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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벌 신사 우리 애인은
(슥3:1~10)
1. 대제사장 여호수아는 여호와의 천사 앞에 섰고 사탄은 그의 오른쪽에 서서 그를 대적하는 것을 여호와께서 내게 보이시니라
2.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여호와께서 너를 책망하노라 예루살렘을 택한 여호와께서 너를 책망하노라 이는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가 아니냐 하실 때에
3. 여호수아가 더러운 옷을 입고 천사 앞에 서 있는지라
4. 여호와께서 자기 앞에 선 자들에게 명령하사 그 더러운 옷을 벗기라 하시고 또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 죄악을 제거하여 버렸으니 네게 아름다운 옷을 입히리라 하시기로
5. 내가 말하되 정결한 관을 그의 머리에 씌우소서 하매 곧 정결한 관을 그 머리에 씌우며 옷을 입히고 여호와의 천사는 곁에 섰더라
오늘 우리가 읽은 부분은 스가랴의 여덟 가지 환상 중의 네 번째 환상입니다.
이 네 번째 환상의 말씀을 중심으로 <단벌신사 우리 애인은>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단벌신사 우리 애인은’
1970년대에 가수 김 상희 씨가 부르신 노래 중에 ‘단벌신사’라는 노래가 있는 것을 기억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그 가사가 이렇습니다.
“단벌신사 우리 애인은 서른한 살 노총각님, 단벌옷에 넥타이 두 개 언제나 변함없죠, 멋이야 없지만 마음만은 진실해, 주머니가 텅텅 비어 데이트를 못해도, 단벌신사 노총각님 당신을 사랑해요!”
이거 무슨 방언 같아요, 방언.
요즘의 세상에 사는 입장에서 보자면 마음으로 이해도 안가는 방언 같다 이겁니다.
‘단벌신사 우리 애인은 서른한 살 노총각님’
벌써 꼬질꼬질한 느낌이 확 들지 않습니까?
‘단벌옷에 넥타이 두 개 언제나 변함없죠,’
변함이 없는 게 좋지만 이런 건 좀 변화가 있으면 좋겠는데…
‘멋이야 없지만 마음만은 진실해,’
요즘 제일 안 통하는 말이 이것 아닙니까? 마음만 진실해서 어디다 쓰게요?
마음이 진실한 게 가치가 없다는 게 아니라, 그냥 우리가 그런 세태에서 살고 있다는 얘기를 하는 겁니다.
‘주머니가 텅텅 비어 데이트를 못해도’
이러면 끝이죠, 주머니가 텅텅 비어 데이트를 못하는데
‘단벌신사 노총각님 당신을 사랑해요’
요즘 같으면 미친 여자지요, 미친 아가씨입니다. 있을 수도 없는 얘기예요.
야~ 참, 우리가 이런 노래를 좋다고 부르면서 살았던 시절도 있어요.
‘단벌신사 노총각님 당신을 사랑해요’
여러분, 단벌신사가 되지 않으면 신앙인이 아닙니다.
이 ‘단벌신사’라고 하는 유행가의 가사가 도저히 요즘의 세태로서는 받아들일 수도 없는 그런 내용이고 ‘단벌신사’의 가사에 나오는 단벌신사의 모습은 패배자요 낙오자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자녀, 애인은 단벌신사가 아니면 안 됩니다.
오로지 하나님은 단벌신사만 사랑하십니다.
그것이 노총각이든 젊은 총각이든 노인이든 하여간 단벌신사가 되어야 하나님의 애인이 될 수 있고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오늘 이 넷째 환상은 성전재건 당시에 대제사장이었던 여호수아를 등장시키게 됩니다.
천사 앞에 여호수아가 서있고 (모세의 후계자 여호수아가 아닙니다) 그리고 그 여호수아 옆에 오른쪽으로 사탄이 있으면서 여호수아를 대적합니다.
이게 환상의 내용이에요.
그런데 도대체 왜 사탄이 대제사장 여호수아를 대적하는가 보았더니, 그게 궁금하지 않겠습니까? 대제사장이면 1년에 한 번씩 대 속죄일에 모든 선민을 대신해서 속죄 제사를 드리는 사람입니다.
