빤스 도둑
나는 22살 1982년 9월 14일 빡빡머리로 논산 제2훈련소에 군 입대를 하였다. 그 해 가을 가뭄이 어찌나 심하던지 연무대 주변 훈련장의 붉으스런 황토 먼지를 6주간 군사기초훈련을 받으면서 평생 마실 것을 다 마신 것 같다. 훈련받고 부대로 돌아오는 길가의 추광(秋光)에 농익어가는 새빨간 능금의 유혹(誘惑)은 정말로 참을 수가 없을 정도였는데, 나로 하여금 훗날 사과 과수원집 딸과 결혼을 하게 된 계기가 되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논산에서 무사히 훈련을 마친 우리 일행을 실은 야간열차는, 북쪽 전방으로 밤새 달리더니 새벽녘 춘천역 주변 101대기보충대로 떨쳐놓았다. 그곳에서 자대배치 받기위해 며칠 쉬는 동안 우리들은 최전방으로 배치 될 가 두려워, 닭장에 닭 잡으려고 들어온 주인에게 붙잡힐까 불안에 떠는 닭처럼 이 눈치 저 눈치 보며 하루하루를 긴장 속에 보냈다. 그러던 어느 날 호리호리하고 날카로워 보이는 기간 병이 나를 비롯하여 위생병 주특기를 가진 동료 두 명을 연병장으로 부르더니 “앉아! 일어서!”를 수차례 시켰다. 우리는 속으로 보충대 주변의 군병원(軍病院)으로 보내주려나 하고 그 들 지시에 열심히 따라 했는데, 자기들끼리 귓속말로 소근 대더니 그 중 나를 지명했다. 순간 나는 군대생활이 잘 풀리려나. 하고 좋아하는 찰나, “이 놈 안경착용자네”하며 나에게 실망의 눈빛을 보냈다. 군 입대 전부터 나는 눈이 나빠도 돈이 없어 그 냥 불편하게 지냈으나 훈련소에서 안경을 만들어 주어 사격할 때만 썼는데 나의 병적기록부에 찍힌 ‘안경착용’ 도장에 그들은 나 보다 조금 왜소하지만 안성이 고향인 동료를 차출하여 떠났다. 대어(大魚)를 잡다 놓친 낚시꾼의 심정보다 더 아쉬움에 그 날 석식(夕食)은 밥맛이 없어 먹는 둥 마는 둥 했다. 그 후 나는 그 동료를 15개월 뒤 위생병 중 꽃보직인 후송병을 하면서 환자 인솔하러 다니던 중 원주 51후송병원 정형외과 병상(病床)에서 우연히 해후(邂逅)하였는데 양 팔이 부러져 입원하고 있었다. 반갑고 의아해 어떻게 된 것이냐고 물으니, 울상을 지며 비행기에서 낙하훈련을 받다가 떨어졌다며 목숨만 건진 것도 다행이라 하였다. 나의 안경착용 때문에 특수부대로 대신 간 전우에게 미안하기도 하여 빵과 우유를 사주고 우리는 또 헤어졌다. 인간지사(人間之事 )새옹지마(塞翁之馬)의 의미를 처음 느껴 본 순간 이였다.
어쨌든 나는 그 해 101보충대에서 11월 낙엽이 서리를 맞아 힘없이 떨어지는 어느 추운 날 강원도 홍천 11사단 00연대의무중대로 자대배치를 받아 그 당시 유행하던 이용의 ‘잊혀진 계절’과 나훈아의 ‘울긴 왜울어’ ‘대동강 편지’를 수차례 목 놓아 부르는 등의 혹독한 신고식을 통과하고 힘 든 이등병시절을 시작하게 되었다. 찬 서리 맞은 낙엽처리와 각종 작업 등 온갖 궂은일을 다 한데다 손도 제대로 못 씻어 손이 트였지만 위생병임에도 치료도 해 주지 않는 비정(非情)한 선임들 속에서 우리 졸병들은 몰래 반창고를 훔쳐서 볼펜에 감아 두었다가 손가락 트인 곳을 감는 것이 유일한 임시방편의 치료였으며, 반창고라도 감지 않으면 당시 강원도 추위가 트인 손가락 주변의 통각(痛覺)을 가만 두지 않았다. 물 한 바가지로 얼굴과 손발 씻고 양말까지 빨았다면 누가 믿으랴. 발 냄새나면 혼 날까봐 발가락에 치약을 바르면 다음 날 발가락 틈새가 찢어지는 악순환의 고통 이였다. 말로만 위생병이지 졸병은 인간이하 취급을 받았으며 보병보다도 비위생적인 비위생병 이였다.
