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간 잘들 계셨습니까?
몇 년 전에 return of nimicypals 닉으로 몇 번 글을 올린 적 있습니다.
찾아보니 2014년도 즈음 되는 것 같습니다. 글을 쓴다는게 여간 많은 시간이
소요되는데다 중독성이 있는지라, 먹고사니즘에 건강문제 등 여러 사정이
겹쳐 부득이 탈퇴를 하고선 간간히 들어와 리딩만 하던 세월이 벌써 수년이 흘렀습니다.
다행이 중간에 자료실 등 여러 게시판이 오픈되는 횡재를 만나 가입하지 않고도
리딩이 가능한 시기가 있었는데, 자료실의 경우 최근에 또 비회원의 읽기가 안되더군요.
여하튼 반갑고 수고들 많으십니다. 저는 이 카페가 여호와의 증인 한국지부와 조직이 아무런 감시나
견제없이 더 쉽게 부패하고 독단적이 되지 않도록 하는데 크게 기여해왔다고 생각합니다.
사회로 따지자면 언론의 감시 견제 그 기능을 톡톡히 해온 것이죠. 어떤 조직이든지
내부적으로 쉬쉬하는 조직은 썩기 마련입니다. 다행이 이 카페를 통해 조직내부에 직간접으로
연계된 분들의 정보와 소식을 통해서 문제들이 알려지고 드러나고 비평내지는 비판과 비난을
받는 메커니즘을 통해서 한국지부가 좀 더 스스로 경계를 하고 조심하도록 해왔다고 생각합니다.
워낙 안하무인지만, 그래도...
한국지부는 분명히 이 사이트를 봅니다. 일례로 2015년에 통치체란 명칭이 중앙장로회로 바뀐것만
봐도 그렇습니다. 조직의 생리로 봤을 때, 외부의 지속적인 문제지적없이 내부에서 자연발생적으로
변경했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반세기 이상 자리잡아 한국의 경우 거의 신의 대리통치 수준의 신격적
권위로까지 여겨지고 한국 증인들의 뇌리에 절대적인 순종과 경외대상으로까지 각인된 이 통치체란
용어를 외부의 지속적인 문제지적없이 스스로 시대정신을 반영하여 고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이 통치체란 용어의 변경 이면의 자세한 사정과 관련된 한 게시글을 보았습니다. 중국선교와
한국지부 번역부의 젊은 세대의 분위기가 반영된 것이라고 하지만, 이 카페가 오랜동안 지속적으로
줄기차게 governing body가 시대에 맞지 않는 보편적인 사용의 의미에서 터무니없이 벗어난 권위적인
오역에서 비롯된 단어라고 한 합리적인 지적이 영향을 미치고 그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되지 않았다면
감히 통치체의 권위에 맞서는 불순종적인 용어변경을 꿈이나 꾸었겠습니까?
2014년 제가 올린 여러 글들에서 저 역시 통치체가 언급될 때마다 통치체라 부르지 않고 "여호와의
증인의 미국본부 운영진 혹은 이사회(한국명은 거만하게도 통치체)"라고 번거로움을 무릎쓰고
지속적으로 반복해서 통치체를 그렇게 불렀습니다. 마침내 2015년에 한국지부가 그 문제의 용어를
중앙장로회로 바꿨더군요. 이 현상은 두 가지 측면에서 큰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오랜 동안 수만에서
근 십만명의 한국 증인 신자들의 뇌리에 순종이란 미명으로 죽으라면 죽는 시늉까지 할 정도의 천황이나
토테미즘 수준으로 신격화 각인되었던 통치체란 용어가 단지 오역에 지나지 않았던 사실의 충격을 넘어서,
본부 운영진을 좀 더 동료인간으로 동료 형제로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대단히 큰 의미가 있습니다. 통치체 상황에서는 모든게 절대적이고 일방적이었습니다. 하지만 신격화가
많이 걷힌 중앙장로회 상황에서는 1세기 당시처럼 좀 더 원활한 커뮤니케이션도 가능하겠다는 분위기와
희망적 상황이 도래하게 된 것입니다. 실제로는 그렇지 않겠지만, 적어도 인식상의 차이는 적지않다고
생각됩니다.
또 하나는 사도들이 명백히 금지한 것 외에 여호와의 증인 본부나 지부 운영진의 지침이나 규정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며 오래되고 심각한 오류나 잘못이 있을 수 있으며, 재론의 여지가 얼마든지 있다는
사실입니다. 한국지부는 "의인의 빛은 점점..." 운운 하겠지만, 문제는 합리적 조정이나 변화가 느려도
너무 느려터졌다는 것입니다. 통치체란 오역에 더해 캔디스 콘티 건을 한 번 보십시오. 의인이 스스로 점점
빛을 밝히는 것이 아니라, 폐쇄된 권위적 환경에서 퇴행적 관행과 아집에 찌들어 버티다가 결국 비싼 댓가를
치러가며 합리적 변화와 개혁을 당한 것이죠. 오히려 세상의 지성과 인권과 정부정책과 법과 장치들이
훨씬 몇발짝 앞서가고 있습니다. 의인의 빛이 물론 서서히 빛나는 경향이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의인의
빛은 언제나 적어도 세상의 빛보다 앞서 비추어야 할 것입니다. 어둠의 세상에 촛불을 밝혀 선도하는 그런
빛이어야 합니다. 하지만 통치체나 캔디스 콘티의 경우에서 보듯이 지나치게 느리고 폐쇄된 증인 사회의
어두운 곳에 오히려 세상이 빛을 비추었습니다. 웃기는 현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캔디스 콘티 건과 관련해서는 아직도 조직차원에서의 공개적 사과도 없습니다. 교황도 카톨릭의 문제를 사과하고,
정부도 때론 공개 사과를 하는데, 여호와의 증인만큼은 무슨 통배짱인지, 사과는 커녕, 자신의 신자들에게까지
비밀로하며 쉬쉬해왔습니다. 그러면서 지방회중 장로들만 볼 수 있는 편지로 CIA나 KGB 스타일의 정말 그래도
되는건지 하는 형태의 비밀 정보를 다루는 형식으로 지침을 하달하는 수준입니다.
최근에 증인관련 소식에 올라온 가족단절 인권문제도 마찬가지의 폐단입니다. 성경에 지속적으로 부도덕한
행위를 하는 사람들을 회중에서 내쫓으라는 명문이 있고, 이 가르침을 가지고 오지 않은 사람과는
인사도 말라는 명확한 문장이 있습니다만, 과연 그 문장들이 보편적인 인륜인 가족관계 단절까지 의미하는
건지는 재론의 여지가 매우 컵니다. 개중에는 여호와의 증인 종교 자체와 내부의 불합리한 행태나
회중내의 형제자매들의 행태에 크게 실망해서 그만두는게 낫겠다고 판단해 그만두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에 대해서는 오히려 증인조직이 반성을 해야지 왜 가족관계를 단절시키는가 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