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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양업(1821-1861) 신부 와 쉬자후이(徐家汇) 송장 헝탕에 예수회 근거지를 두고 전교활동을 하던 예수회 회장 고틀랑 신부는 헝탕이 상해 중심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고, 1846년 청조의 해금 정책 이후 늘어나는 외국인 선교사들을 맞이하기 위해 예수회 기지를 옮길 생각을 하였다. 1846년 송장(松江) 지역과 교통이 편리하고 서광계 후손들이 모여 살던 쉬자후이(서광계 묘지 북동쪽)를 예수회 기지로 정하고 선교사 숙소와 작은 성당을 짓기 시작하여 1847년 7월 예수회 본부를 완성하고, 7월 31일 예수회 본부를 헝탕에서 쉬자후이로 옮겼다.
1847년 장서루 1847년 장서루
고틀랑 신부는 예수회 회관 완성과 동시에 숙소 한 편에 3칸으로 된 수사실을 만들고, 그곳에 예수회 신부들이 본국에서 가져온 서양 책들을 보관하여 선교사들이 열람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바로 이곳이 현 장서루(藏书楼)의 원형이다. 1860년에 현재 위치인 자오자방 강변(肇嘉浜河畔)에 새 건물을 짓고 1897년에 다시 2층으로 된 건물 한 동을 건설하고 1905년 쉬자후이 장서루로 정식 명명했다. 이는 상해 근대 도서관의 원형으로 1910년에 낙성한 현 쉬자후이 성당보다 더 빠르다.
장서루 내부 모습
한국 천주교 신자로서 장서루가 특별하게 느껴지는 것은 최양업 부제가 1년 9개월 동안 쉬자후이 예수회 본부에서 머물렀을 때 가장 오랜 시간을 보낸 곳이 도서관이었는데 당시 도서관 위치에서 옆으로 조금 옮겨진 곳에 현 장서루가 남아 있어 최양업 부제의 발자취를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장서루 현재 모습
예수회 회관 준공과 함께 마침 1847년 상해로 온 최양업 부제는 이곳 예수회 본부에서 머물며 장서루에서 주로 많은 시간을 보낸 만큼 1847년 9월 3일과 1849년 5월 12일에 스승인 외방전교회 신학교장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낸 편지는 모두 이곳 도서관에서 썼을 것이다. 두 편의 편지는 고군산도와 백령도를 통한 조선 입국 시도 실패 후 몸과 마음이 지친 절망적인 상황에서 안타까운 마음으로 상해로 돌아와서 스승에게 쓴 것이다. 특히 1849년 사제 서품 후 바로 떠난 백령도를 통한 조선 입국 실패 후 상해로 돌아와서 쓴 내용에는 최양업 신부 스스로 “귀양살이하는 곳으로 되돌아왔다"라고 한 표현에서 당시 최양업 신부가 느꼈을 엄청난 심적 고통을 가늠해 볼 수 있다.
쉬쟈후이 예수회 본원
하지만 1년 9개월 동안 쉬자후이 예수회 본부에서의 생활은 육체적으로는 안정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요동을 거쳐 육로로 조선 잠입에 성공할 수 있었던 용기와 힘을 이곳에서 매일 미사에 참례하면서 키웠던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1848년 5월 12일 자 편지에서: “이 자리에서 마레스카 주교님과 예수회 회원 신부들의 지극히 자상한 보살핌에 대하여 우리 신부님들께 말씀드리겠습니다. 예수회 회원 신부님들에게는 제가 아주 오랫동안 체류하면서 융숭한 대접을 받아 많은 신세를 졌습니다. 저 혼자서는 그분들에게 합당한 인사를 드리기에 부족합니다. 경애하올 우리 신부님들에게 저의 가난함을 대신하여 사례하여 주십시오. 지극히 너그러우신 하느님의 자비로 지극히 무능하고 가난한 제가 존엄하신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미사성제를 드리고 온 세상의 이루 다 평가할 수 없는 값진 대가를 날마다 하느님 아버지께 바치는 권능을 수여받았음은 큰 위로입니다.” 최양업 부제는 1848년 신설된 쉬자후이 신학원에서 예수회 4명의 수사와 같이 신학 수업을 듣고, 1849년 4월 15일 예수회 강남 대목구장 마레스카 주교로부터 사제 서품을 받았다. 1836년 12월 조선을 떠난 이후 12년이 넘어서 조선인이라고는 한 명도 없는 만리타국에서 오직 스승 메스트르 신부와 나이 어린 동료 수사들의 축하만을 받았을 것이다. 이후 5월에 상해를 출발, 요동을 거쳐 12월 3일 조선으로 귀국하였다.
