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靜軒 趙貞喆의 유배 한시 연구
홍랑과의 사랑을 중심으로
朴東昱(漢陽大學部大學 助敎授)
<要約>
趙貞喆(1751∼1831)의 문집인 '靜軒瀛海處坎錄'은 제주도의 풍물과 풍속을 담은 소중한 기록이며, 무엇보다도 유배인의 심정이 편편마다 담긴 유배 문학의 백미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조선 시대 최장기 유배인이었다. 조정철은 제주도에서 무려 27년을 謫居하였으며, 총 29년 동안을 유배지에서 떠돌았다. 27살의 젊은 나이에 고도(孤島)에 들어와서 머리가 성성할 때 섬을 떠났다. 그리고 그는 환갑의 나이인 1811년에 제주목사로 일 년 동안 부임하면서 제주로 돌아왔다. 여기에는 당파를 달리한 인물들의 처절한 복수와 증오가 얼마나 집요했는지가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또, 그러한 처절한 복수극을 목숨을 걸고 막아낸 여인과의 사랑도 있었다. 이러한 사건을 중심으로 제주도라는 공간에서 한 유배인이 겪었던 곤욕과 사랑에 대해서 알아보았다.
유배 문학에 대한 선행 연구가 많이 이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조정철에 대한 구체적인 연구 성과는 그리 많지 않다. 그의 시문은 유배 문학의 백미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유배지에 머물렀던 세월도 누구 못지않게 길었지만, 그가 남긴 시문은 유배인의 고통과 상심이 어떤 이보다 더욱 핍진하게 그려져 있다. 뿐만 아니라 그가 남긴 기록에는 제주의 풍광과 풍속이 매우 상세히 기술되어 있어 앞으로 제주사 연구에서 매우 중요한 자료로 인식될 필요가 있다.
이러한 그의 문학적 성과를 실제 사건의 추이에 맞추어 살펴보았다. 본 논문에서 얻은 성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목사, 현감이 유배인을 다루는 방식의 실제적인 모습을 엿볼 수 있었다. 둘째, 유배인의 실제적인 삶이 매우 소상하게 그려져 있다. 셋째 유배인의 심리 상태가 섬세하게 담겨 있다. 넷째, 유배지에서 만난 여인과의 사랑이 그려져 있다. 신분을 뛰어넘은 아름다운 사랑이어서 더 애틋하다. 정말로 아름다운 사랑이란 격정의 사랑이 아닌, 의리와 같은 사랑이다. 자신의 몸을 희생하면서 사랑하는 이를 살려 내는 깊은 사랑이나, 그것을 잊지 않고 수십 년 후에 돌아와서 무덤에 빗돌을 세워 주는 사랑이나 아름답기는 마찬가지다.
1. 서 론
지금 사람들에게 제주도는 유채꽃과 신혼여행이 떠오르는 낭만의 공간이다. 그러나 조선시대 제주도는 이러한 낭만적인 생각과는 거리가 먼 격절(隔絶)의 장소였다. 유배인의 몸과 정신은 그들이 살던 현실과 철저하게 분리당하면서 꿈과 희망까지 함께 유배지에 가둬 두어야 했다. 무엇보다도 유배인에게 가혹한 현실은 유배 기한이 정해져 있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것이 며칠이 될지 십 수 년이 될지는 오로지 임금에게 달려 있었다. 그들의 시에 연군(戀君)의 정조(情調)가 집요할 정도로 등장하는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상황이 절박할수록 그들은 더 애타게 임금을 찾고 충성을 다짐했다.
조정철(趙貞喆, 1751∼1831)은 자가 성경(成卿)·태성(台城)이고, 호는 정헌(靜軒)·대릉(大陵)이다. 그는 문학사에서 그리 알려진 인물이 아니다.1) 그러나 그의 문집인 '정헌영해처감록(靜軒瀛海處坎錄)'은 제주도의 풍물과 풍속을 담은 소중한 기록이며, 무엇보다도 유배인의 심정이 편편마다 담긴 유배 문학의 백미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아쉬운 사실은 이 문집이 1788년까지만 기록되어 있다는 점이다. 온전한 생애 전체의 기록이 문집에 담겨져 있었다면 더 풍성하고 다양한 내용이 실려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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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조정철에 대한 최초의 연구는 양순필 교수의 '조선조 유배문학 연구'(건국대 박사학위 논문, 1982)에 의해 이루어졌다. 제주도 유배인에 대해 전면적으로 다룬 최초의 연구라는데 큰 의미가 있다. 여기에서 부분적으로 조정철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소재영 교수의 '조선조 문학의 탐구'(아세아 문화사, 1997)에 「정헌 조정철과 홍랑전」이 실려 있다. 문중에서 나온 자료집인 조원환의 '양주조씨사료선집'(보경문화사, 1994)도 매우 많은 자료들을 충실히 정리해 놓고 있다. 최근에는 김익수에 의해 '정헌영해처감록'이란 제목으로 제주문화원(2006)에서 완역 출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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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조선 시대 최장기 유배인이었다. 조정철은 제주도에서 무려 27년을 적거(謫居)하였으며, 총 29년 동안을 유배지에서 떠돌았다. 2) 27살의 젊은 나이에 고도(孤島)에 들어와서 머리가 성성할 때 섬을 떠났다. 그리고 그는 환갑의 나이인 1811년에 제주목사로 일 년 동안 부임하면서 다시는 떠올리기 싫을 제주로 돌아왔다. 여기에는 한 여자와의 사랑이야기가 숨겨져 있다. 슬프고 고단한 삶의 언저리를 붙들어 주다가 자신을 구하고 죽어간 여자에 대한 순애보가 담겨져 있다.
註2)
1. 제주도(濟州道) 제주목(濟州牧) 1777년 9월11일∼1782년 2월
2. 제주도(濟州道) 정의현(旌義縣) 1782년∼1790년 9월
3. 제주도(濟州道) 추자도(楸子島) 1790년∼1803년 2월
4. 전라도(全羅道) 나주목 광양 1803년∼1805년 3월
5. 전라도(全羅道) 구례 1805년∼1807년 5월
6. 황해도(黃海道) 토산현(兎山縣) 1807년∼1807년 7월
2. 사건의 발단과 홍랑의 죽음
조정철은 본관이 양주(楊州)이다. 그의 가문은 노소론(老少論)의 격한 대립으로 몇 대가 부침(浮沈)을 거듭하면서 당쟁(黨爭)이라는 격랑(激浪)을 빠짐없이 겪었다. 그 시작은 노론 사대신의 한 명인 조태채(趙泰采, 1660∼1722)로부터 시작된다. 경종을 보좌하려는 소론(少論)과 연잉군(延礽君, 후에 正祖)을 추대하려는 노론(老論)의 격돌로 신임사화(辛壬士禍)가 발생했을 때 목호룡(睦虎龍)의 고변으로 조태채는 진도(珍島)에 귀양 간 뒤 사사(賜死)되었다.
이 사건으로 인해 그의 가문은 막대한 타격을 입는다. 조태채의 맏아들인 조정빈(趙鼎彬, ?∼?)은 1723년 1월 제주도(濟州道) 정의현(旌義縣)에 유배되었고, 둘째 아들인 조관빈(趙觀彬, 1691∼1757)은 1723년 흥양현(興陽縣)에 귀양 갔다가 1725년 풀려 나와 홍문관 제학(弘文館提學)에 기용되었으나, 1731년 소론의 영수 이광좌(李光佐)를 탄핵하여 결국 대정현(大靜縣)에 유배되었다.
누대(累代)의 비운(悲運)은 조정철에게도 어김없이 대물림 되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앞선 인물들보다 훨씬 심한 고초를 당하였다. 이른바 정조(正祖) 시해 사건에 연루되어 제주도에 유배당하니, 몇 대가 제주도에 유배당하는 지난(至難)한 체험을 한 셈이다.
조정철의 운명을 완전히 뒤바꿔 버린 정조 시해 사건에 대해서 간략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홍계희(洪啓禧)의 손자인 홍상범(洪相範)이 전흥문(田興文)과 강용휘(姜龍輝)를 포섭하여 정조를 시해하려다 실패한 사건이다.3) 이 사건의 후폭풍은 일파만파 확대되면서 먼저 조정철의 장인인 홍지해(洪趾海)를 비롯한 처갓집이 심각한 화를 입었다. 그리고 1777년 8월 반역 사건에 연루된 홍상길(洪相吉)의 공초에서 그의 형인 홍상범(洪相範)4)의 여종인 감정(甘丁)이 조정철의 집에 드나들었다고 진술하여서5), 조정철 본인은 물론이거니와 그의 형인 조원철을 비롯한 일족이 잡혀갔다. 이 사건에 연루되어 조정철도 사약을 받을 수 있었지만, 증조부인 조태채의 공적을 감안하여 제주도로 유배되는 선에서 일단락되었다.
註3) 이 사건의 전말은 속명의록(續明義錄)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이 책은 최근에 민족 문화추진회에서 번역이 이루어졌다. 또, 오갑균, 조선후기당쟁연구(삼영사, 1999년), 240∼247p에 사건의 전말이 자세히 소개되어 있다.
註4) 홍상범(洪相範, ?∼1777): 조선 후기의 모반자. 본관은 남양(南陽). 할아버지는 판중추 부사 계희(啓禧)이며, 아버지는 관찰사 술해(述海)이다. 필해는 장형을 맞아 죽고, 술 해·지해·찬해 등과 친척, 연루자 모두 주복(誅伏)되었고, 할아버지 계희도 관작을 추탈 당하였다.
註5) 여기에 대한 기록은 조선왕조실록 1777년 8월 11일에 자세하게 기술되어 있다.
