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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언약과 새 언약의 논리적 비교 3. 하나님의 계명
(마 5:27-32) 또 간음치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만일 네 오른눈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 또 일렀으되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거든 이혼 증서를 줄 것이라 하였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연고 없이 아내를 버리면 이는 저로 간음하게 함이요 또 누구든지 버린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
오늘 전해드릴 말씀은 옛 언약과 새 언약의 논리적 비교 세 번째 하나님의 계명입니다.
우리가 계속해서 옛 언약과 새 언약의 논리를 비교해나가고 있는데 오늘은 하나님께서 옛 언약을 주신 후 새 언약을 주실 때 계명의 측면에서 하나님의 백성에게 명령하시는 내용이 어떻게 변화했는가를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계약서가 바뀌었다는 것은 갑이신 하나님이 을인 우리들에게 요구하는 것 또한 바뀌었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바뀌었느냐 하는 것이지요. 바뀐 내용은 무엇이고 바뀌었다면 왜 바뀐 것이며 바뀌었을 때는 과연 무엇을 원하시는 것인가를 우리가 성경에서 자세히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부분을 성경에서 치밀하게 파악하지 않으면 옛 계약서상의 하나님의 명령과 새 계약서상의 하나님의 명령을 구분하지 못하는 심각한 오류가 일어나게 되고, 그렇게 되면 열심히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산다고 하면서도 실제 사는 모습은 유대교인처럼 되기도 하고 구약백성인지 신약백성인지 구분이 안 되는 혼란이 현실에서 마구 벌어집니다.
특히 서구신학의 기독교 윤리학이 그런 오류를 심각하게 범하고 있습니다. 기독교 윤리학의 상당히 많은 부분은 구약의 하나님의 명령이 들어와 있는 셈입니다. 그것을 명확하게 구분하지 못하면 옛 계약을 폐하시고 새 계약을 주신 하나님께서 아주 입장이 난처해지십니다. 오래 참으신다고 약속하신 바가 있으니까 화는 안 내시겠지만 어떤 문제가 생기냐 하면, 그냥 내버려 두십니다. “그래, 알았다. 너희들 마음대로 살아라.” 내버려 두시는 거지요. 그런 일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래서 옛 언약과 새 언약의 계명이 어떻게 변했는가? 왜 변했는가? 변한 목적이 무엇인가? 하나님이 과연 무엇을 원하시는 건가? 등을 치밀하게 비교해서 보게 되면 우리가 새 언약의 특징을 더 깊이 알 수가 있게 됩니다. 오늘 봉독해 드린 본문으로부터 출발해서 신구약의 계명의 차이점을 보아나가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은 두 가지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간음이라는 문제로 해서 이 두 내용이 연결되어 있긴 하지만 내용은 조금 다르지요. 첫 번째 부분이 27절부터 30절까지입니다. 모든 기독교인들이 잘 알고 있는 내용이지요.
구약에서는, 즉 옛 언약에서는 너희가 간음치 말라는 명령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았는데 율법을 완전케 하러 온 내가 그 진정한 의미를 설명해 주마. 그 계명의 진정한 의미는 간음이라는 행동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고 아예 음욕이 생기면 안 되는 것이다.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따라서 옛 언약에서는 간음이라는 행동을 하지 말라는 계명을 주셨는데 새 언약에서는 음욕 자체를 품지 말라는 계명을 주신 것입니다.
따라서 이 두 계명만 놓고 보더라도 구약의 계명이 더 잔인한가, 신약의 계명이 더 잔인한가? 신약의 계명이 훨씬 잔인합니다. 그것을 우리가 정확하게 인식할 수 있어야 합니다. 구약은 정의의 하나님 공의의 하나님이시니 무서운 하나님이고, 신약의 하나님은 좋으신 사랑의 하나님이라는 등 이렇게들 이야기하지만 그건 성경을 잘 몰라서 하는 말입니다. 모세 율법보다 예수님의 계명이 훨씬 잔인해요.
제가 전도사가 되고 얼마 안 지나서 공포 때문에 4복음서를 4개월여 동안 읽지 못 했다는 말씀을 여러 번 드렸는데 실제로 예수님의 말씀 하나하나가 우리에게 공포를 일으킵니다. 그것이 우리 눈에 보여야 옛 언약에서의 하나님의 요구와 새 언약에서 하나님의 요구가 어떻게 달라졌는지가 명확하게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서구 신학에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구약의 잔인한 하나님에서 신약의 사랑의 하나님으로 바뀌어서 이제는 오직 믿음으로 우리가 구원을 받고 예수님의 보혈의 피를 뒤집어써서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있게 되고 등등 이렇게 접근하면 예수님이 모세의 율법보다 더 잔인한 말씀을 하신 그 중요한 핵심을 우리가 놓치게 됩니다. 심지어 차라리 눈을 빼버리라, 손발을 잘라버려라 말씀하시지요.
