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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묘·성균관의 모든것
<문묘 성균관의 역사>
서울 문묘와 성균관은 1398년(태조 7)에 창건하였다. 창건 당시 규모는 대성전과 명륜당을 비롯하여 96칸에 달하였다. 그러나 1400년(정종 2) 화재로 소실되어 1409년(태종 9)에 중건하였다. 이후 전사청, 향관청(享官廳), 장서각 등 여러 건물들을 더 세웠지만 임진왜란 때 전사청을 제외한 대부분의 건물이 또다시 소실되었다. 1601년(선조 34) 중건공사에 착수하여 대성전을 완공하고, 2년 후에는 동무(東廡)와 서무(西廡), 신문(神門)을 중건하였다. 1606년(선조39)에 명륜당을 중건하면서 비로소 격식을 갖추게 되었다. 1626년(인조 4)에는 정록청(正錄廳), 존경각(尊經閣), 양현고(養賢庫), 진사식당 등을 재건하였으며, 1653년(효종 4)에는 향실(香室)을 건립하였다. 이후에도 새로운 건물들이 건립되었으며 여러 차례에 걸쳐 보수되었다.
서울 문묘와 성균관은 조선시대 최고의 교육기관으로서의 역할을 담당하였지만 조선 말기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이면서 침체되기 시작하였다. 1895년(고종 32)부터는 갑오경장의 여파로 인해 교육기능을 상실한 채 문묘 기능만 유지하게 되었다. 1910년 일제강점과 함께 성균관은 더욱 침체되었다. 1930년에는 명륜학원(明倫學院)이 설립되었고, 1939년에 명륜전문학원으로 변화되었다가 1943년에 폐교되었다. 광복 후에 다시 명륜전문학교로 개교하였고 이듬해 성균관대학으로 개명하였다. 1953년에는 성균관대학교가 종합대학이 되었고, 1963년에 성균관대학교와 성균관이 분리되었다.
<성균관 유생>
개국 초에는 정원이 150인이었으나, 1429년(세종 11)에는 200인으로 증원되었다. 이 중 반은 상재생(上齋生) 또는 상사생(上舍生)이라 하여 생원(生員)·진사(進士)로서 입학한 정규생(正規生)이었으며, 나머지 반은 기재생(寄齋生) 또는 하재생(下齋生)이라 하여 유학(幼學) 중에서 선발했다.
성균관유생들은 과거에 있어서 여러가지 특전을 부여받았다. 관시·알성시(謁聖試)·춘추도회(春秋都會) 등이 그것이며, 그 밖에 천거의 특전을 받기도 하였다. 성균관은 문과 준비를 위한 과업교육(科業敎育)을 담당하는 기관이었기에 입학규정은 엄하면서도 일정한 재학기간이나 졸업일이 없었다. 과거에 합격하는 날이 바로 졸업일이었다고 할 수 있다.
<성균관 유생들의 생활>
총 200명의 학생들은 기본적으로 통학금지, 전원 기숙사 생활을 해야 했다. 기숙사비, 등록금, 식비, 문구류 등등 드는 비용은 모두 공짜였다. 그런데도 의외로 정원이 모자라 합격생 이외에도 외부 입학생을 추가 모집했다(영재 조기 입학생, 기부입학생, 국가유공자 금수저). 그리고 합격생의 연령은 34.5세. 합격생 대부분이 처자식 딸린 30대 가장이었으니 오랜 시간 기숙사 생활을 하는 걸 꺼려했다. 또한 성균관은 입학과 졸업이 따로 없어, 나가고 싶은 사람은 그냥 자퇴하면 끝이었다.
