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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명학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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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봉화 스크랩 밀양박씨 오고당구택 이야기
혜명 추천 0 조회 204 12.03.12 10:46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명 칭 :  밀양박씨 오고당구택(密陽朴氏 五高堂舊宅)
소 재 지 :  경상북도 봉화군 봉성면 봉양리 598
(원소재지 : 경상북도 봉화군 봉성면 원둔리)
이건시기 :  19세기 초반 이전
소 유 자 :  박종훈(관리자 : 박종훈)
문 화 재 :  봉화군 민속자료 제52호, 1984-12-29 지정, 1동 

건축 배경
조선시대 말기인 1820년대로 조대비(趙大妃)의 병환을 고치고 고종으로부터 오고당(五高堂)이라는 호를 받은 조선 말기의 명의 박한진(朴翰鎭)이 태어나고 자란 집이다.

건축 구성
이 건물은 평면형태가 사방 각 3칸으로 된 이른바 사방집이며, 지붕이 까치구멍이라고 부르는 독특한 구조를 하고 있는 점에 특색이 있는 주택이다. 현선이라는 목수가 지었다고 전해지는 이 집은 건물 전면의 3칸은 부엌·봉당·창고이고 가운데는 안방과 마루로 되어 있으며, 뒷면 3칸은 고방과 마루 상방으로 구성되어 있다. 전면의 흙벽 위쪽에 환기와 채광을 위하여 여러 개의 작은 개구부가 나 있으며, 벽의 일부는 판벽이다. 태백산맥 일대에 분포되어 있는 사방집의 전형적인 수법으로 구성된 건물이다.

현판
오고당(五高堂)
벼슬 대신 받은 고귀한 당호, 오고당
오고당은 고종이 조대비의 병을 치료한 박한진이 벼슬을 주겠다고 하여도 받지 않자 의리가 높다 하여 내려준 호이다. 그러나 고종은 이 뜻에 대해서는 밝히지 않았으므로, 사실상 이 다섯 개 높음이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명확하지 않다. 이 다섯 가지의 내용에 대해서는 설왕설래가 많았는데, 은고(恩高), 지고(志高), 지고(智高), 수신고(修身高), 수분고(修分高)로 보는 사람들이 다수였다고 한다.

 

문중 이야기
- 부모를 위해 의술에 입문한 효자
박한진의 일생에서 중요한 것은 12세 때 부친이 병을 앓았던 일이다. 원근의 의원들을 찾아 진맥을 하고 처방을 받았다. 그런데 의원들마다 진단이 달랐고 처방도 달랐다. 어떤 처방은 병을 악화시키기까지 하였다. 고생 끝에 부친의 병환은 치유되었지만, 이러한 경험은 박한진으로 하여금 의술에 관심을 두게 만들었다. 귀중한 부모님의 생명을 오진을 밥 먹듯이 하는 의원들에게 맡겨 둘 수 없다는 생각이 그를 이끌어 갔다. 그 때부터 박한진은 경서를 익히는 여가에 의서를 섭렵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의 의술이 채 일정한 진보를 이루기도 전에 부모님이 차례로 타계하였다. 16세 때 모친이 타계하고, 20세 때 부친이 돌아가셨다. 부모가 차례로 세상을 떠난 후에는 입신양명하여 부모가 지어 준 이름을 드날리는 것이 효도하는 길이라고 생각하였다. 공부에 더욱 열중하여 4서 3경, 제자백가, 각종 의서에 통달하게 되었다.


