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六祖 口訣
법성이 원적하야 본무생멸이언마는 인유생념하야 수유생연이라
法性이 圓寂하야 本無生滅이언마는 因有生念하야 遂有生緣이라
고로 천득명지이생하나니 시고위지명이니라
故로 天得命之以生하나니 是故謂之命이니라
법의 본바탕이 원만하고 고요하여 본래 생멸이 없건만 생멸이 있다는 생각을 인연하여 드디어 인연이 생긴 것이다. 그러므로 하늘의 운명을 얻어서 태어나니 그래서 命이라 한다.
천명이 기립에 진공이 불유하야 전일생념이 전이위의식하고
天命이 旣立에 眞空이 不有하야 前日生念이 轉而爲意識하고
의식지용이 산이위육근하며 육근이 각유분별하야 중유소총지자라
意識之用이 散而爲六根하며 六根이 各有分別하야 中有所總持者라
天命이 이미 성립되면 眞空이 있지 않으며 전날에 생긴 생각을 굴려서 意識이 되고 의식작용이 흩어져 六根이 되며 六根이 각각 분별이 있어서 그 가운데 총지 하는 것이 있다.
시고위지심이니 심자는 념려지소재야오
是故謂之心이니 心者는 念慮之所在也오
신식지소사야며 진망지소공처자야요 당범부성현기회지지야니라
神識之所舍也며 眞妄之所共處者也요 當凡夫聖賢機會之地也니라
그래서 이를 마음이라 하니 마음이란 생각이 있는 곳이고, 정신과인식작용의 집이며 진실과 거짓이 함께 있는 곳이며 마땅히 범부와 성현의 機緣이 모이는 곳의 땅이다.
일체중생이 자무시래로 불능이생멸자는 개위차심의 소누일새 고로
一切衆生이 自無始來로 不能離生滅者는 皆爲此心의 所累일새 故로
제불이 유교인료차심이시니 차심료하면 즉견자성이요 견자성즉시보리야니라
諸佛이 惟敎人了此心이시니 此心了하면 卽見自性이요 見自性則是菩提也니라
일체 중생이 태초의 옛날부터 생멸의 윤회를 벗어나지 못한 것은 다 이 마음에 연루한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부처님이 오직 사람들이 이 마음을 깨닫게 하려하시니, 이 마음을 깨달으면 곧 自性을 보고 自性을 보게 되면 이것이 곧 菩提(깨달음)인 것이다.
차재성시에 개자공적이담연약무라가 연유생념이후에 유자야라
此在性時에 皆自空寂而湛然若無라가 緣有生念而後에 有者也라
유생칙유형이니 형자는 지수화풍지취말야라 이혈기로 위체니
有生則有形이니 形者는 地水火風之聚沫也라 以血氣로 爲體니
유생자지소탁야라
有生者之所託也라
이것이 性品에 있을 때는 모두 스스로 空寂하여 맑아서 없는 듯하다가 緣이 있어서 생각을 낸 이후에는 존재하는 것이다.
태어나면 곧 형상이 있게 되니 형상이란 지, 수, 화, 풍이 모인 거품이며, 여기서 혈기가 바탕이 되며 이것은 생명이 있는 것이 의지하는 곳이다.
혈기족즉정족하고 정족즉생신하고 신족에 생묘용하나니
血氣足則精足하고 精足則生神하고 神足에 生妙用하나니
연칙묘용자는 즉재오원적시지진아야니라
然則妙用者는 卽在吾圓寂時之眞我也니라
血氣가 충족한즉 정기가 충족하고 정기가 충족한즉 精神이 생겨나고 精神이 충족하면 妙用이 생겨난다. 그렇다면 묘용이란 것은 곧 내가 원만하고 고요할 때에 있던 참다운 나인 것이다.
인형지우물고로 견지어작위이이어늘 단범부는 미이축물하고 성현은
因形之遇物故로 見之於作爲而已어늘 但凡夫는 迷而逐物하고 聖賢은
명이응물이라 축물자는 자피요 응물자는 자아니 자피자는 착어소견이라
明而應物이라 逐物者는 自彼요 應物者는 自我니 自彼者는 着於所見이라
고수윤회하고 자아자는 당체상공이라 만겁여일이니 합이관지컨댄
故受輪廻하고 自我者는 當體常空이라 萬劫如一이니 合而觀之컨댄
개심지묘용야니라
皆心之妙用也니라
형상이 사물을 만남으로 인하여 이것이 작위로 나타났을 뿐이다,
다만 범부는 미혹하여 사물만 따르고 성현은 밝아서 사물에 응한다.
