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 돈(辛 旽)의 자료
1.[자료/01]* 신 돈(辛 旽) 신 돈(辛 旽) : 호청한거사,법명편조,자요공,고려27대 충숙왕9년 서기1322임술년생,서기1354년갑오년 왕사,영도첨의사사,서기1365년 공민왕14년 진평후,수정순록도섭리보세공신,벽상삼한삼중대광제조숭록사사겸판서운판서,전민변정도감 제조판사,축성부원군,초당공파
2.[자료/02] *고려개혁 신돈의 행적/ 신봉승 교수 역사에 이름을 올린 사람들 중에는 사실 이상의 평가를 받으면서 성인이거나 충신으로 추앙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그 행적이 실제보다 잘못 알려지거나 지나치게 비하된 경우도 허다하다.
이성계는 조선왕조를 창업하면서 고려사의 개수를 명했다. 불법으로 나라를 세웠거나 쿠테타로 정권을 탈취한 부류들은 반드시 전조의 부패와 난정을 부각하여 자신들의 궐기에 정당성을 부여한다. 현존하는 "고려사"와 "고려사절요"는 태조 이성계의 치세에서부터 세종조에 이르는 장장 60여 년의 세월에 걸쳐 수 없이 다시 고쳐 써야하는 우여곡절을 겪었다. 모두가 조선왕조의 창업을 미화하고, 고려왕조의 부패를 강조하기 위해서 였다.
혁명의 주역인 이성계를 부각하기 위해서는 명장 최영의 평가절하가 불가피 했고, 쓸어 넘겨야 할 고려왕조의 왕통에 흠집을 내기 위해서는 신돈을 요승으로 낙인 찍어야 했다. 그 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6백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최영의 경우는 명장의 위치로 다시 복원되었지만, 신돈의 경우는 아묻도 재론하지않은 채 소설이나 드라마에서 더욱 참담하게 뒤틀려지고 있다.
신돈은 고려조 충숙왕 9년(1322)에 계성현 옥천사 사비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여러 산방을 떠돌며 수불통선하다가 마침내 자신이태어난 옥천사의 주지가 되었다. 공민왕이 왕위에 오른지 불과3년(1354)만에 신돈을 불러 왕사로 봉한 것은 그의 명성이 너무도 자자해서였다. 그때 신돈의 나이 32세 였다 면 그야말로 파격의 예우가 아닐 수 없다.
그로부터 11년 뒤인14년(1365) 5월 초하루에는 다시 사부에 봉함과 더불어 청한거사라는 호를 하사하면서 국정을 자문케 하였다. 또 같은 해 5월 27일에는 또다시 가자하여 진평후에 봉하였고, 12월 24일에 이르러서는 엄청나게 긴 벼술을 신돈에게 내리면서 섭정의 지위에 오르게 하였다.
--수정이순, 논도변리, 보세공신, 벽상삼한삼중대광, 영도첨의사사사, 판감찰사사, 축성부원군, 제조승록사사 겸 판서운관사(원문생략)--라는 벼슬을 내리었다. 대체 어느 왕조에 이같이 긴 벼슬이 있었던가. 뿐만이 아니다. 공민왕은 몸소 친필맹사를 써서 신돈에게 내리니,역사는 이를 일러 맹약교지라 적었다.
--스승이 나를 구하고, 내가 스승을 구하니, 우리는 생사를 같이하리라. 또 어떠한 남의 말에도 현혹되지 않을 것이니 이는 하늘과 부처가 증명할 것이라.-- 임금과 신하의 맹서가 이런 지경에 이르자면, 왕사 신돈을 신임하는 공민왕의 속내를 읽고도 남는다. 혹자는 신돈이 요망하여,공민왕을 현혹하여서 얻어낸 "맹약"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당시의 시대상을 조금만 더 냉철하게 살펴본다면, 신돈이 주도하는 개혁의 당위성이 곧 공민왕에게도 시급한 과제였음을 알게된다.
그러므로 공민왕은 15년에 다시 신돈에게 "전민변정감제조판사"를 내려 전제개혁을 주도하게 하였다. 고려국의 훈구세력들에게는 엄청난 타격이 아닐 수가 없다. 이어 16년에는 "성균관 조영을 재수하여 마침내 신돈으로 하여금 국정을 전담하게 하였다. 그것은 4백 5십여 년 동안이나 전횡되어 온 고려국 훈구세력들의 오만과 부패를 척결하는 개혁의 태풍이었다.
신돈이 공민왕의 신임을 얻어 왕사가 된 때가 32세였다면 그의 승려로서의 명성과 인품을 섣불리 깎아내리기가 어렵다. 그로부터 17년 동안 공민왕의 신임을 등에 업은 신돈은 고려 국의 훈구대신들에게 철퇴를 가하는 등 불굴의 의지로 정치개혁을 이끌어나갔다.
전제를 개혁하고 부패의 척결이 진척되면서 백성들은 만세를 부르면서 환호하였고, 원나라와 명나라에서도 서로 다투어 외교사절을 파견하여 신돈의 개혁정책을 지지하는 자문을 보냈다. 그들은 연일 신돈을 위한 연회를 베풀면서 그의 개혁정책에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다만, 왕비 노국공주가 세상을 떠나면서 공민왕의 상심이 커지는 것과 때를 같이하여 원나라와 명나라의 분쟁이 고조되면서 고려국에도 이념의 갈등이 빚어지기 시작한다.
섭정 신돈은 왜구의 침공, 홍건적의 난동 등의 외환과 훈구제력들의 반격을 수습하면서 민심을 달래야하는 이중 삼중의 어려움을 겪게 된다. 신돈의 집정 후반 6년 동안은 지어미를 잃은 상심과 실의에서 해여나질 못하는 공민왕을 대리하게 되었으므로 정치적 역량을 발휘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역대의 왕비를 따라 원나라에서 나온 외척혈연의 무리들이 후두르는 전횡은 중벌로 다스려야 하고, 무반 세력들과 결탁한 토호들의 발호에도 철퇴를 내려야 했다. 또한 기득권을 놓지 않으려는 훈구세력과 왕권을 농락하려는 신흥 숭유세력(반원친명)들들도 가차 없이 다스려야 하는 것은 난제가 아닐 수 없었다.
역명보다 개혁이 어려운 것은 보이지 않는 적과 싸워야하는 부담이 있기 때문임은 예나 지금이나 다름이 없다. 이른바 권문세도로 대변되는 기득권세력들과 배불신흥세력들은 약속이나 한 듯이 신돈의 급진적인 개혁에반기를 든다. 그 반기는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신돈의 약점과 과오를 들추어 내어 모함하는 것이었다. 신돈은 훈구세력의 무고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히려 고려국의 새로운 기풍을 진작하기 위해 충주로의 천도를 계획한다.
송도는 바다에 가까워서 왜구들의 노략질이 잦았으므로 "백성들만 피해가 크다"는 이유에서였다. 이에 대한 백성들의 환호는 공민왕을 두렵게 하고도 남았다. 마침내 공민왕 18년(1369), 신돈의 천도설을 빌미로 그의 제거에 나선다. 공민왕은 훈구세력의 비호를 받으면서 그리도 믿고 따랐던 사부를 수원에 유폐하였다가 사약을 내려 죽게 하였다. 그리고 3년뒤, 공민왕 또한 자신이 믿고 부렸던 내시 최만생에게 살해되는 비극을 맞는다. 조선왕조를 창업한 이성계는 "고려사"를 계수하면서 공민앙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우왕을 신돈의 비첩인 반야의 소생이라 하여 신우라고 적음으로써 고려왕조의 왕통을 철저하게 폄하 하면서 급진적인 개혁주의자였던 신돈의 행적에 돌이킬 수 없는 족쇄를 채웠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왕이 11세 즉위하였다면 노국공주가 살아있을 때 태여난 것이 됨므로, 공민왕과 반야와의 시간적인 흐름에 엄청난 상충이 있음을 스스로 인정한 꼴이 된다. 신돈을 매도하고 비하하면서 나라를 창업하고 왕위에 오른 이성계는 집권이후, 고려 말의 혼란기를 신돈의 개혁정책을 고스란히 이어받으면서 수습해 나갔다. 민심은 신돈을 환호했을 때처럼 미번에는 이성계를 환호하였다. 역사가 빚어내는 아이러니가 아니고 무엇이랴.