1777년 제주도로 유배되면서 29년 유배의 서곡은 시작된다. 입도(入島)하여 다른 풍속과 기후에 적지 않은 고통을 겪었을 뿐 아니라, 무엇보다 견디기 힘든 것은 가족들과의 생이별과 지인들과의 격절(隔絶)의 체험이었다. 그러한 그의 심회는 시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원(寃), 비(悲), 탄(歎), 한(恨), 수(愁), 우(憂) 등이 빈번히 등장하는 시제(詩題)만 보아도 그의 고단한 삶이 여과없이 투영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어려운 시기에 또 비보(悲報)가 날아들었다. 조정철이 제주도에 도배(到配)된 것이 1777년 9월 11일이었고, 그의 아내가 자결한 것은6) 동년 9월 27일이었다. 그는 아내의 죽음에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고 아내에 대한 그리움으로 여러 편의 시를 남기기도 했다.7) 아마도 아내는 친정 식구들이 정조 시해 사건으로 인해 도륙되고, 시댁에게까지 일이 일파만파로 퍼진 것에 대해 죄의식을 느꼈을 것이다. 게다가 자신이 여종인 감정(甘丁)과 접촉한 사실이 빌미를 제공하여 사건의 여파가 남편인 조정철에게 까지 확대된 것 또한 자결을 결심한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
註6) 죽은 아내는 남양 홍씨 지해의 딸(1749∼1777)이다.
註7) 「七日夜 孤坐感懷 遂賦一絶 以寓悼亡之情」, 「悼亡」, 「九月二十七日卽亡室忌日也 敬次悔軒大靜謫中 兪夫人初忌悼亡詩韻書懷」 등을 남겼다.
유배의 땅에서 또 다시 절망적인 상황을 맞이한 조정철은 홍랑(洪娘, 洪允愛)과의 만남을 통해 위안을 얻었다.8) 홍랑이 불의의 사건으로 죽기 전까지의 기록은 조정철의 시집에 남아 있지는 않지만 절해고도에서 힘겨운 시간을 의지할 수 있었던 인물임에는 틀림없다. 그녀와 정식으로 혼인을 맺지는 않았지만 둘 사이에서 딸(1781년 2월 30일∼1863년 11월 24일)이 태어나기도 했다. 그러나 그들의 사랑은 오래가지는 못했다.
註8) 이렇게 유배지에 꽃피운 사랑이 적지 않았다. 그들은 신분을 뛰어넘어 사랑을 나누었으며, 그런 사랑을 글로 남기기도 했다. 김려(金鑢 1766~1821)가 32세 때 함경도 부령에 유배되었다가 기생 연희와 만나 사랑을 나누었고, 이학규(李學逵, 1770~1835)는 유배지에서 진양(晉陽) 강씨(姜氏)를 아내로 맞아 5년을 함께 살았으며,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이 다산초당에 살았던 10여 년 동안 지극정성으로 수발한 홍임이 모친이 있었다.
김시구(金蓍耉, 1724~1795)9)가 1781년 3월 제주목사로 부임하고 동년 7월 파직될 때까지 조정철을 위해(危害)하기 위한 공작은 쉼 없이 시도되었다. 왜 그가 부임할 당시부터 작정을 하고 조정철을 해하려 했는지는 구체적으로 밝힐 수 없었지만, 조정철 가문과의 누대에 걸친 원한에서 비롯된 것임이 추론될 따름이다. 10)
註9) 김시구(金蓍耉, 1724~1795):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경주. 자는 몽휴(夢休). 1754년(영조 30)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예문관검열이 되고, 그해 보안 도찰방(保安道察訪)으로 나갔다가 곧 지평(持平)으로 승진하였다. 1758년 경양 도찰방(景陽道察訪)으로 좌천되고, 1762년 이후 장령(掌令) ·돈령부동지사(敦 寧府同知事) ·도총부부총관(都摠府副摠官) 등을 역임하였다. 1767년 전사관(典 祀官)이 되어 관북(關北)에 파견되었으며, 1772년 승지를 지낸 뒤 주로 외직으 로 나가, 1781년 제주목사로 있을 때 전라도관찰사 박우원(朴祐源)의 밀계로 파직되었다. 성리학에 밝았다.
註10)홍순만의 '제주여인상', 「열녀 홍윤애전」(제주문화원, 1998)에서는 “김시구가 신임사화를 일으켰던 김일경의 일당으로 소론파에 속한 인물이었다. 조정철의 집안과는 이미 할아버지 때부터 불구대천의 원수 집안이었다.”라고 기술했으 나, 김시구가 김일경의 일파라는 사실을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는 없었다. 다만 조정철의 「獄中悲恨」 주에 “余爲一鏡餘黨金蓍耈所誣 又致此危禍 拘囚縣獄”라 고 적혀 있는 것으로 볼 때 김일경과 김시구 사이에 모종의 관련이 있음은 확 실한 듯하다.
孤臣血淚泣君恩 외로운 신하 임금 은혜에 피눈물 흘리며,
萬事南荒一戒存 남쪽 변방 온갖 일 한결 같이 경계했네.
昨日狂風吹大樹 어제는 미친바람 큰 나무에 불어서는
殘花嫰葉落紛紛 시든 꽃 부드런 잎 어지럽게 떨어졌네.
「牧使金蓍耈, 自來兇南也. 一自下船之日, 已有殺余之意. 以五十疋綿布, 第一等任事懸賞, 而開告密之門. 終無可罪之端, 則遂至着氈笠, 親自出沒. 而極矣乃與其徒判官黃鱗采, 雄唱雌和, 同惡相濟. 勒致一少妓之免賤家居者, 以出入余謫之罪, 別造如椽之杖打, 至七十之數, 骨碎筋斷而死. 事甚驚慘, 漫書一絶. 辛丑閏五月十五日也, 辛丑.」 11)
註11)
일반적인 한시의 제목보다 훨씬 더 길다. 시로 표현할 수 없는 저간의 사정을 제목에 담았다. 제목을 해석하면 다음과 같다. “목사 김시구는 흉악한 남인이다. 한결같이 배에서 내린 날로부터 이미 나를 죽이려는 마음이 있었다. 50필의 면포를 1등으로 일을 처리한 사람에게 걸고서 밀고하라고 문을 열어 두었다. 끝내 죄가 될 만한 단서가 나오지 않자 드디어 전립(氈笠)을 쓰고서 몸소 스스로 출몰하다가 종국에는 이에 그의 무리 판관 황린채(黃鱗采)와 손발이 척척 맞아 나쁜 일을 함께하며 서로 도왔다. 한 명의 어린 기녀로서 면천되어 집에 기거하던 자를 억지로 끌고 와서 나의 적거에 출입한 죄를 씌워 특별히 서까래로 만든 장으로 내리치니 60∼70여 대에 이르자 뼈가 바수어지고 근육이 끊어져 죽었다. 일이 너무도 놀랍고 참혹하여 급하게 한 수의 절구를 쓴다. 신축년(정조 5, 1781년) 윤5월 15일이었다.”
불행한 사건을 예감이라도 한 듯 위의 시를 짓기 바로 전에 「以八事書揭壁上 自警仍於題下 各書一律」이라는 제목으로 8수를 지었다. 여기에는 1. 감군은(感君恩) 2. 축친수(祝親壽) 3. 인궁액(忍窮厄) 4. 각수사(却愁思) 5. 신언어(愼言語) 6. 근문학(勤文學) 7. 견폐문(堅閉門) 8. 고사객(固謝客) 등 여덟 개의 소제목이 부기되어 있다. 이러한 굳은 결심과 근신에도 불구하고 음해를 일삼는 무리의 공세에는 무기력하기만 했다. 위의 시 1,2구에는 그러한 근신과 경계에 대한 각오가 실려져 있다.
3,4구에서는 보다 구체적인 이야기가 은유적으로 표현되고 있다. ‘광풍(狂風)’은 김시구 일당의 음해를, ‘대수(大樹)’는 끊임없이 자경(自警)하는 작가 자신을 상징한다. 4구의 잔화(殘花)는 조정철 자신의 상처 입은 심회를 말하는 것이고, 눈엽(嫰葉)은 새롭게 시작된 사랑인 홍랑을 가리킨다. 마지막에 ‘낙분분(落紛紛)’은 홍랑의 죽음을 의미한다.12)
註12)
확인할 수는 없지만 홍랑이 조정철을 구하기 위해 고초를 겪다 죽은 것만은 사실인 것 같다. 다음은 홍랑의 죽음과 관련된 일설이 있어서 소개한다. “고로(古老)의 말로는 5월에 제주목사 앞으로 감사(監司)로부터 밀사(密使)가 와서 조정철을 적당한 죄명 아래 장살(杖殺)하라고 했다. 그는 법정에 끌려 나와 심한 매를 맞고 거의 시체가 되어 법정 밖으로 운반되어 나갔다. 이때 홍랑(洪娘)이 달려들어 그의 몸에서 아직 온기가 있는 것을 알고 입에 오줌을 부어 소생시켰다. 당시의 법은 장사(杖死)했다고 해서 버려진 죄인이 다시 살아나는 일이 있으면 또다시 죽이는 일 같은 것은 없었다. 그는 끝내 그대로 생명을 유지하고 홍랑은 중죄인으로서 교살(絞殺)되었다고 한다.” 김봉현, 제주도유인전(濟州道流人傳)(국서간행회, 1972) 참조.
김시구는 노골적으로 조정철을 죽이려는 흉계를 드러낸다. 상황은 매우 급박하게 돌아갔다. 정헌영해처감록』권3에는 홍랑의 죽음 이후 옥중에 갇혔으면서도 사건의 원흉인 김시구를 몇 번이나 언급하며 그에 대한 분노를 표출하고 있다. 이 부분을 통해서 사건의 보다 충실한 재구가 가능하다.