<방외유생>
실록과 승정원일기에 보면 방외유생들은 성균관의 재회에 참석하거나, 거재생을 대신하여 제사를 지키거나, 성균관의 각종 행사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문묘배향인물 배치도>
* 공자, 4성, 송조6현, 우리나라 성현 18분
- 공부자 (孔夫子)
- 4성(四聖)- 종성 증자(宗聖 曾子), 아성 맹자(亞聖 孟子)
복성 안자(復聖 顔子), 술성 자사(述聖 子思)
- 공부자의 제자 10철(十哲)- 민손(閔損) ·염경(冉耕) ·염옹(冉雍) ·재예(宰豫) ·단목사(端木賜)염구(冉求) ·중유(仲由) ·언언(言偃) ·복상(商) ·전손사(顓孫師)
- 송조육현(宋朝六賢)- 주돈이, 정호, 정이, 소옹, 장재, 주희
* 우리나라 18현(十八賢)
설 총 안 유 김굉필 조광조 이 황 이 이 김장생 김 집 송준길 최치원 정몽주
정여창 이언적 김인후 성 혼 조 헌 송시열 박세채
* 공문 10철(孔門十哲)
공자는 70여 생애를 살면서 수 많은 제자를 양성하여 고대 중국의 문명의 시원을 연 인물이다. 그가 일생을 통하여 배출한 제자가 3,200여명에 달한다고 하며 그 가운데 10명의 제자를 공문10철(孔門十哲)이라 부른다.
1) 비공 민손(費公閔損)- 자건
주나라의 후기 춘추시대의 노나라 사람. 성은 민(閔)이요 이름은 자건(子蹇)이니 공자보다 15세가 적은 초기의 제자다. 천성으로 효성스러워 계모와 배다른 동생들을 잘 보살펴 공자님으로부터 "효자로다. 민자건이여!"라는 찬사를 하게 하신 인물로써 훗날 비공(費公)에 봉해졌다.
2) 운공 염경(鄆公 冉耕) - 백우
노나라 사람. 성은 염씨요 이름은 경이며 자가 백우(伯牛)이다. 덕행이 있으며 일찍이 대풍창(문둥병)에 걸려 죽으려 할때 공자께서 노구를 이끄시고 그를 찾아가 처참한 제자의 모습을 보고 하늘을 원망하신다. "이 사람에게 이러한 병이 걸림은 운명이란 말입니까?"하고. 훗날 운공(鄆公)에 봉해진다.
3) 설공 염옹(薛公冉雍) - 중궁
노나라 사람, 성은 염씨이며 이름은 옹이며 자는 중궁(仲弓)이다. 공자보다 29세 아래다. 덕행이 있었으며 너그럽고 간중(簡重)하였다. 평소 공자께서는 옹을 보고 평하시기를 "옹은 임금의 도량이 있으니 왕 노릇을 할만하다"고 칭송하셨다. 훗날 설공에 봉해진다.
4) 제공 재여(齊公宰予) - 자아
노나라 사람. 성은 재씨이며 이름은 여이고 자는 자아(子我)다. 평소 언변에 능하여 자공과 더불어 병칭 되었다. 제나라에 벼슬하여 훗날 제나라의 수도인 임치땅의 대부가 되었다. 성격이 경솔한 면이 있어 자주 공자님으로부터 꾸지람을 받기도 한다. 훗날 제공에 봉해졌다.
5) 여공 단목사(黎公端木賜) - 자공
위나라 사람. 성은 단목이며 이름은 사 자는 자공(子貢)이다. 공자보다 31세가 적다. 인물 비평하기를 좋아하고 지혜가 성인을 알아볼 정도였으며 한번만 들어도 그 뜻을 알았다. 다.
6) 서공 염구(徐公冉求) - 자유
노나라 사람. 성은 염씨 이름은 구 자는 자유(子有)다. 공자보다 29세 아래다. 재예(才藝)가 많고 정치학에 능하였다. 그래서 공자께서는 그를 당대의 실력자인 계씨의 집 가신으로 추천한다. 훗날 서공에 봉해진다.
7) 위공 중유(衛公仲由) - 자로
노나라 사람. 성은 중 이름은 유 자는 자로(子路) 또는 계로(季路)라 한다. 공자 초기의 제자이며 성격이 호방하고 무술에 능하였다. 그러나 조급하고 호협한 성격으로 말미암아 훗날 위나라의 정변에 관계되어 공자보다 앞서 죽는다.
8) 오공 언언(吳公言偃) - 자유
노나라 사람. 성은 언 이름은 언 자는 자유(子游)다. 공자보다 45세 연하다. 문학에 능하였고 노나라의 하읍인 무성의 고을 원으로 있을 때는 예학으로 다스렸다.
