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교회 진단서 3, 버가모 교회, 계 2:12-17, 박홍섭 목사
믿음은 많은 부분 우리가 발을 딛고 살아가는 이 세상의 가치관과 충돌을 가져옵니다. 위로와 평안만을 기대하고 신앙생활을 하면 여기에서 브레이크가 걸립니다. 자신은 별일 없이 잘살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회개하라 하고, 삶을 바꾸지 않으면 참된 믿음 안으로 들어올 수 없다고 하니 마음이 편하기보다는 부담과 혼란이 옵니다. 소아시아 일곱 교회 중 세 번째 교회인 버가모 교회에는 이런 갈등 속에서 대조적인 반응을 보인 두 부류의 교인들이 있었습니다.
이 두 부류를 살피기 전에 먼저 버가모라는 도시를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버가모는 에베소, 서머나와 함께 소아시아의 3 대도시 중 하나로 상당 기간 로마식민지의 수도역할을 했던 행정도시입니다. 위치상으로 서머나에서 북쪽으로 약 80km 정도 떨어진 이 도시는 세 가지를 자랑했는데, 첫 번째가 신전입니다. 지금도 그 위용을 자랑하는 제우스 신전이 있었고, 지혜와 예술의 신 아덴, 농업과 풍요와 결혼의 신 데메테르, 술의 신인 디오니소스를 섬기는 신전들이 유명했습니다. 특히 아시아 최초로 살아있는 로마 황제 아우구스를 경배하는 신전을 건축하여 황제숭배의 중심지가 된 도시가 버가모입니다.
두 번째로 이 도시는 소아시아에서 가장 병을 잘 고치는 의료의 도시로 이름나 있었습니다. 히포크라테스 다음으로 유명했던 갈렌이라는 의사가 여기에 있었고 치유와 부활의 신으로 알려진 아스클레피오스라는 신을 섬기는 아스클레피온이라는 병원이 있었습니다. 이곳에서 병을 고치기 위해서는 아스클레피오스를 숭배하고 서약을 해야 했습니다. 구주로 불리는 아스클레피오스의 상징은 뱀이었습니다. 오늘날에도 약국과 제약을 상징하는 심볼에 뱀의 형상이 뚜렷하게 나타나는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특별히 병자들은 치유를 위해서 신전 안에서 하루를 자야 하는데, 이때 신전 안에 풀어놓은 독이 없는 뱀들이 지나가면서 몸을 스치게 되면 그것이 치유하는 신의 손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처럼 버가모는 병을 고치고자 하는 사람들의 열망을 이용해 우상숭배의 길로 빠지게 하는 그런 우상의 도시였습니다.
세 번째는 당시 20만 권의 장서를 보유하고 있었던 세계에서 가장 큰 도서관이 이들의 자랑거리였습니다. 일일이 파피루스나 양피지에 필사해서 책을 만들던 시대에 20만 권이라면 대단한 양이 아닐 수 없습니다. 문제는 여기에 있는 책이 대부분 반 하나님 적이고 사람들의 정신을 혼미하게 하고 타락하게끔 하는 책이었다는 점입니다. 이처럼 로마제국의 행정도시였고, 의료와 지식이 발달했던 버가모 사람들은 스스로 로마의 문명을 주도하고 이끄는 문화인이고 지식인이라며 자랑했지만, 주님은 이런 버가모를 사탄의 영향력과 통치력이 가장 강력하게 미치는 ‘사단의 위’가 있는 곳이라고 했습니다. “네가 어디 사는 것을 내가 아노니 거기는 사단의 위가 있는 데라”(13) 정치, 문화, 경제, 의료, 지식 모든 면에 있어서 사단이 맹렬하게 사람들의 정신과 사상을 지배했던 거대한 우상숭배와 세속화의 도시가 바로 버가모였습니다. 주님은 이 어두운 우상의 도시, 세속화된 도시의 한가운데 당신의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버가모 교회만이 아닙니다. 교회는 사단이 ‘왕 노릇’ 하는 세상 속에서 존재하기에 모든 시대 모든 교회의 주소는 “사단의 위”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진리는 어두운 데서 빛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버가모 교회는 이 도시 속에서 진리의 빛과 생명의 소금 역할을 감당하라고 하신 주님의 계획을 어떻게 감당했을까요? 먼저 13절을 보십시오. 칭찬이 나옵니다. “네가 내 이름을 굳게 잡아서 내 충성된 증인 안디바가 너희 가운에 곧 사단의 거하는 곳에서 죽임을 당할 때에도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였도다.” 내 충성된 증인은 원문을 살려 직역하면, ‘나의 충성된 나의 증인’입니다. 주님은 두 차례나 ‘나의’라는 말을 쓰심으로 안디바를 행한 특별한 애정을 표현하십니다. 감사하게도 버가모 교회에는 안디바와 같은 충성된 증인이 있었습니다. 