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송백산악회에 기고했던 글을 전재한 것입니다.]
1편이 구라산행기가 아니어서 아쉽다는 이야기도 있어 분발해서 2편을 썼습니다. 읽어주시는 분들에게 미리 감사를...
백두대간[피재-건의령-구부시령-덕항산-지각산-자암재]구간 산행기
후기2 - 구라편
[하이맛이 피재에서부터 구부시령까지 숲속길을오래 걸어온지라 이제 지칠 때도 되었고 무언가 사건이 일어날 때도 되었다.]
피재 -> 건의령 -> 여러 봉우리 지나가기 -> 구부시령까지의 야그는 전과 동이다.
이 근처 마을의 어떤 여인이 결혼을 하는대로 아홉 번이나 지아비가 계속 죽는 통에 ‘아홉 남편을 모신 고개’ 라는이름의 구부시령에서 돌탑에 돌 하나를 올려 놓으며 무사산행을 빈 나는 숲이 내뿜는 피톤치드와 내부에서 불붙는 자기 자신의 감흥에 취해서 원래 가야할 북쪽길을 찾지 못하였다. 그래서 동쪽인지 서쪽인지 구별이 안 되는 길로 백두대간길이려니 하면서 희미한 숲길을 따라갔다.
한참을 걷는데 앞뒤로 동행하던 송백님들도 보이지 않고 아주 깊은 숲속에 홀로 선 기분이었다. 길을 잘 못 가고 있구나 깨달은 순간이었다. 숲속 나무사이론 오후의 봄날 햇살이 나무들 사이로 사선을 그으며 가득 비추니 이곳이 낙원이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날 정도였지만 낯선 곳에 선 나는 약간의 두려움까지 느끼고 있었다. 바로 이 때 앳된 동자승 한 명이 숲에서 나와 인사를 한다.
‘하이맛님, 잘 오셨습니다. 저희 마을로 가시죠.’
‘여긴 어디이며 당신은 누구요?’ 두려움은 호기심으로 쉽게 변한다.
‘이곳은 600년전 고려의 선비들이 숨어 살던 두문동이오며 신선의 마을이라고도 하지요. 어떤 사람들은 무릉도원이라고도 부른답니다. 저는 여기 심부름꾼이지요’
‘이럴 수가.. 그 이야기들이 사실이란 말인가? 전설의 무릉도원이 실재한다?’
나는 나대로 마음속에 퍼뜩 집히는 바가 있었다. 우선 태백에는 자개문을 지나면 오복동이라는 무릉도원이 있다는 이야기를 민병준씨가 쓴 책에서 보았었고, 금대봉 밑 싸리재의 다른 이름이 두문동재라는 사실, 고려때 이성계를 피하여 선비들이 건의령에 관모와 의복을 걸어놓고 이 근처의 백두대간으로 숨어들었다는 건의령 입간판의 글이 상기되었다.
백두대간의 깊은 숲속 곳곳에 무릉도원이 숨겨져 있지 않을까 하는 의문이 오늘 풀린 것이다. 동자는 나를 데리고 절벽에 나 있는 석회석 동굴로 들어갔다. 동굴문은 돌로 막혀있었는데 동자가 신호를 하자 그 문은 스르륵하고 열렸다. 캄캄한 굴 속을 얼마 쯤 내 배낭속에서 꺼낸 헤드랜턴에 의지해 지나가자 갑자기 밝은 세상이 나오고 저 건너 도원마을로 가는 배가 한 척 나타났는데 거기가 체크포인트였다. 나는 젊은 지킴이에게 GPS를 끈 사실을 확인당하고 운전면허증을 맡겨야만 했다.
살구꽃, 라일락, 그리고 진달래 등 꽃이 만발하였는데 꽃 중 압권은 역시 핑크빛의 복숭아꽃이었다. 그 현란한 색깔이 마음을 어지럽게 하고 라일락 향기가 코를 마비시킬 지경이었다. 나는 마을의 원로에게 안내되었다. 거기서 이 마을의 유래와 주민에 대하여 들을 수 있었다. 이 곳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 신선으로 몇 백년씩 계속 살고 있는데 마을을 다스리는 원로들은 고려 때 건의령에 관복을 반납한 분들이라고 한다. 그들은 동굴 속에서 이곳을 발견하고 밖으로는 나가지 않기로 서약하고 살고 있다고 한다.
따라서 주민의 구성은 매우 단촐하고 가끔 길을 잃고 헤매는 사람들 중 쓸만한 사람은 동자를 보내 이곳 주민이 되도록 데려온다는 것이었다.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은 구부시령 과부의 아홉 남편들이 모두 죽은 것으로 되어 있으나 실제로는 그들의 심성이 착한 것을 안 이 곳 원로들이 젊은 사람을 영입하기 위해 이곳으로 불러들인 것이라고 한다. 그게 한 200년쯤 된다고 하는데 아까 검문소를 지키는 사람이 그중 가장 어린 사람이라고 하는데 내가 보기에 삼십 밖에는 안되어 보였었다.