9) 위공 복상(魏公卜商) - 자하
위나라 사람. 성은 복 이름은 상 자는 자하(子夏)다. 공자보다 44세가 적다. 자유와 더불어 문학에 능하였고 공자 사후 서하에서 후학을 가르치고 위나라 문후의 스승이 되었다.
10) 진공 전손사(陳公顓孫師) - 자장
진나라 사람. 성은 전손 이름은 사 자는 자장(子張)이다. 공자보다 48세 아래이다. 용모가 빼어나고 자질이 너그로우며 사교성이 좋은 반면 인의의 행실을 표방하지 않아 동문들로부터 공경의 대상은 되지 못하였다.
* 석전대제
문묘, 곧 성균관의 대성전에서 공자를 비롯한 선성(先聖)과 선현(先賢)들에게 제사 지내는 의식. 모든 유교적 제사 의식의 전범(典範)이며, 가장 규모가 큰 제사이다. . 1986년 중요무형문화재 85호로 지정되었다. 석전은 정제(丁祭), 또는 상정제(上丁祭)라는 별칭으로도 불렀는데, 이는 석전을 매년 봄과 가을에 걸쳐 두 차례 음력 2월과 8월의 상정일(上丁日)을 택하여 봉행해 온 데서 비롯된 것이다.
『고려사(高麗史)』의 기록에 따르면 고려시대 국립학교인 국자감에서 석전을 봉행하였으며, 현종 11년(1019) 8월에는 최치원을 선성묘에 종향(從享)하고, 현종 13년에 다시 설총을 종향함으로써 우리나라의 성현을 문묘에 배향하는 전통이 시작되었다.
석전대제에는 다섯 명의 헌관(獻官: 위패 앞에 잔을 올리는 제관)과 집례(執禮: 진행을 담당하는 제관), 대축(大祝: 제사의 축문을 읽는 제관)을 포함한 27명의 집사가 참여하며, 이와 더불어 문묘제례악(文廟祭禮樂)을 연주하는 41명의 악사, 팔일무(八佾舞)를 추는 64명, 모두 137명의 대규모 인원이 동원된다.
<성균관내 건물 배치도>
< 출입문>
* 신삼문(神三門)
문묘의 정문으로 대성전 남쪽에 위치하며 대성전과는 신도(神道)로 이어져 있다. 성현들의 넋이 드나든다고 해서 신문(神門)이라 불리는데 외삼문(外三門)이라고도 한다. 정면의 돌계단을 통해 기단에 오르내리도록 되어 있다. 석전대제 때에만 좌우문이 개방된다.
*동말문(東末門) · 서말문(西末門
대성전 뜰의 동남쪽과 서남쪽 끄트머리에 위치한다. 태조 7년(1398년)에 창건된 뒤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다가 선조 37년(1604년)에 중건했다.
*동삼문(東三門
대성전 동쪽에 위치하며 대성전과는 어도(御道)로 이어져 있다. 임금이 성균관에 드나드는 문으로 어삼문(御三門)이라고도 한다. 정면 3칸에 측면 2칸의 평삼문(平三門)이고 남쪽으로 동무와 연결되어 있으며 북쪽으로는 동고와 연결되어 있다. 정면의 돌계단을 통해 기단에 오르내리도록 되어 있다.
*대문(大門)
성균관 관람시 실질적으로 출입이 가능한 문으로 명륜당 뜰의 동남쪽 끄트머리에 위치한다. 명륜당 대문이라고도 한다. 정면 2칸에 측면 1칸의 평삼문(平三門)이고 정면의 돌계단을 통해 기단에 오르내리도록 되어 있다. 남쪽으로는 동고와 연결되어 있으며 북쪽으로는 동재와 연결되어 있다.
閒人勿入 / 볼일 없는 사람은 들어오지 말라.
*전향문(前香門) · 후향문(後香門)
성균관 관람시 실질적으로 출입이 가능한 문으로 전향문은 동재와 식당 사이에 위치하고, 후향문은 명륜당 서쪽에 위치한다. 전향문을 통해 성균관으로 들어가면 동재 앞을 지나서 정록청에 이르고, 후향문을 통해 성균관에서 나가면 비천당 앞에 다다른다.