[1] 김시구(金蓍耈)가 부임한 뒤로 김일경(金一鏡)의 손자를 초빙하였는데 종성(鍾城)에서 대정(大靜)으로 유배를 온 이름이 거정(巨鼎)이란 사람이었다. 그의 첩이 종성 기생의 일가붙이라 하는데 관아에 머무르게 하였다. 그것은 반드시 나를 죽이고자 하는 마음이 분명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으니, 애초부터 역적 일경의 손자를 은밀히 불러들여 먹여 살리려고 했다.13)
註13) 「獄中口吟」의 주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실려 있다. 金蓍耈自到官之後, 招延一鏡孫, 自鍾城謫大靜之名巨鼎者. 謂以其妾鍾城妓生之戚屬, 留置衙中. 則其必欲殺余之心的然可知 初欲以潛招賊鏡之孫, 豢養衙中…하략…
[2] 오 년 동안 적거하면서 관가의 점호가 아니면 한 발자국도 문 밖을 나서지 않고 뜰만을 서성였다. 비록 한여름이더라도 일찍이 문을 나서 얼굴을 드러내지 않았다. 섬사람들이 입고 먹을 것에 군색하지 않을까 의심했다. 또 이동원(李東元)이 나를 꾀어 재물을 도둑질하려고 와서 편지 받기를 청해 북쪽으로 올라가서 살림살이를 운반해서 오겠다고 하였으나, 내가 곤궁해서 더 굳게 산다는 의지로 허락지 않았다. 또 관리가 두려워 그로 하여금 자주 출입하지 말라고 하였더니, 곧 이에 원망을 품었다. 앞뒤로 무고하고 헐뜯을 뿐만 아니라 터무니없는 말로 과장하는 것이 천백 번에 이를 뿐만이 아니었다. 김시구(金蓍耈)가 부임하여 남인(南人) 종자(種子)인 이동원을 아끼기를 동기간과 같이 하였다. 동원(東元)의 종질(從姪)인 일훈(日熏)도 김시구가 총애하는 막료로서 동원(東元)과 함께 시구(蓍耈)와 인채(鱗采) 등과 안팎으로 호응하여 공손히 상대방 눈치를 살피고 이리저리 농락하며 죽이려는 기회를 만들어 내려 하였다. 그러므로 시의 뜻이 이와 같은 것이다.14)
註14) 「獄中不勝悲寃吟此」의 주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실려 있다. 五年居謫, 非官點, 則足跡未嘗出戶外, 步庭除. 雖盛夏, 不曾開門露面. 島人疑以有衣食不窘, 又李東元欲誘我偸財, 來請受書, 北上運致糧資, 而余以固窮之意不許. 且畏官禁使之勿頻數出入, 則乃挾憾, 前後誣毁, 譸張者, 不啻千百及. 金蓍耈之來莅, 以東元之南人種子愛之若同氣. 東元之從姪日熏, 以耈之寵幕與東元內外和應, 蓍耈鱗采等, 側肩帖耳, 上下闔闢, 織成戕殺之機. 故詩意如此.
김시구는 조정철과의 불구대천 원수인 김일경의 손자 김거정을 불러 들여 대접하였다. 이미 이것은 조정철에게는 보이지 않는 위해(危害)임에 틀림없었다. 게다가 남인(南人)인 이동원(李東元)도 김시구, 황인채와 호응하면서 조정철을 제거할 기회만을 엿보았다. 이러한 철저한 준비가 있었으니 홍랑의 죽음과 조정철의 고초는 예견된 일이었다.
毒楚如鋒事不根 근거도 없이 칼끝 같은 독한 매질했으나,
爾言破竹息紛紜 너의 말은 똑 부러져 시끄러움 잠재웠네.
猶將密啓成吾案 오히려 밀계로 나의 죄안 이루었으니
生死如今在聖君 생사가 현재에는 성군에게 달렸다네.
「洪娘[名允愛]毒楚之下氣絶, 而口猶稱寃. 禍色尤急, 雉懸而死. 金蓍耈乃欲文過遂非, 密啓上聞云題此.(홍랑[이름은 윤애이다]이 모진 고문을 겪어 기절하면서도 입으로는 오히려 원통하다 말을 했다. 앙화의 기색이 점점 다급해지자 목을 매고 자진했다. 김시구는 자기 허물을 문식하여 나쁜 짓을 완수하려고 밀계를 상감께 올렸다 하므로 이 시를 쓴다.)」
김시구의 조정철에 대한 분노는 홍랑까지 불똥이 튀었다. 이러한 사실은 구전(口傳)으로 더욱 구체적으로 전해지고 있다.15) 김시구는 홍랑을 고문하여 불리한 증언을 끌어내어 조정철을 더욱 곤경에 빠트리려 하였다. 그러나 홍랑은 죽음을 각오하고 조정철에게 불리한 증언을 끝내 하지 않았다. 기록이 앞뒤가 조금 다르다. 앞에서는 장을 맞고 죽은 것으로 언급되었지만, 이 시의 기록으로 판단하건대 심한 매질을 당하고도 더 위태로운 형국으로 몰리자, 홍랑이 스스로 목을 매어 자결했던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김시구는 홍랑의 억울한 죽음을 은폐하기 위해 임금에게 밀계를 보내 조정철을 모함한다. 사랑하는 사람이 자신을 위해 죽어감에도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던 참담한 심정은 조정철의 다음 시에 잘 드러나 있다.
註15) 홍랑(洪娘)이 김시구 목사에게 관아(官衙)로 잡혀 가기 전에 위험이 닥쳐 올 것을 대비하여 홍랑은 언니와 의논하여 언니는 홍랑과 조목사 사이에 낳은 어린 딸을 데리고 한라산에 들어가 피신하게 되었는데 그곳이 박인선옹의 말에 의하면 산심봉(山心峰) 마용사(馬龍寺)이고 그때 스님은 마용(馬龍)스님이라 하였다. 이렇게 언니가 딸을 데리고 한라산으로 피신한 뒤 관아에서 홍랑을 고문할 때 홍랑의 가슴을 집중적으로 추궁하였는데 처녀의 몸으로 유두와 유방이 왜 이렇게 부풀었는가를 가혹하게 고문하였지만 이 부분에 이르러 부모에게 태어난 원래의 체질이 그렇다고 완강하게 반박하고 홍랑은 입을 열지 않고 죽음을 당했다고 한다. 조원환, '양주조씨사료선집'(보경문화사, 1994), 898쪽 참조.
橘柚城南三尺墳 성 남쪽 귤, 유자 우거진 곳 석자의 무덤
芳魂千載至寃存 천년 동안 꽃다운 넋 지극한 한 남으리라.
椒漿桂酒誰能奠 초장(椒漿)과 계주(桂酒)를 누가 능히 올릴까?
一曲悲歌自淚痕 한 곡조 슬픈 노래에 절로 눈물 자국 생기네.
「六月二日曉聞薤露聲, 問是洪娘發靷也. 由我而死, 不覺可憐慘怛, 起書一絶.(6월 2일 새벽에 상여 소리 듣고서 물어보니 홍랑의 발인이었다. 나 때문에 죽었으니 나도 모르게 가련하고 참담하여 일어나서 절구 한수를 짓는다.)」
3. 계속되는 고초와 곤욕
命與仇謨飽閱窮 운명이 원수와 도모하게 돼서 곤궁함 실컷 겪으니
誰人斯世似余躬 이 세상 어떤 사람이 내 처지와 같을까
殺機潛動言維酷 죽일 기회 남몰래 움직여서 말이 참혹하였고
密啓馳聞事卽空 밀계를 상감에게 보고했으니 없는 일 꾸며댔네.
儻或燭寃吾主聖 원통함을 밝혀 줄 분은 우리 군주인 성상뿐이고
也應黙佑彼天隆 묵묵히 도와 줄 분도 저 높은데 있는 하늘뿐이네.
元城定力能相及 원성(元城)의 정력(定力)이 서로 미칠 수가 있다면
憂喜不曾着在中 근심과 기쁨 일찍이 마음에 두지 않으리라.
「牧使金蓍耈與判官黃鱗采, 罷管下體統, 日夕聚首綢繆, 使裨將李日熏, 挾將校李東元妓生鄭娘, 內外煽謨, 撲殺無辜, 擬余罔測之科, 島人嗷嗷, 甚於防川. 則遂欲掩殺人之跡, 售戕余之計. 事過後十六日, 始修密啓, 有若急變者然. 遂書此以道其憂憤悲寃云爾.」16)
註16) 번역은 다음과 같다. “목사 김시구와 판관 황인채는 관하(管下)의 체통은 그만두고, 아침저녁으로 머리를 맞대 일에 대비하여 비장(裨將) 이일훈(李日熏)으로 하여금 장교(將校) 이동원(李東元), 기생(妓生) 정랑(鄭娘)을 끼고 안팎으로 선동하여 꾀를 내어 무고하게 때려죽인 일을 망측한 죄과에 나를 맞추려고 하니 섬사람들이 탄식하기를 시내를 막는 것보다도 심하게 하였다. 곧 드디어 사람을 죽인 흔적을 가리고자 나를 죽일 계획을 시행하려고 했다. 일이 끝난 지 16일이 지나서야 비로소 밀계를 만들었으니 마치 급한 변고가 있었던 것처럼 하였다. 드디어 이것을 써서 그 근심과 분함, 슬픔과 원망을 말하는 바이다.”