--대종회 원로 자문위원 신봉승(경희대 교수)--
3. [자료/03] 신돈, 그는 누구인가?/ 신호웅 교수
1. 문제의 제기 여말 공민왕대 최고의 개혁정치가로 회자되던 신돈의 생애는 그야말로 파란만장한 한편의 드라마였다. 개혁정치가로 등장하는 과정이 그렇고, 승려 신분으로 재상의 자리에 올라 서민 위주의 개혁을 추진하여 온 국민으로 부터 聖人으로 추앙받는 절정기를 누리다가, 반개혁파의 참소를 받아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는 종말이 그렇다.
죽은 뒤에는 鄭道傳이 각색한 李成桂의 집권 시나리오 禑昌非王說에 중심축으로 등장하여 우왕의 생부가 신돈이라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마침내 妖僧이라는 역사 기록을 남기게 되었으니 그 어찌 통분하지 않겠는가? 山 寧越 辛門에서는 여말 신돈의 왜곡된 역사 기록으로 인해 많은 피해를 보고 있다.
개인적으로 처음 인사를 나누는 이들로 부터 신돈의 후손이군요. 라는 우스게 농담을 받은 것이 한 두번이 아니다. 그것은 결코 기분 좋은 일이 아니다. 문중 전체의 이미지가 실추되는 것도 예외는 아니다. 문제는 왜곡된 기록을 여과없이 받아들이는 데 있다. 이 글은 신돈의 伸寃(신원)을 호소하려는 것도 아니고, 靈山 寧越 辛門의 格을 올려보자는 것도 아니다. 春秋筆法으로 정도전의 왜곡된 역사 조작에 筆誅를 가하려는 것도 아니다. 다만 역사를 공부하는 역사학도로서 당시의 사실을 以實直書해 보려는 순수한 학자적 양심일 뿐이다.
2. 신돈, 공민왕대 개혁의 주역으로 활약 공민왕은 14년 동안 끊임없이 반원정책을 펴고, 내정개혁을 추진하였으나 안팎으로 거센 반발과 도전을 받아야 했다. 그런 가운데 홍건적을 격퇴하고 부원세력인 崔濡 일당을 제거하여 한 때 정치적 안정을 누리기도 했지만, 사랑하는 왕비 노국대장공주가 난산 끝에 죽자 왕은 정신적 공황상태에 빠져 있는 실정이었다.
이무렵 등용된 인물이 辛旽(? 1371)이다. 정치적으로 새로운 활로를 모색해 보려는 시도였다. 공민왕이 신돈을 등용하여 이렇게 말했다. "신돈은 도를 터득해 욕심이 없을 뿐만 아니라, 미천하여 친한 黨이 없어 대사를 맡길 만하다." (『高麗史』世家 恭愍王) 고려는 26대 충선왕이 주도하여 권문세족을 타도하기 위해 개혁을 추진하였으나 번번히 개혁 대상인 권문세족의 반발로 실패하였다.
충선왕과 충숙왕 때 시도된 개혁이 실패한 가장 큰 이유는 개혁을 주도했던 인물들 자신부터 개혁대상인 권문세족이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개혁주체와 개혁대상이 혼재되어 있었기 때문에 여말에 추진된 개혁들이 실패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공민왕은 이런 반성의 토대위에서 권문세족과 상관없는 한미한 신분의 신돈에게 개혁을 주도할 수 있는 칼자루를 맡긴 것이었다. 신돈의 법명은 遍照이며, 공민왕이 내린 淸閑居士라는 법호도 있고, 정사를 맡은 후에 정한 속명이 돈이다. 그의 아버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언급이 없으나 본관이 靈山이고 그 묘가 영산에 있었다는 사실을 미루어 볼 때 영산 지역의 유력한 호족으로 추정되는데,
어머니가 창녕 玉川寺의 婢였다는 母系 신분으로 인해 주위의 용납을 받지 못하고 山房에 거처했을 정도로 미천한 출신이었다. 그런데 고려시대 法制를 보면 종은 아예 출가가 불가능하므로 출가 당시 그의 신분은 천민이 아니었을 것이다. 이런 일을 미루어 보면 어머니가 중이었다는 사실도 의심이 가는 부분이다. 아무튼 젊은 시절에 산방생활의 체험으로 삶의 辛苦를 절절히 體得(체득)한 그였기에 여말 고려 백성들이 겪고 있는 어려움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의 능력을 펼 기회를 잡지 못하다가 마침내 1358년(공민왕 7)에 왕의 측근인 金元命의 소개로 공민왕을 처음 만나게 된다. 공민왕은 전날 어떤 사람이 칼을 빼들고 자신을 찌르려고 할 때 어떤 승려가 다가 와 구해 주는 꿈울 꾸었는데 다음날 마침 김원명이 신돈을 데려와 인사를 시킨것이었다.
그의 용모를 보니 바로 꿈에 본 그 승려였다. 김원명은 공민왕의 근신으로 홍건적의 침략으로 왕이 안동으로 파천할 때 호종하였는데, 공민왕의 안동 파천시에 그 주변에 살고 있던 신돈과 처음 만났을 것으로 보인다. 공민왕이 신기하게 여기며 신돈과 대화를 해보니 퍽 지혜로운 사람이라는 느낌을 받았다고 한다. 신돈은 독실하게 불교를 신봉하여 스스로 득도 하였다고 큰 소리를 쳤지만 주변 사람들이 이를 그대로 믿을 만큼 총명하여 공민왕의 신망을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신돈의 정치적 성장을 두려워하여 그를 시기하는 무리들이 "나라를 어지럽힐 자는 반드시 중놈일 것이다."라는 비난도 있었고, 심지어 鄭世雲같은 이는 요승이라 하여 죽이려 까지 하므로 공민왕이 그를 피신시키기도 하였다. 따라서 그를 배척하던 인물들이 물러난 다음에야 정치의 표면에 나설 수 있게 되었다. 1364 공민왕을 알현하여 정치 개혁의 소신을 밝히고 비로소 궁안에 들어와 일하게 된다. 이때 그는 공민왕과 더불어 이런 대화를 하고 있다.
"소승은 세상을 복되고 이롭게 할 뜻이 있습니다. 비록 권문세족들이 참언이나 방해가 있더라도 저를 믿어 주어야합니다. " 이에 공민왕은, "스승은 나를 구하고 나는 스승을 구하여 사생을 두고 맹세하오. 이것으로 남의 말에 미혹되지 않을 것을 부처님과 하늘에 증명하오.(『高麗史』 列傳 辛旽) 두 사람의 대화는 참으로 진지하였다. 이 정도만 이야기해도 그들의 개혁의지는 충분히 읽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다른 기록들은 대부분 신돈에 대해 저질스러운 비난을 퍼부었다. 신돈은 권문세가 출신도 아니고 기득권을 누리는 불교 세력도 아니었으며, 개혁의 꼬투리를 잡고 미온적으로 대처하는 신흥사대부출신도 아니었다. 공민왕은 신돈의 출신이 마음에 들었을 뿐만 아니라 현실을 바르게 보는 과단성있는 인물로 여겼다.
이 무렵에 왕으로 부터 청한거사라는 호를 받고 국왕의 師傅가 되어 국정을 자문하였는데 그의 안목이 탁월하여 왕이 따르지 않는 바가 없었으며, 그로 인하여 많은 추종자가 생기게 되었다. 1365년 5월에 崔瑩을 비롯하여 李仁復 李龜壽 등을 거세하면서 정치적 기반을 더욱 강화하였으며, 같은 해 7월에는 眞平侯에 봉해진 뒤 領都僉議使司事에 이르렀다. 이른바 '신하로서 최고의 지위'에 올라 이를 바탕으로 강력한 개혁정치가 추진되었다. 그의 개혁정치의 큰 틀과 방향은 크게 두 가지로 정리된다.
하나는 田民辨正都監을 중심으로 추진된 경제 개혁이고, 다른 하나는 권문세가를 누르고 사대부를 육성하여 새로운 개혁을 주도하자는 것이었다. 당시의 신진사대부는 오늘날 386 개혁세대로 비교되는 참신한 정치신인들이었다. 이 사실은 신돈이 구상하는 개혁의 범위와 정도가 매우 획기적이고 참신하며 백성의 여망에 부응하는 개혁이라고 평가해도 좋을 것이다.