근데 그 사람이 사탄이 대적할 수 있을 만큼 죄가 있다는 것이 이해가 안 가지 않습니까?
사탄이 대적할 수 있는 빌미는 언제나 우리의 죄에 있어요.
우리의 죄가 있기 때문에 사탄이 우리를 대적할 수 있는 여지를 찾게 됩니다.
우리가 죄가 없다 그러면 사탄이 우리를 대적할 수 없지요.
고소할 수 없다는 얘깁니다.
왜 대적하는지 가만히 들여다봤더니 여호수아 대제사장이 입고 있는 옷이 더러워요.
원래 대제사장은 아주 거룩하게 구별된 옷을 입게 됩니다.
그런데 하여간 이 환상에서는 대제사장인데도 불구하고 또 속죄 제사를 수행해야 될 임무를 띠고 있는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옷이 더럽습니다.
여기서 이 환상은 뒷부분에 메시아 예언이 나옵니다.
메시아가 도래하게 될 때에 일어날 일, 스가랴 입장에서 지금 당장으로 봐서는 성전재건의 의미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환상을 통해서 계속해서 하나님께 그 의미를 전달받습니다.
근데 성전재건의 진정한 완성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사건에서 완성이 됩니다.
성전의 의미가 뭐라고요?
성전의 의미는 번제에 집중되어 있고, 번제가 왜 드려집니까?
하나님과 만나기 위해서 내가 거룩해져야 되기 때문에.
그래서 그 여러 가지 측면을 얘기해야 하고, 오늘 또 성전 재건하는 사람들에게 꼭 들려주어야 할 또 다른 측면에서의 이야기가 전달되는데, 대제사장 여호수아가 나온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도래하신 시간이 되면 우리 모두가 제사장이 된 것처럼 하나님과 대면하게 되는 자리에 서게 될 것이라는 걸 예언하는 거죠.
그러니까 우리를 대표해서 지금 그 당시의 대제사장인 여호수아가 꿈에 등장을 한 겁니다.
그런데 그 옷이 더럽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나 가만 봤더니, 대적하는 사탄을 나무라시면서 더러운 옷을 벗기고 아름다운 옷으로 갈아입히십니다.
그러면서 하신 말씀이 ‘내가 너의 죄악을 제거하여 버렸으니까 아름다운 옷을 입히겠다’
이러면서 환상이 진행됩니다.
자, 여기서 더러운 옷을 벗어버리고 아름다운 옷을 입히시면서 옷을 벗기신 것으로 죄악을 제거하셨다고 하는 이 환상이 읽어 내려가기가 조금 껄끄러운 꺼림칙한 면이 있습니다.
어떤 면이 그렇습니까?
죄악을 제거하시는데 옷만 바꿔 입혀서 될까? 싶은 생각이 든다는 거예요.
예를 들어서, 뉴스를 봤더니 서울역에 노숙자분들이 많이 계시나 봐요, 요즘 서울역 가본 지가 오래 돼서 잘 모르겠는데, 노숙자분들을 강제로 바깥으로 내보내게 되었다는 것이에요.
서울역을 이용하는 시민들에게 위협이 되기도 하고 불편하게 하니까, 뭐 그렇기도 하겠지요.
노숙자분들의 얘기가 나왔으니까 노숙자로 예를 들어봅니다.
1년 동안 노숙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씻지를 못하죠. 목욕을 못합니다.
당연히 1년 동안 옷을 갈아입을 수도 없었을 것이에요. 옷도 더러워졌지요.
그런데 1년 노숙하신 분을 옷만 갈아입힌다고 그게 될 일입니까?
그러면 그 몸은 어떻겠어요? 1년 동안 씻지 않은 그 위에 새 옷을 입힌다고 깨끗해지겠습니까?
우리의 죄악이라고 하는 것은 1년 동안 노숙하시면서 목욕을 안 해서 몸이 불결해진 것은 비교가 안 되는 불결함이거든요?
근데 옷 갈아입혔다고 죄악이 제거가 됩니까?