사물을 따르는 것은 자신의 객관(상대)이요, 사물에 응하는 것은 자신의 주관(나)이니, 자신을 상대에게 빼앗긴 사람은 소견에 집착하는 까닭에 윤회의 업보를 받고, 자신의 주관이 확실하면 그 바탕이 항상 공하여 만겁이 지나도 한결같으니 그것을 통합하여 보건대 모두다 마음의 묘한 작용이다.
시고로 당기미생지시하야 소위성자가 원만구족하야 공연무물하고
是故로 當其未生之時하야 所謂性者가 圓滿具足하야 空然無物하고
담호자연하며 기광대가 여처공등하야 왕래변화에 일체자유니
湛乎自然하며 其廣大가 與處空等하야 往來變化에 一切自由니
천수욕명아이생이나 기가득호아
天雖欲命我以生이나 其可得乎아
그러므로 그것이 아직 생기지 않았을 때에는 이른바 자성이란 원만구족해서 텅 비어 사물도 없고 맑고 맑아 자연스러우며 그 넓고 크기는 허공과 같아서 가고 오고 변화하는 모든 것이 자유로우니 하늘이 비록 나에게 명하여 태어나게 하고자 하나 어찌 가히 그것이 되겠는가?
천유불능명아이생이어든 황어사대호며 황어오행호아 기유생념하고
天猶不能命我以生이어든 況於四大乎며 況於五行乎아 旣有生念하고
우유생연이라 고로 천득이생명아하고 사대가 득이기형아하고 오행이
又有生緣이라 故로 天得以生命我하고 四大가 得以氣形我하고 五行이
득이수약아하나니 차는 유생자지소이유멸야니라
得以數約我하나니 此는 有生者之所以有滅也니라
하늘도 오히려 나에게 명하여 태어나게 할 수 없거늘 하물며 사대가 어떻게 하겠으며 더구나 오행이 어찌 할 수 있겠는가?
이미 생각을 냄이 있으면 또한 생겨나는 인연도 있음이라.
그러므로 하늘이 나를 태어나도록 명하고 사대가 氣로써 나를 형성하게 되며 五行이 數로써 나와 부합시킬 수 있게 되니 이것은 生이 있는 것은 반드시 滅이 있는 이유이다.
연호생멸즉일이나 재범부성현지소이생멸즉수니 범부지인은
然乎生滅則一이나 在凡夫聖賢之所以生滅則殊니 凡夫之人은
생연념유하고 식수업변하야 습기훈염이 인생유심일새 고로
生緣念有하고 識隨業變하야 習氣薰染이 因生愈甚일새 故로
기생지후에 심착제망하나니
旣生之後에 心着諸妄하나니
그러나 생과 멸이 하나이나 범부와 성현의 생과 멸은 다르다.
범부는 태어남에 생각을 반연하고 識은 業을 따라 변하여 습기(전생에 익힌 번뇌의 찌꺼기), 훈염(몸에 배고 마음에 물들어)으로 인하여 태어남이 더욱 심하다. 그래서 이미 태어난 뒤에 마음이 모든 망상에 집착한다.
망인사대하야 이위아신하며 망인육친하야 이위아유하며
妄認四大하야 以爲我身하며 妄認六親하야 以爲我有하며
망인성색하야 이위쾌락하며 망인진로하야 이위부귀라
妄認聲色하야 以爲快樂하며 妄認塵勞하야 以爲富貴라
망상으로 四大(지수화풍의 임시모임)를 나의 몸이라 인식하고, 망상으로 六親(부모,형제,처자)을 나의 소유로 생각하고, 망상으로 聲色(보고 듣는 것)을 쾌락으로 생각하고, 망상으로 塵勞(6진에 시달리는 것)를 富貴라 인식한다.
심목지견이 무소불망이니 제망이 기기에 번뇌만차라
心目知見이 無所不妄이니 諸妄이 旣起에 煩惱萬差라
망념이 탈진에 진성이 수은하야 인아위주하고 진식위객하며
妄念이 奪眞에 眞性이 遂隱하야 人我爲主하고 眞識爲客하며
마음과 눈으로 알고 보는 것이 거짓 아닌 것이 없으니 모든 망상이 이미 일어나면 번뇌가 만 가지로 차이가 있고 구별된다.
망념이 眞如을 뺏으면 참 성품이 드디어 숨어서 人相과 我相이 마음의 주인이 되고 진실한 인식은 나그네가 된다.