첫째, 경제개혁을 주도한 전민변정도감은 1365년에 가뭄을 다스리기 위해 설치된 형인추정도감의 기능을 확대 개편하여 1366년에 명칭을 전민변정도감으로 바꾸고, 스스로 判事가 되어 의욕적으로 경제개혁을 추진함으로 백성들의 열화와 같은 성원을 받았다. 토지탈점 등 대토지소유의 경향에 따른 사회경제적 모순은 이미 12세기부터 시작되어 무신집권기와 원 간섭기를 거치면서 점점 누적되어 온 것으로, 공민왕대에 이르면 호강한 무리들이 공사전을 탈점하는 한편, 양인 농민층을 노예로 삼고 驛吏 官奴 백성 등의 有役者를 누락시키고 숨기는 부정을 저질러 거대한 농장을 확대시키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홍건적의 난 이후의 사회변화로 말미암아 농장은 획기적으로 크게 확대되고 있었다. 이와 같은 농장의 확대는 궁극적으로 국가의 有役人口의 감소와 재정적 결손을 초래하였다. 전민변정도감이 추구하는 최종 목표는 이와 같은 농장의 확대를 억제시키며, 호강한 무리들의 폐단을 척결하자는 목적에서 설치, 활동하게 된 것이다. 원 간섭기에는 여러 차례에 걸쳐 개혁정치가 실시되었고, 공민왕 때에도 1352년(공민왕 1)과 1356년, 그리고 1363년에 '개혁'교서가 반포되었지만 사회경제적 모순을 시정하는데는 성공하지 못하였다.
이러한 개혁들이 실패한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겠지만, 그 중에서도 이를 추진한 정치세력이 갖는 한계가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즉 이들 개혁은 사회경제적 모순의 원인을 주로 국왕 측근세력이나 부원세력의 불법행위에서 찾았고, 이들과 함께 모순의 원인을 제공하였던 권문세족이 오히려 개혁을 추진함으로써 개혁의 대상에서 제외되었던 것이다. 권문세족이 추진한 개혁이 당시의 사회경제적 모순을 시정할 것이라는 기대는 처음부터 바랄 수 없는 일이었다. 신돈에 의해 주도되었던 개혁은 이러한 권문세족을 정치적으로 배제한 가운데 이루어졌음으로 이전의 개혁정치와는 달리 실질적인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신돈은 권문세가들이 부당하게 탈점한 토지와 강압에 의하여 노비가 된 백성들을 개경은 보름 안에, 지방은 40일 안에 신고하라는 강력한 조치를 취하여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그 결과 권문세가들이 탈점했던 田民을 원래의 주인에게 돌려준 경우가 많아 "聖人이 나타났다." 라는 찬양을 받기까지 하였다.
둘째, 성균관을 중영하고, 신진사대부를 양성하여 새로운 개혁세력을 구축하려 하였다. 신돈의 개혁정치는 권문세족의 경제적 기반을 와해시키는 것이었으므로 권문세족들은 맹렬하게 반대하였다. 이에 공민왕과 신돈은 권문세족에 대한 대안으로 왕권을 뒷받침하고 개혁을 추진할 수 있는 정치세력이 필요로 하였으며, 여기서 권문세족과 정치적 입장을 달리하는 신진관료들에게 주목하게 되었다. 이러한 점에서 신돈과 신진관료 사이에 정치적인 제휴가 가능하였으며, 이를 통하여 신진관료들은 정치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였다.
먼저 1367년(공민왕 16)에는 성균관이 다시 지어졌고, 이곳을 중심으로 신진관료들이 세력을 결집할 수 있게 되었다. 다음해에 과거제도를 개혁하여 국왕의 親試가 부활되었는데, 이는 과거를 통해 문신들 사이에 권문세족을 중심으로 좌주 문생관계가 형성되는 것을 막으려 한 것이었다. 신돈 등장 이후 공민왕과 신돈, 그리고 신진사대부에 의해 추진되었던 개혁정치는 1371년(공민왕 20) 신돈이 제거되면서 중단되었다. 신돈이 제거된 것은 다음의 두 가지 때문이었다.
첫째, 개혁정치가 진행되면서 신돈이 자신의 독자적인 세력기반을 구축하려 하였고, 이것이 공민왕과 마찰을 일으키게 되었다. 본래 공민왕이 신돈을 기용한 것은 권문세족과 연결되어 있지 않을 뿐 아니라 어떠한 세력기반도 갖지 않아 공민왕 자신의 개혁의지를 충분히 반영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에서였다. 따라서 신돈의 정치적 지위는 공민왕의 강력한 후원을 받는 왕권의 대행자로서 존재할 때에만 보장될 수 있는 것이었다. 그 런데 개혁이 진행되면서 신돈이 점차 자기 세력을 확대 강화해감에 따라 공민왕의 견제를 받게 되었다. 1369년(공민왕 18)에 신돈이 5道都事審官이 되고자 하여 사심관 제도의 복구를 주장하자, 공민왕이 이를 거부하였던 것이 그 단적인 예이다.
둘째 이유로는 당시 중국에서 일어난 원 명교체에 따른 대륙정세의 변동과 그에 대한 적극적인 외교의 필요성을 들 수 있다. 1368년 명이 건국된 뒤 명과의 외교관계가 급진전되었던, 이러한 가운데 1370년에는 공민왕이 친정을 선포하였다. 이는 곧 신돈의 실각으로 이어져 다음해에 신돈이 유배되고 그를 중심으로 추진되던 개혁정치도 중단되었다. 신돈의 집권은 공민왕 때의 복잡한 정치 상황 아래에서 나타났던 특이한 현상이었다.
집권기간은 6년 정도에 불과하였지만 정치적 감각이 탁월하여 신분적 질곡에서 해방되었던 민중들에게는 '聖人'으로 추앙될 만큼 대중적 인기를 끌었던 개혁정치가였다. 특히 집권기간 중에 권문세가의 유력자들을 거세시키면서 전민변정도감을 통하여 개혁적인 시책을 전개하였으며, 특히 성균관을 중영하여 신진사대부세력이 성장할 수 있는 배경을 마련하였다는 점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하겠다. 정몽주 정도전 윤소종 등 조선의 건국과 밀접한 관계를 지니는 신진사대부 세력이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정치세력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는 사실은 공민왕의 개혁정치 전반과 관련하여 각별히 유의할 점이다.
또한 공민왕을 계승한 禑王과 그의 아들 昌王이 신돈의 자손이라 하여 禑昌非王說을 내세워 廢假立眞의 명분 아래 창왕을 내쫓고 공양왕을 추대한 정변과도 간접적인 관련을 가지게 됨으로써 조선의 건국과정을 통하여 그의 집권은 부정적인 측면에서 많은 논란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3. 禑昌非王說의 허구 『고려사』나 『조선왕조실록』에 보이는 우창비왕설은 사서의 기록과는 달리 사실 자체가 허구라는 것은 이미 널리진 사실이다. 사학계의 꾸준한 연구 성과로 중·고등학교용 국정 교과서인『국사』에는 물론, 변태섭의『韓國史通論』, 이기백의『韓國史新論』등 주요 개설서에서 辛禑, 辛昌이라는 표현 대신에 우왕, 창왕이라고 표기하고 있는 사실이 그것을 입증하고 있다.
하지만 우창비왕설의 경과나 시말, 또는 그 진위 여부에 대해서는 일체의 언급이 없기 때문에 이에 대한 구체적 이해가 필요하고, 왜곡과 윤색된 사서의 잘못을 밝혀 역사적 진실에 접근해야 한다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이에 필자는 우창비왕설의 허구를 입증하는 자료를 체계적으로 정리해보고자 한다. 첫째, 우창비왕설은 이성계파의 집권 시나리오의 하나로서 등장했다는 점이다. 우창비왕설이 처음 대두한 것은 이성계의 집권 과정에서 비롯된다. 위화도 회군으로 요동 정벌을 주도한 최영이 몰락하고 우왕도 폐위되었다.
다음 왕을 누구로 할 것이냐는 문제로 회군 주체들 간에 논란이 있었으나 조민수 측이 명유 李穡의 지원을 받아 昌王을 옹립하고 정권을 장악했다. 그러나 곧 趙浚의 상소로 전제개혁을 추진하게 되고 이 과정에서 조민수를 비롯하여 많은 구세력이 몰락하였다. 이런 정세하에서 우왕의 복위를 꾀한 사건이 발발하자 이성계파의 브레인 정도전은 이른바 "禑昌非王說"과 "廢假立眞"을 내세워 창왕마져 축출하고 공양왕을 세웠다.
즉 우왕과 창왕은 공민왕의 아들이 아니고 辛旽의 아들로서 외람하게 왕위를 도둑질했다는 것이다. 이 후 정도전은 전제와 군제 개혁으로 역성혁명의 기반을 다져 나간다. 1392년(공양왕 4) 3월 고려의 최후 보루였던 정몽주는 이성계의 낙마를 호기로 그의 정적인 정도전과 조준 등을 유배하고 이성계파에 대 반격을 가하게 된다.