관련이야기
- 넓고 어둑한 사방집
밀양박씨 오고당구택은 대문채·본채·별채로 이루어져 있다. 대문채는 원형이 보전되어 있지 않다. 대문만은 고형을 유지하고 있지만, 문지방이나 문틀 같은 것은 옛 것이 아니며, 벽이나 지붕은 블록이나 슬레이트 같은 것으로 처리한 것들이다. 이 점은 뒤쪽의 별채 역시 마찬가지이다. 별채는 정면 3칸, 측면 1칸 규모인데, 동향을 하고 있다. 본채가 남향을 하고 있는 것과는 다르다. 본채와 별채는 사이에 좁은 마당을 두고 있다. 별채는 2단으로 자연석을 쌓은 위에 자리 잡고 있다. 북쪽 편으로 자리 잡고 있는 1칸은 광이고, 남쪽 편 2칸은 방이다. 남쪽 끝 칸은 작은 1쪽 방문을 두었고, 남쪽으로부터 제 2칸은 중간 크기의 2쪽 방문을 달았다. 방문 앞에는 넓적한 판석을 섬돌로 두었다. 이 별채는 지붕이 슬레이트로 되어 있는데, 아마도 지붕을 바꾼 것으로 보인다. 뼈대는 옛 것이지만, 지붕은 새것이라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정면의 칸들은 제대로 1칸 넓이를 갖추고 있으나, 측면의 칸은 일반적인 경우보다 조금 좁다는 느낌이다. 오고당 본채 건물은 아주 매력적인 건물이다. 이 건물이 실용적인 것인지에 대해서는 안에 살아보지 못하여 잘 알 수 없는 문제이지만, 흔히 볼 수 있는 건물이 아니라는 점, 상당히 눈길을 끌만한 것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안내판에서 말하듯이, 안채는 사방이 똑같이 3칸 규모이고, 그것이 다 한 지붕 안에 들어있는 건물이다. 지붕은 납작한 편이다. 동·서 방향으로 용마루가 뻗어 있고, 고매가도 동쪽과 서쪽으로 마련되어 있으며, 용마루로부터 사방으로 뻗어내란 추녀는 각도가 아주 밋밋하게 되어 있다. 정면 3칸은 원래는 일선으로 되어 있었지만, 서쪽 끝 칸을 약 1m 정도 달아매고 추녀 밑으로 약식 지붕을 가설하여서 현재는 1칸이 약간 앞으로 나선 모습을 하고 있다. 기단은 어린애 몸통만한 강돌을 2층으로 쌓아 마련하였다. 앞 부분의 가운데 칸 한 부분에서 이 강돌은 하나 이가 빠져서 1층이 되어 있는 곳이 있는데, 이곳이 대문 영역이며 계단이라고 할 수 있다. 정면 3칸 중 동쪽 제 1칸은 아래 2, 위 3 정도 비례로 횡분된다. 아래는 나무문 하나를 달고 있는 나무판 벽이고, 위는 흙벽이다. 위쪽 벽은 흙으로 되어 있는데, 위쪽 3분의 1쯤 되는 지점에 사각형의 광창을 2개 옆으로 나란히 뚫어 놓았다. 이 광창은 가운데 칸에서도 같은 높이에 일선으로 보인다. 가운데 칸에서는 개수가 4개로 늘어난다. 가운데 칸은 아래 2, 위 1 정도 비례로 횡분된다. 아래의 중앙에는 2쪽 나무문이 달려 있고, 나머지는 나무판 벽이다. 위쪽은 옆과 마찬가지로 구멍이 뚫린 흙벽이다. 앞의 동쪽으로부터 제 3칸은 기단의 2층 석단을 벽의 아랫부분으로 삼고 있다. 그 위에는 작은 돌들을 3층으로 더 쌓아올려 벽의 아랫부분을 형성하고 있기도 하다. 이 벽의 위쪽에는 사각의 작은 유리 창문이 달려 있다. 제 3칸은 서쪽 측면 부분으로도 1m 정도 더 달아매져 있다. 이 건물의 동쪽 측면 3칸은 아래로부터, 광-방-방의 구조를 보여주고 있다. 