삼업전인하고 백업후수하야 유랑생사에 무유애제하야 생진즉멸하고
三業前引하고 百業後隨하야 流浪生死에 無有涯際하야 生盡則滅하고
멸진부생하야 생멸상심에 지타제취호대 전전부지일새
滅盡復生하야 生滅相尋에 至墮諸趣호대 轉轉不知일새
三業이 앞에서 길을 인도하고 百業이 그 뒤를 따르게 된다.
생사의 바다에 유랑함에 끝이 없어서 생이 다하면 멸하고 멸이 다하면 다시 태어나 생멸이 서로 찾아서 여러 갈래에 떨어지니 돌고 도는 윤회의 끝을 알지 못한다.
유자무명하야 조제업고하야 수지진사겁진토록 불복인신이어니와
愈恣無明하야 造諸業罟하야 遂至塵沙劫盡토록 不復人身이어니와
성현즉불연이니 성현은 생불인념하고 응적이생이라
聖賢則不然이니 聖賢은 生不因念하고 應迹而生이라
더욱 무명이 제멋대로 날뛰어 모든 업의 그물을 만들어 드디어 진사겁(아주 길고 긴 시간)이 다하도록 다시는 사람 몸을 회복하지 못하지만, 성현은 그렇지 않으니 성현은 태어날 때 생각으로 인연하지 않고 (중생의 교화를 위하여) 자취에 응하여 태어나신다.
욕생즉생하야 불대피명일새 고로 기생지후에 원적지성이 의구담연하야
欲生則生하야 不待彼命일새 故로 旣生之後에 圓寂之性이 依舊湛然하야
무체상무괘애하며 기조만법이 여청천백일하야 무호발은체라
無體相無罣礙하며 其照萬法이 如靑天白日하야 無毫髮隱滯라
태어나고자 하면 태어나고 저 하늘의 命을 기다리지 않으므로 이미 태어난 후엔 원적한 성품이 예전처럼 담연하여 體相(바탕과 형상)도 없고 가로막는 걸림도 없으며 그 만법을 비춤이 마치 푸른 하늘의 밝은 해와 같아서 머리카락하나도 숨기거나 막힘이 없도다.
고능건립일체선법하야 변어사계호대 불견기소하며 섭수일체중생하야
故能建立一切善法하야 遍於沙界호대 不見其少하며 攝受一切衆生하야
귀어적멸호대 불이위다하나니 구지불능래며 축지불능거라
歸於寂滅호대 不以爲多하나니 驅之不能來며 逐之不能去라
그러므로 일체 거룩한 법을 건립하여 沙界(온갖 세상)에 두루 하되 그것을 적고 모자라게 보지 않으며 일체중생을 섭수하여 적멸에 돌아가게 하되 그것을 많다고 하지 않나니, 몰아도 오게 할 수 없고 쫓아내도 가게 할 수 없다.
수탁사대위형하고 오행위양이나 개아소가일새 미상망인이니
雖托四大爲形하고 五行爲養이나 皆我所假일새 未嘗妄認이니
아연이 구진에 아적이 당멸이라
我緣이 苟盡에 我迹이 當滅이라
비록 四大를 의탁하여 형상이 되고 五行으로 길러지게 되어도 무두가 내가 빌려온 것이어서 일찍이 망상으로 인정한 적이 없으니 자아의 인연이 진실로 다하면 자아의 자취는 마땅히 멸한다.
위이거지가 여래거이니 어아에 하여재아 시고로 범부는 유생즉유멸이라 委而去之가 如來去耳니 於我에 何與哉아 是故로 凡夫는 有生則有滅이라 멸자가 불능불생이어니와 현성은 유생역유멸호대 멸자가 귀어진공하나니
滅者가 不能不生이어니와 賢聖은 有生亦有滅호대 滅者가 歸於眞空하나니
버리고 떠나는 것이 마치 오고 가는 것과 같을 따름이니 자아에게 그것이 무슨 관계가 있겠는가? 그러므로 범부는 생이 있은즉 멸이 있고 멸한 자는 태어나지 않을 수 없지만, 성현은 생이 있고 또한 멸이 있지만 멸하면 眞空에 되돌아간다.
