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2월3일 금요일. 이탈리아 시간 오전 9시. 까를로와 그의 부친 파파로코를 만나 마리나-스베바의 키와 세일요트의 키를 정식으로 인계 받았다. 마리나 사무실에 가 등록을 하니 아줌마 사무원이 직접 밖으로 나와 마리나 키로 주차장 문을 열어주는 시범까지 보여준다. 이제 계류장 바로 앞까지 차를 몰고 가 짐을 내릴 수 있고, 샤워 실도 사용가능하다. 나는 출항 때까지 마리나-스베바의 계류 고객으로, 뭔가 대접받는 느낌이다.
보트 서베이는 마쳤지만 아무래도 중고 요트다 보니 사소한 부분의 수리가 필요하다. 보트 뒤쪽의 외부 샤워기는 내부에서 물을 차단하는 밸브가 없다. 이러면 한국의 혹독한 겨울에는 다 얼어 터진다. 상황을 설명하고 냉,온수 차단 밸브 두 개 설치를 추가로 요청한다. 이탈리아 겨울이 따스하긴 한 모양이다. 2월 초인 현재도 폰툰의 수돗물을 얼마든지 사용가능하다.
토요일부터는 배에서 숙식한다. 라디에이터 한 개를 사고, 이불 등을 준비한다. 배에 무시동 히터가 기본 설치되어 있지만 배의 경유를 쓴다. 계류 중에는 전기를 사용하기로 한다. 출항 때까지 살면서 물 소비라든가, 음식량, 전력 사용량 등을 4개월 항해에 맞게 대비하려는 의도다. 이젠 바바리아 50이 우리 가족의 집이다. 제조국가인 독일인들의 꼼꼼함을 믿고 싶다. 전에 가지고 있던 프랑스제 베네토요트 와는 몇 가지 점에서 다르다. 예를 들면 앞 뒤 물탱크가 프랑스제는 두 탱크를 함께 쓰는 밸브가 있었는데, 독일제는 확실히 구분 되어 있다. 전자는 편리하지만 두 탱크의 물이 동시에 고갈 될 수 있다. 항해 중 이러면 낭패일 거다. 후자는 밸브를 조절하는 불편함이 있지만, 탱크 하나는 비었고, 두 번째 탱크를 쓰는 중이라는 긴장을 주어 선장은 보다 주의할 것이다.
한국에서 세계일주 항해를 시작할 때는 한국 식품을 잔뜩 싣고 편안한 마음으로 출항이 가능하다. 하지만 외국에서 출항 할 때는 한국 식품을 준비하기가 쉽지 않다. 처음에는 한국에서 포장, 항공화물을 보낼 까 했는데, 비용도 만만치 않고, 받아줄 주소도 마땅치 않다. 특히, 배를 직접 서베이 한 후 한국서 보내라고 하면 내가 출항하기 전까지 도착할 수 있을까가 관건이다. 하염없이 고추장, 된장을 기다리는 상황이 벌어질 수 있다. 물론 어지간한 나라에는 한국 마트가 있다. 이탈리아에는 산살보와 3시간 30분 거리인 로마에 제일 가까운 한국마트가 있다. (물론 내가 모르는 한국마트가 더 있을 수도 있다)
로마에서 한국마트에 들러 쌀10키로, 김치 봉지 3개, 간장, 고추장, 된장, 라면 40개, 밑반찬 조금을 샀다. 잘은 모르지만 한국서는 10~15만원 어치로 예상한다. 그러나 계산해 보니 50만원이 나왔다. 가격이 엄청나다. 한식으로 생활하면 출항도 하기 전에 다 먹어치우겠다. 가능하면 이탈리아 음식으로 생활하자. 다행이 아내가 스파게티에 적응하기 시작했다. 먹다보니 이탈리아 빵도 상당히 맛있다. 하루에 한 끼 정도만, 가지고 간 압력 밥솥에 밥을 해 아기에게 먹이고 우리도 먹는다.