홍랑은 조정철을 살리기 위해 비명에 죽어갔다. 위의 시처럼 홍랑이 죽은 후 김시구는 밀계를 조정에 올려 자신이 죄 없는 여인을 단죄하여 죽인 과오를 면하기 위해 오히려 조정철의 죄를 상세히 알린다. 이것은 또 다른 고초와 곤욕의 시작이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슬픔에 빠져 있을 겨를도 없이 김시구의 밀계에 대한 본격적인 조사가 진행되었다. 7월 12일 밤에 새로운 제주목사 이양정(李養鼎)17), 판관 이형묵(李亨黙)18), 대정현감 이양재(李亮載), 정의현감 이우진(李羽晋) 등이 관선(官船)으로 도착했다.19) 이와 동시에 김시구는 파직당하고 그와 연루된 13명이 잡혀 들어갔다. 또, 이 일을 구체적으로 조사할 어사가 파견될 것이 결정되었는데, 이때 이미 조정철은 수인(囚人)의 몸이 되어 있었다. 이때의 참담한 심정을 「獄中悲寃」에 “이번 세상에 진실로 즐거움이 없으니, 어찌 저승에서 노님을 꺼릴 텐가?(斯世眞無樂, 何妨九地遊)”라고 적고 있다.
註17) 이양정(李養鼎): 조선조의 문신. 정조 때의 제주목사. 자는 치공(稚功)이고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1770년 문과의 경과(慶科) 별시(別試)에서 급제, 1781년 7월, 목사 김시구(金蓍耈)의 후임으로 제주에 도임하고 1782년 1월에 승지로 제수되어 떠났다. 당시 제주판관은 이형묵(李亨黙)이며 정의현감은 이우진(李羽晋), 대정현감은 이양재(李亮載)이다. 목사 이양정이 재임하던 1781년 제주순무안사시재어사(巡撫按査試才御使) 박천형(朴天衡)이 내도, 과장을 개설하여 문과에 김용(金鏞), 변경우(邊景祐), 강성익(康聖翊) 3명을 시취(試取)하였다.
註18) 이형묵(李亨黙): 조선조 정조 때의 제주판관. 1781년 7월, 황인채(黃鱗采)의 후임으로 제주에 도임하고 1783년 2월에 전라도 전주영장(全州營將)으로 제수되자 떠났다. 당시 제주목사는 이양정(李養鼎)과 이문혁(李文爀)이며 정의현감은 이우진(李羽晋)과 이장익(李長益)이고 대정현감은 이양재(李亮載)와 박재연(朴載淵)이다. 이형묵의 이름과 옆에 당시 목사 이양정(李養鼎)의 이름이 나란히 새겨진 마애명(磨崖銘)이 한라산 정상 동대(東臺)에 있다.
註19) 「七月十二日夜 濟州牧使李養鼎判官李亨黙大靜縣監李亮載旌義縣監李羽晋等 官船一時來泊 蓋因金蓍耈密啓 欲行按査以明虛實 命以文武有資歷者 易三邑四長吏 且命遣繡衣故也 宣傳官鷄鳴時 來拿蓍耈十三 昧爽判官先到任 急行徒流點考 卽地拿余及他罪謫 幷着枷下獄後 判官親到獄中 申飭防守之嚴 操縱之酷 比金吾不啻倍蓰撫 躬自悼不勝 悲寃口吟一絶」
이 일을 처리할 어사는 옥에 갇힌 지 한 달이 지나도록 도착하지 않았다. 이때의 초조한 마음은 「桎梏」, 「逮獄三十日」에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드디어 8월 12일 안핵어사(按覈御史) 박천형(朴天衡)이 들어와 13일부터 비로소 사건을 조사하기 시작했고, 17일이 되어서야 조정철 사건의 신문이 시작되었다. 조정철은 18일, 19일에 걸쳐 2, 3차 조사를 받았지만 김시구가 밀계에서 언급한 7가지 죄목에 대해 끝내 불복하였다. 이 당시 정황이 「十八日十九日 再推三推 連受刑不服 還囚獄中吟此」의 주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주에 따르면, 어사 박천형은 별다른 혐의를 찾지 못하자 조정철의 보수(保授)인 신호(申好)와 친한 서울상인 이천주(李天柱)를 신문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별다른 사실이 없자. 신호의 처와 천주의 첩을 잡아다가 9차례나 주리를 틀었지만 결국은 자복을 받아 내지 못했다. 종국에는 조정철의 글에서 몇 개의 문구를 트집 잡기까지 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4차 조사 때에는 사실 관계에 대해서는 불복하였지만, “눈물로 잘못을 뉘우치고 은혜 베풀기를 빌며 어찌 다른 뜻이 있겠느냐”고 하였다.20) 여름에 시작된 조사는 철이 바뀌고도 끝나지 않았다. 이때의 심정을 적은 한 편의 시를 살펴보자.
註20) 「獄中四次推問 不服後吟寃抱」의 주에 “遂以泣愆頌恩 豈有他意”라고 적혀있다.
天時已變一炎凉 계절은 이미 한 번 더위, 추위로 바뀌었는데,
寃淚淫淫拭欲瘡 원통한 눈물 줄줄 흘러 닦아 내다 부스럼 됐네.
世事于今人按劒 지금 세상일은 사람을 원수처럼 대하고,
讒言從古舌如簧 옛날부터 참언은 혓바닥이 피리와 같네.
飢窮徹骨猶疑飽 굶주림, 곤궁이 뼈에 사무쳐도 오히려 배부르다 의심하고,
憂病纏身反謂康 근심과 병이 몸에 얽혔어도 도리어 건강하다 말하네.
可識吾生難久視 알겠노라. 나의 삶이 오래 살기 어려워
靑山歸去一眠長 청산에 돌아가서 길게 한 번 잠들 것을
— 「獄中 炎凉已變 漫吟」
이 시는 원망스런 눈물만을 흘릴 수밖에 없는 고심참담한 심정을 토로하고 있다. 아무리 무고함을 말하려 해도 세상 사람들은 그것을 오히려 왜곡해서 받아들인다. 5,6구는 자신의 진실이 통하지 않는 사실에 대한 무기력함을 표현하고는 7,8구에서는 이러한 위태로운 상황에 자신의 목숨이 얼마 남지 않을 것이라는 비극적 전망을 하기도 한다. 이것은 어사의 치계(馳啓)에 대한 조치가 어떤 식으로 내려질 건지에 대한 극심한 불안이 표출된 것이라 볼 수 있다. 「獄中聞 大賈李光福 以與大燮出沒同商之罪…」의 “성명이 일월과 같으셔서 너의 목숨 또한 보전함 마땅하리.(聖明同日月 爾命也應全)”, 「獄中病臥」의 “은혜와 위엄은 성주에게 우러르고, 죽고 삶은 밝은 조정 믿노라(恩威仰聖主, 伸屈信明廷)”, 또, 「獄中紀實用前韻」의 “성은이 오히려 세 칸 집 보호해 주어도, 당시 의론은 만 번 죽을 사람 용납키 어려웠네.(聖恩猶庇三間屋 時議難容萬死人)”, 「獄中寃恨」의 “우리 임금 인성(仁聖)하시니, 매번 공평하게 옥사 처리 하시리(吾王自仁聖 斷獄每公平)”라는 부분에서 알 수 있듯이 예측 불가능한 앞날에 대한 불안은 오히려 절박한 연군(戀君)의 의지로 표현된다.
「獄中十月三日吟此」에 따르면 10월 3일부터는 상황이 조금 호전됨을 알 수 있다. 어사가 치계(馳啓)를 올린 후에 결과를 기다리면서 조금은 관망의 태도를 취했기 때문이다.21) 조정철은 어떠한 죄목으로 심문을 당했고, 조사는 어떻게 진행 되었으며, 어사의 장계는 무슨 내용을 담고 있었을까? 「獄中寃恨」의 주에는 당시의 사정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註21) 「獄中十月三日吟此」의 주에 따르면 “어사 치계를 올린 후에 옥에서 금지하는 것을 조금 완화해 주었다. 관아에게 제공하던 것을 보수로 하여금 음식을 전하게 했다. 이때 때마침 엄동이 되어 추위에 어는 것이 매우 심하였다. 수직하는 장교들은 말라 삭은 가시울을 주워다가 불을 지펴 손을 쬐었다(御史以馳啓之後, 獄禁稍解. 罷官供, 使保授傳食. 時値嚴冬, 寒凍忒甚. 守直將校輩, 拾時荊圍之枯損者, 爇火熇手)”라 했다.