안디바가 누구이며 그가 어떻게 순교했는지는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사단의 보좌가 있는 이 어두운 도시의 죄악과 우상숭배의 물결에 대항하며 주의 이름을 굳게 붙잡고 죽기까지 충성했던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교회사가 유세비우스에 의하면 버가모 교회에서 순교 당한 사람은 안디바 뿐 아니라 카푸스, 파필루스, 아가도니카라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이에 근거해 신약 학자들은 안디바가 어느 한 특정 인물이 아니라 죽기까지 충성한 사람들을 대표하는 이름이라고 주석하기도 합니다. 버가모 교회는 이들처럼 주님의 이름을 굳게 잡고 주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한 사람들,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그리스도와 복음을 자랑하고 죽음을 각오하면서까지 복음을 지키고 증거 했던 신실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초대교회의 교부이자 유명한 설교자인 크리소스톰에게 하루는 제자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선생님, 온 세상이 우리를 반대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좋습니까?” 그때 크리소스톰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래 그러면 우리가 온 세상을 반대하면 되겠구나” 이런 사람이 안디바입니다. 예수 믿는 신앙 때문에 온 세상이 자신을 반대한다 해도 오히려 자기가 온 세상을 반대하면서 주의 이름을 붙잡고 진리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 교회를 교회 되게 하고 성도를 성도 되게 하는, 이 어두운 세상을 진리로 밝히는 주님의 충성스러운 증인들, 이들이 안디바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은 우리가 세상의 기세에 눌려 겨우 신앙의 명맥만 유지하는 모습을 원하지 않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증인으로 불렀습니다. 예수의 증인, 복음의 증인, 믿음의 충성스러운 증인으로 불렀습니다. 오늘 거대한 불 신앙의 흐름이 시대의 사조가 되어 믿는 자를 향해 덮쳐오는 우리에게도 안디바 같이 주의 이름을 굳게 잡고 죽기까지 예수의 주되심을 고백하는 충성스러운 증인들이 얼마나 필요합니까? 버가모 교회는 이런 충성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안디바가 있었습니다. 한우리교회에도 안디바와 같은 많은 충성된 증인들이 일어나기를 축원합니다.
그러나 버가모 교회에는 안디바 같은 사람만 있지 않았습니다. 전혀 다른 신앙의 색채를 가진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14절을 보십시오. 발람의 교훈과 니골라 당의 가르침을 지키는 자들이 교회 안에 있었습니다. 14절에 발람의 교훈을 말하고 15절에 이와같이 니골라 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었다고 하니 사실상, 이 둘은 같은 교훈입니다. 니골라당은 에베소 교회안에도 있었던 이단으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를 주셨으니 이제는 마음대로, 정욕을 따라서 살 수 있다는 교리를 핵심적으로 가르쳤습니다. 육체의 방종과 성적 음행을 신앙의 자유로 가르쳤던 점에서 이들의 교훈은 광야 이스라엘 백성들을 유혹했던 발람의 교훈과 비슷합니다. 한 편으로는 안디바 같은 충성된 증인이 있었지만, 또 한편으로는 발람의 교훈과 니골라 당의 가르침을 따라가는 세속화된 교인들이 있었습니다. 한 교회 안에 이렇게 상반된 두 부류가 있었다는 점이 너무나 놀랍지만 버가모 교회가 그러했습니다.
발람의 교훈이 무엇입니까? 모압왕 발락에게 이스라엘을 저주하기 위해 포섭되었던 거짓 선지자인 발람은 자신이 이스라엘을 저주하려 할 때마다 하나님이 간섭하셔서 세 번 다 저주가 축복으로 바뀌자 이런 방식으로 이스라엘을 저주할 수 없음을 알고 발락에게 한 가지 계교를 알려줍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 모압 여인들을 두어서 그들과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함께 먹도록 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이 올무에 걸려 우상의 제물을 먹고 행음하다가 하나님의 진노로 2만 4천 명이 죽었습니다.