그 중에서 졸병에게 가장 난처하게 한 것은 막사 뒤편에 널어놓은 졸병들의 빨래가 없어지는 것이다. 당시만 해도 2종(피복) 보급이 원활치 않아 선임들은 신병이 훈련소에서 갓 받아온 A급 런닝 ․ 빤스 ․ 양말 등을 호시탐탐 노렸는데 비표시(秘標示)를 해도 선임이 슬쩍 가져가버리면 우리는 말도 못하고 건조대 구석의 비바람에 바래서 선임들이 챙기지 않는 C급들만 입을 수밖에 없었는데, 그나마 그것이라도 있으면 다행 이였다. 토요일 오후부터 일요일은 졸병이 극히 개인시간이 일부 허용되어 빨래도 하고 선임들과 축구도 하며 휴식을 취했다.
그러던 어느 일요일, 나 역시 서너 개의 빤스를 다 잃어버리고 달랑 1개를 건조대에 널고 노 팬티 차림의 추리닝을 입고 강제 동원(?)되어 축구시합을 하게 되었는데 평일의 스트레스를 이 때 다 풀어 버리는 것이다. 나는 축구를 곧잘 하는 편이라서 있는 힘을 다해 상대선수를 이리저리 제치고 골인을 넣어 선임에게 귀여움을 받는 유일한 시간 이였다. 또한, 미운 선임의 공을 뺏을 때 미친척하고 정강이를 차도 무식한 군대축구라서 큰 문제가 되 질 않았다. 그러나 문제의 그 날은 전라도 정읍이 고향인 내 밑의 전우가 지금 소래포구에서 약국하고 있는 선임을 일부러 걷어찼다고 해서 게임 도중, 그 선임한테 조인트 몇 대를 맞자 상대 측 선임이 자기편을 때렸다고 주먹질 하다가 쇄골이 골절되어 응급 후송하는 웃지 못 할 일이 생겼다. 분위기는 순식간에 살벌해지고 선임은 군기 빠졌다는 명분으로 중대원 전원을 목봉체조로 들볶았는데 어차피 군대축구는 이기나 지나 온갖 이유로 체벌은 끝이 없었다. 그러나 나는 그 날 널어놓은 빤스가 없어질까 마음은 온통 막사 뒤 건조대에 가 있었는데, 개인행동이 불가해 가 볼 수도 없는 가련한 이등병 신세였다.
드디어 선임들의 행패(?)는 끝나고 세면장으로 흩어질 때 얼른 막사 뒤로 가보니 그토록 걱정했던 내 빤스를 널어놓은 자리는 휑하니 비워있고 왕고참들 빨래만 널 수 있는 양지바른 전용 빨랫줄에 이천 쌀로 갓 지은 햅밥같이 하얗다 못해 파르스름하기 까지 한 초A급 빤스가 유일하게 한 장 널려 있는 것이 아닌가. 주위를 보니 마침 다행인지 불행인지 아무도 없었다. 순간 선악의 갈등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어차피 오늘 노팬티 차림으로 야간점호시간을 받을 수는 없지 않는가. 만약에 노팬티 차림으로 점호를 받다가 나로 인해 선임하사가 단체 벌을 주게 되면 요령 없는 놈으로 찍혀 정말이지 나는 군대생활 끝장이다 라는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벌써 선임 팬티는 내 품안에 들어와 있었고 화장실로 냅다 뛰고 있었다. 몰려오는 거친 숨을 고르고 화장실의 안에서 빤스를 자세히 보니, 안 쪽 상표 딱지 있는 곳에 “CHO"라고 비표시가 되어 있지 않는가. 아~ 나는 단말마 같은 신흠소리가 절로 나왔다. 우리 중대의 유일한 하느님과 동기동창이시며 최고참이신 전역이 얼마 남지 않은 목포가 고향인 조정택 병장의 것이 아닌가. 정말 앞이 캄캄했지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진퇴양난 이였다. 도로 원위치로 갖다 놓을까 했지만 그것도 졸병은 여의치가 않았다. 할 수 없이 비표시의 상표를 뜯어내고 부리나케 입고서 똥 싸다 만 놈 모습으로 내무반으로 달려가는데 도착하기도 전에 조병장이 막사 앞에서 호루라기를 휘리릭~ 두 번을 불어 대더니 의무중대 전원집합! 하는 소리가 나의 귀속 전정기관을 사정없이 울렸다.