올해 윤5월에 전라감사 박우원이 측근 장교 김씨 성을 가진 자를 몰래 거짓으로 어사라 칭하여 암암리에 제주목사 김시구에 글을 주어 여러 죄인의 동정을 염탐하도록 하였다. 김시구는 삼읍의 일에 대한 것을 물샐 틈 없이 기록하여 묶어 두고, 또한 기회를 엿보아 살육할 계획을 하려고 근거 없는 말을 꾸며 내어 추악하게 무고함이 끝이 없었다. 우원은 시구의 밀계를 보고서 등보와 기록한 염문 책자를 허실을 궁구하지 않고 몹시 서둘러 마치 절호의 기회를 얻은 양 상감께 상달하였다. 섬 안에서 나에 대한 큰 사건이 있었다고 하기에 이른 것은 나에게는 태반이 지적될 만한 것이 없었다. 오직 죄를 더하지 않으면 생명이 끊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두렵게 여겨서 7가지 죄목을 갖다가 조사하였다. 첫째 서울 상인 이천주와 내통해서 편지를 통해 양식을 운반했다는 것이고, 둘째는 이현대의 전복 따는 역을 면제시켜 준 것이고, 셋째 스스로 가벼운 죄라고 일컬었다는 것이고, 넷째는 사람들이 나리라고 부르면 사양하지 않고 편안하게 받아들였다는 것이고, 다섯째는 관가에서 점고할 적에도 굴복하지 않았다는 것이고, 여섯째는 고을의 여자 하인과 간음했다는 것이고 일곱째는 마음대로 이무의 두 글자를 쓴 것이었다. 제2항, 제4항은 자복하였고 제5항은 불복할 때가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혹 비오는 날을 만나게 되면 쭈그리고 앉아서 점고에 응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온 섬의 죄인들이 노소를 막론하고 아울러 사노와 함께 일찍이 땅에 엎드려서 진술하지 않았다. 그 나머지는 한결같이 아울러 불복하였다. 전후 6일 동안 세 번 형벌로 신문하는 벌을 받았는데 네 차례 자세하게 캐묻는 것을 겪고 서서 한 번 진술했더니 또 그간에 문을 닫고 나가지 않았으며 곁에다가는 옷장을 설치하고 농 위에는 책자를 쌓아 놓았으며 손님을 사절하고 만나지 않았고 그 의관을 정제하고 망령되이 함부로 스스로 존대한 체하여 반찬을 갖추어 먹은 것 등 여덟 아홉 가지 일들을 서로 번갈아가며 신문하기 때문에 조목조목 증거를 인용해서 그에 대답을 했다. 일의 형세가 여기에 이르자 만일에 성상의 인자하고 청렴하심이 아니라면 곧 옥에서 살아 나가는 것은 아무래도 이치가 없었다. 그러므로 이렇게 운운한다.22)
註22) 是年閏五月, 全羅監司朴祐源, 潛送寵校金姓者, 假稱繡衣, 暗地貽書濟牧金蓍耈, 使之廉探, 諸罪人動靜. 蓍耈廉察錄三邑事, 綢繆締結, 又乘機而欲售殺伐之計, 做出無根之言, 醜誣罔極. 祐源見蓍耈密啓, 謄報及所錄廉問冊子, 不究虛實, 汲汲忙忙, 如得奇貨, 上達天聽. 至有島中大事端, 於余則太半指無謂. 有惟恐罪之不加命之不隕, 按査七罪目. 一曰交通京商李天柱通書運糧, 二曰頉給李顯大鮑 作之役, 三曰自稱輕罪, 四曰人以進賜稱之而不辭安受, 五曰官點不屈伏, 六曰潛奸邑婢, 七曰肆然書罹誣二字. 第二第四則自服, 第五則非無不伏之時, 而或値雨日, 則蹲坐應點, 然一島罪人無論老少, 幷與私奴未嘗伏地納供. 其餘一幷不服. 前後六日, 三受訊刑, 四經盤問而終始一招, 則又於其間以閉戶不出, 傍置衣籠籠上積冊子, 謝客不見, 正其衣冠, 妄自尊大, 具饌而食等, 八九件事, 迭相發問, 故節節引據而對之. 事勢至此, 若非聖上仁明, 則生出獄戶, 萬無其理. 故云云.
桎梏一身重 질곡이 한 몸에 무거운데
桁楊七罪輕 항양은 일곱 죄목에도 가볍네.
指無還謂有 없는 것 가리켜서 도리어 있다 말하고,
置死豈圖生 죽이려 하니 어찌 살기 도모하랴.
至恨蒼天質 지극한 한은 하늘에 질정하고,
深寃血淚傾 깊은 원한은 피눈물 쏟았다네.
吾王自仁聖 우리 상감이 스스로 인성하여서
斷獄每公平 옥사 결단을 매번 공평하게 하셨네.
문제가 되었던 일곱 가지 죄목을 하나하나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죄목은 서울상인 이천주(李天柱)와 내통하여 편지를 배달하고, 식량을 운반한 일이다(一曰交通京商李天柱通書運糧). 조정철은 여러 정황상 철저하게 내지(內地)와 연락이 봉쇄되어 있었다. 당시에 가족들과 편지를 주고받거나 음식물을 전달받을 수 있는 처지가 못 되었다. 그것으로 인한 고통을 매우 빈번하게 호소한 시들이 남아 있다. 이 죄목은 억지로 이천주를 포섭해서 조정철을 얽어 넣으려는 김시구의 음모에서 비롯된 것이니 실상과는 거리가 먼 일이었다. 23)
註23) 「獄中聞, 大賈李光福, 以與大燮出沒同商之罪, 自島中被拿, 逮囚捕廳. 誣援李天柱運余財興販, 蓋緣金蓍耈同船指嗾, 使之死中求生故也. 九月十二, 捕校來, 拿天柱, 則繡衣以余保授主人申好啓, 聞上送於該廳云, 不勝驚駭. 夜臥賦一律, 以道曖昧悲寃之意, 且祈其生還.」이란 긴 제목이 당시의 정황을 소상히 말해 주고 있다. 번역은 다음과 같다. “옥중에서 듣건대 큰 상인 이광복(李光福)이 대섭(大燮)과 함께 출몰하며 장사를 함께하는 죄로써 섬 안에서 사로 잡혀서 포도청에 수감되었다. 이천주가 나의 재산을 운반해서 팔았다고 무고했는데 대개 김시구가 한 통속이기 때문에 사주(使嗾)했으니, 그로 하여금 죽는 속에서 살기를 구하였기 때문이다. 9월 12일 포교가 와서 천주를 잡아갔는데 곧 어사가 나의 보수 주인인 신호라는 것을 보고하여 상감이 해당하는 관청에 공문을 보냈다고 하여 놀라움을 이길 수가 없었다. 밤중에 누워서 율수 한시를 짓는 것으로 암담하고 원통한 뜻을 말하고 또 그가 살아서 돌아오기를 기원했다.”
둘째는 이현대(李顯大)의 전복 따는 역을 면제시켜 준 일이다(二曰頉給李顯大鮑作之役). 사실은 이현대에게 편지를 전달해 주면 전복을 따는 일을 면제해 주겠다고 했던 일을 말한다.24) 이 일이 이현대의 배신 때문에 문제화되었는지 여부는 분명치 않지만, 조정철은 이 일로 인해서 그에 대한 깊은 적의를 표현하는 문구를 여러 차례 남겼다. 1783년도의 기록에는 이현대가 목사 이문혁(李文爀)25)에게 총애를 받으려고 죄인들의 동정을 살피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낙담을 해서 지은 시가 있고26), 1788년도에는 8월에 이현대가 서울에 편지를 전해 주겠다 접근하기에 미심쩍음에도 불구하고 편지를 전달했다가 적발되었던 기록이 나온다. 27)
註24) 「家鄕消息已斷絶, 秋冬劫運尙驚心, 旅夜孤燈漫爾書此」의 주에서 “按査時 以必也通書家鄕 爲大罪案 終始受刑 又以戊戌 李顯大李仁基紹介傳書 罰役頉給事 爲第二罪狀故云云”
註25) 시집에는 이문적(李文跡)이라 되어 있지만, 이문혁(李文爀)의 오자이다.
註26) 「濟州吏李顯大 卽辛丑作孽之一也 今又仇視我 而方納賂要寵於牧使李文爀 出沒探罪人動靜云 不勝可怕書此寓懷」
註27) 「戊申十月二十八日 巡營將校牧營執事等 各奉渠將令來夜半突入 搜探文書 至於赤脫衣服 使之或立或坐 飜轉一身而極矣 及其無所得 則閱出衣服箱 謂之新衣持四件壽衣而去 其中一衣 卽慈堂手線衣 而臨別以九原 相見敎意丁寧者也 今遽爲所奪 不勝悲寃書此 是夜適又大雨雪 戊申」의 주에 당시의 정황이 상세히 적혀있다.
셋째, 스스로 가벼운 죄라고 말한 것(三曰自稱輕罪)이다. 이 조목은 악의적으로 음해하려는 의도가 다분하다.
넷째, 사람들이 나리[進賜]라고 부르면 사양하지 않고 편안히 받아들인 것(四曰人以進賜稱之而不辭安受)이다. 호칭이란 그 존재의 규정이다. 호칭이 한 번 불릴 적마다 자신의 처지를 각성시킨다. 「獄中悲寃」에서도 옥리(獄吏)에게 장부(丈夫)라고 불리는 것에 대해 비애를 표출한 바 있었고, 「悲身世」에서는 다른 사람들이 ‘나리’라는 호칭을 절대로 사용하지 못하게 할 것을 다짐하고 있다.
다섯째, 관아의 점호에 복종하지 않은 것(五曰官點不屈伏)이다. 조정철 자신이 성실하게 관아의 점호에 참석하지 않은 적이 있기는 하였다고 토로했지만, 비가 올 때 쭈그리고 앉아 점호를 받는 일들은 보통의 죄수들에게 관례임에도 불구하고 문제 삼은 것에 대해 상당히 억울하게 여겼다.
여섯째, 읍비(邑婢)를 은밀히 간음한 일(六曰潛奸邑婢)이다. 이것은 홍랑과의 일을 언급한 것인데, 아마도 이 죄목을 홍랑이 자복하였다면 조정철이 더욱 위태로운 지경에 빠졌으리라 예상할 수 있다.
일곱째 마음대로(肆然) 이무(罹誣, 무고를 입음)라는 두 가지를 쓴 일(七曰肆然書罹誣二字)이다.28) 이 죄목도 죄를 덮어씌우기 위한 억지스런 부분이 없지 않다. 이밖에 소소하게 바깥출입을 하지 않는 일, 옷장을 설치하고 책자를 쌓아 놓은 일, 손님을 만나지 않은 일, 의관을 정제한 일, 반찬을 갖추어 먹은 일 등을 지적했다.