쉬쟈후이 예수회 본원
마레스카 주교(Francesco Xavier Maresca 1806-1855 이탈리아)는 베시 주교 뒤를 이어 1848년 -1855년까지 남경 교구 주교직을 맡아, 최양업 신부에게 사제 서품을 주고, 메스트르 신부와 최양업 부제가 조선 입국 실패 후, 1847년 8월 상해로 온 이후 그들을 따뜻하게 맞이하고 조선으로 입국하기까지 많은 도움을 주었다. 마레스카 주교는 이탈리아 나폴리에서 태어나 마태오 리빠(Matteo Ripa 1692-1746)가 창설한 중국인 신부 배양을 목적으로 하는 나폴리 성가수원(聖家修院) 에서 공부했다. 1840년 중국 호북(湖北)으로 파견된 후 성가수회(聖家修會) 회장으로 임명되어 6년 동안 활동하다가 1846년 베시 주교의 요청으로 강남에 도착하였다. 1847년 5월 4일 진자샹 성당에서 솔리(Soli) 명예 주교로 축성되어 베시 주교의 보좌주교가 되었다. 1848년 7월 9일 베시 주교 사직 후 남경 교구 주교로 임명되어 동자두에서 머물렀다.
쉬자후이 예수회 회관 1847년 당시에는 아주 초라했으나 이후 강남 전교구의 예수회 중심지가 되었고 유일한 회관이었다. 이곳에서 신부들은 공동생활을 하며 매년 피정을 하고 수도자 생활을 만족하게 보냈다. 또한 쉬자후이 구역은 예수회 회관으로부터 정신적 물질적으로 필요한 많은 도움을 받았다. 그리하여 오래지 않아 전체 전교구의 진정한 중심점이 된 것이다.
예수회 본원
회관에는 예수회 관구장 외에 회관 담당 신부가 관구장 외출 시 그 업무를 대신했다. 또한 일 처리하는 수사와 독서 수사가 있었는데 그들은 신부 수업을 수습하고 있었다. 새로 온 신부들은 전교구에 파견되기 전에 쉬자후이에서 몇 개월 머물렀다. 1847년 예수회 관구장 고틀랑 신부 영도하에 르메트르(Lemaitre 1816-1865, 프랑스) 신부가 회관 건축공정을 담당했고, 두 명의 수사가 보조를 했다. 1848년 4월 14일 포이세메 (P. Augustinus Poissemeux 1804-1854卜亦奥) 신부가 고틀랑 신부 뒤를 이어 예수회 관구장이 되었으며 2차로 파견된 유럽에서 온 로리쾌 신부와 보니에 신부가 쉬자후이 회관 담당 신부가 되었다. 또한 새로 온 신부 프로게가 쉬자후이 지역을 담당하여 회관 주변 관할 지역의 성사를 보았다. 1848년 말에는 베시 주교와 함께 이탈리아로 갔던 마사 신부(P. Ronatus Massa 1817-1953)가 3명의 젊은 이탈리아 예수회 수사들, 조틀리 (Ange Zottli), 마사 (Louis Massa), 아디노피(Francois Adinolfi)와 같이 왔는데 이들은 신학 수업을 마치지는 않았으나 이후 신학원 원장이 된 고틀랑 신부 밑에서 중국 예수회 신학원의 초석이 되었다. 그들을 위해서 르메트르 신부는 회관의 식당 위층에 방 3개를 더 만들었다. 그들은 최양업 토마스 부제와 함께 일 년을 공부했는데, 이미 신학을 공부한 최양업 부제는 중문에도 정통하여 동료들이 중문 공부하는 것을 도와주었다고 한다. 최양업 부제는 일 년 후 신부로 축성되어 조선으로 돌아갔다. 초기 규모가 작은 신학원에는 로니에르, 플레, 마사 신부가 교수로 있었다. (1847-1851)