간음은 안 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평생 간음을 안 하는 사람들이 훨씬 많습니다. 심지어 세상 사람들도 간음을 안 하는 사람이 훨씬 많아요. 간음을 하지 말라는 계명은 세상 사람들도 지킬 수 있는 거지요. 그런데 음욕이 생기면 그게 바로 간음행위와 같다고 말씀하시면 전 인류가 완전히 수렁에 빠지게 됩니다. 여기서 빠져 나갈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따라서 구약의 하나님의 계명과 신약의 하나님의 계명은 엄청난 차이를 가지고 있습니다. 모세의 율법은 사람들이 지킬 수 있는 것으로 대개 보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계명은 절대 인간이 지킬 수 없는 계명들입니다. 모든 계명이 다 그렇습니다. 절대 지킬 수 없어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지금 여기서 밝히시는 부분은 모세의 율법도 사실은 그런 의미였다는 것입니다. 간음이라는 행위를 하지 말라고 모세의 율법에 표현을 하셨지만 실제 하나님의 의도는 간음하고자 하는 마음조차 생기지 않는 것을 요구하신 것이었다고 밝히시는 겁니다. 마태복음 5장 17절을 봉독합니다.
(마 5:17)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
예수님이 오셔서 간음 행위를 하지 말라는 율법을 폐하고 음욕도 생기면 안 된다는 새 계명을, 전혀 다른 계명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간음하지 말라는 행위를 요구하시는 모세의 율법에 들어 있는 진정한 하나님의 뜻을 예수님이 밝히시겠다는 겁니다. 음욕조차 생기면 안 된다는 거지요.
여기서 모세 율법과 예수님의 계명의 차이를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모세의 율법은 인간의 행위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이걸 해라, 하지 말라. 이렇게 인간의 행위에 초점을 맞추고 있고 예수님이 주시는 새 언약의 계명은 마음속의 모티브를 지적하시는 겁니다. 겉으로 나타나는 행동이 율법적이냐 아니냐를 따지기 이전에 마음속에 율법적인 마음이 있느냐 없느냐를 따지시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완전히 차원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모세의 율법은 사람들이 지킬 수 있는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었지만 새 언약의 계명은 지킬 가능성이 0%입니다. 그것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앞에서 기독교 윤리학에도 구약적인 계명들이 들어와서 문제가 심각하다고 말씀을 드렸는데 예수님의 새 언약의 계명을 두고 기독교 윤리학이라는 분야가 생길 수가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계명들은 윤리 항목들이 아니고 아예 인간이 아닌 존재가 되라는 요구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기독교 윤리학을 만들었다는 것 자체가 성경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사랑하라”는 계명을 두고도 “그러니 우리가 서로 사랑해야 하지 않겠습니까?”라고 말하는 것은 성경의 내용이 무엇인지를 모른다는 이야기입니다. 새 언약에서 말씀하시는 사랑은 예수님처럼 사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사랑하는 것은 인간이 할 수 없는 것이지요. 따라서 “사랑합시다”라는 말을 하는 순간 그 사람은 구약 백성인 겁니다. 신약 백성은 “사랑합시다”라는 주장을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마나한 불가능한 주장이고 오늘 대표기도에서 연동흠 형제님이 그 점을 하나님 앞에 집중적으로 기도드리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오늘 이 예배에 함께 하시는 것을 제가 새삼 절감하게 되는데, 인간은 안 되는 일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라고 하시는 것인가? 도대체 왜 인간에게 완전히 불가능한 일을 계명으로 주셨는가? 어쩌자고 이러시는 건가? 그것이 바로 성경에 계시된 구원의 약속입니다. 새 언약의 계명은 명령이자 동시에 약속입니다. 불가능한 계명들을 준행할 수 있는 신비한 존재로 만들어 주신다는 약속인 것이지요.
따라서 신약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의인은 예수를 믿는 자가 아니고 인간에게는 완전히 불가능한 계명을 실제로 준행할 수 있는 신비한 존재로 바뀐 자입니다. 오늘 본문에 적용해서 말씀드리면 실제로 마음에서 음욕이 안 생기는 사람이 신약에서 말씀하시는 의인인 것이지요.
성경은 예수를 구세주로 믿으면 의롭다고 말씀하시지 않고 “의롭다고 여기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의롭지 못하지만 의롭다고 간주하신다는 것이지요. 그 표현이 “로기조마이 디카이오쉬넨”입니다. 의롭다고 쳐주시는 것이고 그 다음으로 정작 성경의 본론은 실제 의롭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구원의 약속의 핵심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의롭다고 여기시는 것은 준비 단계고 실제로 의롭게 만드시는 것이 본론인 것이지요.