<제향 영역>
*대성전(大成殿)
공자를 비롯한 유교 성현들의 위패를 모신 사당으로 문묘 행사를 거행하는 곳이다. 태조 7년(1398년)에 창건된 뒤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다가 선조 35년(1602년)에 중건했다. 현판은 한호(韓濠)가 썼다. 처음에는 대성인(大聖人)을 모신 곳이라 해서 대성전(大聖殿)이라 했는데, 중국 사신이 공자는 온갖 학문을 집대성(集大成)했으므로 대성전(大成殿)이라 부르는 것이 맞다 해 바뀌었다.
*동무(東廡) · 서무(西廡)
중국 94현과 한국 18현의 위패를 모시던 공간으로 대성전 뜰의 동서에 위치한다. 태조 7년(1398년)에 창건된 뒤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다가 선조 37년(1604년)에 중건했다.
-대성전 은행나무
대성전 앞에 있는 은행나무 두 그루이다. 수령은 대략 400년 ~ 500년 정도이다. 서울특별시의 기념물 제37호로 지정받았다.
*동고(東庫)
동삼문과 대문 사이에 있는 창고이다.
* 묘정비(廟庭碑)
문묘의 연혁을 기록한 비석으로 대성전 뜰 동남쪽에 있다. 태종 10년(1410년)에 처음 묘정비를 세웠는데, 비문은 왕명을 받들어 변계량(卞季良)이 지었다. 중종 6년(1511년)에는 비각을 세웠다. 임진왜란 때 훼손되자 인조 4년(1626년)에 다시 묘정비를 세웠는데, 비문은 이정귀(李廷龜)가 짓고 이홍주(李弘胄)가 썼으며 제액은 김상용(金尙容)이 썼다.
*제기고(祭器庫)
문묘의 향사에 사용되는 제기를 보관하는 건물로 서무의 서쪽에 있다. 태조 7년(1398년)에 창건된 뒤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다가 선조 35년(1602년)에 중건했다.
*수복청(守僕廳)
문묘의 관리를 담당하던 남자 하인들이 거처하던 곳으로 제기고 북쪽에 있다. 재학당(載學堂)이나 근관직청(芹官直廳)이라고도 한다.
*전사청(典祀廳)
문묘의 향사에 사용되는 제수를 준비하는 건물로 수복청 북쪽에 위치한다. 성종 3년(1472년)에 창건했고, 1986년에 복원했다.
*포주(庖廚)
문묘의 향사에 사용되는 제물을 검사하고 손질하던 곳으로 전사청의 북쪽에 위치한다. 태종 7년(1407년)에 창건했고, 1975년에 복원했다.
<강학 영역>
-명륜당(明倫堂)
성균관 유생들의 교육을 위한 강당이자 과거 시험장으로 대성전 북쪽에 위치한다. 태조 7년(1398년)에 창건된 뒤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다가 선조 39년(1606년)에 중건했다. 내부에 걸린 현판 중에는 박문약례(博文約禮)라는 현판이 있는데, 이것은 공자의 77세손으로서 제32대 연성공(衍聖公)이자 초대 대성지성선사봉사관(大成至聖先師奉祀官)을 지낸 공덕성(孔德成)의 글씨이다.
* 동재(東齋) · 서재(西齋
성균관 유생들이 기숙하던 건물로 명륜당 뜰의 동서에 위치한다. 태조 7년(1398년)에 창건된 뒤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다가 선조 39년(1606년)에 중건했다.
*문묘 은행나무
행단(杏壇)을 상징하는 두 그루의 은행나무로 명륜당 뜰에 위치한다. 중종 14년(1519년)에 대사성을 지낸 윤탁(尹卓)이 심었으며, 나이는 600살 정도로 추정된다. 천연기념물 제59호로 지정받았다.
*존경각(尊經閣)
성균관의 장서를 보관하던 도서관으로 명륜당 북쪽에 위치한다. 소장된 장서는 각종 유교 경전과 역사서로 한정되었고, 불교 및 도교와 여타 기술 서적은 소장하지 않았다. 성종 7년(1476년)에 창건되어 중중 9년(1514년)의 화재와 임진왜란으로 두 차례 소실되었다가 광해군 13년(1621년)에 중건했다.