아래로부터 제 1칸은 그 앞부분과 같이 벽면이 아래 2, 위 3정도 비례로 분할된다. 아래는 나무판이 종으로 박힌 벽이고, 위는 흙벽이다. 이 부분의 아래로부터 제 2칸은 벽면이 1대 3대 1 정도의 비례로 횡분된다. 아래는 주초 영역이며, 툇마루가 가설되어 있다. 두 뼘 정도 넓이이다. 뜰 중앙에는 섬돌이 놓여 있기도 하다. 가운데 칸에는 중앙에 사각의 문틀을 넣고, 2칸 방문을 달았다. 위쪽을 제외한 세 방향으로는 문틀을 이룬 목재가 방문 영역에만 가설되어 있으나, 위쪽 문틀은 벽면을 횡단하는 각재이다. 이 부분의 위쪽 제 1칸은 흙벽인데 여기에 오고당이라는 현판이 달려 있다. 측면의 아래로부터 제 3칸, 그러니까 맨 위 칸은 역시 벽면이 3단으로 횡분되어 있는데, 아래쪽에 솥이 걸려 있으므로, 아래쪽 제 1단의 횡분 높이는 중간 칸보다 15cm는 올라붙었고, 거기에 또 중간 칸보다 15cm는 올라붙은 쪽마루가 가설되어 있다. 이 벽면의 중간 칸과 위 칸을 가르는 횡목도 중간 칸보다는 5cm 정도 내려붙어 있다. 그러므로 벽면 중간 부분 한가운데에 붙어 있는 2쪽 방문은 통상의 경우보다 아주 작다. 맨 위 벽면은 수선방향으로 3개의 각목을 넣어 벽면을 4분하고 있다. 서쪽 측면의 아래로부터 1칸은 달아맨 영역인데, 전체가 다 흙벽이고, 제 2칸은 방문이 하나 달려 있으며, 제 3칸은 옛 방문과 새로 단 유리문이 같이 붙어 있다. 이 건물 뒤편의 동쪽으로부터 제 1칸은 달아맨 영역이다. 처마 밑으로 1m 정도의 넓이이다. 지붕 부분은 특별히 따로 가설되어 있지 않다. 제 2칸에는 방문이 달려 있고, 제 3칸에는 방문과 사각의 창문이 같이 달려 있다. 안으로 들어가면, 공간은 종으로 3분된다. 동쪽의 정면 1칸, 측면 3칸은 아래로부터, 광-마루방-방 등 셋으로 구분된다. 서쪽의 정면 1칸, 측면 1칸은 아래로부터 측면 1칸의 다용도실, 그리고 측면 2칸의 통방으로 나누어진다. 가운데의 정면 1칸, 측면 3칸 영역은 앞쪽의 1칸 영역은 봉당, 뒤쪽의 2칸 영역은 마루로 되어 있다. 봉당의 뒤쪽, 마루 앞으로는 섬돌이 놓였고, 봉당은 시멘트로 발라져 있다. 물론 달아맨 영역은 예외로 하고 하는 말이다. 위쪽의 목구조는 길게 횡보가 남북 방향으로 가로 놓여 있다. 이것은 방·광 등의 천정 면을 이룬다. 방들의 윗면은 직선으로 끊어져 천정 면이 반듯하게 처리되어 있으며, 그 위 목구조들은 정면 3칸, 측면 3칸 모두가 드러나 있는 모습이다. 남북방향으로 뻗은 벽면 위쪽의 횡보 중앙, 가운데 칸을 이루는 측면 아래 위의 기둥 위로는 짧은 기둥이 놓여지고, 그 위에 다시 굵은 횡목을 올렸다. 이 횡목 역시 남북 방향으로 놓여 있다. 이 굵은 횡목의 중간 부분에서는 넓고 두터운 사다리꼴 모양의 판재가 놓여지고, 이 판재는 중간 부분에 홈을 파서 동서 방향으로 들보를 놓았다. 들보 위로는 서까래가 남북 방향으로 길게 뻗어 내린다. 두 번째 굵은 횡목, 사다리꼴 판재 재목, 서까래 등으로 이루어진 좁은 삼각형 부분은 한 쪽은 완전히 흙으로 메워져 있고 한 쪽은 반만 흙으로 메워져, 나머지 부분에는 공기가 통하도록 되어 있다. 까치구멍이라는 것은 바로 이 부분을 두고 하는 말이다.