그러니까 이 환상에 나오는 옷의 의미가 뭔가 특별하게 우리가 주의해서 이해를 해야 되는 거예요.
우리가 지금 생각하고 있는 이런 옷, 이것이 비유로 등장해서 그냥 이대로 쓰이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면 옷이 뭘까요, 옷이?
옷이라는 비유가 뜻하는 바가 뭡니까?
그냥 단순히 몸에 걸치는 것이 아니라 신분을 말합니다, 신분.
신분이라는 게 뭐죠, 여러분?
사회적으로 내게 주어지는 위치입니다.
예를 들어 가정이라는 사회가 있습니다.
동네라는 사회가 있고, 국가라는 사회가 있고, 직장이라는 사회가 있고, 학교라는 사회가 있습니다.
그런데 가정이라는 사회 안에서 위치가 예를 들어 엄마라고 한다면 그 엄마라는 것이 옷이라는 겁니다.
당신은 누굽니까?
나는 아무개의 엄마입니다.
직장에 가면 보험설계사로 활동을 하십니다. 당신은 누굽니까?
직장이라는 사회 속에서 나는 보험설계사입니다.
시댁에 갑니다, 그러면 당신은 누굽니까?
아, 나는 며느리입니다.
이 ‘나’라는 내용들이 옷이라는 겁니다.
그것이 신분이고 내가 처한 사회에 따라서 내게 주어지는 위치, 내게 부여되는 타이틀, 이게 바로 옷이에요.
‘나’라는 의식 속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죠.
아내라는 것, 엄마라는 것, 보험설계사라는 것, 누구의 딸이라는 것, 누구의 며느리라는 것, 어느 선생님의 제자라는 것, 이게 다 옷이라는 거예요.
‘나’라는 의식 속에 있는 이런 신분이 다 옷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이게 더러워졌다는 얘기예요.
그리고 이게 더러워질 경우에, 예를 들어 ‘내가 아빠다’라고 할 때 그 아빠가 더러워지면 사탄이 대적하며 공격해 들어갈 수 있는 빌미를 제공하게 되는 것이고, 그것이 죄악이라는 겁니다.
더러워진 아빠, 더러워진 엄마, 더러워진 직장인, 더러워진 대통령, 더러워진 장관, 더러워진 선생님, 모든 신분이 옷인데 그 신분이 더러워졌어요.
그러니까 내가 더러워진 것이죠.
이 세상이 나한테 부여한 신분이 더러워진 것이고 내가 더러워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악을 제거한다는 것은 더러워진 ‘나’가 없어진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더러워진 아빠가 끝난다는 거예요.
아빠라는 신분을 벗어버립니다.
아빠 그만 두는 거예요, 하나님 앞에서 죄악이 제거되려면 아빠 그만둬야 되고, 남편 그만둬야 되고, 직장인 그만둬야 되고, 대통령 그만둬야 되는 겁니다, 하나님 앞에서.
그게 옷을 벗는 거예요, 더러워진 옷을 벗는 겁니다.
아니 말이 됩니까? 내가 지금 아빤데 애가 아직 어리고, 또 다 컸어도 그렇지, 한번 아빠면 영원히 아빠지 어떻게 아빠를 그만 두느냐?
아빠를 그만 두지 않으면 죄악이 제거된 게 아니에요.
옷이라는 게 신분을 말하기 때문에, 내 사회적인 위치를 말하기 때문에, 내가 엄마라는 타이틀 그만 두지 않으면 여러분은 죄악을 제거 받은 자들이 아닙니다.
십자가복음은 옷 벗기는 일이고, 옷 벗는다는 것은 아빠를 그만둔다는 것이고, 엄마 그만둔다는 것이고, 직장인 그만둔다는 것이에요.
내가 아들입니까? 아들 그만둔다는 것입니다.
아 그게 말이 되냐?
글쎄요, 저도 모르겠네요, 말이 되는지.
말씀을 말씀대로 차근차근 봐나가면 그렇다는 거예요.
그러면 그 말씀이 잘못된 것일까요?