*육일각(六一閣)
군자가 갖추어야 할 육예(六藝) 가운데 하나인 궁술을 익히고 이와 관련된 대사례(大射禮)에 쓰이는 활과 화살을 보관하던 건물로 존경각 동쪽에 위치한다. 영조 19년(1743년)에 영조가 직접 대사례를 행하고 이를 기념하여 건립했고, 본래는 향관청의 서쪽에 있었다.
*식당(食堂)
성균관 유생들이 식사하던 건물로 동재 동쪽에 위치한다. 진사식당(進士食堂)이라고도 한다. 태조 7년(1398년)에 창건된 뒤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다가 인조 4년(1626년)에 중건했다.
* 비복청(婢僕廳)
성균관 유생들의 식사를 담당하던 여자 하인들이 거처하던 곳으로 진사식당 북동쪽에 위치한다. 서벽고(西壁庫)라고도 한다. 정조 대 이전에 건립한 것으로 추정된다.
<관리 영역>
*정록청(正錄廳)
성균관의 관원들이 근무하던 사무실로 명륜당 서쪽에 위치한다. 태조 7년(1398년)에 창건된 뒤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다가 인조 4년(1626년)에 중건했다.
*서리청(書吏廳)
성균관의 관원들이 근무하던 사무실로 정록청 동북쪽에 위치한다. 정조 대 이전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전체 14칸의 건물이 안뜰을 중심으로 冂자를 이루고 있는데, 본당은 정면 5칸에 측면 2칸이고 서측 익사가 1칸에 동측 익사가 3칸이다. 개방 시간에도 출입이 통제되는 건물이다.
*직방(直房)
성균관의 관원들이 쉬어가던 대기실로 정록청 뜰의 동쪽에 위치한다.
*고직사(庫直舍)
정록청에 드나드는 문간채로 정록청 남쪽에 위치한다. 고문(庫門)이라고도 한다. 전체 4칸 가운데 문간을 중심으로 서쪽 1칸은 사무실로, 동쪽 2칸은 창고로 사용된다.
*향관청(享官廳)
문묘의 향사 때 제관들이 숙식하고 제사에 쓰이는 향과 축문을 봉안하는 건물로 육일각과 정록청의 남쪽에 위치한다. 성종 4년(1473년)에 창건된 뒤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다가 효종 4년(1653년)에 중건했다.
*동월랑(東月廊) · 서월랑(西月廊)
문묘의 향사 때 집사들이 숙식하고 평소에는 성균관의 유생들이 기숙하던 건물로 향관청 뜰의 동서에 위치한다. 성종 4년(1473년)에 창건했고, 1986년에 복원했다.
<외부 부속 건물>
*탕평비(蕩平碑
영조 18년(1742년)에 성균관의 유생들이 당쟁에서 벗어나 참다운 인재가 되기를 권장하기 위해 영조의 어필을 새겨서 세운 것으로 어서비(御書碑)라고도 불린다. 본래 반수(泮水)를 건너는 향석교 뒤에 세워져 있었으나 1980년에 성균관대학교 정문 자리에 있던 대성문(大成門)과 가깝다는 이유로 보다 남쪽인 지금의 자리에 이전되었다.
*하마비(下馬碑)
궁궐과 종묘 사직 등 엄숙한 장소의 입구에 세워서 이곳을 지나는 자는 말에서 내리라는 뜻을 알리기 위해 비석이다. 大小人員 過此者 皆下馬 / 크건 작건 이곳을 지나는 자는 모두 말에서 내리라.
*하련대(下輦臺)
석전대제나 알성시 등이 거행되어 임금이 친히 성균관에 행차할 때 타고 온 가마(輦)를 내려놓는 곳이다. 동삼문 맞은편에 위치한다.
*비천당(丕闡堂)
강당이나 과거 시험장으로 쓰이던 건물로 명륜당 서북쪽에 위치한다. 현종 5년(1664년)에 도성 안의 사찰인 인수원(仁壽院)과 자수원(慈壽院)을 헐면서 나온 자재를 가져다가 성균관에 비천당과 함께 그 서남쪽으로 벽입재(闢入齋)와 일양재(一兩齋)를 세웠는데, 그 이름은 송시열이 큰 도를 크게 밝힌다(丕闡大猷)는 주희의 말에서 따온 것이다.
<자료정리 정운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