관련인물
- 배출 인물

박한진(朴翰鎭)
- 의술로 일가를 이룬 선비

박한진(朴翰鎭, 1815~1893)은 자가 자원(子遠), 호는 만리(萬里)이다. 또 다른 호는 오고(五高)라고 하는데, 이 호들은 고종이 하사한 것이다. 박한진의 본관은 밀양이다. 시조는 신라 시조 박혁거세이다. 경명왕의 아홉 왕자 중 장자인 밀성대군 박언침(朴彦?)으로부터 본관을 밀양으로 따로 갖게 되었다. 박한진의 부친은 박재경(朴載景)이고 모친은 진주강씨이다. 그는 유학을 공부하는 선비이면서도 의술이 일정한 경지를 이루어 진맥하고 약을 쓰기만 하면 치료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돈이 없어 약을 쓰지 못하는 환자는 무료로 고쳐 주기도 하였다. 환자가 아무리 부유하다고 하여도 치료를 하고 나서는 약 값 외의 돈을 받지 않았다. 한번은 어떤 부잣집의 3대 독자가 병이 나서 목숨이 경각에 달려 있는 것을 불과 몇 첩의 탕약을 달여 먹여 치유한 적이 있었다. 부잣집에서 음식·옷감·곡물 등을 소에 싣고 와서 부리고 두둑하게 돈까지 내려 하였으나, 박한진은 다 물리치고 약값만을 받았을 뿐이었다. 이런 까닭에 박한진은 늘 가난하게 살았다. 현감 조병익의 병을 치료한 적도 있었다. 한 번은 현감 장화식의 두 아들이 동시에 심하게 상한을 앓은 적이 있었다. 현감은 박한진을 불러 치료를 부탁하였다. 박한진은 독삼탕을 처방하였다. 둘러앉았던 의원들은 다들 깜짝 놀랐다. 상한에 인삼은 독이나 마찬가지라는 것이었다. 박한진의 의술을 잘 알고 있던 현감은 다른 의원들의 만류를 무릅쓰고 박한진의 처방을 따랐다. 독삼탕을 먹은 현감의 두 아들은 사경을 헤매었다. 현감도 박한진을 원망하였다. 박한진은 현감의 원망을 듣고는 조용히 일어나 물러 나왔다. 잠시 후 현감의 두 아들이 소생하였다. 현감은 자신의 경솔함을 탓하는 마음도 있고 박한진에 대한 고마움을 주체할 수가 없어서 버선발로 뛰어나와 박한진을 찾아가 사과를 하였다. 1875년(고종 12) 조대비가 병이 들었다. 박한진의 나이 61세 때이다. 백약이 무효하고, 전국의 모든 의원이 손을 들었다. 박한진의 의술에 대해 잘 알고 있던 조병익·장화식 등은 조정의 일원이 되어 있었다. 이들이 박한진을 추천하였다. 고종은 박한진에게 장사랑 벼슬을 제수하고, 봉화 현감에게 급히 상경시키라는 명령을 내렸다. 박한진은 상경하던 날 입궐하여 임금을 배알하고 병자를 진맥하였다. 피곤하여 처방은 다음날 내기로 하고 주어진 거처에 돌아와 목욕재계하고 생각에 생각을 거듭한 끝에 다음날 새벽 소시호탕(小柴胡湯) 3첩이면 완쾌할 것이라는 처방전을 내었다. 주변에 가득한 명의들은 박장대소하며 비웃었다. 임금이 하문하니 이구동성으로 병에 맞지 않는 처방이라고 아뢰었다. 임금은 주저하였다. 이 약을 쓰면 해로운가? 임금이 다시 물었다. 해로울 것은 없을 것입니다. 의원들이 대답하였다. 임금은 해로울 것이 없다면 시험 삼아 써 보아도 나쁠 것은 없으리라 생각하였다. 소시호탕을 끓여 대비께 진상하니, 병은 씻은 듯이 사라졌다. 다음날 아침 임금이 박한진을 불러 치하하며 말했다. ‘명가전만리(名可傳萬里 : 명성이 만리에 전해질 것이다)’라 하며 만리(萬里)를 호로 내렸다. 임금은 벼슬을 내려 고마움을 표하려 하였다. 무슨 벼슬을 원하느냐고 임금이 하문하였다. 그러자 박한진은 인재를 적재적소에 써야 하는 것인데 쥐꼬리만 한 의술로 벼슬을 받을 수는 없는 일이라고 거듭 사양하였다.임금이 “인술뿐만 아니라 의리 또한 드높구나.”라고 감탄하고 “경에게 5고(五高)의 호를 더 내리노라.”라고 말하였다. 그러자 박한진은 “어찌 5고의 이름을 받으리까?”라며 다시 사양하였다. 임금이 짐짓 진노한 표정으로 “이것까지 받지 않는다는 말인가?”라고 말하고는 자리를 떨치고 일어나 내정으로 나갔다. 5고의 뜻이 무엇인지에 대한 말씀은 없었다. 박한진도 그 5고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없었다. 1고도 없는 내가 5고란 이름을 어찌 쓸까? 박한진은 난감하였다. 그러나 임금이 내린 이름인 것을 어찌하랴. 집으로 돌아와 ‘만리정오고거(萬里亭五高居)’라는 쌍현판을 문패처럼 내걸었다. 하사품이 내려졌고, 조대비의 한글 친서가 내려왔다. 이런 것들은 불행하게도 보전되지 못하였다. 향년 79세였다. 덕산포에 묘지를 잡았다가, 명호 곤지동으로 이장하였다.