당시 삼봉은 예천에서 참수 직전의 위기에 몰렸으나 정몽주가 이방원의 수하에 의해 살해됨에 따라 목숨을 건지게 된다. 정몽주의 사후, 유배에서 풀려난 정도전의 주도하에 새 왕조 개창의 시나리오가 순탄하게 추진되어 1392년 7월 17일 개성 수창궁에서 이성계가 즉위하고, 새 왕조가 탄생한다.
둘째, 『고려사』 열전 辛禑 條를 보면, 우왕의 부계는 공민왕으로 모계는 般若로 기록되어 있다. 이를 입증하는 자료를 보면, 辛禑의 아명은 牟尼奴이니 신돈의 비첩 반야의 소생이다. 공민왕이 항상 아들 없음을 걱정하던 차에 하루는 미행으로 신돈의 집에 가니 신돈이 이 아이를 가리키며, '전하께서는 이 아이를 양자로 삼아 뒤를 이으소서' 라고 했다.
(『고려사』 열전 신우) "내가 일찍이 신돈의 집에 갔을 때 그 집 여종과 내통하여 아들을 낳았으니 그 아이를 놀라게 하지말고 잘 보호하라" (同上) "신돈의 집에 아름다운 여자가 있는데 자식을 낳을 수 있다는 말을 듣고, 내가 가까이 하였더니 이 아이를 낳았다."(同上) 위의 자료 은 신돈이 공민왕에게 한 말인데, 이때 왕이 곁눈으로 보며 웃기만 하고 대답하지 않았지만 마음속으로는 이에 동의하였다는 것이다.
모니노라 부르던 신돈의 비첩 반야의 소생인 이 아이가 바로 우왕이란 이야기다. 는 그 후 신돈이 수원으로 귀양가게 되었을 때 공민왕이 근신들에게 한 말인데, 비록 신돈은 버렸지만 이 아이는 明德太后殿에 두고 키워서 왕으로 삼았다는 주장이다. 은 신돈을 처형한 후에 '공민왕이 권신 이인임에게 한 말이다' 라고 『고려사』는 적고 있다.
위의 자료를 검토해 보면 우왕이 신돈의 자식이라는 이성계 추종자들의 주장이 거짓임을 말해준다. 신돈이 처형된 뒤 공민왕은 모니노의 이름을 禑로 바꾸고 죽은 궁인 한씨 소생으로 삼았으며 나아가 한씨의 3대와 그 외조에게 벼슬을 추증했다. 조선후기의 학자 兪棨는 『麗史提綱』에서, 우가 왕이 된 후 반야가 밤중에 태후궁에 들어가, "주상을 내가 낳았는데 어찌 한씨를 어머니로 하시오" 라고 울부짖으니 태후가 반야를 옥에 가두었는데 반야가 새로 지은 中門을 가리키며, "하늘이 만약 나의 원통함을 안다면 이 문이 스스로 무너질 것이다." 라고 말했는데 얼마후 문이 스스로 무너져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했다. 『여사제강』 라는 기록을 남기고 있다.
그런데 이 사건 당시 三司右使 김속명이 "천하에 그 아비를 분간못하는 자는 가끔 있지만, 그 어미를 분간 못하는 자가 있다는 말은 내 듣지 못했다" 고 탄식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의 핵심은 우왕의 부계이지, 모계가 아니라는 점이다. 즉 우왕의 아버지가 공민왕인가 신돈인가 하는 점이지 그 어미가 반야인가 한씨인가의 문제는 아닌 것이다. 만약 우가 신돈의 자식이라면 신돈을 처형한 공민왕이 우를 후사로 삼을 이유가 없다. 국왕의 사후 후사가 없을 경우 종실중에서 후계 왕을 물색하는 것이 왕실내의 법도인데 자신이 처형한 他姓의 아들을 후사로 선택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셋째, 조선 개국 주도세력이 왕씨를 대신한 이씨 집권의 정당성을 주장하기 위해 우창비왕설을 날조한 것이었다. 이성계는 고려와 고려의 구신들을 제거하고 조선을 개국한 것이 아니라 고려 도평의사사의 추대를 받아 즉위하였고, 고려를 멸한 것이 아니라 고려를 계승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태조의 즉위 교서를 보면, "나라 이름은 그 전대로 고려라 하고, 儀章과 법제는 한결같이 고려의 고사에 따른다"고 했다. 여기에는 왕씨를 대신하여 이씨가 왕이 되어야만 하는 집권의 논리가 필요했다. 그 논리가 위화도회군으로 제거한 우왕이 공민왕의 자식이 아니라 신돈의 자식이라는 날조였다. 이성계는 趙琳을 명나라에 보내 올린 表文에도 이 말을 하고 있다. "권지고려국사 이성계는 말씀을 올립니다.
삼가 생각하옵건대, 소방에서는 공민왕이 후사가 없이 세상을 떠난 뒤에 신돈의 아들 우가 성을 속이고 왕위를 도둑질한 것이 15년이었습니다. 무진년(1388) 봄에 망녕되이 군대를 일으켜 장차 요동을 범하려 하여 신을 도통사로 삼아 군대를 거느리고 압록강까지 이르게 하였습니다. 신이 생각해 보건대, 소방이 상국의 경계를 범할 수 없으므로 여러 장수들에게 대의로써 깨우쳐 즉시 함께 군사를 돌이켰습니다. (『太祖實錄』) 이성계 일파는 신돈의 아들 우왕이 요동정벌로 명나라 영토를 침범하려 했기 때문에 이를 막기 위해 이른바 위화도회군을 단행했다는 것이다. 『고려사』는 신돈, 우왕, 창왕을 정중부, 이의민 등과 같은 반열에 놓아 반역 열전에 올려 놓았다.
이를테면 신돈과 그 아들 우가 왕위를 도둑질한 역적이고, 이성계가 이를 타도한 인물이란 뜻이다. 위화도회군으로 집권한 이성계파가 같이 회군한 조민수의 주장에 따라 우왕의 아들 창왕을 임금으로 세웠다가, 조민수를 몰아낸 후 우창비왕설을 날조한 뒤, 폐가입진을 명분삼아 허수아비 공양왕을 즉위시킨 것이었다. 이성계의 추종자들이 이토록 신돈을 폄하한 것은 역설적으로 신돈이 자기들 처럼 부패한 여말의 정치를 청산하려는 개혁정치가였기 때문이었다.
넷째, 위화도 회군 이후 우왕 축출, 창왕 추대라는 역사의 격동기에 당대 최고의 석학 한산군 李穡이 창왕 즉위를 적극적으로 지지했다는 점이다. 이성게 등의 새 집권파는 우왕을 신씨의 혈통으로 몰아 그의 뿌리를 완전히 뽑아 없에려는 공작을 벌렸지만 이색은 '신씨 조작설' 을 거부하였고, 위화도 회군에 참여했던 조민수 역시 이색의 손을 들어 주었다. 종실 중에서 적당한 인물을 가려 새 임금을 삼으려했던 이성계의 계략이 실패로 돌아간 것이었다.
창왕은 아홉 살의 나이로 1년 동안 왕 노릇을 했지만 이성계의 꼭둑각시에 지나지 않았다. 차라리 이성계의 손 안에 있는 노리개였다. 이성계를 추종하는 세력에 의해 우왕은 강릉으로, 창왕은 강화도로 유배되었다가 사람을 보내 곧 바로 살해하였다. 두 임금은 '신씨 혈통' 이라는 누명을 쓰고 죽어간 것이다. 뒤에 정인지 등이 『高麗史』를 편찬할 때 우-창왕이 임금으로 재위한 史實을 기록하면서 王紀인 世家에 포함시키지 않고 신하들의 개인 사적을 적는 열전에 넣어 연대기로 적어 놓았다. 임금을 신하로 조작하고, 그것도 부족하여 반역 열전에 넣은 것이다. 이것도 유례가 없는 일이었다.
4. 맺음말 조선 후기 실학자로 추앙받는 성호 李瀷은 뒷날 이색이 '신씨' 를 임금으로 추대하는 일에 앞장섰다 하여 국문을 받은 사실에 대해 다음과 같이 자신의 소신을 피력하였다.
