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상 1:19-28, 사무엘을 주신 하나님과 사무엘을 바친 한나 23.12.6, 박홍섭 목사
오늘 본문은 하나님께서 한나에게 사무엘이라는 아들을 주시고 한나는 그 아들을 하나님께 나실 인으로 바치는 내용입니다. 모든 사건이 그렇지만, 특별히 시대의 전환기에 등장하는 성경의 인물과 그들에게 허락되는 사건과 경험들은 단순히 한 개인에게 주어지는 의미로 그치지 않고 구속의 역사를 위한 하나님의 뜻을 계시해주는 역할을 합니다. 사무엘이 태어나고 바쳐지는 이 사건에도 일관된 하나님의 뜻이 나타납니다. 하나님은 한나의 태를 닫아 그녀에게 불임의 고통을 허락하셨습니다. 1:5-6을 보면 여호와께서 임신하지 못하게 하셨다고 두 번이나 반복합니다. 한나의 불임이 하나님의 의도에 의한 불임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그 오랜 불임의 고통을 통해 한나의 마음속에 아들을 주시면 하나님께 바치겠다는 마음을 만들어가십니다. 그리고 때가 되어 아들을 주셨고 한나는 서원대로 그 아들을 하나님께 바칩니다.
이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말씀하고자 하는 뜻이 무엇일까요? 한나처럼 진심으로 간절하게 자신의 소원을 기도로 아뢰면 우리도 응답받을 수 있으니 간절하게 기도하자고 하면 너무 말초적이고 단편적인 해석과 적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일단, 사무엘서가 시작되는 시대적인 배경이 사사 시대의 말기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고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사는, 종교의 형태는 있지만, 하나님과 상관없는 불 신앙과 패역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시대입니다. 사무엘서는 이런 시대를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경륜이 어떻게 사무엘과 다윗을 통해 펼쳐지는가를 설명하는 역사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이런 방식으로 주셨다고요? 19-20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아침에 일찍 일어나 여호와 앞에 경배하고 돌아가서 라마의 자기 집에 이르니라 엘가나가 그 아내 한나와 동침하매 여호와께서 그를 생각하신지라 한나가 잉태하고 때가 이르매 아들을 낳아 사무엘이라 이름하였으니 이는 내가 여호와께 그를 구하였다 함이더라” 지금 한나는 이 아들을 여호와 하나님께서 주신 아들임을 알고 이름을 사무엘이라고 짓습니다. 한나는 자신의 태를 닫으신 분도 하나님이고 태를 열어 아들을 주신 분도 하나님임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믿음의 고백에 근거하여 어린 사무엘을 서원대로 하나님께 나실 인으로 바칩니다.
그렇게 사무엘을 바치는 과정에서 주목해야 할 중요한 사실 하나가 있습니다. 해마다 온 가족이 절기와 서원제를 지키기 위해 실로로 올라갈 때 한나는 아이가 젖을 떼면 나실인으로 하나님께 바쳐야 하니 그때까지 나는 올라가지 않고 이 아이를 데리고 있겠다고 할 때 남편 엘가나가 한나의 요청을 들어줍니다. 그때 엘가나가 한나에게 하는 말을 보십시오. 23절입니다. “그의 남편 엘가나가 그에게 이르되 그대의 소견에 좋은 대로 하여 그를 젖 떼기까지 기다리라. 오직 여호와께서 그의 말씀대로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하니라. 이에 그 여자가 그의 아들을 양육하며 그가 젖 떼기까지 기다리다가” 엘가나는 한나의 요청에 그대의 소견에 좋은 대로 하라고 허락합니다. 이 표현이 상당히 익숙하지 않습니까? 사사기의 에필로그에서 반복해서 나왔던 “자기 소견에 좋은 대로 살았다는” 말과 똑같습니다. 그런데 어구는 똑같지만, 의미는 전혀 다릅니다. 사사기에서는 이 구문이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고 자신의 생각대로 살았음을 설명하는 구문이었다면, 엘가나의 이 말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한나의 생각, 한나의 소견이라는 의미입니다.