자, 우선 내가 아빤데 왜 아빠 됨 자체가 더럽냐? 아빠 됨이 더럽다는 거예요.
여러분, ‘마음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라’
언제나 죄의 기준은 여기서 출발합니다.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라’ 딴 거에 마음을 주는 게 죄악인 것이에요.
그러니까 쉽게 말하면 아빠노릇, 엄마노릇을 합니다.
그런데 아빠노릇에 마음을 들이잖아요? 그게 죄악입니다.
마음이라는 것은 원래 하나님께만 드려야 되는 거예요.
더러워짐과 청결함의 차이가 뭐라고 했지요?
있어야 될 것이 있어야 될 자리에 있는 게 청결함이에요.
아무리 깨끗한 밥이라도 그 밥이 책상 위의 책꽂이에 있으면 그건 불결해지고 더러워지는 겁니다.
우리 마음이 본래 더러운 게 아니에요.
그런데 그 마음이 있어야 될 자리가 아닌 딴 자리에 있으면 더러워지는 겁니다.
아빠노릇을 하면서 마음 썼지요? 더러워진 거예요.
마치 이런 겁니다, 아빠라는 게 옷이라고 그랬죠?
지금도 제가 말씀드리면서 침이 계속해서 침샘에서 나와서 목구멍으로 넘어가고 있습니다.
입에 담기도 하고 계속 나오기도 하고 그래서 삼키기도 합니다.
침 자체가 더러운 게 아니니까.
그런데 그 침을 내 옷에다 계속 뱉는다고 생각해 보세요.
마찬가집니다, 그게 더러워지죠. 계속 내가 침을 뱉고 있어요.
내가 마음을 쓰면서 아빠노릇 하잖아요? 마음을 쓰면서 엄마노릇 하고, 마음 쓰면서 직장인노릇 하고, 국민들에 대하여 마음 쓰면서 대통령노릇 하지 않습니까?
그러면 내가 내 옷에 침 뱉고 있는 것이고 더러워지는 겁니다, 하나님께 가야 될 마음을 자꾸 내가 아빠노릇에 쓰고 있으니까.
그러면 도대체 어떻게 하란 말이냐? 내가 지금 아빤데.
여러분, 아빠 아니에요.
여러분이 아빠고 엄마고 직장인이고 선생님이고 제자니까 여러분이 아직 죄악이 제거되지 않고 있다는 겁니다.
십자가복음의 예수님을 믿어도 아직 죄악이 제거되지 않고 있는 이유가 뭐냐 하면 여러분이 아직도 여러분을 아빠라고 생각하고 있으니까, 여러분을 엄마라고 생각하고 있으니까.
이 세상이 준 신분을 ‘나’라고 생각하고 있으니까 죄악이 제거되지 않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 도대체 어떡하란 말이냐?
오늘 우리가 읽지 않은 본문 8절 마지막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내 종 싹을 나게 하리라’ 이게 메시아 탄생을 말하는 겁니다.
예수님을 내 종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싹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아들이에요. 그리고 당신 자신이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이신 분이 이 세상으로 내려와서 사람 사회 속에 끼어들어갈 때, 옷이 하나 주어집니다, 입고 다니실 옷이.
그게 ‘종’이라는 옷이에요, 종.
예수님도 이 땅에 태어나셔서, 어머니가 계시고 아버지가 계셨어요. 마리아와 요셉.
형제들이 있었는데 형제 중에 맏이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이 있었기 때문에 세상적인 신분으로 말하면 선생입니다.
그리고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등 이 귀족층이 예수님을 죄인의 친구라고 타이틀을 붙여주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어떤 옷도 입지 않으셨습니다.
오직 단벌신사로 살았어요.
하나님의 종이라는 유일한 옷을 입고 사셨습니다.
자, 이게 무슨 얘기냐 하면,
예수님께 형제들이 비난을 합니다.
왜 세상에 나서서 자기를 드러내지 않고 숨어 지내느냐?
이때 그 형제들의 맏형이라는 옷을 입고 맏형이라는 신분에서 그들을 대하지 않으셨습니다.
마리아가 예수님께 와서 포도주가 떨어졌다고 얘기합니다.