내 생각에 禑王을 폐위한 것은 북벌(요동정벌) 때문이다. 그 때에 비록 우왕이 신씨라는 소문이 있었다 하더라도 모두가 사사로이 귓속말로 주고 받을 정도이지 공명정대한 이론에서 나온 것은 아니었다. 그러므로 昌을 세웠으나 모두 조용했던 것임을 역사에 의거해 증명할 수 있다. 사세가 한 번 기울어지자 구설이 더욱 번거롭게 되면서 附和雷同하여 깰 수 없는 정론으로 굳어지고, 역사가들도 여기에 따라 쓰기도 깍기도 하여 후세에 전하였다. 그래서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없게 되었다. (李瀷, {성호사설} 인사문)
위의 글에서 이익은 '신씨설'이 조작되었음을 간결하게 밝히고 있다. 같은 시대의 역사학자 安鼎福이 『東史綱目』을 편찬하면서 당시의 사건에 자신의 견해를 밝혔는데, 불사이군의 충신으로 회자되는 元天錫의 시에는 최영이 처형된 일, 우-창왕이 폐위되고 죽은일 등이 낱낱이 적혀 있다고 하였다.
나아가서 "정인지의 『高麗史』에 비하면 해와 별의 무게보다 큰 차이가 있다. 초야에 이런 훌륭한 직필이 있으니 어찌 돌에 눌린 죽순이 비껴 나오는 것이 아니겠는가" 라고 하였다. 禑昌非王說에 대해 元天錫은 이런 풍자시를 읊었다. 태조의 신령께서 하늘에 계셔 끼친 은택 오래 흘러 전해왔거니 참과 거짓 가리기 왜 늦었나 저 하늘은 밝히 살피시리라. (원천석, {耘谷詩史}) 원천석은 여말∼선초의 왕조교체기에 살았다.
그는 최영의 처형을 부당한 일로 여겼고, 우창비왕설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의 시는 우-창비왕설이 조작이라는 것을 강하게 시사하고 있다. 여말의 명신 吉再는 '우-창이 시해되었다' 는 비보를 듣고 3년 동안 상복을 입고 우왕,창왕을 참임금으로 받들었다. 공민왕대 반개혁파의 조작으로 억울한 죽음을 당한 신돈의 사연과 우창비왕설은 모두 역사 기록이 승자 중심으로 윤색된 것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준 사건이라 하겠다.
(筆者-關東大 敎授 辛虎雄)
4. [자료04] 1. 신돈은 누구인가/ 정선용 박사 본관 영산(靈山). 속성 신(辛). 자 요공(耀空), 법명 편조(遍照), 돈(旽)은 퇴속하여 고친 이름. 호 청한거사(淸閑居士). 계성현(桂城縣) 옥천사(玉川寺) 사비(寺婢)의 아들. 김원명(金元命)의 추천으로 공민왕(恭愍王)으로부터 신임을 받고 사부(師傅)로서 국정을 맡았다. 1365(공민왕 14) 진평후(眞平侯)라는 봉작까지 받아 가며 정치개혁을 단행하였는데, 그의 개혁정치는 고려 내부의 혼탁한 사회적 적폐(積弊)를 타개, 질서를 확립하고자 한 것으로, 전민변정도감(田民辨整都監)이라는 토지개혁 관청을 두어 부호들이 권세로 빼앗은 토지를 각 소유자에게 돌려주고, 노비로서 자유민이 되려는 자들을 해방시켰으며, 국가재정을 잘 관리하여 민심을 얻었다.
그러나, 그의 급진적 개혁은 상층계급의 반감을 샀고, 왕의 신임을 기화로 점차 오만해져서 방탕과 음란을 일삼았으므로 점점 배척을 당하게 되었다. 영록대부집현전대학사(榮祿大夫集賢殿大學士)가 되어 1369년(공민왕 18) 풍수지리설(風水地理說)로 왕을 유혹, 서울을 충주(忠州)로 옮길 계획을 세우고 스스로 오도도사심관(五道都事審官)이 되려다 왕의 불신을 받았다. 그러자 왕을 살해하려는 역모(逆謀)를 꾸며 권력을 되찾으려 하였으나 발각되어 수원(水原)에 유폐되었다가 1371년에 처형되었다.
신돈은 오늘날 경상남도 창녕 지역에 해당하는 영산(靈山) 출신이었다. 그의 본래 이름은 편조(遍照)였으며, 자(字)는 요공(耀空)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어떤 사람이었는지 알 수 없지만, 영산의 유력자였을 가능성도 있다. 고려에서는 인종 13년(1135)에 노비로 승려가 되지 못하게 하는 법령을 만들었다. 그런데 신돈의 어머니는 계성현(桂城縣)에 소재한 옥천사(玉川寺)의 노비였다.따라서 신돈이 승려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아버지의 신분에 의존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신씨(辛氏)는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영산 지역의 토성(土姓)이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영산 지역에 분묘를 두었던 신돈의 아버지는 이곳의 유력자였을 가능성이 있다. 이처럼 영산 지역의 유력자로 추측되는아버지와 계성현 옥천사의 노비였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신돈은 어려서부터 승려가 되었다. 그가 승려로서 일찍이 인연을 맺은 사찰은 그 어머니가 종노릇을 한 계성현의 옥천사였을 것으로 보인다. 창녕 화왕산 남쪽에 있었던 이 사찰은 신돈이 죽임을 당한 뒤 곧 폐쇄되었다. 그 뒤 다시 고쳐지어졌지만, 완성되기 직전에 다시 헐리고 말았다. 신돈의 일로 해서 다시 반대가 생겼기 때문이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옥천사를 단순히 신돈의 어머니가 종노릇 한 곳으로만 볼 수는 없다. 옥천사가 그만큼 신돈과 밀접한 관계에 있었다는 뜻이다.
일찍부터 옥천사와 인연을 맺은 신돈이 어느 계통의 승려였는지 자세히 알 수는 없다. 그런데 옥천사는 신라 화엄종의 개조(開祖)였던 의상(義湘: 625∼702)의 화엄전교(華嚴傳敎) 10찰 가운데 하나였다. 이런 점을 고려할 때, 신돈은 화엄종 계열의 승려였을 가능성이 높다. 그의 본래 이름이 편조였다는 점도 이러한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즉, 편조는 ‘무한한 빛이 널리 비친다’는 뜻을 가진 광명편조(光明遍照)를 줄인 말이다. 광명편조는 화엄종에서 주존불로 모시는 비로자나불을 일컫는 산스크리트어 ‘비로카나(Vairocana)’를 의역한 것이다. 편조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던 신돈이 화엄종 계열의 승려였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신돈이 화엄종 계열의 승려였을 가능성은 또 다른 측면에서도 살펴볼 수 있다. 먼저 신돈은 집권하고 있는 동안 8회에 걸쳐 문수회(文殊會)를 개설하였는데, 그것이 화엄법회였을 가능성이 높다. 《화엄경》에 따르면, 문수보살은 보현보살과 더불어 비로자나불의 협시보살이 되어 삼존불을 이루고 있다. 《화엄경》에서 문수보살이 그만큼 중요한 위치에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신돈이 개설한 문수회는 화엄법회였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그리고 신돈은 당시에 문수의 후신으로 칭송을 받기도 하였는데, 문수보살의 화신으로 칭송된 경우는 중국 화엄종의 제1조인 두순(杜順: 556∼640), 신라말의 화엄종 승려인 희랑(希郞)처럼 화엄종과 관련된 인물들이었다.