어떻게든 이탈리아에서 쌀을 구해야 한다. 카를로에게 물었다. 쌀을 구할 수 있어? 그런데 ‘라이스’를 못 알아 듣는다. 손발 동원하고 먹는 시늉을 하니? Oh! 리쏘? 하며 웃는다. 그러더니 1Kg 짜리 포장 쌀을 내민다. 살펴보니 여기 유명 마켓의 이름이 적혀있다. 만세! 쌀을 얼마든지 살 수 있다. 근심걱정의 절반이 사라졌다. 쌀이 영어로는 라이스, 이탈이아어로는 리쏘다.
오후에 인근 마켓에 갔다. 마리나에서 1Km 떨어진 가까운 곳이다. Centro Commerciale Costaverde. 가정용품, 전자제품, 수퍼마켓, 옷가게 등이 집합된 종합 쇼핑몰이다. 시험적으로 쌀 5봉투, 파스타 10봉투, 파스타 소스 1박스, 바나나등과 저녁에 배에서 먹을 목살까지 카트가 터지게 샀다. 한국서 이 정도라면 40만 원 정도? 그러나 계산은 20만원이다. 이탈리아 쌀은 1키로에 2.68 유로(3,618원) 다. 이탈리아에선 이탈리아 식료품으로 살아야 한다. 그게 답이다. 내일 부터는 쌀, 물, 감자, 양파, 햄과 통조림, 계란 초컬릿 등을 4개월 치 사야 한다. 신선 식품류는 도중에 당도하는 마리나에서 보충하자.
그나저나, 한국과 이탈리아의 사소한 문화 차이로 엄청 헷갈린다. 로마공항 힐튼에서 룸 키를 받아보니 1086호다. 엘리베이터로 가보니 6층까지 밖에 없다. 뭐지? 한참을 10층까지 가는 엘리베이터를 찾아 헤매다 로비 리셉션에 물어 보니 그게 1층이란다. 왓? 1086이 1층 86호라고? 지금 산살보에서 묵는 숙소는 2층인데, 엘리베이터에는 1 이다. 1층은 0고 로비는 –1 이다. 또 한참 헤맸다. 또 이 소형 엘리베이터는 엘리베이터가 올 때까지 버튼을 누르고 있어야 한다. 엘리베이터에 타고 난 후 가고 싶은 층에 도착할 때까지 버튼을 누르고 있어야 한다. 어쩌면 이렇게 자유롭게 엉망진창일까? 이탈리아 사람도 한국 오면 헷갈릴까? 1086호 키를 받아들면 1층에서 찾아 헤맬까? 요지경이다.
요 며칠 마리나는 날씨가 계속 좋다. 땅거미 지는 마리나는 무척 아름답다. 매일 봐도 매번 멋지다. 여기도 대관령처럼 큰 산맥이 있다. 더 높아서 흰 눈이 멋지게 쌓여있다. 게다가 달까지 휘영청. 세일요트들의 마스트 실루엣이 고단한 여행자의 마음을 흔든다. 옆에 계류 된 듀포 460에서는 이탈리아 중년들이 파티를 벌이고 있다. 그 중 한명이 다가와 인사한다. 안녕 나는 까를로의 친구다. 이제 이배가 네 배라고? 축하한다. 이배는 정말 멋진 배야. 뭐시라? 한국까지 4개월 항해? 너는 진짜 대단하다. 부럽다. 이탈리아 억양 영어로 한참 수다를 떨다 돌아갔다.
까를로가 배의 고장 난 가스렌지를 새것으로 바꿔 준다고 해서 당분간 휴대용 가스렌지를 사용 중이다. 콕핏 테이블에 팬을 놓고 목살을 굽는다. 된장에 참기름 조금. 마트에서 산 배추 비슷한 야채를 씻어 상추를 대신한다. 이탈리아 쌀밥은 맛이 묘하구나. 얼른 고기를 노릇하게 구워 아기에게 주니, 제비새끼처럼 입을 딱딱 벌리며 잘 받아먹는다. 행복하다. 내 새끼 입에 고기와 밥 들어간다. 내 입장에서는 만사여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