그래서 마음속에 음욕이 일어나지 않는 사람으로 만들어주신다는 약속이고, 따라서 명령은 그런 사람으로 만들어 주십사고 회개하면서 간구하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음욕을 품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쳐봤자 그것은 절대로 안 되는 일이니 우리에게 주시는 명령은 그런 신비한 존재로 만들어 줄 테니 회개하고 간구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런 신비한 존재로 만들어 주겠다, 그런 의인으로 만들어 주겠다, 새로운 피조물로 만들어 주겠다, 신의 성품을 가진 자로 만들어 주겠다. 그것이 신약의 구원의 약속의 핵심입니다.
따라서 새 언약에서 예수님은 인간에겐 완전히 불가능한 계명들을 주시고 소원하고 회개하고 간구하면 그 계명들을 준행할 수 있는 존재로 만들어 주겠다고 약속하시는 것입니다. 즉 신약의 계명들은 명령이자 동시에 약속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러나 구약은 명령입니다. “지켜라! 안 지키면 저주를, 지키면 복을!” 하시면서 인간이 지킬 수 있는 형태의 계명들을 주시면서 신상필벌을 제시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왜 모세 율법에서 인간이 지킬 수 있는 행위를 명령하시는 형태로 계명들을 제시하셨는가? 옛 언약에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신비한 존재로 만들어 주신다는 약속을 포함시키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육에 속한 자들을 대상으로 모세 율법을 주셨기 때문에 육에 속한 자들이 지킬 가능성이 있는 형태로 변형시켜서 주셨던 거지요.
그런데 신약 시대가 시작되면서 영에 속한 자들이 되는 길이 열렸기 때문에 이제는 예수님이 본론을 펼치시는 겁니다. 그래서 모세의 율법의 계명과 예수님의 계명의 내용이 달라지는 겁니다.
그렇다면 음욕을 품지 말라는 예수님의 계명이 불교의 승려나 가톨릭의 신부들처럼 아예 결혼도 하지 말고 살라는 것인가? 그게 아닙니다. 간음을 금하시는 계명의 본질은 “사랑”입니다. 간음이란 상대방을 완전히 쾌락의 수단으로 이용하는 것이고 배우자 이외의 사람을 향해 음욕을 품는다는 것은 그 사람을 쾌락의 수단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뿐만이 아닙니다. 그것 때문에 자기 배우자가 입게 될 상처와 고통에 대해서 전혀 무관심한 것입니다. 따라서 간음은 최악의 범죄입니다. 서로를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며 살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극악무도하게 거스르는 대표적인 범죄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두 번째 내용은 31절과 32절입니다.
(마 5:31-32) 또 일렀으되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거든 이혼 증서를 줄 것이라 하였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연고 없이 아내를 버리면 이는 저로 간음하게 함이요 또 누구든지 버린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
이와 관련된 모세의 율법은 신명기 24장 1절과 2절입니다.
(신 24:1-2) 사람이 아내를 취하여 데려온 후에 수치되는 일이 그에게 있음을 발견하고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거든 이혼 증서를 써서 그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어 보낼 것이요 그 여자는 그 집에서 나가서 다른 사람의 아내가 되려니와
따라서 유대교인들은 아내가 마음에 안 들면 이혼 증서를 줘서 내쫓습니다. 그것이 율법을 준수하는 것입니다. 율법이 그것을 허용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내를 내쫓고 새 아내를 구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늘 본문 32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지요.
(마 5:32) ...누구든지 음행한 연고 없이 아내를 버리면 이는 저로 간음하게 함이요 또 누구든지 버린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
이 말씀은 아내가 간음을 한 경우 외에는 이혼 증서를 써주고 아내를 내쫓으면 안 된다는 겁니다. 모세의 율법과는 다르지요. 이 차이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같은 마태복음 19장에서 예수님이 더 자세히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19장 3절부터 봉독하겠습니다.
(마 19:3-9)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나아와 그를 시험하여 가로되 사람이 아무 연고를 물론하고 그 아내를 내어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 (예수님을 시험하는 겁니다. 예수님이 하셨던 말씀이 있었던 거지요.)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사람을 지으신 이가 본래 저희를 남자와 여자로 만드시고 말씀하시기를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찌니라 하신 것을 읽지 못하였느냐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찌니라 하시니 (모세 율법에 어긋나는 말씀을 하시지요? 바리새인들의 시비에 걸린 것 같이 보입니다) 여짜오되 그러하면 어찌하여 모세는 이혼 증서를 주어서 내어버리라 명하였나이까 (예수님이 다음과 같은 폭탄선언을 하십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모세가 너희 마음의 완악함을 인하여 아내 내어버림을 허락하였거니와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
원래 하나님이 원하시는 건 그것이 아니었는데 모세가 바꾸었다는 겁니다. 왜? 완악하기 때문에! 원래의 하나님의 뜻을 그대로 계명으로 정하면 지킬 수 있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모세가 변개했다는 말씀입니다. 물론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이지요. 그러면 모세가 무엇을 염려했기에 이렇게 바꿨을까요? 그 점을 우리가 생각해봐야 합니다. 모세가 무엇을 걱정했던 걸까요?