뿐만 아니라 신돈이 태고보우(太古普愚: 1301∼1382)를 왕사에서 축출하고 천희(千熙: 1307∼1382)를 국사로 추대한 점도 신돈이 화엄종 계열의 승려였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보우가 선종 승려였던 데 반해, 천희는 화엄종 승려였기 때문이다. 신돈은 이처럼 화엄종 계열에 가까운 승려였다. 그런데 그는 보우에 의해 사승(邪僧)으로 몰렸다. 보우가 공민왕에게 신돈에 대해 논하면서, “나라가 다스려지면 진승(眞僧)이 뜻을 얻게 되고, 나라가 위태로우면 사승(邪僧)이 때를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왕께서 잘 살피시어 신돈을 멀리하시면 종사(宗社)에 다행함을 얻을까 합니다.”라고 하였던 것이다. 신돈과 보우가 단순히 종파만 달랐다면, 보우가 신돈을 이렇게까지 부정적으로 평가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면, 신돈은 왜 보우로부터 이러한 평가를 받았을까. 이와 관련해서는 사상적으로든 정치적으로든 서로 다른 신돈과 보우의 입장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런데 보우는 공민왕의 왕사가 되어 원융부(圓融府)를 세우고 선·교 종문 사사(寺社)의 주지 임명을 마음대로 했던 인물이다. 뿐만 아니라 그는 공민왕의 친모인 명덕태후(明德太后: ?∼1380)와 같은 남양 홍씨 가문의 사람이었다. 보우가 권문세족적 기반을 가지고 있었고, 일찍부터 불교계를 장악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반면, 신돈은 어머니가 미천하였기 때문에 그 무리에 참여하지 못하고 항상 산방(山房)에 거처하였다고 한다. 신돈이 자신의 미천한 신분 때문에 그 무리들과 어울리지 못하였다는 뜻이다. 신돈이 보우와 달리 권문세족 중심의 불교계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을 가능성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따라서 보우가 신돈을 사승으로 깎아 내린 것은 신돈이 자신의 입장과 그 출신이 달랐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신돈은 이처럼 권문세족 중심의 불교 세력과 입장을 달리한 인물이었다. 그가 집권한 뒤 보우를 왕사의 자리에서 축출했던 것도 이러한 사정과 관련이 있었다. 보우가 권문세족 중심인 당시의 불교계를 대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정은 신돈에 의해 국사로 추대된 천희가 권문세족과 거리가 먼 지방 출신이었다는 점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2. 신돈의 집권과 개혁 권문세족 중심의 불교계에 불만을 가진 화엄종 계통의 승려였던 신돈이 공민왕과 결탁하여 정권을 맡은 것은 공민왕 14년이었다. 공민왕은 즉위한 이래 오래도록 개혁을 추구하면서 신돈과 같은 인물의 등장을 애타게 기다려왔다. 공민왕은 “세신대족(世臣大族)은 친당(親黨)이 뿌리를 이어 서로 감추고 있으며, 초야신진(草野新進)은 정(情)을 속이고 행(行)을 꾸며서 명예를 탐하다가 귀하게 현달하게 되면 문지(門地)가 한미함을 부끄럽게 여겨 대족과 혼인해서 모두 그 처음을 버리고 있으며, 유생(儒生)은 유약하여 강직함이 적고 또 문생(門生)·좌주(座主)·동년(同年)을 칭하고 당(黨)을 이루어 서로 의를 두터이 하면서 정(情)에 따르고 있다. 그러므로 세 부류는 모두 쓰기에 부족하다.”라고 하여, 기존의 정치집단들을 불신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세상을 떠나 홀로 서 있는 사람을 중용하여 인순(因循)의 폐단을 고치려고 하였다.
이러한 때에 공민왕은 기이한 꿈을 하나 꾸었다. 어떤 사람이 칼을 빼어 자신을 찌르려고 하는데, 승려 한 사람이 이를 구해주었던 것이다. 공민왕은 이튿날 태후에게 그 꿈을 말하고 있었다. 그런데 마침 태후의 외척인 김원명(金元命: ?∼1370)이 꿈에 본 승려의 용모와 닮은 신돈을 소개해 주었다. 공민왕이 기이하게 여겨 신돈과 더불어 담론하였는데, 그 총명하고 말 잘함 등이 자신의 뜻에 맞았다.
공민왕은 이로 말미암아 신돈을 비밀리에 자주 궁중으로 불러들여 공리(空理)를 논하였다. 그 뒤, 공민왕은 마침내 신돈이 도를 얻어 욕심도 적고 또 미천하여 친당도 없기 때문에 큰일을 맡길 만하다고 여겼다. 그리하여 “스승은 나를 구하고, 나는 스승을 구하리라.”라고 맹세한 뒤, 공민왕은 신돈에게 국정을 맡겼던 것이다.
여기에서 공민왕이 신돈에게 국정을 맡긴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로 그가 권문세족을 비롯한 기존의 정치세력으로부터 독립되어 있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신돈이 공민왕의 개혁구상을 실현할 만한 능력을 갖춘 데다가 권문세족을 비롯하여 개혁의 대상이 되는 기득권 세력과 거리를 두고 있었던 것이다. 신돈 집권기에 정비된 많은 제도 개혁은 실제로 ‘이세독립지인(離世獨立之人)’으로서의 그의 면모를 잘 보여주고 있다. 권문세족 중심의 불교계에 대한 그의 불만이 집권 이후의 개혁에 그대로 반영되어 나타났던 것이다.
신돈의 개혁은 크게 두 가지 방향에서 추진되었다. 그 하나는 인적 쇄신을 통한 기득권 세력의 견제와 개혁 세력의 양성이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이를 바탕으로 민생의 안정을 도모하는 것이었다. 신돈이 “간악한 무리를 제거하고 현량을 등용하여 삼한(三韓)의 백성이 조금은 편안함을 얻게 한 뒤에 장차 산림(山林)으로 돌아가고자 생각했습니다.”라고 말한 것은 이러한 사정을 반영한 것이었다.
먼저 기득권 세력을 견제하기 위한 인적 쇄신은 그가 집권한 지 30일 만에 친훈(親勳)과 명망 있는 자를 파면시켜 내쫓으면서 시작되었다. 이 때 재상(宰相)과 대간(臺諫)이 모두 그의 입에서 나왔다는 기록은 이러한 사정을 말해주고 있다. 신돈은 관리를 승진시킬 때 근무연한을 고려하는 순자격식(循資格式)을 실시하기도 하였는데, 이것은 권세가의 자제들이 남보다 빨리 승진하는 것을 막으려는 것이었다고 평가된다. 그리고 신돈은 현량(賢良)의 등용을 강조하면서 개혁 세력을 양성하고자 하였다. 신돈이 전선(銓選)을 하면서 현량을 천거한다고 스스로 칭하였으나 제목(除目)이 발표되고 보니 천거된 사람들이 모두 평소에 그가 마음에 둔 사람이었다는 기록이 이러한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여기에 보이는 현량은 유교적 소양을 갖춘 인재들이었다. 신돈은 이들을 양성하기 위해 성균관을 중수하려고 하였는데, “문선왕(文宣王: 孔子)은 천하 만세의 스승인데 어찌 적은 비용을 아끼어 전대(前代)의 규모에 이지러지게 하리요.”라고 하였다. 현량 양성에 대한 그의 의지를 읽을 수 있는 부분이다. 그러면서도 그는 과거제의 개혁을 통해 권문세가뿐만 아니라 유생들까지 견제하였다. 신돈은 공민왕 17년에 시험관인 좌주를 없애고 친시(親試)로 과거시험을 치렀고, 이듬해에 원나라의 향시(鄕試)·회시(會試)·전시(殿試)의 제도를 도입하여 좌주의 실권을 회시에서만 갖게 하였다. 신돈은 이를 통해 좌주·문생·동년 등을 칭하면서 당을 이루는 유생에 대해 견제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신진 세력이 과거를 통해 등용될 수 있는 길을 넓히고자 했던 것이다.
신돈이 추구했던 개혁의 또 다른 방향은 민생안정의 도모였는데, 이와 관련해서는 전민변정도감(田民辨正都監)의 설치가 주목된다. 원종(元宗) 10년과 충렬왕(忠烈王) 14년 및 27년, 그리고 공민왕 원년에 각각 설치된 바 있는 이 기구는 토지의 소유주를 밝히고 사람의 신분을 바로잡으려는 것이었다. 신돈은 이 기구의 판사(判事)가 되어, “호강(豪强)의 무리들이 종묘·학교·창고·사사·녹전·군수전 및 국인이 세업(世業)으로 삼는 전민을 거의 다 탈점하더니, 전주(田主)에게 돌려줄 것을 판결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대로 가지고 있다. 이들이 양민을 노비로 삼아 주현·역리·관노와 백성의 역(役)에서 도피한 자들을 모두 다 농장(農莊)에 묶어 두니, 백성들은 병들고 나라는 여위게 되었다.
이제 전민변정도감을 두어 이를 추정케 하여 서울은 15일, 각 도는 40일을 기한으로 한다. 그 잘못을 알고 스스로 고치는 자는 묻지 않을 것이나, 기한이 지나 일이 발각되는 자는 규찰하여 다스릴 것이다. 다만 망령되이 고소하는 자는 또한 죄줄 것이다.”라고 하였다. 당시에 넓은 토지를 차지하여 농장을 경영하고 있던 권세가들이 힘없는 양민들의 토지를 강제로 빼앗고 국가의 땅을 몰래 차지하고 나아가 일반 양민들을 강제로 노비로 삼는 경우가 많았는데, 신돈은 권세가들이 이처럼 불법적으로 빼앗은 토지와 노비를 조사하여 본래대로 되돌려 놓고자 했던 것이다.
