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촌’하면 생각나는 것은 무엇일까? 지금도 잊을 수 없는 경기도 용인의 초임지 초등학교에 대한 추억이다. 전교생 250명의 6학급. 마치 엊그제 일처럼 생생하게 추억이 되살아난다. 아이들의 순수한 마음과 학부모들의 선생님 존경하는 마음과 포근한 인심, 그리고 가족처럼 대하여 주신 교직원의 따뜻한 정. 농촌에 대한 좋은 인상과 함께 고이 간직하고픈 아름다운 단상들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간다.
방과후의 가정방문. 감바위에 사는 아이들 십 여명이 앞서거니 뒷서거니하며 즐겁게 담임을 손잡아 이끈다. 어느 마을, 어느 집을 방문하건 학부모는 담임과 동네 아이들을 반갑게 맞이한다. 마치 친한 친척을 맞이하듯……. 내 자식 챙기듯……. 뛰어나오는 모습이, 손잡은 따스한 손이 아주 거리낌 없이 집안 곳곳을 안내하며 사는 모습을 진솔하게 보여준다. 집에 있는 간식을 아이들과 함께 먹으며 자녀의 생활, 성격, 장단점, 공부 이야기 등을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나눈다. “선생님, 드릴 것은 없고 이것 가지고 가세요.” 방문을 마치고 나오는데 윤례 어머니 손에는 살아 있는 씨암탉의 날개죽지가 잡혀있다. 조금전까지 앞뜰에서 노닐던 닭은 휘둥그레한 눈으로 주위를 둘러본다. 귀한 사위가 오면 씨암탉을 잡아 준다는 말은 들었어도 담임에게 씨암탉을 안겨주는 학부모는 처음 보았다. 워낙 뜻밖이라, 명색이 선생님이라는 체면이 있어 완곡하게 사양했지만 지금도 그 당시 당혹감은 남아 있다. ‘살아 있는 저 닭을 들고 어떻게 버스를 타고 집에까지 간담…….’
가정 형편상 아들과 며느리는 도시로 내보내고 손주를 키우는 전일이 할머니. 가끔씩 학교에 나타나실 때마다 교무실에서는 작은 파티가 벌어진다. 찐옥수수, 찐감자, 찐고구마 파티가 바로 그것. 손수 농사를 지으셔서 정성껏 삶아 김이 모락모락 나는 농촌의 전형적인 작은 인심에서 우리 선생님들은 아이들을 더 열심히 가르칠 것을 다짐했고 선생님이 된 것에 대한 뿌듯한 자부심을 느꼈다. 손주에 대한 사랑을, 선생님에 대한 감사의 표시를 행동으로 보여 준 전일이 할머니의 그 높은 뜻을 이제야 알 것 같다.
그 부모에 그 자식이라고 하던가! 소규모 학교 예산은 한정되어 있어 학부모의 도움을 받아 여는 경로잔치. 아이들 예능발표는 학교에서 다양하게 준비를 하고 음식은 여러 어머니들이 자기 부모 받들듯 자발적으로 학교로 실어 나르고 음식상을 차린다. 이에 질세라 8월의 뜨거운 태양 아래 뜨끈한 커다란 수박을 밭에서 직접 따가지고 땀을 뻘뻘 흘리며 가져온 4학년 미섭이! 지금쯤 성장하여 부모님께 효도하며 사회의 역군으로 성장해 있으리라 굳게 믿는다.
어느 날이던가? 방과 후, 운동장에서 동네 뒷산의 산불 연기를 목격하고 담임과 함께 수 킬로미터를 단숨에 달려가 진화 작업을 벌인 아이들. 도착하여 보니 다행히 동네 어른들이 불길을 잡아 꺼져가고 있었지만 숨을 헐떡거리는 담임과는 다르게 잔불을 끄며 여유 있는 표정을 짓는 아이들. 체력도 강하고 ‘동네일이 바로 내 일’이라는 그 공동체 의식. 햇병아리 교사에게 있어 그들이 오히려 스승이 아니었나 생각해본다.