시고로 범부생멸은 여신중영하야 출입상수에 무유진시어니와
是故로 凡夫生滅은 如身中影하야 出入相隨에 無有盡時어니와
성현생멸은 여공중뇌하야 자발자지에 불누어물이어늘 세인이
聖賢生滅은 如空中雷하야 自發自止에 不累於物이어늘 世人이
부지생멸지여차하고 이이생멸로 위번뇌대환하나니 개불자각야로다
不知生滅之如此하고 而以生滅로 爲煩惱大患하나니 蓋不自覺也로다
그래서 범부의 생멸은 몸 가운데 그림자 같아서 들어가고 나옴이 서로 따라다녀 다할 때가 없지만 성현의 생멸은 공중의 우뇌소리와 같아서 스스로 발생하였다가 스스로 그쳐서 사물에 연루 되지 않는다. 세상 사람들은 생멸이 이와 같은 이치를 모르고 생멸로써 번뇌하며 큰 근심거리를 삼으니 대개 스스로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다.
각즉견생멸이 여신상진하야 당일진분이니 하능누아성재아 석아여래가
覺則見生滅이 如身上塵하야 當一振奮耳니 何能累我性哉아 昔我如來가
이대자비심으로 민일체중생이 미착전도하야 유랑생사지여차하시며
以大慈悲心으로 憫一切衆生이 迷錯顚倒하야 流浪生死之如此하시며
깨닫게 되면 생멸을 몸 위에 묻은 먼지같이 보니 마땅히 한번 떨치고 털어버릴 뿐이니, 어찌 나의 성품에 連累될 수가 있겠는가?
옛날 우리 여래께서 대자비심으로 일체 중생의 헷갈린 착각과 거꾸로 된 견해로 생사의 바다에 유랑함이 이와 같음을 불쌍히 여기사
우견일체중생이 본유쾌락자재성하야 개가수증성불하시고 욕일체중생으로
又見一切衆生이 本有快樂自在性하야 皆可脩證成佛하시고 欲一切衆生으로
진위성현생멸하고 불위범부생멸하사대 유려일체중생이 무시이래로
盡爲聖賢生滅하고 不爲凡夫生滅하사대 猶慮一切衆生이 無始以來로
유랑일구에 기종성이 이차하야 미능이일법으로 속오일새
流浪日久에 其種性이 已差하야 未能以一法으로 速悟일새
또한 일체중생이 본래부터 쾌락하고 자재한 본성이 있어서 모두 도를 닦고 증득하면 成佛할 수 있음을 보시고, 일체중생이 모두 성현의 생멸이 되게 하고 범부의 생멸이 되지 않게 하시되 오히려 일체중생이 무시이래로 생사의 바다에 유랑한 지가 너무 오래되어 그 근본자성이 이미 어긋나서 능히 一法으로써 속히 깨닫지 못함을 염려하시니,
고로 위설팔만사천법문하시니 문문가입에 개가도진여지지요
故로 爲說八萬四千法門하시니 門門可入에 皆可到眞如之地요
매설일법문이 막비정녕실어라
每說一法門이 莫非丁寧實語라
그러므로 이를 위하여 팔만사천법문을 말씀하시니, 그 하나하나의 법문마다 그 안에 들어갈 수 있고 모두 眞如의 경지에 도달 할 수 있게 하셨다. 한 法門을 설할 때 마다 고구정녕 진실한 말씀 아님이 없다.
욕사일체중생으로 각수소견법문하야 입자심지하며 도자심지하며
欲使一切衆生으로 各隨所見法門하야 入自心地하며 到自心地하며
견자불성하며 증자신불하야 즉동여래케하시니
見自佛性하며 證自身佛하야 卽同如來케하시니
일체중생으로 하여금 각각 그가 본 법문을 따라서 자기의 마음의 경지에 들어가게 하였으며 자기 마음 땅에 도달하게 되면 자신의 불성을 보고 자신의 부처를 증득하여 곧 여래와 같게 하고자 하였다.
시고로 여래가 어제경에 설유자는 욕사일체중생으로 도상생선이요
是故로 如來가 於諸經에 說有者는 欲使一切衆生으로 睹相生善이요
설무자는 욕사일체중생으로 이상견성이며 소설색공도 역부여시하니라
說無者는 欲使一切衆生으로 離相見性이며 所說色空도 亦復如是하니라
그래서 여래가 모든 經에서 말씀하신 [有]라는 것은 일체 중생으로 하여금 형상을 보고 거룩한 마음을 생겨나게 하고자 한 것이고 [無]라고 말씀하신 것은 일체 중생으로 하여금 相을 떠나서 자성을 보게 하고자 한 것이며, 또 설하신 色, 空도 또한 다시 이와 같음이다.