신돈은 이를 위해 전민변정도감의 판사를 맡아 이틀에 한 번씩 업무를 직접 처리하였다. 그리하여 많은 권세가들이 빼앗았던 전민들을 그 주인에게 돌려줄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이 때문에 중외(中外)가 크게 기뻐하였고, 당시에 노비에서 해방된 사람들은 심지어 성인이 나왔다고 신돈을 떠받들었다고 한다.
신돈은 이처럼 기득권 세력을 견제하기 위한 인적 쇄신과 민생의 안정에 역점을 두고 개혁을 추진하였다. 이러한 신돈의 개혁 조치는 권문세족 중심의 불교 세력과 입장을 달리하며 성장했던 그가 선택한 당연한 길었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이러한 신돈의 등장은 즉위 초부터 시도했던 개혁의 성과에 만족하지 못했던 공민왕에게 기대감을 심어 주었다. 공민왕은 신돈의 원찰(願刹)인 낙산사(洛山寺)에 행차하여 “불초한 내가 나라에 임한 지 15년 동안 홍수와 가뭄의 재해가 끊이지 않았다. 그런데 금년에 풍작이 들었으니, 이는 실로 첨의(僉議)의 선치(善治)로 말미암은 것이리라.”라고 말하였다. 공민왕이 신돈에게 그런 기대를 표현했던 것이다. 그리고 일반민의 경우는 신돈을 일컬어 ‘신승(神僧)’이라 하거나 ‘성인(聖人)이 세상에 났다’고 하였으며, 혹은 ‘문수의 후신’이라고 하기도 하였다. 그만큼 신돈이 추진한 개혁을 환영하였던 것이다.
3. 기득권 세력의 반발에 무너진 개혁의 꿈 권문세족을 비롯한 기득권 세력과 입장을 달리한 신돈의 개혁은 국왕과 일반민의 폭넓은 지지를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권문세족을 비롯한 기득권 세력의 경우는 사정이 달랐다. 신돈에 의해 개혁의 대상으로 몰린 이들은 그에 대한 불만을 드러내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불만은 불교계 내부에서도 나타났다. 먼저 권문세족적 기반을 가진 보우는 공민왕에게 신돈을 사승(邪僧)으로 깎아 내리면서 멀리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리고 윤소종(尹紹宗: 1345∼1393) 집안의 승려인 부일(夫日)은 “신돈의 탐욕스럽고 포악함이 개·돼지만도 못하여 반드시 나라를 그르칠 것인데, 선현(禪顯)이 그에게 붙어서 따르고 있으니 차마 보지 못하겠다.”라고 하면서, 도망하여 산으로 들어갔다.
사실, 신돈에 대한 기득권 세력의 불만은 그가 공민왕에 의해 정치적으로 주목받을 때부터 드러내고 있었다. 이제현(李齊賢: 1287∼1367)은 일찍이 “신돈은 골법(骨法)이 옛 흉인(凶人)과 같으니 가까이 하지 마옵소서.”라고 공민왕에게 말한 바 있었다. 이제현은 공민왕이 즉위한 이래 추구해온 개혁을 담당한 인물이었다. 그렇지만 그는 공민왕이 말한 ‘유약하여 강직함이 적고 또 문생·좌주·동년을 칭하고 당을 이루어 서로 의를 두터이 하면서 정에 따르는’ 유생의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신돈이 그를 지목하여 “문생과 그 문하의 문생들이 나라의 도둑이 되었다.”라고 할 정도였다. 이러한 이제현이 신돈을 부정적으로 평가한 것은 신돈의 집권 전부터였다. 신돈이 이 점을 마음에 품고 있었지만 해를 가하지 못하였다는 점에서 볼 때 그렇다.
또한 이승경(李承慶: ?∼1360)은 신돈을 가리켜 “나라를 어지럽힐 자는 반드시 이 중이리라.”라고 하였다. 그런데 이승경은 원나라에서 벼슬하다가 공민왕 6년에 그 어머니 상을 당하여 고려에 돌아온 인물이다.19) 그리고 문하시랑평장사와 홍건적을 평정하기 위한 도원수가 되기도 했던 그는 공민왕 9년 3월에 충근경절협모위원공신(忠勤勁節?謀威遠功臣)이 되었다가 윤5월 계유(癸酉)에 죽었다.20) 따라서 이승경이 신돈을 접한 것은 공민왕 9년 윤5월 이전이었다. 신돈이 김원명의 소개로 공민왕을 만난 것이 공민왕 9년 이전이었다는 뜻이다.21)
신돈은 이처럼 집권하기 전부터 기득권 세력의 견제를 받고 있었다. 심지어 죽음의 위협을 느끼기도 하였다. 정세운(鄭世雲: ?∼1363)은 신돈을 요승이라 하여 죽이려고까지 하였다. 그리하여 신돈은 왕의 도움을 받아 비밀리에 피해 다녔다. 그는 이 때문에 다시 머리를 깎고 두타(頭陀)가 되었다. 그가 다시 궐내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은 이승경과 정세운이 죽은 뒤였다. 그는 이때부터 왕의 사부(師傅)를 칭하며 국사(國事)에 자문하고, 권세를 마음대로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정세운은 공민왕을 따라 원나라에 다녀왔다가 공신에 책록되었던 인물이다.22) 기철(奇徹: ?∼1356)을 주살한 공으로 지문하성사에 오르고, 다시 20만 대군의 총병관(摠兵官)이 되어 홍건적을 물리치고 개경을 탈환한 공을 세워 호종공신(扈從功臣)에 오른 그는 공민왕 11년 3월에 죽었다. 신돈이 왕의 사부가 된 것은 정세운이 죽은 공민왕 11년 3월 이후였다는 뜻이다.
신돈의 정치적 등장은 이처럼 기득권 세력의 반발을 일으켰다. 그리고 기득권 세력의 이러한 반발은 그가 집권한 뒤에도 계속되었다. 특히 공민왕 16년 10월에는 오인택(吳仁澤)·경천흥(慶千興)·목인길(睦仁吉)·김원명(金元命)·안우경(安遇慶)·조희고(趙希古)·이희비(李希泌)·한휘(韓暉)·조린(趙璘)·윤승순(尹承順) 등의 모반 사건이 있었으며, 17년 10월에도 김정(金精)·김흥조(金興祖)·조사공(趙思恭)·유사의(兪思義)·김제안(金齊顔)·김구보(金龜寶)·이원림(李元林)·윤희종(尹希宗) 등이 신돈을 죽이려고 계획하다가 적발되기도 하였다.
그런데 기득권 세력의 이러한 반발에는 공민왕의 모후인 명덕태후가 개입되어 있었다.25) 앞에서 본 것처럼 신돈은 명덕태후의 외척인 김원명의 소개로 공민왕과 처음 만날 수 있었다. 그러나 신돈과 태후는 서로를 꺼려하고 있었다. 태후는 공민왕 15년 8월에 있었던 연회석에서 “미망인이 어찌 감히 외부의 중과 자리를 같이 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면서, 신돈에게 자리를 마련해주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18년 5월에는 “어찌 신하에게 정사(政事)를 맡겨서 공(功)이 있고 죄(罪) 없는 사람을 많이 죽이고 크게 토목공사를 일으켜 화기(和氣)를 손상케 하는 것입니까?”라고 하거나 “왕은 나이가 어리지도 않는데 어찌 나라의 권력(國柄)을 다른 사람의 손에 맡기고 있습니까?”라고 하면서, 태후는 신돈에게 정권을 맡긴 공민왕을 질책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신돈은 공경(公卿)과 구신(舊臣)으로 표현된 기득권 세력들을 쫓아낸 뒤 오직 태후만을 꺼렸다고 한다. 특히 15년 8월의 연회석에서 수모를 당한 뒤, 그는 태후에게 깊이 감정을 품어 여러모로 해치려고 하기도 하였다.