봉화 > 봉성상운권 > 봉양리
- ‘나눔’의 전통을 이어가고 있는 공동체
경상북도 봉화군 봉성면 봉양리는 봉성면 소재지(옛날 봉화현-봉성현- 소재지)에서 남쪽으로 2km 지점에 위치한 마을이다. 작은 계곡을 사이에 두고 1리와 2리로 나뉘어져 있으며, 동쪽으로는 명호면 고감리, 서쪽으로는 상운면 운계리, 남쪽으로는 상운면 문촌리, 북쪽으로는 면소재지인 봉성리와 접하고 있다.이 마을은 낮은 야산으로 둘러 싸여 있고 맑은 공기에 깨끗한 환경을 보전해 가고 있는 지역으로, 쌀, 고추, 담배 등을 생산하여 높은 소득을 얻는 마을로 손꼽히고 있다. 농한기에는 부녀자들이 베틀과 개량직조기로 품질 좋은 안동포를 생산하여 농가소득에 한몫 기여했으나, 요즈음은 동네에 젊은 부녀자들이 없어 삼베 짜는 기술이 전승되지 못하고 있어 아쉬움을 남기고 있다.예전에 말둔(未屯), 원둔(遠屯) 등의 이름으로 불렸던 봉양리(鳳陽里)는 926년(고려 태조 19) 경에 최씨 성을 가진 선비가 이곳을 둘러보고 마을을 개척했다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는데, 현재는 밀양박씨, 영해박씨, 순흥안씨, 기계유씨, 진주강씨, 안동권씨 등 여러 성이 함께 모여 살고 있다.또 이 마을에는 1905년(고종 42)에 군내에서 제일 먼저 측량학교가 세워져 운영되어 오다가 1911년에는 봉양서숙으로 개칭되었으며 마침내 봉성공립보통학교로 승격하였다. 이런 이유로 이곳 주민들은 일찍부터 개화사상을 받아들여 사회에 진출하는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봉양 1리에는 안분골[內鳳谷], 석기골[昔基谷], 성황당골, 양지마(陽地마), 도대문골(都大門골), 잣그락골(栢洞, 혹은 짜그락골), 바른골(正谷, 혹은 바든골) 등이 있으며, 봉양 2리에는 떡버드나무골, 학방골[學房谷], 수구재골, 도래골(松鶴洞, 혹은 회곡동), 남면동, 고지바우(高岩 , 혹은 高左岩) 등이 있다.양지마는 조선 시대에 말둔역(末屯驛)이 있었던 곳인데, 원래 춘양면 도심리의 죽터[竹基]에 있던 역을 1884년(고종21)에 이곳으로 옮긴 것이다. 지금도 역터에서 동쪽으로 명호면의 나화석, 서쪽으로 상운면의 문촌 하눌, 남쪽으로는 문촌리의 마장과 신라현을 거쳐 안동군 도산면의 태자동까지 역마가 통하던 길이 남아 있는 흔적을 살필 수가 있다.학방골에 있는 오고당(五高堂) 고택은 이곳 밀양박씨 문중의 소유로 1815년(순조15)에 건립되었는데, 이곳은 참봉 박한진(朴翰鎭)이 태어난 곳이다. 그는 높은 의술로 많은 환자에게 무료로 진료함으로써 그 명성이 전국적으로 널리 알려졌으며, 61세(1875) 때 조대비의 병을 약 3첩으로 고친 것을 계기로 오고당이란 호를 고종으로부터 받았다. 이 고택은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민속자료 제 52호로 지정받아 현재까지 보존되어 오고 있다.고지바우는 고암(高巖) 금은(琴?) 선생이 살던 곳으로, 그는 고암정사(高巖精舍)를 지어 후학을 가르쳤다고 하나 지금은 훼손되어 없어지고 연못의 흔적만 남아 있다. 가까운 곳에 혜민정(惠民亭)이 있다. 이곳의 의특골[義德谷]은 약 천 년 전에 300여 가구의 집단부락이 형성되어 부유하게 살았던 곳이다. 어느 해 큰 흉년이 들어 문전걸식하는 사람이 많았는데, 주민들이 동구 밖의 느티나무 밑에 큰 가마솥을 걸고 죽을 나누어 주어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구하였다 한다. 이와 같이 의로운 덕을 베푼 마을이라 하여 의덕곡 또는 옛텃골이라 하였으나 지금은 의특골이라 부르며 그 당시 사람들이 모여서 죽을 나누던 곳을 시명정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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