연이중생집착이 견유비진유요 견무비진무며 기견색견공도
然而衆生執着이 見有非眞有요 見無非眞無며 其見色見空도
개여시집착하야 부기단상이견하야 전위생사근체하나니
皆如是執着하야 復起斷常二見하야 轉爲生死根蔕하나니
부시이무이법문이면 우장미착전도하야 유랑생사가 심어전일일새
不示以無二法門이면 又將迷錯顚倒하야 流浪生死가 甚於前日일새
그러나 중생들은 집착으로 有를 보고 眞有가 아니라 하고 無를 보고도 참으로 없는 것이 아니라 하며 그 色을 보고 空을 보는 것도 다 이와 같이 집착하여 여기에 다시 斷見과 常見의 두 가지 편견을 일으켜서 돌고 도는 생사의 뿌리와 꼭지가 된다. 둘이 아닌 법문을 제시하지 않는다면 또 다시 헷갈리고 착각하고 거꾸로 되어 생사의 바다에 유랑함이 前日보다 더 심할 것이다.
고로 여래가 우위설대반야법하사 파단상이견하사 사일체중생으로
故로 如來가 又爲說大般若法하사 破斷常二見하사 使一切衆生으로
지진유진무와 진색진공이 본래무이이며 역불원인이라 담연적정하야
知眞有眞無와 眞色眞空이 本來無二이며 亦不遠人이라 湛然寂靜하야
지재자기성중일새 단이자기성지혜로 조파제망즉효연자견이니라
只在自己性中일새 但以自己性智慧로 照破諸妄則曉然自見이니라
그러므로 여래께서 또 다시 大般若의 법문을 설하셔서 단견과 상견의 두 편견을 깨뜨려 일체중생으로 하여금 참有와 참無와 참色과 참空이 본래 둘이 아니며 또한 사람과 멀지 않고 해맑고 고요하여 오직 자기 본성 가운데 있음을 알게 하셨다. 다만 자기의 태어난 지혜로 모든 거짓을 비추어 허물어 버린다면 바로 환하게 스스로 진실을 보게 된다.
시고로 대반야경육백권은 개여래가 위보살과인하사 설불성이라
是故로 大般若經六百卷은 皆如來가 爲菩薩果人하사 說佛性이라
연이기간에 유유위돈점자설이어니와 유금강경은 위발대승자설이며
然而其間에 猶有爲頓漸者說이어니와 惟金剛經은 爲發大乘者說이며
위발최상승자설이라
爲發最上乘者說이라
그러므로 대반야경600권은 모두 여래께서 보살의 果位을 얻은 사람들을 위하여 佛性을 설법하신 내용이다. 그러나 그 사이에는 오히려 돈교와 점교를 위한 설법이 있지만, 오직 이 금강경은 大乘의 마음이 일어난 사람을 위한 설법이며 최상승을 일으킬 사람을 위한 설법이다.
시고로 기경이 선설사생사상하시고 차운범소유상이 개시허망이니
是故로 其經이 先說四生四相하시고 次云凡所有相이 皆是虛妄이니
약견제상비상하면 즉견여래라하시니 개현일체법이 지무소주하야사
若見諸相非相하면 卽見如來라하시니 蓋顯一切法이 至無所住하야사
시위진체라
是爲眞諦라
그러므로 이 經은 먼저 四生과 四相을 말씀하시고 다음에
"모든 형상이 있는 것은 모두 다 허망한 것이며, 만약 모든 相을 相이 아님을 본다면 곧 부처를 보게 된다." 하시니 이는 무릇 모든 법이 머무는 곳이 없는 경지에 이르러야만 이것이 참다운 진리라고 나타내신 것이다.
고로 여래가 어차경에 범설섭유하면 즉파지이비하고 직취실상하사
故로 如來가 於此經에 凡說涉有하면 卽破之以非하고 直取實相하사
이시중생하시니 개공중생이 불해불소설하고 기심이 반유소주고야니
以示衆生하시니 蓋恐衆生이 不解佛所說하고 其心이 反有所住故也니
여소위불법이 즉비불법지류가 시야니라
如所謂佛法이 卽非佛法之類가 是也니라
그러므로 여래가 이 경에서 설하신 모든 말씀이 무릇 [有]에 관련된 것은 곧 이를 허물어 [아니다]라고 하셨고, 곧바로 실상을 취하여서 중생에게 제시하시니 대개 중생은 부처님이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 마음에 도리어 住着하는 곳이 있을까 염려한 까닭이다.
이른바 '佛法은 곧 佛法이 아니다'라고 한 말씀과 같은 것이 이러한 類에 속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