아내가 음행한 연고 외에는 아내를 쫓아낼 수 없도록 원래의 하나님의 뜻대로 계명을 정하면 남자들이 아내를 아예 죽이는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리고는 새장가를 갑니다. 그건 필연적으로 그렇게 되어 있어요. 아내를 내쫓고 싶은데 아내가 바람을 안 피운단 말이지요. 그러면 무슨 꾀를 내겠습니까? 아예 아내를 죽여 버리는 꾀를 냅니다. 그런 짓들을 할 것이 뻔하기 때문에 그렇게 아내를 죽이느니 차라리 내보내는 게 낫다는 겁니다. 그래서 아내가 마음에 안 들면 죽이지 말고 그냥 이혼 증서 써줘서 내보내라는 겁니다.
이렇게 옛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계명을 하달하면 더 큰 부작용이 생기는 겁니다. 그 완악함을 알기 때문에 계명의 내용을 바꾼 것이지요. 더 큰 불상사가 나지 않도록. 그러고도 남을 인간들인데 하나님께서는 옛 언약에서는 그들을 개조시켜 주신다는 약속을 포함시키시지 않으셨으니 방법은 딱 하나지요. 불상사가 나지 않도록 하나님의 계명을 손보는 겁니다(모세가 자의적으로 손봤다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그것을 허락하신 것으로 보는 것이 합당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윤리 도덕의 형태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만든 윤리 도덕 체계이고 법체계의 형태인 것이지요. 육에 속한 옛 사람들은 그렇게 다스리는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계명을 들이대면 지킬 수 있는 사람이 하나도 없기 때문에 오히려 더 큰 불상사가 터지니까 육에 속한 자들이 지킬 수 있는 항목으로 적당히 변개시켜서 제시를 하신 것, 그것이 바로 모세 율법입니다.
따라서 기독교 윤리학은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이 전제된 것이고 그건 예수님이 완전케 하신, 예수님이 밝히신 새 계명들의 내용을 전혀 모르고 있다는 것의 반증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의 두 가지 주제가 연결되어 있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런 불완전하고 변개된 모세 율법을 무엇 때문에 주셨는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수님이 오실 때까지 1400년 동안 모세의 율법 아래에서 삽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오시고 새 언약을 주신단 말이지요. 그렇다면 그 1400년을 도대체 무엇 때문에 허락하셨는가? 신약 백성인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이유는 딱 하나입니다. 인간은 안 된다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한 샘플이었다는 겁니다. 인간은 불가능하다, 인간은 하나님의 뜻대로 살 수 없다는 것을 유대인들이 몸으로 보여주는 겁니다.
왜 그렇게 단언할 수 있냐 하면 애초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언약은 오히려 예수님이 말씀하신 새 언약과 일치하지, 모세의 언약과는 일치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부분에 대해 지금부터 보도록 하겠습니다. 두 가지 항목을 보게 될 텐데 우선 첫 번째 항목으로 창세기 18장 19절을 보겠습니다.
(창 18:19) 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 이는 나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대하여 말한 일을 이루려 함이니라
아브라함을 선택하신 것은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기 위해서라고 말씀합니다. 즉 쩨다카와 미쉬파트를 행하는 집단을 만들기 위해 아브라함을 선택하셨다는 말씀인데 이 쩨다카와 미쉬파트가 과연 뭐냐는 겁니다. 여기서는 의와 공도라고 번역됐지만 정의와 공의로도 번역이 되고 의와 판단으로도 번역되는 등 여러 가지로 번역이 되는데 이 쩨다카와 미쉬파트의 내용이 과연 뭐냐는 거지요.
모세 율법도 쩨다카와 미쉬파트에 대한 내용으로 되어 있고 신약의 새 계명도 디카이오쉬네와 크리시스에 대한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헬라어 디카이오쉬네는 히브리어 쩨다카의 번역이고 크리시스는 미쉬파트의 번역이지요. 디카이오쉬네는 주로 의로 번역이 되고 크리시스는 대개 심판이나 판단으로 번역됩니다.
신구약의 계명들은 모두 하나님이 원하시는 의로운 삶을 그 내용으로 하고 있는데 이 의로운 삶은 그 기준이 되는 의와 그 의에 근거한 정확한 판단을 근간으로 합니다. 따라서 쩨다카와 미쉬파트, 디카이오쉬네와 크리시스는 항상 짝을 이루게 되는 것이지요.