註28) 「十八日十九日 再推三推 連受刑不服 還囚獄中吟此」의 주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게다가 나에게 우연히 하나의 글이 있었는데 그 안에 “정유년 가을, 나는 무고를 당해 옥에 갇혔는데 상감의 은혜를 입어 옥에서 나섰다”라는 두세 구의 말이 있었다. 어사가 “이무(罹誣)라는 두 글자의 뜻이 가리키는 바가 있는가?”라고 묻기에 흉적 홍상길(洪相吉, 정조시해 사건에 연루된 사람)에게 무고를 원용한 것이라 대답하니 또 몽성상(蒙聖上)이하 8자로써 밝게 근거를 대서 진술하게 하였다(且余偶有一文字 其中有歲丁酉秋 余罹誣逮獄 蒙聖上恩生出圓扉 數三句語 御史以罹誣二字意 有所指問之 故以被賊吉誣援對之 且以蒙聖上以下八字 昭然憑據而納供)”
무고는 사실 여부와 관계가 없다. 아무리 근신한다고 피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작정하고 자신을 음해하려는 사람들에게 죄인의 신분은 철저한 약자일 수밖에 없다. 결국, 두 번째와 네 번째 죄목을 자복하는 선에서 조사가 끝나게 된다. 이제 조사는 끝나고 어사의 장계가 올라가 그에 따른 처분만을 기다려야 했으니, 오히려 조사의 시간보다 더 초조하고 힘겨운 시간이 남은 셈이다.
一入圓扉淹九旬 한 번 옥문에 들어서서 90일 머물렀으니,
餘生不死値玆辰 남은 인생 죽지 않고 오늘이 되었다네.
新尤天地難容士 새 허물은 천지에서 용납하기 어려운 선비이고,
舊痛缾罍有恥人 옛 아픔은 작은 병과 큰 병에 부끄러움 있는 사람이네.
休咎自知焉用策 화복을 스스로 아니, 어찌 계책을 쓰랴.
薰蕕無辨已爲薪 향초와 구린 풀 분별없이 이미 땔감 되었네.
聖恩若許歸田早 성은으로 만일 일찍 전원에 돌아감 허락한다면
一曲滄浪鷗鷺隣 창랑가 한 곡조를 부르며 갈매기, 해오라기와 이웃하리.
「獄中十月十四夜 不勝悲寃 復用前韻口吟 是日乃余讐日也⌟
(옥중에서 10월 14일날 밤에 슬프고 원통함을 이기지 못하여 다시 앞선 운자를 사용하여 입으로 읊다. 이날이 바로 부모님의 기일이다)」
사람은 가장 위급하고 절망적인 순간이면 부모님을 떠올리게 마련이다. 조정철은 앞서 「獄中思親」에서 “어제 찬바람 불고 눈비가 내렸는데 나는 죽지 않고 살아 아직도 감옥이네. 부모님 생각에 천 줄기 눈물 막기 어려워 절반은 형구 적셨고 절반쯤은 옷 적셨네.(昨夜寒風雨雪霏 吾生不死尙圓扉 思親難制千行淚 半濕桁楊半濕衣)”라고 하기도 했다. 더군다나 이날은 아버지인 조영순(趙榮順, 1725∼1775)29)의 기일이었다.
註29) 조영순(趙榮順, 1725∼1775): 자가 효승(孝承)이고 호는 퇴헌(退軒)이다. 여호(黎湖) 박필주(朴弼周)에게서 학업을 했다. 1754년 부수찬(副修撰)으로 왕세자에게 영의정 이천보(李天輔)를 매도하는 글을 올렸다가 제주도 대정(大靜)에 유배되었던 인물이다. 1770년 소론(少論)의 영수 최석항(崔錫恒)의 신원(伸寃)을 상소했다가 갑산부(甲山府)에 유배당하여 서인(庶人)이 되었다. 문집으로 퇴헌집(退軒集)이 있다.
이때는 옥에 갇힌 지 90일째 되는 날이었다. 4구는 시경, 「소아(小雅)」, ‘육아(蓼莪)’에, “작은 병이 텅 빔이여, 큰 항아리의 수치로다.[甁之罄矣 維罍之恥]”에서 나온 말이다. 여기에서 작은 병은 자식을 가리키고 큰 항아리는 부모를 가리킨다. 그러니 3,4구는 세상에서 버림받은 자신의 처지와 부모님에 대한 죄송스런 마음을 표현한 것이다. 5,6구에서는 화복을 알지만은 아무 계책도 쓸 수 없는 무기력한 자신의 형편과 군자와 소인도 분변하지 않는 세상에 대한 원망을 드러냈다. 7,8구에서는 무사히 고향에 돌아갔으면 하는 강렬한 소망을 엿볼 수 있다.
一日猶難况十旬 하루도 오히려 어려운데 하물며 100일이야
枷頭黙數閱來辰 머리에 칼 쓰고 묵묵히 겪어온 때 세어 보네.
五年已作長流客 오 년을 이미 긴 유배객이 되었는데
三月還成係緤人 삼 개월 도리어 끈에 매인 사람 되었네.
歲晏芷蘭猶變節 해가 평온하여도 지난은 오히려 절개를 바꾼다지만,
天寒松柏詎爲薪 하늘이 춥다고 소나무 잣나무가 어찌 땔감이 되겠는가?
餘生造次皆寃恨 남은 생 짧은 시간 모두 원한이니,
愁聽晨鷄動四隣 근심 속에 새벽닭이 사방에 우는 소리 듣노라.
「十月二十三日 囚獄洽滿十旬 每誦坡翁詩 竊以百日爲期 今便來奇漠然 曉枕復用前韻 吟此以道鬱悶之懷(10월 23일 감옥에 갇힌 지 꼭 100일인데 매번 소동파의 시를 외우면서 백일이 되기를 기다렸다. 이번 인편에 기별이 오는 것도 막연하다. 새벽 잠자리에서 다시 앞선 운자를 써서 이 시를 읊어 답답하고 걱정되는 마음을 말하였다.)」
어느덧 100일 지났다. 언제 죽을 지도 모를 극도의 불안 속이었으니, 100일의 시간은 수인(囚人)이 감당하기에는 벅찬 시간이었을 것이다. 그래도 5,6구에서는 아직도 굳히지 않은 강인한 절개를 느낄 수 있다. 천한(天寒)은 지금의 상황을, 송백(松柏)은 자신을 대변한다. 7,8구에서 복잡한 심사 속에서 날이 샐 때까지 불면의 시간을 보냈음을 알 수 있다. 그렇게 기다리던 소식은 그날 새벽에 드디어 당도한다. 아래의 시에 그 감회를 적고 있다.
聖度容臣寃 임금의 도량으로 신하의 원통함 용납하니,
淵思察爾譖 깊은 생각으로 저들의 헐뜯음 살피셨네.
獄中百日詩 옥중의 백일 시는
今覺示先讖 이제야 깨닫겠네. 미리 조짐 보였음을
「十月卄三曉 吟一詩排悶 是日自上命赦臣死 還發配所關文 入島 解枷於客舍庭下 仍行四拜禮以謝莫大之恩 感淚泉湧 不知攸措 出紅箭門外回念 百日歸期之詩始覺 萬事 皆有先讖 口吟一絶以識(10월 23일 새벽 시 한 수를 읊어 걱정을 털어 버렸다. 이날 상감께서 신의 죽을죄를 사면하고 다시 배소를 향해 출발하라는 관문이 섬에 들어와 객사 마당에서 칼을 벗어 놓았다. 이에 사배 예를 행해 크나큰 은혜에 감사하였다. 감격한 눈물이 샘물처럼 용솟음쳐서 어찌할 바를 알지 못하였다. 홍전문밖으로 나서 돌이켜 생각해 보니 백일 동안 돌아가기를 기다렸던 시가 떠올라서 모든 일에는 모두 미리 조짐이 있었다. 입으로 절구 한 수를 읊어서 기록하였다.」
이제야 어사의 장계에 대한 처분이 내려져 드디어 사면을 받았다. 그동안 죽음과 삶의 경계를 오고 간 시간이었다. 그 시간 속에서 사랑하는 여인을 잃었다. 자신에게 씌워진 일곱 가지 죄목도 기실은 음해에 가까운 것이었다. 비원(悲寃)으로 숱한 불면의 시간들을 가로질렀다. 이로써 홍랑과의 사건은 일단락되었다. 한 명은 비명에 죽어갔고, 한 명은 죽음보다 못한 고초를 겪었다.
4. 아직도 끝나지 않은 사랑
조정철은 끝내 풀려났다. 그렇다고 상황이 더 나아진 것도 아니었다. 「謫中 書苦况」에서는 “백 겁 동안 살아서는 오히려 죽지 못해, 굶주림·추위의 고통 한 때에 겸하였네. 일용품 구하려 해도 오히려 얻기 어려워, 적거가 도리어 옥중의 혹독함과 같구나.(百劫吾生尙不死 飢窮寒苦一時兼 欲求水火猶難得 謫裏還如獄裏嚴)”라고 했다. 굶주림이나 추위는 하나도 해결된 것이 없다. 일용품조차 구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상황은 옥안에 있을 때나 적거로 풀려났을 때나 가혹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이때 섬에 있는 죄인들을 섬 내륙으로 이송시킨다는 소문이 있었다. 30) 해배(解配)에 대한 희망도 없이 오히려 상황은 더욱 좋지 않게 바뀌었다. 「書懷」에서는 “만일 끝내 못 돌아갈 것 같으면 차라리 일찍 죽는 것 편안하리라.(若終歸未得, 寧早死爲安)”라고 한 것에서도 그러한 절망적인 소회를 읽을 수 있다. 불안하고 초조한 상황에서도 학자로서의 습벽(習癖)은 남아 있었는지 귤과 유자에 대해 품평을 한 「橘柚品題」 15수를 남겨 놓기도 하였다. 제주에 정배된 죄인들에 대한 분산 명령이 떨어지고, 그것이 실행될 일만 남아 있었다. 한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는 두 편의 시에는 그 당시 조정철이 느꼈을 절망과 불안이 엿보인다.