마리아의 아들로서 마리아를 상대하지 않으십니다.
형제를 대할 때건 마리아를 대할 때건 언제나 하나님의 종이라는 옷으로 대합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대하면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다는 그런 말씀은 하지 마세요!’라고 얘기합니다.
그 제자들에게 선생으로 대하지 않으십니다, 오직 하나님의 종으로써 제자들을 대하십니다.
선생이라는 옷을 안 입으신다는 거예요.
선생이라는 옷을 입고 만약에 제자들을 대하셨다면 선생이라는 옷에 예수님도 침을 뱉으시는 것이 됩니다.
마리아에게 아들로서 대하셨다면 예수님도 당신의 아들이라는 옷에 침을 뱉으며 더러워지시는 죄악 속에 빠지셨을 겁니다마는 예수님은 언제나 하나님의 종이라는 유일하게 주어진 단 하나의 옷을 입으시고 어머니 마리아도 대하시고, 형제들도 대하시고, 제자들도 대하셨습니다.
여러분, 주님의 십자가복음에서 우리가 이 세상에 대해서 죽습니다.
마음이 사랑하는 모든 관계에 대해서 다 죽고 하나님에 대해서만 살아납니다.
이게 부활이에요, 하나님에 대해서만 살아납니다.
우리가 어제는 이 똑같은 상황을 가지고 눈으로 얘기했어요.
이 세상에서 내가 보는 모든 것들에 대해서 내 시신경은 죽어요.
나는 단지 하나님의 눈동자가 될 뿐이지 그 눈동자와 연결된 시신경의 주인이 아닙니다.
‘나’라는 눈동자와 연결된 시신경의 주인은 하나님이세요.
그래서 오늘도 본문 나머지 부분을 읽어보면 9절에 눈 얘기가 나옵니다.
주님께서 돌로 비유되면서 그 돌에 일곱 개의 눈이 있다고 나와요.
이처럼 성전이 재건될 때 일어날 일, 주님의 십자가복음을 받아들일 때 일어날 일을 여러 가지 측면에서 계속해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제 이런 겁니다.
십자가복음을 받아들였잖아요?
그러면 이제 아빠 된 옷을 벗어버린다는 거예요, 이제 아빠 아닙니다.
남편 된 옷을 벗어버리는 겁니다.
아내 된 옷을 벗어버리는 겁니다.
이게 성전에서 일어나는 일이고, 성전의 의미가 완성되는 십자가복음 속에서 일어나는 일이에요.
이제 아빠도 아니고, 직장인도 아니에요, 대통령도 아니고 교수도 아니고, 난 그 무엇도 그 누구도 아닙니다.
난 단벌신사예요, 오직 하나님의 종이라는 옷을 입게 됩니다.
십자가복음을 받아들여서 모든 걸 끊고 하나님 앞에 서면, 물론 하나님 앞에서 나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만은 하나님의 아들이고, 하나님의 애인이고, 하나님의 아내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의 자녀요, 그 하나님의 애인이고, 그 하나님의 아내인 내가 이 세상으로 보내어지게 되면 세상 사람들 사이에서 단벌로 살아가는 자가 됩니다.
하나님의 종이라는 옷 하나만을 입고 삽니다.
그래서 이제는 아내 기쁘게 해주려고 이벤트 하지 마세요.
그러시면 안돼요.
하나님 기쁘게 해드리려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아내에게 행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종으로서.
그래서 오늘 본문에 보면 여러분, 7절에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에 네가 만일 내 도를 행하며 내 규례를 지키면’이라는 말이 나와요.
여호수아에게 옷을 갈아입히고 하는 말씀이에요, ‘내 도를 행하고 내 규례를 지키면’ 이게 무슨 말입니까?
아내가 이벤트를 원합니다.
그래서 아내에게 마음을 쓰면서 남편노릇을 하느라고 이벤트를 준비해서 해줍니다.
그러면 아내의 도와 아내의 규례를 지키는 겁니다.
자식에게 이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엄마, 아빠로서 자식에게 이것저것을 마음을 써가며 해줍니다.