우리가 살펴 볼 두 번째 항목은 창세기 12장 1절에서 3절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창 12:1-3)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찌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
아브라함을 선택하신 두 번째 목적은 땅의 모든 족속을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자신들을 선민이라고 부릅니다. 천하 만민과 자신들은 다르다는 거지요. 모세 율법도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돈을 빌려주어도 이자를 받으면 안 되는데 이방인에게서는 받아도 된다. 이방인은 인간 취급을 하지 않습니다, 모세 율법 자체가 그렇습니다. 따라서 모세 율법에 근거한 유대교는 전도와 선교라는 게 없습니다. 지금도 없어요. 들어오겠다는 사람을 막지는 않지만 유대교는 전도와 선교를 사명으로 삼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셨지요.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이처럼 모세 율법은 두 가지 측면에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언약과 일치하지 않습니다. 첫째는 쩨다카와 미쉬파트가 뭐냐 하는 데에서 일치하지 않고 둘째는 그 대상이 이스라엘로 한정되어 있다는 데에서 일치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시고 새 언약의 시대가 열리면서 그 두 가지가 모두 바뀌게 됩니다. 첫째로는 모세 율법에서 쩨다카와 미쉬파트는 정의로운 심판에 초점이 맞추어지고 신상필벌 체계의 근간이었으나 새 언약에서는 사도 바울이 말씀한 것처럼 율법의 완성은 사랑이라고 규정됩니다. 디카이오쉬네는 사랑이고 크리시스는 사랑을 위한 판단이라는 것이지요. 그리고 둘째로는 언약의 대상이 아브라함의 육적 후손에서 아브라함의 신앙적 후손으로 확대됩니다. 즉 모든 인류에게 확대됩니다. 언약의 내용이 상세하게 밝혀지고 언약의 대상이 달라지는 것이지요.
모세의 율법은 이스라엘 혈육 공동체를 기준으로 정의의 칼날을 휘두르는 것이었으나 예수님께서 율법을 완전케 하셔서 아브라함에게 원래 주셨던 그 계명의 의미를 밝히시자 특수한 사랑을 행하는 삶의 기회가 이 세상 모든 사람에게 주어지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언약이 이루어지는 것은 그 새 계명들을 지키는 것에 동의하고 회개를 시작한 사람들에 한정되지요. 하나님이 예정하신 사람들이기도 합니다.
이 새 언약은 예수님이 오시면서 갑자기 진행된 것은 아닙니다. 구약의 후기 선지서들에 이미 예언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 예언들 몇 곳에서 그 변화의 내용을 더 자세히 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예레미야 31장 31절입니다.
(렘 31:31)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세우리라
모세의 율법과는 다른 계약서를 주신다는 예언입니다. 그리고 33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렘 31:33)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에 세울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법을 아예 마음속에 넣어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모세의 율법은 마음속에 넣어주신 것이 아니고 눈앞에 펼쳐놓으신 것이었지요. 눈앞에 펼쳐놓으시고 “이대로 지켜라. 지키면 복을 주고 못 지키면 저주를 내린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새 언약은 그 법을, 즉 그 계명들을 마음속에 넣어버리신다는 겁니다. 마음속에 넣어버리시면 어떤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내가 원하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으로 바뀌게 됩니다. 율법을 준행하기를 기뻐하는 사람으로 바뀌게 되는 겁니다. 그걸 또 다른 측면에서 어떻게 설명하시는지 에스겔 36장 24절부터 27절까지에서 보겠습니다.
(겔 36:24-27) 내가 너희를 열국 중에서 취하여 내고 열국 중에서 모아 데리고 고토에 들어가서 맑은 물로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케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을 섬김에서 너희를 정결케 할 것이며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찌라
에스겔 선지자를 통해서는 내 신을 너희 속에 둔다, 즉 성령의 강림과 충만이라는 측면에서 예언하십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기를 소원하는 존재로 바뀌는 것, 계명을 준행하기를 소원하는 존재로 바뀌는 것, 그것이 바로 성령 충만이고 그것이 바로 새로운 피조물의 모습입니다.
이렇게 후기 선지자들을 통해 이미 예언되었던 새 언약이 예수님에 의해 완전히 밝혀졌으나 예수님의 제자들은 변합니까? 하나도 안 변합니다. 예수님이 붙잡히실 때에 모두 도망친 것은 물론이고 심지어 부활하신 예수님을 뵙고도 물고기를 잡으러 갑니다. 먹고 살려고. 여전히 자기가 먹고 사는 것 외에는 관심이 없던 제자들이지요. 이랬던 자들이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의 성령 강림 이후에 변하게 됩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율법의 내용을 밝히시고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시면서 십자가의 길을 열어놓으신 것이고 성령께서 오심으로써 제자들이 실제로 그 십자가의 길을 통과하게 되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자기도 소원하는 신비한 존재로 바뀌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성령이 오시면 내가 가르친 모든 것을 그때 너희가 알게 될 것이다”라고 미리 말씀을 하셨던 거지요.