註30) 조선왕조실록' 정조 5년 신축(1781) 10월 26일의 기록은 “형조의 소관인 제주(濟州)에 정배된 죄인을 분정(分定)하여 이배(移配)시키라고 명하였다.”라 했다. 또, 정조 6년 임인(1782) 1월 14일의 기록은 “판의금 홍낙성(洪樂性)이 아뢰기를, ‘제주 어사(濟州御史)의 별단(別單) 가운데 주성(州城)에서 선소(船所)까지의 거리가 10리도 못된다고 하니, 조정철(趙貞喆)·심익운(沈翼雲) 같은 역얼(逆孼)이 육지의 상고(商賈)들과 체결하여 서울의 소식을 교통(交通)할 수 있습니다. 의당 조정철은 정의현(旌義縣)에 이배(移配)하고 심익운은 대정현(大靜縣)에 이배하여야 합니다.’”라고 했다.
客夜鷄聲欲四更 나그네 밤에 닭이 울어 사경이 되려 하니
寒窓寂歷伴孤檠 차가운 창 쓸쓸한데 등잔만 짝을 하네.
山河擧目魂長斷 산하에 눈을 들면 혼은 길이 끊기고,
家國關心夢自驚 집과 나라에 마음 쓰면 꿈에서 절로 놀라네.
六載投荒憐宋子 6년 동안 귀향 가니 송옥(宋玉)년이 가련하고,
二毛侵鬢感潘生 이모가 귀밑에 나니 반악을 느끼노라.
華封壽富多男祝 화봉(華封)의 수부, 다남으로 축원을 했다지만,
已罪猶然仰聖明 이몸의 죄 그대로라 성명(聖明)만을 우러르네.
—「除夕」
官角聲殘天欲明 관아 피리 소리 잦아드니 날이 밝아오는데,
屠蘇一酌百憂生 도소주 한 잔에 온갖 근심 떠오르네.
頻更歲月身將老 자주 세월 바뀌어 몸이 늙었는데,
屢閱風霜夢亦驚 거듭 풍상을 겪어 꿈에도 놀란다네.
兀兀危蹤悲海國 혼돈스런 위태론 자취 해국은 서글프나,
紛紛樂事憶王城 시끌벅적 즐거운 일 있던 서울이 떠오르네.
蓬桑宿志今寥落 큰 포부 묵은 뜻이 지금은 처량하니
靑史難垂異代名 후세의 역사책에 이름을 전하기 어려우리.
— 「元日」
절망적인 상황에서 한 해가 가고 옴은 또 다른 고초의 시간을 예고할 뿐이다. 그래도 「除夕」에서는 한 가닥의 간절한 희망이 엿보인다. 5,6구에서 6년 만에 해배된 송시열을 언급한 것이나, 반악의 이모(二毛)31)를 언급한 것은 매우 상징적이다. 새해에 32살이 되어 유배 온 지 6년이 되면 이곳을 떠나고 싶다는 염원이 들어있다.
註31) 「추흥부서(秋興賦序)」에 “余春秋三十有二 始見二毛”라 하였다.
화봉(華封)은 화봉삼축(華封三祝)이란 말로 자주 쓰인다. 화(華)는 옛날 중국의 지명이며, 봉(封)은 국경을 의미한다. 그러하니 화봉은 화라는 국경을 지키던 사람을 가리킨다. 그가 요(堯)임금을 만나서 수(壽)ㆍ부(富)ㆍ다남자(多男子)의 세 가지 축원을 하였다. '장자(莊子)', 「전자방(田子方)」에 나온다. 조정철이 임금에 대한 축원과 더불어 이 상황에서 구제해 줄 것을 기대하는 내용이다.
「元日」에서는 새해를 맞는 설렘과 희망은 찾아보기 힘들다. 5,6구에서 해국(海國)과 왕성(王城)은 지금과 예전의 상황을 선명하게 부각시킨다. 7,8구에서는 예전에 품었던 큰 포부는 사그라지고, 역사책에 이름도 남기지 못할 것 같다는 절망감을 토로하고 있다.
결국은 어사 박천형(朴天衡)이 장계에서 “제주 주성은 배 대는 곳과의 거리가 10리 미만의 곳입니다. 더구나 여기는 육지 상인들이 도회를 이루는 곳이므로 죄인 아무개와 같이 서울과 인연이 있는 자는 반드시 편지를 통하려 하거나 식량을 운반하려 할 것이니 두 현(정의, 대정)으로 이해하는 게 좋겠습니다.”라고 하였다. 32)이 장계에 홍락성(洪樂性)이 의견을 더하여33), 죄인들을 정의, 대정으로 분산 배치하는 일이 결정이 되었고, 이러한 내용이 공문으로 내려왔으니 이때가 1782년 2월 11일이었다.
註32) 이러한 상황은 「聞朝家以余移配旌義縣 旌乃濟州之屬邑 而事因御史朴天衡啓也 天衡之啓略曰 濟州州城去船所 不滿十里之地也 且是陸商都會之處 則如罪人某也之攀緣京洛者 必不無書札之通糧米之運 移配兩縣可也 正月十四日 判金吾洪樂性 以繡啓之大有意見稱之 移余配所於旌義意者 以州城猶爲善地 難贖孤臣之罪 又其水泉瘴癘勝於兩縣 未必殺人之故也 二月十一日關文入島 不勝悲寃 書此一絶」에 자세히 실려 있다.
註33) 조선왕조실록 1782년 1월 14일에 “판의금 홍낙성(洪樂性)이 아뢰기를, ‘제주 어사(濟州御史)의 별단(別單) 가운데 주성(州城)에서 선소(船所)까지의 거리가 10리도 못된다고 하니, 조정철(趙貞喆)·심익운(沈翼雲) 같은 역얼(逆孼)이 육지의 상고(商賈)들과 체결하여 서울의 소식을 교통(交通)할 수 있습니다. 의당 조정철은 정의현(旌義縣)에 이배(移配)하고 심익운은 대정현(大靜縣)에 이배하여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드디어 2월에 정의현(旌義縣)에 이배(移配)되었다. 정의현으로 가는 도중의 일이 시에 매우 상세하게 보인다. 거의 출발 즈음에 지은 시인 「暫憩東門橘上 臨發口號道感懷」에서 “머리 돌리니 저절로 슬픈 한에 젖어 눈 닿는 곳마다 마음 상함 배가 되네. 세 걸음마다 한 번 긴 한숨 쉬나, 산바람은 얼굴 가득 맑게 하네.(回頭自悲恨 觸目倍傷情 三步一長嘯 山風滿面淸)”라고 하여 참담한 심경을 토로하고 있다. 정의현에 도착해서의 감회 역시 「到配旌義縣」에 잘 드러나 있다.
이제부터 새로운 정의현 생활이 시작되었다. 기록에 따르면 정의현에서의 생활은 여러모로 더 열악했던 것으로 보인다. 무엇보다 견딜 수 없었던 것은 서울과의 연락이 완전히 두절되었다는 점이다. 어머니나 자식들과도 편지 한 장 주고받을 수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 점점 지쳐가고 있었으니 「詠枯松」에서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술회하고 있다. “한 그루 외로운 소나무 나이를 따지지 못하겠는데 추위에 가지, 잎은 절반쯤 떨어졌네. 어찌하면 비와 이슬이 봄철에만 두루 내려, 옛날 같은 센 바람 부는 늦은 계절에는 향기 풍길까(一樹孤松不記齡 天寒柯葉半凋零 如何雨露三春遍 依舊長風晩節馨)”
정의현에서의 생활은 자연 환경적인 요인으로의 괴로움과 관리들의 혹독한 취급으로 인한 이중고에 시달렸다. 자연 환경에 대한 괴로움은 「毒瘴中記事」에 구체적으로 잘 묘사되어 있다. 또, 관리들의 혹독한 취급은 「耽羅雜詠」에 잘 묘사되어 있다. 1783년이 되면 관리들의 가혹함이 극에 달하는데, 「聞全羅伯趙時偉 關飭罪人防守……」에서는 “…전략…한 번 먹고 한 번 입고 똥오줌 누는 것까지, 눕고 앉았고 말하고 침묵하는 것까지도, 빠짐없이 환히 캐고 몰래 살펴서 나는 듯이 관원 귀에 들어감 얼마나 신속한지…하략…(一喫一着及屎溺 或臥或坐曁語嘿 顯探密伺無遺漏 飛入官耳何神速)”라고 하였다.
歲色將窮雪意闌 이해가 다 가고 눈이 내리려 하니,
羇心世味共辛酸 나그네 세상 맛이 모두 신산하네.
繡肝紙腹成灰燼 마음속 그려낸 시문 잿더미 되었으니,
嗟惜吾生萬事艱 아 내 삶 모든 일 어려운 것 애석도하네.
「申大秊搜探文書間數日甚嚴 遂移置近日所作文字於隣人家 幷入於灰燼 此亦命窮所致賦一絶(신대년이 문서를 뒤지기를 며칠 간격으로 몹시 엄하게 했다. 마침내 근일에 지은 문자를 이웃집에 옮겨 두었는데 다 불에 타고 말았다. 이 또한 곤궁한 운명의 소치인지라 절구 한 수를 읊는다.」
이 시는 1787년에 기록된 것이다. 조정철의 시집에는 1784년까지의 시들은 있으나, 그 후의 시들은 드문드문 있다. 그리고 결국은 1788년 동짓달 11일이 마지막 기록이 된다. 위의 시처럼 이러한 경로로 그의 많은 시들이 사라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의 행적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제주도(濟州道) 정의현(旌義縣)에 1790년 9월까지 머물렀다. 그 후, 제주도(濟州道) 추자도(楸子島), 전라도(全羅道) 광양, 전라도(全羅道) 구례, 황해도(黃海道) 토산현(兎山縣) 등을 거쳐 한 많은 유배가 끝나게 된다. 스무 살의 젊은이가 오십 줄의 초로(初老)가 되어서야 유배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드라마틱하게도 조정철은 1811년 제주목사로 제주의 땅을 다시 밟는다. 제주를 떠난 지는 8년만이고, 해배(解配)된 지는 4년만의 일이었다. 비원(悲怨)의 땅을 바뀐 신분으로 관리가 되어 방문한 것이다. 그는 1812년 동래 부사로 부임할 때까지 1년간 제주에 머물렀다.