20여명 남짓한 중대원은 집합되고 조병장은 쫄 다구들이 겁대가리가 상실했다며 “제대할 때 입고 가려고 고이 간직해 빨아 놓은 것인데 감히 왕고참 팬티를 훔쳐가!” 라며 길길이 뛰었다. 중대원 모두는 머리를 숙여 아무 말도 못하고 있는데 나에겐 일생일대의 위기가 닥쳐왔다. 어차피 샅샅이 뒤지면 걸릴 텐데 나가서 내가 훔쳤다고 말해 버릴까 하며 고민하고 있는데, 조병장이 갑자기 “여기서 이등병은 열외!” 라며 이등병은 제외시켜 주는 것이 아닌가. 교회도 안 다니는 나는 순간 오~ 주여! 가 절로 나왔다. 조병장의 논리는 이등병은 감히 왕고참의 물건을 훔쳐 갈 일이 없다는 것이다. 그 날 죄 없는 선임들만 머리박기, 주먹 쥐고 엎드려 뻗쳐 등 30분 이상 얼 차례를 받고나서 대신 초A급 빤스4장을 배상하라는 조건으로 마무리가 되었다. 그 날은 야간점호도 온 종일 중대원이 시달린 탓에 주번하사는 취침점호를 지시하여 다행히 내 빤스도둑 사건은 영원히 역사에 묻히게 되었다. 얼마 후 대장보다 한 계급 위인 육군병장 조병장은 전역하면서 입다 남은 런닝과 빤스 ․ 양말 등을 우리 이등병들에만 나눠주고 중대원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으며 개구리복을 입고 고향 앞으로 훌훌 떠났다. 단아한 키에 인간미 넘치던 조병장은 훗날 노량진 수산시장에서 근무한다는 소식을 풍문(風聞)으로 들었다.
지금의 군대 빤스는 어떠한지 모르겠으나 그 당시 군바리는 사제품을 사용 못하도록 규정되어 있어 국방부에서 나오는 흰색 반바지형 면바지만 입었다. 지금 내가 입는 팬티는 색깔과 모양도 다양한데 특히, 런닝이나 양말보다 유난히 팬티에 대한 애착이 많다. 아마 그 당시 빤스 사건 때문이리라. 어느덧 전역한지 25년이 흘렸지만, 당시 같이 근무했던 옛 전우들에게 나의 빤스도둑 사건에 대하여 고백할 기회가 없었는데 이렇게 지면을 통해 사죄하며 진실을 밝히고 싶다. 그 당시 빤스도둑은 나였다고……. 당시는 군 생활이 정말 고통스러웠지만 나의 인생항로를 돌이켜 보면 삶에 소중했던 한 페이지 인 것 같다. 그립기만 한 옛 전우들 지금은 어디에 있는지 보고 싶다.
2009. 09. 04. 청명한 가을 어느 날
첫댓글 저도 논산훈련소 23연대에서 훈련 받을 당시 누군가 룬련시간에 내무반에 침입해 쿠폰(가져간 현금을 쿠폰과 교환해줌)과 팬티를 훔쳐가서 일요일에 남의 연대 빨래 널어놓은 곳을 기웃거리다가 모두 보초를 서고 있는 바람에 빤스를 훔치는데 성공하지 못했던 기억이 정말 엊그제 같은데 ~~~세월이 너무 빠르네요...
군대 이야기라면 다들 좋아하시던데. 제가 근무하는 학교서도 실장님께서도 특공대 나오셨다며 업무를 못하게
할 정도로 이야기를 해요. 옆에 선생님들 줄줄이 다 수색대가 어쩌고 두 아들 군입대 후 군대에 대한 이야기만
늘 들어요. 그래도 싫지가 않는 것은 아마 동감이 가기 때문인가? 아들 땜시렁 귀를 더 귀울이기도 하고.
요즘은 팬티가 계급마다 틀리다던데. 아마 팬티 도둑을 없애기 위함인가?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