니골라 당의 교훈이 그러합니다. 이들은 예수 안에서 모든 율법이 성취되었기 때문에 율법은 필요 없고 마음대로 살아도 된다고 주장했습니다. 자신들이 가장 신앙의 자유를 누리는 자들이며 자기들처럼 살지 않으면 율법의 멍에에 얽매여 있는 사람들이라고 비웃으면서 자기 멋대로 죄를 짓는 사람들이 니골라 당입니다. 니골라 당과 발람의 교훈은 마음껏 자신의 욕망을 채우면서 예수 믿을 수 있다는 사상을 가르친 같은 맥락의 거짓 교훈입니다. 이들은 황제숭배와 우상숭배를 거부하고 죽기까지 주의 이름을 붙들고 믿음의 정절을 지키는 안디바와 같은 사람들이 있는데도, 버가모의 우상 축제에 버젓이 참여하면서 그것이 신앙의 자유이며, 시민의 사회적 의무이고 문화생활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이 가르침은 자유란 이름으로, 문화란 이름으로 우상과 하나님을 겸하여 섬길 수 있고, 죄악 된 삶을 바꾸지 않아도 되는 아주 강력하고 달콤한 유혹입니다.
철학자 키케로(Cicero)의 말을 들어보면 당시 로마제국 아래에 사는 사람들의 평범한 일상이 어떠한지를 알 수 있습니다. “젊은 사람이 창녀와 연애하는 것을 금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가 있다면 나는 그런 자의 말을 묵과할 수 없다. 그는 우리 세대에 허용된 사상에서뿐만 아니라 우리 선조들의 관습과 전통에서도 어긋난 사상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 시대는 창녀와 연애하는 것이 허용되던 시대였습니다. 그런 시대적 사조가 그 시대에 생긴 것이 아니라 선조들의 전통과 관습으로 이어져 왔습니다. 선조들의 관습과 전통이 무엇입니까? 주전 4세기 그리스 철학자 데모스테네스(Demosthenes)의 말을 들어보십시오. “우리는 쾌락의 도구로 창녀를 인정하며 잠자리를 위하여 첩 제도를 인정한다. 그리고 합법적으로 아이를 가지며 집안을 돌보기 위해 부인을 둔다.” 시대의 정신이 이러했으니 발람의 교훈과 니골라 당의 교훈은 전혀 윤리적 탈선이 아니었고 사회적 지탄의 대상도 아니었습니다. 발람의 교훈과 니골라 당의 교훈은 이런 세상의 분위기를 문화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품고 관용하면서 마음껏 세상을 즐기도록 성도를 유혹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미 에베소교회를 향한 진단에서 나는 이런 니골라 당의 행위를 미워하신다고 말씀했습니다. 믿는 자의 길이 있습니다. 우리는 길이라고 다 가지 않습니다. 주님이 미워하시는 길은 아무리 좋아 보여도 가지 않습니다. 믿는 자의 길이 있고 믿는 자의 삶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믿는데 믿지 않는 사람들이 사는 방식과 똑같이 살 수 있습니까? 과거에 믿지 않을 때 살았던 죄악에 속한 삶의 방식을 바꾸지 않고 믿을 수 있습니까? 불가능합니다. 음란하게 살아온 사람들은 음란한 생활을 청산하고 그리스도인의 길을 가야 하고, 수고하지 않고 남의 노력으로 사는 자는 자기 스스로 노력하면서 믿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죄악을 즐기면서 나는 자유롭게 예수를 믿는 자유인이며 지성인이고 문화인이라고 하면 예수님이 비웃습니다.
