄 알고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줄 점점 알게 되었으니 말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놀라운 사랑을 받은 자임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22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서로 사랑하라” ‘그러므로 서로 사랑하라’, 단순하게 명령하면 될 것을, 앞에 수식어를 잔뜩 붙였습니다. 수식어의 포인트는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입니다. 요약하면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 서로 사랑하라’입니다. ‘먹고 살기도 힘든데요 내 중심 지키기도 버거운데요. 서로 사랑하라구요?’, 그런 생각은 던져버려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들은 가장 놀라운 사랑의 세계에 들어온 자들입니다. 형제를 사랑할 수 있는 수준에 세계에 들어온 사람이라는 자기 인식, 자부심을 가져야 합니다.
23절을 보십시오. 우리의 믿음은 어쩌다보니 생겨난 것이 아닙니다. 부모님 따라 교회문턱을 나오다보니, 친구 따라 나오다보니 믿게 된 것이 아닙니다. 썩지 아니할 씨, 살아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에게 믿음을 주신 하나님의 섭리와 인도하심 또한 살아있고 항상 있습니다. 24,25절을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 이 말씀은 이사야서 40장 6-8절로서 바벨론 포로로 끌려간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로하기 위해 주어졌습니다. 바벨론 도성의 웅장한 모습은 회복을 담은 하나님의 말씀을 비현실적이고 황당한 약속처럼 보이게 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바벨론의 웅장한 모습은 풀의 꽃과 같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풀은 왕성할지라도 뜨거운 바람이 한번 불어오면 시들고 맙니다. 그와 같이 바벨론의 영광은 잠시였습니다. 풀의 꽃은 이 땅의 자랑, 이 땅의 파워를 상징합니다. 베드로 당시에는 로마제국입니다. 오늘날에는 미국의 파워, 중국의 파워 혹은 세상이 자랑하는 모든 것에 적용할 수 있습니다.
세상의 웅장함에 짓눌려 하나님의 약속을 놓치는 우를 조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믿음으로 사는 것이야말로 가장 확실한 길, 가장 위대한 승리의 길이라는 것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최근의 정치적 상황으로 말미암아 한국사회에서 기독교 이미지가 더욱 악화되고 있습니다. 기독교 이미지가 좋아지면 좋겠지만, 안 좋아지더라도 낙심하거나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두려울수록 사탄 마귀의 노림수에 말려들게 됩니다. 흩어진 나그네처럼 불안정하게 살아갈지라도, 우리는 택함받은 자들, 산소망을 가진 자들입니다. 세상 모든 것은 풀의 꽃처럼 시들고 떨어지겠지만, 예수님을 아는 것 그리고 예수님의 나라는 썩지 아니하고 더럽지 아니하고 쇠하지 아니합니다. 세상이 아무리 불안정을 향해 달려갈지라도 우리에게 주어진 구원과 영생과 하나님의 나라와 성령의 열매는 우리를 때마다 살아있게 하고 빛나게 할 것입니다. 우리 각 사람에게 믿음 주시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