왜 그는 제주에 다시 돌아왔을까? 그의 시집 맨 끝에 「題洪娘墓」가 실려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를 살리기 위해 대신 죽어갈 수밖에 없었던 여인에 대한 미안함과 회한이 평생 마음에 있었다는 이야기다. 시신을 수습해 주지도, 직접 무덤을 만들어 주지도 못한 서러움이 그 안에 담겨 있다. 또, 홍랑이 죽은 해에 태어난 딸은 이때 이미 31세였다. 장성하도록 품안에서 키우지도 못한 딸아이에 대한 연민도 있었을 것이다. 북제주군(北濟州郡) 애월읍(涯月邑) 금덕리(今德里)에 아직도 남아 있는 홍랑의 비문[洪義女之墓]에 실린 전문은 다음과 같다. 34)
註34) 조정철의 자취를 찾을 수 있는 곳이 아직도 몇 곳이 있다. 한라산 백록담 물가에 조정철의 마애명이 남아 있으며, 전라남도 강진군 강진읍 서성리 영당 거리에 「濟州牧使趙公貞喆萬歲不忘碑」가 남아 있다. 김순이, 「조정철 목사의 숨결을 찾아서」, '제주도'(통권 109호), 44쪽 참조.
홍의녀는 향리 홍처훈의 딸이다. 정조 정유(1777년)에 내가 죄로 탐라에 안치되었는데 의녀가 때때로 나의 적거에 출입을 하였다. 신축(1781년)에 간사한 사람이 나를 얽어대기를 의녀로써 미끼를 삼았으나 죽일 기미를 잃게 되자 혈육을 낭자하게 만들었다. 의녀가 “공이 살게 되는 것은 내가 죽는 것에 달려있다”라고 말하며 이에 불복하였고 또 목을 매달아 죽었으니 윤5월 15일이었다. 그 후 31년 만에 내가 은혜를 입어 방어사로 와서 이 지방을 진무하게 되자 묘도를 상설하고 시로써 쓴다.
瘞玉埋香奄幾年 옥 묻고 향기 묻은 지 문득 몇 년이던가
誰將爾怨訴蒼天 누가 그대의 원통함을 푸른 하늘에 호소하리.
黃泉路邃歸何賴 황천길 깊은데 돌아갈 제 무엇을 의지했던가?
碧血藏深死亦緣 벽혈이 깊이 감추어져 있으니 죽어도 또한 인연 있네.
千古芳名蘅杜烈 천고의 꽃다운 이름은 형두의 빛남이오,
一門高節弟兄賢 한 가문의 높은 절개는 형제의 현명함이었네.
烏頭雙闕今難作 젊은 나이의 두 무덤 이제 살아나기 어려우니,
靑草應生馬鬣前 푸른 풀이 응당 무덤 앞에 나리라.
이 시는 시집에 「題洪娘墓」35)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다. 그 시의 주에는 “홍랑이 나에게 화가 미치는 것을 누그려 트리려고 목을 매어 죽었다. 또 그의 언니는 참판 이형규(李亨逵)의 부실(副室)이었는데 이공이 죽게 되자 또한 독약을 먹고 순절했다.(洪爲緩余禍遂, 雉懸而死, 又其兄爲李參判亨逵副室, 及李公卒, 亦服毒而殉)”라고 적혀 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홍랑의 딸을 구한 것은 다름 아닌 홍랑의 언니였다. 그에 대한 고마움을 여기에서 읽을 수 있다. 아마도 당시에 홍랑이 고문을 못 이기고 자백을 했다면, 조정철의 생명도 장담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피가 나고 살이 터지는 혹형 속에서 끝내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려는 일념으로 저항을 하다, 형세가 도저히 빠져나오지 못할 것으로 보이자 목을 매어 죽었으니 그 헌신적인 사랑이 지금에도 눈물겹다. 이 묘비로 그는 조금은 자책에서 벗어나지 않았을까? 그리도 험난한 유배지에서의 한 철을 조금이라도 윤색하여 기억할 수 있었을는지도 모른다. 또, 늦게야 만난 딸과의 감회는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구전으로 약간의 이야기가 전해 올 뿐이다. 36) 생사를 넘는 위급한 지경에 낳은 딸과 수십 년이 지나서야 가진 상봉의 감회는 기록을 확인하지 않아도 얼마나 감격스러웠을지는 충분히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註35) 洪義女鄕吏處勳女. 正宗丁酉, 余以罪置耽羅, 義女時出入余謫. 辛丑壬人欲搆余以義女餌, 殺機墮突, 血肉狼藉. 義女曰: “公之生, 在我一死” 旣不服, 又雉懸而殉, 閏五之十五日也. 後三十一年, 余蒙恩, 以防禦來, 鎭玆方, 象設墓道, 系以詩曰, 瘞玉埋香奄幾年, 誰將爾怨訴蒼天. 黃泉路邃歸何賴, 碧血藏深死亦緣. 千古芳名蘅杜烈, 一門高節弟兄賢. 烏頭雙闕今難作, 靑草應生馬鬣前.
註36) 조목사는 곽지(郭支) 마을에 농토(農土)를 4차에 걸쳐 총 7,000평(1차 2,500평, 2차 1,600평, 3차 1,700평, 4차 1,200평)을 사 주어 딸네 박씨 가문(朴氏家門)에 생계(生計)를 어렵지 않게 했다. 조원환, 양주조씨사료선집(보경문화사, 1994), 882쪽 참조.
이뿐 아니라 제주목사로 있는 동안의 치적(治積)도 적지 않았다. 동서성외곽(東西城外廓)을 개축(改築)하여 외구나 폭동에 대비했고 또 12개 과원(果園)을 설치하여 감귤재배(柑橘栽培)를 권장했다. 이것으로 만1년 동안의 짧은 제주목사 재임 기간을 마쳤다.
그래도 그의 말년은 평탄하였다. 1813년에는 충청도 관찰사로, 1818년에는 이조참의로, 1822년에는 3월에는 이조참판, 7월에는 성균관 대사성 등을 두루 역임하였다. 1830년 사헌부 대사헌, 지중추부사를 끝으로 관직에서 물러났다가, 1831년 향년 81세에 별세하였다. 다만 아쉬운 것은 유배의 전반기에 해당하는 기록만이 남아 있을 뿐 그의 원고 전체가 남아 있지 않다는 점이다. 처절한 아픔과 절망이 점철된 그의 시문이 후반기에는 어떠한 변모를 겪었을지 매우 궁금하다. 또 해배(解配)되었을 때의 시가 남아 있었더라면 얼마나 감격적이었을지 짐작이 되고도 남는다.
5. 결 론
본 논문은 조정철의 '정헌영해처감록을 텍스트로 하여 제주도라는 공간에서 한 유배인이 겪었던 곤욕과 사랑에 대해서 알아보았다. 여기에는 당파를 달리한 인물들의 처절한 복수와 증오가 얼마나 집요했는지가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또, 그러한 처절한 복수극을 목숨을 걸고 막아낸 여인과의 사랑도 있었다.
유배 문학에 대한 선행 연구가 많이 이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조정철에 대한 구체적인 연구 성과는 그리 많지 않다. 그의 시문은 유배 문학의 백미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유배지에 머물렀던 세월도 누구 못지않게 길었지만, 그가 남긴 시문은 유배인의 고통과 상심이 어떤 이보다 더욱 핍진하게 그려져 있다. 뿐만 아니라 그가 남긴 기록에는 제주의 풍광과 풍속이 매우 상세히 기술되어 있어 앞으로 제주사 연구에서 매우 중요한 자료로 인식될 필요가 있다.
본 논문은 이러한 그의 문학적 성과를 실제 사건의 추이에 맞추어 살펴보았다. 본 논문에서 얻은 성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목사, 현감이 유배인을 다루는 방식의 실제적인 모습을 엿볼 수 있었다. 음식이나 편지의 반입도 막고, 굴욕적인 점호, 집요한 수색과 감시는 어떠한 유배인의 기록보다 생생하고 절실하다. 둘째, 유배인의 실제적인 삶이 매우 소상하게 그려져 있다. 조정철의 시문은 날짜순으로 기록되어 있고 각 시문마다 제목과 주가 매우 상세히 병기되어 있어 사건의 전말과 유배인의 삶을 소상히 살펴볼 수 있다. 셋째 유배인의 심리 상태가 섬세하게 담겨 있다. 언제 해배(解配)될지도 모르는 절망적인 심리와 격절의 심회가 잘 드러나 있다. 넷째, 유배지에서 만난 여인과의 사랑이 그려져 있다. 신분을 뛰어넘은 아름다운 사랑이어서 더 애틋하다. 정말로 아름다운 사랑이란 격정의 사랑이 아닌, 의리와 같은 사랑이다. 자신의 몸을 희생하면서 사랑하는 이를 살려 내는 깊은 사랑이나, 그것을 잊지 않고 수십 년 후에 돌아와서 무덤에 빗돌을 세워 주는 사랑이나 아름답기는 마찬가지다. - 2007년 8월 20일
◇ 參考文獻◇
▶ 續明義錄
▶ 靜軒瀛海處坎錄
▶ 조선왕조실록
▶ 김봉현, 濟州道流人傳, 국서간행회, 1972.
▶ 김익수, 정헌영해처감록, 제주문화원, 2006.
▶ 소재영, 조선조 문학의 탐구, 아세아 문화사, 1997.
▶ 양순필, 조선조 유배문학 연구, 건국대 박사논문, 1982.
▶ 오갑균, 조선후기당쟁연구, 삼영사, 1999.
▶ 조원환, 양주조씨사료선집, 보경문화사,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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