주님은 교회와 세상, 세상과 교회를 가르는 경계선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교회는 세상이 아니고 세상은 교회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 경계선은 언제나 분명해야 합니다. 버가모 교회는 발람의 교훈과 니골라 당의 가르침을 좇는 무리들에 의해 이런 신앙의 경계선이 무너질 위험에 처해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지금 우리는 교회의 울타리를 다시 쳐야 하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가능하면 울타리를 거두고 문턱이 없는 교회가 되자고 말하는 분위기 속에서 울타리를 세우고 울타리를 쳐야 한다는 말은 환영받지 못하는 소리가 분명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울타리를 쳐야 합니다. 교회의 울타리가 무엇입니까? 진리의 말씀인 복음입니다. 진리의 울타리를 잘 쳐서 복음을 왜곡시키거나 약화시키지 않고 잘 지키고 잘 전하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바랍니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좌우에 날 선 검을 가지신 주님은 세상과 구별되지 않고, 세상과 싸우기를 포기한 교회와 성도들에게 회개하지 않으면 내가 속히 가서 내 입의 검으로 너희들과 싸우겠다고 경고하십니다. 16절이죠. “그러므로 회개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속히 가서 내 입의 검으로 그들과 싸우리라” 사랑하는 여러분, 교회는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진리의 말씀으로 세상의 가치관과 죄악과 더불어 싸워야 합니다. 발람의 교훈과 싸우고 니골라 당의 가르침과도 싸워야 합니다. 이 싸움에 져서 진리가 무너지면 경건이 무너지고 윤리도 무너집니다. 우리의 심령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는 좌우에 날 선 검과 같은 그 말씀의 칼날이 둔해지면 세속의 정신에 무너집니다. 왜 버가모 교인의 일부가 음행과 우상숭배로 무너졌습니까? 그들 안에 하나님의 말씀이 먼저 무너졌기 때문입니다.
오늘날도 똑같습니다. 강단에서 선포되는 말씀의 무게와 깊이와 진리성이 약화 되고 무너지면, 교회의 타락과 교인들의 타락이 따라옵니다. 하나님의 양날 선 검과 같은 말씀이 살아있지 않으면 우리의 죄 성이 고개를 들고 교회 안에서 행세합니다. 주님이 좌우에 날 선 검을 가지고 내 입의 검으로 싸우시겠다고 말씀하셨으니 우리도 주님이 허락하신 좌우에 날 선 진리의 말씀으로 세상의 정신과 싸우는 영적 전쟁을 싸워야 합니다. 이 싸움을 포기하면 주님이 우리와 싸우신다고 하시니 진리와 사랑으로 이 싸움을 잘 싸우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바랍니다.
이기는 자에게 주시는 약속이 무엇입니까? 17절입니다. 감추인 만나를 받습니다. 감추인 만나는 요한복음 6장에 나오는 생명의 떡되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주의 말씀을 붙들고 우상에게 무릎 꿇지 않고 세속에 물들지도 않고 끝까지 주의 이름을 붙잡고 깨끗한 신앙을 지키는 이기는 자에게는 감추인 만나인 예수그리스도를 먹게 해 준다는 것입니다. 주님과 생명의 교제를 누릴 수 있다는 뜻입니다. 사단은 우리가 세상과 타협하기만 하면 쾌락과 즐거움과 만족을 얻을 수 있다고 속입니다. 거짓말입니다. 사단은 속이는 자요, 거짓의 아비입니다. 참된 만족은 거기에서 오지 않습니다. 진정한 만족, 참된 만족은 감추인 만나인 예수 그리스도를 먹고 그분의 말씀으로 생명의 교제를 나눌 때 옵니다. 그리스도가 주시는 생명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 기쁨이 있는 자가 감추인 만나를 먹는 자입니다. 여러분에게 만나가 끊이지 않기를 축원합니다.
또 하나의 약속이 무엇입니까? 새 이름이 새겨진 힌 돌을 받습니다. 당시 힌 돌은 재판석에서 무죄를 선언할 때 사용한 도구입니다. 다시 말하면 흰 돌은 자유입니다. 승리하는 자에게 주님은 새로운 이름을 주시고 그 이름이 새겨진 흰 돌, 새롭게 주어진 참된 자유의 삶을 주신다고 약속하고 있습니다. 지금 버가모 교회가 거짓 자유에 속아 발람과 니골라당의 교훈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참된 자유는 이런 거짓 자유와 싸워 이기는 자에게 허락됩니다. 울타리와 경계선을 넘나들면서 죄짓는 자유는 자유가 아닙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죄에 묶여 꼼짝 못 하게 되는데 무슨 자유입니까? 진정한 자유는 죄를 이기는 자유입니다.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신을 인식하고 거룩한 삶과 믿음을 지키기 위해, 사단의 보좌가 있는 환경 속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신을 복종시키는 사람이 이 자유를 누립니다. 아무에게나 주어지지 않는 자유입니다.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진리로 이기는 자에게 주어집니다. 진리로 죄에서 자유 하는 저와 여러분, 한우리 식구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