이곳은 자연의 섭리로 먹을 것이 자연히 마련되고 질병도 없어 사람들은 오락과 스포츠에 시간을 보내는 듯 하였다. 그래서 모두 젊은 모습과 기력을 간직하며 오래 산다고 한다. 나는 마을을 한 바퀴 돌아 본 다음 근처 냇가옆의 정자나무 밑 사람들이 모인 곳으로 갔다. 한 편에선 서너명의 노인들이 바둑이나 장기를 두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다른 평상에선 젊은이들이 노트북으로 무선인터넷 게임에 빠져 있었다. 고스톱 그룹도 있다 하는데 그곳엔 내가 이곳에 완전히 받아들여진 다음에야 안내하겠다고 한다.(고스톱엔 어느나라 돈으로 거는지 궁금했지만 묻지 못했다.)
저녁식사는 한옥으로 지은 식당에서 할 수 있었는데 현미가 섞인 오곡밥과 곰취, 참취, 삼잎국화 등 산나물과 명태국을 먹을 수 있어 내 입맛에 꼭 맞았다. 식후에 서빙되는 차는 순국산 둥글레차라서 중국제 둥글레차와는 그 맛이 천지차이였다. 그리고 삼척 환선주라든가 하는 명주를 한 잔 주는데 나는 그 술을 받아먹자 깊은 잠에 빠져 달게 잘 수 있었다. 최근의 불면증이 다 날아간 셈이었다.
다음날부터 나는 마을 사람들과 축구와 당구, 소프트볼, 골프연습과 인공사면에서의 스키 등을 즐기며 시간가는 줄 모르게 지냈다. 저녁엔 노래방에서 맥주를 마시며 노랠 불렀다. 일주일 쯤 지나자 맘껏 노는 것도 시들해져 나는 하마부인도 슬슬 그립고 해서 퇴출을 신청하였다. 나는 원로와 대면하였다.
‘이곳이 싫소?’
‘그건 아니옵니다만 사람이 재미로만 살 수는 없아옵니다.’
‘그렇다면 이곳에 빠진 게 무엇이오?’
‘눈물에 젖은 빵이옵니다. 노동의 뒤에 오는 성취감이 제겐 꼭 필요하옵니다.’
‘허어, 우린 수백년간 신선같은 생활을 계속해 왔오. 하늘이 주는 걸 먹으며 개인의 교양과 체육에 모든 시간을 쓰고 있음에 이를 탓하는 사람은 당신이 처음이오’
‘죄송합니다. 나가서 일 좀 더 하다가 은퇴한 뒤 오면 안 되겠습니까?’
‘안될 말이오. 여기는 그런 양로원이 아니오. 후회할 때가 올거요. 안되었지만 퇴출을 허가하리다. 단, 각서는 쓰고 가시오.’
‘고맙습니다.’
나는 이곳의 위치는 물론 존재여부에 대해서도 함구할 것이라는 각서를 쓰고 하이맛이라고 알파벳 글자로 싸인한 다음 복사꽃이 흐드러지게 핀 무릉도원을 나올 수 있었다. 물론 각서에는 단서조항이 있었다. 다음카페의 송백산악회 ‘백두대간 산행기 란’에는 글을 쓸 수 있게 되어 있는 것이었다. 그것은 내가 원로를 설득한 결과인데, 산행기를 쓸 때에는 사실에 입각하여 써야하기 때문에 송백에 글을 투고하는 내가 무릉도원에 갔던 일을 숨길 수는 없노라고 강하게 주장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 글이 송백의 바깥으로 나간다면 내 책임이 아님을 밝힌다.)
동자의 안내로 석회석 동굴의 돌문을 나온 나는 어찌어찌하여 구부시령까지 올 수 있었다. 거기서부터는 잘 아는 길인지라 삼척시내까지 쉽게 걸어 내려올 수 있었다. 배낭속의 휴대폰을 꺼내 하마부인에게 전화를 하려하니 전화기는 이미 고장나 있고 고물이 되어 있었다. 삼척시내에 가니 중앙역이라는 간판이 붙은 유리와 철로되어 속이 훤히 들여다 보이는 화려한 건물이 있는데 서울로 가는 KTX가 턱 버티고 서 있었다. 나는 눈을 의심할 수 밖에 없었다. (이 시골 삼척에 언제 KTX가?)
사람들의 옷차림도 아주 야하고 화려했다. 원색에 가까운 옷의 무리들에게 나는 땀에 절고 검은 등산복을 입은 촌스러운 한 노인에 불과했다. 신선놀음에 도끼자루 썩는 줄 모른다는 속담이 생각났다. 시간이 꽤 흘렀다는 것을 주변 분위기를 보고 알 수 있었다.
‘지금이 몇 년도요? 선거는 끝났오?’
나는 어떤 잘생긴 남학생에게 물었다.
‘할아버지 지금이 2037년인것도 모르세요? 어디 외국에 다녀 오셨어요?’
‘아니? 벌써 2037년이라고? 그게 정말이오?’
'예, 그렇습니다.' 청년은 나를 이상한 눈으로 쳐다 보았다.
그곳 동굴 속 무릉도원에서의 신선놀음 시간 일주일이 대한민국 시간 30년에 필적했다는 것이다.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다. 그래도 난 살아야 했다. 무릉도원에 대한 과도한 호기심이 나에게서 30년을 빼앗아 갔지만 그놈의 호기심이 또 발동했다. 그래서 그에게 물었다.
‘한가지 중요한 걸 물으리다. 2007년 대선에선 누가 대통령에 당선되었소?’
‘제가 태어나기 전이라 잘 모르겠습니다만 아빠에게 여쭈어 볼게요.’
학생은 전화기도 없이 텔레파시로 자기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고 있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