명덕태후가 이처럼 신돈과 적대관계에 있었던 것은 그 자신이 기득권 세력을 대표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태후가 신돈에 의해 제거된 이들을 옹호하여 공이 있고 죄 없는 사람이라고 말한 것은 이러한 사정을 반영해주고 있다. 그리고 태후의 조카사위였던 경천흥(?∼1380)과 외척이었던 김원명 등이 16년 10월에 오인택 등과 함께 신돈을 제거하려던 모의에 가담한 것도 이러한 사정을 말해주고 있다. 뿐만 아니라 15년 3월에 상소를 올려 신돈을 공격하다 쫓겨난 정추(鄭樞)와 이존오(李存吾)도 경천흥과 친척관계에 있었던 인물이다.28) 신돈과 대립했던 사람들이 명덕태후와 직·간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었던 것이다. 특히 김원명은 신돈을 공민왕에게 직접 소개했던 인물이다. 그리고 신돈이 집권한 뒤, 그는 삼사좌사·응양군상호군(三司左使鷹揚軍上護軍)이 되어 8위 42도부병을 맡기도 하였다. 이러한 김원명이 태도를 바꾸어 신돈을 제거하려는 모의에 가담한 사실도 그와 태후와의 관계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처럼 기득권 세력은 왕의 모후인 명덕태후를 중심으로 해서 신돈에 대해 반발하고 있었다. 이러한 사정은 누구보다도 공민왕이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공민왕은 “모후(母后)께서는 어찌 자식의 허물 드러내기를 이와 같이 하나이까? 사람을 많이 죽인 것은 신(臣)의 죄(罪)가 아니라 다만 난신(亂臣)을 금하는 것뿐입니다.”라고 하면서, 신돈을 보호해 주었다. 그리하여 공민왕은 신돈이 제거되기 3개월 전까지 명덕태후와 접촉을 끊기까지 하였다.29)
신돈은 이처럼 왕의 모후인 명덕태후를 중심으로 한 기득권 세력의 반발에 직면해 있었다. 그는 공민왕의 보호로 다행히 두 차례의 모반 사건을 피할 수는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기득권 세력의 집요한 반발을 억누른 것은 아니었다. 신돈으로서는 당연히 이들의 반발을 억누를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였을 것이다. 이 과정에서 등장한 방안 가운데 하나가 5도도사심관(五道都事審官)의 부활이었다. 신돈은 스스로 5도도사심관이 되어 각 지방을 직접 통제하려고 하였다. 신돈은 이를 통해 기득권 세력의 반발을 견제하려고 한 것이다. 공민왕이 5도도사심관제도의 회복을 청하는 상서(上書)를 불사르면서 거절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신돈이 각 도·주·현의 사심주목(事審奏目)을 가지고 제도의 회복을 다시 청한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그러나 공민왕은 신돈이 제기한 5도도사심관의 부활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사심관 제도를 파한 충숙왕(忠肅王: 1313∼1339)의 뜻을 내세워 거절하였던 것이다. 그렇지만 공민왕이 이를 거절한 실제 이유는 ‘각 주의 사심관 만큼 큰 도둑은 없다’는 그의 사심관에 대한 인식 때문이었다. 권문세족의 세력화에 불만을 가지고 개혁을 추구해온 공민왕이 신돈의 세력화 역시 막으려고 했던 것이다. 사실, 공민왕은 조일신(趙日新: ?∼1352)·기철(奇轍: ?∼1356)·최유(崔濡: ?∼1364)·김용(金鏞: ?∼1363) 등 친원파 세력과 대립하면서 권문세족 등의 세력화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공민왕이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세신대족·초야신진·유생 등 기존의 정치집단을 불신하고, 세상을 떠나 홀로 서 있는 신돈을 중용한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공민왕은 자신의 심복에 가까운 대신(大臣)이라도 그 권세가 커지면 제거하고 말았다.30) 공민왕이 5도도사심관의 부활을 거절한 것은 신돈의 세력화에 의혹을 제기한 것이었다고 하겠다. 기현(奇顯)·최사원(崔思遠) 등이 복심이 되고 이춘부(李春富)·김란(金蘭) 등이 우익이 되어 신돈의 당파가 조정에 가득 차게 되자 왕도 스스로 불안해 하였다는 것은 이러한 사정을 보여주고 있다. 바로 이점이 공민왕과 신돈의 협력관계가 갖는 한계였고, 신돈 정권이 갖는 한계였다.
이처럼 공민왕과 신돈은 기득권 세력의 저항에 직면하여 이에 대응하는 정치세력을 키우는 것과 관련하여 서로 입장을 달리하였다. 신돈이 정치세력을 키우는 것에 대해 공민왕이 의혹을 제기한 것이었다. 그리고 양자의 이러한 입장 차이는 머지않아 기득권 세력의 공격에 노출되었다. 김원명의 동생이자 태후의 외척인 김속명이31) 당시 선부의랑(選部議郞)을 지낸 이인(李靭)에 의해 작성되었다는 투고를 가지고 공민왕에게 신돈의 모반을 거론한 것이다. 공민왕은 이를 계기로 마침내 신돈과 그 추종세력을 일거에 제거하였다.32) 그리하여 신돈은 수원에 유배되었다가 곧바로 죽임을 당하였고, 그 추종세력들도 대부분 죽거나 유배되었다. 기득권 세력의 폐해를 바로잡으려던 신돈이 좌절을 겪은 것이다. 이때가 공민왕 20년 7월의 일이었다.
4. 어떻게 평가되어야 할 것인가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신돈은 권문세족 중심의 불교계에 불만을 가진 화엄종 계통의 승려였다. 신돈이 집권한 뒤 추구한 개혁에는 그의 이러한 입장이 반영되어 나타났다. 기득권 세력에 대한 견제와 민생의 안정을 꾀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일반 민들은 성인이니 신승이니 혹은 문수의 후신이니 하며 그를 추종하였다. 그러나 신돈에 의해 개혁의 대상으로 몰린 기득권 세력은 사승이니 요승이니 하면서 그를 깎아 내리고 공격하였다.
그런데 신돈은 모반죄로 처형당하였다. 그리고 그에 의해 개혁의 대상으로 몰렸던 세신대족·초야신진·유생 등의 기득권 세력은 다시 권력에 접근할 수 있었다. 신돈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가 이들에 의해 덧칠해졌을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특히 신돈을 깎아 내림으로써 정치적 이득을 얻을 수 있었던 이들에 의해 그것이 확대·재생산되었다. 공민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우왕(禑王: 1374∼1388)이 신돈의 아들이었다는 주장만 해도 그렇다.
《고려사》에서는 우왕과 그 아들인 창왕(1388∼1389)의 기록을 〈열전〉 반역조(條)로 분류하고 있다. 두 왕이 신돈의 자손으로서 왕위를 도둑질하였기 때문에, 다른 왕들의 기록과 같이 〈세가〉에 모아둘 수 없다는 것이었다. 《고려사》의 기록에 따르면, 우왕이 신돈의 아들이었을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우왕의 출생이 그와 전혀 무관한 것만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공민왕이 신돈을 제거하면서 이전까지 세상에 공개되지 않았던 우를 자신의 아들이라고 밝히고 신돈의 집에서 데려왔던 것이다. 그렇지만 공민왕이 당시 일곱 살이었던 우를 강녕부원대군(江寧府院大君)에 책봉할 때에 어느 누구도 우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았다. 우가 왕위에 올랐을 때에도 그를 공민왕의 아들이 아니라는 주장은 제기되지 않았다.
심지어는 우왕이 이성계의 위화도회군과 함께 폐위될 때에도 그의 정통성이 부정되지는 않았다. 우왕이 신돈의 아들이었다는 주장은 창왕 1년(1389) 11월에 우왕이 이성계를 죽이고 복위를 꾀하려다가 발각되었을 때 비로소 제기되었다. 이성계 일파가 공양왕(1389∼1392)을 즉위시키면서 우왕과 창왕을 신돈의 아들이라고 주장하였던 것이다.33) 다시 말해서 우왕과 창왕이 신돈의 아들이었다는 주장은 이성계 일파의 정치적 필요에 따라 조작된 것일 수도 있다는 뜻이다. 이성계는 공양왕도 쫓아내고 결국 고려까지 멸망시키지 않았던가! 그리고 《고려사》가 이성계를 창업군주로 하는 조선시대에 그 신료들에 의해 쓰여지지 않았던가!
백보를 양보하여 신돈에 대한 기록을 그대로 받아들인다고 하더라도, 그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는 주로 그의 개인적 행태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승려였던 그가 끊임없이 성 추문을 일으키고 있었고, 아들까지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마저도 유교에서 치국의 도를 구하는 고려에서 그가 도덕적 결백이 요구되어지는 승려였기 때문에 지워진 부담이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이러한 개인적 행태 때문에 민생의 안정을 위해 그가 추구한 개혁까지 부정적으로 이해해서도 안 될 것이다. 조선 건국의 주도세력들마저도 신돈이 추구했던 개혁에서 그 개혁의 방향을 찾았다는 점을 고려할 때 특히 그렇다.
** 글/ 정선용 ** 1. 전남대학교 사학과 졸업 2. 서강대학교 대학원 석사과정 수료 3. 서강대학교 대학원 박사과정 졸업 4. 논문으로 <궁예의 세력 형성과정과 도읍선정>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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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귀한자료 잘 읽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