그러면 자식의 규례와 자식의 도를 지키는 겁니다.
그리고 나는 아빠로서 더러워지고 엄마로서 더러워지고 끊임없이 마음을 자식에게 씀으로써 죄악이 제거되지 않은 상태에서 삶을 살아가게 되고 끊임없이 사탄이 나를 대적할 수 있는 빌미를 제공하며 살아가면서 모든 걱정과 불만과 원통함 이 모든 것이 사탄의 대적으로부터 내게 주어지는 것이에요.
내 마음에 불만이 생기고 원망이 생기고 걱정과 불안감이 생긴다. 이것은 사탄이 대적하고 있다는 증거고 그렇다면 내가 더럽다는 증거고, 더러운 이유는 내가 지금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종이라는 옷 말고 이 세상에서 내게 부여된 신분의 옷을 입고 거기에 마음을 쓰며 충실하기 때문에 더러워졌다는 것을 빨리 깨달아야 돼요.
자식을 앞에 두고 봅니다, 나는 자식에 대해 죽은 자예요.
그 자식에 대해서는 하나님만이 살아계시면 됩니다.
나는 하나님의 종이에요.
그래서 아빠로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종으로서 내 자식에게 하나님이 원하시는 행동을 하는 겁니다.
내가 한 행동이 아내에게 이벤트 성이 담겨지게 될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나는 이벤트를 행하지 않습니다.
나는 오직 하나님의 법과 하나님의 도와 하나님의 규례를 지켜나가는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그런 걸 아느냐?
주님의 십자가 붙잡고 아내에 대해서 완전히 남편으로서 옷을 벗어버리고 남편 됨이 죽어버리면, 그리고 하나님의 종의 옷을 입으면 하나님께서 알려주실 것이에요.
아내에게 무엇을 해라, 자식에게 무엇을 해라, 직장에서는 직장인의 신분을 벗어버리고 하나님의 종의 신분을 갖고서 무엇을 해라, 하나님이 가르쳐주십니다.
직장인 됨을 잊어버릴 정도로 십자가에서 죽으면, 장로님으로서 이 명박 대통령은 어떻게 하시면 됩니까?
주님의 십자가 붙잡고 ‘내가 대통령이다’라는 이 신분에 대해 죽어버리는 겁니다.
그리고 오직 나라가 보이고 국민이 보이고 백성이 보이던 마음 상태에서 하나님만이 가득히 보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종의 옷을 입습니다.
나라에 대해서 전혀 몰라도 하나님이 알고계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시키시는 일만 하면 내가 참모들을 데리고 주야를 자지 않고 머리를 짜내는 것보다도 훨씬 더 멋진 정책도 나올 수가 있다는 거예요.
여러분, 십자가복음을 받아들이셨습니까?
그러면 단벌옷이라야 돼요.
이 세상이 나에게 주는 모든 신분이 다 십자가에서 죽어야 됩니다.
이 세상이 내게 준 신분에 내가 마음을 쓰면 여전히 더러움 속에서 살게 되고, 내가 나한테 침을 뱉는 게 되어버려요.
오직 하나님의 종으로서 아내 앞에 다가가고 남편 앞에 다가가고 자식 앞에, 직장에, 관공서에, 학교에 우리는 가는 거예요.
십자가복음에 충실해서 제대로 죽으면 하나님의 법도와 규례가 그때그때 필요한 대로 우리에게 알려지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종이라는 이 단벌옷의 신사만이 주님의 애인이 될 수 있습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너무나 많은 옷을 번갈아 입어가면서 우리 마음을 쓰며 마치 내 옷에 침 뱉듯이 더러움 속에서 살았습니다.
이제 아빠노릇 중단하고 엄마노릇 중단하고, 직장인노릇 중단하고 사회적인 직분노릇 중단하느라 주님의 십자가 붙잡고 죽기를 원합니다.
죽은 자가 되게 해 주시고 하나님의 종이라는 옷, 단벌옷을 입고 이 세상 사람들을 향해 나갈 때 하나님이 원하시는 규례와 법도만을 그에게 행하는 자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