상기 그림 설명 ABCD: 1847년 매입한 첫 번째 토지. EF: 서씨(徐家)의 공소. F: 소성당으로 예수회 회원과 쉬자후이 구역 교우들이 사용하였다. 이 소서당에서 최양업 신부가 사제 서품을 받았다. ABCD 토지 안에 전부 방을 만들었고, 대나무가 회관 주변을 둘러싸고 있다. 1번 은 예수회장 방, 2는 비교적 큰 방으로 주교를 위한 방이다. 예수회장 방 아래층은 본당신부가 거주했는데 후에는 회관 관장이 거주했다. 2층 중앙은 도서실이다. 1,2층 남은 작은방들은 신부들이 사용했다. 회관의 출입은 2개의 문을 사용했는데, 7번은 보통 입구로 공소를 통해야 한다. 6번은 자오자빈의 영예문으로, 안에는 종이 설치되어 있고, 종은 정원 8을 향하고 있다. 4에는 2칸, 3칸짜리 작은방으로 환자실과 약제실이다. 3은 식당으로 식당 아래층은 르메트르 신부가 공동 독서실로 사용하는 작은방을 만들었다. 1849-1850년 기 황(饑荒) 시기에는 쉬자후이 신부들이 5에 2,30명의 남자 어린이 신자들을 수용하였는데 오래지 않아 G에 중국집 한 채를 매입해서 남자 어린이들이 거주하게 했다. 이것이 쉬후이 공학(徐匯公學)의 시작이다. 자오자빈(肇家滨)은 회관의 담장에 근접해 있다.
자오자방(肇家滨)
성당 아래로 흐르는 하찬은 자오자방(肇家滨)으로 이 하천을 통해서 송장과 상해 시내로 갈 수 있다. 수로를 이용하여 쉬자후이에서 서산까지 갈 경우, 쉬자후이에서 치바오(七宝), 치바오에서 스징(泗经), 스징에서 서산(佘山)까지 각각 18리로 하루가 걸렸다고 한다.
1851년 완성된 쉬자후이 이냐시오 성당 (현 주교부 자리)
1910년 쉬자후이 성당 (주소: 上海市 徐汇区 蒲西路 158号)
대성당 완공 이후 1851년에 건립한 300명 규모의 이냐시오 성당은 쉬후이중학 성당으로 사용되다가 현 주교부 건물 건설 때 헐렸다고 한다.
성당의 내부
1906년에 착공해서 1910년에 완공한 현 성당은 두 개의 종탑을 가진 전형적인 프랑스 고딕 양식의 성당으로 총 길이 83.3미터, 평면은 십자가 형으로 바실리카 양식의 대청(大厅)은 2500명을 수용할 수 있다.
실내에는 흰색 수저우(苏州) 금산석을 정교하게 조각한 64개 기둥을 사용하여 조형미가 아름답고 장엄하다. 중앙의 대 제대 양옆으로 18개의 제대가 있다. (총 19대)
성당 안에는 2대 주교인 장가수(张家树) 주교와 3대 김노현(金鲁贤) 주교의 유골과 성모 마리아와 예수, 요한 바오로 2세, 이냐시오 성인의 동상이 있다.
쉬자후이는 1847년 예수회 기지를 마련하기 전부터 서광계 후손 몇 호가 이 곳에 경당을 지었다. 이후 예수회는 쉬자후이에 성당, 수도원, 학교, 장서각, 성모원, 박물관, 천문대 등을 건립하였고, 사방 1.5km의 천주교 지역은 문화, 출판, 과학, 교육 등의 중심지로서 천주교 상해교구의 중심이 되었고, 근대 중국에 있어서 가장 규모 있고 영향력 있는 서방문화 전파지가 되었다.
참고문헌 상해한인성당현양위 , 한국천주교회의 발자취 /2016 歷史上的 徐家汇, 上海文化出版社 샤를르 달레, 安應烈 崔奭祐 譯註, 한국교회사연구소 / 2009 강남전교사 江南传教史, (法)史式徽(J.de.ca.Serviere)著, 上海译文出版社 1983.6 (중국어본)
Written by Francisco Sun / 선 봉 주 연구.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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