새 언약의 시스템은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인간이 절대 준행할 수 없는 계명을 주시고 그 계명 앞에서 “하나님, 우리는 절대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 수가 없는 존재들입니다. 불쌍히 여겨 주시고 우리를 변화시켜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할 때 성령께서 역사하셔서 하나님의 계명을 준행하기를 소원하는 존재로 바뀌게 되고 이어서 그 의로운, 즉 예수님처럼 서로 사랑하는 삶을 현실에서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피드백이 있습니다. 검증이 있어요. 지금 이 순간 우리가 계명을 실제로 준행하고 있는지를 항상 검증해야 하는 것입니다. 현실의 삶에서 검증이 생략되면 새 언약 전체가 공허한 것이 되어버립니다.
행위가 아니고 믿음으로? 계명을 준행하는 삶이 현실에서 검증되지 않으면 끝장입니다. 언제 사도 바울이 율법의 행위가 아니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했습니까? 그건 루터가 자신의 이신칭의론을 합리화하려고 자의적인 번역을 했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루터 이전에는 라틴어 성경도 그렇고 모두 “디아 피스테오스 예수 크리스투”가 목적격 소유격으로 번역되어 있었어요. KJV은 지금도 그렇게 번역되어 있습니다.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피스티스로 인해서 구원을 얻는다는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스티스, 즉 우리의 믿음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의 신실함입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에서 “피스티스가 온 후로”라고 말씀합니다.
이 피스티스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이지 우리 안에서 나오는 게 아닙니다. 따라서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것은 성경과 전혀 반대로 가는 겁니다. 결국 밀양이라는 영화까지 나오게 되는 거지요.
구속, 즉 죄사함의 약속은 요즘의 개인회생이나 파산면책 제도와 같은 겁니다. 개인회생과 파산면책이 결론입니까? 아니지요. 그렇게 해줘야 새 출발을 할 수 있으니까 그 제도를 만든 것이지 개인회생 파산면책 받아서 배 두드리며 살라고 만든 것이 아니란 말이지요. 정상적인 사회인으로 다시 출발하게 만들어 주려고 개인회생 파산면책 제도를 만든 것처럼 예수님의 보혈의 공로는 새 출발을 할 수 있는 출발선에 서게 하시는 것이고 본론은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서 계명을 준행하는 삶을 현실에서 살아내는 겁니다. 그리고 그것은 반드시 검증되아야 합니다.
그때 그 검증의 기준이 바로 조직신학입니다. 왜 성경이라고 하지 않고 조직신학이라고 하는가? 성경은 보는 사람마다 다르게 보여요. 따라서 성경은 기준이 될 수 없습니다. 결국 실제적인 기준은 그 성경을 해석해서 정립한 조직신학입니다. 성경은 보는 사람마다 다르게 해석되기 때문에 “우리 모두 성경 말씀대로 삽시다”는 말이 안 되는 소리입니다. 그 말은 사실은 “우리 교단의 조직신학대로 삽시다”라는 말입니다. 성경대로 산다는 말 자체가 논리적으로 성립이 안 되는 말입니다. 인간은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없습니다. 자신이 받아들인 조직신학대로 사는 거예요.
조직신학이 어마어마하게 중요한 요소입니다. 율법이 완성된 삶, 의로운 삶,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면서 수시로 조직신학에 의해 검증을 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잘못된 점이 드러나면 또 회개를 해야 하고 들어맞는 점이 발견되면 하나님께 감사하는 거지요. 감사와 회개가 평생 계속 깊어지는 것입니다.
이 입증에 대한 말씀은 마지막에서 다시 보기로 하고 그전에 한 가지만 더 보겠습니다. 이 새 언약 앞에 서있는 그리스도의 제자들의 정확한 포지션은 어떤 것인가 하는 점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요한 사도가 정확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한일서 1장 8절을 봉독하겠습니다.
(요일 1:8) 만일 우리가 죄 없다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자신이 의인이 되었다고 생각하면 그건 정신 나간 자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계속 죄만 범하고 사는 것이 정상이란 거냐? 그렇지 않지요. 같은 요한일서 3장 6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요일 3:6)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아니하나니 범죄하는 자마다 그를 보지도 못하였고 그를 알지도 못하였느니라
그 안에 거하는 자, In Christ입니다. In Christ 상태에서는 범죄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앞에서는 죄가 없다고 하면 스스로 속이는 인간이라고 했으니 이게 어찌 된 일이지요?
그리스도의 제자는 In Christ 상태에 있을 때에만 죄를 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나도 원하는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Out of Christ 상태로 빠지게 되면 그 즉시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과는 전혀 다른, 내가 원하는 것이 살아납니다. 그래서 “나는 죄 없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나는 완전한 의인이 되었습니다”라고 이야기하면 그건 하나님께 도전하는 정신 나간 인간이 되는 거지요.