왜 이 말에 주목해야 합니까? 사사 시대의 어두움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수단이 여기에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전부 왕이신 하나님의 뜻을 무시하고 자기 소견에 좋은 대로 살고 있습니다. 그런 시대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방법은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자기 소견을 하나님의 뜻대로 바꾸고 조정하는 한나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한나에게 불임의 오랜 고통을 허락하시고 사무엘을 주셨습니까? 이런 소견을 만들어내기 위해서입니다. 아들을 주시면 이 아들은 나의 아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니 당연히 바치겠다는 소견입니다. 27-28을 보실까요. “이 아이를 위하여 내가 기도하였더니 여호와께서 나의 구하여 기도한 바를 허락하신지라 그러므로 나도 그를 여호와께 드리되 그의 평생을 여호와께 드리나이다 하고 그 아이는 거기서 여호와께 경배하니라”
이런 마음과 실천이 쉽지 않습니다. 사무엘이 어떤 아들입니까? 오랫동안 불임의 고통과 설움을 겪다가 어렵게 기도로 얻은 아들입니다. 얼마나 사랑스럽겠습니까?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들입니다. 아무리 하나님께 바친다 해도 그런 아들을 젖을 떼고 난 뒤 바로 바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한나라고 왜 이 아들을 붙들어 곁에 두고 싶지 않겠습니까? 아장아장 걸어 다니면서 웃고 재롱을 부리는 것을 보는 즐거움을 왜 더 누리고 싶지 않겠습니까? 왜 이 아들을 통해 자신의 희망을 실현시키고 싶지 않겠습니까? 사실, 그런 마음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자기 소견에 좋은 대로 사는 모든 일반인의 모습입니다. 사람들은 다 그렇게 삽니다. 자식에게 희망을 두고 소유에 희망을 둡니다. 자식과 소유를 통해 자신의 꿈과 희망을 실현해 보려고 합니다. 겉으로 하나님이 주셨다고 말을 할지 몰라도 실상은 내 자식이고 내 소유라고 생각하고 삽니다. 지금 사사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 그렇게 살고 있습니다. 아무도 자식을 하나님의 자녀로 생각하지 않고, 소유를 하나님의 소유로 생각하지 않고 있습니다. 아무도 나를 통해 하나님이 바라시는 뜻이 무엇인지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저 자기 혼자 잘 먹고 잘살면 그만인, 그리고 그것을 위해 어떤 수단과 방법도 서슴지 않고 시행하는 시대입니다.
이 시대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방법이 무엇이라고요? 한나를 통해 주시는 사무엘이고 그런 사무엘을 내 자식이기 전에 하나님의 자식이라고 바치는 한나의 모습입니다. 아브라함이 독자 이삭을 바칠 때의 모습과 비슷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사라에게도 자식을 주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도 불임의 고통을 당했고 여종 하갈에게도 무시를 당하는 설움을 겪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아브라함과 사라의 힘으로는 자식을 보지 못할 시간까지 기다렸다가 아브라함의 나이 100세에 이삭을 주셨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이 아들은 아브라함과 사라의 능력과 수단과 방법으로 얻은 아들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서 당신의 능력과 은혜로 주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삭이 자란 후 그를 제물로 바치라고 하셨습니다. 그때 아브라함은 두말하지 않고 이삭을 하나님께 바쳐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을 보였고 하나님은 그런 아브라함과 이삭을 통해 믿음의 백성을 만들어내십니다. 믿음은 그렇게 인간의 수단과 방법으로 만들어지지 않고 이삭을 만드신 것처럼 오직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로만 만들어진다는 뜻입니다. 그것을 인정할 때 이삭은 나의 이삭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삭이라고 고백하며 언제든지 하나님께 바칠 수 있는 것입니다.
똑같습니다. 하나님은 지금 불임의 여성 한나를 통해 아브라함 같은 믿음을 만들어내셨고 그가 믿음으로 바치는 사무엘이라는 아들을 통해 칠흑같이 어두운 사사 시대를 밝히는 구원의 역사, 믿음의 역사를 만들어가십니다. 오늘 본문을 읽고, 우리의 남은 인생을 살면서 기도로 하나님 앞에서 가져야 할 믿음과 마음이 바로 이런 소견입니다. “내게 있는 모든 것이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입니다. 내 자식이 하나님의 자식이고 내 소유가 하나님의 소유이고 나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을 주인으로 인정하고 왕으로 모시는 삶, 나의 소견을 왕이신 하나님의 뜻으로 조정하는 믿음, 그 믿음을 만들어내기 위해 하나님께서 내 인생을 허락하시고 그 모든 시간의 여정 속에서 그 믿음으로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가고 계심을 알았으니 이제부터 언제든지 나 자신을 바칠 수 있는 마음으로 살아가겠습니다”라고 기도할 수 있는 저녁이 되기를 바랍니다.
세상은 그렇게 살지 않습니다. 왜 자기를 하나님께 바치겠습니까? 왜 사랑하는 자식을 하나님께 바치겠습니까? 내 인생이고 내 자녀인데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자식을 좋은 학교에 보내고 좋은 회사에 취직시키는 것을 최대의 목표로 삼고 살아갑니다. 내가 잘되고 내 자식이 잘난 사람이 되어 세상에서 당당하게 큰소리치며 사는 것이 인생 최고의 복이라고 생각하고 삽니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도 별 차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싶다는 믿음과 그런 의식이 별로 없습니다. 사사 시대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시대 속에서 당신의 구원 역사를 누구를 통해 이루어가십니까? 자기 소견을 하나님의 뜻으로 바꾸어 사는 사람, 언제든지 자신을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자신과 자녀와 모든 것을 하나님께 드리면 하나님은 그냥 넙죽 받으시겠습니까? 아닙니다. 다시 돌려주십니다. 아브라함이에게 100세에 이삭을 바쳤을 때 하나님은 네가 나를 경외하는 줄 알겠다고 하시면서 이삭을 돌려주셨습니다. 그때 이삭은 나의 이삭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이삭입니다. 동일합니다. 오늘 한나가 사무엘을 바친 것도 같습니다. 사무엘은 이제부터 한나의 사무엘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사무엘이고 하나님의 사무엘입니다. 이 저녁, 우리 자신을 그렇게 하나님께 드리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의 소유가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