5학년 담임 시절. 6학년 학생들이 학교 나무에 거름을 주기 위해 나무 주변에 동심원으로 골을 파고 교장 선생님과 함께 재래식 화장실에서 인분을 퍼 나른다. 고약한 냄새에 인상은 찌푸리면서도 꾀부리지 않고 땀흘려가며, 웃으며 일하는 해맑은 얼굴 모습에서 우리 나라의 밝은 미래를 보았다.
학교 근처에 음식점이 없어 숙직 때마다 식사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남자 교원이래야 교감, 교무주임, 나. 이렇게 셋이서 맡다보니 숙직은 사흘에 한번 씩 돌아오게 된다. 라면 끓여 먹는 것도 질리고 하여 ‘여기를 떠나 도시의 큰 학교로 가야지.’ 하는 결심을 굳히는데 가끔씩 학부모가 챙겨 주시는 도시락은 이 곳에 정을 붙이게 한다. 담임의 식성을 어찌 아셨는지 내가 좋아하는 김치와 고추조림. 그 맛에 3년이란 세월은 그리 길게 느껴지지 않았나 보다.
어느 날 이런 일도 있었다. 학교 앞에 사는 학부형이 자기 아버지에게 개망나니 짓을 하는 것을 홍성철 교장 선생님께서 목격하였다. 그냥 지나치는 교장 선생님의 성품은 아니었다. 그 학부형은 교장 선생님의 엄한 훈계를 듣고 행동을 자제하게 되었으며 그 후 교장선생님만 보면 꼬박꼬박 예의를 표하고 있다. 학교장이 지역사회의 어른으로 대접받는 농촌, 잘못을 일깨워 주면 이를 바르게 받아들이는 사회, 이것이 올바른 우리의 원래 모습이 아니던가.
농촌학교 홍교장 선생님에 대한 추억은 한 가지 더 있다. 직원조회가 끝나면 작업복으로 갈아입으시고 괭이와 호미와 비를 들고 운동장 정지작업, 잔디밭의 잡초제거, 화단 가꾸기, 수목관리, 지저분한 곳 청소 등 교내 구석구석에 그 분의 손길이 안 간 곳이 없을 정도다. 그 분의 말씀은 늘 이렇다. “선생님들은 아이들이나 열심히 가르치세요. 학교의 작업과 미화는 내가 할 터이니…….”
학교 앞 동네 사택에 사시는 9년 선배인 윤영섭 선생님. 바쁜 교직생활 중에서도 동네에서 음식물 찌꺼기를 걷어 모아 돼지를 기른다. 그 선배님의 따뜻한 후배사랑 정신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토요일 숙직 후의 일요일 아침, 동네 아이를 시켜 숙직자를 식사에 초대한다. 일년에 두 세 차례.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이다. 나는 선배님의 깍듯한 초청이 너무나 고마워 어린이 종합선물세트를 사들고 초대에 응하지만 선배님의 정성에 비하면 답례라고 하기엔 어림도 없다. 농촌엔 후배 사랑의 정신이 면면히 흐르고 있는 것이다.
농촌에 살려면 부지런해야 한다고 말한다. 사실 농촌사람들은 부지런하다. 농촌 학교 교장도, 선배 선생님도 농촌 사람들의 삶을 배워서인지 부지런하다. 나는 언제쯤 그들을 쫒아갈 수 있을까?
보고 싶다, 농촌 학교의 제자들이. 뵙고 싶다, 그 곳의 학부모와 교직원들이. 다시 느끼고 싶다, 농촌의 포근한 인정을. 다시 찾아가서 농촌이 베푼 사랑을 보답하고 싶다. ꃁ
첫댓글 1977년부터 용인 대지초에서 3년간 근무했죠. 지금은 그 곳이 아파트 단지로 변했네요. 학교 규모도 커지고...
삽십여년의 세월에 인정도 많이 변하고 사는 모습도 많이 변하고....너와 내가 손을 잡고 도란도란 웃음과 얘기꽃을 피우며 가기엔 속도가 너무 빨라졌네요. 앞만 보며 모두들 100미터 달리기를 하고 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