따라서 새 언약의 계명 앞에서 그리스도의 제자들의 포지션은 In Christ 상태가 되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나도 원하게 되면 하나님께 감사하고, Out of Christ 상태가 되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과 내가 원하는 것이 따로 가게 되면 깊은 회개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걸 보고 오락가락이라고 표현하는 겁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오락가락하는 존재입니다.
그렇다면 세상 사람들이나 육에 속한 크리스찬은? 항상 가락 상태입니다. 한 번도 오락이 일어난 적이 없어요. 항상 자기가 원하는 것 따로 있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 따로 있는데 어떤 문제가 생기냐 하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내가 원하는 것과 동일하다고 성경을 해석해 버립니다. 그것이 바로 서구 기독교의 본질입니다.
가장 좋은 예가 “부모님께 효도하자”는 구호입니다. 성경에서 부모님께 효도하라고 하십니까? 예. 하라고 하십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런데 예수님은 뭐라고 하시지요? 네 부모와 처자를 버리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고 하십니다. 심지어 누가복음에서는 부모와 처자를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부모를 미워하는 것이 계명을 준행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부모를 공경하는 것이 계명을 준행하는 것입니까? 어떻게 하라는 겁니까?
예수님의 계명을 따라서 부모를 버리고 교회에서만 살 것이냐? 아니지요. 예수님도 고르반을 언급하시면서 하나님께 바친다고 부모 공양을 외면하면 큰 죄라고 그러셨지요? 그럼 어떻게 하라는 거냐? 여기서 기독교 윤리학이 부모를 공경하고 효도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예수님의 계명을 무시한 것이지요. 인간의 계명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난도질을 하는 겁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답을 압니다. 에베소서 6장 1절입니다.
(엡 6:1) 자녀들아 “주 안에서(in Christ)”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저들이 말하는 효도는 부모가 원하는 것을 해드리는 것이지만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부모 공경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부모님에게 해드리는 것입니다. 따라서 부모님의 소원을 안 들어드리기 때문에 부모를 버리는 것으로 표현되는 것이고 하나님이 부모님에게 가서 하라고 명령하시는 일을 부모님에게 가서 하기 때문에 부모를 공경하는 것이 되는 것이지요. 부모님도 사랑의 대상이니까요.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오락가락하는 포지션에 있습니다. 우리가 항상 이야기하지만, “와! 의인이 나타났다!”라고 사람들이 말하면 우리는 십리 밖으로 피해야 하는 겁니다. 그건 거짓말쟁이거나 바보거나 둘 중에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성인이 나타났다? 그건 사기입니다. 성인이란 건 존재할 수가 없어요. 항상 하나님 앞에서 긴장하고 항상 Out of Christ 상태가 될 때마다 깊은 회개로 들어가야 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제자지 의인이 되었다고 한다면 그건 사기꾼입니다.
마지막으로 계명의 준행은 반드시 검증되어야 한다는 것을 보고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이사야서 65장 25절 말씀입니다.
(사 65:25) 이리와 어린 양이 함께 먹을 것이며 사자가 소처럼 짚을 먹을 것이며 뱀은 흙으로 식물을 삼을 것이니 나의 성산에서는 해함도 없겠고 상함도 없으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이 예언이 현실에서 구현되어야 합니다. 서구 기독교는 이 말씀을 새 하늘과 새 땅에 가져다 댑니다. 죽어서 가는 천당에 적용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이 말씀은 새 언약의 시대가 시작되면 현실에서 구현될 모습을 예언한 말씀입니다. 이 땅에 임하는 서로를 예수님처럼 사랑하는 하나님의 나라 한 몸 공동체의 모습입니다.
현실에서 이 모습이 실제로 나타나지 않으면 말장난입니다. 하나님을 능멸하는 일이 되는 거지요. 이와 관련해서 예수님의 말씀도 봅니다. 마태복음 7장 15절에서 23절을 봉독하겠습니다. 좀 긴데 핵심 되는 말씀들만 보겠습니다.
(마 7:15-16)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이사야 선지자와 같이 양과 이리로 비교하십니다)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찌니
이어서 20절입니다.
(마 7:20) 이러므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그들의 삶의 모습으로 검증이 돼야 한다는 것을 예수님도 분명하게 말씀하시는 겁니다. 그 다음 21절입니다.
(마 7: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여기서 천국으로 번역된 “바실레이아 우라노스”는 이 땅에 임하는 하나님의 나라를 함께 의미하는 중의적인 의미로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 한 몸 공동체의 삶을 이 땅에서 살기 위해서는 “주여 주여” 부르는 것으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당연히 안 되지요. “주여 주여” 부른다고 함께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다 잡아 먹으려고 들지요. ‘오! 예수님 같은 사람들이 여기 모여 있네. 하루에 한 명씩 잡아먹자!’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고 하신 겁니다. 다음으로 로마서 16장 17절에서 18절 말씀입니다.
