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실미도사건'은 무엇인가?
1971년 8월 23일 이른바 '실미도 난동사건'으로 명명된 그 날의 사건에 대해 언론은 그들이 정말 '북파부대'라면 건국 이래 최대의 파란을 몰고 올 사건이었기에 취재에 열을 올렸으나 어느 매체도 성공할 수 없었다. 사건 발생 3일만에 정래혁 국방장관, 김두만 공군참모총장 등 정부와 군 관계자들이 줄줄이 옷을 벗었고 살아남은 4명의 훈련병들도 바로 사형되었다. 그렇게 '실미도 사건'은 역사 속에서 영원히 사라져 버리는 듯 했으나 '국민의 정부' 이후 HID, AIU 등 국군 산하 첩보부대들의 존재와 인권에 대한 문제가 사회적 이슈로 부각되면서 '실미도사건' 에 대한 재조명은 고개를 들기 시작한다.
부대의 공식명칭은 '오류동 정보부대'로 불리던 공군 제 7069부대 소속 2325전대 209파견대. 1968년 1월 21일 '박정희 모가지를 따러' 31명의 무장공비가 청와대 앞까지 침투했다 무산된 '1.21 김신조 사건'에 놀란 박정희 정권과 중앙정보부가 계획한 보복조치로 창설되었다. 사형수, 무기수, 일반 제소자들이 포함된 사회 밑바닥 계층을 포섭, 작전성공 시 모든 형벌 취소 및 전과기록 말소 등 정부로부터 새 삶을 보장 받는 조건이었다. 1968년 4월에 만들어져서 '684부대'로 불렸던 이 부대는 김신조부대와 똑같이 31명으로 구성됐으나 훈련도중 사고, 탈출, 처형 등으로 7명 사망, 결국 24명이 최후까지 살아 남는다. 그들의 목표는 단 하나, 북파되어 주석궁에 침투 '김일성 목을 따오는 것'이었다.
실미도에 훈련은 없었다. 뛰고 또 뛰는 훈련병들 뒤엔 언제나 실탄을 장전한 기간병들이 있었던 것. 그들은 인민군 말투에 인민군가, 인민군 제식훈련 등 철저하게 인민군식 훈련을 받았다. 처음엔 오합지졸이었던 훈련병들은 발꿈치로 날아드는 실제사격과 단체구타, 인간의 한계에 도전하는 지옥훈련을 통해 단 3개월만에 북파 가능한 인간병기가 되었다. 부대가 창설된 지 4개월만에 첫번째 실전명령이 떨어져 바닷길로 북에 침투를 시도하지만 상부의 저지로 중도무산된다. 이후 3년 4개월간 '출정의 날'만을 손꼽아 기다리는 그들의 긴긴 기다림은 시작된다.
그 사이 섬 밖 육지의 상황은 처음 실미도부대를 창설할 때와는 전혀 다르게 돌아가기 시작한다. 국제 데땅트와 함께 남북 화해분위기가 조성되기 시작하고 중정부장이 교체되는 등 급격한 변화는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어느덧 '구 시대의 유물' 이자 '유령부대' 가 되어 버린 실미도 684부대, 결국 그들을 제거하라는 상부의 명령이 떨어진다. 그러나 인간병기로 길들여진 실미도훈련병들에게 일반사병들이었던 담당 기간병들은 속수무책이었고, 단 십여분만에 실미도를 접수한 훈련병들은 인천으로 상륙, 송도외곽에서 버스를 탈취, 서울로 향한다. 전군 비상경계령이 발동된 가운데 이들은 진압군과 교전 끝에 대방동 유한양행 앞에서 전원 자폭이라는 최후를 선택한다. 정부는 그 어느 때보다 신속히 이 사건을 종결지었다.
왜 함께 청와대로 향했는가? 왜 전원자폭 했을까? 살 수 있는 방법은 없었을까?
당시 훈련병들이 탈취한 버스에는 민간인 승객들이 타고 있었고 이들은 묘한 증언을 해 왔다. 훈련병들이 청와대로 가자고 했다는 것, 인질인 자신들을 보호하려고 했다는 것, 그리고 분명 버스 안에서 훈련병들이 먼저 총을 쏘진 않았다는 것. 이는 반대로 인질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진압군은 사격을 가했다는 얘기다. 그들은 왜 함께 청와대로 가려고 했을까? 왜 함께 전원 자폭의 최후를 선택했는가? 북파가능한 인간병기들이 뿔뿔이 흩어져 개별행동을 했다면 살아 남을 수 있지 않았을까? 그들은 무언가 '목숨걸고 하고 싶었던 이야기'가 있었던 것일까? 32년간 숨겨져 온 진실... 이제 말할 수 있게 된 지금, 그러나 그들은 사라지고 없다.
영화 "실미도"의 촬영지 실미도를 영화 개봉한지 7년이 지난 2010년 6월8일에 찾아갔다. 실미도 촬영지를 보려고 무의도를 찾았으나 물 때를 몰라서 돌아온 것이 작년 겨울이었는데 올해는 다행히 들어갈 수 있었다.
천안함 사건으로 남북 긴장상태가 최고조에 달한, 현충일이 있는 6월에 찾은 실미도는 그 옛날의 가슴 아픈 사연은 보이지 않고 아름답기 그지없는 해변과 소나무 군락이 아름다운 곳이었다. 영화 촬영장 세트는 그 당시 무허가 건물이라고 영화가 대박나기도 전에 철거하여 없어지고 표지판만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실미도를 가려면 먼저 무의도를 가야 한다. 무의도는 영종대교를 건너 영종도에서 잠진도 선착장에서 배를 타고 5분 정도만 가면 갈 수 있는 아주 가까운 섬이다. 도선료는 여객은 대인 3000원/소인 2100원이고,차량은 승용차 기준 20,000원이며, 운행시각은 07:00-20:00 매 30분간격으로 다닌다.
<잠진도 선착장>

무의도에 내렸다.

무의도에서 실미도를 가려면 물 때를 알아야 하는데 하루에 두번씩 물길이 열린다고 한다.
자세한 시간을 알려면 국립해양조사원 (http://www.khoa.go.kr)에 가면 알 수 있다.
실미도를 보려면 또 입장료 2000원을 내고 실미도 유원지에 들어가야 한다.
< 실미도 유원지앞 표지판>


실미해변(무의도 북서쪽에 위치한 초승달 모양의 해변)을 쭉 따라 걸어가면
길이 200m정도의 갯벌이 나온다.






무의도와 실미도를 연결하는 징검다리를 건넌다


<실미도 촬영장소가 있었던 곳에 세워진 푯말>

<실미도 부대원들이 훈련했던 숲속길>

다시 해변으로 나와서 실미도 사건을 모르는 세대를 만나고......




무의도쪽으로 올라오면


100년 이상 된 소나무 군락이 아름다운 캠핑장이 있다.



실미도 영화 개봉 이후에 어렵게 살아남은 북파공작원들의 실체가 알려지게 되었고, 사회적 이슈가 되었었다. 그들은 나라를 위해서 일했지만 떳떳하게 밝히지도 못하고 어둠속에 갇혀 어렵게 살아왔다. 그러나 실미도 영화 개봉 이후에 그들은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고, 국가를 상대로 손해보상을 요구하는 수차례 시위한 결과 어렵게 정말 얼마 안 되는 돈을 받았다.
통일이 되어 남북대립, 남남갈등이 없는 세상이 오기를 손 모아 기도하면서
실미도 기행을 마친다.

첫댓글 무언가 조금 남겨져 있었다면 하는 아쉬움 이였어요~
추천해 드릴려고 했는데, 없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