(롬 16:17-18)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교훈을 거스려 분쟁을 일으키고 거치게 하는 자들을 살피고 저희에게서 떠나라 이 같은 자들은 우리 주 그리스도를 섬기지 아니하고 다만 자기의 배만 섬기나니 공교하고 아첨하는 말로 순진한 자들의 마음을 미혹하느니라
자기 배만 섬기는 자들과는 헤어지라는 겁니다. 왜? 같이 있으면 결국 하나씩 하나씩 잡아먹히고 끝나니까! 비록 오락가락이지만 깨어 있을 때에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자기도 원하는 의인의 모습을 실제 삶으로 드러내는 자들끼리 모여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기 배를 섬기는 자들, 자기밖에 모르는 자들, 자기를 위해서 사는 자들과는 갈라서라는 것입니다. 절대 같이 있을 수 없다는 거지요. 왜? 하나씩 하나씩 잡아먹히고 끝납니다. 안 잡아먹힐 수 있을까요? 불가능합니다. 이리는 양을 잡아먹어야 생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어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야고보서 2장 14절에서 18절 말씀입니다.
(약 2:14-18)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혹이 가로되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즉 삶의 현장에서 행위로 검증이 되어야 하는 겁니다. 검증이 되지 않으면 죽은 믿음, 즉 가짜 믿음이라는 거지요. 그리고 자기 판단으로 스스로 검증하는 것이 아니고 조직신학에 의해서 객관적으로 검증되어야 합니다.
그 의로운 행위가 구체적으로 어떤 행위냐? 그것을 우리는 네 가지 항목으로 요약합니다. 나가서는 전도와 활용, 들어와서는 구제와 양육입니다. 우리의 모든 일거수일투족이 그 네 가지 행위에 적합한 것인지 항상 검증받아야 하는 것이지요.
옛 계명들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살 수 없는 자들을 향해서 주신 변개된 계명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셔서 “원래 하나님이 원하시는 계명은 이런 것이었다”라고 밝히셨는데 그걸 들어보니까 이건 인간이 아닌 거지요.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이냐? “그 계명들을 준행할 수 있는 자로 만들어 주시옵소서” 하고 매달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령께서 역사하셔서 신의 성품으로 그 불가능한 계명들을 준행하는 순간들이 우리에게 나타나게 됩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더욱 회개하고 더욱 간구함으로써 그런 시간을 점점 늘려가는 거지요. 사도 바울이 “내가 다 이루었다는 것이 아니라 나는 푯대를 향해 달려갈 뿐이다”라고 말씀하셨듯이 나날이 진보해가는 것, 그 시간이 점점 늘어가는 것,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제자들의 삶입니다.
새 언약은 이처럼 극한의 신비가 현실이 되게 해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참으로 감사하게도 우리 공동체에 그런 모습들이 조금씩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아, 지금의 나의 이 마음은 인간이 가질 수 없는 마음인데?’ 그게 스스로 확인이 되는 일들이 시작되었습니다. 서로 격려하고 서로 권면하고 서로 중보기도하면서 함께 어깨동무하고 그 변화된 신비한 모습이 함께 조금씩 늘어가는 과정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의 삶입니다. 그 삶에 우리가 발을 들여 놓았습니다. 인간에게는 불가능한 일이 우리에게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엘리야가 먼 산 위의 손바닥만한 구름을 보고 비가 올 것을 안 것처럼 우리 안에 나타나는 이 작은 그러나 지극히 신비한 이 모습들을 보면서 점차 우리가 더욱 성숙하게 계명을 준행하는 삶을 살게 될 것을 확인하게 되는 것이지요.
더욱 회개하며 간구하는 우리가 되기를 원합니다. 그렇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미 그 길에 들어섰기 때문이지요. 이어지는 성찬에서 간절한 마음으로 성찬에 임하는 우리들에게 예수님의 살과 피가 우리를 더욱 변화시키는 놀라운 일이 진행될 줄을 믿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펼치시기 위하여 저희들을 부르신 것을 저희가 알고 있습니다. 속히 우리를 더욱 변화시켜 주시어서 하나님의 계명을 준행하는 우리의 삶을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주게 하시옵소서. 그것을 위해서 우리를 부르신 것을 믿습니다. 산 위의 동네를 사람들이 다 보게 된다고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 각자의 존재와 우리의 공동체와 우리의 삶이 세상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눈으로 보게 하는 놀라운 일을 이루시옵소서. 그리하여 우리부터 시작해서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많은 사람들이 감옥에서 신음하는 피눈물을 흘리며 몸부림치는 삶을 끝내고 양과 이리가 함께 먹는 지복의 삶을 누리게 하시옵소서. 간절한 마음으로 성찬에 임하는 저희들에게 이 놀라운 일을 한 단계 더 진행시켜 주시옵소서. 이루실 줄 믿사옵고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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